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캐럴의 『거울나라의 앨리스』에 대해 토론하면서 알게 된 사실 하나.

번역에 따라서 엄청나게 다른 내용이 된다는 것.

 

 

 

 내가 읽은 책은 펭귄클래식 코리아 판으로, 옮긴이는 이소연이다.

 문제가 된 것은 <9장 여왕이 된 앨리스>의

 

 “Take a bone from a dog: what remains?” 부분이다.

 

 

 펭귄클래식 코리아의 번역은 이렇다.

 

"개에서 뼈를 빼봐. 뭐가 남지?"

앨리스는 생각에 잠겼다.

"뼈를 빼면 당연히 뼈는 안 남을 거고요 .... 개도 안 남겠죠. 나를 물려고 달려들 테니까요....

그러면 나도 안 남을 거예요."

"그래서 아무도 안 남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거냐?"

붉은 여왕이 말했다.

"제 생각엔 그게 답인 것 같아요."

"변함없이 또 틀렸구나. 개 정신은 남지."

붉은 여왕이 말했다.

"하지만 전 잘 모르겠...."

"아니 왜 몰라? 자 봐봐. 개가 정신줄을 놓겠지, 그렇지 않겠어?"

"그럴 것도 같네요."

앨리스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러니까 개가 가버려도, 개 정신은 남는 거야!"

여왕이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앨리스가 최대한 엄숙한 목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개랑 개 정신이 각각 다른 길을 가겠죠."

하지만 앨리스는 속으로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우린 모두 정말 바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뼈’를 빼면 ‘정신’ 이 남는다는 말에, 번뜻 헤겔의 ‘정신은 뼈다’ 를가 떠올랐고, 횡설수설이긴 하지만 이런 리뷰를 쓰기도 했다.

 

 

 그런데 독서 토론회에서 한 회원이 ‘정신’ 이란 말은 처음 듣는다고 했다. 그녀가 읽은 책은 북폴리오가 출판한 마틴 가드너의 주석이 달린 『Alice』로 옮긴이는 최인자이다. 이 책은 같은 내용을 이렇게 옮겨 놓았다.

 

 

"다른 뺄셈을 해보자. 개한테서 뼈다귀를 빼앗으면 무엇이 남아 있을까?"

앨리스는 곰곰이 생각했다.

"당연히 뼈다귀는 남아있지 않을 거예요. 제가 뼈다귀를 가지면요. 그리고 개도 남아 있지 않을 거예요. 저를 물려고 달려올 테니까요. 그러면 당연히 저도 남아 있을 수가 없고요. "

"그러면 너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구나!"

붉은 여왕이 말했다.

"저는 그게 답이라고 생각해요."

"틀렸어, 또."

붉은 여왕이 말했다.

"개의 성질은 남아 있어."

"하지만 제가 그걸 어떻게 알 수가..."

"자, 내 말을 잘 들어보라고!"

붉은 여왕이 큰 소리로 말했다.

"개는 화를 낼 거야, 그렇겠지?"

"그렇겠죠."

앨리스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그럼 만일 개가 가버린다 해도 개의 성질은 남아 있을 거라고!"

붉은 여왕은 의기양양하게 설명을 했다.

앨리스는 되도록 엄숙하게 말했다.

"아마 각각 다른 길로 가겠죠."

 

 

첫 번째 차이는 ‘bone’ 에 있다.

펭귄 판은 "개에서 뼈를 빼봐. 뭐가 남지?" 이고,

북폴리오 판은 “개한테서 뼈다귀를 빼앗으면 무엇이 남아 있을까?” 이다.

첫 번째는 개의 뼈 즉 골격을 연상시키고, 두 번째는 개가 입에 문 뼈다귀를 떠올리게 한다.

 

이 차이는 자연스럽게 두 번째 차이를 낳는다.

개에서 뼈를 빼면 혹은 뺏으면,

펭귄 판은 “개가 정신줄을 놓겠지” 로,

북폴리오 판은 “개는 화를 낼 거야” 라 번역한다.

 

살아있는 개에게서 뼈를 빼내려고 달려들면 정신줄을 놓는 것이 당연하고,

개가 좋아하는 뼈다귀를 빼앗으려 하면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다.

각각은 자연스럽지만, 이 두 번역이 하나의 원작에서 나왔다는 것은 놀랍다.

도대체 옮긴이들은 왜 이렇게 완전히 다른 번역을 한 것일까?

 

 

이럴 때, 원문을 찾아보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런데 캐럴은 끊임없이 앨리스 작품들을 수정했다고 한다. 지금도 여러 가지 판본이 나돌고 있다. 어쩌면 두 출판사가 원문으로 삼은 영문 판본이 다를 수도 있다. 확인을 해 본 것은 아니다. 가드너의 주석에도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도 없다. 우리가 찾아본 것은 어느 회원이 가진 어떤 영문판이다.

 

"Try another Subtraction sum. Take a bone from a dog; what remains?"

Alice considered.

"The bone wouldn't remain, of course, if I took-and the dog wouldn't remain; it would come to bite me- and I'm sure I shouldn't remain!"

"Then you think nothing would remain?"

said the Red Queen.

"I think that's the answer."

"Wrong, as usual," said the Red Queen. "The dog's temper would remain."

"But I don't see how-"

"Why, look here!" the Red Queen cried. "The dog would lose its temper, wouldn't it?

"Perhaps it would," Alice replied cautiously.

"Then if the dog went away, its temper would remain!" the Queen exclaimed triumphantly.

Alice said, as gravely as she could,

"They might go different ways."

 

 

이 영문판은 북폴리오 판의 번역과 비슷해 보인다. 'bone'에 대해서는 두 번역 다 가능성이 있지만, 'temper'는 통상 ‘성질’로 번역된다. 게다가 ‘lose one's temper’는 ‘화를 내다’ 는 의미의 관용구다. 물론 캐럴은 여기서 'lose' 를 이중적으로 사용하며 말장난을 한다. ‘화를 내다’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성질을 잃다’로 사용하며, 개가 잃은 성질이 개가 가고 난 뒤에도 그 자리에 남는다고 붉은 여왕이 주장하게 만드는 것이다. remain은 lose의 대구다.

 

그런데 팽귄클래식 판의 번역자는 중학생 정도 되면 알 수 있는 이 평범한 관용구, ‘lose one's temper’ 를 왜 ‘정신줄을 놓다’ 로 옮겼을까? 오역으로 보기에는 너무 쉬운 구절이라, 아무래도 뭔가 이유가 있을 것만 같다.

 

 

오역이든 뭐든 이 번역문은 이상한 효과를 낳는다. 철학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도 대번 헤겔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다. 헤겔은 ‘정신’의 철학자다. 그의 『정신 현상학』의 악명은 오늘날까지도 철학사의 한두 손가락 안에 꼽힌다. 그만큼 유명하기도 하다. 그런데 유물론의 입장에서 보면 정신은 도대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뇌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우리는 여전히 정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호르몬의 혹은 어떤 신경의 영향 아래 있는지 알지 못한다. 대충 어느 영역이라고 뭉뚱그려 말하지만 정신의 실체를 밝히지는 못했다. 헤겔 당시에도 정신에 대한 의견은 분분했던 모양이다. 헤겔은 “정신은 뼈다”라는 정신 나간 듯 한 명제를 남겼다. 이 무한판단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나는 여전히 오리무중에 있다. 다만 헤겔은 남자의 생식기와 비뇨기가 동일하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가장 고차원적인 것과 가장 저차원적인 것이 하나라는 것이다. 생식은 배뇨가 아니지만 배뇨기관 없이는 생식도 불가능하다. 정신은 뼈가 아니지만 뼈로 둘러싸인 뇌 없이는 정신도 없다. “정신은 뼈다”는 어쩌면 정신에 대한 규정이 그 자체로 불가능함을 선언하고 있기도 하다. 정신의 개념은 그 무엇으로도 불가능하다. 막다른 골목, 불가능성 앞에 우리는 종종 동어반복 뒤로 숨는다. “정신은 정신이다.” “법은 법이다.” “아버지는 아버지다” 여기에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냐? 는 이 의기양양함은 사실 무능함의 고백이다. 아버지의 정당성, 법의 정당성이 더 이상 근거를 찾을 수 없을 때 들이대는 폭력이다. 그러므로 “정신은 정신이다” 는 곧 “정신은 뼈다” 와 같지 않겠는가.

 

 

 

 

루이스 캐럴은 앨리스 이야기를 자신이 사랑하는 어린 앨리스 리델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썼다. 그리고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인 캐럴 자신의 지적 즐거움을 위해서도 썼다. 그는 한 문장 안에 두 즐거움을 중첩시키는 데에 놀라운 재능을 발휘했다. 지금도 앨리스를 읽는 두 가지 방법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다. 어린 아이의 시각에서 순수한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는 쪽과 수학과 논리학, 철학의 관점에서 캐럴이 감추어둔 무수한 의미를 찾아내어야 한다는 쪽이 그의 독자층을 두 그룹으로 확연히 갈라놓고 있다.

 

temper 가 우리말의 ‘정신’ 이라는 의미를 가질 수도 있는지, 혹은 펭귄 판의 원본에는 다른 단어가 쓰였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단순히 옮긴이의 오역인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펭귄 판과 북폴리오 판의 뚜렷한 대조는 루이스 캐럴이 의도한 두 가지 효과를 각각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아,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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