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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철학사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지음, 박민수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8년 9월
평점 :
제 3부 중세 철학
기독교는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323~337)에 의해 국가적 공인을 받았다. 이후 다른 종교에 비해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다, 392년 이교숭배가 전면 금지되면서 궁극적 승리를 거두었다.
중세철학의 본질적 주제는 기독교 교의와 고대 철학 사상의 융합이다. 중세철학은 두 시기로 뚜렷이 구별된다. 첫 번째는 교부철학 Patristik 시대로, 사도들의 활동 시기부터 서기 800년경까지다. 이 명칭은 아버지를 뜻하는 라틴어 ‘파테르pater’에서 유래했다. 두 번째는 스콜라 철학Scholastik 시대로, 서기 800년경부터 중세철학이 종말에 이르는 1500년경까지이다. 이 명칭은 라틴어 ‘스콜라스티키scholastici’에서 유래한 것으로 처음에는 학교 교사를 뜻했으며 나중에는 선교사를 종국에는 교회 교사를 뜻하게 되었다.
제 1장 교부철학의 시대
Ⅰ. 고대 사상과 기독교의 정신적 태도 차이
우리 상식과 별반 다른 내용이 없어 생략한다.
Ⅱ. 기독교와 고대철학의 최초 접목 - 초기 교부들
“이제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고 학자가 어디 있습니까? 또 이 세상의 이론가가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가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 주시지 않았습니까?” 사도 바울의 이 말은 기독교와 철학의 첨예한 대립을 보여준다. 높은 교양을 갖춘 고대말의 희랍〮․ 로마인의 정신과 절대적인 도덕성을 요구하며 모든 현세적인 것을 멸시했던 초기 기독교인들의 정신은 화합할 수 없는 차이를 드러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포교를 위해 이교적 교양인들에게 기독교를 변호할 필요가 있었고, 이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고전적 교양을 익히고 철학적 소양을 쌓아야 했다. 이런 활동을 시도한 사람들을 호교론자라 한다. 유명한 호교론자인 테르툴리아누스(160~220)는 “불합리한 까닭에 나는 믿는다.”는 경구를 남겼다(고 믿어진다). 이 경구는 신앙의 진리와 사유의 진리는 완전히 다른 영역에 있다는 그의 근본사상을 적확하게 보여준다. 그는 신앙의 진리를 사유의 진리 보다 높은 진리로 확정하며, 이 둘 사이에 대립이 있을 경우, 신앙에 어긋나는 모든 것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학에 대한 철학의 종속, 신앙에 대한 지식의 종속에 대한 이러한 요구는 장차 모든 기독교 철학의 특징을 이룬다.
Ⅲ. 기독교 내부의 위험
1. 그노시스파
기독교는 기원초의 수세기 동안 적대적 환경에서 입지를 굳히기 위해 부단히 고투했다. 이런 와중에 기독교 내부에서도 위협적인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중 가장 영향력이 컸던 운동이 그노시스파Gnosis였다. 그노시스는 희랍어로 인식이란 뜻이다.
그노시스파는 악의 존재를 해결하기 위해 창조주로서의 신과 구세주로서의 신을 구별했다. 구세주인 신은 무한히 자비로운 반면, 창조주인 신은 구세주와 때로는 적이 되기도 한다. 그 때문에 창조주가 만든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죄에 빠진 것은 더 이상 인간만의 책임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개개 인간의 영혼이란 선한 원리와 악한 원리의 영원한 투쟁이 벌어지는 싸움터일 뿐이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원죄를 벗고 새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의 투쟁을 자기 내면에서 직관하고 인식하는 일이다. 그노시스파는 신앙보다 이런 인식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 이 때문에 이 운동 전반에 그노시스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노시스파는 신비주의와 결합되기도 했는데, 신에 대한 인식 역시 이성적 인식이 아니라 신비적 인식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
2. 마니교
페르시아인 마니에 의해 창시되었다. 마니교는 유대교를 단호히 거부하고 페르시아와 인도 사상을 기독교와 결부시켰다. 마니교의 기본 관념은 영원히 병존하는 두 세계이다. 신성한 빛의 아버지가 지배하는 빛의 세계와 어둠의 아버지와 그의 악마들이 지배하는 어둠의 세계가 투쟁한다. 예수는 빛의 세계에서 강림한 인류의 구원자이고 야훼는 어둠의 아버지다.
Ⅳ. 교회 통일의 확립
교회는 한편으로는 교권제도를 확립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교적 미신을 배척하는 가운데 기독교 진리를 철저히 고수해나감으로써 내외적인 안정을 이룰 수 있었다.
Ⅴ. 아우구스티누스 : 354 ~ 430
아우구스티누스는 희랍 철학의 고전시대 이후로는 처음 등장한 탁월한 철학자다. 그의 저작을 통해 신흥 기독교 문화가 최초로 수준 높은 철학적 표현을 얻게 되었다. 그의 사상은 5~6세기에 걸쳐 전체 기독교 세계를 휩쓸었으며, 중세 전체를 규정하는 정신적 유산이 되었다. 플라톤을 제외한다면 『신국론』만큼 인간의 사상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저술도 없을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정론을 주장했다. 자비로운 신은 인간을 구원하지만, 구원은 선택적이며 철저히 신의 의지에 달려 있다. 구원은 현명하고도 불가해한 신의 호의에 따라 애초부터 결정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 감정에 반하는 예정설은 교회의 이익에도 배치되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한발 물러나 중도적 입장을 취했다. 신은 애초부터 구원과 저주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전지전능함에 의해 최후의 결과를 내다보는 것뿐이다.
Ⅵ. 아우구스티누스 이외의 후기 교부들
로마제국은 동로와 서로마로 갈라졌고, 서로마는 서기 500년경에는 제국의 거의 대부분이 게르만족의 지배에 들어갔다. 동로마는 이슬람교도들에게 시달리고 있었지만 15세기까지 천년 비잔티움 제국을 유지했다.
혼란의 와중에도 교회는 지속적으로 세력을 강화했다. 강력한 교황들이 정치적 권력을 획득했고, 수도회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내적인 힘을 풍부히 길러나갔다. 동방에서 시작된 수도회는 529년 누르시아의 베네딕투스가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창설한 이후 전체 기독교 세계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거의 모든 고전 라틴어 문헌을 보유할 수 있는 것은 수도회의 수도원과 도서관 덕분이다.
제 2장 스콜라철학 시대
서유럽이 역사의 중심에 처음 등장한 것은 서기 400년에서 800년 사이의 암흑기를 벗어나면서부터다. 중세문화의 중추는 지중해연안에서 알프스 북쪽의 프랑크왕국으로 옮겨갔다. 과거의 야만인들이 문화의 주역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런 변화와 더불어 독일적 요소들이 동방의 슬라브족에게 전파되었고, 황제와 교황이 각각 지배적 입지를 굳히며 중세 내내 경쟁했다. 전체 중세문화는 종교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정신문화와 철학 역시 통일 이루었으며 초국가적 성격을 띠었다. 모든 지역에서 라틴어가 사용되었고, 중요한 저작은 라틴어로 집필되었다. 이때의 철학은 성직자들에 대한 교육과정의 하나로 수도원 학교에서 생겨났다. 학교교사 혹은 교과목을 뜻하는 스콜라철학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스콜라철학의 과제는 애초에 정해져 있었다. 신앙이 확정지은 진리에 이성적인 기초를 제공하고, 그 진리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것이다. 스콜라철학은 한마디로 신학의 시녀였다.
Ⅰ. 초기 스콜라철학 : 보편논쟁
보편논쟁은 현대철학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유명한 논쟁이다. 보편자를 보는 관점에 따라 실재론과 유명론으로 갈라졌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는 명제에서 소크라테스는 개별자이고 인간은 보편자이다. 실재론은 보편자에 대해 개별자보다 더 높은 현실성을 부여한다. 반대로 유명론은 보편자란 한갓 이름에 불과하며 개별자만이 현실적이라고 주장한다. 보다시피 중세의 실재론은 오늘날과는 그 의미가 판이하게 달라, 오늘날의 관념론에 가깝다.
실재론자의 공식은 ‘universalia ante res 즉 일반개념은 개별 사물보다 앞서 존재한다’ 였다. 유명론자의 공식은 ‘universalia post res 일반개념은 개별 사물 뒤에 존재한’' 였다. 이 두 입장을 절충하여 아벨라르는 ‘universalia in res 일반개념은 개별 사물 속에 존재한다’ 는 공식을 제안했다. 개별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현실적이라는 주장은 부조리하다. 보편자의 구체화인 개별자들 사이의 차이를 비본질적인 것으로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직 개별자만이 현실적이고 일반개념은 한갓 이름에 불과하다는 것도 그릇되다. 일반개념에 포괄되는 개별사물들 내에는 본질의 실재적 동일성이 존재하고 이것이 일반개념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개념은 모든 인간에 존재하는 보편 인간성이라는 동종의 현실성에 상응한다. 물론 이런 보편성은 오로지 개별 인간 내에서 존재할 뿐, 그 바깥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반개념은 사물들 속에 있는 것이다. 아벨라르의 견해는 일종의 변증법적 지양이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에서 일반 개념은 오로지 사물들 속에 있다. 그러나 신의 입장에서 일반개념은 사물에 앞서 존재한다. 일반개념은 피조물의 원형으로서 신의 정신 안에 있다. 인간의 입장에서 일반개념은 실제로 사물들 다음에 존재한다. 일반개념은 우리가 사물들의 일치로부터 도출해 내야 하는 개념들로서 존재한다.
Ⅱ. 중세의 아랍철학과 유대철학
아랍세계의 종교적 중심지는 메카지만, 문화적 중심지는 바그다드와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은 8세기에 아랍에 의해 정복되어 특히 스페인 남부는 1492년까지 아랍의 영토로 남아있었다. 스페인은 10세기 서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인구 밀도가 높은 곳이기도 했다. 이슬람문화는 고대 희랍의 학문과 결합하여 아랍-희랍 철학을 꽃피웠다. 아랍-희랍 철학은 중세 유럽의 기독교 철학이 희랍 학문과 철학의 유산을 습득하고 무엇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되었다. 이런 이유만으로도 아랍-희랍철학은 서양철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무어족이 다스리던 스페인의 여러 대학에서 이슬람교도와 유대교도 그리고 기독교도들이 서로에 대해 상당한 관용을 보이면서 함께 교수활동을 했다. 거대한 도서관들에는 이들 세 종교의 문헌은 물론 이교철학의 번역물이나 주석서도 소장되어 있었다.
Ⅲ. 전성기의 스콜라철학
13세기에 들어와 서양의 사상은 새로운 도약을 시작했다. 도약의 원인은 무엇보다 이슬람 세계와의 생산적인 만남과 이를 매개로한 고대 희랍철학과의 만남이었다. 12세기에는 그 이전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형이상학과 자연과학 문헌을 포함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저작이 점차 서양에 알려지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성은 높아질 대로 높아져 그의 저작은 그 무엇도 능가할 수 없는 현세적 지혜의 총화로 간주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16세기까지 서양 철학을 지배했다.
중세 전성기에 생겨난 대학들은 철학의 훌륭한 배양소가 되었다. 중세의 대학은 모든 것을 총괄하는 기독교 신학을 완성하기 위해 지식의 전 영역을 포괄했다.
대학 못지않게 중요했던 기관으로 도미니쿠스파와 프란체스코파라는 두 개의 탁발수도회가 있었다.
스콜라철학의 대표자는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 토미즘은 도미니쿠스파의 공식철학이 되었다. 1322년 토마스는 성인으로 추증되었으며, 1879년에는 토미즘이 카톨릭 교회의 공식 철학으로 인정되었다. 1931년 새로 제정된 신학교 수업 규정에 의하면, 철학과 사변신학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학설과 원리에 따라 강의되어야 한다.
스콜라 철학의 세계상은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에 의해 가장 아름다운 시작품으로 표현되었다. 중세가 해체기로 접어들기 직전에 창조된 단테의 『신곡』은 그 수백 년 동안의 정신과 감정이 웅대한 세계묘사로 총괄되어 있다.
Ⅳ. 후기 스콜라철학
윌리엄 오컴(1290~1349)의 유명론의 혁신은 스콜라철학의 기반에 대한 공격이었으며 새로운 시대의 여명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오컴의 유명론은 기독교 교의에 적용될 경우 교의 자체를 흔들어 놓을 수도 있었다.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오컴은 신학 전체를 이성적 이해가능성의 영역에서 분리시켰다.
모든 지식의 토대는 개별자에서 출발하는 경험이지만 인간은 신에 대해 이런 식의 경험을 할 수 없으므로 인간은 신에 대한 본래적인 지식을 획득할 수 없다. 결국 신학은 정확한 논증 등을 구사하는 학문이 될 수 없다. 신학과 현세 사이에 분리선을 그은 오컴은 실제 교회정책에서도 분리선이 존중되기를 바랐다. 오컴은 교회의 세속화를 가차 없이 공격했다. 오컴은 현세를 거부하고 교회의 과제를 종교 영역에 국한시킬 것을 요구했다.
오컴의 유명론과 그의 추론들은 스콜라철학에 의해 수백 년 동안 유지된 신학과 철학, 신앙과 지식의 연대를 실제로 끊어버렸다. 두 영역은 독립되었다. 이중의 진리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오컴의 행동이 낳은 중대한 결과이며,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지식과 신앙은 각자 고유한 법칙에 따라 발전하며 서로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러한 분화가 우리의 전체 근현대 문화를 관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