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의 미로에 빠지기
송병선 지음 / 책이있는마을 / 2002년 5월
평점 :
품절


보르헤스의 『알레프』와『픽션들』을 읽었다. 당연히 어리둥절했다. 어떻게 읽어야 할지, 무엇을 읽어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해설서를 찾아보았다. 나는, 해설서는 잘 읽지 않는다, 특히 소설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소설책 뒤편에 붙은 작품해설도 읽지 않는다.  소설을 읽으려고 해설서를 읽다니, 바보 같다.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맛을 느끼는 법을 공부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요리사가 될 것도 아니고, 맛 감별사가 될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래도 읽었다. 송병선의 『보르헤스의 미로에 빠지기』. 송병선을 택한 특별한 이유는 없다. 민음사가 세계문학전집 시리즈에 보르헤스를 포함시키면서, 번역을 맡은 라틴문학 전공자가 송병선 교수라, 이름이 낯익었다. 시립도서관에 있는 것 중 제일 만만한 것이기도 했다. 혀가 굳었는데, 맛보는 법을 배운다고 오묘한 맛을 제대로 느낄 수는 없다. 그래도 방법이라도 조금 익혔으니, 『알레프』를 다시 읽어보려 한다.

 

 

 

1장은 <보르헤스의 미로를 향한 첫걸음> 이다. 제목대로 보르헤스에 관한 전반적인 설명을 담고 있다. 보르헤스는 한마디로 말하면,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으로 교착 상태에 빠진 문학계에 새로운 출구를 열어준 작가다. 보르헤스 이후 문학은 특히 미국문학은 포스트모더니즘을 향해 질주한다.

 

「보르헤스의 작품세계는 철학, 신학, 문학, 논리학, 신화 등에 걸친 광범위한 소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그의 문학세계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에 의해 고갈된 서구 문학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 선구자이며, 하나의 진리만을 찾고자 하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60년대 말의 문학적 상황을 다원화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p38」

 

보르헤스의 문학세계는 다원적이다. 하나의 진리나 유일신을 부정하며, 진리/허구의 이분법적 대립을 해체한다. 리얼리티와 픽션이 구별되지 않는다. 현실이 곧 허구이고, 허구가 곧 현실이다. 굳이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탈구조주의를 불러 오지 않아도 우리에게는 익숙하다. 장자의 ‘호접몽’이 있으니까. 사실 보르헤스는 동양의 사상과 불교를 좋아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추방된 것은 진리다. 그러므로 플라톤과 헤겔 역시 추방되었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도 슬슬 해거름을 맞고 있는지, 진리와 헤겔의 부정성 같은 것들이 다시 불려나오고 있다. 한병철의 『피로사회』나 『투명사회』뿐만 아니라, 알랭 바디우, 지젝 등의 라캉주의 좌파들이 부정성과 ‘진리-사건’ 등을 주장하고 있다. 물론 계몽주의시대의 순진한 진리와는 다른 업그레이드 판 진리이다.

 

여하튼 진리가 없다는 것은 판단의 기준도 없다는 것이다. 리얼인지 픽션인지도 헷갈리고, 판단의 기준도 없고, 끊임없이 차이를 반복하며 미로를 헤매는 그런 소설이 쉽게 읽힐 리가 없다. 업계는 보르헤스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로 숭배하고 따랐지만, 대중에게 보르헤스는 어쩌면 순수한 비현실이다. 현실이 허구이고 허구가 현실이기를 꿈꾸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모든 것이 꿈이나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면, 왜 끝나지 않는 고통만이 그렇게도 생생한 걸까? 『픽션들』의 <원형의 폐허> 속 화자처럼 우리도 불길 속에서 아무런 뜨거움도 느끼지 못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포스트모더니즘이 이렇게 빨리 도전받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현실의 고통에 답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문학계에서 왜 모더니즘문학이 고갈되었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존 바스라는 사람이 「고갈의 문학」에서 모더니즘 미학의 고갈을 선언하면서, 해결책으로 보르헤스를 들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이다. 이 단편의 내용은 나도 알고 있었던 걸로 보아, 보르헤스를 읽지 않은 사람들도 어디선가 한번은 들었을법하게 유명한 작품임이 틀림없다. 피에르 메나르라는 작가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중 두세장 정도를 글자 그대로 베껴서 자신의 이름으로 돈키호테를 출간했는데, 피에르 메나르의 이 돈키호테가 세르반테스의 원작 보다 훨씬 풍부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르헤스는 말한다. 글자 그대로 베꼈는데 도대체 이 두 작품에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보르헤스는 이렇게 메나르의 상상적인 예를 통해 창조라는 종래의 글쓰기 행위를 부정한다. 즉 최소한의 패러디를 통해 메나르는 돈키호테를 글자 그대로 베끼지만, 동일한 두 작품 사이의 역사적 거리로 인해 두 번째 것이 첫 번째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인식소의 변화로 인해 독자 및 작가의 콘텍스트가 대치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패러디가 텍스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지평선 속에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곳에서 메나르는 독서를 글쓰기 행위로 간주함으로써 둘 사이의 이분법적 경계를 해체한다. p47~8」

 

말하자면 메나르의 베껴 쓰기는 독자의 읽기와 같다. 17세기의 『돈키호테』가 20세기에 읽힐 때는 당연히 그 의미가 달라진다. 이런 경험은 우리들도 자주 한다. 고전이라 불리는 지긋지긋한 작품들을 읽을 때, 자주 부딪히는 문제이다. 보르헤스는 메나르의 쓰기-읽기가 더 풍부하다고 하지만, 평범한 나의 독해력은 당대인들에 비해 훨씬 빈약함에 틀림없다. 그 작품들이 왜 고전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깊이 감동한 고전들도 없지는 않다. 여하튼 시대에 따라 혹은 독자에 따라 하나의 텍스트는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읽는 방법에 따라 텍스트는 변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작가들은 옛 텍스트를 가지고 새로운 텍스트를 만들어낸다. 모방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포스트모던한 용어로는 ‘상호텍스트성’ 이다. 상호텍스트성을 추구하는 작가들-메타픽션가들은 “글쓰기가 결국은 다른 다양한 텍스트를 흡수하고 변용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되풀이하는 것임을 감추지 않는다.p49”  페더만이라는 사람은 이것을 “표절유희”라고 불렀다. 표절이 고발의 대상이 아니라, 유희의 대상인 셈이다. 표절과 유희라고 하니, 과거 이인화의 ‘패스티쉬’ 논쟁이 생각난다. 혼성모방이란 뜻인데, 이인화의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를 두고, 너 이것 누구누구 베꼈지 하니까, 나는 누구누구만 베낀 것이 아니고 이놈 저놈 엄청 베꼈다고 응수한 사건이다. 덕분에 나는 페티시와 패스티쉬가 엄청 헷갈려서, 글을 쓸 때마다 찾아보곤 했다. 그러니까 이인화도 일종의 표절유희를 즐긴 셈인데, 마침 이 책의 <한국문학과 보르헤스>편에서 송병선은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을 다루고 있다. 이인화는 『영원한 제국』이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베낀 것이라고 했는데, 송병선은 에코가 보르헤스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에 결국은 『영원한 제국』도 보르헤스 문학의 자장 안에서 쓰였다고 해석한다.

 

 

2장은 <보르헤스는 어떻게 글을 썼는가> 이다. 이 장은 보르헤스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마르케스, 카프카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보르헤스가 가장 좋아한 것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다. 보르헤스는 소설의 구조를 이 백과사전의 구조와 유사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보르헤스가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작가는 카프카이다. 카프카처럼 글을 쓰려고 했다가 실패했다는 고백이 나온다. 보르헤스는 카프카와 상호텍스트성의 관계를 맺으려 한 것이다. 송병선은  “한 텍스트가 다른 텍스트를 어떻게 흡수하고 변형했는가”, 즉 보르헤스가 카프카를 어떻게 흡수,변형 했는가를 탐색하고 있다. 다음으로 조금 짚어 보아야 할 것은 마르케스로 대표되는 라틴아메리카의 마술적 사실주와 보르헤스의 환상문학 간의 관계이다.

 

라틴아메리카의 문학을 흔히 환상문학이라고 한다. 그런데 남미의 환상문학은 리얼리즘의 반대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남미의 환상문학은 현실을 묘사하기 위해 환상적인 이미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현실에 다가가기 위해 남미문학은 환상을 채택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평범하지 않은 존재에 의존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들에게 환상의 유일한 목표는 인간이다.” 샤르트르가 카프카나 블랑쇼의 환상 문학에 대해 한 이 말은 남미문학에도 그대로 유효하다. 환상적인 이미지는 라틴아메리카인들이 처한 조건과 상황을 표현하는 도구이다.

 

보르헤스는 이성적 환상주의자다. SF소설가나 초현실주의자와는 다르다. 톨킨이 그리고 있는 『반지의 제왕』의 순수 환상의 세계와도 다르다. 보르헤스의 비현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기초하고 있다. 보르헤스 스스로 자기의 환상소설은 근본적으로 실제 인간에 대한 감추어진 논평이라고 말했다. 보르헤스의 비현실에는 현실이 있다. 보르헤스는 사상과 현실 사이의 피할 수 없는 모순을 보여주기 위해 이성과 논리적 상상력, 수사학적 상징들을 사용한다. 이것은 보르헤스의 픽션들이 인간 논리에 대해 실망감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보르헤스의 환상소설은 비이성에 반대한 이성의 도구이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진리를 부정하는 보르헤스가 ‘이성적’ 환상주의자라니 언뜻 모순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더니즘은 계몽의 시대, ‘이성의 권위에 대한 계몽의 신앙’으로 표현되는 시대가 아닌가?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성의 권위에 대한 반란이 아닌가?

 

그런데 보르헤스의 ‘이성적’ 환상주의는 1930년대의 서구사회를 비이성적 사회로 파악한데 따른 것이다. 보르헤스는 파시즘, 공산주의, 대중 민주주의, 독재주의를 모두 비이성으로 치부했다. 그는 환상을 통해 완벽하게 조직된 세계를 제시한다. 그러니까 근대를 대표하는 ‘이성’과 송병선이 설명하는 보르헤스의 ‘이성’은 좀 층위가 다른 것 같다. 사실 30년대의 ‘비이성적 사회’라는 것은 데카르트 이래 서구 사회를 이끌어 온 이성 중심주의의 파국적 귀결인데 말이다.

 

어쨌든 보르헤스는 픽션으로 철학을 논파한다고 할 수 있다. 환상으로 논리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환상이라고 할 때 선험적으로 떠올리는 그런 공상 과학적이고, 빗자루가 하늘을 나는 순수 환상과는 분명히 다르다. 보르헤스의 환상세계는 논리적, 이성적으로 구성된 세계라 할 수 있다. “보르헤스의 작품 속에는 멋진 논리적 구성과 이런 논리적 구성이 현실 세계의 알려지지 않는 구조를 그대로 보여줄 수 없다는 실망감이 교차되는 것이다. p101”

 

마르케스의 환상문학은 ‘마술적 사실주의’라 불린다. 마르케스 자신은 환상적 혹은 마술적이라는 용어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리얼리즘 작가’로 규정한다. 그러나 마르케스는 전 세계인에게 마술적 사실주의의 대부로 인식되어 있다. 마술적 사실주의는 보르헤스의 환상문학과는 많이 다르다.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이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보르헤스의 작품들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라틴아메리카 비평사를 살펴보면 ‘마술적 사실주의’는 1950년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이후 ‘마술적 사실주의’에 관한 많은 의견이 등장했지만, 이 용어는 사실주의라는 말이 내포하고 있는 재현성과 마술적이란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글쓰기의 실험성을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용어가 비평가들의 입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단순한 기록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현실을 보여주는 다양한 면을 통합하려는 관점과 라틴아메리카 역사와 문화 및 사회 문제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리얼리즘-자연주의 문학 서술의 한계를 느끼고 과감하고 혁신적이자 실험적인 문학 테크닉을 사용하고 있는데 기인한다. p101~2」

 

마르케스가 자신을 리얼리즘 작가로 주장하는 것이 아마도 이 때문이 아닐까? 마르케스에게 마술적 형식이란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보다 잘 서술하기 위해 필요한 강력한 도구라 할 수 있다. 마르케스 뿐만 아니라 『영혼의 집』의 이사벨 아옌데,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의 라우라 에스키벨 역시 라틴 아메리카의 원시적 주술과 마술을 통해 현실의 문제를 강렬하게 고발한다.

 

보르헤스와 마르케스는 라틴아메리카 환상문학의 두 거장이지만, 매우 상이한 경향을 나타낸다. 보르헤스는 “차갑고 지성적이며 박학함을 통해 이성적으로 환상을 사용한다.” 반면 마르케스는 “불가해한 현실의 신비를 포착하면서, 작가의 사회적·예술적 의무로써 마술적 사실주의를 구사한다.”

 

남미의 환상문학이 현실을 묘사한다는 점에서 볼 때,  보르헤스의 '이성적' 환상주의는 철학의 현실을, 마르케스의 '사실적' 마술주의는  사회적 혹은 역사적 현실을 다룬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케스와는 달리 보르헤스는 현실의 문제를 외면했다는 비판을 받는 것이 아닐까. 마르케스가 당대의 현실 사회에 천착한 반면 보르헤스는 진리나 존재 혹은 영원성과 같은 형이상학적 현실에 몰두했다고 해야하지 않을까. 라틴아메리카의 환상문학 안에서 '현실' 이라는 공통의 키워드를 찾아야 한다면 말이다.

 

3장은 보르헤스가 세계문학에 미친 영향에 대한 고찰이다. 보르헤스를 가장 먼저 받아들여, 세계적 작가로 격상시킨 것은 프랑스의 신비평계이다. 푸코는 『말과 사물』의 서론을 통해 보르헤스의 글이 자기 책의 직접적 동기가 되었음을 고백한다. 보르헤스는 현대미국소설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90년대에 뒤늦게 수용되기 시작한 우리문학계에서도 보르헤스의 영향이 발견된다. 송병선은 구광본, 이인화, 이승우를 통해 보르헤스의 한국적 수용에 대해 분석하는데, 구광본과 이승우의 책은 읽어보지 않아 잘 모르겠다. 이인화는 충분히 그럴듯해 보인다.

 

 

4장은 <보르헤스의 작품을 읽는 방법>인데, 작품론이라 할 수 있다. 보르헤스의 가장 짧은 단편인 <이스테리온의 집>과 후기 걸작인 <의회>를 분석한 두 편의 글과 보르헤스에게 성이 무엇인지를 다룬 글로 이루어져 있다.

 

 

한 가지 기억해 둘 만한 것은 보르헤스의 작품을 읽는 네 단계이다. 첫 단계는 까다로운 이론적 배경 따위는 다 집어치우고 그냥 스토리에 집중해야 한다. 스토리 자체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보르헤스는 스토리텔링의 대가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 두 번째 단계는 의미를 찾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서술 기법을 분석하는 것이고 네 번째는 작품들 속에서 의미를 지시하는 조그마한 단서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게임처럼 레벨이 있다는 것인데, 일단 나 같은 일반 독자는 소설 자체로서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 그러자면 그 어지러운 각주들로부터 먼저 해방되어야 할 것 같다. 다행히 황병하 역 보다 송병선 역에는 각주가 훨씬 적어 보이기는 한다. 다시 송병선 역으로 『알레프』에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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