보르헤스는 일종의 강박이다, 카프카와 함께. 하도 여기저기서 말들을 하니까, 읽지 않았다고 하면 뭔가 비웃음을 살 것 같은  불안함. 나도 보르헤스를 읽으려 한적이 있다. 육칠년 전쯤, 재미있다는 지인의 말에, 속았다. 보르헤스 전집을 독파한 지인은 보르헤스를 정말 좋아했다. 나는 어떤 재미를 느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다. 보르헤스에게서 재미를 찾지 못한다는 것은 단지 보르헤스는 재미없어라고 평하는 것과 다르다. 그것은 마치 풀지 못한 방정식이 적힌 칠판 앞에서 벌건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 그런 것이다.  보르헤스는 재미있어야하고 위대해야하고  경이로워야 한다. 하다 못해 뭔지는 몰라도 무척 놀랍다, 정도는 되어야 한다. 수학을 포기하면 방정식 그깟것 아무것도 아니지만.., 인문학을 포기하지 않고도 보르헤스 그깟것 할 수 있을까?

 

 

도서관 소속의 독서회는 아이들의 방학기간에 맞춰 방학을 한다. 아이들의 방학과 별 상관없이 사는 몇몇 회원들은 놀아 뭐하냐, 책이라고 읽고 수다라도 떨자, 했다. 그런데 보르헤스다. 마침 한 명의 회원이 박사과정을 수료한 서어서문학과 출신이다. 서어서문학은 스페인문학 보다 남미문학이 중심이라고 한다. 넘어야 할 산이라면, 등산화끈이라도 조여보자는 마음으로, 꼬셨다. 네가 특강하는 셈치고, 보르헤스 좀 가르쳐 주라, 이야기는 그렇게 되었다. 휴가 마치고 다음주부터 시작이다. 첫 책은 『픽션들』 

 

보르헤스는 여전히 어렵다. 차라리 난삽하다. 짧은 단편들인데도 너무 많은 이름들이 나온다. 익숙치 않은 스페인어 명사들이 일단 머릿속을 헝컬어댄다.

 

그리고 주석이 없으면 읽기 어렵다. 보르헤스는 책에 대한 책, 소설에 대한 소설을 쓴다. 그런데 그것이 평론이 아니라 소설이다. 그것도 아주 압축된 단편소설이다. 당연히 아무 설명이 없다. 보르헤스가 표적으로 삼은 그 소설, 그 책을 읽지 않고는 보르헤스의 소설을 이해할 길이 없다. 유명한 책들도 아니다. 셰익스피어나 안데르센 같은, 읽지 않아도 누구나 아는 그런 책들이 아니라, 듣도 보도 못한 책들에 관한 글을 쓴다. 보르헤스는 살아있는 도서관인지 걸어다니는 도서관인지, 아뭏든 그렇게 불린다.  적어도 기어다니는 도서관 정도는 되어야 보르헤스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노심초사, 고육지책, 역자는 공부 못하는 학생이 교과서에 온통 빨간줄을 그어대듯 주석을 달아댄다. 주석은 읽지 않으면 내용을 이해할 수 없고, 읽으면 어지럽고 질린다.

 

역자 황병하는 "작금에 들어 아무도 20세기 후반의 새로운 지성 사조인 독자반응이론, 후기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이 보르헤스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보르헤스는 이 작품집들을 가지고 20세기 후반을 창조해낸 것이다." 라고 썼다. 그런데 지금은 21세기다. 포스트모더니즘도 후기구조주의도 진부해졌다. 독자반응이론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텍스트는 독자의 해석에 의해 재탄생한다는 것도 상식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처음 말했을 때, 그때 코페르니쿠스는 살아있는 혁명아였다. 지금 코페르니쿠스는 박제된 혁명아이고,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은 초등학생들도 아는 상식이다. 보르헤스 보다 보르헤스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는 푸코,에코,데리다를 먼저 접한 21세기의 나는 당연히 보르헤스가 놀랍지 않다. 보르헤스를 역사의 창조자로 인정은 해야겠지만, 그 창조가 주는 경이와 위대함은 이미 후계자들에 의해 먼저 전파되었다.

 

그럼에도 『픽션들』 의 몇몇은 재미있었다. 가장 유명한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바벨의 도서관>, <바빌로니아의 복권>.  비교적 쉬운 편에 속하는 단편들이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명확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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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8-09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 제 얘기 같아서 찔립니다. 저 보르헤스 좋아합니다. 엄지손가락 세 개를 세우고는 했죠. ㅎㅎㅎㅎㅎ. 전 보르헤스가 장편을 압축해서 단편으로 쓸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천재라고 생각하고는 했습니다 파스칼이었나요. 그가 편지에다 이렇게 썼죠. 짧게 쓸 수 없어서 길게 써서 미안합니다...라고 말이죠. 보르헤스는 참기름 장수 같아요. 압축한 것을 풀어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말리 2014-08-10 09:37   좋아요 0 | URL
저는 시를 잘 못읽습니다. 감성도 독해력도 떨어져서 그렇겠지. 그래서 단편 보다는 장편이 더 잘 읽힙니다. 보르헤스에 대한 이론적 지식 이런걸 다 떠나서 시적 감수성이 있었다면 보르헤스를 직관적으로 좋아했을 수도 있을것 같아요. 음악, 미술 이런 것들에도 감수성이 엄청 결핍된 편이라 응축이나 상징에도 매우 약합니다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