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오 영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박영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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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세기 서양 고전을 읽을 때, 항상 놀라는 것이 있다. 한편에는『레미제라블』과 같은 너무 비참한 세계가, 한편에는 『오만과 편견』같은 화려한 귀족사회가 그려져 있어, 이것이 어떻게 같은 시대일까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르주아의 시대라는 19세기는 정말 그랬다. 빈부의 격차가 정점에 이르러, 상위 10%가 90%의 부를 차지했다. 10%의 상류사회와 90%의 하류사회로 딱 양분되어서, 작가가 어디에 시선을 뒀는가에 따라, 19세기는 향락과 사치의 시대가 될 수도, 빈곤과 절망의 시대가 될 수도 있다.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은 10%의 상류사회 혹은 1%의 최상위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선택받은 주류사회에 진입하기 위한 비주류 ‘라스티냐크의 수업시대’ 가 그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라스티냐크를 이끄는 두 명의 선생은 사촌누이인 보세앙 자작부인과 같은 집의 하숙생인 보트랭이다. 자작부인의 살롱은 파리 사교계의 꿈의 무대이다. 젊은 라스티냐크를 후원하기로 한 자작부인은 그에게 성공의 발판으로 뉘싱겐 남작부인을 추천한다.

 

「자! 라스티냐크씨, 세상이란 이런 거예요. 세상을 알맞게 다루세요. 당신은 출세하고 싶지요? 내가 돕겠어요. 여성들이 얼마나 깊이 타락했으며, 남자들이 얼마나 볼썽사나운 허영심에 빠져 있는지를 헤아리게 될 거예요. ․․․․․․․․․․․․․․․․․․ 역마다 바꿔 타고 버리는 역마처럼, 남자와 여자를 그렇게 대하세요. 그러면 당신은 욕망의 꼭대기에 도달하게 될 거예요. 아실 테지만, 당신에게 관심 가진 여인이 아무도 없다면, 당신은 사교계에서 아무것도 아니지요. 당신에게는 젊고, 돈 많고, 우아한 여성이 필요해요. 당신이 진실한 감정을 가졌다면 보물처럼 숨겨두세요. 결코 그것을 남이 알아채게 해서는 안 돼요. 만약 그러면, 당신은 파멸이에요. 」

 

정체가 모호한 보트랭은 10여 페이지에 걸친, 일명 ‘보트랭의 설교’를 통해 라스티냐크에게 거액의 예비 상속녀인 빅토린 양을 유혹하도록 부추긴다. 보트랭은 악당이지만 그의 설교에는 19세기 사회의 진실이 축약되어 있다. 『21세기 자본』의 피케티가 말한 것처럼 그것은 노동이냐? 상속이냐? 의 문제이다. 라스티냐크는 법률가로 성공하기 위해 대학을 다니고 있지만, 보트랭은 그것이 한낱 환상에 불과함을 지적한다. 19세기의 프랑스 사회는 노동을 통해 상류사회에 진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고리오 영감』의 배경은 1819년 파리다. 라스티냐크는 1800년 전후로 태어났을 것이다. 당시 상위 1% 노동소득자가 얻는 생활수준은 노동소득 하위 50%가 얻는 생활수준의 10배 정도가 된다. 라스티냐크가 성공한 법률가가 된다 해도 하층민의 10배 정도의 삶을 누릴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상위 1%의 상속인이 얻는 생활수준은 하층민의 25배가 넘는다. 수십 년을 노력한 끝에 사오십 살이 되어 검사장이나 파리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변호사가 되어도, 당장 빅토린 양과 결혼해서 얻는 생활수준의 절반에도 미칠 수가 없다. 무엇보다 그렇게 법률가로 성공하기가 힘들다. 파리에는 좋은 일자리가 오만 개밖에 없기 때문이다. 21세기 우리의 처지와 비슷하다. 우리가 개미굴로 표현하는 것을 발자크의 시대는 거미 항아리로 묘사하고 있다.

 

「출세하기 위해서 자네가 해야 할 노력과 필사적 싸움이 어떤가를 판단해 보게. 항아리 속에 들어 있는 거미들처럼 자네들은 서로를 잡아먹어야 하네. 왜냐하면 좋은 자리가 오만 개밖에 없기 때문이야. 이곳 파리 사람들이 어떻게 출세하는가를 알고 있나? 천재성을 떨치든지 아니면 능수능란하게 타락해야 하네. 사회 집단 속으로 대포알처럼 뚫고 들어가거나 페스트 균처럼 스며들어 가야 하네. 정직이란 아무 소용이 없네. p148」

 

천재가 아니면 타락밖에 방법이 없다. 보세앙 자작 부인의 추천이나 보트랭의 유혹이나, 다를 것이 없다. 자작부인은 젊고, 돈 많고, 우아한 남작부인의 애인이 되기를 권하고, 보트랭은 100만 프랑을 상속받을 수 있는 빅토린양과 결혼할 것을 제안한다. 단 빅토린 양이 상속녀가 되기 위해서는 현재의 상속자인 오빠가 죽어야 하고, 라스티냐크는 그 음모를 묵인해야 한다.

 

「보세앙 부인이 나에게 완곡한 표현으로 설명한 것을 저 사람은 노골적으로 말해 주었어. 그는 내 가슴을 마치 쇠갈고리로 찢어놓은 것 같아. 나는 왜 뉘싱겐 부인 에게 가고 싶은 걸까? 저 사람은 내가 생각들을 가슴속에 품자마자 곧 그것들을 알아버린단 말이야. 어쨌든 한마디로 말해서 저 악당은 다른 사람들이나 책들이 나에게 얘기해 준 것보다도 더 많은 미덕을 가르쳐 주었어. p158」

 

‘라스티냐크의 딜레마’는 19세기가 자본수익률이 노동수익률 보다 훨씬 높은 시대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해서 얻는 소득의 성장률은 1%정도인데, 자본은 해마다 5%의 성장률을 보인다. 지금으로 치면 연봉이 1000만원 올랐는데, 전세 값은 5000만원이 오른 셈이다. 이렇게 되면 노동소득자는 전세를 줄이거나, 월세로 가거나, 외곽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실질적으로는 소득이 오른 것이 아니라 내린 것과 같다. 거꾸로 임대업자는 일을 하지 않고도 노동소득자의 5배 수익을 올릴 수 있다. 빈부격차가 심화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피케티는 이런 현상을 과거가 미래를 잡아먹는다고 표현한다. 보트랭의 설교에 대입하자면 상속은 과거이고 노동은 미래이다. 상속이 노동을 잡아먹는 사회이므로, 라스티냐크가 아무리 출세한 법률가가 된다고 해도 빅토린양의 백만 프랑에 잡아먹히게 된다.

 

그러나 이제 막 상류사회를 밟은 라스티냐크은 보트랭의 음모에 저항한다. 보트랭은 뉘싱겐 남작부인을 통해 출세하려는 라스티냐크나 음모를 꾸미는 자신이나 결국에는 다르지 않음을, 똑 같은 범죄임을 역설한다.

 

「왜냐하면 자네가 연애라도 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성공하겠다는 말인가? 여보게 학생, 덕성이란 잘게 쪼개지지 않네. 있거나 아니면 없거나 일세. 사람들은 우리의 죄를 참회하라고 말하네. 게다가 덕성 때문에 깨우쳐서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도 또한 멋진 이론 아닌가! 사회가 설치한 사다리 난간에 이르기 위해서 여성을 꼬드기고, 자녀들 사이에 불화의 씨를 던지며, 각자의 쾌락과 이해를 목적으로 남모르는 장소에서 저지르는 모든 파렴치한 행위들이 자네는 신념과 희망과 박애에서 비롯된 행위라고 생각하는가? 어린애한테서 재산의 반을 하룻밤에 빼앗는 신사는 어째서 두 달 동안의 징역을 받고, 위급한 경우에 천 프랑의 지폐를 훔친 불쌍한 녀석은 어째서 도형장으로 끌려가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자네들의 법일세. 어느 법조문 하나도 부조리하지 않은 게 없네. 장갑을 끼고 기회주의자의 목소리를 내는 신사는 살인을 해도 피도 흘리지 않고 속여서 어물쩡 넘겨버리네. 살인범은 자물쇠를 열 때 쓰는 작은 지렛대로 문을 연다네. 이 두 가지가 모두 밤에 이루어지는 범죄일세! 내가 자네에게 제의한 것과 자네가 언젠가는 하게 될 행동 사이에는, 피를 많이 흘리느냐 적게 흘리느냐의 차이밖에 없는 것일세. 자네는 이 세상에 어떤 고정된 게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인간들을 경멸하게. 그리고 법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을 보아 두게. 겉으로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큰 성공의 비밀은 바로 그것이 망각된 범죄라는 것이네. 왜냐하면 그 범죄는 정확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일세. p156~7」

 

보트랭의 장광설에도 불구하고 처음 라스티냐크이 선택한 것은 피를 적게 흘리는 범죄다. 그러나 고리오 영감의 비참한 최후와 그 딸들의 비정함을 겪은 라스티냐크는 ‘투쟁’을 선언한다. 투쟁은 복종, 반항과 함께 이 사회의 세 가지 모습이라고 라스티냐크가 생각했던 것이지만 어느 것도 결심하지 못했었다. 복종은 가정을, 투쟁은 세상을 반항은 보트랭을 의미한다. 복종은 귀찮았고, 반항은 불가능했으며, 투쟁은 불확실했기 때문이다. 고리오 영감의 무덤에서 라스티냐크는 파리의 화려한 불빛을 내려다보며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 고 우렁차게 외쳤다. 그리고 뉘싱겐 부인의 집으로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뉘싱겐 부인은 라스티냐크의 애인이자 고리오 영감의 둘째 딸이다. 마지막 애원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임종도 매장도 보러오지 않았다. 고리오 영감의 최후를 지켜보며 딸들의 배반과 타락을 몸서리치도록 겪은 라스티냐크는 아마도 뉘싱겐 부인에게 일말의 애정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라스티냐크는 파리와의 대결을 결심하며 뉘싱겐 부인에게로 향한다. 왜? 아마도 보세앙 자작부인이 해 준 충고를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역마다 바꿔 타고 버리는 역마처럼, 남자와 여자를 그렇게 대하세요. 그러면 당신은 욕망의 꼭대기에 도달하게 될 거예요.” 뉘싱겐 부인은 라스티냐크의 첫 번째 역마가 될 것이다.

 

라스티냐크는 어떻게 사교계를 정복한 것일까? 『고리오 영감』의 마지막은 우리에게 많은 상상을 자극하지만, 사실 상상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발자크는 처음으로 ‘인물 재등장 기법’ 을 시도했다. 여러 소설에서 똑 같은 인물들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을 말한다. 라스티냐크는 스물다섯 편에 다시 등장한다. 그러니 아마도 우리는 연 수입 이만 프랑의 여자와 결혼한 라스티냐크, 장관이 된 라스티냐크 등 라스티냐크의 일생을 다양한 소설로부터 짜맞추어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발자크는 입헌군주제와 카톨릭을 신봉했다. 19세기 혁명의 격동기 속에서 발자크의 세계관은 다분히 반동적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에는 귀족이 부르주아보다 두 배나 많고, 부르주아는 민중보다 세 배나 많다. 그에게 민중은 배경으로 그려질 뿐이다. 그럼에도 발자크는 엥겔스가 말했듯 ‘진보적 냄새를 풍기는 예술가’ 이다. 부르주아 사회를 예리하게 분석함으로써, 이 계급의 부상과 프랑스 사회의 나갈 방향을 누구보다 재빨리 인식하고 깊이 있게 묘사했다. 발자크에게 혁명적 요소는 전혀 없지만, 사회구조적 모순 속에서 전형적 인물을 창조해내는 과정에서 역사적 진실을 드러내었다. 누구의 말인지 모르겠지만 <작품해설>에는 발자크에 대한 이런 평가가 인용되어 있다.

 

「귀족은 단순히 존재함으로써 귀족일 수 있으나 부르주아지는 모든 성공과 실패의 유동성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존재의 근거를 만들어가야 할 긴박한 사회적 투쟁 속에 휘말려 있다. 발자크는 안정되고 교양 있는 전통적인 부르주아지에 속하지 않았으며 바로 대혁명에 의해서 창출된 서민적인 부르주아지에 속하였다. 그는 수세기의 성장 끝에 비로소 19세기에 이르러 명실상부한 부르주아 세계를 표현한, 진정한 의미에서 가장 부르주아적인 작가인 동시에 이 계급의 철저한 자기 인식과 탐구 그 자체에 의하여 이 계급에 대한 최대의 비판자가 되었던 작가였다. p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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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훔치기 - 왜 예술은 우리를 눈멀게 하는가 What's Up 7
다리안 리더 지음, 박소현 옮김 / 새물결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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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반지는 사실 우리를 사로잡는 사악한 눈이다. 반지는 그것을 가진 사람을 꼼짝하지 못하게 사로잡아 사우론의 응시 아래 놓는다.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보여 지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공포다. 슈퍼맨이 매번 어벙한 클라크 기자로 돌아왔던 이유도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인간은 사회적 페르소나를 연기할 때, 즉 가면을 쓰고 있을 때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 부지불식간에 누군가 방문을 벌컥 열면 별 짓을 하지 않았는데도 우리는 수치심과 불안감을 느낀다.

   

고대의 이론들은 우리가 만화에서 보는 것처럼 눈이 빛을 내뿜는다고 믿었다. 그러

나 시각의 기하학은 데카르트의 유명한 그림처럼, 눈이 빛을 방출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빛을 수용하는 기관이라 보았다. 그렇다면 빛을 뿜는 사악한 눈은 사라진 것일까? 1911년 루브르 미술관에서 <모나리자>를 훔친 페루지아는 모나리자가 자기를 향해 미소를 짓는 듯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모나리자가 그를 응시했고, 그는 그것에 사로잡혔다는 것이다. 파울 클레는 “숲을 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다, 나무들이 나를 보고 있다.” 고 말했다. 클레가 메뉴판에서 신문지의 여백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던 이유는 이렇게 무언가에 응시당하고 있는 느낌 때문이었다. 이것이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는 이유다. 그림은 사악한 눈을 자신으로부터 돌리게 만드는 일종의 덫이다. 화가들은 살아남기 위해 이미지나 물건을 떨어뜨린다. 도망자가 일부러 돌을 던지거나 소리를 내서 추적자를 다른 곳으로 유인하는 것처럼 말이다. 라캉은 몇몇 시각 예술은 사악한 눈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무장해제시키기 위한 스크린으로 기능한다고 보았다. 회화는 눈을 위해 덫을 놓는 필사적인 행위이다.

 

보통 라캉의 스크린은 이중으로 기능한다. 그것은 가리개인 동시에 지시자이다. 미술사의 가장 유명한 일화인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의 핵심은 이것이다. 새들은 제욱시스의 포도에 속아 넘어갔지만, 제욱시스는 파라시오스의 베일에 속아 넘어 간다. 베일과 스크린은 그 뒤의 대상을 감추는 동시에, 그 뒤에 무엇인가가 있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것은 기만이다. 제욱시스는 엄청난 그림이 있을 것이라는 이미지에 속았다. 이미지는 인간의 욕망이 투영하는 것들을 반영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대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예술적 이미지의 속성은 현실에 대한 모방이 아니라 시선을 유혹하고 기만하려는 노력이다. 욕망의 궁극적 대상은 금지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불가능성이기 때문이다. 파라시오스의 베일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텅 빈 공간만이 있을 뿐이다.

  

 

역설적이게도 <모나리자>는 그것이 사라진 이후에야 불후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남녀노소 수많은 프랑스인들은 그림이 아니라 그림이 사라진 것을 보려고 루브르 미술관으로 몰려들었다. 이전에 한 번도 모나리자를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말이다. 군중들이 보려고 몰려든 것은 모나리자가 사라지고 남은 텅 빈 공간이었다. 모나리자가 거기 있기 때문이 아니라 거기 없기 때문에 보러 간 것이다. 모나리자는 ‘잃어버린 숭고한 대상’ 이 되었다.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이던 브레즈네프가 ‘못생겼지만 똑똑해 보이는 여자’ 라고 했던 그 그림이 말이다. 사람들은 이 텅 빈 장소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프랑스의 한 신문이 보도한 대로 루브르가 재개관했을 때 “군중들은 다른 그림은 보지 않았다. 그들은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성스러운 <모나리자>가 미소 짓고 있던 먼지투성이 공간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그리고 열광적으로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조콘다>가 거기 있는 것보다 사라진 것이 훨씬 더 흥미진진한 일이었다.” 라캉의 주장에 따른다면 <모나리자>가 도난당한 뒤 루브르에 몰려든 군중들은 미술작품의 진정한 기능을 입증해 주었다 미술작품의 진정한 기능이란 물物 Das Ding 이라는 텅 빈 장소, 다시 말해 미술작품과 그것이 점하고 있는 장소 사이의 틈새를 환기시켜 주는 것이었다. 텅 빈 공간을 보러 몰려든 군중들에 대해 한 신문에서 말한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미술작품 자체를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미술작품이 차지하고 있는 장소 때문에 미술작품을 좋아한다.” 그리고 이 장소는, 적어도 『르 피가로』에 따르면, “무시무시하게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거대한 공백” 이었다. p133~5」

 

 

物 Das Ding 이란 일종의 ‘부재하는 원인’ 이다. 이글대는 우리의 욕망은 사악한 눈과 같다. 이 사악한 눈, 욕망을 사로잡은 물物 Das Ding 은 그러나 덫이다. 클레의 강박적인 그림이자 파라시오스의 베일이다. 이 대상은 결코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욕망은 원초적으로 충족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의 맛을 찾아다니는 그 어떤 미식가도 ‘절대 맛’을 찾을 수 없고, ‘절대 음’을 위해 피를 토하는 창극인도 경지에 이를 수 없다. 어떤 영웅도 금지된 대상을 손에 넣을 수 없었던 것은 신이 금지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애초에 부재하기 때문에, 불가능성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물物 Das Ding이 텅 빈 장소여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떤 실체적 대상도 텅 빈 장소 혹은 욕망의 베일을 대신할 수 없다. 최고의 덫은 텅 빈 물物 Das Ding이다. 한 번도 모나리자를 본 적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먼지투성이의 텅 빈 장소에 열광했던 이유가 이것이다. 우리의 욕망이 어떤 실체적 대상에 절망할 위험 없이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은 사회가 보지 못하도록 금지한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을 찾는다고 주장했다. 애초에 결코 존재한 적이 없는 것을 찾으려는 노력이야말로 너무나 인간적인 특징이 아닌가? 그러므로 2여년 뒤 모나리자가 돌아왔을 때 사람들의 기이한 반응은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

 

「<모나리자>가 도난당했을 때, 진짜 <모나리자>는 이미 수년 전에 도난당해서 없고, 이번에 도난당한 <모나리자>는 모조품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모나리자>가 다시 루브르에 돌아 왔을 때 그것은 진짜 <모나리자>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엄청나게 회자되었다. 이러한 추측들을 쓸데없는 어림짐작으로 간주하는 대신 장소와 그것을 채우고 있는 요소, 즉 욕망의 텅 빈 공간과 욕망을 충족시켜 줄 것이라 주장하는 모든 대상들 사이의 필연적인 틈새가 초래한 구조적 결과로 해석하는 것은 어떨까? 무언가가 항상 우리에게 대상과 장소 사이의 그러한 틈새를 환기시켜 줄 것이다. 프로이트에게는 그 장소가 결코 존재한 적 없는 대상의 장소라면 모든 경험적 대상은 그 장소를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p171」

 

사람들이 진짜 모나리자를 거부하는 것은 당연할 지도 모른다. 모나리자가 사라지고 남은 텅 빈 장소에 사람들이 열렬히 투여했던 그 욕망을 결코 진짜 모나리자가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진짜는 진짜 대상이 아니라 진짜에 대한 갈망 혹은 욕망 또는 환상이기 때문이다.

 

「완성된 것은 실제로 결코 성취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완성된 것이라는 이상은 미완성 된 대상들을 통해서만 희구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예술은 결코 눈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수 없다는 점에서 미완성이다. 즉 어떤 예술도 눈이 추구하는 것을 보여 줄 수 없다. p238」

 

사우론의 눈, 사악한 욕망의 눈은 결코 충족을 모른다. 그러므로 욕망은 끊임없이 완성을 미룬다. 히스테리증자와 같이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어요.’ 라고 말한다. 베일 뒤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텅 빈 장소에서 욕망이 보는 것은 욕망 그 자체뿐이라는 것을, 욕망이 만든 환상이라는 것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사악한 눈은 역설적이게도 보지 않으려 한다. 욕망이 눈멀어 있기 때문이다. 베일 뒤의 無 그 자체를 똑 바로 바라보게 될 때 우리를 구성하던 환상의 전체 틀이 무너진다. 좌표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것이 라캉이 말하는 ‘환상을 횡단하기’ 이다. 욕망은 환상의 횡단을 거부하지만, 근본적인 틀을 뒤바꾸기 위해서는 반드시 환상을 건너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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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10-22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최고입니다. 그렇잖아요. 이 책 바구니에 담고 관심을 가지는 중인데 이렇게 만나네요.....요즘 반값 할인을 하거든요....

말리 2014-10-22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반값하길래 얼른 샀습니다 ㅎ. 지젝보다 친절하고 훨씬 쉬워요. 이 책 내용과 어디선가 제가 읽었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마구 섞어 써서 책읽으시면 다르다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어요ㅎ;
 
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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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부재’ 가 언제 적 이야긴데, 아직도 아버지 애가哀歌? 사진만 얼핏 봤던 작가소개를 다시 보니, 1980년생이다. 큰조카랑 동갑이다. 그러고 보니 조카가, 우리가 IMF 직격탄 세대야, 이모, 하던 기억이 난다. 1997년에 조카는 아마도 고등학생이었겠다. 아버지의 권위와 역할이 눈앞에서 무너져 가는 모습을 가장 예민한 시기에 보아야 했을 것이다. 등록금이 버티고 있는 대학교는 생존의 현장이었을 것이고, 취업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자. 


 나는 1997년에 대한 좀 색다른 기억을 갖고 있다. 나라가 폭삭 망할 것이라 아무도 짐작조차 못했던 그 해 추석, 나는 버스투어 팀에 끼여 십 여일 가량 유럽 관광을 했다. 스무 명 남짓한 관광 팀의 대부분은 정년퇴직을 전후한 연배였는데, 같은 버스에 여러 날을 부대끼다 보니, 하기 싫은 자기소개도 해야 되고, 물 사오기 같은 소소한 심부름도 했다. 다양한 이력을 가진 그 분들 중에서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은 분이 있다. 아들은 학원 강사고 본인은 주식으로  많은 수익을 냈다고 했다. 힘들게 회사는 뭐 하러 다니느냐고, 학원을 해야 돈을 번다는 조언도 하셨는데, 그 분이 흔들리던 버스에서 마이크를 쥐고 주식 예찬론을 펴던 것이, 연이어 터졌던 IMF 때문에 더욱 인상 깊게 남았다. 가진 돈을 모두 주식에 넣었던 그 분은 IMF 이후 어떻게 되셨을지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난다. 성실히 일만하다, 돈이 돈을 버는 신천지를 발견한 생초짜의 열변에,  슬몃 혀를 차는 분들도 계셨지만, 첫 인사에서 ‘나, 이대 나왔어요.’ 하던 사모님 보다는 훨씬 좋았다.  1997년의 가을은 그랬다. 너도나도 돈만 있으면 주식투자를 하고, 흥청거렸다. 그래서 그해 겨울은 더욱 더 혹독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아비들에게도 그리고 그 당당했던 아비를 기억하고 있는 아이들에게도. 


 2003년, 갓 스무 서넛이 되었을 김애란 작가가 더듬고 있는 아비가 IMF 이전의 든든했던 아비인지, IMF 따위와 아무 상관이 없는 아비인지, 나는 모르겠지만, 포레스트 검프처럼 세계 곳곳을 달리고 있을 아비를 상상하며 떠난 아비를 기다리는 그녀의 책에서 나는 IMF를 통과하며 보아야 했던 수많은 아비들의 몰락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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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인 앨리스씨』를 읽고 《이동진의 빨간 책방》을 들었다. 『야만적인 앨리스씨』와『파씨의 입문』의 작가 황정은이 직접 나왔다. 약한 허스키에 성큼성큼한 그녀의 목소리가 작품보다 나는 더 매력적이었다. 상기된 두 호스트는 작품의 내용보다 작가와 그 주변 이야기 그리고 작품의 형식에 열을 올렸다. 사실 내용은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흔하다. 《그것이 알고 싶다》나 《궁금한 이야기 Y》에는 훨씬 끔찍하고 잔혹한 아동살해, 아동학대 사건들이 많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물론 작가는 폭력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어떻게 폭력을 내화하고 폭력 속에 매몰되는지 아니면 폭력에 맞설 수 있는지 질문하며, 독자를 그 물음 속으로 끌어 들인다.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폭력은 특히 가정폭력은 인간을 파괴한다. 어린 피해자가 불가항력일 때 당연히 그렇지만, 피해자가 분연히 주먹을 쥐고 돌아서 그 폭력을 되돌릴 때 더욱 그렇다. 존속상해는 근친상간에 못지않은 금기이다. 오이디푸스는 그러므로 세계사에 가장 비참하고 비극적인 인물이 되었다. 아버지를 향한 무자비한 발길질로 파괴되는 것은 아버지의 육체가 아니라 발길질하는 자식의 영혼이다.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차마 발길질 대신 씨발년이라는 욕설로 이 되갚음의 폭력을 승화한다. 황정은은 백번이 넘는 ‘씨발’ 질에도 불구하고, 앨리시어를 극한으로 몰고 가지는 못한다. 차라리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가 더 독했다.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읽고 특이했던 것은 작품의 시점이었다. 나는 빨간책방의 수다스런 호스트들이 굉장히 파고들 줄 알았는데, 생각만큼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다. 작가 황정은은 무심하게 그렇게 써야할 것 같아서 그랬단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는 3인칭 시점으로 쓰여 있다. 그런데 사실은 1인칭 이다. 앨리시어는~, 앨리시어는~ 하고 앨리시어를 따라가는 제3의 시선이 말을 하지만, 이 삼자는 사실 앨리시어 자신이다. 이 책의 첫 머리에 앨리시어의 두 인칭으로의 분리가 마치 회화적 아니 영상처럼 표현된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돌이켜 보니 그렇다.

 

내 이름은 앨리시어. 여장 부랑자로 사거리에 서 있다.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그대를 찾아 머리를 기울여 본다. 부채꼴로 펼쳐진 거리의 한쪽 모퉁이에서 다른 쪽 모퉁이까지 천천히 훑어본다. 고깃집과 카페와 각종 대리점과 백화점이 있다. 사거리 중앙엔 이 지점에 무언가 묻혔다는 표식처럼 열십자로 횡단보도가 그려져 있다. 신호가 바뀌면 사방에서 사방으로 사람들이 길을 건널 것이다. 앨리시어는 그들 가운데서 기다린다. 앨리시어의 복장은 완벽하다.

 

첫째 줄의 두 문장은 1인칭 앨리시어다. 그리고 둘째 줄부터 앨리시어는 3인칭으로 서서히 분리되어 마침내 여섯째 줄에 이르면 완벽하게 3인칭으로 변해있다. 마치 몸에서 스르륵 빠져나온 영혼이 1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횡단보도 위의 3인칭 육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앨리시어의 영혼과 육체가 1인칭과 3인칭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 의하면, 여기에 또 하나의 인칭이 호출되고 있다. -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그대, 2인칭 독자를 향한 1인칭 앨리시어의 부름이다. 단순히 보자면 이 책은 앨리시어가 독자에게 하는 말이자 추궁이다. 나는 이렇게 살았는데, 당신들은 무엇을 했나!

 

시점의 분리라는 특이한 서술법을 나는 처음 보았는데, 요즘 문단에서 드물지 않은 기법인지 굉장히 독창적인지 것인지 모르겠다. 여기서 내가 떠올린 것은 ‘발화행위의 주체’와 ‘발화 내용의 주체’ 혹은 ‘언표행위의 주체’와 ‘언표된 주체’ 의 분리이다. 말하자면 1인칭 앨리시어는 발화행위의 주체이고 3인칭 앨리시어는 발화 내용의 주체다.

 

‘나는 밥을 먹고 있다’ 라는 단순한 문장에서도 주체의 분리를 볼 수 있다. 밥을 먹고 있는 ‘나’는 발화 내용의 주체다. 이 말을 하는 나는 발화행위의 주체다. 이 두 주체가 하나인 것 같지만, 사실 주체는 말을 통해 분열된다. 주체의 분열은 흔히 거짓말쟁이의 역설이라고 하는 것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나는 거짓말쟁이다.’ 발화내용이 참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발화내용의 주체는 거짓말쟁이다. 이번에는 발화행위의 차원에서 들여다보자. 나는 거짓말쟁이라는 것은 참이므로, 발화행위의 주체인 나는 진실을 말했다. 발화행위의 주체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발화내용의 주체와 발화행위의 주체는 ‘나는 거짓말쟁이다’는 말을 통해서 뚜렷한 분열을 드러내고 있다. 진실은 어느 쪽에 있을까? 이번에는 발화내용이 거짓이라고 가정하자. 이 말은 발화행위의 주체가 거짓말쟁이라는 의미다. 이 문장이 거짓이므로, 문장 속의 주어 즉 발화내용의 주체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결국 누가 되었건 둘 중 하나는 거짓말쟁이고 나머지 하나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주체는 이렇게 거짓말하는 주체와 거짓말 하지 않는 주체로 분리된다. “발화행위의 나는 결코 발화내용의 나가 아니다.”

 

조금 더 흥미로운 사례는 가장 능란한 사기꾼의 수법에 있다. 깔끔한 사기꾼은 엄청난 거짓말로 사기를 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함으로써 사기를 친다. 이 사기의 성공은 사실 사기꾼의 혀가 아니라 상대의 마음에 달려 있다. 속지 않으려는 자가 더 쉽게 속아 넘어가기 마련이다. 의심이 많은 사람은 상대의 말을 거꾸로 받아들인다. 탈무드에 이런 대화가 있다.

 

“네가 가는 곳은 크라코비인데, 네가 렘베르크로 가고 있다고 내가 믿도록, 크라코비로 간다고 나에게 말하면서, 왜 너는 거짓말을 하니?”

 

크라코비로 간다고 한 ‘너’의 말은 진실이다. 즉 발화내용의 주체인 너는 진실을 말했다. 그런데 발화행위의 차원에서 ‘너’는 거짓말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크라코비로 간다고 하면 렘베르크로 간다고 내가 믿을 것임을 ‘너’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발화행위의 주체인 너는 실제로는 거짓말을 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야기가 있다. 청개구리 동화다. 엄마 청개구리는 뭐든지 반대로만 하는 아기 청개구리에게 “내가 죽거든 개울가에 묻어라”고 말했다. 발화내용의 주체로서의 엄마 청개구리는 개울가에 묻어달라고 했지만, 발화행위의 주체로서의 엄마 청개구리의 욕망은 개울가에 절대로 묻지 말라는 것이다.

 

욕망이 발화 ‘행위’ 속에 드러나는 것은 말 즉 발화 ‘내용’이 주체가 원하는 것을 제대로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종종 느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답답함은 말이 욕망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함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멋지게 패러디한 것이 “남자에게 좋은데, 정말 좋은데, 뭐라고 표현할 빵법이 없네~” 라는 광고가 아닐까. 표면적으로는 광고규제에 대한 우회적 패러디이지만, 실제로는 언어학적 그리고 정신분석학적 주체의 분리를 훌륭히 은유하고 있다. 경상도 사투리가 고백하는 발화내용의 실패는 발화행위의 차원에서 제품의 특징을 강타하며, 성공한 발화(광고)의 전형이 되었다.

 

발화내용과 발화행위의 차이는 언어학적인 구분이다.

 

「방브니스트 같은 구조주의 언어학자들 사이에서 발화 행위énonciation 차원과 발화 내용énoncé의 차원을 구분하는 것은 일반적 관례가 되어 있다. 발화 내용 차원의 담론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발화의 수신자가 품게 되는 의문, 즉 발화의 송신자가 전달하는 표면적 발화 내용 너머에 ‘그는 과연 나에게서 무엇을 원하는가 Che vuoi?’와 같은 의문이다. 다시 말해서 발화 행위 차원의 담론에 대한 질문이다. 이것은 언어 행위 속에 내재한 결핍으로서의 욕망의 존재를 말해준다. 언어 행위 속에는 딱히 구체적으로 요구 조건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욕망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라캉 : 재현과 그 불만(이하 인용은 모두 이 책)> p135~6 」

 

라캉은 언어학적 문제를 정신분석학으로 끌어왔다. 라캉의 후기구조주의적 정신분석학의 특징이 언어학적 관점에서 정신분석학을 읽고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언어학을 읽은 결과이다.

 

「언어학에서 말하는 담론이 갖는 두 측면, 즉 발화내용과 발화행위의 구별은 의식적 담론과 무의식적 담론의 구별에 효과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라캉은 이 구분법을 ‘말하여진 것 let dit’ 과 ‘말하는 것 le dire’ 사이의 차이로 설명하고, 주체의 진실은 ‘반쯤 말하여진 것 un mi-dit’에서 드러난다고 한다. p91 」

 

정신분석에서 주체는 언어를 통해 형성된다. 언어의 세계, 상징계로 들어와야만 주체가 탄생한다. 언어의 세계를 거부하는 사람을 우리는 정신병자라고 부른다. 언어의 세계는 정상인이 되기 위해 받아들여야만 하는 강요된 선택이다. 그런데 이 선택에서 주체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한조각의 대상a, 주체의 진실이다. 의식의 주체에게 이 진실은 억압되는데, 억압된 것은 반드시 회귀한다는 라캉의 명제에 따라 상실된 진실은 무의식의 주체를 통해 얼핏얼핏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이 존재의 진실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그것은 언어의 음성적 발성, 즉 발화행위를 통해서 표현된다. 그러므로 무의식의 주체, 욕망의 주체는 바로 발화 행위의 주체의 차원과 연결된다. 라캉의 말대로 “대타자의 영역에 위치하기 위해서 무의식의 존재는 담론의 발화 행위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무의식은 ‘말하는’ 발화 행위 속에서 드러나는 반면, ‘말하여진’ 발화 내용 속에서는 자신을 은폐한다. 주체의 진리, 무의식의 목소리가 들리게 하기 위한 주체의 전략은 그것을 반쯤 말하는 것이다 .p91~2 」

 

다시 ‘나는 밥을 먹고 있다’로 돌아가 보자. 밥을 먹고 있는 ‘나’와 그 말을 하는 ‘나’는 다르다. 발화내용의 주체와 발화행위의 주체가 분열된 것인데, 라캉에 따르면 진정한 주체는 그 틈바구니 속에서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앨리시어는 비실비실 웃으며 그의 뒤를 따라간다. 가로등 불빛을 벗어나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이제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놓친 채로 밤 속에 남는다.

 

『야만적인 앨리스씨』에서도 딱 다시 한 번 불쑥 1인칭 앨리시어가 나타난다. 1인칭 앨리시어는 책 첫 문장에서 한 번 나왔다 사라지고 앨리시어는 내내 3인칭으로 서술되었다. 그런데 1인칭 앨리시어 나는 3인칭 앨리시어 나를 놓치고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그때서야 나(이 글을 쓰는 말리;;)는 이 이야기의 화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앨리시어 자신인 것을 깨달았다.

 

왜 여기서 1인칭 앨리스는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야 했던 걸까? 이 무의식의 주체는 어떤 욕망의 주체인가? 여장을 한 부랑자 앨리시어는 끊임없이 거리를 배회한다. 자신을 현시한다. 여장과 악취로 사람들의 눈과 코에 들러붙는다.

 

그대의 무자비한 점막에 앨리시어는 도꼬마리처럼 달라붙는다. 갈고리 같은 작은 가시로 진하게 들러붙는다. 앨리시어는 그렇게 하려고 존재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발화행위의 주체, 1인칭 앨리시어의 욕망은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 우리가 앨리시어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여장으로든 악취로든 혹은 아직도 떨어지고만 있는 잔혹 동화 속의 소년 앨리스로든. 그러고도 불안한 앨리시어의 욕망은 중간 중간 우리를 호출하며 확인한다.-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나를 놓치지는 않았나, 나를 잊은 것은 아닌가하는 앨리시어의 불안함. 그 불안함은 3인칭 앨리시어의 뒷모습을 놓치고 어둠 속에 남겨졌을 때 아마도 극에 달한 것은 아니었을까. 앨리시어도 앨리시어를 의식에서 놓아버리는데, 우리들은, 그대들은 정말 앨리시어를 놓치고 있지 않은가, 그 두려움이 3인칭 앨리시어의 뒤에 감추고 있던 1인칭 앨리시어의 얼굴을 드러내게 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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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인 앨리스씨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독서회 회원의 열살짜리 아이와 몇 달째 동화책을 읽고 있다. 이 엄마에게 『야만적인 앨리스씨』대출을 부탁했는데, 지난 번 모임에서 우리 모두를 넘어가게 했다. 지난 달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나라의 앨리스』를 그녀의 딸과 함께 읽었는데, 내가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부탁하자, 오~ 앨리스 시리즈를 전부 하려는 구나,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작가가 우리나라 사람이라 잠깐 이상하긴 했다고. 이 앨리스가 그 앨리스? 모두 허리를 젖히며 깔깔거렸다.

 

나도 깔깔거렸는데,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읽고보니, 앨리스 시리즈 라고 해도 꼭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시리즈라고  혼자 써야 하는 법은 없다. 우리에게 구보씨가 있지 않은가. 박태원의 구보씨, 최인훈의 구보씨, 주인석의 구보씨. 그 이후로 또 다른 구보씨가 나타났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주인석의 구보씨가 살던 90년대 이후로 나는 우리나라 소설을 거의 읽지 않았다. 세계적인 소설도 거의 읽지 않았다. 그러니 요즘 문지와 창비 같은 '문학동네'를 주름잡는 소설가들은 알지 못한다. 김영하를 소설보다는 조영일과의 논쟁을 통해 알게 되었을 정도다. '문지'라고 써놓고 보니, 문지 4金 중 김치수 선생이 몇 일 전 돌아가셨다. 4金인 김현, 김치수, 김연주, 김병익은 문지 창간 주역들이다. 주인석의 구보씨는 문지 사무실 한켠에서, 바둑을 두는 이 김씨들 옆에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었다. 제일 먼저 작고한 김현의 마지막 일기인『행복한 책읽기』에는 김치수와 등산을 가던 이야기도 나온다. 내게 한국의 문학동네는 이런 이름들로 떠오른다. 그러니 황정은이라는 이름은 듣도보도 못했었다.

 

『야만적인 앨리스씨』가, 추천한 회원의 말처럼,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았다. 무엇때문인지 그녀는 내가 참 좋아할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그렇다고 재미없는 것은 아니다. 읽을만 하다. 다만 내가 살아온 그만큼 보았던 세상이 있고, 그 세상에는 무수한 앨리시어들이 혹은 앨리스들이 있었다. 쉽게 익숙해지는 사람들처럼 나도 그렇게  둔감해져서 다 비슷하게 느껴진다. 차라리 소년은 아니지만, 영화 <똥파리>의 양익준이 생각났다. 상훈(양익준 역)은 친아버지를 사정없이 패버리는데, 앨리시어는 차마 그러지 못했는지 친구의 아버지를 패버린다. 그리고 부랑아로 세상을 떠돈다. 상훈처럼 독하기는 어렵다.

 

『야만적인 앨리스씨』가 흥미로웠던 것은 내용이 아니라 서술의 시점이다. 전문용어로는 무어라 하는지 모르겠는데, 서술의 시점이 마구 뒤바뀐다. 처음엔 뭔가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시점의 혼란 때문이었다. 첫 페이지부터 그렇다.

 

내 이름은 앨리시어, 여장 부랑자로 사거리에 서 있다.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그대를 찾아 머리를 기울여 본다. 부채꼴로 펼쳐진 거리의  한쪽 모퉁이에서 다른 쪽 모퉁이까지 천천히 훑어본다. 고깃집과 카페와 각종 대리점과 백화점이 있다. 사거리 중앙엔 이 지점에 무언가 묻혔다는 표식처럼 열십자로 횡단보도가 그려져 있다. 신호가 바뀌면 사방에서 사방으로 사람들이 길을 건널 것이다. 앨리시어는 그들 가운데서 기다린다. 앨리시어의 복장은 완벽하다.

  …… …… …… …… …… ……

담배에 불을 붙이다가 동전을 찾으려고 주머니를 뒤지다가 숨을 들이쉬다가 거리에 떨어진 장갑을 줍다가 우산을 펼치다가 농담에 웃다가 라테를 마시다가 복권 번호를 맞춰보다가 버스정류장에서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앨리시어의 체취를 맡을 것이다. 그대는 얼굴을 찡그린다. 불쾌해지는 것이다. 앨리시어는 이 불쾌함이 사랑스럽다.

 

첫 문장은 익숙하다. 1인칭 화자의 시점이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부터 뭔가 이상하다.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그대는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거지? 그대를 찾아 머리를 기울이는 것은 앨리시어인가? 그런데 몇 문장이 지나면 갑자기 '앨리시어'가 3인칭 주어로 등장한다. 3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인가? 그런데 모든 것을 아는 '전지적' 시점이 왜 추측을 하지? '길을 건널 것이다.' 혹은 '체취를 맡을 것이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도 전지적 시점인가? 전문가가 아니니 맞는지 틀린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이상하긴 하다. 3인칭이긴 한데 전지적 시점은 아니고, 뭐 인간적 시점인가? 3인칭 관찰자적 시점 같은거. 그런데 관찰자가 '앨리시어는 이 불쾌함이 사랑스럽다' 고 단정 할 수 있나? 혹은 '불쾌해지는 것이다.'는?  3인칭 심리학적 관찰자 시점인가? 이런 것도 있나?  

 

이런 복잡한 것들을 따질 생각은 없다. 나는 그냥 독자니까. 중요한 것은 이런 뒤섞음과 혼란이 어떤 효과를 주는가 이다. 작가가 막 썼을 리는 없고 도대체 왜 이렇게 쓴 걸까?  물론 그 의도까지 알 필요는 없다. 나는 그냥 독자니까. 다만 그래서 내가 어떻게 느꼈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뒤섞인 시점이 읽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모르겠다. 이 낯선 시점때문에 이 전형적인 이야기가 새롭게 읽히고 있나? 꼭 그런 것 같지도 않고,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지도 않다. 나의 느낌도 왔다갔다 하는구나..

 

왔다갔다...라고 하고 보니, 더 왔다갔다 하게 만드는 대목도 있다.    

 

앨리시어는 비실비실 웃으며 그의 뒤를 따라간다. 가로등 불빛을 벗어나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이제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놓친 채로 밤 속에 남는다.  

 

갑자기, '나는'이 등장한다. 이 책을 통틀어 처음이자 마지막인 '나'가 아닌가 싶다. 뚫어지게 찾아보지 않아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 '나'는 책 첫머리의 앨리시어를 가리키는 '내 이름은 앨리시어' 의 그 '나'가 아니다. 앨리시어와 고미와 동생을 지켜보는 제 3의 '나'다. 심지어 이 '나'는 앨리시어를 놓치고 혼자 남겨지기 까지 한다. 나는 전지적 관점도 관찰자적 관점도 잃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또 하나, 시제도 바뀐다. 대부분의 시제는 현재다. 깨닫는다, 바라본다, 좆같다, 삼킨다 등등. 그런데 "그 밤에 고모리에 사건이 하나 있었다."로 시작하는 일련의 서술은 과거시제다. 말하자면 '왔다갔다' 하기가 이 책의 주 형식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어서, 새로운 포장이라도 입히려고 한 걸까?

 

마지막에 또 한번의 혼란이  있다.

 

오래전 길에서 만난 사람에게 나무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커다란 나무와 앨리스 소년에 관해서.

앨리스 소년은 그 나무 아래에서, 해가 뜨고 달이 지는 것을 지켜 보면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자는 나무 바깥으로 나가면 되지, 라고 말했다. 모든 일은 그 새끼가 나무 아래 서 있기를 고집했기 때문 아닐까? 나무 바깥으로 나가면 상황 끝, 오케이?

그렇구나.

그렇구나, 하고 앨리시어는 생각을 해보았다.

 

처음엔 당연히 앨리스 소년이 앨리시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앨리스 소년 이야기를 들은 남자가 '상황 끝, 오케이?' 하자, '그렇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앨리시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3인칭 관찰자, 그리고 문득 '나는'하고 얼굴을 드러낸 그 '나'가 모두 앨리시어라는 말인가? 앨리시어가 앨리시어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인가?

 

사실 이런 질문들은 간단히 답해질 수 있다.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이책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황정은 작가가 직접 나온다. 나는 앞부분에서 살짝, 이 작가의 매력적인 목소리만 듣고 책 내용에 대해서는 일부러 듣지 않았다. 책을 읽고 내 생각을 정리하기 전에는 어떤 평문도 어떤 이야기도 다 자유로운 사고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내일 오전 걸레질을 하며, 아마도 나는 오늘 밤의 이 어지러움을 깨끗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가 될런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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