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이었던 남자 - 악몽 펭귄클래식 76
G. K. 체스터튼 지음, 김성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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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이었던 남자』만큼 제목이 이상한 책도 없다. ‘목요일의 남자’라면 그리 이상하지는 않을 텐데... 아! 그러고 보니,『목요일의 아이』라는 책이 있었다. 중학생 때 읽으며 울던 기억이 난다. 목요일의 아이는 길을 떠나고... 수요일의 아이는 뭐였더라? 알라딘을 뒤져보니 책은 절판이고, 다행히 어느 분의 리뷰에 고스란히 노래(시?)가 남아있다.

 

월요일의 아이는 이쁘고요,

화요일의 아이는 의젓 하구요,

수요일의 아이는 수심이 많아,

목요일의 아이는 길을 떠나고,

금요일의 아이는 사랑스럽고,

토요일의 아이는 고생이 많아,

일요일에 태어난 꼬마아이는 귀엽고, 명랑하고, 싹싹하지요..

 

 

하느님이 낳은 아이들은 조금 다르다.

   

        월요일에는 빛을

        화요일에는 하늘, 땅, 바다를

수요일에는 땅위의 푸른 식물을

목요일에는 해와 달을

금요일에는 물과 땅과 하늘의 동물을

토요일에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일요일에는 쉬신 것 같다.

(기독신자가 아니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창세기를 보니 대충 이렇게 나누면 될 것 같다. )

 

『목요일 이었던 남자』의 목요일은 길을 떠나는 아이가 아니고, 해와 달처럼 빛을 비추는 시인이다. “만일 사임도 자신을 볼 수 있었더라면, 처음으로 자기 자신이 된 것 같다고 느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간사가 최초의 형태 없는 빛을 사랑하는 철학자를 나타낸다면, 사임은 그 빛을 특별한 형태로, 즉 태양과 달로 나누어 비추려 하는 시인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학자는 때때로 무한성을 추구하지만, 시인은 항상 유한성을 추구한다. 그에게 위대한 순간은 빛이 아니라 태양과 달이 창조된 순간이었다. p202"

 

그런데 월요일에 창조한 빛은 무엇일까? 언뜻 태양과 달도 없이 어떻게 빛이 있나 싶었는데, 하느님이 창조한 것은 지구가 아니라 우주일 것이란 생각이 드니, 그건 빅뱅의 빛이구나 싶다.(거듭 신자가 아니니, 마음대로 해석한다.) 여하튼 우연이지만, 길을 떠나는 목요일의 아이와 시인 목요일은 딱 어울린다. 사임이란 시인이 월요일이었다면!, 아... 이쁜 시인이라니! 그런데 이렇게 뒤죽박죽, 왔다갔다 리뷰를 쓰면 글이 산으로 갈 것 같은데, 사실 『목요일 이었던 남자』란 책이 이렇게 씌어있으니, 나도 모르게 생각이 널을 뛴다. 아니 나만 그렇게 읽은 건가?

 

『목요일 이었던 남자』에는 일곱 명의 남자가 나온다. 짐작대로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다. 그렇다고 일요일을 귀엽고 싹싹하고 명랑하다고 연상하면 곤란하다. 우연의 일치는 딱 목요일에만 해당한다. 모든 것에 해당한다면 우연이라 쓸 수가 없을 테니. 이 책의 원제는 『The Man Who Was Thursday』, 부제는 A Nightmare 악몽이다. 이상한 나라에 갔다 온 앨리스처럼 일곱 요일을 만나고 온 사임의 개꿈 이라 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꿈은 ‘억압된 욕망의 위장된 성취’이다. 꿈에서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꿈은 위장되어 있다. 꿈이 그렇게도 이상하고 비논리적인 이유가 바로 위장이라는 꿈 작업 때문이다. 꿈은 응축과 전치라는 위장술로 무의식의 검열을 교묘히 피해간다. 응축과 전치는 언어의 은유와 환유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목요일 이었던 남자』에는 은유와 환유가 넘쳐난다. 꿈의 위장술이든 언어의 마술이든, 숨기고 바꾸는 작업에 흥미가 없는 사람은 이게 뭐야!, 할 수 있는 책인 반면, 꿈의 핵심이 꿈 작업에 있고 언어의 묘미가 교묘히 드러내고 은근히 감추는 기술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주 아주 재미있는 책이 될 것이다.

 

그런데 꿈이나 언어와는 별개로, 가장 훌륭한 위장술은 무엇일까? 가장 그럴듯하게 속이는 기술은 참말로 거짓말 하는 것이다. 일곱 명의 무정부주의자들은 대낮에 정장을 차려입고 카페에 둘러앉아 큰 소리로 국왕 암살을 계획한다. 카페의 웨이터들도 손님들도 저 신사분들이 테러리스트라며 웃는다. <무정부주의 중앙의회>의 총재인 일요일에 대해 그레고리는 이렇게 말한다.

 

“그분이 하는 충고는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경구처럼 놀라웠고 영국 은행만큼이나 실용적이었지. 난 그분께 ‘어떻게 하면 세상으로부터 저를 감출 수가 있을까요? 주교나 장교보다 더 존경받는 인물로 누가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소. 그분은 헤아릴 길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소. ‘안전하게 감추길 바라는가? 자네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위장을 바라는가? 절대로 폭탄을 쓸 사람이 아니라고 믿게 하는 그런 위장?’ 난 고개를 끄덕였지. 그러자 갑자기 그분의 사자 같은 목소리가 ‘그럼, 무정부주의자로 위장하면 될 게 아닌가, 이 바보 같은 사람아!’ 하고 온 방 안에 쩌렁쩌렁 울렸소. ‘그렇게 하면 아무도 자네가 그런 위험한 일을 하리라고 생각지 못할 테니까.’ 그러고 나서 그분은 아무 말 없이 가버리셨소. 난 그분 말대로 했고, 이를 후회해 본 적이 없어. 난 여자들에게 밤낮으로 피비린내 나는 살인 얘기를 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그 여인들은 제 아기의 유모차를 내게 밀도록 했지.p32”

 

<무정부주의 중앙의회>의 반대편에는 <철학경찰>이 있다. 왜 철학경찰인가? 오늘날 가장 위험한 범죄자들은 교육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은 도둑이나 중혼자 심지어는 살인자들 보다 더 위험하다. 후자들은 사회의 틀 자체는 존중하는 데 반해, 철학자들은 그 틀 자체를 부수려 하고 있다. 세계를 위협하는 것은 지성인의 음모, 학술적이고 예술적인 정신이다.

 

“우리는 오늘날 가장 위험한 범죄자는 무법적인 현대 철학자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도둑이나 중혼자들이 근본적으로 도덕적이에요. 그들은 동정의 여지가 있죠. 인간의 근본적인 이상은 수용하는데, 단지 잘못을 추구할 뿐이니까요. 도둑들은 재산을 존중합니다. 그걸 너무 존중한 나머지 자기 손안에 넣고 싶어 할 뿐이죠. 하지만 철학자들은 재산을 증오해서 개인의 소유라는 생각 자체를 파괴하려고 해요. 중혼자들은 결혼을 존중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의식적이고 격식을 차리는 중혼의 형식을 따르지 않겠죠. 하지만 철학자들은 결혼 자체를 경멸합니다. 또, 살인자들은 인간의 생명을 존중합니다. 단지 자신들 보다 덜 중요해 보이는 생명을 희생시킴으로써 생명의 더 큰 충만함을 맛보려는 것뿐이죠. 그런데 철학자들은 생명 그 자체를 증오해서,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자기 생명까지도 증오합니다.p55”

 

철학 경찰의 임무는 선제적이다. 범죄 단계뿐만 아니라 논쟁 단계에 있는 음모도 적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찾아 선제공격한 미국과 동일한 발상이지만 방법은 전혀 다르다.

 

“철학적인 경찰관이 하는 일은 보통 형사보다는 더 대담하면서도 민감하죠. 형사들은 대개 도둑을 잡으러 선술집을 덮치지만, 우리는 염세주의자들을 찾기 위해 예술가의 티 파티에 참석합니다. 형사들은 장부나 메모를 보고 범죄를 추적하지만, 우린 소네트가 적힌 책에서 범죄의 징후를 알아내지요. 사람들을 지적인 광신이나 범죄로 몰아가는, 끔찍한 사상의 뿌리를 우리는 찾아내야 합니다. p54”

 

1908년 체스터턴이 『목요일 이었던 남자』를 발간할 즈음인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허무주의와 테러리즘의 시대였다. 까뮈의 『반항인』에 의하면, 1878년은 러시아 테러리즘이 탄생한 해이다.

 

「193명의 민중주의자들이 재판을 받은 그 이튿날인 1월 24일, 몹시 젊은 처녀 베라 자쑬리치가 페테르스부르그의 총독 트레포프 장군을 사살한다. 배심원들에 의해 석방되자, 그녀는 연이어 짜아르의 경찰로부터 탈출한다. 이 권총 한 방이 폭포처럼 뒤따를 탄압과 암살의 단초가 되고, 이후 탄압과 암살은 서로 응전하기를 그치지 않거니와, 우리는 오직 권태만이 거기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같은 해에, ‘인민의지당’의 당원인 크라브친스키는 『죽음에는 죽음으로』라는 그의 소책자에서 테러를 원리로 확립시킨다. 원리에는 결과가 따르기 마련이다. 유럽에서는, 독일 황제와 이탈리아 국왕과 스페인 국왕이 암살의 희생이 된다. 1878년에 알렉산더 2세는 정치경찰을 창설함으로써 국가적 테러리즘의 가장 효과적인 무기를 만들어낸다.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러시아와 서구에서, 19세기는 살인으로 점철된다. p186」

 

이어서 까뮈는 허무주의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허무주의는, 하나의 좌절된 종교 운동에 긴밀히 결부된 채, 그리하여 테러리즘으로 끝나고 있다. 전적인 부정의 세계에서, 폭탄과 권총으로써, 또한 교수대로 나아가는 용기로써, 그 젊은이들은 모순에서 벗어나려고 애썼으며 그들이 결여하고 있던 가치들을 창조하려고 애썼다. 그들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 혹은 자신들이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의 이름으로 죽었다. 그러나 그들을 시발로 하여,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것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그 무엇인가 - 사람들은 단지 그 무엇인가가 존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 뿐이다. -를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시키는, 좀더 어려운 습관을 가지게 된다.p187」

 

지고의 가치가 부재한 상태에서 테러리스트들은 미래의 가치, 아직 알지는 못하지만, 도래해야만 할 가치를 위해 총을 쏘고 폭탄을 던졌다. 정의와 사랑의 공동체를 재창조하기 위해 현재의 절대주의를 파괴했던 것이다.

 

체스터턴은 시대의 허무주의에 반하여 기독교의 낙관론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정부주의 중앙의회>가 천지창조의 일곱 요일로 구성되어 있는 것도 그렇고, 가령 이런 문장을 보면 그렇게 느껴진다.

 

“이 남포등이 보이는가? 여기에 새겨진 십자가와 그 안의 불빛이 보이는가? 당신은 이것을 만들지 않았고, 불을 붙이지도 않았다. 당신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들이, 믿고 복종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 쇠에 무늬를 만들었고, 불의 전설을 보존하였지. 당신이 걷는 거리, 입고 있는 옷 모두가 이 남포등처럼 당신의 쓰레기 같은 철학을 부인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당신이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파괴만 할 수 있을 뿐. 당신은 인류를, 세계를 파괴할 것이다. 더 말해 뭐하겠는가. 하지만 이 유구한 기독교의 남포등은 파괴하지 못할 것이다. 이건 당신네 원숭이들의 제국은 절대 찾지 못할 그런 곳으로 갈 것이다! p171”

‘원숭이들의 제국’은 허무주의자들이 신봉한 다윈의 진화론을 빗댄 것 같다. 허무주의자들은 공리주의와 과학적 합리주의를 옹호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체스터턴이 일방적으로 허무주의를 비난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랬다면 이 책은 훌륭한 소설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떠나서, 『목요일 이었던 남자』는 추리소설로만 읽어도 아·주,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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