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독서회는 방학이 있다. 아이들의 방학에 맞추어 겨울에 두 달, 여름에 한 달 방학을 한다. 처음에는 이상했는데 이제는 이해가 간다. 애들 키우고, 집안일 하고, 파트타임 일도 해가면서 일주일에 한권씩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내가 봐도 놀랍다. 방학이 되면 아이들에게 가는 손이 두 배는 늘어나니 책을 손에 쥘 시간은 그만큼 줄어든다. 좋아서 읽는 책이지만, 방학이 다가오면 회원들의 얼굴에 살짝 안도감이 실리기도 한다. 내내 쫒기듯 읽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그럴만도 하다.

 

올 한해 우리 독서회는 36권의 책을 읽었다. 소설이 27권, 인문학 4권, 에세이 3권, 기타 2권 이다. 소설은 고전이 10권, 현대소설이 17권이다. 지역별로 보면 국내소설 8권, 영미소설 8권, 그외 외국소설 11권이다.

 

올해 읽은 책들에 대한 회원들의 평가를 알아보기 위해 간단한 조사를 했다. 제일  재미있었던 책, 가장 유익했던 책 그리고 최악의 책을 뽑았다.

 

 '재미'로는 3명이 <창문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뽑아 주었고, 그외 <소년이 온다>를 비롯 7권이 각 1표씩을 얻었다. 취향이 참 다양하다. 재미있는 책으로 선정된 8권의 책은 모두 소설이다.

 

'유익'으로는 <피로사회>, <프루스트가 우리 삶을 바꾸는 방법>, <팔레스타인> 이 모두 두표씩을 얻어 공동 1위를 차지했다. 그 외 <소년이 온다>를 비롯 5권이 각 1표씩을 얻었다. 가장 유익했던 3권의 책은 모두 소설이 아니다. 그런데 매우 재미있는 것은 <피로사회>,와 <프루스트가 우리 삶을 바꾸는 방법>은 최악의 책에서도 1위를 먹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아주 유익한 책이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 어려워 읽기 힘들었던 것이다. 1표씩을 얻은 5권의 유익한 책 중에 4권이 소설이고, 1권이 여행 에세이다. 

 

최악의 책은  <피로사회>, <프루스트가 우리 삶을 바꾸는 방법>그리고  <정글만리> 가 각 3표씩을 얻어 공동 1위에 올랐다. <피로사회>와 <프루스트가 우리 삶을 바꾸는 방법>은 어려워서 읽기 힘들었다는 이유로, <정글만리>는 너무 실망했다는 이유로 선정되었다.  그 외 각 2표씩을 얻은 책 두 권이 최악의 책에 이름을 올렸다.

 

<피로사회>와 <프루스트가 우리 삶을 바꾸는 방법>은 올해 우리 독서회의 문제적 책이라 할 수 있다. 극명하게 호불호가 갈리는데, 이 사실 자체가 독서회의 난제를 드러내주고 있다. 독서회는 평균 10명을 넘던 참석자가 하반기에 와서 점차 줄어 들어 최저 5명이 참석하는 날도 있었다.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나는 사람도 늘어났지만, 한 편에는 너무 어렵다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떤 회원들은 독서회가 친목 위에 가벼운 책을 얹기를 바라고, 또 어떤 회원들은 혼자 읽기는 약간 벅찬 책을 함께 읽을 수 있는 장이 되기를 바란다. 전자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독서회의 의미가 퇴색하고, 후자에 비중을 두면 버거워하는 회원이 생겨난다. 그런데 대개 목소리가 큰 회원은 후자에 속한다. 독서회의 목소리란  읽을 책을 많이 추천하는 것이다. 어디서나 발언하는 자가 권력을 쥔다. 그러다 보니 참석자가 줄어드는 문제가 발생했다.

 

어떻게 해야할까? 사실 평가 설문을 한 것도 이 때문이다. 회원들의 성향을 파악하여 내년 독서회의 방향을 잡는 기본 자료로 사용하려 했다. 그런데 한눈에 보이는 결과는 참 취향들이 다양하다는 것이다. 재미에 대한 기준도 다 다르다. 유익과 어려움 사이에는 절충의 가능성도 없어 보인다. 재미있고 유익한 책이 최고이지만, 적어도 큰 어려움 없이 유익하게 읽을만한 차선의 책을 선택하기도 만만치 않다. 그렇다고 매번 재미만 있는 책을 읽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재미있는 책은 혼자서 읽어도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 재밌어~~ 외에 할 말이 없는 책을 가지고 독서회라는 이름을 걸고 만날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한편 사람이 먼저라고 생각하면, 누구나 쉽게 읽고 가볍게 이야기할 수 있는 책을 골라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그러면 나는 별로 참석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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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12-26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회에서 책 많이 읽으셨네요.
우리도서관 독서회는 월 1회하니까 1달에 한권 읽어요.
그동안 논어정독, 백석평전, 책은 도끼다 등 읽었어요.
제가 주로 선정하는데 1월 책이 고민입니다. 인문학 서평쓰기라......책 선택이 어렵네요.


말리 2014-12-26 17:23   좋아요 0 | URL
돌아보니 많이 읽었네요 ㅎ ^^ . 저희도 봄에는 백석의 시집을 읽기로 했어요. 이 기회에 백성평전도 읽어야 할 것 같아요. 1월의 주제가 인문학 서평쓰기인가요? 불문학과 교수이자 비평가인 황현산의 산문집을 읽고 있는데 좋네요. 글쓰기의 교본으로 삼을 만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밤이 선생이다> 인데, 심심풀이로 조금씩 읽으려 했는데 주욱 읽게 되네요.

해피북 2015-01-02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부럽습니다.^^ 독서모임을 하시면서 다양한 책을 나누시고! 아무래도. 모임의. 주된 목적은 다양한 책을 함께 읽어야 하는만큼 한달에 한번 정도는 혼자. 읽기 힘들었던 주제도 나누는것이 좋지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갇해봅니다 무튼 부러운 독서모임이네요^^

말리 2015-01-02 10:17   좋아요 0 | URL
네, 조언 감사합니다 ^^. 요즘은 도서관도 많고 책읽는 사람들도 많아서 그리 어렵지 않게 독서모임을 가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같은 책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습니다.
 
세계 철학사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지음, 박민수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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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부 20세기 철학 사상의 주요 방향

 

제 2장 현대 철학의 주제와 문제

 

이 책의 저자는 20세기의 철학이 경험과학과 긴밀할 뿐 아니라 긴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7부 2장을 지금까지와 달리 인물이 아닌 주제 영역에 따라 나눈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읽어갈수록 정말 그래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저자의 취향과 편향 때문은 아닌가 의심이 든다.

 

 

Ⅰ. 인간의 모습 (철학적 인간학)

 

칸트에 의하면 철학이 답해야 하는 세 가지 물음은 하나의 물음으로 집약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다.

 

 

Ⅱ.언어

 

20세기가 지나는 동안 언어는 철학의 핵심주제가 되었다. 언어는 인간의 인식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는데, 칸트는 이것을 간과했다. 칸트와 동시대인인 하만(1730~1788)은 “내게 중요한 문제는 ‘이성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언어란 무엇이냐?’ 이다. (....) 언어가 없다면 우리는 이성을 갖지 못할 것이다. 말이 없다면 이성도 없고 세계도 없다.”고 칸트를 비판하며 인식비판에서 언어비판으로 이행할 것을 주장했다. 또 다른 동시대 사상가인 헤르더(1744~1803)는 이성은 언어에 구속되어 있으며, 이성은 원칙적으로 언어적이라고 말했다. 이성은 경험과 역사 그리고 관심의 구속을 받는다. 실제로 언어에 관한 자립적 학문은 이 시대부터 발전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최소한 5000개의 언어가 있다. 언어의 다양성보다 철학적으로 더 흥미로운 것은, 이런 모든 언어에 일정한 본질적 특징이 공통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른바 언어적 보편자가 존재한다.

 

훔볼트(1767~1835)는 철학의 중심물음이 칸트가 제기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에 동의하면서, 인간이란 “언어를 통해서만 인간이다” 고 주장했다. 인간이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또 세계 안에서 방향을 잡아 나아가는 행위는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인간의 세계는 언제나 언어에 의해 매개되어 있다. 이 언어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운동하는 것으로 오직 개개 인간의 생생한 발화 행위에서만 존재한다.

 

소쉬르(1857~1913)는 언어 고찰에 있어 패러다임의 전환을 일으키며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했다. 소쉬르는 파롤parole 과 랑그langue를 구분한다. 파롤은 개인이 순간순간 사용하는 일회적이고 생생한 언어를 가리키며, 랑그는 기호와 규칙으로 이루어진 언어체계, 즉 모든 개인이 공유하고 있지만 언어공동체에 속하는 개인들의 총체에서만 완전하게 실존하는 체계를 가리킨다. 소쉬르에 의하면 모든 언어적 기호는 이중적 성격을 갖는다. 모든 언어에는 음성 형태, 즉 기표(시니피앙 signifiant)와 기의(시니피에 signifié)가 융합되어 있다. 두 요소의 결합은 임의적이고 우연적이다. 소쉬르는 구조주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언어가 철학의 중심이 된 것은 오랜 역사적 발전의 결과이다. 이 과정에서 비트켄슈타인(1889~1951) 만큼 커다란 기여를 한 철학자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현대철학에서 ‘언어적 전회’라는 말이 흔히 사용되는 것은 그의 사상 때문이다. 비트켄슈타인은 모든 텍스트를 독일어로 썼지만 그의 주요 활동 무대는 영국이다. 이것은 비트켄슈타인을 현대 영미철학자의 대표자로 간주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비트켄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의 서문에서 “본질적인 점에서 문제들을 최종적으로 해결했다”고 쓰며, 자신이 2000년 이상 지속 되어온 철학의 난제를 해결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후기 비트켄슈타인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세계와 사상 및 명제에 의한 그 모사 사이에 명백한 관계가 있다는 『논고』의 생각 (그림이론)을 버린다. 사후 출간된 『철학적 탐구』에서 비트켄슈타인은 언어를 이루는 단어와 문장들은 대개가 다의적이고 모호하며 부정확하다고 생각했다. 단어의 의미는 그것이 사용되는 방식에 달려있다.(놀이이론)

 

‘언어적 전회’ 라는 간명한 표어는 철학적 문제들이 철학적 언어의 문제로 전환되기 시작했음을 가리킨다. 이런 철학의 대표적 집단은 빈학파이다. 그들에게 철학이란 명제나 그것들의 논리적 상호 관계를 명확히 하고 의미 있는 명제를 의미 없는 명제와 구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활동이다. 의미 있는 명제란 참, 거짓이 명확하게 구분 가능한 명제이다. 예를 들어 칸트처럼 “현상 세계의 이면에는 사물 자체의 영역이 있다”는 식의 명제는 무의미하다. 無나 영혼, 세계정신 같은 단어들도 무의미하다. 빈학파는 이렇게 형이상학의 뿌리에 도끼날을 박았다.

 

오스틴(1911~1960)은 언어의 수행성을 주장했다. 언어에는 진술적인 것도 있지만 수행적인 것도 있다. “내가 약속한다”는 말은 곧 약속의 행위 자체이기도 하다. 오스틴은 이것을 ‘언어행위 Speech Act’ 라 불렀다.

 

 

Ⅲ. 인식과 지식

 

칸트의 활동에서 신칸트주의 번영에 이르기까지 100년 이상 인식론은 철학의 중심을 이루었다. 그 후 철학은 인식 문제를 외면하지는 않았지만, 그 초점을 두 가지로 이동시켰다. 하나는 언어, 특히 인식에서의 그 역할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과학 즉 인식이 계획적, 방법적으로 추진되고 점진적 성공을 거두는 영역이었다. 이렇게 해서 인식론은 과학론이 되었다.

 

1. 신실증주의

 

실증주의란 특정한 철학이론이나 학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철학적·과학적 기본 입장을 가리킨다. 철학과 관련해서 합목적적인 태도는 실증적으로 주어진 것, 명백히 지각될 수 있는 것, 감성적 경험에 의해 확인될 수 있고 관찰될 수 있는 것만 중시하는 태도이다. 오귀스트 콩트(1798~1857)가 실증주의란 명칭을 철학에 도입했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내용은 아주 오래된 것이었다. 정신사에 등장한 사상조류 중에서 주어진 것만을 중시해야 한다는 일반적 요청을 내세우고 또 우리 인식에 주어지는 것은 감각적 인상들만으로 이루어진다는 견해를 표방하는 조류는 모두 실증주의라 불릴 수 있다. 실증주의는 언제나 형이상학을 거부해 왔다.

 

신실증주의란 명칭은 19세기 말에 시작되어 20세기 중반까지 지속된 하나의 철학적 학파를 지시한다. 이 학파는 ‘논리실증주의’나 ‘논리경험주의’라고도 불린다. 이 학파에 속하는 모든 사상가에게 논리학은 각별한 역할을 한다.

 

2. 새로운 논리학

 

기호논리학은 다른 모든 사실과학들과 달리 하나의 이론 체계가 아니다. 기호논리학은 하나의 인공 언어에 비교될 수 있다. 기호논리학은 기호들과 이 기호들의 사용규칙을 포함하는 하나의 체계다. 그러나 이런 언어구성에서는 개별 기호들이 우선은 해석되지 않고 있으므로 기호논리학은 차라리 언어의 골격 내지 도식이라 불려야 할 것이다. 이 기호들은 응용논리학의 영역에서야 구체적 내용을 지니게 된다. 기호논리학은 수학의 새로운 토대 정립에 제일 먼저 활용되었다.

 

간단히 말해 기호논리학은 우리가 수학시간에 배운 이런 표들을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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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러셀에서 분석철학까지( 신실증주의 : 빈학파 → 분석철학 : 일상언어철학)

 

러셀(18721970)은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인식수단은 자연과학뿐이라고 생각했다. 철학이 다루는 문제는 도덕이나 종교가 아니라 과학에서 차용되어야 한다. 러셀은 만년에 이를수록 점점 더 실증주의로 기울어졌고 실증주의에 의해 인정되지 않은 모든 지식영역에 대해 회의적 태도를 견지했다. 러셀에 따르면 이 세계에는 물질도 없고 정신도 없고 자아도 없으며 오직 감각자료만이 존재한다. 우리 지식의 유일한 원천인 자연과학은 감각자료 외에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20세기 철학유파의 하나로, 통일적이고 강력한 집단이었던 신실증주의학파는 ‘빈학파’라고 자처했던 일군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빈학파는 1938년 이후로는 대개 ‘분석철학’으로 지칭되며 때로는 ‘토대연구’라고도 불린다. 현대 논리학과 결부된 모든 철학은 분석철학이다. 이 학파는 기호논리학을 체계화했으며, 철학자들로 하여금 언어라는 현상에 주목하게 하여 새로운 통찰을 얻어냈다. 이들은 인식의 문제를 공공연하게 구호로 내걸고, 증명가능하고 확실한 인식, 즉 과학을 주장했다. 과학적 인식의 이론, 즉 과학론은 이 학파의 주요 관심사의 하나였다.

 

4. 두 명의 회의주의자

 

과학적 인식의 가능성에 대해 명백히 회의주의적인 태도를 가진 사상가로는 쿤(1922~1996)이 있다. 자연과학적 인식의 진보는 단계적·연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변혁과 비약의 형태로 수행된다. 패러다임에 접합되지 않는 현상들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고와 이론적 발상을 요구하며 결국 패러다임의 교체를 강제한다.

 

5. 포퍼와 비판적 합리주의

 

포퍼(1902~1994)에 의하면, 세계 사건은 엄격하게 결정되어 있지 않고 모든 면에서 확실하게 예정되어 있지도 않으며(비결정론) 완전하게 인식될 수도 없다. 지식이란 언제나 잠정적, 가설적 성격을 갖는다. 이런 이유에서 포퍼는 확증 대신 반증을 내세운다. 가설이란 확증에 의해 입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증을 통해 반박될 수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1879~1955)은 이론적 개념들은 우선 인간의 정신, 인간의 상상력에서 자유롭게 창조되며 이것이 나중에야 경험에서 검증되는 것으로 보았다. “내 확신에 의하면, 우리의 사유와 언어적 표현에서 등장하는 개념은 모두가 사유의 자유로운 창조물이며 감각적 체험에서 귀납적으로 획득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다만 우리는 일정한 개념 및 개념 연관들을 습관적으로 감각적 체험에 굳게 결부시키며 그 결과 감각적 체험의 세계와 개념 및 언명의 세계 사이의 간극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기가 쉽지 않은 것일 뿐이다. 예컨대 모든 계열의 수란 분명히 인간 정신의 고안물, 다시 말해 일정한 감각적 체험의 정리를 편리하게 하려고 인간이 창조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수의 개념을 체험 자체로부터 이를테면 자연스레 생성시키는 방도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내가 수의 개념을 선택한 것은 그것이 과학 이전의 사유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구성적 성격의 인식을 용이하게 하기 때문이다.”

 

포퍼는 과학의 가설들은 순간적이고 직관적인 깨달음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며, 이것이 추후에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가설로 변환된다고 보았다.

 

6. 해석학

 

해석학Hermeneutik이란 말은 헤르메스 신에서 유래했다. 헤르메스는 신들의 뜻을 전달할 뿐 아니라 이를 이해할 수 있게도 해주어야 했다. 그래서 헤르메스란 이름은 ‘설명하다, 해석하다, 석의하다’ 란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 20세기에 들어와 해석학은 철학의 고유한 학파를 형성하는데, 대표적 사상가는 가다머(1900~2002)이다.

 

가다머에게 해석, 즉 이해란 보편적 현상이다. 해석 내지 이해란 전승된 문헌과 정신적 산물의 수용은 물론 모든 인간 지식과 관련해서 기초적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모든 지식에는 기초적인 ‘선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가다머 사상의 중심에 놓인 것은 언어이다. “언어적으로 구성된 우리의 세계 정향에 속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인간의 모든 세계정향은 언어 습득에서 완성된다. 하지만 그것뿐이 아니다. 우리라는 세계-내-존재의 언어성은 경국 경험의 전체 영역을 표현한다.”

 

7. 구성주의

 

구성주의자들의 사유는 우리가 현실이라 믿는 것은 실제로 우리가 고안한 무엇, 우리 자신의 구성이 아닐까 라는 물음을 핵심 과제로 삼고 있다. 구성주의의 사상적 선구자 중 가장 중요한 인물로는 칸트를 꼽을 수 있다. 칸트는 현실이란 바깥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장치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고 말했다.

 

8. 진화론적 인식론

 

진화론적 인식론자들은 이른바 ‘가설적 실재론’을 기본으로 공유한다. ‘인간에게는 궁극적 확실성을 지닌 지식이 허락되지 않는다. 인간은 틀릴 수 있으며, 인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점은 학문의 전체 영역에서 타당성을 갖는다.’ 는 테제를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그 타당성을 엄밀하게 입증할 수 없지만 필연적이며 참된 것이라고 전제되는 ‘요청’이 필요하다.

 

9. 인식의 한계

 

20세기 후반에는 사유의 중심이 인식의 한계에 대한 물음으로 옮겨진다. 괴델(1906~1978)은 『수학의 원리』에서, 전개된 자연수의 공리체계는 비록 참이기는 하지만 이 체계의 틀 내에는 입증될 수 없는 명제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간파했다. 어떤 공리체계에서 우리 인식을 확정짓는 일이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이 괴델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과학이란 현실을 정확하고 완전하며 일관되게 서술할 가능성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한편 하이젠베르크(1901~1976)는 양자역학을 통해 인간 인식의 한계를 확인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의하면 한 미립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상보적인 관계에 있다. 둘 중 하나가 정확하게 측정될수록 다른 하나의 측정은 정확성이 떨어진다. 측정 행위 자체가 미립자의 상태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미립자의 상태에 대해서는 정확한 진술이 불가능하다. 다만 아주 많은 미립자의 상태에 대해서만 타당한 통계적 진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우리 인식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연사건에는 불확실성의 요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에 따라 인과성 개념은 상대화되며, 빈틈없는 결정론이란 견지될 수 없는 이론으로 전락한다.

 

 

Ⅳ.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잡다한 이야기가 있는데, 포퍼와 공리주의에 대해서 짧게 요약하고 넘어간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20세기는 철학의 ‘다성적 세기’ 라 너무 많은 학파들과 사상가들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그다지 눈이 가는 사람은 없다. 다만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매우 인상적이다. 체계 혹은 세계는 불완전하다. 세계에 대한 우리 인식의 한계는 세계 자체의 한계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은 인식론에 관한 철학이고, 여기서 곧바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윤리적 해답을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단초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포퍼는 역사주의를 비판했다. 역사 발전의 근본 법칙을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 발전에 관해 근거 있는 진술을 전개하는 것이 가능하며, 이로부터 올바른 정치적·사회적 행위의 지침을 도출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 역사주의다. 계시된 신의 의지나 선택받은 민족의 승리, 변증법적 법칙 또는 필연적인 사회경제적 발전이 역사의 시작과 끝을 이룬다고 주장하는 견해들이 그런 예이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의 1권은 이런 견해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플라톤 사상을 공박하고 있으며, 2권은 헤겔과 마르크스 및 그 후계자들을 비판한다.

 

영미의 공리주의는 처음 들을 때는 매우 윤리적으로 들린다. 벤담이나 밀은 어떤 행위의 모든 당사자에게 가능한 한 최대의 이익 내지 최소의 피해를 가져오는 행위는 선하다는 원칙을 견지했다. 이로움이란 적극적으로는 행복이나 쾌락을 얻는 것에서 존재하며, 소극적으로는 고통이나 불쾌를 피하는 데서 존재한다. 따라서 언제나 행위의 결과가 중요하다.

 

그러나 이익, 유용성, 행위의 결과를 기준으로 고안한 벤덤의 판옵티콘은 푸코의 해석처럼 감시와 처벌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윤리적 의도가 가장 비윤리적인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특히 결과를 최고로 중시하는 공리주의의 원칙이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는 것은 아이러니 그 자체다.

 

Ⅴ.뇌, 의식, 정신

 

플라톤 시대와 기독교적 중세에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서양 사상에서는 영혼과 육체, 정신과 물질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대립은 인간도 반으로 갈라 놓았다. 일상적 욕구로 가득 찬 신체는 위대한 사상가들이 주목할 가치가 없는 영역이었다. 그러나 데카르트적 극장은 수많은 비판에 직면해 왔고, 20세기 혹은 20세기 후반의 철학사상의 특징은 데카르트적 이원론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신경과학, 뇌과학 등의 발전으로 정신의 비밀은 풀릴 수 있을까? 이 책의 저자는 20세기의 철학이 경험과학들과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20세기 철학 전체를 과학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성향이 있지만, 그 역시 이 문제에 관해서만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라 전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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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지음, 박민수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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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7부 20세기 철학 사상의 주요 방향

 

 

20세기는 다양한 학문이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철학도 이 학문들의 성과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물리학이다.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은 물질 개념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유물론은 ‘물’ 의 개념 자체를 다시 설정해야 했다. 그 외에도 생물학에서 다윈의 진화론이 상식으로 자리 잡았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소쉬르의 언어학 등이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했다. 특히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는 철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가 언어이다. 철학은 이 모든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따라서 철학자들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력해야 한다. 최소한 이런 점에서 ‘철학의 과학화’란 상당한 실재성이 있다.

 

아직 7부 2장을 다 읽지 못했지만, 저자는 20세기의 철학이 더 이상 독자적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제 1장 20세기 전반의 사상가와 학파

 

20세기의 철학은 다양한 학파들이 병립해서 각축했다. 20세기 철학은 음악처럼 ‘다성적 세기’ 라 불릴 만하다.

 

 

 

Ⅰ. 생철학과 역사주의

 

생철학은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에 반발하여 등장한 정신운동이다. 사유만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생생한’ 삶을 파악하고자 한다. 생철학자들은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사상에 공통적으로 의존하는데, 이 두 철학자는 19세기의 계몽적 이성을 철학의 왕좌에서 몰아낸 장본인들이다.

 

현대 생철학을 최초로 발전시킨 사람은 프랑스의 앙리 베르그송 (1859~1941) 이다. 베르그송은 공간과 시간의 관계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공간은 존재하는데 반해 시간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생성중이다.

 

공간에 상응하는 인식능력은 지성인데 반해 시간의 순수한 지속은 오직 직관에 의해서만 포착된다. 지성은 ‘제작하는 인간 homo faber’의 기관이며, 직관은 ‘사유하는 인간 homo sapiens' 의 기관이다. 지성과 달리 직관은 실체적 행위에 기여하지 않는다. 지성은 실천과 연관해서 기능하므로 철학은 오로지 직관에 의해서만 시작될 수 있다. 철학에는 강제적인 논리적 증명이 결여될 수밖에 없다. 철학자는 자신이 직관해 의해 인식한 것을 직관적이고 영상적으로 서술하고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들이 직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이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Ⅱ. 실용주의

 

실용주의와 더불어 철학사에 최초로 미국이 등장한다. 윌리엄 제임스 (1842~1910)는 미국 실용주의의 창시자였으며, 국제적 중요성을 지닌 최초의 미국철학자이다. 『여인의 초상』의 작가인 헨리 제임스의 형이기도 하다.

 

'실용주의Pragmatismus' 는 그리스어 pragma (행동, 행위)에서 유래한다. 제임스의 정의에 따르면 실용주의란 “최초의 사물, 원리, 범주 또는 이른바 필연성이란 것을 도외시하고 마지막 사물, 결실, 결과 또는 사실에 주목하려는 입장‘ 이다. 실용주의의 특징이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진리의 특수한 개념이다. 즉 여기서는 유용성과 가치 또는 성공이 진리의 기준이 된다.” 현재 우리의 생각과 비슷하다. 제임스가 profit 이나 result처럼 미국인들이 즐겨 쓰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 것도 당연해 보인다.

 

미국 실용주의의 두 번째 대표자는 존 듀이(1859~1952)로, 자연과학과 실천적 경험에만 관심을 쏟았고 이 영역을 초월하는 모든 것은 철저히 배제했다. 그에게 이론이란 행위를 위한 도구였으며, 사상에는 도구적 가치만이 부여되었다. 따라서 듀이의 철학은 ‘도구주의’ 라 불린다.

 

 

Ⅲ. 새로운 존재론과 새로운 형이상학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스콜라철학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을 지배한 전통적 존재론은 하나의 보편자가 모든 사물에 형태를 부여하는 규정적 본질이라는 명제에 근거한다. 지고한 보편자에서 모든 개별자가 도출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경험적 현실을 초월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칸트를 정점으로 하는 비판적 인식론은 전통적 존재론의 전제를 궁극적으로 타파했다. 칸트 비판의 결과는 그 누구도 배제하거나 되돌릴 수 없었다. 따라서 새로운 존재론은 비판적 존재론일 수밖에 없다. 이는 무엇보다 새로운 존재론이 선험적 개념이나 방법론에서 출발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존재의 범주는 선험적으로 인식될 수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존재범주들이 우리의 인식범주들과 일치하는 것이라면 인식범주로부터 존재범주가 도출될 수 있는가 여부이다.

 

실재하는 세계를 인식하기 위해 하르트만(1882~1950)의 ‘비판적 실재론’이 취하는 방식은 거의 모든 전통적 존재론과 두 가지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첫 째, 하르트만에게 실재세계란 전적으로 인식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실재세계는 일정한 한계까지는 개념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 둘 째, 하르트만은 철학이 흔히 범하는 오류, 즉 특정한 존재 영역에서 타당한 것으로 인식된 원리를 아무 검증 없이 다른 영역에 전용하는 오류를 피하려 한다.

 

현대의 형이상학자들은 경험주의자들이다. 이들은 모두 경험에서 출발하며 선험적 인식을 거부한다. 그렇지만 이들은 경험을 외적 경험, 즉 감성적 경험으로 국한시키지 않고 지적인 경험을 인정한다. 이들은 생철학이나 현상학과는 달리 직관적이 아니며, 합리적, 지성적, 이성적이다. 새로운 형이상학은 존재자 일반을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둔다. 존재를 직접적으로 포착하려 한다는 점에서 구체적인 것을 지향하는 거대한 실재론적 사유운동과 같은 맥락 속에 있다. 20세기의 형이상학은 종합적이고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양상을 띤다.

 

 

Ⅳ. 현상학

 

생철학이나 실용주의 등의 20세기 철학 대부분은 칸트에게서 이탈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현상학도 마찬가지다. 후설의 현상학은 실존주의의 모태가 되었다.

 

현상학Phänomenologie 이란 무엇인가? 이 말은 그리스어 phainesthai (나타나다, 밝혀지다)에서 유래했다. 어원을 철학적 맥락으로 보면, 감관에 현상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철학에서 현상학이란 말은 특히 헤르더와 헤겔에 의해 사용되었다.

 

칸트는 현상phenomenon을 사물 자체noumenon에 대립시켰다. 후설(1859~1938)은 현상학을 사실학문이 아니라 본질학문으로 정초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본질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태도가 필요하다. 후설은 자연적인 인식 태도를 중지시키고 전체 자연세계를 ‘괄호 안에 묶었다.’ 실재 세계 전체를 괄호로 묶고 순수한 사태로 향하는 이 과정을 에포케(판단중지)라 부른다.

 

 

Ⅴ. 실존철학

 

실존주의의 원천은 키르케고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실존철학자들은 개인과 개인의 구체적 상황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현존재의 근본사실인 불안과 인간의 고독 그리고 인간존재의 극복 불가능한 비극성에 주의를 기울이는데, 이것은 이미 키르케고르에서 나타난 것이다.

 

키르케고르의 사상에 근원을 둔 실존철학자들의 공통점은 첫 째, 실존이란 언제나 인간의 실존이라는 점이다. 실존철학은 인간을 중심에 둔 인본주의적 철학이다. 둘 째, 실존은 언제나 개인의 실존이다. 실존철학은 주관적이다. 세 째, 인간은 사물과 달리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만든다. 인간은 사물과 관련된 범주에 의해 파악될 수 없고 그런 범주에 의해 적절히 해석될 수 없다. 네 째, 방법적으로 실존철학자들은 현상학자들이다. 존재자의 직접적 파악이 주 관심사이다. 그러나 후설이 구체적 실존을 판단중지한 것과 비교하면, 실존철학의 출발점과 목표는 현상학과 다르다. 다섯 째, 실존철학은 역동적이다. 실존은 ‘시간-내-존재’ 다. 실존은 불변이 아니며 시간과 시간성에 구속되어 있다. 여섯 째, 현존재는 언제나 ‘세계-내-존재’ 이며, ‘타자와 연결된 존재’ 이다. 실존철학은 인간을 구체적 상황에서 고찰하고 세계 및 타자와 연관시킨다.

 

카를 야스퍼스(1883~1969)의 기본 개념에는 포괄자, 실존, 초월자 등이 있다. 야스퍼스에 의하면 인간은 객관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모든 것 이상의 존재다. 실존은 완결된 학설의 개념들에 의해 서술될 수 없다. 실존은 자유, 소통, 역사성의 범주에 의해 해명될 수 있다. 실존이란 존재가 아니라 존재할 수 있음 이다. 실존은 끊임없이 선택의 기로, 결단의 기로에 서 있다. 그러므로 실존은 자유롭다. 실존은 결코 사유될 수 없고 오직 행위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실존이란 “선택의 순간에 근원에서 일어나는 자기 창조” 이다. 인간은 아무도 혼자서는 행복할 수 없다. 실존은 다른 자기존재와 실존적 유대관계를 맺는 가운데서만 실현될 수 있다. 실존은 또한 언제나 상황 속에 있다. 실존이 직접적으로 실현되는 상황이 존재한다. 죽음과 고뇌, 투쟁, 죄책 같은 것들에서 실존이 실현된다. 우리가 눈을 똑바로 뜨고 이런 상황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완전한 우리 자신이 된다.

 

샤르트르(1905~1980)는 이해하는 실존이란 단순하고 순수하며 적나라한 존재 즉 존재 자체, “어떤 무엇인가가 아니라 단순히 있는” 무엇이다. 사물은 어떤 무엇이지만 인간은 확정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무엇이 아니다. 인간은 우선은 ‘무無’ 이다. 인간은 무를 바탕으로 지속적인 창조를 거듭하는 가운데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된다. 인간은 “자유라는 선고를 받았다.” 인간은 자유롭다. 인간은 세계 내에서 참여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에서 가치를 정립할 수 있다. 인간의 자기실현은 ‘자유로운 기투’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사르트르의 사상은 인간에게 극도의 책임을 지운다. 자신의 머리채를 붙잡고 무에서 빠져나와야 하며 무의 지속적인 위협을 막아내야 한다. 인간은 홀로 책임을 지며 그 밖의 누구도 특히 신은 그를 돕지 못한다. 더욱이 인간은 자신만 책임지는 존재가 아니라 언제나 동시에 타인에게 책임이 있는 존재다. 하나의 자아와 다른 모든 자아의 불가분의 연관성, 이러한 상호주관성에 사르트르의 윤리학이 근거하고 있다.

 

 

Ⅵ. 존재 물음의 전개 : 마르틴 하이데거 1889~1976

 

오랫동안 하이데거는 실존철학자로 간주되었지만, 하이데거는 이를 거부했다. 하이데거에 처음부터 중요했던 문제는 ‘존재’의 의미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고대철학과 기독교적 서양철학은 인간의 현존재를 사물의 존재양식과 다름없이 규정하려 했다는 점, 즉 인간의 존재를 사물의 나타남과 현존함의 방식으로 이해했다는 점에서 비난받을 만하다. 다시 말해 그들은 존재를 물음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존재 자체는 사물 즉 존재자가 아니다. 존재 자체는 모든 존재자의 근원이며 우리에게 대상으로 맞서 있지 않다. 존재에 대한 물음은 철학에 의해 망각되고 간과되었다. 모든 존재자와 존재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가 간과되었다. 이 차이를 하이데거는 존재론적 차이라고 부른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하고, 둘의 차이인 존재론적 차이를 밝히려 했다. 그러나 ‘존재’는 하이데거 해석자들에게 난제 중의 난제다. 무수한 논문들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에 대한 일치된 견해는 없다. 존재는 부정신학의 신개념을 연상시킨다. 신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직접적으로 진술할 수 없다. 존재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무엇이 존재가 아닌가 만을 서술할 수 있다.

 

여하튼 하이데거의 존재에 접근하려면, 그가 ‘현존재Dasein’라 부르는 인간에서 시작해야 한다. 인간만이 모든 존재자 중에서 이미 ‘존재’를 이해하고 있는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현존재란 본질적으로 ‘세계-내-존재’ 다. 인간 현존재는 언제나 이미 그의 의지에서 벗어나 있고 교체될 수 없는 특정한 장소에 있다. 인간 현존재는 “거기에 내던져져 있다.” 세계 내 현존재는 근심, 하이데거의 표현으로는 ‘염려Sorge’라는 존재 양식을 갖고 있다. 또한 인간의 근본경험은 ‘불안Angst’ 이다. 불안해 하는 것은 현존재가 세계 내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현존재는 ‘죽음으로 향한 존재’ 로 존재한다. 절대적 한계인 죽음과의 마주침에서 인간 현존재의 고유한 의의와 간절함이 생겨난다. 하이데거의 사상에서 죽음은 인간 존재의 근거이자, 한계, 그 지평인 시간과 시간성을 해명하는 열쇠이다. 시간성은 본래적인 배려의 의미이고 현존재의 근본 사건이다.

 

하이데거는 20세기 사상가 중 가장 위대한 언어사상가이다. 하이데거에게 언어는 단순한 소통과 이해의 수단이 아니다. 언어는 단순히 인간의 도구가 아니라 ‘존재의 집’ 이다. “우리가 언어를 가진 것이 아니라 언어가 우리를 갖고 있다.” 사유의 본질은 언어의 본질로부터 파악될 수 있다. 그리고 언어의 본질은 시의 본질로부터 파악된다.

 

 

Ⅶ. 마르크스주의의 영광과 종말

 

하나의 철학에서 발생하고 그 철학에 근거한 운동이 마르크스주의처럼 거대한 힘을 행사한 것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유물론적 변증법은 논리학이자 인식론이라는 주장이 있다. 물질적 현실은 변증법에 따라 발전하며 인간 의식의 발전은 그러한 현실적 발전을 반영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사유 과정이 현실의 발전 과정과 실제로 합치하며 따라서 우리가 오류를 범하지 않을 것임을 보장하는 것은 도대체 누구 혹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자의 대답은 실천이다. 즉 인식의 토대는 물질과의 실천적 교류이다.

 

마르크스에서 출발하는 모든 사상가, 즉 인간이란 “세계 바깥에 웅크린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라는 마르크스의 인식을 진지하게 다루는 사상가들을 우리는 넓은 의미에서 사회철학자라 부를 수 있다. 마르크스를 단순히 신봉하지 않고 비판적으로 다루는 사상가들을 비판적 사회철학자라 부를 수 있다. 이 비판적 사회철학자는 흔히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가리킨다. 이 학설은 ‘사회의 비판 이론’으로도 불리는데, 대표자로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그리고 후일의 하버마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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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캐럴의 『거울나라의 앨리스』에 대해 토론하면서 알게 된 사실 하나.

번역에 따라서 엄청나게 다른 내용이 된다는 것.

 

 

 

 내가 읽은 책은 펭귄클래식 코리아 판으로, 옮긴이는 이소연이다.

 문제가 된 것은 <9장 여왕이 된 앨리스>의

 

 “Take a bone from a dog: what remains?” 부분이다.

 

 

 펭귄클래식 코리아의 번역은 이렇다.

 

"개에서 뼈를 빼봐. 뭐가 남지?"

앨리스는 생각에 잠겼다.

"뼈를 빼면 당연히 뼈는 안 남을 거고요 .... 개도 안 남겠죠. 나를 물려고 달려들 테니까요....

그러면 나도 안 남을 거예요."

"그래서 아무도 안 남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거냐?"

붉은 여왕이 말했다.

"제 생각엔 그게 답인 것 같아요."

"변함없이 또 틀렸구나. 개 정신은 남지."

붉은 여왕이 말했다.

"하지만 전 잘 모르겠...."

"아니 왜 몰라? 자 봐봐. 개가 정신줄을 놓겠지, 그렇지 않겠어?"

"그럴 것도 같네요."

앨리스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러니까 개가 가버려도, 개 정신은 남는 거야!"

여왕이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앨리스가 최대한 엄숙한 목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개랑 개 정신이 각각 다른 길을 가겠죠."

하지만 앨리스는 속으로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우린 모두 정말 바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뼈’를 빼면 ‘정신’ 이 남는다는 말에, 번뜻 헤겔의 ‘정신은 뼈다’ 를가 떠올랐고, 횡설수설이긴 하지만 이런 리뷰를 쓰기도 했다.

 

 

 그런데 독서 토론회에서 한 회원이 ‘정신’ 이란 말은 처음 듣는다고 했다. 그녀가 읽은 책은 북폴리오가 출판한 마틴 가드너의 주석이 달린 『Alice』로 옮긴이는 최인자이다. 이 책은 같은 내용을 이렇게 옮겨 놓았다.

 

 

"다른 뺄셈을 해보자. 개한테서 뼈다귀를 빼앗으면 무엇이 남아 있을까?"

앨리스는 곰곰이 생각했다.

"당연히 뼈다귀는 남아있지 않을 거예요. 제가 뼈다귀를 가지면요. 그리고 개도 남아 있지 않을 거예요. 저를 물려고 달려올 테니까요. 그러면 당연히 저도 남아 있을 수가 없고요. "

"그러면 너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구나!"

붉은 여왕이 말했다.

"저는 그게 답이라고 생각해요."

"틀렸어, 또."

붉은 여왕이 말했다.

"개의 성질은 남아 있어."

"하지만 제가 그걸 어떻게 알 수가..."

"자, 내 말을 잘 들어보라고!"

붉은 여왕이 큰 소리로 말했다.

"개는 화를 낼 거야, 그렇겠지?"

"그렇겠죠."

앨리스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그럼 만일 개가 가버린다 해도 개의 성질은 남아 있을 거라고!"

붉은 여왕은 의기양양하게 설명을 했다.

앨리스는 되도록 엄숙하게 말했다.

"아마 각각 다른 길로 가겠죠."

 

 

첫 번째 차이는 ‘bone’ 에 있다.

펭귄 판은 "개에서 뼈를 빼봐. 뭐가 남지?" 이고,

북폴리오 판은 “개한테서 뼈다귀를 빼앗으면 무엇이 남아 있을까?” 이다.

첫 번째는 개의 뼈 즉 골격을 연상시키고, 두 번째는 개가 입에 문 뼈다귀를 떠올리게 한다.

 

이 차이는 자연스럽게 두 번째 차이를 낳는다.

개에서 뼈를 빼면 혹은 뺏으면,

펭귄 판은 “개가 정신줄을 놓겠지” 로,

북폴리오 판은 “개는 화를 낼 거야” 라 번역한다.

 

살아있는 개에게서 뼈를 빼내려고 달려들면 정신줄을 놓는 것이 당연하고,

개가 좋아하는 뼈다귀를 빼앗으려 하면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다.

각각은 자연스럽지만, 이 두 번역이 하나의 원작에서 나왔다는 것은 놀랍다.

도대체 옮긴이들은 왜 이렇게 완전히 다른 번역을 한 것일까?

 

 

이럴 때, 원문을 찾아보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런데 캐럴은 끊임없이 앨리스 작품들을 수정했다고 한다. 지금도 여러 가지 판본이 나돌고 있다. 어쩌면 두 출판사가 원문으로 삼은 영문 판본이 다를 수도 있다. 확인을 해 본 것은 아니다. 가드너의 주석에도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도 없다. 우리가 찾아본 것은 어느 회원이 가진 어떤 영문판이다.

 

"Try another Subtraction sum. Take a bone from a dog; what remains?"

Alice considered.

"The bone wouldn't remain, of course, if I took-and the dog wouldn't remain; it would come to bite me- and I'm sure I shouldn't remain!"

"Then you think nothing would remain?"

said the Red Queen.

"I think that's the answer."

"Wrong, as usual," said the Red Queen. "The dog's temper would remain."

"But I don't see how-"

"Why, look here!" the Red Queen cried. "The dog would lose its temper, wouldn't it?

"Perhaps it would," Alice replied cautiously.

"Then if the dog went away, its temper would remain!" the Queen exclaimed triumphantly.

Alice said, as gravely as she could,

"They might go different ways."

 

 

이 영문판은 북폴리오 판의 번역과 비슷해 보인다. 'bone'에 대해서는 두 번역 다 가능성이 있지만, 'temper'는 통상 ‘성질’로 번역된다. 게다가 ‘lose one's temper’는 ‘화를 내다’ 는 의미의 관용구다. 물론 캐럴은 여기서 'lose' 를 이중적으로 사용하며 말장난을 한다. ‘화를 내다’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성질을 잃다’로 사용하며, 개가 잃은 성질이 개가 가고 난 뒤에도 그 자리에 남는다고 붉은 여왕이 주장하게 만드는 것이다. remain은 lose의 대구다.

 

그런데 팽귄클래식 판의 번역자는 중학생 정도 되면 알 수 있는 이 평범한 관용구, ‘lose one's temper’ 를 왜 ‘정신줄을 놓다’ 로 옮겼을까? 오역으로 보기에는 너무 쉬운 구절이라, 아무래도 뭔가 이유가 있을 것만 같다.

 

 

오역이든 뭐든 이 번역문은 이상한 효과를 낳는다. 철학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도 대번 헤겔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다. 헤겔은 ‘정신’의 철학자다. 그의 『정신 현상학』의 악명은 오늘날까지도 철학사의 한두 손가락 안에 꼽힌다. 그만큼 유명하기도 하다. 그런데 유물론의 입장에서 보면 정신은 도대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뇌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우리는 여전히 정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호르몬의 혹은 어떤 신경의 영향 아래 있는지 알지 못한다. 대충 어느 영역이라고 뭉뚱그려 말하지만 정신의 실체를 밝히지는 못했다. 헤겔 당시에도 정신에 대한 의견은 분분했던 모양이다. 헤겔은 “정신은 뼈다”라는 정신 나간 듯 한 명제를 남겼다. 이 무한판단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나는 여전히 오리무중에 있다. 다만 헤겔은 남자의 생식기와 비뇨기가 동일하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가장 고차원적인 것과 가장 저차원적인 것이 하나라는 것이다. 생식은 배뇨가 아니지만 배뇨기관 없이는 생식도 불가능하다. 정신은 뼈가 아니지만 뼈로 둘러싸인 뇌 없이는 정신도 없다. “정신은 뼈다”는 어쩌면 정신에 대한 규정이 그 자체로 불가능함을 선언하고 있기도 하다. 정신의 개념은 그 무엇으로도 불가능하다. 막다른 골목, 불가능성 앞에 우리는 종종 동어반복 뒤로 숨는다. “정신은 정신이다.” “법은 법이다.” “아버지는 아버지다” 여기에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냐? 는 이 의기양양함은 사실 무능함의 고백이다. 아버지의 정당성, 법의 정당성이 더 이상 근거를 찾을 수 없을 때 들이대는 폭력이다. 그러므로 “정신은 정신이다” 는 곧 “정신은 뼈다” 와 같지 않겠는가.

 

 

 

 

루이스 캐럴은 앨리스 이야기를 자신이 사랑하는 어린 앨리스 리델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썼다. 그리고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인 캐럴 자신의 지적 즐거움을 위해서도 썼다. 그는 한 문장 안에 두 즐거움을 중첩시키는 데에 놀라운 재능을 발휘했다. 지금도 앨리스를 읽는 두 가지 방법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다. 어린 아이의 시각에서 순수한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는 쪽과 수학과 논리학, 철학의 관점에서 캐럴이 감추어둔 무수한 의미를 찾아내어야 한다는 쪽이 그의 독자층을 두 그룹으로 확연히 갈라놓고 있다.

 

temper 가 우리말의 ‘정신’ 이라는 의미를 가질 수도 있는지, 혹은 펭귄 판의 원본에는 다른 단어가 쓰였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단순히 옮긴이의 오역인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펭귄 판과 북폴리오 판의 뚜렷한 대조는 루이스 캐럴이 의도한 두 가지 효과를 각각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아,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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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공산당 선언 펭귄클래식 80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권화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12월
평점 :
판매중지


마르크스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은 굉장히 짧습니다. 펭귄클래식 코리아 판으로 45쪽 정도의 분량입니다. 그런데도 이 책 자체는 꽤 두껍습니다. 개레스 스테드먼 존스라는 정치학자가 쓴 서설이 200쪽 가까이 되기 때문입니다. 서설 중 ‘공산주의’ 의 개념에 관한 내용을 조금 옮겨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빨갱이라는 말로 변형되어 일상용어처럼 쓰이지만, 이 말을 정확한 개념을 가지고 쓰는 사람은 별로 없을 듯합니다.

 

『공산당 선언』의 너무나도 유명한 첫 문장은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입니다. 다음은 “구 유럽의 모든 세력들, 교황과 차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의 급진파와 독일의 경찰 밀정이 이 유령을 쫓아내기 위해 신성한 동맹을 맺었다.” 로 이어집니다.

 

유럽의 구세력들이 결집하여 결사적으로 쫓아내려 하는 이 유령, 공산주의는 무엇일까요? 공산주의의 어원 자체는 중세 말 기독교에 반기를 든 수도원 결사체들 중 급진파들이 처음 사용했다고 들었습니다. 존스의 서설에서는 범위를 좁혀 이 용어가 현재의 의미를 획득해 나가는 과정을 프랑스 혁명기부터 살피고 있습니다.

 

『공산당 선언』은 1848년 발표됩니다. 선언 자체는 1848년 전 유럽으로 번진 혁명 때문에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묻혀 버립니다. 그렇다 해도 ‘공산주의’는 당시 유럽사회에 널리 퍼진 골칫거리였습니다. 독일의 유명한 백과사전인 『국가사전』1846년 ‘보유’편에는 이런 기술이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지난 몇 년간 온통 공산주의에 관한 이야기밖에 없었다. 공산주의는 누군가가 두려워하고 또 누군가가 두려움을 불어넣기 위해 이용하는 위협적인 유령이 되었다.” 우리가 놀라운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는 당시에는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진부한 수식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불과 12년 전 인 1834년 『국가사전』초판에는 ‘공산주의’라는 용어가 실리지도 않았습니다. 공산주의가 유럽사회에 두드러진 위치로 떠오르는 과정은 놀랍도록 급속했던 것입니다.

 

공산주의라는 말은 1840년대 초에 널리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의 1830년 7월 혁명 때 재등장한 공화주의 운동의 초급진적 분파를 묘사하기 위한 용어로 사용된 것입니다. ‘재등장한 공화주의’ 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것은 이들이 대혁명 당시의 급진 자코뱅이 주장한 공화주의를 계승했다는 것입니다. 자코뱅적 공화주의의 핵심은 ‘평등’입니다. 혁명 당시 생존자(테르미도르 반동이후)의 회상에 의하면 “자신들을 ‘평등파’라 부르는 혁명 공모자들은 불평등이 그대로 남아 있는 한 인민 주권과 고덕한 공화국은 결코 보장될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부패한 테르미도르 정부는 2년 전 공포정치를 주재한 공안위원회와 유사한 ‘현자들’의 비상 ‘독재’에 의해 타도되고 대체되어야 했다. 이 기구는 부자들의 재산을 압류하고, 토지를 몰수하고, 재화의 공유를 수립한 연후에 평등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공화국에 참여할 인민에게 권력을 돌려줄 생각이었다.”

 

이 사상이 1830년 7월 혁명으로 형성된 급진 공화주의 협회들에서 재등장한 것입니다. 이들에게 7월 혁명의 결과로 세워진 루이 필립의 ‘7월 왕정’은 배신이었습니다. 루이 필립은 의회 군주정, 유산계급 참정권, 자유방임 경제를 실행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부르주아의 권력이 강화된 것입니다. 부르주아 자본주의는 평등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부르주아들이 중시한 것은 개인의 자유, 그 중에서도 사적 소유의 권리와 자유입니다. 자본주의의 단짝은 자유주의입니다. 이 때문에 프랑스 혁명은 거의 100년을 끌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의 주요 배경인 1832년 6월 봉기가 발생한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ABC 회원들이라는 학생들이 마지막 바리케이드 전투에서 전멸합니다. 급진 공화주의 협회는 주로 학생들과 불만을 품은 장인들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듭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급진 공화주의 협회들이 계속 반란을 시도하자 결국 1835년 공화주의 협회가 불법화되었으며 공화국에 대한 옹호도 모두 금지되었습니다.

 

공화주의 협회가 불법화되자, 합법을 선호하는 일부 급진 공화주의자들이 1830년대 말 ‘평등주의 공화국’ 대신 평화적이고 비정치적인 대체물로 제시한 것이 바로 ‘공산주의’입니다. 현대사의 관점에서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공화주의는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온건한 이미지로 살아남고, 공산주의는 독재와 폭력의 이미지로 점철되어 패퇴했습니다. 물론 공화주의는 지금도 양쪽 모두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북한의 공식명칭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입니다. 우리나라의 영문 표기는 ‘Republic of Korea’입니다.

 

공산주의는 1840년 공적 주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와 합류합니다. 정치 지형이 변화되면서, 평등에 집중하는 급진 공화주의와 노동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서 결사에 관심을 기울이는 새로운 사회주의가 합류했던 것입니다. 정치적 차원의 평등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공산주의가, 사회공동체와 경제적 협동을 지향하는 사회주의와 만났습니다. 노동 문제에 직면하여 불편한 동거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후 공산주의는 새로운 자리매김을 해나갑니다. 공화주의적 뿌리와 분리되면서 프롤레타리아트와 관련됩니다. 1841년 보수주의 프러시아 국가신문은 공산주의를 “현대사회의 산업적 궁핍”과 연결시켰고, 공산주의 사상을 “불행하고 광기에 찬 계급의 비통한 외침”으로 정의했습니다. 1840년대 독일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현대 산업세계와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궁핍, 빈곤, 범죄와 연결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의미는 ‘하층계급’이었습니다. 마르크스는 1843년에 프롤레타리아트를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빈민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빈곤화된 사람들이며 .... 사회의 대대적인 해체에서 귀결되는 대중들” 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노동자 계급이라고 이해하는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산업화의 내부에 포함된 노동자가 아니라 산업화 밖에 내팽겨진 빈민입니다.

 

이 프롤레타리아트가 공산주의와 결부되자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었습니다. 『공산당 선언』의 첫 문단에서 언급된 ‘구 유럽의 모든 세력들’은 직조공 반란, 농민봉기, 영국의 새 구빈법 등 모든 것의 배후에 공산주의자들이 있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현존하는 세계에 대한 불만의 천둥을 뒤따르는 번개의 섬광 속에서 공산주의의 창백한 유령이 드러났다.” 당시 공산주의가 갖게 된 이미지입니다.

여기에는 공산주의가 프롤레타리아트의 궁핍과 분노를 언어로 표현했다는 두려움, 공산주의가 프롤레타리아트와 동일한 것이라는 두려움이 깔려 있습니다. 1840년대에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험한 계급, 사유재산에 대한 약탈적 적대와 동일시하는 것이 보편적이었습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은 빈부 사이의 전쟁의 징후였습니다.

 

『공산당 선언』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가 제시됩니다. 더 이상 궁핍하고 뿌리 없는 빈민이 아닙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산업화의 산물이며, 공장들과 그들이 모이는 도시들에 의해 단련됩니다. 범죄적이며 부정적인 하층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룸펜프롤레타리아트’로 따로 분류됩니다. 이것은 엥겔스가 발전시킨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부르주아의 재산에 대한 위협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계속해서 “현존하는 모든 사회적 조건들의 폭력적 타도”를 강조했으며,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선고를 실행하는 집행자가 되었습니다. 프롤레타리아트를 폭력과 소위 ‘절도 욕구’와 연결하는 것은 부정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것은 변증법적 진보로 바뀌었습니다. 진보의 최고 단계는 프롤레타리아의 혁명과 공산주의 목표의 성취입니다.

 

『공산당 선언』이 당장의 효과를 나타낸 것은 아닙니다. 이 선언의 효과는 부르주아뿐만 아니라 노동자들도 두렵게 했습니다. 한 세대 후 1860년대와 1870년대에 사회민주주의 운동이 독일에 등장했을 때, 공산주의라는 말은 기피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공산주의의 모태는 공화주의, 공화주의의 가치는 평등입니다. 자본주의는 자유주의와 함께 출발했습니다. 흔히 우리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경제 체제로서의 대척점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여기서 추적해 본 공산주의는 정치적 개념으로 시작합니다. 물론 마르크스 이후 공산주의는 생산관계의 역사적 최종 단계로 규정되면서 경제적 개념에 밀착됩니다.

 

조금 웃기는 것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자본주의 국가들이 스스로를 공화주의 체제로 천명한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자유와 평등은 궁극적으로 양립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서로가 서로의 권리를 침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적 소유의 자유가 바탕이 되는 자본주의가 평등을 추구하는 공화주의와 어느 한도까지 양립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여기에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추가하면 상황은 훨씬 복잡해집니다. 민주주의는 民, People이 주인인 체제입니다. 북한을 비롯해 중국 등 공산주의 국가들은 인민, People을 공식 명칭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국가들 역시 민주주의체제임을 역설합니다. 돈이 근본인 자본資本주의와 民이 주인인 민주주의民本 는 또 어디까지 양립할 수 있을까요? 資本과 民本은 1원1표와 1인1표에서 그 차이를 극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돈이 주인인 경제체제에 살고 있으면서 국민이 주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혹은 국민이 주인인 정치제제에 살고 있으면서 돈을 주인으로 모십니다. 공산주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민을 주인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모든 권력은 당의 지도자가 가집니다.

 

공산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 공화주의 !

우리는 민주주의적 자본주의 공화국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우수한 가치들을 조합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념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이 최고의 조합은 현실에서도 끊임없이 삐걱 대고 있습니다. 쏟아지는 뉴스들만 보아도 우리가 이 국가의 주인임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로 가입한 독서 카페의 토론에 참여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이 글은 카페에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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