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이었던 남자 - 악몽 펭귄클래식 76
G. K. 체스터튼 지음, 김성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목요일 이었던 남자』만큼 제목이 이상한 책도 없다. ‘목요일의 남자’라면 그리 이상하지는 않을 텐데... 아! 그러고 보니,『목요일의 아이』라는 책이 있었다. 중학생 때 읽으며 울던 기억이 난다. 목요일의 아이는 길을 떠나고... 수요일의 아이는 뭐였더라? 알라딘을 뒤져보니 책은 절판이고, 다행히 어느 분의 리뷰에 고스란히 노래(시?)가 남아있다.

 

월요일의 아이는 이쁘고요,

화요일의 아이는 의젓 하구요,

수요일의 아이는 수심이 많아,

목요일의 아이는 길을 떠나고,

금요일의 아이는 사랑스럽고,

토요일의 아이는 고생이 많아,

일요일에 태어난 꼬마아이는 귀엽고, 명랑하고, 싹싹하지요..

 

 

하느님이 낳은 아이들은 조금 다르다.

   

        월요일에는 빛을

        화요일에는 하늘, 땅, 바다를

수요일에는 땅위의 푸른 식물을

목요일에는 해와 달을

금요일에는 물과 땅과 하늘의 동물을

토요일에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일요일에는 쉬신 것 같다.

(기독신자가 아니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창세기를 보니 대충 이렇게 나누면 될 것 같다. )

 

『목요일 이었던 남자』의 목요일은 길을 떠나는 아이가 아니고, 해와 달처럼 빛을 비추는 시인이다. “만일 사임도 자신을 볼 수 있었더라면, 처음으로 자기 자신이 된 것 같다고 느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간사가 최초의 형태 없는 빛을 사랑하는 철학자를 나타낸다면, 사임은 그 빛을 특별한 형태로, 즉 태양과 달로 나누어 비추려 하는 시인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학자는 때때로 무한성을 추구하지만, 시인은 항상 유한성을 추구한다. 그에게 위대한 순간은 빛이 아니라 태양과 달이 창조된 순간이었다. p202"

 

그런데 월요일에 창조한 빛은 무엇일까? 언뜻 태양과 달도 없이 어떻게 빛이 있나 싶었는데, 하느님이 창조한 것은 지구가 아니라 우주일 것이란 생각이 드니, 그건 빅뱅의 빛이구나 싶다.(거듭 신자가 아니니, 마음대로 해석한다.) 여하튼 우연이지만, 길을 떠나는 목요일의 아이와 시인 목요일은 딱 어울린다. 사임이란 시인이 월요일이었다면!, 아... 이쁜 시인이라니! 그런데 이렇게 뒤죽박죽, 왔다갔다 리뷰를 쓰면 글이 산으로 갈 것 같은데, 사실 『목요일 이었던 남자』란 책이 이렇게 씌어있으니, 나도 모르게 생각이 널을 뛴다. 아니 나만 그렇게 읽은 건가?

 

『목요일 이었던 남자』에는 일곱 명의 남자가 나온다. 짐작대로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다. 그렇다고 일요일을 귀엽고 싹싹하고 명랑하다고 연상하면 곤란하다. 우연의 일치는 딱 목요일에만 해당한다. 모든 것에 해당한다면 우연이라 쓸 수가 없을 테니. 이 책의 원제는 『The Man Who Was Thursday』, 부제는 A Nightmare 악몽이다. 이상한 나라에 갔다 온 앨리스처럼 일곱 요일을 만나고 온 사임의 개꿈 이라 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꿈은 ‘억압된 욕망의 위장된 성취’이다. 꿈에서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꿈은 위장되어 있다. 꿈이 그렇게도 이상하고 비논리적인 이유가 바로 위장이라는 꿈 작업 때문이다. 꿈은 응축과 전치라는 위장술로 무의식의 검열을 교묘히 피해간다. 응축과 전치는 언어의 은유와 환유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목요일 이었던 남자』에는 은유와 환유가 넘쳐난다. 꿈의 위장술이든 언어의 마술이든, 숨기고 바꾸는 작업에 흥미가 없는 사람은 이게 뭐야!, 할 수 있는 책인 반면, 꿈의 핵심이 꿈 작업에 있고 언어의 묘미가 교묘히 드러내고 은근히 감추는 기술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주 아주 재미있는 책이 될 것이다.

 

그런데 꿈이나 언어와는 별개로, 가장 훌륭한 위장술은 무엇일까? 가장 그럴듯하게 속이는 기술은 참말로 거짓말 하는 것이다. 일곱 명의 무정부주의자들은 대낮에 정장을 차려입고 카페에 둘러앉아 큰 소리로 국왕 암살을 계획한다. 카페의 웨이터들도 손님들도 저 신사분들이 테러리스트라며 웃는다. <무정부주의 중앙의회>의 총재인 일요일에 대해 그레고리는 이렇게 말한다.

 

“그분이 하는 충고는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경구처럼 놀라웠고 영국 은행만큼이나 실용적이었지. 난 그분께 ‘어떻게 하면 세상으로부터 저를 감출 수가 있을까요? 주교나 장교보다 더 존경받는 인물로 누가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소. 그분은 헤아릴 길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소. ‘안전하게 감추길 바라는가? 자네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위장을 바라는가? 절대로 폭탄을 쓸 사람이 아니라고 믿게 하는 그런 위장?’ 난 고개를 끄덕였지. 그러자 갑자기 그분의 사자 같은 목소리가 ‘그럼, 무정부주의자로 위장하면 될 게 아닌가, 이 바보 같은 사람아!’ 하고 온 방 안에 쩌렁쩌렁 울렸소. ‘그렇게 하면 아무도 자네가 그런 위험한 일을 하리라고 생각지 못할 테니까.’ 그러고 나서 그분은 아무 말 없이 가버리셨소. 난 그분 말대로 했고, 이를 후회해 본 적이 없어. 난 여자들에게 밤낮으로 피비린내 나는 살인 얘기를 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그 여인들은 제 아기의 유모차를 내게 밀도록 했지.p32”

 

<무정부주의 중앙의회>의 반대편에는 <철학경찰>이 있다. 왜 철학경찰인가? 오늘날 가장 위험한 범죄자들은 교육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은 도둑이나 중혼자 심지어는 살인자들 보다 더 위험하다. 후자들은 사회의 틀 자체는 존중하는 데 반해, 철학자들은 그 틀 자체를 부수려 하고 있다. 세계를 위협하는 것은 지성인의 음모, 학술적이고 예술적인 정신이다.

 

“우리는 오늘날 가장 위험한 범죄자는 무법적인 현대 철학자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도둑이나 중혼자들이 근본적으로 도덕적이에요. 그들은 동정의 여지가 있죠. 인간의 근본적인 이상은 수용하는데, 단지 잘못을 추구할 뿐이니까요. 도둑들은 재산을 존중합니다. 그걸 너무 존중한 나머지 자기 손안에 넣고 싶어 할 뿐이죠. 하지만 철학자들은 재산을 증오해서 개인의 소유라는 생각 자체를 파괴하려고 해요. 중혼자들은 결혼을 존중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의식적이고 격식을 차리는 중혼의 형식을 따르지 않겠죠. 하지만 철학자들은 결혼 자체를 경멸합니다. 또, 살인자들은 인간의 생명을 존중합니다. 단지 자신들 보다 덜 중요해 보이는 생명을 희생시킴으로써 생명의 더 큰 충만함을 맛보려는 것뿐이죠. 그런데 철학자들은 생명 그 자체를 증오해서,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자기 생명까지도 증오합니다.p55”

 

철학 경찰의 임무는 선제적이다. 범죄 단계뿐만 아니라 논쟁 단계에 있는 음모도 적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찾아 선제공격한 미국과 동일한 발상이지만 방법은 전혀 다르다.

 

“철학적인 경찰관이 하는 일은 보통 형사보다는 더 대담하면서도 민감하죠. 형사들은 대개 도둑을 잡으러 선술집을 덮치지만, 우리는 염세주의자들을 찾기 위해 예술가의 티 파티에 참석합니다. 형사들은 장부나 메모를 보고 범죄를 추적하지만, 우린 소네트가 적힌 책에서 범죄의 징후를 알아내지요. 사람들을 지적인 광신이나 범죄로 몰아가는, 끔찍한 사상의 뿌리를 우리는 찾아내야 합니다. p54”

 

1908년 체스터턴이 『목요일 이었던 남자』를 발간할 즈음인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허무주의와 테러리즘의 시대였다. 까뮈의 『반항인』에 의하면, 1878년은 러시아 테러리즘이 탄생한 해이다.

 

「193명의 민중주의자들이 재판을 받은 그 이튿날인 1월 24일, 몹시 젊은 처녀 베라 자쑬리치가 페테르스부르그의 총독 트레포프 장군을 사살한다. 배심원들에 의해 석방되자, 그녀는 연이어 짜아르의 경찰로부터 탈출한다. 이 권총 한 방이 폭포처럼 뒤따를 탄압과 암살의 단초가 되고, 이후 탄압과 암살은 서로 응전하기를 그치지 않거니와, 우리는 오직 권태만이 거기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같은 해에, ‘인민의지당’의 당원인 크라브친스키는 『죽음에는 죽음으로』라는 그의 소책자에서 테러를 원리로 확립시킨다. 원리에는 결과가 따르기 마련이다. 유럽에서는, 독일 황제와 이탈리아 국왕과 스페인 국왕이 암살의 희생이 된다. 1878년에 알렉산더 2세는 정치경찰을 창설함으로써 국가적 테러리즘의 가장 효과적인 무기를 만들어낸다.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러시아와 서구에서, 19세기는 살인으로 점철된다. p186」

 

이어서 까뮈는 허무주의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허무주의는, 하나의 좌절된 종교 운동에 긴밀히 결부된 채, 그리하여 테러리즘으로 끝나고 있다. 전적인 부정의 세계에서, 폭탄과 권총으로써, 또한 교수대로 나아가는 용기로써, 그 젊은이들은 모순에서 벗어나려고 애썼으며 그들이 결여하고 있던 가치들을 창조하려고 애썼다. 그들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 혹은 자신들이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의 이름으로 죽었다. 그러나 그들을 시발로 하여,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것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그 무엇인가 - 사람들은 단지 그 무엇인가가 존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 뿐이다. -를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시키는, 좀더 어려운 습관을 가지게 된다.p187」

 

지고의 가치가 부재한 상태에서 테러리스트들은 미래의 가치, 아직 알지는 못하지만, 도래해야만 할 가치를 위해 총을 쏘고 폭탄을 던졌다. 정의와 사랑의 공동체를 재창조하기 위해 현재의 절대주의를 파괴했던 것이다.

 

체스터턴은 시대의 허무주의에 반하여 기독교의 낙관론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정부주의 중앙의회>가 천지창조의 일곱 요일로 구성되어 있는 것도 그렇고, 가령 이런 문장을 보면 그렇게 느껴진다.

 

“이 남포등이 보이는가? 여기에 새겨진 십자가와 그 안의 불빛이 보이는가? 당신은 이것을 만들지 않았고, 불을 붙이지도 않았다. 당신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들이, 믿고 복종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 쇠에 무늬를 만들었고, 불의 전설을 보존하였지. 당신이 걷는 거리, 입고 있는 옷 모두가 이 남포등처럼 당신의 쓰레기 같은 철학을 부인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당신이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파괴만 할 수 있을 뿐. 당신은 인류를, 세계를 파괴할 것이다. 더 말해 뭐하겠는가. 하지만 이 유구한 기독교의 남포등은 파괴하지 못할 것이다. 이건 당신네 원숭이들의 제국은 절대 찾지 못할 그런 곳으로 갈 것이다! p171”

‘원숭이들의 제국’은 허무주의자들이 신봉한 다윈의 진화론을 빗댄 것 같다. 허무주의자들은 공리주의와 과학적 합리주의를 옹호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체스터턴이 일방적으로 허무주의를 비난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랬다면 이 책은 훌륭한 소설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떠나서, 『목요일 이었던 남자』는 추리소설로만 읽어도 아·주,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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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세상이 편치 않던 내게도 치기에 찬 시절이 있었나 싶은데, 문득 떠오른 것이 있다. 스무 살 무렵이 될 때까지, 한글로 쓰인 책은 모두 다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한국말도. 말이 안 통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 이후의 삶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이해하지 못하는 책들과 부딪히며 세계의 불투명성과 스스로의 한계를 깨쳐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그 이해하지 못한 책들 중에도 단연 최고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이다. 2011년 여름 무렵 지인들과 『정신현상학』 세미나를 했다. 나만 빼면 나름 학문이 업인 사람들인데, 이 책에 대해서만은 별반 그럴듯한 이해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발제조차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당시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고 해설서를 찾아보았는데 만만해 보이는 책이 없었다. 도서관에 있던 한자경의 『헤겔 정신현상학의 이해』는 차라리 안 보느니만 못할 정도로 횡설수설이었다. 그 세미나는 차라리 인내심의 시험이었는데, 한 문장을 열 번 되풀이 읽어도 그 말뜻이 머리는커녕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책이라, 끝까지 읽어내는 것이 목표가 되어 버렸다. 게다가 분량도, 두 권으로 나뉜 한길사판이 총 832쪽이나 되었다. 어떤 사람은 『정신현상학』읽기의 최고 성과는 다른 책에 대한 독해력이 높아지는 것이라고도 했다. 여하튼 지금도 『정신현상학』이 무슨 내용이냐고 묻는다면 횡설수설 외에 조리있는 말은 한마디도 못할 것 같다. 그럼에도 이 책의 명성은 끝 간 데가 없는지, 인문학 책들 여기저기에 수시로 출몰한다.

 

 

 

그러다 이번에 하세가와 히로시의 『헤겔 정신현상학 입문』을 발견했다. 일본 저자라 좀 탐탁찮았지만, 이상하게도 일본책은 잘 읽히지 않는다. 아직 하루키도 한번 읽어 보지 않았다, 도서출판 b 의 <헤겔총서> 시리즈라 기대를 갖고 읽었다. 이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인 프레드릭 바이저의 『헤겔』이 무척 훌륭했기 때문이다. 『정신현상학』이후 헤겔이라면 넌더리가 나면서도, 한편 도전정신이 잠복해 있던 터에 우연히 도서관에서 읽게 된 책이다. 영어로 책을 쓰는 독일 관념론 철학자라는데, 헤겔 사상의 핵심을 그리 어렵지 않으면서도 흡인력 있게 설명하고 있었다. 『정신현상학』뿐만 아니라 지젝의 책들을 읽으며, 매우 궁금했으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개념들을 나름대로 정리할 수 있었다. 도서관에서 읽고 다시 구매해서 또 읽었는데도 아주 좋았다.

 

 

하세가와 히로시의 『헤겔 정신현상학 입문』은 기대와 달리 혹은 어느 정도 예상한대로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일단 일본식 문장을 직역한 한글 번역문은 어쩔 수 없이 눈에 거슬렸다. 차라리 살짝 윤색을 하면 나았지 싶을 정도인데, 이건 뭐 개인 취향이다. 내용으로 말하자면, 다 덮어두고, 이 책을 통해 『정신현상학』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된 것이 있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라고 대답하게 될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원서의 혼란에 해설의 혼란을 더한 것도 같고, 어느 정도는 이해에 도움이 된 것도 같은데, 전체적으로, 아! 헤겔의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은 주지 못한다. 게다가 또 눈에 밟히는 것은 역자인데, 이신철은 바로 바이저의 『헤겔』 역자이기도 하다. 철학박사로 헤겔에 관한 몇몇 책들을 번역했다고는 하지만, 일본어에도 능통하신 분인지 약간 의문이 든다. 원래 일본식 문장을 안 좋아하니까 번역문도 눈에 거슬리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파일을 뒤져보니 처음 『정신현상학』을 읽을 때 웹에서 찾은 그림이 있는데, 출처가 어디였는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헤겔 정신현상학 입문』에 의하면, 일반적인 상식이지만, 『정신현상학』은 ‘의식의 여행’ 이다. 절대적 앎을 향해 가는 지도 없는 여행 말이다. 혹은 내 생각에는 아이가 사고를 배워나가는 과정 같기도 하다. 첫 단계는 그저 앞에 무엇인가가 ‘있다’라는 것을 인지하는 감성적 확신 즉 감각이다. 의식의 첫 단계가 감각이란 말이다. 두 번째는 지각이다. 사물을 인지하는 단계. 세 번째는 지성 혹은 오성이다. 이 세단계의 의식을 통틀어 그냥 ‘의식’ 이라고 한다. 그 다음 단계는 ‘자기의식’이다. 자기를 의식한다는 것은 곧 타자를 의식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기의식은 타자의 의식에 대한 인정과 투쟁이다. 그 다음 단계는 ‘이성’ 이다. 이성에 대한 헤겔의 유명한 정의로는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 가 있다. 마지막 단계는 정신이다. 정신의 단계에서 공동체와 세계가 중심을 이룬다. 정신은 공동체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개별자로서의 정신이 공동체 정신 내부를 자유롭게 오고가며, 역사라는 정신의 마당도 자유자재로 왕래한다. 그러한 정신의 운동이 앎과 사유에 이끌려 전개될 때, 정신은 『정신현상학』의 마지막 장 ‘C.(DD) 절대지’ 의 경지에 놓인다. p198」

 

「종교와 연결하여 말하자면, 절대지란 신의 관점을 스스로의 것으로 할 수 있다는 확신 위에 서는 앎을 가리키며, 교양 및 도덕과 연결하여 말하자면, 전 세계에 통용되는 교양과 도덕을 획득할 수 있다고 확신한 앎을 가리킨다. p199」

 

의식의 최고 형태인 정신이 여행의 끝에 도달하는 곳은 ‘절대지’, 절대적인 앎이다. 세계를 움직이는 근본원리, 사회적· 윤리적· 법적 토대를 형성하고 조망하는 경지가 절대지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의식의 여정을 서술한 『정신현상학』의 핵심은 ‘부정성’이다. 의식은 끊임없는 투쟁과 부정을 통해 절대지에 도달한다. 부정성은 여정을 이끄는 에너지, 동력이다. 『정신현상학』서문 중 가장 유명한 부분이기도 한 이 구절이 아마도 가장 많이 인용되는 이유기도 할 것이다.

 

「정신이란 그 자신이 절대적인 분열 속에 몸담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가운데 진리를 획득하는 것이다. 정신은 부정적인 것에서 눈길을 돌려 긍정적인 쪽으로 쏠림으로써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가 주어졌을 때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쓸모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당장 고개를 내저으며 다른 쪽으로 마음을 돌리는 것은 정신이 취할 자세가 아니다. 참으로 정신이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바로 부정적인 것을 직시하며 그 곁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따돌리지 않고 그 곁에 함께 머무르는 바로 그때, 여기에 부정적인 것을 존재로 전화되게 하는 마력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 마력이란 앞에서 주체라고 일컬어졌던 것과 동일한 것이다. 즉 주체란 자기가 관여하는 범위 안에 있는 내용에 독자적인 존립을 부여함으로써 추상적이고 직접적인 존재 일반을 지양하여 실체를 진리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부정이나 매개를 자기의 외부에 맡겨놓다시피 한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분열과 매개를 행하는 존재만이 주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정신현상학』 p71,72」

 

‘부정성과 함께 머무르기’ 를 통해 주체가 탄생하고, 주체의 정신은 절대적 앎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 하세가와 히로시가 설명하는 헤겔 주체사상을 잠깐 읽어보자.

 

「세계 전체를 확고부동하고 완성된 질서로 파악하는 것이 스피노자식의 ‘실체’의 사상이라고 한다면, 거기에 분열과 대립과 부정을 가지고 들어와 질서의 해체와 재생의 끊임없는 운동 속에서 참된 현실의 모습을 보는 것이 헤겔의 ‘주체’의 사상이었다. ‘주체’는 무엇보다도 우선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거니와, 완성된 질서를 이루어 내고서 긴장을 푸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새삼스럽게 해명할 것까지도 없이 여기서 말하는 ‘주체’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개별자로서의 주체가 아니다. 그것은 훨씬 더 넓은 의미에서의 주체이다. 자신을 포함하는 세계 속에 일정한 질서가 주어졌을 때 거기에 안주할 수없는, 그리하여 그것을 때려 부수고 새로운 질서를 산출하고자 하는 힘을 지니는 것 - 그러한 것을 헤겔은 모두 ‘주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헤겔은 현실 세계의 이르는 모든 곳에서 그러한 부정의 힘을 보기 때문에, 세계 그 자체도 주체라고 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세계 속의 형태를 지닌 모든 것도 주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p39」

 

이렇게 주체와 부정성은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이 부정성은 즉각 헤겔의 변증법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흔히 오해하고 있듯 헤겔의 변증법을 대표하고 있는 것은 ‘정-반-합’의 도식이 아니다. 『헤겔』저자 프레드릭 바이저는 헤겔 자신은 결코 이 용어법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모든 도식의 사용을 비판했다고 한다. 정립과 반정립의 개진은 원래 칸트의 것이다. 헤겔을 독특하게 해석하여 심지어는 사이비로 비판받기도 하지만, 지젝은 헤겔 변증법을 부정과 ‘부정의 부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두 번째의 부정 즉 부정의 부정은 소위 정-반-합에서 말하는 행복한 합일이 아니다. 부정의 부정은 부정의 극단이며, 관점의 전환이다. 첫 번째 부정에서 부정적으로 보았던 것을, 부정의 부정에서는 긍정적으로 보는, 시차적 관점으로 전환할 뿐이다. 불가능성의 조건을 가능성의 조건으로 바꾸어 보는 것, 그것이 부정의 부정이다. 12척박에 없는 것이 전쟁의 불가능성의 조건이라 여겨졌지만, 이순신 장군에게는 가능성의 조건이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신에게는 아직 열 두 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를 통해 이순신 장군은 헤겔의 변증법을 실행 했다.

 

 

사족으로 따뜻한 위로 한마디를 전하며, 마무리를 지을까 한다. 『정신현상학』은 우리에게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심지어는 하세가와 히로시에게도 어려웠던 듯하다. 사실 『헤겔의 정신현상학 입문』은 <『정신현상학』의 난해함> 이란 장으로 시작한다. 『정신현상학』이 쓸데없이 어려운 이유는 이 책을 쓸 당시의 헤겔이 기백과 패기에 넘친 젊은이였다는 데 있다. 말하자면 넘치는 의욕을 사유가 따라잡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군데군데 사고의 모순과 관념의 비약이 있다고 하세가와 히로시는 보고 있다. 더 큰 이유는 ‘의식의 여정’ 이 순탄할 수 없고, 절대지라는 목적이 호락호락 달성될 수 없기 때문은 물론이다. 여하튼 어렵다고 너무 슬퍼하지 말고, 관심이 있다면 도전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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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밴드에 올리는 후기를 오늘 살짝 공개합니다. 조정래의 <정글만리>에 대한 3~40대 일반 주부들의 생각, 이렇게 팽팽합니다^^

 

 

 

 

여름 내내 읽었던 조정래의 <정글만리>가 드디어 토론탁상에 올랐습니다. 추석 준비를 이유로 OO님이 두 주간이나 발제를 미루기도 했던 책이지요. 그런데 추석은 표면상의 이유인듯하고 그 동안 발제준비에 몰두하셨던 듯합니다. 아주 훌륭한 발제로 저절로 박수가 터져나왔습니다. 등장인물 중심으로 내용을 소개했구요. 중국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비롯 몇 가지 논제를 던지셨습니다.

 

오늘 토론은 한마디로 '한발도 물러서지 않는 선악의 팽팽한 대립' 이라 할 수있는데요. <정글만리>에 긍정적 평가를 하신 분들은 착한 사람, 부정적 평가를 내린 인간들은 나쁜 사람으로 규정되었습니다. 졸지에 나쁜뇬에 등극하신 분들, 독서회의 필요악이라, 자위를 하자구요 흙. 결과는 긍정평가 4명, 부정평가 4명, 굳이 중도를 표방하신 2명, 무승부 되겠습니다.  70만부(맞나요?) 가 팔린 베스트셀러에, 지금도 이 책을 읽지 않으면 시대를 논할 수 없다는 둥의 광고가 나가고 있는 점으로 보아, 저희 독서회의 평가는 이례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몇몇 나쁜뇬들의 암약으로 ㅠ.ㅠ.

 

긍정평가의 가장 큰 이유로는, 이 책을 통해 중국이란 나라의 현실에 대해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을 꼽아주셨습니다. 역사책이나 경제학책은 아무래도 읽기힘든 상황에서 중국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기초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인데요. 게다가 중국에 대한 흥미가 생기니 관련 책을 더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구요. 말하자면 동기 유발자적 입문서라는 것이지요. 독자들 중에는 실제로 중국, 한번 해볼만한 시장이야, 라는 자신감을 얻기도 한답니다.

 

그런데 부정평가의 가장 큰 이유도 다름 아닌 이 '쉬운 접근법' 에 있습니다. 하나의 사실을 두고 정반대의 관점이 극명하게 충돌한 , 저희 독서회에서는 보기드문 상황인데요. 조정래가 보여준 중국의 실상이 극히 편협하고 표면적이어서 오히려 중국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님의 표현대로 100가지 얼굴 중에 한가지의 얼굴만 보여주므로써 한가지 얼굴을 중국 전체의 얼굴로 오인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문학 작품이라면 작가가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얼굴을 보여줌으로써 독자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작가의 답, 작가의 시선이 항상 옳은 것도, 항상 옳을 수도 없는 것이니까요. 특히 조정래라는 '이름값' 자체가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인데요, 그 이름에 대한 독자들의 무한신뢰가 비판적 독해를 방해할 위험이 높기 때문입니다. ... 아무래도 부정판단에 대해 더 말이 길어지는군요...짐작하다시피 저도 나쁜뇬에 지명된 처지라 ㅠ.ㅠ.... 기록자의 객관성을 상실하고 .... 댓글로 균형을 잡아주시길 바랍니다.

 

여하튼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양편이 모두 공감한 것은 문학작품으로서의 <정글만리>는 조금(혹은 엄청) 격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물도 사건도 갈등도 없고 저자의 아바타들만 난립하는 인상입니다. 그래서 여러 회원님들도 소설 보다는 르포에 가깝다는 말씀을 하셨구요. 반면 약간 모자란 문학성이 오히려 책을 쉽게 읽을 수 있게 해준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님의 부군은 평소 책을 머~얼리 하시는 분인데도, 이 책만은 휘리릭 단숨에 재미있게 읽으셨다고 합니다. 

 

 그외에도 조정래 할아버지가 여성을 보는 조야하고 비하적인 시선에 대해서도 대부분 의견 일치를 보였습니다. 한중 젊은이 한쌍의 연애 묘사도 너무 6~70년대 적이고요. 신성일, 엄앵란에 간드러진 성우 목소리를 입혀 만든 연애영화를 보는 듯한 오글거림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여하튼 12시 반이 넘을 때까지 선악의 극한 대결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데요. 역시 의견일치 보다는 굽힐줄 모르는 소신 주장이 활력있고 짜릿하고, 기타 등등 ... 좋았습니다. 양볼이 살짝 붉어지고, 목소리가 높아지는 부작용은 있지만, 아직 그 정도의 심박 상승은 버텨낼 수 있는 연배들이신지라 이런 종류의 토론은 적극 권장해도 될 것 같습니다. 참석 회원님들도 즐거워 하셨습니다.(아닌가요?)

 

그런데 왜 긍정평가자들이 좋은 사람이냐구요? ☆☆☆님이 말씀하시길, '우리 착한 사람들'은 어떤 책에서라도 좋은 내용을 찾아낼 수 있고, 배울점을 발견할 수 있다.... 고 하시는 바람에, 졸지에 부정평가자들은 '너희 나쁜 인간들' 이 되었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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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반양장) - 지금 우리를 위한 새로운 경제학 교과서
장하준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어제 또 피케티 기사가 일제히 실렸다. 방한한 피케티가 세계지식포럼의 사전행사로 마련된 '1% 대 99% 대토론회'에서 한 강연 기사인데, 한국의 불평등에 대한 언급이 헤드라인으로 뽑혀있다. 프레시안 기사에는 강연전문과 일대일 문답도 실려 있어 링크해 둔다. 그런데 피케티는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에 분류된 아홉 개의 경제학파 중 어디에 속할까? 그는 자본주의 300여 년의 통계 자료를 분석하여 소득 불평등의 심화를 입증하면서, 부자들에 대한 고율의 누진세와 글로벌 부유세 도입을 주장한다. 부의 불평등이 지나치게 커지면 사회가 위험하므로,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고전주의학파나 신고전주의학파 또는 오스트리아학파와는 거리가 멀다. 합리적인 수준의 부의 격차를 인정하고, 민주적인 해결방식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 마르크스학파는 아니지 않을까 싶다. 국가개입이란 면에서 케인스학파나 개발주의 전통 혹은 제도학파에 가까운 걸까? 어떤 하나의 학파에 속하는지 장하준이 장려하는 것처럼 학파들의 칵테일을 선호하는지 모르겠지만, 장하준의 경제학적 관점과 많이 닮아 보인다. 장하준도 그의 첫 번째 책인 『사다리 걷어차기』부터 지금까지의 여러 책을 통해 국가 개입의 필요성에 관해 꾸준히 주장해 왔다. 그리고 ‘경제는 정치적 논쟁’ 이라는 말을 통해, 경제로부터 정치를 떼어내려고 온갖 수단을 사용해 온 신고전주의학파 등의 자유시장주의자들과는 명백한 전선을 긋고 있다.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는 총 2부로 되어 있다. 1부 <경제학에 익숙해지기>는 지난 리뷰에서 간단히 소개 했다. 2부 <경제학 사용하기>는 6장부터 12장까지, 총 일곱 개의 장으로 되어 있는데, 1부에 비해 좀 더 세부적인 경제학 지식을 담고 있다. 처음 몇몇 까다로운 개념들과 수치들을 견디고 나면, 또 장하준의 책이 원래 그렇듯 술술 읽힌다. 며칠 걸릴지 모른다 생각했는데, 250쪽 정도를 하루 만에 읽을 정도이다.

 

 

6장은 통계와 수치에 관한 내용이다. 정치에 관해서는 모두들 한마디씩 거들면서도 경제에 관해서는 자신 있게 발언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통계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이 어려운 통계 프로그램을 돌려 나온 결과라고 주장하면, 빈손만 가지고 반박하기는 힘들다. 물론 객관적 수치가 중요하다. 피케티가 주목받는 이유도 ‘20여 개국의 300년에 걸친 방대한 자료를 분석한 결과’로 입증된 수많은 그래프와 수치들에 힘입은 바 클 것이다. 그냥 맨 입으로, 불평등 때문에 나라 망할지도 모르니 부자한테 세금 왕창 물리자고 했다면 전경련이 나서서 그렇게 길길이 뛰었을 리 없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소리다.

 

그런데 이 막강한 힘을 가진 통계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다. 뭐 여론조사가 문제가 되면서 많이 알려진 사실이라 비밀이라고까지 하기는 그렇지만, 여하튼 장하준은 구소련의 농담을 들어 통계수치의 맹점을 경고한다. “동지, 2 더하기 2는 무엇이오?”란 질문에 대한, 소비에트연방 국가계획위원회의 통계실장이 되기 위한 정답은 이것이다. “몇이길 원하십니까?” 이것은 통계 결과를 조작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통계에 어떤 조작이 있다면, 그것은 설계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무엇을 대상으로 어떤 방법을 통해 통계를 낼 것이냐에 따라 결과로 나온 수치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 통계라는 말이다. 그러니 수치를 읽을 때는 이것들이 무엇을 말해주는지 뿐만 아니라 무엇을 말해주지 않는지도 따져보아야 한다.

 

7장이 강조하는 것은 ‘생산’ 의 중요성이다. 현대 사회의 유행 중 하나는 ‘후-’, 소위 'post-'를 붙이는 것이다. 경제학에서도 '산업화 후 사회', ‘post-industrial society’ 에 진입했다는 주장이 널리 퍼져있다. 제조업을 굴뚝 산업이라고 비웃으면서 서비스 산업, 지식경제를 강조한다. 사실 우리도 어느덧 세뇌되어 있다. 선진국에는 이제 공장이 사라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른바 그 통계를 잘 따져 보면, 부자나라들에서는 제조업뿐만 아니라 농업도 여전히 중요시 되고 있다. 어떤 수치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착시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에, 제조업이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고 할 수 있는데, 자세한 것은 책을 꼼꼼히 읽어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불변 가격으로 계산했을 때, 미국과 스위스는 지난 20여 년 사이에 제조업 비중이 5% 증가했고, 핀란드, 스웨덴은 지난 몇십 년 사이에 총생산량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50%나 증가했다. 그런데 영국은 진짜로 제조업 비중이 극적으로 감소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영화 <풀 몬티>나 <빌리 엘리어트>에서 본 대로 노동자들의 몰락이다.

 

「영국처럼 고가치 서비스를 수출하고 거기서 번 이윤으로 필요한 공산품을 수입해 오면 된다는 것이다. 이 전략은 일정 기간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2008년 금융 위기가 닥치기 전 약 10년 동안 영국은 급속한 탈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도 괜찮은 성장률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 금융 산업의 호황 덕분이었다. 그러나 2008년 위기를 겪으면서 서비스가 성장의 새로운 동력이라는 믿음은 단지 환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이 고생산성 서비스의 많은 부분이 엔지니어링, 디자인, 경영 컨설팅 등 제조업 부문 기업이 주 고객인 ‘생산자 서비스’ 이다. 따라서 제조업 기반이 약해지면 이런 서비스의 질이 떨어져 서비스 수출도 더 어려워진다. p255」

 

생각해 보면 그렇다. 서비스 아무리 좋아도 서비스 자체를 서비스 할 수는 없다. 무언가 생산품이 있어야 제공하거나 봉사할 것이 있다. 아무리 친절해도 맛없는 식당을 두 번 가기는 싫고, 아무리 시설이 번쩍번쩍해도 한 번 입으면 후줄근해지는 옷을 사지는 않는다. 한때는 서비스로 성공한 ‘스위스’, ‘싱가포르’를 따라해야 한다는 주장이 유행하기도 했다. 그런데 스위스, 싱가포르 경제는 완전히 반대라는 것이 밝혀져 입에 거품 물던 사람들이 머쓱해 지기도 했다. 2000년대 통계 자료를 보면 스위스와 싱가포르는 일본과 함께 1인당 제조업의 부가가치가 세계 3위 안에 항상 들고 있는 나라이다. 스위스가 관광만으로, 싱가포르가 금융만으로 저렇게 잘 먹고 잘 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는 지식경제, 창조경제 타령을 하고 있다. 창조경제가 뭔지는 지금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장하준에 따르면 세계적 추세도 별반 다르지 않다.

 

「불행하게도 사상적으로는 산업화 후 사회의 담론이 힘을 얻고, 실생활에서는 금융 부문이 경제를 주도하면서 제조업에 대한 무관심은 근래에 와서는 경멸로까지 바뀌었다. 새로운 ‘지식 경제’ 사회에서 제조업은 저임금 노동력을 주무기로 하는 개발도상국에서나 하는 저급한 활동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공장에서 만들어졌고, 새로운 사회 또한 공장에서 만들어질 것이다. 게다가 이른바 산업화 후 사회에서도 이른바 새로운 경제의 동력이라고 여겨지는 서비스 산업은 역동적인 제조업 부문의 뒷받침 없이는 융성할 수 없다. 서비스 산업이 주도해 번영을 이룬 경제의 대명사라고 생각하는 스위스와 싱가포르가 (일본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산업화된 세 나라 중 두 나라라는 사실이 바로 그 증거이다. p267」

 

8장은 돈, 금융 이야기다. 은행과 주식에 관한 복잡한 설명을 모두 이해하기는 힘들다. 파생상품은 만든 사람도,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 모두 모르고 거래한다는 말까지 있으니, 내가 뭘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2008년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여기저기서 사실은 나도 모른다는 전문가들의 고백이 터져 나왔다. 상품 하나를 이해하려면 투자자가 10억 페이지가 넘는 정보를 흡수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아무도 상황을 알지 못했고, 상황을 통제하지 못했던 것이다. 장하준은 금융개혁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으로 금융 시스템의 단순화를 꼽는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어야 안전한 금융거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도 은행에 가면 은행원 자신도 알지 못하는 복잡한 상품들을 권하고 있다. 나도 칠팔년 전 그런 상품에 가입한 적이 있다. 당연히 뭔지도 모르면서 이율 높고 안전한 상품이라는 말만 믿고 들었다. 그러고도 그게 진짜 무엇이었는지 이번에야 알았다. 책을 읽다가 ‘트랑슈’ 라는 말을 발견했는데, 내가 들었던 상품이 ‘KB방카슈랑스’ 였던 것이다. ‘부채 담보부 증권’ 의 일종으로, 주택대출 같은 것을 해주고 은행이 받은 채권들을 묶어서 금융 상품으로 만든 것인데, 이게 위험하니까 다시 그 위험도에 따라 분할해서 증권을 발행한 것이다. 트랑슈란 ‘얇게 저민 조각’이란 뜻으로 상위 트랑슈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상품이고, 하위 트랑슈는 엄청 위험한 상품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나는 뭔지도 모르고 미국 서브프라임 주택 담보 대출자의 채권을 산 셈이다. 이 미국인 대출자가 돈을 못 갚으면 내가 매달 꼬박꼬박 부었던 돈도 공중으로 날아간다는 뜻이다. 그런 식으로 날아간 돈이 얼마인지는 굳이 밝히지 않겠지만, 그걸 회복하고 원금을 찾는데 몇 년이 걸렸는지 모르겠다.

 

9장은 불평등과 빈곤에 관한 내용이다. 장하준이 신고전주의 학파와 대립한다고 해서 마르크스학파는 아니다. 그는 불평등이 너무 심해도, 또 너무 적어도 좋지 않다고 한다. 불평등이 극도로 높아도 또 극도로 낮아도, 경제 성장을 저해하고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다고 보기 때문이다. 피케티와 마찬가지로 장하준은 1980년대 이후 대부분의 국가에서 소득 불균형이 심해졌다고 본다. 그 중 영국과 미국이 가장 두드러지는데, 이 두 나라가 바로 신자유주의 정책의 선봉에 서 있다.

 

10장은 일과 실업에 관한 이야기로, 상식적인 수준의 내용이다. 브라질의 대주교 돔 헬더 카마라의 말이 인용되어 있는데 매우 인상 깊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면 사람들은 나를 성인이라고 부른다. 왜 그들에게 음식이 없는지를 물으면 사람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 부른다.” 우리가 진짜 해야 할 일은 인도주의적인 지원이 아니라 바로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예전에 어떤 분의 블로그에서 읽고 갈무리 해둔 브레히트의 시가 다시 생각난다.

 

<노동자가 의사에게 하는 말>

 

제가 누더기 옷을 벗고 선생님 앞에 서면,

선생님은 저의 벗은 몸을 구석구석 진찰하십니다.

제가 아픈 이유를 찾으시려면,

누더기 옷을 힐끗 보는 것이 더 나을 겁니다.

저의 몸이나 옷이나,

같은 이유 때문에 닳으니까요.

 

제 어깨가 아픈 것은 습기 때문이라고 그러셨지요.

그런데 저희 집 벽에 생기는 얼룩도 그렇다고 하더군요.

저의 어깨나 벽이나

같은 이유 때문에 얼룩지니까요.

그러니 말씀해주세요.

그 습기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거지요?

 

11장은 국가개입, 정부의 역할에 관한 논쟁이다. 신고전주의학파 같이 경제의 탈정치화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정부 실패’ 논리를 내세운다. 정부란 탐욕스러운 관료들이 자기 잇속에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에 정부가 개입하면 경제 전체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에 희생당하여, 경제가 파탄난다는 주장이다. 반대편에는 ‘시장 실패’ 논리가 있다. 시장은 그대로 둘 때 제일 잘 돌아가니까, 최소한의 개입 외에는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 신고전주의학파 등의 논리인데, 역사적으로 따져보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1945년~1973년이 자본주의의 황금기인데, 이때는 케인스학파의 이론이 경제 정책의 주를 이루던 때이다. 1980년~현재까지는 신고전주의학파 시대로, 이 시기보다 그 이전의 자본주의의 황금기 때가 경제 성장률이 높았다는 사실이다. 시장은 국가 개입 보다 자유방임에 의해 더 쉽게 실패한다는 것이 ‘시장 실패’의 논리이다. 장하준의 결론은 정부 실패도 일리가 있지만, 신고전주의자들처럼 경제에서 정치를 떼어내는 것은 불가능 할뿐 아니라 반민주적이라는 주장이다. 이 장에서 명시적으로 국가개입을 주장하지는 않지만, 장하준은 예전부터 일관되게 국가개입의 필요성을 역설해 왔다.

 

「민주 국가에서 정치란 국민이 끼치는 영향력에 다름 아니다. 시장은 ‘1원 1표’ 원칙으로 움직이는 반면 민주 정치는 ‘1인 1표’ 원칙으로 움직인다. 따라서 민주 사회에서 경제를 탈정치화하자는 것은, 결국 돈을 더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 사회를 움직이는 힘을 더 많이 주자는 반민주적인 주장이다. p381」

 

그리고 원래 경제학의 이름은 ‘정치경제학’ 이다. 경제를 정치적으로 관리하는 것에 대한 연구가 경제학의 본래 의미이다. 정치경제학에서 정치를 떼어낸 것은 신고전주의학파이다. 그들이 승계한다고 주장하는 고전주의학파들도 정치경제학이라고 불렀다. 신고전주의학파는 경제에서 정치를 제거하고 순수 과학을 지향함으로써 실제로는 경제의 윤리적 측면을 없애버린 것이다. 그러나 경제의 탈정치화는 궁극적으로 불가능하다. 시장 자체가 정치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무엇이 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고, 누가 어떤 방식으로 거래를 하는지에 대한 규칙들이 필요한데, 이것들을 결정하는 것은 정치의 영역이다. 노예의 상품화, 아동 노동, 마약 판매, 노동 시간 같은 것들은 시장의 필요에 의해 제한 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윤리와 투쟁에 의해 규제되었다. 담뱃값 인상 역시 마찬가지다.

 

12장이 다루고 있는 것은 국제 무역이다. 세계화에 따라 무역은 가파르게 자유화 되었다. 자유 시장주의자들은 모든 국경을 개방하고 모든 상품이 자유롭게 이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들이 입을 다무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노동 상품이다. 자유 이민을 옹호하는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극히 드물다.

 

그런데 노동력의 이동은 우파 포퓰리즘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도 노동현장에서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의 노동자들과 알력이 심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값싼 노동력의 대거 유입으로 안 그래도 살기 어려운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처지가 더욱 열악해 진다는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유입은 임금을 하락시키려는 자본가들의 필요 때문인데, 싸움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1930년대나 요즘처럼 경제 상황이 어려울 때는 우파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의 선동으로 불안해진 노동자들이 자신의 문제가 많은 부분 이민자들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믿게 된다. 그러나 오르지 않는 임금과 악화되는 노동 환경은 기업 전략과 정부 경제 정책의 영역에서 더 큰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즉 기업들의 주주이익 극대화 전략이 노동자들을 쥐어짜고, 잘못된 거시 경제 정책으로 인해 과다한 실업이 발생하며, 숙련 노동자들을 훈련시키는 시스템이 정비되지 않아 자국 노동자들의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주류 정치인들의 능력과 의지 부족으로 많은 부자 나라에서 반이민 정책을 기치로 내건 정당들이 생겨나 인기를 끌고 있다. p425」

 

 

내가 가끔 경제 서적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경제에서 정치를 떼어낼 수 없는 것처럼 경제를 말하지 않고는 그 어떤 것도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사교육 문제도, 일베의 발호도, 세월호 사건도, 심지어는 지역별 소방관 현황에도 경제적 문제가 깔려 있다. 묻지마 범죄는 말할 것도 없다. 역사책을 보아도 소설책을 보아도 경제가 빠져 있는 인간의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방카슈랑스에 속아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도 경제의 ABC는 필요하다. 그럼에도 경제학이란 아무래도 거리감이 느껴진다.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려면 머리가 깨질 것 같고 눈알이 빠질 것 같다. 은행이 돈도 없이 실제 예금의 수십, 수백 배가 넘는 돈을 마구 빌려 준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고, 하루아침에 수백억의 자산이 올랐다 내렸다 하는 주식 시장이 근절해야 하는 도박이 아니라 건전한 금융 거래라는 것도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다. 경제라는 것이 거대한 사기 위에 지어 올린 마천루가 아닌가 싶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그런 허상, 가짜가 오늘 나의 밥상과 옷차림을 결정짓고, 내일 올려주어야 할 전세를 결정한다. 이것이 실재는 아닐지라도 현실이다. 그러니 오늘도 나는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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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반양장) - 지금 우리를 위한 새로운 경제학 교과서
장하준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장하준의 책은 무엇을 봐도 시원시원하다. 한 호흡의 머뭇거림도 없이 성큼성큼 직진이다. 7월에 나온 신간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도 그렇다. 제목에 살짝 겁먹었지만, 내가 아는 장하준을 믿고 책을 신청했다, 일단은 도서관에. 그리고 1부를 읽다가 알다딘에 주문했다. 책갈피에 꽂아야 할 표지종이가 너무 많아졌고, 아무래도 밑줄이 필요할 것 같고, 무엇보다 두고두고 찾아보게 될 것 같기 때문이다.

 

 

이 책의 부제는 <지금 우리를 위한 새로운 경제학교과서>이다. 말하자면 대중들이 알아야 할 경제학의 ABC이다. 그런데 대중이 “경제학은 왜 알아야 할까?” 장하준이 프롤로그로 던진 질문 역시 이것이다. 답은, 경제학자들 또는 권력자들의 손에 놀아나지 않기 위해서다. 에필로그를 앞당겨 빌려오면, 장하준에게 “경제학은 정치적 논쟁이다.” 경제학에는 정답이 없다.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이 아무리 시장에 간섭하면 큰일 난다고 떠들어도, 그것은 정답도 과학도 진실도 아니다. 하나의 주장에 불과하다. 그리고 모든 주장에는 어떤 집단의 이익이 걸려있다.

 

「경제학은 정치적 논쟁이다. 과학이 아니고, 앞으로도 과학이 될 수 없다. 경제학에는 정치적, 도덕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확립될 수 있는 객관적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경제학적 논쟁을 대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오래된 질문을 던져야 한다. “Cui bono 누가 이득을 보는가?” 로마의 정치인이자 유명한 웅변가였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말이다. p435」

 

흔한 패러디 중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가 있다. 1992년 미국대통령 선거 당시의 빌 클린턴 측의 유명한 구호인 “It's the economy, stupid!”의 다양한 변주 중 하나이다. 경제가 장땡이란 말이다. 경제가 핵심, 토대인 것은 맞다. 그런데 그 경제를 결정짓는 것은 정치이다. 지젝은 정치와 경제가 시차적 관계에 있다고 주장했다.

 

「경제가 주요 영역이며 그곳에서 전투의 승패가 결정될 것이며 우리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주문을 깨뜨려야만 한다. 그러나 개입은 경제학적인 것이 아니라 전격적으로 정치적이어야 한다. 『시차적 관점』p627」

 

입만 열면 경제, 경제를 외치며 심지어 세월호라는 전대미문의 국가적 재난마저 ‘경제 살리기’를 이유로 재갈을 물리는 박근혜 정부를 보면 이 난해한 소리가 무슨 의미인지 즉각 알 수 있다. 입으로는 서민경제인데 하는 짓은 부자경제다. 담뱃값, 주민세, 자동차세는 올리고 반대로 기업가가 자녀에게 사업을 승계할 때와 손자에게 1억 원 이하의 교육비를 대어줄 때 증여세는 내리겠다고 한다. 투기도 규제도 모두 풀었다. 기업이 부담할 세금도 줄였다. 경제가 살아나기는 할 텐데 서민경제가 아니라 부자경제가 만세를 부를 것이다. 서민경제는 이미 수난의 시대를 걷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결정의 근원은 우리 국민의 정치적 선택에 있다. 박근혜와 새누리당이 전폭적으로 지지해준 국민들에게 보내준 화답의 선물이다. 정치적 지지에 경제적 선물 보따리를 안긴 것이다. 둘은 뫼비우스의 띠 모양을 한 하나의 몸체이다. 우리가 원하는 경제는 정치적 선택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경제전문가들은 곧잘 거짓말을 한다. 부자들이 잘 사는 경제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이 모든 것들이 서민경제를 살리는 지름길이라고 강변한다. 그런데 더 우스운 건 그들도 자신의 말이 거짓말인지 모르고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비극적인 예로 참여정부를 들 수 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은 신자유주의와 국가개입 정책을 두고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국가경제를 살리고 싶은데 신고전주의자들의 자유방임주의가 맞는지 그에 반하는 경제 정책들 일테면 케인즈주의 같은 것들이 올바른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은 신자유주의적 관료들의 손에 놀아났다는 것이다. 고 노무현대통령은 결국 한미 FTA가 서민을 살릴 것이라 거짓말을 했다.

 

세계적인 사례로는 레이건 정부의 경제 정책이 있다. 레이건은 대처 수상과 함께 전 세계의 경제정책을 신자유주의로 이끈 핵심 인물이다.

 

「레이건 정부는 고소득자들에 대한 세율을 공격적으로 깎으면서 이 조치로 부자들이 투자 이익 중 더 많은 부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투자 의욕을 촉진해서 부의 창출을 독려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부자들이 부를 더 많이 축적하면 더 많이 소비할 것이고, 이로 인해 일자리가 더 늘어나 더 많은 사람들의 수입이 증가할 것이라는 논리였다. 이것을 낙수 효과 이론 (trickle-down theory)이라고 부른다. 부자들의 세금을 깎는 동시에 레이건 정부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보조금을 삭감하고 최소 임금을 동결하면서, 그것이 더 열심히 일할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논리이다. 왜 일을 더 열심히 하도록 하기 위해 부자들은 더 부자로 만들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일까? 이해가 되든 안 되든 이 논리는 공급 경제학 supply-side economics이라고 불리며 향후 30년 동안, 아니 그 이후까지도 미국 경제 정책의 기본 신념으로 자리 잡았다. p96~7」

 

우리 서민들은 처마 밑의 낙숫물이라도 받아먹으려면 일단 부자들이 투자 할 마음이 생기도록 부자들의 배를 두둑이 불려주어야 한다는 소리다. 박근혜 정부의 경제 정책 소위 ‘초이노믹스’ 와 비슷한 점이 많아 보인다.

 

최근, 그러고 보니 마침 오늘 그가 방한하는 것 같다, ‘피케티 때리기’ 라는 기사로 타임라인을 떠들썩하게 만든 경제학 논쟁이 있다. 『21세기 자본』의 저자 피케티가 그 주인공인데, 참고로 그는 71년생으로 쟁쟁한 한국 경제전문가들이 보기에 아들 뻘 정도의 햇병아리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햇병아리의 책 한권을 두고 이례적으로 전경련 부설의 한국경제연구원이 아시아금융학회와 공동으로 세미나를 개최해서, 한국에 맞지 않는 주장이라는 둥 열렬히 ‘피케티 때리기’를 했다. 왜 아버지 뻘 되는 경제전문가들께서 그런 야만적인 일을 하셨을까? 경향신문 기사의하면, 나는 아직 『21세기 자본』을 읽지 않았고 아마도 앞으로도 읽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다, 그의 방대한 분량의 책이 주장하는 내용은 명료하다.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높아지면 자본 소유자인 최상위계층에 부가 집중되는 게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돈이 돈을 번다’는 의미다.” 현대 자본주의는 자본수익율의 비율이 점점 높아져 빈부격차가 심화된다는 것인데, 300여 년에 걸친 20여 개국의 방대한 자료를 모아 분석한 결과라고 한다. 그가 내놓은 해법은 “최고 소득세율 인상과 글로벌 부유세”로, 말하자면 부자들에게 세금을 왕창 매기자는 것이다. 그러니 피케티가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기도 전에 노인네들이 모여 거품을 물었다는 것이 소위 ‘71년생 아들뻘 학자’ 망언의 전말이다. ‘피케티 민증 사건’이라고도 하는데, “ 피케티: 저는 ‘21세기 자본론’에서 이러이러한 주장을... 한국 학계/재계: 민증까 피케티: ?!?!?! ” 라는 트윗으로 풍자되기도 했다.

 

피케티 논쟁은 “Cui bono 누가 이득을 보는가?” 라는 질문이 왜 필요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경연의 두려움은 이론적 차원이 아니라 정치적 파급력에 있다. 박근혜 정부가 콘크리트 지지층에 대한 넘치는 자신감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부자감세와 서민증세 정책에 제동이 걸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한경연의 논리적 근거는 레이건의 낙수 효과 이론과 같다. "고율의 누진소득세와 자본세를 부과해야 한다는 피케티의 처방은 피케티가 의도하는 것과는 반대로 기업가의 투자환경을 악화시켜 그 결과 고용과 분배구조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늘 듣는 소리지만, 들을 때마다 협박받는 기분이다. 찍소리하면 떨어지는 물 한 방울도 못 먹을 줄 알라는 소리다.

 

장하준은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가 필요한 것은 이때라고 한다. 경제학에는 매우 다양한 접근법이 있다. 어떤 이론도 ‘절대반지’가 될 수 없다. 다양한 이론들은 각각의 강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다. 레이건이 신봉한 신고전주의만이 현대경제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아니다. 4장 <백화제방>에서 장하준은 아홉 가지 경제학파를 소개하고 있다. 아담 스미스로 대표되는 고전주의 학파부터 조금 생소한 행동주의 학파까지, 그 장단점을 설명하는데, 어느 것도 그 하나만으로 완벽하지 않다. 예를 들어 케인즈학파는 거시경제와 금융시장에 대한 탁월한 이론을 제시한 반면 지나치게 단기적 변수에만 초점을 맞춘 탓에 장기적 변화에 대해서는 상당히 취약하다. 여기서 장하준은 ‘지적 다양성과 경제학의 이종 교배’를 주장한다. 어느 한 가지 이론만 맹신하지 말고, 칵테일을 만들듯 여러 가지 이론을 섞어서 최적의 방법을 찾자는 것이다. 여하튼 다 좋은데 그래서 그걸 왜 내가, 경제의 문외한인 내가 알아야 한단 말인가?

 

「다른 사람이 내린 결정의 수동적인 피해자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 모두 경제학을 하는 다양한 접근법을 이해하고 있어야만 한다. 최저 임금, 아웃소싱, 사회 복지, 먹거리의 안전성, 연금 등등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치는 모든 경제 정책과 기업의 결정 뒤에는 어떤 경제학 이론이 있기 마련이다 - 그 결정에 영감을 제공하든지, 더 흔하게는 힘을 가진 자들이 어차피 하고 싶었던 행위를 정당화하든지 하면서 말이다.

다양한 경제 이론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힘 있는 사람들이 “대안은 없다.” 라고 할 때(마가릿 대처가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정책을 실행하면서 말했듯)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 일반 대중이 이런 문제에 관한 의식을 확실히 드러낼 때에야 비로소 전문 경제학자들이 과학적 진리의 수호자를 자청하면서 지적인 으름장을 놀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p166」

 

기업에 세금을 많이 매기면 일자리 없어져! 라고 협박을 할 때, 일자리는 기업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정부와 협동조합이 일자리 창출에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계와 논거를 가지고 설파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Cui bono 누가 이득을 보는가?”라 다그칠 수 있다. 적어도 부자 경제를 살리면서 서민경제 살리기라는 거짓말을 할 수 없도록, 그 이론들을 따져보고 대안적 이론들과 비교하여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물론 겨우 입문서 하나를 가지고 유창하게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학자라든가 전문가라든가 하는 권위에 위축되지 않고 따져볼 태도를 갖게 될 수는 있다.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1부, <경제학에 익숙해지기>의 역할이 바로 이런 것이다. 1장은 인생과 우주 그리고 모든 것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경제학 이론들의 뻥에 대해서 저자가 바라보는 경제학이란 무엇인가를 짤막하게 소개하고 있다. 2장은 초기 자본주의에서부터 2014년의 자본주의까지, 자본주의의 변화 양태를 간단히 짚어준다. 자본주의는 300년 정도의 역사 속에서 모든 것이 변화해 왔다. 아담 스미스 시대와는 자본가도 노동자도 달라졌고, 시장도 금융시스템도 변화했다. 고전주의학파의 낡은 이론으로 현대의 자본주의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그리고 아마 경제학의 이론들이 앞으로도 계속 변화해 나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3장은 2장에 이어 자본주의의 역사를 시기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여명기인 1550~1820년, 산업혁명기인 1820~1870년, 하이눈 시기인 1870년~1913년, 파란의 시기인 1914~1945년, 자본주의의 황금기 1945~1973년, 오일 쇼크로 인한 과도기인 1973~1979년,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흥망을 고스란히 보고 있는 1980년~현재까지의 시기별로 구분되어 있다. 연도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예전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사건들이 떠오른다. 4장은 앞에서도 얘기한 것처럼 아홉 가지의 경제학 학파들에 대한 설명이다. 5장은 경제 주체에 관한 내용이다. 신고전학파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경제의 주인공이 개인인가에 대한 질문에서 장하준은 진짜 주인공은 조직 즉 기업, 정부, 노동조합, 국제기구 등의 큰 조직들이라고 말한다.

 

 

제목만 보고는 1부의 내용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데 장하준의 책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읽기가 그다지 힘들지 않다. 경제에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아니, 정치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조직하는지에 관심이 있어도, 1부는 매우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2부는? 아직 읽지 않았다. 2부의 제목은 <경제학 사용하기>로 1부에서 경제에 익숙해졌다면, 2부에서는 진도를 한번 나가보겠다고 한다. 그러니 좀 더 어려울 수는 있겠다. 여하튼 총 일곱 장, 250 쪽 정도를 다 읽고 나면 뭐라고 말해드릴 수 있을 것 같다.

 

 

                          덧붙임 : 아홉 개 학파에 대한  한 문장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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