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평전
안도현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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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 않은 사람이 그랬을 것처럼 나도 이 딱딱한 제목의 책을 '빨간책방'을 통해 알게 되었다. 빨간책방은 집안일 할때의 배경음으로 좋지만, 사실 독서에는 방해가 된다. 두 시간여의 사전 수다를 듣고 읽는 책은 그 책 고유의 빛을 반 이상이나 죽여버린다. 김빠진 맥주라는 상투어가 이처럼 딱 들어맞는 경우도 드물것이다. 그럼에도 듣고 나면 한번 읽어보고 싶은 책이 생긴다. 안도현의 『백석평전』이 그랬다.

 

처음에 나는 백석의 이름이 무엇일까 궁금했다.  白石은 당연히 호같은 무엇이리라 생각했다. 백석, 백석하면서도 정작 시인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 조금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백석은 몇 개의 이름을 가졌지만, 성이 백씨이고, 필명으로는 백석만을 고집했으니, 우리가 알아야 할 이름은 백석 하나면 족하다.

 

 『백석평전』을 다 읽고 나는 후회했다. 반만 읽을 것을, 아니 6.25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만 읽을 것을, 아니 백석이 '삼수갑산'의 그 삼수의 집단농장으로 쫒겨나기 전까지만 읽을 것을, 후회했다. '학령전 아동문학 논쟁' 에서 밀려나 붓대신 낫을 들어야 했던 장년의 그 시인은 보지 말았어야 했다. 낫때문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 그가 배반해야 했던 그 자신의 시 때문에, 온통 수령과 혁명과 원수와 붉은 깃발로 점철된 그 구호들이 백석의 시일리가 없다고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인으로서 백석은 방황과 절망의 쓴 맛을 보았지만 한 사람의 인간으로 이승에서 보낸 시간을 결코 부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시를 쓰는 자유를 내려놓음으로써 백석은 오히려 더 많은 자유를 누렸던 것은 아닐까?"

 

작가 안도현의 말처럼 북한에서 인생의 후반기를 보낸 백석을 안타까워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백석의 시가 온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그가 써내야  했던 '자기 배신'의 시들이 우리에게 전해진 이상, 그의 자유로움을 자유로움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참으로 힘들다.

 

 

사실 나는 예술적 감수성이 매우 떨어지는 편이다. 그것이 미술이건 음악이건, 시이건 그렇다.  자연히 시를 그다지 즐겨 읽는 편은 아니다.  『백석평전』에 관심을 가진 것은 일제 강점기에서 남북분단 이후를 살아야 했던 한 시인의 삶이 워낙 극적이고 무엇보다 시대의 첨단을 걷던 모던  보이라는 사실이  '백석' 이란 이름으로 대변되는 그 시대의 예술인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녹두빛 더블부레스트를 젖히고 한대의 바다 물결을 연상시키는 검은 머리의 웨이브를 휘날리면서 광화문통 네거리를 건너가는 한 청년'의 모습이 참으로 궁금했다. 순식간에 주위를 몽파르나스로 만든다는 그 모던 보이가.  

 

 

백석의 시는 읽기에도 힘들만큼 평안도 사투리가 심하다고들 한다.  그런데 읽어보니 그닥 어렵지도 않다.  『토지』나  『태백산맥』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백석의 시도 힘들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투리가 아무리 심하다 한들 바다 건너 제주도도 아니고 그래봤자 우리말이다. 백석의 사투리는 그냥 사투리가 아니다. 그 사투리야말로 백석 시의 맛이다. 그 사투리들을 표준말로 옮겨 놓으면 백석의 시는, 과장해서, 카페인 없는 커피가 될 것이다. 특히 우리 남쪽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것이 이제는 TV나 영화 밖에서는 들어볼 수 없는 금지된 언어이기 때문에 그의 쓸쓸함은 더욱 쓸쓸하고 그의 외로움은 더욱 외롭게 느껴진다. 백석 자신에게도 사투리는 그냥 고향의 말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백석은 식민지로 오염되고 왜곡되기 이전의 고향, 즉 시원의 순결성을 가지고 있는 고향과 고향의 방언에 착안했다. 고향의 말인 방언이야말로 몰락의 길로 치닫고 있는 하나의 시적인 역설로 작용할 수 있으리라고 그는 판단했다. 그러니까 백석의 평안도 방언 사용은 향토주의에 매몰된 결과가 아니라 준비된 창작방법론이며 의도된 기획에서 나온 것이었다. p99"

 

 

 『백석평전』에만도 여러 편의 시가 나온다. 그 중에서 아마도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가 가장 유명할 것이다. 나는 이것도 좋지만 <흰 바람벽이 있어>와<'남신의주 유동 박씨 봉방>이 좋다.  그리고 그의 짧은 명태에 관한 시인 <멧새소리>도.

 

처마끝에 명태明太를 말린다

명태明太는 꽁꽁 얼었다

명태明太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볕은 서러웁게 차갑다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明太다

문門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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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1-04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빨간책방을 종종 듣는 편인데 말씀처럼 책을 읽기전에 들으면 어느정도 선입견을 갖게되는 점도 있지만, 이렇게 좋은 책들을 알게되는 행운을 얻게되서 무시할 수 없더라구요. 요즘 안도현 시인에 관한 이야기를 이웃님들 글에서 자주 접해서 그런지 안도현 시인이 참 궁금해지고, 이 책 역시 궁금하네요^^

말리 2015-01-05 10:30   좋아요 0 | URL
네, 그래서 저도 끊지 못합니다 ^^ 읽고 싶은 책은 가능한 안듣고 안 읽을 것 같은 책은 맘 놓고 듣습니다.
 
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처음 써보는 주목 신간이다. 다소 편향된 취향아닐까 싶지만, 선정되면 좋겠다.^^

 

 

 

요즘들어 부쩍  관심이 는 것이 역사다. 인문학의 기초는 역사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역사를 조금 더 알면 문학작품도 철학도 그만큼 더 재미있고 깊이있는 독해가 가능하다.

 

19세기 유럽의 대표 작가 디킨스가 서술하는 영국사는 또 어떤 맛일지, 매우 궁금하다. 유럽 대륙과는 또 다른 길을 걸어 온 영국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 더불어 디킨스의 훌륭한 문장도 함께 할 수 있으니 더할나위 없다. 다만 648쪽의 분량이 만만치 않다.

 

 

 

강준만이 이런 책을 썼다는 것이 우선 눈길을 끌었다. 목차를 잠깐 훑어보니 제목처럼 그렇게 중후한 책은 아닌 것 같다. 이론서는 아니고, 영어 단어의 어원을 중심으로 사회상, 시대상을 가볍게 풀어내는 것 같다. 예전에 유행했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가 생각난다. 이 책의 인문학 버전 정도로 생각해도 될까? 심심할 때, 머리가 무거울 때, 기분 전환이 될 듯 하다.  강준만의 입담도 궁금하고.

 

 

 

 

다빈치와 프로이트. 그 조합만으로 군침이 돈다. 게다가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적으로 들여다 본 다빈치라니! 168쪽으로 분량은 많지 않지만, 아마도 꼼꼼이 들여다 볼 만한 책이 될 것이다. 다만 번역자가 정신분석의 전문가도 예술가도 아니어서 조금 신경이 쓰인다. 그래도 프로이트가 직접 쓴 책이니까 ^^

 

작년에 읽은 <모나리자 훔치기>도 재미있었다. 모나리자 도난 사건과 그 때문에 불멸의 아우라를 획득한 모나리자의 미소. 이 미스테리한 그림에 대한 프로이트의 분석도 무척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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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1-03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나리자를 사랑한... 요 책은 아마도 프로이트의 논문 레오나르도 다 빈치 유년의 기록`을 옮긴 것 같습니다. 저자가 프로이트이니 말이죠. 열린책들에서 나온 << 예술과 정신분석 >> 에 그의 논문이 있습니다.

말리 2015-01-03 12:08   좋아요 0 | URL
네~ 그렇군요. 재미있나요? 재미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만 ^^ ;;

곰곰생각하는발 2015-01-03 14:48   좋아요 0 | URL
제가 가지고 있는 전집이 별로 없는데 그 중 프로이트 전집을 가지고 있씁니다. 탁월합니다. 전집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창조적 작가의 몽상`과 환자 증상 사례인 꼬마 한스, 도라 이야기, 늑대인간 등등은 흥미진진한 문학작품 못지 않으니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그냥 다 좋습니다. 프로이트는 글을 굉장히 잘 쓰는 사람입니다.

말리 2015-01-03 15:09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저도 프로이트 읽어야 하는데 손이 쉬이 가지를 않네요.
 
세계 철학사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지음, 박민수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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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부 중세 철학

 

기독교는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323~337)에 의해 국가적 공인을 받았다. 이후 다른 종교에 비해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다, 392년 이교숭배가 전면 금지되면서 궁극적 승리를 거두었다.

 

중세철학의 본질적 주제는 기독교 교의와 고대 철학 사상의 융합이다. 중세철학은 두 시기로 뚜렷이 구별된다. 첫 번째는 교부철학 Patristik 시대로, 사도들의 활동 시기부터 서기 800년경까지다. 이 명칭은 아버지를 뜻하는 라틴어 ‘파테르pater’에서 유래했다. 두 번째는 스콜라 철학Scholastik 시대로, 서기 800년경부터 중세철학이 종말에 이르는 1500년경까지이다. 이 명칭은 라틴어 ‘스콜라스티키scholastici’에서 유래한 것으로 처음에는 학교 교사를 뜻했으며 나중에는 선교사를 종국에는 교회 교사를 뜻하게 되었다.

 

 

제 1장 교부철학의 시대

 

Ⅰ. 고대 사상과 기독교의 정신적 태도 차이

 

우리 상식과 별반 다른 내용이 없어 생략한다.

 

Ⅱ. 기독교와 고대철학의 최초 접목 - 초기 교부들

 

“이제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고 학자가 어디 있습니까? 또 이 세상의 이론가가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가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 주시지 않았습니까?” 사도 바울의 이 말은 기독교와 철학의 첨예한 대립을 보여준다. 높은 교양을 갖춘 고대말의 희랍〮․ 로마인의 정신과 절대적인 도덕성을 요구하며 모든 현세적인 것을 멸시했던 초기 기독교인들의 정신은 화합할 수 없는 차이를 드러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포교를 위해 이교적 교양인들에게 기독교를 변호할 필요가 있었고, 이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고전적 교양을 익히고 철학적 소양을 쌓아야 했다. 이런 활동을 시도한 사람들을 호교론자라 한다. 유명한 호교론자인 테르툴리아누스(160~220)는 “불합리한 까닭에 나는 믿는다.”는 경구를 남겼다(고 믿어진다). 이 경구는 신앙의 진리와 사유의 진리는 완전히 다른 영역에 있다는 그의 근본사상을 적확하게 보여준다. 그는 신앙의 진리를 사유의 진리 보다 높은 진리로 확정하며, 이 둘 사이에 대립이 있을 경우, 신앙에 어긋나는 모든 것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학에 대한 철학의 종속, 신앙에 대한 지식의 종속에 대한 이러한 요구는 장차 모든 기독교 철학의 특징을 이룬다.

 

Ⅲ. 기독교 내부의 위험

 

1. 그노시스파

 

기독교는 기원초의 수세기 동안 적대적 환경에서 입지를 굳히기 위해 부단히 고투했다. 이런 와중에 기독교 내부에서도 위협적인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중 가장 영향력이 컸던 운동이 그노시스파Gnosis였다. 그노시스는 희랍어로 인식이란 뜻이다.

 

그노시스파는 악의 존재를 해결하기 위해 창조주로서의 신과 구세주로서의 신을 구별했다. 구세주인 신은 무한히 자비로운 반면, 창조주인 신은 구세주와 때로는 적이 되기도 한다. 그 때문에 창조주가 만든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죄에 빠진 것은 더 이상 인간만의 책임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개개 인간의 영혼이란 선한 원리와 악한 원리의 영원한 투쟁이 벌어지는 싸움터일 뿐이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원죄를 벗고 새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의 투쟁을 자기 내면에서 직관하고 인식하는 일이다. 그노시스파는 신앙보다 이런 인식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 이 때문에 이 운동 전반에 그노시스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노시스파는 신비주의와 결합되기도 했는데, 신에 대한 인식 역시 이성적 인식이 아니라 신비적 인식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

 

2. 마니교

 

페르시아인 마니에 의해 창시되었다. 마니교는 유대교를 단호히 거부하고 페르시아와 인도 사상을 기독교와 결부시켰다. 마니교의 기본 관념은 영원히 병존하는 두 세계이다. 신성한 빛의 아버지가 지배하는 빛의 세계와 어둠의 아버지와 그의 악마들이 지배하는 어둠의 세계가 투쟁한다. 예수는 빛의 세계에서 강림한 인류의 구원자이고 야훼는 어둠의 아버지다.

 

Ⅳ. 교회 통일의 확립

 

교회는 한편으로는 교권제도를 확립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교적 미신을 배척하는 가운데 기독교 진리를 철저히 고수해나감으로써 내외적인 안정을 이룰 수 있었다.

 

Ⅴ. 아우구스티누스 : 354 ~ 430

 

아우구스티누스는 희랍 철학의 고전시대 이후로는 처음 등장한 탁월한 철학자다. 그의 저작을 통해 신흥 기독교 문화가 최초로 수준 높은 철학적 표현을 얻게 되었다. 그의 사상은 5~6세기에 걸쳐 전체 기독교 세계를 휩쓸었으며, 중세 전체를 규정하는 정신적 유산이 되었다. 플라톤을 제외한다면 『신국론』만큼 인간의 사상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저술도 없을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정론을 주장했다. 자비로운 신은 인간을 구원하지만, 구원은 선택적이며 철저히 신의 의지에 달려 있다. 구원은 현명하고도 불가해한 신의 호의에 따라 애초부터 결정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 감정에 반하는 예정설은 교회의 이익에도 배치되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한발 물러나 중도적 입장을 취했다. 신은 애초부터 구원과 저주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전지전능함에 의해 최후의 결과를 내다보는 것뿐이다.

 

Ⅵ. 아우구스티누스 이외의 후기 교부들

 

로마제국은 동로와 서로마로 갈라졌고, 서로마는 서기 500년경에는 제국의 거의 대부분이 게르만족의 지배에 들어갔다. 동로마는 이슬람교도들에게 시달리고 있었지만 15세기까지 천년 비잔티움 제국을 유지했다.

 

혼란의 와중에도 교회는 지속적으로 세력을 강화했다. 강력한 교황들이 정치적 권력을 획득했고, 수도회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내적인 힘을 풍부히 길러나갔다. 동방에서 시작된 수도회는 529년 누르시아의 베네딕투스가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창설한 이후 전체 기독교 세계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거의 모든 고전 라틴어 문헌을 보유할 수 있는 것은 수도회의 수도원과 도서관 덕분이다.

 

 

 

제 2장 스콜라철학 시대

 

서유럽이 역사의 중심에 처음 등장한 것은 서기 400년에서 800년 사이의 암흑기를 벗어나면서부터다. 중세문화의 중추는 지중해연안에서 알프스 북쪽의 프랑크왕국으로 옮겨갔다. 과거의 야만인들이 문화의 주역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런 변화와 더불어 독일적 요소들이 동방의 슬라브족에게 전파되었고, 황제와 교황이 각각 지배적 입지를 굳히며 중세 내내 경쟁했다. 전체 중세문화는 종교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정신문화와 철학 역시 통일 이루었으며 초국가적 성격을 띠었다. 모든 지역에서 라틴어가 사용되었고, 중요한 저작은 라틴어로 집필되었다. 이때의 철학은 성직자들에 대한 교육과정의 하나로 수도원 학교에서 생겨났다. 학교교사 혹은 교과목을 뜻하는 스콜라철학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스콜라철학의 과제는 애초에 정해져 있었다. 신앙이 확정지은 진리에 이성적인 기초를 제공하고, 그 진리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것이다. 스콜라철학은 한마디로 신학의 시녀였다.

 

Ⅰ. 초기 스콜라철학 : 보편논쟁

 

보편논쟁은 현대철학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유명한 논쟁이다. 보편자를 보는 관점에 따라 실재론과 유명론으로 갈라졌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는 명제에서 소크라테스는 개별자이고 인간은 보편자이다. 실재론은 보편자에 대해 개별자보다 더 높은 현실성을 부여한다. 반대로 유명론은 보편자란 한갓 이름에 불과하며 개별자만이 현실적이라고 주장한다. 보다시피 중세의 실재론은 오늘날과는 그 의미가 판이하게 달라, 오늘날의 관념론에 가깝다.

 

실재론자의 공식은 ‘universalia ante res 즉 일반개념은 개별 사물보다 앞서 존재한다’ 였다. 유명론자의 공식은 ‘universalia post res 일반개념은 개별 사물 뒤에 존재한’' 였다. 이 두 입장을 절충하여 아벨라르는 ‘universalia in res 일반개념은 개별 사물 속에 존재한다’ 는 공식을 제안했다. 개별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현실적이라는 주장은 부조리하다. 보편자의 구체화인 개별자들 사이의 차이를 비본질적인 것으로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직 개별자만이 현실적이고 일반개념은 한갓 이름에 불과하다는 것도 그릇되다. 일반개념에 포괄되는 개별사물들 내에는 본질의 실재적 동일성이 존재하고 이것이 일반개념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개념은 모든 인간에 존재하는 보편 인간성이라는 동종의 현실성에 상응한다. 물론 이런 보편성은 오로지 개별 인간 내에서 존재할 뿐, 그 바깥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반개념은 사물들 속에 있는 것이다. 아벨라르의 견해는 일종의 변증법적 지양이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에서 일반 개념은 오로지 사물들 속에 있다. 그러나 신의 입장에서 일반개념은 사물에 앞서 존재한다. 일반개념은 피조물의 원형으로서 신의 정신 안에 있다. 인간의 입장에서 일반개념은 실제로 사물들 다음에 존재한다. 일반개념은 우리가 사물들의 일치로부터 도출해 내야 하는 개념들로서 존재한다.

 

Ⅱ. 중세의 아랍철학과 유대철학

 

아랍세계의 종교적 중심지는 메카지만, 문화적 중심지는 바그다드와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은 8세기에 아랍에 의해 정복되어 특히 스페인 남부는 1492년까지 아랍의 영토로 남아있었다. 스페인은 10세기 서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인구 밀도가 높은 곳이기도 했다. 이슬람문화는 고대 희랍의 학문과 결합하여 아랍-희랍 철학을 꽃피웠다. 아랍-희랍 철학은 중세 유럽의 기독교 철학이 희랍 학문과 철학의 유산을 습득하고 무엇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되었다. 이런 이유만으로도 아랍-희랍철학은 서양철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무어족이 다스리던 스페인의 여러 대학에서 이슬람교도와 유대교도 그리고 기독교도들이 서로에 대해 상당한 관용을 보이면서 함께 교수활동을 했다. 거대한 도서관들에는 이들 세 종교의 문헌은 물론 이교철학의 번역물이나 주석서도 소장되어 있었다.

 

Ⅲ. 전성기의 스콜라철학

 

13세기에 들어와 서양의 사상은 새로운 도약을 시작했다. 도약의 원인은 무엇보다 이슬람 세계와의 생산적인 만남과 이를 매개로한 고대 희랍철학과의 만남이었다. 12세기에는 그 이전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형이상학과 자연과학 문헌을 포함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저작이 점차 서양에 알려지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성은 높아질 대로 높아져 그의 저작은 그 무엇도 능가할 수 없는 현세적 지혜의 총화로 간주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16세기까지 서양 철학을 지배했다.

 

중세 전성기에 생겨난 대학들은 철학의 훌륭한 배양소가 되었다. 중세의 대학은 모든 것을 총괄하는 기독교 신학을 완성하기 위해 지식의 전 영역을 포괄했다.

 

대학 못지않게 중요했던 기관으로 도미니쿠스파와 프란체스코파라는 두 개의 탁발수도회가 있었다.

 

스콜라철학의 대표자는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 토미즘은 도미니쿠스파의 공식철학이 되었다. 1322년 토마스는 성인으로 추증되었으며, 1879년에는 토미즘이 카톨릭 교회의 공식 철학으로 인정되었다. 1931년 새로 제정된 신학교 수업 규정에 의하면, 철학과 사변신학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학설과 원리에 따라 강의되어야 한다.

 

스콜라 철학의 세계상은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에 의해 가장 아름다운 시작품으로 표현되었다. 중세가 해체기로 접어들기 직전에 창조된 단테의 『신곡』은 그 수백 년 동안의 정신과 감정이 웅대한 세계묘사로 총괄되어 있다.

 

Ⅳ. 후기 스콜라철학

 

윌리엄 오컴(1290~1349)의 유명론의 혁신은 스콜라철학의 기반에 대한 공격이었으며 새로운 시대의 여명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오컴의 유명론은 기독교 교의에 적용될 경우 교의 자체를 흔들어 놓을 수도 있었다.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오컴은 신학 전체를 이성적 이해가능성의 영역에서 분리시켰다.

 

모든 지식의 토대는 개별자에서 출발하는 경험이지만 인간은 신에 대해 이런 식의 경험을 할 수 없으므로 인간은 신에 대한 본래적인 지식을 획득할 수 없다. 결국 신학은 정확한 논증 등을 구사하는 학문이 될 수 없다. 신학과 현세 사이에 분리선을 그은 오컴은 실제 교회정책에서도 분리선이 존중되기를 바랐다. 오컴은 교회의 세속화를 가차 없이 공격했다. 오컴은 현세를 거부하고 교회의 과제를 종교 영역에 국한시킬 것을 요구했다.

 

오컴의 유명론과 그의 추론들은 스콜라철학에 의해 수백 년 동안 유지된 신학과 철학, 신앙과 지식의 연대를 실제로 끊어버렸다. 두 영역은 독립되었다. 이중의 진리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오컴의 행동이 낳은 중대한 결과이며,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지식과 신앙은 각자 고유한 법칙에 따라 발전하며 서로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러한 분화가 우리의 전체 근현대 문화를 관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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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철학사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지음, 박민수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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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부 희랍 철학

 

 

희랍철학의 창시자들은 서양 철학의 선조이기도 하다. 희랍 세계에서 본래적 의미의 철학이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550년경이다. 흥미로운 것은 희랍뿐만 아니라 인도, 중국 등 아시아의 철학도 대체로 비슷한 시기에 발흥하였다. 노자, 공자, 석가 등 중요 사상가들이 기원전 6세기에 출현했다. 그 누구도 이 세계사적 일치를 설명하는 못하지만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정말이지 놀랍다. 독일의 한 철학자는 이 시대를 두고 ‘세계사의 축을 이루는 시대’ 라고 하기도 했다.

 

희랍철학 그리고 본질적으로 그 파생물이라 할 수 있는 로마 철학은 기원전 6세기에 시작되어 기원후 6세기에 종결된다. 서기 529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플라톤 아카데미를 폐쇄했는데, 이 사건이 고대의 궁극적 종말이라 할 수 있다. 희랍철학의 역사는 1000년에 걸쳐 전개되었다.

 

희랍철학은 크게 세 시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시대가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의 시대다. 신학적 표상에서 벗어나 만물의 근원을 이루는 하나의 원소를 찾으려 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 시대는 기원전 600년경에서 기원전 4세기 초까지다.

 

첫 번째 시대에서 두 번째 시대로 넘어가는 시기는 소피스트들의 시대다. 이후 희랍철학의 전성기를 위한 발판이 되었다.

 

두 번째 시대는 희랍철학의 황금기로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다. 아테나이가 중심이 된 이 시대의 철학을 아티카 철학이라고도 부른다. 황금기는 기원전 5세기 중반 경 소피스트들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어 기원전 322년 아리스토텔레스의 죽음으로 끝난다.

 

세 번째 시대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철학이다. 수세기 동안의 점차적 몰락을 거쳐 기원후 6세기에 이르러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가 이 시대를 대표한다.

 

 

 

 

제 1장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

 

이 시기 철학자들의 저작은 단 한편도 온전하게 남은 것이 없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토막글들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으로 묶여있다. 이 철학자들의 견해는 이후 사상가들의 저작에서 간접적인 형식으로 전해지는 것들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간접 전달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Ⅰ. 밀레토스의 자연철학자들

 

밀레토스는 기원전 6세기의 주요무역항으로, 희랍 세계의 가장 부유한 도시였다. 여러 인종과 종교가 교차하는 이 도시는 희랍의 학문과 철학의 발생지이다.

 

대표적 철학자로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가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든 존재자의 생성을 하나의 궁극적 원소 내지 물질적으로 파악된 근본 원리에 의해 해명하였다는 점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물을, 다음에는 공기를 궁극 원소로 이해했다.

Ⅱ. 피타고라스

 

‘필로소피’와 ‘코스모스’는 피타고라스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피타고라스는 자신을 현자(소포스) 대신 필로소프 즉 지혜의 친구 혹은 지혜의 애호가라 부르게 했다. 피타고라스가 세계를 코스모스라 불렀던 것은 세계의 모든 것이 수적 관계에 의해 질서 있고 조화롭게 배열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피타고라스가 세운 단체는 일종의 밀교라 할 수 있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엄격한 계율로 인해 지극히 폐쇄적인 비밀결사의 성격을 띠었다. 이들은 정치 영역에서 권력을 획득하고자 했으며, 다분히 귀족주의적 경향을 추구했다. 이런 시도는 세인의 공격을 초래했고, 크로톤의 집회소가 방화로 붕괴되면서 학파 자체가 처참히 괴멸되었다. 피타고라스학파는 규율이 갖춰진 폐쇄적 공동체에서 종교·철학적 사상을 실행에 옮기려 했던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Ⅲ. 엘레아학파

 

엘레아는 이탈리아에 건설된 희랍 식민지였다. 이 학파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는 파르메니데스다. 파르메니데스는 생성이나 운동은 실제로 가능하지 않고 오로지 불변의 항구적 존재만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파르메니데스의 비판자들은 다원성과 변화를 부정하는 이론이 모순을 낳는다고 반박했다. 제논은 이 반박에 대해 오히려 존재자의 다원성과 운동의 실재성을 가정하는 것이야말로 해결될 수 없는 모순을 낳는다는 것을 입증하려 했다.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나 ‘날아가는 화살’에 관한 제논의 역설이 탄생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제논의 논증은 명백하고 자명하게 여겨지는 견해나 진술도 우리가 그것을 비판적으로 파고든다면 의심스럽고 모순적인 것으로 밝혀질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해주었다는 것에 중요한 의의가 있다.

 

Ⅳ. 헤라클레이토스와 기원전 5세기의 자연철학자들

 

헤라클레이토스는 변증법적 발전 이론의 최초 모델을 개발했다. 이 변증법은 2000여년이 지난 후 헤겔과 마르크스에게서 부활했다. 변증법이라는 말은 ‘대화하다’ 라는 뜻의 희랍어에서 유래했다. 희랍인들은 ‘주장과 반론에서 논증의 기술’이란 의미로 이 용어를 사용했다. 변증법의 좀 더 현재적 의미는 끊임없이 새로운 차원에서 전개되는 대립적 힘들의 상호 작용인 생성의 흐름 속에서 진보의 법칙을 통찰해 내는 발전 이론이란 뜻이다.

 

근원적 에너지로부터 부단히 다양한 것이 전개되도록 만드는 위대한 법칙은 바로 대립의 통일이다. 모든 발전은 양극의 대립적인 두 힘이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 일어난다. “신은 낮과 밤이며, 겨울과 여름이고, 전쟁과 평화이고 또 포만과 굶주림이다.” 이념과 이념, 인간과 인간, 남자와 여자, 계급과 계급, 민족과 민족이 투쟁하는 가운데 조화로운 세계 전체가 형성된다. 이런 의미에서 투쟁 내지 전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이고, 모든 것의 왕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기 위해 자신의 대립물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그것이 어떻게 자신과 불화하면서도 자신과 일치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활과 리라처럼 서로 갈등하면서 조화를 이룬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영원한 평화 속에서 모든 투쟁이 종식되기를 갈망하는 사람은 완전한 중지와 죽음을 바라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밀레토스의 자연철학자들은 물과 공기를,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을, 엘레아학파에서는 흙을 만물을 이루는 궁극적 원소로 보았다. 엠페도클레스는 이 네 가지 근본물질을 동등하게 배치시켰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불, 물, 공기, 흙이라는 ‘4원소’ 관념이 처음으로 정립되었다. 엠페도클레스는 하나의 원소를 찾는데 몰두했던 고대 자연철학을 확실히 종결시켰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은 주로 소아시아와 남부 이탈리아 및 트라키아 지방의 희랍 식민지에서 발달했다. 본토의 뿌리 깊은 인습에서 멀리 떨어진 식민 신천지의 분위기는 아테나이를 비롯한 본토의 도시들에 비해 자유로운 정신사조들이 등장하기에 훨씬 유리했다. 희랍의 본토 도시들에서는 전통과 인습, 특히 종교적 인습이 거의 흔들림 없이 영향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500년 경 소아시아에서 태어난 아낙사고라스는 철학을 아테나이에 전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가 죽은 후 아테나이에서 철학이 놀랍도록 융성했다. 아낙사고라스는 ‘누스Nous’ 라는 추상적 철학 원리를 최초로 도입했다. 누스는 이성적이고 전능하지만 비인격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사유의 정신’ 이다.

 

 

 

제 2장 희랍 철학의 전성기

 

Ⅰ. 소피스트

 

기원전 5~6세기는 정신사에서 거의 유례를 찾기 힘든, 놀라운 시기다. 자연적 세계 해명의 지극히 다양한 가능성들이 전개되기 시작하는데, 희랍과 서양철학의 모든 방향은 바로 여기에 근원과 선구를 두고 있다.

 

소피스트의 등장은 희랍의 정치적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페르시아전쟁이 희랍세계의 승리로 끝나자, 희랍 특히 아테나이는 번영을 구가했고 좀 더 높은 교양을 욕망했다. 아테나이의 민주정 체제에서는 민중의회와 민중법정에서 민중을 휘어잡는 능란한 연설 기술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정치가와 연설가들에게는 철저한 훈련이 필요했는데, 이에 부응했던 사람들이 소피스트들이었다. ‘소피스타이Sophistai’는 ‘지혜의 스승’이란 뜻으로. 소피스트들은 일종의 방랑교사였다. 이들은 여러 도시를 떠돌며 일정한 보수를 받고 갖가지 기술과 재주, 특히 논변술을 가르쳤다.

 

대다수의 소피스트들은 객관적 인식이란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가졌다. 객관적 기준이 없어지면 결국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누가 옳은 듯이 보이는가가 중요하게 된다. 이것은 논증의 영역뿐 아니라 행위의 영역에도 적용되어, 궁극적 중요성을 갖는 것은 성과였다. 논변술도 논증의 기술이기보다는 설득의 기술이었다. 윤리 문제에서도 모두에게 구속력을 갖는 객관적 법이란 없고 오로지 강자의 법만 존재한다고 보았다.

 

소피스트들은 진리와 정의의 객관적 기준을 부인했다는 점 말고도 수업의 대가로 적지 않은 보수를 받곤 했다는 점 때문에 그 명칭이 다소 부정적인 함의를 띠게 되었다.

 

소피스트의 대표적인 인물은 프로타고라스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는 그의 말은 매우 유명하지만, 이 말은 언뜻 보기와는 달리 인간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프로타고라스가 말하는 인간이란 보편 인간이 아니라 개별 인간이다. 즉 인간은 개개인 모두 자신만의 척도를 가진다는 뜻이다. 소피스트들의 공통된 사상처럼 이 말 역시 절대적 진리는 없고 상대적 진리만 있으며, 객관적 진리는 없고 주관적 진리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피스트들은 희랍철학에서 자연이 아니라 인간에게 완전히 주목한 최초의 철학자들이다. 이들은 사유 자체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고 그 조건과 가능성 및 한계를 비판한 최초의 철학자이기도 하다. 또한 윤리적 가치 기준 역시 철저히 이성적으로 고찰하여 윤리학을 철학적 체계에 논리정연하게 통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소피스트의 등장은 과도기적 현상이었지만, 이것이 없었다면 이후 아테나이 철학의 번영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의의를 지녔다.

 

Ⅱ. 소크라테스 : 기원전 470년경 ~ 기원전 399

 

소크라테스의 최후를 이해하려면 당시 아테나이의 정치적 상황을 알아야 한다. 아테나이의 민주정치는 물론, 현대적 기준으로 보면 노예와 여자를 시민에서 제외시켰다는 점에서 지극히 불완전하지만, 당시의 기준으로는 그 원칙이 극단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귀족주의 정파들은 이 정치형태를 원칙적으로 반대하고 있었다. 특히 30년에 걸친 펠로폰네소스 전쟁 동안 힘의 결집이 중요한 와중에도 아테나이에서는 정권을 쥔 민주주의 세력과 스파르타식 귀족주의를 선망하는 세력 사이에서 치열한 당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현실정치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귀족주의 정파의 옹호자로 간주되고 있었다. 아테나이가 전쟁에서 패하자 민주정도 일시적으로 붕괴했지만 이후 민주주의자들이 다시 정권을 장악했고 이로써 소크라테스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신성 모독이란 죄목으로 독배를 마셔야 했다.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 그노티 세아우톤 gnothi seauton’ 고 외친 이유는 그가 덕과 앎을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바른 것이 무엇인지 모르면 바른 것을 행할 수 없는 것처럼, 바른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바른 것을 행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에게 스스로의 무지를 깨닫게 하면 자기 검증과 반성으로 나가게 할 수 있다고 소크라테스는 생각했다. 인간이란 자기 성찰과 반성을 통해 자신이 줄곧 빠져있던 도덕적 빈곤과 맹목성을 깨닫게 되면, 도덕적 이상에 대한 동경을 품고 이를 추구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영향은 실제 그가 가르친 내용보다 그의 독보적인 인품에 근거한다. 소크라테스의 등장 이후로 역사에서는 문화적 힘이 작용하기 시작했다. 그 힘이란 자기 자신 속에 굳게 뿌리를 둔 자율적이고 도덕적인 인격을 말한다. 선 그 자체를 위해 헌신하는 내적으로 자유로운 인간이 될 것을 설파하는 것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복음이다.

 

Ⅲ. 플라톤 : 기원전 427 ~ 기원전 347

 

플라톤이 배격하고 극복하려한 것은 소피스트 사상이다. 소피스트는 사유와 행동에서 보편적인 구속력을 가진 척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플라톤에게 철학의 과제는 반대로 그러한 기준이 존재하며 그것을 획득할 방법도 있음을 보여주는 것에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 사유와 행위의 기준은 영원한 이데아 안에 주어져 있으며 우리는 사유와 예감에 의해 이 기준을 포착할 수 있다.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는 본래적 수단은 개념적 사유, 플라톤의 용어로는 변증법적 사유다. 수사학은 설득의 기술일 뿐이며, 변증법이야말로 대화라는 공동의 탐색에 의해 보편타당한 것으로 나아가는 기술이다. 변증법적 사유는 한편으로 개별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으로, 제약된 것에서 무제약적인 것으로 상승하며, 다른 한편으로 모든 중간 단계를 거쳐 보편적인 것에서 특수하고 개별적인 것으로 하강한다. 플라톤의 저작이 거의 모두 대화형식을 취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플라톤에게 이데아는 사유에 의해 추출된 보편적 개념이 아니다. 이데아는 철저히 실재적이다. 동굴의 비유에서 보듯, 이데아만이 유일하게 참된 실재성을 갖고 있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표상은 오히려 그림자에 불과하다. 개별적 사물은 소멸하지만 이데아는 불멸의 원형이기에 무한히 존속한다.

 

보편적인 것에 개별적인 것보다 더 높은 실재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거꾸로 개별적인 것만이 현실적이고 보편적 이데아란 그저 우리 머릿속의 구성물인 것인지는 철학의 근본 문제 중 하나이다. 어쨌거나 플라톤에게는 이데아만이 본래적 현실성을 지닌다.

 

플라톤은 다양한 정체, 즉 국가 조직 형태와 그에 부수되는 인간 유형을 탐구하였다. 『국가 ·정체』에는 다섯 가지 형태의 정체가 나오는데, 제7권의 철인정치와 제8권에서 다루는 명예정, 과두정, 민주정, 참주정이 그것이다. 그런데 『세계철학사』의 저자는 명예정을 빼고 네 가지 정체만 다루고 있다.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 부분은 아무래도 『국가〮·정체』에서 직접 인용하는 것이 오히려 쉽고 도움이 될 것 같다. 소크라테스는(이 책도 역시 대화 형식으로 소크라테스가 등장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철인정치를 이상적인 정체로 주장하며, 나머지 네 가지를 잘못된 정체로 비판한다.

 

「네 가지 유형의 대표적인 정체들은 최선자 정체가 점진적으로 쇠퇴되어 감으로써 생기게 되는 형태들인데, 이는 우생학적으로 훌륭한 자질을 가진 아이들의 출산에 실패하여, 통치자들 속에 이질적 성향을 지닌 자들이 섞이게 된 데서 비롯된다. 그래서 처음으로 변질된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정체가 ‘명예 지상 정체’ 또는 ‘명예 지배 정체’로 불리는 것으로서, 이는 최선자 정체와 과두 정체의 중간에 있는 것이다. 이 정체에서는 이성적인 것보다 격정적인 것이 우세한 탓으로, 승리와 명예에 대한 사랑이 지배하는데, 축재에 대한 욕구도 대단하다. 그 다음으로 생기게 되는 것은 과두 정체인데, 이 정체는 평가 재산에 근거하여 통치자들을 갖는다. 따라서 이 정체에서는 끝없이 재산을 끌어 모으는 부류와 이들에게 재산을 넘겨주게 된 가난한 부류가 대립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민주 정체가 탄생하게 되는 것은 이 대립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이김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과두 정권을 장악했던 자들을 숙청한 다음, 모두가 평등권을 누리며 관직도 추첨에 의해서 배정한다. 민주 정체에서는 자유가 넘쳐, 무슨 말이든 할 수 있고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된다. 그러나 부에 대한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이 과두 정체를 몰락시켰듯, 이번에는 자유에 대한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과 그 밖의 다른 것에 대한 무관심이 민주 정체를 몰락시키고, 참주 정체를 탄생시킨다. 개인적 야망의 달성을 위해 가진 것이 별로 없는 민중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참주가 된 자로 인해서 결국에는 나라 살림이 거덜 나고 만다. p505~506」

 

인용문은 제 8 권의 내용을 요약 설명하고 있는 , <제 8권의 논의 전개> 부분이다. 제 7권은 그 유명한 동굴의 비유와 철인정치를 다루고 있다. 우생학이라든가 현대의 관점에서는 비윤리적이고 비민주적인 생각도 있지만, 이천 여 년 전 희랍세계의 정치적 현실에서 나온 플라톤의 국가론은 그 시대의 맥락에서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여하튼 다시 『세계철학사』로 돌아와, 이상 국가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설명을 들어 보자.

 

먼저 국가는 출생 신분에 관계없이 아이들에게 균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음악, 체육, 계산, 수학, 변증법 등과 더불어 고통과 긴장과 결핍을 견뎌내는 훈련을 실시한다. 20세가 될 때까지 이런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고위직 후보 자격을 박탈한다. 이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다시 10년간의 교육을 받고 또 한 번 선발 과정을 거친다. 통과한 사람은 5년 동안 철학 교육을 받는다. 35세가 될 때까지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한 사람은 이제 관념의 세계에서 냉혹한 현실공간으로 내려와 15년 동안 생존 현장에서 실전 훈련을 거쳐야 한다. 혹독하고 냉정한 생존 투쟁을 견디고 50세가 되면,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남자로서 지도자의 역할을 맡게 된다. 이들이 바로 플라톤이 꿈꾸었던 철학자 왕 혹은 왕이 된 철학자 이다. 이들 수호자들은 사유재산을 가져서도 안 되고, 아내와 자식도 사적으로가 아니라 공적으로 공유해야 한다. 최선의 남자들은 최선의 여자들과 가능한 자주 성관계를 가져 최상의 자식을 낳아야 한다. 그러나 이 자식이 누구의 자식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도록 해야 한다.

 

플라톤의 이상국가가 현실에서도 과연 이상국가가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수천 년 전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이지 놀랍다.

 

. 아리스토텔레스 : 기원전 384 ~ 기원전 322

 

플라톤의 가장 위대한 제자이자 적수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의(즉위 이전) 가정교사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차적으로 과학자였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 세계의 과학화가 시작되었다. 그는 구체적 사물과 사실을 수집하고 기록하였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통일적 원리들 아래 정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독자적 학문으로서의 논리학을 창시했다. 모순율, 동일률, 배중률, 충족이유율을 사유의 네 가지 원칙으로 내세웠다. 다른 희랍인들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인간의 최고선이 행복이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는 명제는 매우 유명하다. 그는 법률과 도덕에 기초한 선한 국가에서 시민들의 윤리적 공동체를 이룩하는 것이야말로 인륜의 지고하고 본래적 형식이라고 생각한다. 정치란 실제에 적용된 윤리학일 뿐이다. 덕의 고찰은 윤리학의 전 단계이자 이론적 부분에 불과하며, 실제에 적용된 윤리학이자 윤리학의 실천적 부분이 되는 것은 국가론이다.

 

 

제 3장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희랍과 로마의 철학

 

헬레니즘 시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망시기와 거의 일치하는) 알렉산더의 사망시기에서 대략 기원을 전후하는 시기까지이다. 정치적 독립을 상실한 이후에도 아테나이는 오랫동안 철학적 중심지로 머물렀다. 헬레니즘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철학 연구의 뜻을 품은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활동지로 찾아왔다.

 

고대 희랍 철학과 문화의 특성은 질서 잡힌 우주의 총괄 개념으로서의 코스모스, 세계의 근원적 현상이며 만물을 지배하는 이성인 로고스, 윤리적 선과 가까이 있는 미에 대한 몰입을 뜻하는 에로스 등 몇몇 개념으로 요약될 수 있다.

 

로마인은 철두철미 실제적인 민족이었다. 언어와 문학 이외에 로마인이 남긴 가장 위대한 업적은 로마법과 전혀 새로운 차원의 완전성을 띠고 발전한 국가제도이다. 이 시대 철학에서는 사변적 경향이 줄어들고 윤리학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된다. 그에 따라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에서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가장 중요한 사상가로 부상한다. 이 두 철학자의 학설에서는 인간과 윤리학에 대한 비희랍적 관심이 당시로서는 가장 강하게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은 예술과 종교 이상으로 당대를 지배하는 정신적 힘이 되었다. 기독교의 대두로 인해 해체를 경험할 때까지 철학은 대로마제국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Ⅰ. 스토아학파

 

인간은 본성상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삶은 이성적인 삶이다. 이성적 삶이 유일한 덕이며 행복이다. 이성적 삶과 덕과 행복은 동의어이다. 덕은 동시에 유일한 선이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하며 무엇이 아무래도 좋은 것인지를 인식하는 일이다. 그런데 올바른 가치를 인식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려는 과정에서 우리는 정념의 방해를 받게 된다. 정념은 이성을 현혹하고 악한 것을 추구하게 만든다. 인간의 과제는 이런 정념과 지속적으로 투쟁하는 데 있다. 이런 정념을 완전히 극복한 이후에야 덕이라는 목표에 도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평정의 상태를 스토아 사상가들은 ‘아파테이아aphatheia’라 부른다. 스토아학파의 핵심을 금욕주의라 생각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스토아주의의 세계사적 의의는 기독교와의 연관성에 있다. 스토아 사상가들은 금욕적 도덕을 엄수하고 모든 외적 재물을 경시하라고 설파한다. 이들은 세계 전체가 지고한 존재에서 구현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민족과 계층의 구별을 넘어 보편적 인간애를 요구한다. 이 모든 점에서 스토아학파는 기독교에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중세에는 세네카가 최초의 기독교인 중 하나라는 견해가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스토아학파 이외에도 에피쿠로스학파, 회의주의학파, 절충주의학파, 신플라톤주의 등이 이 시대 희랍〮〮로마 철학을 대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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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종 트위터는 지식인의 무덤이라는 생각을 한다. 자기가 자기를 파묻는 그런 무덤 말이다. 즉흥적으로 내뱉은 말, 실없는 농담 한마디가 책에서 혹은 공적 활동에서 쌓아온 이미지를 무너뜨린다. 어쩌면 툭 튀어 나온 그 말들이 그가 쓴 책보다 더 그라는 인간을 잘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몇몇의 이름들은 그렇게 묻혔다.

 

 

황현산이라는 노학자를 알게 된 것은 얼마 전 트위터에서다. 1945년생이니 트위터 입문 자체가 예사롭지는 않다. 특히 트위터의 사정을 잘 아는 주변인들에게는 무척 염려스러운 일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사실 트위터는 이전투구라는 말 그대로, 진흙탕 바닥이 아닌가. 몇몇 맨션들이 황현산의 트위터 입문과 우려를 전하기 시작했고, 곧 이어 그의 맨션들이 리트윗 되기 시작했다. 트위터에서는 보기 드문, 좋은 말들이었다. 그의 곧고 깨끗한 문장에 끌려 나도 팔로우를 했다.

 

“구두가 크십니다, 불판이 뜨거우십니다, 서비스업체 직원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직원이 무식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말하라고 시키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말이 어찌 되건 손님만 좋아하면, 나라가 어찌 되건 돈만 벌면, 결국 같은 생각이다.”

 

황현산이 일흔이 다 된, 불문학자이자, 비평가이며, 고려대 명예교수라는 것도 이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 만큼 그의 맨션 어디에도 일흔 먹은 노인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문학공부 : 세월호 참사로 슬퍼하는 한국인에 대한 글을 쓰라는 숙제에서 초등학생이 ‘오빠와 나는 울었다’ 로 썼다. 오빠와 네가 한국을 대표하냐고 묻는 바보도 있다. 대표는 무슨 대표, 표본이라면 모를까. 시에서는 이런 표현을 뭉뚱그려 옛날에는 상징이라”

 

“했고, 오늘날에는 보통 환유라 한다. 부분으로 전체가 아니라, 단순한 사실의 서술로 거대하거나 복잡한 현상의 징후를 드러내는 장치. 가장 이해시키기 어려운 것은 은유가 아니라 환유다. 누가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남매와 함께 울어야 아는 것이라서.”

 

“은유는 보통 자기에게는 확실하나 다른 사람은 아직 감지하기 어려운 것을 표현한다. 환유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다. 뭉크가 불안한 사람을 그릴 때 그 불안이 무엇인지 알았겠는가. 고로 모든 것을 다 아는 체 하는 사람들이 싫어한다.”

 

“은유는 의미를 내포한다. 환유에는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 좋은 환유는 사실상 아무것도 담지 않는다. 환유에서 의미에 해당하는 것을 찾는다면 그 환유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 전체다. 그래서 환유를 읽기 위해서는 좋은 감각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이런 맨션은 트위터로 읽는 것이 미안하기도 하다. 어떤 트위터러가 <문학평론가, 황현산의 서재: 서재는 감옥이다>는 네이버의 글을 링크놓았다. 읽다가 문득 공교롭게도 같은 불문학자였던 김현이 생각났다. 문학에 관해 무척 비슷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배도 고향도 전공도 비슷한데, 김현 선생은 20여 년 전에 돌아가셨다.

 

“옛날에 소크라테스는 자기를 가리켜서 소등에 붙은 등에라고 했죠. 소한테 붙어서 소로 하여금 잠 못 자게하고 소를 못살게 군다고 말했는데 문학의 기능이야말로 거의 이런 기능입니다. 내가 뭘 하고 있는가, 내가 나태하지 않는가, 내가 행복한가, 또는 내가 행복한데 정말 이렇게 행복해도 괜찮은가. 늘 이렇게 따져 묻게 하는 것이 문학입니다. 이 과정에서 어떤 깊은 상처를 치유할 수도 있는데, 그 깊은 상처를 치유해준다는 말은 또 다른 말로 하면 항상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처를 핥고 다시 그 상처를 바라본다는 말일 겁니다.”

 

김현은 어디선가 문학이란 우리를 끊임없이 불편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출처를 찾아보려고 김현 문학 전집 1권 『한국문학의 위상 / 문학 사회학』을 뒤적였는데, 같은 표현은 찾지 못했다. 다만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에게 들은 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소설책을 읽어서 무엇 하려느냐?”는 힐난을 실마리로 문학의 효용에 대해 풀어 놓은 부분을 찾았다.

 

「남은 일생 내내 나에게 써먹지 못하는 문학은 해서 무엇 하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신 어머니, 이제 나는 당신께 내 나름의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의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유용한 것이 결핍되었을 때의 그 답답함을 생각하기 바란다. 억압된 욕망은 그것이 강력하게 억압되면 억압될수록 더욱 강하게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억압하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문학을 통하여 억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부정적 힘을 인지한다. 그 부정적 힘의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한다. p50」

 

문학이 어떻게 억압의 정체를 간파하게 만들고, 세계의 개조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일까? 김현은 이렇게 답한다.

 

「인간의 몽상은 인간이 실제로 살고 있는 삶이 얼마나 억압된 삶인가 하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문학은 그런 몽상의 소산이다. 문학은 인간의 실현될 수 없는 꿈과 현실 사이의 거리를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드러낸다. 그 거리야말로 사실은 인간이 어떻게 억압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척도다. p52」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은 그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것을 추문으로 만들고, 그래서 인간을 억누르는 억압의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기만을 날카롭게 고발한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 행복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황정은의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읽고 마음이 평온해 지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좋은 문학 작품은 자꾸만 우리를 찝쩍인다. 편안한 잠을 방해하며 여기저기 긁적이고 뒤척이게 만든다. 배고픈 거지가 문턱에 앉아 있는데, 밥맛이 꿀맛일 수는 없다. 배고픈 거지는 우리 모두의 추문이자, 소등의 등에다.

 

 

내게 김현과 황현산을 이어준 <문학평론가, 황현산의 서재: 서재는 감옥이다>로 다시 돌아가 보자. 거기엔 황현산이 뽑은 <내 인생의 책>도 있고 황현산이 직접 쓴 책도 소개되어 있다. 보들레르, 말라르메, 랭보, 아폴리네르 등의 아득한 이름들을 보다가, 그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를 점찍었다. 도서관에는 그의 산문집뿐만 아니라 그가 번역한 벤야민의 책도 있었다. 제목도 길다. 『보들레르의 작품에 나타난 제2 제정기의 파리』. 두 권을 빌려와 만만한 산문집부터 잡았다. 언제부턴가 나는 에세이를 좀 만만하게 보고 있다. 이를테면 책상에 앉아 집중해서 볼 책에는 넣지 않는다. 『밤이 선생이다』도 심심풀이 땅콩처럼, 물론 요즘 땅콩은 비행기의 항로도 바꾸지만, 휴식이 필요할 때 뒤적이기 좋겠다 싶었다. 더욱이 글 자체가 신문에 실었던 것들이니 연속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한 일주일 정도 걸쳐 천천히 읽으리라 생각했는데, 하루 만에 다 읽었다.

 

글들은 마치 이문구의 『관촌수필』이나 현기영의 『지상의 숟가락 하나』, 성석제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같은 느낌을 준다. 어린 시절을 보낸 황현산의 섬마을 이야기가 많다. 그런데 이 서정적인 글들의 따뜻한 추억담을 따라 가다보면 어느새 현실의 뒤엉킨 문제에 도달해 있다. 우리를 유혹했던 아련한 기억들은 기실 소등의 등에였고, 배고픈 거지에 관한 추문이었다. 그렇게 황현산은 과거와 현재를, 과거에 대한 몽상과 현실의 억압 사이에 놓인 거리를 드러낸다.

 

<과거도 착취 당한다>라는 첫 번째 글은 유신시대에 외국서적 구하기의 어려움을 코믹하게 풀어 놓는다. 서대문 국제우체국의 통관 업무를 담당하는 미스 아무개의 횡포와 시비(?)에 시달리다 못해 끝내 이성을 잃고 창구의 가로대를 뛰어넘은 사건은 부조리하면서도 우습다. 아니 너무 부조리해서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그 웃음의 끝에는 어느새 박정희를 존경하는 요즘 대학생들이 등장한다. 이런 학생들을 보며 우체국 창구를 뛰어넘을 때의 충동을 다시 느낀다며 황현산은 이렇게 쓴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2009년의 글이지만 또 오늘에 읽어야 할 글이다.

 

 

황현산의 글은 김현의 글만큼 아름답지는 않다. 정확히 말하면 황현산의 글을 김현의 글만큼 아름답게 읽지는 못했다. 두 글 사이에는 나를 어떤 방향으로든 변화시킨 20년의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황현산의 글은 김현의 글보다 더 구수하고 더 온화하며 더 편안하다. 그럼에도 김현의 글 못지않게 날카롭고 적확하다. 황현산의 글을 보며 너무 일찍 가신 김현선생을 자꾸 생각하는 밤이다. 내가 김현을 생전에 본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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