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종 트위터는 지식인의 무덤이라는 생각을 한다. 자기가 자기를 파묻는 그런 무덤 말이다. 즉흥적으로 내뱉은 말, 실없는 농담 한마디가 책에서 혹은 공적 활동에서 쌓아온 이미지를 무너뜨린다. 어쩌면 툭 튀어 나온 그 말들이 그가 쓴 책보다 더 그라는 인간을 잘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몇몇의 이름들은 그렇게 묻혔다.

 

 

황현산이라는 노학자를 알게 된 것은 얼마 전 트위터에서다. 1945년생이니 트위터 입문 자체가 예사롭지는 않다. 특히 트위터의 사정을 잘 아는 주변인들에게는 무척 염려스러운 일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사실 트위터는 이전투구라는 말 그대로, 진흙탕 바닥이 아닌가. 몇몇 맨션들이 황현산의 트위터 입문과 우려를 전하기 시작했고, 곧 이어 그의 맨션들이 리트윗 되기 시작했다. 트위터에서는 보기 드문, 좋은 말들이었다. 그의 곧고 깨끗한 문장에 끌려 나도 팔로우를 했다.

 

“구두가 크십니다, 불판이 뜨거우십니다, 서비스업체 직원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직원이 무식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말하라고 시키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말이 어찌 되건 손님만 좋아하면, 나라가 어찌 되건 돈만 벌면, 결국 같은 생각이다.”

 

황현산이 일흔이 다 된, 불문학자이자, 비평가이며, 고려대 명예교수라는 것도 이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 만큼 그의 맨션 어디에도 일흔 먹은 노인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문학공부 : 세월호 참사로 슬퍼하는 한국인에 대한 글을 쓰라는 숙제에서 초등학생이 ‘오빠와 나는 울었다’ 로 썼다. 오빠와 네가 한국을 대표하냐고 묻는 바보도 있다. 대표는 무슨 대표, 표본이라면 모를까. 시에서는 이런 표현을 뭉뚱그려 옛날에는 상징이라”

 

“했고, 오늘날에는 보통 환유라 한다. 부분으로 전체가 아니라, 단순한 사실의 서술로 거대하거나 복잡한 현상의 징후를 드러내는 장치. 가장 이해시키기 어려운 것은 은유가 아니라 환유다. 누가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남매와 함께 울어야 아는 것이라서.”

 

“은유는 보통 자기에게는 확실하나 다른 사람은 아직 감지하기 어려운 것을 표현한다. 환유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다. 뭉크가 불안한 사람을 그릴 때 그 불안이 무엇인지 알았겠는가. 고로 모든 것을 다 아는 체 하는 사람들이 싫어한다.”

 

“은유는 의미를 내포한다. 환유에는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 좋은 환유는 사실상 아무것도 담지 않는다. 환유에서 의미에 해당하는 것을 찾는다면 그 환유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 전체다. 그래서 환유를 읽기 위해서는 좋은 감각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이런 맨션은 트위터로 읽는 것이 미안하기도 하다. 어떤 트위터러가 <문학평론가, 황현산의 서재: 서재는 감옥이다>는 네이버의 글을 링크놓았다. 읽다가 문득 공교롭게도 같은 불문학자였던 김현이 생각났다. 문학에 관해 무척 비슷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배도 고향도 전공도 비슷한데, 김현 선생은 20여 년 전에 돌아가셨다.

 

“옛날에 소크라테스는 자기를 가리켜서 소등에 붙은 등에라고 했죠. 소한테 붙어서 소로 하여금 잠 못 자게하고 소를 못살게 군다고 말했는데 문학의 기능이야말로 거의 이런 기능입니다. 내가 뭘 하고 있는가, 내가 나태하지 않는가, 내가 행복한가, 또는 내가 행복한데 정말 이렇게 행복해도 괜찮은가. 늘 이렇게 따져 묻게 하는 것이 문학입니다. 이 과정에서 어떤 깊은 상처를 치유할 수도 있는데, 그 깊은 상처를 치유해준다는 말은 또 다른 말로 하면 항상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처를 핥고 다시 그 상처를 바라본다는 말일 겁니다.”

 

김현은 어디선가 문학이란 우리를 끊임없이 불편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출처를 찾아보려고 김현 문학 전집 1권 『한국문학의 위상 / 문학 사회학』을 뒤적였는데, 같은 표현은 찾지 못했다. 다만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에게 들은 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소설책을 읽어서 무엇 하려느냐?”는 힐난을 실마리로 문학의 효용에 대해 풀어 놓은 부분을 찾았다.

 

「남은 일생 내내 나에게 써먹지 못하는 문학은 해서 무엇 하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신 어머니, 이제 나는 당신께 내 나름의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의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유용한 것이 결핍되었을 때의 그 답답함을 생각하기 바란다. 억압된 욕망은 그것이 강력하게 억압되면 억압될수록 더욱 강하게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억압하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문학을 통하여 억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부정적 힘을 인지한다. 그 부정적 힘의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한다. p50」

 

문학이 어떻게 억압의 정체를 간파하게 만들고, 세계의 개조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일까? 김현은 이렇게 답한다.

 

「인간의 몽상은 인간이 실제로 살고 있는 삶이 얼마나 억압된 삶인가 하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문학은 그런 몽상의 소산이다. 문학은 인간의 실현될 수 없는 꿈과 현실 사이의 거리를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드러낸다. 그 거리야말로 사실은 인간이 어떻게 억압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척도다. p52」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은 그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것을 추문으로 만들고, 그래서 인간을 억누르는 억압의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기만을 날카롭게 고발한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 행복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황정은의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읽고 마음이 평온해 지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좋은 문학 작품은 자꾸만 우리를 찝쩍인다. 편안한 잠을 방해하며 여기저기 긁적이고 뒤척이게 만든다. 배고픈 거지가 문턱에 앉아 있는데, 밥맛이 꿀맛일 수는 없다. 배고픈 거지는 우리 모두의 추문이자, 소등의 등에다.

 

 

내게 김현과 황현산을 이어준 <문학평론가, 황현산의 서재: 서재는 감옥이다>로 다시 돌아가 보자. 거기엔 황현산이 뽑은 <내 인생의 책>도 있고 황현산이 직접 쓴 책도 소개되어 있다. 보들레르, 말라르메, 랭보, 아폴리네르 등의 아득한 이름들을 보다가, 그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를 점찍었다. 도서관에는 그의 산문집뿐만 아니라 그가 번역한 벤야민의 책도 있었다. 제목도 길다. 『보들레르의 작품에 나타난 제2 제정기의 파리』. 두 권을 빌려와 만만한 산문집부터 잡았다. 언제부턴가 나는 에세이를 좀 만만하게 보고 있다. 이를테면 책상에 앉아 집중해서 볼 책에는 넣지 않는다. 『밤이 선생이다』도 심심풀이 땅콩처럼, 물론 요즘 땅콩은 비행기의 항로도 바꾸지만, 휴식이 필요할 때 뒤적이기 좋겠다 싶었다. 더욱이 글 자체가 신문에 실었던 것들이니 연속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한 일주일 정도 걸쳐 천천히 읽으리라 생각했는데, 하루 만에 다 읽었다.

 

글들은 마치 이문구의 『관촌수필』이나 현기영의 『지상의 숟가락 하나』, 성석제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같은 느낌을 준다. 어린 시절을 보낸 황현산의 섬마을 이야기가 많다. 그런데 이 서정적인 글들의 따뜻한 추억담을 따라 가다보면 어느새 현실의 뒤엉킨 문제에 도달해 있다. 우리를 유혹했던 아련한 기억들은 기실 소등의 등에였고, 배고픈 거지에 관한 추문이었다. 그렇게 황현산은 과거와 현재를, 과거에 대한 몽상과 현실의 억압 사이에 놓인 거리를 드러낸다.

 

<과거도 착취 당한다>라는 첫 번째 글은 유신시대에 외국서적 구하기의 어려움을 코믹하게 풀어 놓는다. 서대문 국제우체국의 통관 업무를 담당하는 미스 아무개의 횡포와 시비(?)에 시달리다 못해 끝내 이성을 잃고 창구의 가로대를 뛰어넘은 사건은 부조리하면서도 우습다. 아니 너무 부조리해서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그 웃음의 끝에는 어느새 박정희를 존경하는 요즘 대학생들이 등장한다. 이런 학생들을 보며 우체국 창구를 뛰어넘을 때의 충동을 다시 느낀다며 황현산은 이렇게 쓴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2009년의 글이지만 또 오늘에 읽어야 할 글이다.

 

 

황현산의 글은 김현의 글만큼 아름답지는 않다. 정확히 말하면 황현산의 글을 김현의 글만큼 아름답게 읽지는 못했다. 두 글 사이에는 나를 어떤 방향으로든 변화시킨 20년의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황현산의 글은 김현의 글보다 더 구수하고 더 온화하며 더 편안하다. 그럼에도 김현의 글 못지않게 날카롭고 적확하다. 황현산의 글을 보며 너무 일찍 가신 김현선생을 자꾸 생각하는 밤이다. 내가 김현을 생전에 본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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