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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반양장) - 지금 우리를 위한 새로운 경제학 교과서
장하준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어제 또 피케티 기사가 일제히 실렸다. 방한한 피케티가 세계지식포럼의 사전행사로 마련된 '1% 대 99% 대토론회'에서 한 강연 기사인데, 한국의 불평등에 대한 언급이 헤드라인으로 뽑혀있다. 프레시안 기사에는 강연전문과 일대일 문답도 실려 있어 링크해 둔다. 그런데 피케티는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에 분류된 아홉 개의 경제학파 중 어디에 속할까? 그는 자본주의 300여 년의 통계 자료를 분석하여 소득 불평등의 심화를 입증하면서, 부자들에 대한 고율의 누진세와 글로벌 부유세 도입을 주장한다. 부의 불평등이 지나치게 커지면 사회가 위험하므로,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고전주의학파나 신고전주의학파 또는 오스트리아학파와는 거리가 멀다. 합리적인 수준의 부의 격차를 인정하고, 민주적인 해결방식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 마르크스학파는 아니지 않을까 싶다. 국가개입이란 면에서 케인스학파나 개발주의 전통 혹은 제도학파에 가까운 걸까? 어떤 하나의 학파에 속하는지 장하준이 장려하는 것처럼 학파들의 칵테일을 선호하는지 모르겠지만, 장하준의 경제학적 관점과 많이 닮아 보인다. 장하준도 그의 첫 번째 책인 『사다리 걷어차기』부터 지금까지의 여러 책을 통해 국가 개입의 필요성에 관해 꾸준히 주장해 왔다. 그리고 ‘경제는 정치적 논쟁’ 이라는 말을 통해, 경제로부터 정치를 떼어내려고 온갖 수단을 사용해 온 신고전주의학파 등의 자유시장주의자들과는 명백한 전선을 긋고 있다.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는 총 2부로 되어 있다. 1부 <경제학에 익숙해지기>는 지난 리뷰에서 간단히 소개 했다. 2부 <경제학 사용하기>는 6장부터 12장까지, 총 일곱 개의 장으로 되어 있는데, 1부에 비해 좀 더 세부적인 경제학 지식을 담고 있다. 처음 몇몇 까다로운 개념들과 수치들을 견디고 나면, 또 장하준의 책이 원래 그렇듯 술술 읽힌다. 며칠 걸릴지 모른다 생각했는데, 250쪽 정도를 하루 만에 읽을 정도이다.
6장은 통계와 수치에 관한 내용이다. 정치에 관해서는 모두들 한마디씩 거들면서도 경제에 관해서는 자신 있게 발언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통계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이 어려운 통계 프로그램을 돌려 나온 결과라고 주장하면, 빈손만 가지고 반박하기는 힘들다. 물론 객관적 수치가 중요하다. 피케티가 주목받는 이유도 ‘20여 개국의 300년에 걸친 방대한 자료를 분석한 결과’로 입증된 수많은 그래프와 수치들에 힘입은 바 클 것이다. 그냥 맨 입으로, 불평등 때문에 나라 망할지도 모르니 부자한테 세금 왕창 물리자고 했다면 전경련이 나서서 그렇게 길길이 뛰었을 리 없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소리다.
그런데 이 막강한 힘을 가진 통계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다. 뭐 여론조사가 문제가 되면서 많이 알려진 사실이라 비밀이라고까지 하기는 그렇지만, 여하튼 장하준은 구소련의 농담을 들어 통계수치의 맹점을 경고한다. “동지, 2 더하기 2는 무엇이오?”란 질문에 대한, 소비에트연방 국가계획위원회의 통계실장이 되기 위한 정답은 이것이다. “몇이길 원하십니까?” 이것은 통계 결과를 조작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통계에 어떤 조작이 있다면, 그것은 설계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무엇을 대상으로 어떤 방법을 통해 통계를 낼 것이냐에 따라 결과로 나온 수치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 통계라는 말이다. 그러니 수치를 읽을 때는 이것들이 무엇을 말해주는지 뿐만 아니라 무엇을 말해주지 않는지도 따져보아야 한다.
7장이 강조하는 것은 ‘생산’ 의 중요성이다. 현대 사회의 유행 중 하나는 ‘후-’, 소위 'post-'를 붙이는 것이다. 경제학에서도 '산업화 후 사회', ‘post-industrial society’ 에 진입했다는 주장이 널리 퍼져있다. 제조업을 굴뚝 산업이라고 비웃으면서 서비스 산업, 지식경제를 강조한다. 사실 우리도 어느덧 세뇌되어 있다. 선진국에는 이제 공장이 사라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른바 그 통계를 잘 따져 보면, 부자나라들에서는 제조업뿐만 아니라 농업도 여전히 중요시 되고 있다. 어떤 수치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착시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에, 제조업이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고 할 수 있는데, 자세한 것은 책을 꼼꼼히 읽어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불변 가격으로 계산했을 때, 미국과 스위스는 지난 20여 년 사이에 제조업 비중이 5% 증가했고, 핀란드, 스웨덴은 지난 몇십 년 사이에 총생산량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50%나 증가했다. 그런데 영국은 진짜로 제조업 비중이 극적으로 감소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영화 <풀 몬티>나 <빌리 엘리어트>에서 본 대로 노동자들의 몰락이다.
「영국처럼 고가치 서비스를 수출하고 거기서 번 이윤으로 필요한 공산품을 수입해 오면 된다는 것이다. 이 전략은 일정 기간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2008년 금융 위기가 닥치기 전 약 10년 동안 영국은 급속한 탈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도 괜찮은 성장률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 금융 산업의 호황 덕분이었다. 그러나 2008년 위기를 겪으면서 서비스가 성장의 새로운 동력이라는 믿음은 단지 환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이 고생산성 서비스의 많은 부분이 엔지니어링, 디자인, 경영 컨설팅 등 제조업 부문 기업이 주 고객인 ‘생산자 서비스’ 이다. 따라서 제조업 기반이 약해지면 이런 서비스의 질이 떨어져 서비스 수출도 더 어려워진다. p255」
생각해 보면 그렇다. 서비스 아무리 좋아도 서비스 자체를 서비스 할 수는 없다. 무언가 생산품이 있어야 제공하거나 봉사할 것이 있다. 아무리 친절해도 맛없는 식당을 두 번 가기는 싫고, 아무리 시설이 번쩍번쩍해도 한 번 입으면 후줄근해지는 옷을 사지는 않는다. 한때는 서비스로 성공한 ‘스위스’, ‘싱가포르’를 따라해야 한다는 주장이 유행하기도 했다. 그런데 스위스, 싱가포르 경제는 완전히 반대라는 것이 밝혀져 입에 거품 물던 사람들이 머쓱해 지기도 했다. 2000년대 통계 자료를 보면 스위스와 싱가포르는 일본과 함께 1인당 제조업의 부가가치가 세계 3위 안에 항상 들고 있는 나라이다. 스위스가 관광만으로, 싱가포르가 금융만으로 저렇게 잘 먹고 잘 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는 지식경제, 창조경제 타령을 하고 있다. 창조경제가 뭔지는 지금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장하준에 따르면 세계적 추세도 별반 다르지 않다.
「불행하게도 사상적으로는 산업화 후 사회의 담론이 힘을 얻고, 실생활에서는 금융 부문이 경제를 주도하면서 제조업에 대한 무관심은 근래에 와서는 경멸로까지 바뀌었다. 새로운 ‘지식 경제’ 사회에서 제조업은 저임금 노동력을 주무기로 하는 개발도상국에서나 하는 저급한 활동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공장에서 만들어졌고, 새로운 사회 또한 공장에서 만들어질 것이다. 게다가 이른바 산업화 후 사회에서도 이른바 새로운 경제의 동력이라고 여겨지는 서비스 산업은 역동적인 제조업 부문의 뒷받침 없이는 융성할 수 없다. 서비스 산업이 주도해 번영을 이룬 경제의 대명사라고 생각하는 스위스와 싱가포르가 (일본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산업화된 세 나라 중 두 나라라는 사실이 바로 그 증거이다. p267」
8장은 돈, 금융 이야기다. 은행과 주식에 관한 복잡한 설명을 모두 이해하기는 힘들다. 파생상품은 만든 사람도,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 모두 모르고 거래한다는 말까지 있으니, 내가 뭘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2008년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여기저기서 사실은 나도 모른다는 전문가들의 고백이 터져 나왔다. 상품 하나를 이해하려면 투자자가 10억 페이지가 넘는 정보를 흡수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아무도 상황을 알지 못했고, 상황을 통제하지 못했던 것이다. 장하준은 금융개혁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으로 금융 시스템의 단순화를 꼽는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어야 안전한 금융거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도 은행에 가면 은행원 자신도 알지 못하는 복잡한 상품들을 권하고 있다. 나도 칠팔년 전 그런 상품에 가입한 적이 있다. 당연히 뭔지도 모르면서 이율 높고 안전한 상품이라는 말만 믿고 들었다. 그러고도 그게 진짜 무엇이었는지 이번에야 알았다. 책을 읽다가 ‘트랑슈’ 라는 말을 발견했는데, 내가 들었던 상품이 ‘KB방카슈랑스’ 였던 것이다. ‘부채 담보부 증권’ 의 일종으로, 주택대출 같은 것을 해주고 은행이 받은 채권들을 묶어서 금융 상품으로 만든 것인데, 이게 위험하니까 다시 그 위험도에 따라 분할해서 증권을 발행한 것이다. 트랑슈란 ‘얇게 저민 조각’이란 뜻으로 상위 트랑슈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상품이고, 하위 트랑슈는 엄청 위험한 상품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나는 뭔지도 모르고 미국 서브프라임 주택 담보 대출자의 채권을 산 셈이다. 이 미국인 대출자가 돈을 못 갚으면 내가 매달 꼬박꼬박 부었던 돈도 공중으로 날아간다는 뜻이다. 그런 식으로 날아간 돈이 얼마인지는 굳이 밝히지 않겠지만, 그걸 회복하고 원금을 찾는데 몇 년이 걸렸는지 모르겠다.
9장은 불평등과 빈곤에 관한 내용이다. 장하준이 신고전주의 학파와 대립한다고 해서 마르크스학파는 아니다. 그는 불평등이 너무 심해도, 또 너무 적어도 좋지 않다고 한다. 불평등이 극도로 높아도 또 극도로 낮아도, 경제 성장을 저해하고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다고 보기 때문이다. 피케티와 마찬가지로 장하준은 1980년대 이후 대부분의 국가에서 소득 불균형이 심해졌다고 본다. 그 중 영국과 미국이 가장 두드러지는데, 이 두 나라가 바로 신자유주의 정책의 선봉에 서 있다.
10장은 일과 실업에 관한 이야기로, 상식적인 수준의 내용이다. 브라질의 대주교 돔 헬더 카마라의 말이 인용되어 있는데 매우 인상 깊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면 사람들은 나를 성인이라고 부른다. 왜 그들에게 음식이 없는지를 물으면 사람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 부른다.” 우리가 진짜 해야 할 일은 인도주의적인 지원이 아니라 바로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예전에 어떤 분의 블로그에서 읽고 갈무리 해둔 브레히트의 시가 다시 생각난다.
<노동자가 의사에게 하는 말>
제가 누더기 옷을 벗고 선생님 앞에 서면,
선생님은 저의 벗은 몸을 구석구석 진찰하십니다.
제가 아픈 이유를 찾으시려면,
누더기 옷을 힐끗 보는 것이 더 나을 겁니다.
저의 몸이나 옷이나,
같은 이유 때문에 닳으니까요.
제 어깨가 아픈 것은 습기 때문이라고 그러셨지요.
그런데 저희 집 벽에 생기는 얼룩도 그렇다고 하더군요.
저의 어깨나 벽이나
같은 이유 때문에 얼룩지니까요.
그러니 말씀해주세요.
그 습기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거지요?
11장은 국가개입, 정부의 역할에 관한 논쟁이다. 신고전주의학파 같이 경제의 탈정치화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정부 실패’ 논리를 내세운다. 정부란 탐욕스러운 관료들이 자기 잇속에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에 정부가 개입하면 경제 전체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에 희생당하여, 경제가 파탄난다는 주장이다. 반대편에는 ‘시장 실패’ 논리가 있다. 시장은 그대로 둘 때 제일 잘 돌아가니까, 최소한의 개입 외에는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 신고전주의학파 등의 논리인데, 역사적으로 따져보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1945년~1973년이 자본주의의 황금기인데, 이때는 케인스학파의 이론이 경제 정책의 주를 이루던 때이다. 1980년~현재까지는 신고전주의학파 시대로, 이 시기보다 그 이전의 자본주의의 황금기 때가 경제 성장률이 높았다는 사실이다. 시장은 국가 개입 보다 자유방임에 의해 더 쉽게 실패한다는 것이 ‘시장 실패’의 논리이다. 장하준의 결론은 정부 실패도 일리가 있지만, 신고전주의자들처럼 경제에서 정치를 떼어내는 것은 불가능 할뿐 아니라 반민주적이라는 주장이다. 이 장에서 명시적으로 국가개입을 주장하지는 않지만, 장하준은 예전부터 일관되게 국가개입의 필요성을 역설해 왔다.
「민주 국가에서 정치란 국민이 끼치는 영향력에 다름 아니다. 시장은 ‘1원 1표’ 원칙으로 움직이는 반면 민주 정치는 ‘1인 1표’ 원칙으로 움직인다. 따라서 민주 사회에서 경제를 탈정치화하자는 것은, 결국 돈을 더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 사회를 움직이는 힘을 더 많이 주자는 반민주적인 주장이다. p381」
그리고 원래 경제학의 이름은 ‘정치경제학’ 이다. 경제를 정치적으로 관리하는 것에 대한 연구가 경제학의 본래 의미이다. 정치경제학에서 정치를 떼어낸 것은 신고전주의학파이다. 그들이 승계한다고 주장하는 고전주의학파들도 정치경제학이라고 불렀다. 신고전주의학파는 경제에서 정치를 제거하고 순수 과학을 지향함으로써 실제로는 경제의 윤리적 측면을 없애버린 것이다. 그러나 경제의 탈정치화는 궁극적으로 불가능하다. 시장 자체가 정치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무엇이 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고, 누가 어떤 방식으로 거래를 하는지에 대한 규칙들이 필요한데, 이것들을 결정하는 것은 정치의 영역이다. 노예의 상품화, 아동 노동, 마약 판매, 노동 시간 같은 것들은 시장의 필요에 의해 제한 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윤리와 투쟁에 의해 규제되었다. 담뱃값 인상 역시 마찬가지다.
12장이 다루고 있는 것은 국제 무역이다. 세계화에 따라 무역은 가파르게 자유화 되었다. 자유 시장주의자들은 모든 국경을 개방하고 모든 상품이 자유롭게 이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들이 입을 다무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노동 상품이다. 자유 이민을 옹호하는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극히 드물다.
그런데 노동력의 이동은 우파 포퓰리즘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도 노동현장에서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의 노동자들과 알력이 심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값싼 노동력의 대거 유입으로 안 그래도 살기 어려운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처지가 더욱 열악해 진다는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유입은 임금을 하락시키려는 자본가들의 필요 때문인데, 싸움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1930년대나 요즘처럼 경제 상황이 어려울 때는 우파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의 선동으로 불안해진 노동자들이 자신의 문제가 많은 부분 이민자들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믿게 된다. 그러나 오르지 않는 임금과 악화되는 노동 환경은 기업 전략과 정부 경제 정책의 영역에서 더 큰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즉 기업들의 주주이익 극대화 전략이 노동자들을 쥐어짜고, 잘못된 거시 경제 정책으로 인해 과다한 실업이 발생하며, 숙련 노동자들을 훈련시키는 시스템이 정비되지 않아 자국 노동자들의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주류 정치인들의 능력과 의지 부족으로 많은 부자 나라에서 반이민 정책을 기치로 내건 정당들이 생겨나 인기를 끌고 있다. p425」
내가 가끔 경제 서적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경제에서 정치를 떼어낼 수 없는 것처럼 경제를 말하지 않고는 그 어떤 것도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사교육 문제도, 일베의 발호도, 세월호 사건도, 심지어는 지역별 소방관 현황에도 경제적 문제가 깔려 있다. 묻지마 범죄는 말할 것도 없다. 역사책을 보아도 소설책을 보아도 경제가 빠져 있는 인간의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방카슈랑스에 속아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도 경제의 ABC는 필요하다. 그럼에도 경제학이란 아무래도 거리감이 느껴진다.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려면 머리가 깨질 것 같고 눈알이 빠질 것 같다. 은행이 돈도 없이 실제 예금의 수십, 수백 배가 넘는 돈을 마구 빌려 준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고, 하루아침에 수백억의 자산이 올랐다 내렸다 하는 주식 시장이 근절해야 하는 도박이 아니라 건전한 금융 거래라는 것도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다. 경제라는 것이 거대한 사기 위에 지어 올린 마천루가 아닌가 싶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그런 허상, 가짜가 오늘 나의 밥상과 옷차림을 결정짓고, 내일 올려주어야 할 전세를 결정한다. 이것이 실재는 아닐지라도 현실이다. 그러니 오늘도 나는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를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