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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그리고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
류동민 지음 / 코난북스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5년 쯤 전에 <사회과학 방법론 기초> 라는 카페에 가입했다. 지금은 개점휴업 상태지만 한 2년간은 매우 활발했던 카페다. 자칭 B급 경제학자 우석훈이 일반인을 상대로 한 사회과학 무료 강의를 시작하면서 개설되었다. 오프라인 강의를 듣기 전, 강의 주제에 따른 과제를 카페 게시판에 올리며, 놀고 배우는 공간이었다. 온라인 회원들도 꽤 많았고, 뒤늦게 합류한 회원들도 많아서, ‘쪽글’이라고 불리던 과제물은 강의 일정과 관계없이 들쭉날쭉 올라오기도 했다. 나도 지인의 권유로 한참 늦게 가입한 온라인 회원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강의의 목적은 ‘일반인 저자’를 키우는 것이었고, 따라서 ‘쪽글’이라는 이 희한한 이름의 과제물은 일종의 글쓰기 훈련이었다.

 

늦깎이로 합류한 내가 맨 처음 쓴 쪽글은 장소에 관한 내용이었다. 과제 제시 글에서 우석훈은 앙리 르페브르라는 학자의 ‘공간과 장소에 관한 정의’를 짧게 소개했다.

 

“나는 그렇게 강조하는 편은 아니지만, 앙리 르페브르라는 학자가 '공간(space)'과 '장소(place)'의 차이에 대해서 지적한 적이 있다. 공간은 물리적 개념이고, 장소는 거기에 사람들의 관계가 누적적으로 개입하는 곳, 그 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 기억도 없는 곳이면 공간이고, 거기에 누군가가 있다 혹은 추억이 있다, 그러면 장소로 변한다는 그런 단순한 논리지만, 이 정도만 생각해도 물리적 특징만 있는 공간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과제는 “자신의 탄생지, 거주지, 그리고 은퇴지에 대해서 서술하고, 그 공간의 의미,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자신에게 갖는 특별한 의미에 대해서 쓰시오.” 였다.

 

내가 쓴 글은 다시 읽어보니, 언제나 그렇듯이, 쌉쌀하지만, 류동민의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읽고 맨 먼저 생각난 글이다. 그 과제를 하면서 나는 사십 여 년의 삶을 주르륵 훑으며 내가 머물렀던 곳들을 짚어 보았다. 가장 오래된 기억 하나는, 출렁이던 남학생들의 물결이다.

 

하교 길이면 4차선 도로 양 쪽의 넓은 인도가 하얀 셔츠를 입은 짧은 머리 남학생들로 새까맣게 뒤덮이곤 했다. 절묘한 위치에 있던 우리 집은 버스 정류장 두어 개의 거리 안에 대여섯 개의 남자 중고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때는 아직 땅값을 이유로 학교들이 도시 외곽으로 밀려나기 전이었고, 우리 동네는 말하자면 학원(학교)가였다고 할 수 있다. 어깨를 스치도록 빽빽이 걷는 남학생들의 수풀 사이로 나는 매일 고개를 푹 숙이고 죄인처럼 집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한 번도 따라오는 남학생이 없었다는 사실이 왠지 슬펐던 기억이 난다. 예뻤던 나의 셋째 언니는 집 안까지 따라 들어오려는 남학생을 피해 비명을 지를 수 있었는데 말이다. 오래 전의 그 거리는 슬프고도 설레었던 추억의 장소이다. 그 까까머리 남학생들이 있어 그 텅 빈 거리는 고향을 떠올리는 추억의 장소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끝내 특별한 장소를 만들지 못했던 십 여 년의 삶이 있었다.

 

“나는 지금은 이곳저곳에서 산다. 십여 년을 서울과 경기의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경기의 북쪽 끄트머리든 남쪽 귀퉁이든 아파트들이 모여 이룬 소도시들은 여기가 저기 같아서 계속 한 곳에서 살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것은 그 동안의 내 삶의 모양과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나는 늘 같은 무언가를 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 십여 년 내가 머물렀던 공간들을 아직 나는 어떤 장소라고 부르지 못할 것 같다. 특별한 사람도 추억도 삶도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유랑을, (한때 그리고 지금도 유행하는 것 같은 말로 하자면) 유목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내게 너무 텅 빈 이 공간을 어떤 이야기가 있는 장소로 만들고 싶지만, 아직도 나는 미끄러지기만 하고 있다.”

 

오랜만에 찾아간 카페에서 몇 조각 긁어온 문장들을 굳이 덧붙이는 것은,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가 대충 이런 식의 기억들로부터 글을 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서울이라는 그 ‘특별’한 도시에서 주거했던 기간은 20대의 한 10년간이다. 하숙촌에서의 4년과 결혼 전 강북 여기저기에서의 6년 정도가 전부다. 신혼집은 경기도 북부에서, 그 이후로는 경기 동부와 남부 등을 맴돌다, 지금은 수도권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꼭 서울에서 살아야 할 필요도 없었지만, 애당초 서울에서의 주거 자체가 불가능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서울은 내가 모르는 곳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속들이 알고 있는 곳도 아니다.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것이 어쩌면 자연스럽다. 그런데도 이 글을 쓰는 것은 15기 알라딘 신간평가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신간평가라는 것이 신문의 서평처럼 일정한 형식을 강제하지는 않아, 나는 평소처럼 책이 촉발한 어떤 기호를 따라 자유롭게 떠돌고 있다.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의 저자 류동민은 <책머리에>서 “인문학이 필요한 자리는 사회과학으로 때우려 하고 사회과학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인문학으로 얼버무리려는 어설픈 짓을 한 것 같아 느끼는 두려움”에 대해 고백했다. 불행하게도 나는 그 두려움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저자의 인문학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까만 머리 남학생 물결에 대한 추억과 비슷한 것들이 그 범주에 들어가는 것 같다. 지젝이 잘 하듯(요즘 유행이니 꼭 지젝이라고 할 필요는 없지만 저자가 좋아한다고 한다), 영화나 드라마 등의 대중문화에 빗댄 설명들도 해당될 듯하다.

 

여하튼 많은 에피소드들이 등장하는데 새롭지는 않다. 손석희의 뉴스룸에서, 포털 뉴스들에서, 화제가 된 트윗에서, 팟캐스트에서, 어디서건 보고 들었던 듯하다. 스타벅스가 제공하는 네 가지 선택의 ‘자유’, 아파트 공화국으로서의 대한민국, 대치동 학원가와 영등포 공시생, 압구정동 성형외과, 자본에 잠식되는 대학 캠퍼스, 상업화한 대형교회, 영세 상인을 몰락시키는 마트, 학벌의 카스트화, 계급에 따른 주거의 분리, 능력신화의 파탄 등등이 추억과 함께 빼곡히 전시되어 있다.

 

이 시대 서울의 맨 얼굴, 한국사회의 민낯은 이미 훤히 드러나 있다. 그 이유도 알려질 만큼 알려져 있다. 몰라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어, 우리는 이렇게들 살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이 계몽은 아닌 것 같다.

 

문제는 출구다. 출구 없는 방에 갇혔으니 어쨌든지 살아남아야 할 것인가? 무수한 자기계발서와 멘토를 표방하는 책들의, 아름답고 싱싱한 문장들을 걷어내면, 나타나는 네 글자는 ‘각자도생’이다. 한때 유행했으나, 각자도생은 벌써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승자독식의 결과는 개미지옥임을 상징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장그래’ 다.

 

정말 출구는 없는가? 류동민이 말하는 ‘사회과학이 있어야 할 자리’는 아마도 여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두려움처럼 눈에 띄는 사회과학적 방법은 없다. 학자들 이름 몇몇이 스치듯 지나가지만, 거기서 어떤 빛을 보기는 힘들다. 자본주의 이후에 대한 전망을 한 명의 경제학자에게 요구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에필로그에 제시한 시나리오는 얼마간 논쟁의 여지가 있을 것 같다.

 

우리 사회의 미래에는 두 가지 시나리오가 있다. 하나는 자유시장경쟁의 가속화다. 류동민은 탈주자와 추격자의 관계로 묘사하는데, 추격자가 절망하여 추격을 포기할 때, 투 트랙의 사회가 완성될 것이라 본다. 빈부 격차의 극대화다. 저자가 희망하는 또 다른 시나리오는 추격이 가능한 민주적 사회다.

 

“능력주의에 대한 강력한 요구, 더 나아가 능력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대중적 요구와 문제제기가 이루어질 때 사회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민주화를 위한 투쟁의 역사가 지금 여기에서 생산적 의의를 갖는다면 바로 이 부분일 것이다. P279”

 

이 주장에 의하면 류동민은 기본적으로 ‘탈주와 추격’을 바람직한 사회의 작동원리로 보고 있다. 소위 개천에서 용이 나는 사회는 보다 민주적이고 평등하다는 말이다. 물론 자본이 능력 발현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세습사회로 가는 길 보다는 개천의 용을 꿈꾸는 과거로의 회귀가 나아보일 수는 있다. 그런데 능력사회란 승자독식 사회와 다른 것인가? 능력주의의 극단에서 우리가 맞닥뜨린 것이 바로 승자독식 아닌가?

 

“서구에서 복지국가가 신자유주의로 이행된 것이 보험의 원리에서 복권의 원리로의 이행이었다면, 복지국가를 경험한 적이 없는 한국에서 신자유주의로의 이행은 노력에 따르는 성공이라는 복권을 꿈꾸는 사회에서 각자 알아서 살아남는 사보험의 원리가 적용되는 사회로 이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자 재주껏 살아남기’ 라는 원리는 여기에서도 적용된다. 정상을 향한 것이라고 여겼던 경주가 실은 바닥을 향한 경주임을 깨닫게 될 때, 추격과 탈주의 과정이 밟을 수 있는 미래 시나리오 중에서 어느 것이 실현될지가 결정 될 것이다. p280”

 

저자의 의도와는 (아마도) 다르게 이어지는 문장은 앞서 말한 투 트랙이 사보험과 복권으로 비유되고 있는가 하는 의문까지 일으킨다. 능력주의가 복권을 꿈꾸라는 것처럼 들릴 위험이 다분하다. 그런데 능력주의와 공공성은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 저자는 능력주의에 대한 강력한 요구에 이어 곧바로 공공적 ‘도시권’에 대한 희망을 피력한다. 도시권이란 도시의 일상생활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로 정의된다.

 

“그런데 도시권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 꼭 반자본주의 투쟁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일터에의 접근권을 보장하는 것, 주거지에서 일터까지 통근에 걸리는 금전적·비금전적 비용의 복구를 요구하는 것은 자본주의 틀 안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열악한 주거 공간에서 살아야 하는 빈곤층과 젊은 세대의 주거권에 대한 사회적 보장은 자본주의 국가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노동력의 원활한 재생산이 그 자본주의 국가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p28!21”

 

여기서 저자 류동민은 마치 안심하라는 듯 도시권의 요구는 반자본주의 투쟁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권리임을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저자의 ‘증상’이 아닐까? 탈주와 추격을 사회의 기본 작동원리로 보고, 능력주의를 요구하고, 무의식중에 복권을 상위에 놓는 태도는 그가 자본주의적 틀 밖에서 사고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은 아닐까? 신자유주의는 안 되지만 자본주의적 경쟁 사회의 모델 또한 벗어날 수 없다. 결과적으로 저자가 갈 수 있는 길은, 개천의 용이 복권에 당첨되기도 하던 능력사회, 유래 없는 경제적 행운을 누렸던 그들 386세대들이 사회에 막 진출하던 과거밖에 남지 않는다. 궁금한 것은 자본주의 안에서 보다 민주적이고 평등한 사회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흔히 택하는 사민주의, 이른바 서구 복지국가의 공적보험 모델에 대해서는 왜 애시 당초 염두에 두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실패한 모델이기 때문에?

 

가장 난감한 것은 마지막 문단이다. 갑자기 앵겔스가 불려온다. 앵겔스는 사유재산 때문에 의사결정이 점점 소수의 손에 집중되는 것이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이라고 주장했다. 저자는 이 개념을 공간에 적용하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는 공적 도시권의 요구임을 강조한다.

 

“만약 공간 생산의 모순을 심화시키는 것이 자본 혹은 자본주의라면, 그것은 돈의 논리가 우리들 각자의 공간에 대한 기억을 왜곡시키면서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어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하므로 비록 추상적이지만, 돈의 논리 때문에 왜곡되는 우리의 기억, 억압당하는 이들의 기억을 복권시키는 것에서 공간 생산의 정치경제학은 시작되어야 한다. 이렇게 서울의 정치경제학은 다시 공간의 기억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p284~5”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이 결국 공적 도시권을 억압한다는 소리다. 기본모순이란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사라질 수 없는 것이다. 한편 저자는 자본주의 틀 안에서의 민주와 평등을 주장해 왔다. 저자의 논리대로라면 자본주의가 궁극적으로 허용 할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을 자본주의 안에서 요구하는 것이다. 그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리뷰가 신간평가단으로서의 글쓰기라는 사실 때문에 어떤 영향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인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상당히 입이 쓰다. 사실 개인적 취향에 맞는 책은 아니지만,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심심찮게 읽을 만한 책이다. 무엇보다 과거의 어떤 골목길, 잊었던 옛집의 우물과 개암나무 따위를 불현듯 불러오는 힘이 있다. 그럼에도 내내 아쉬웠던 것은 너무 많은 것들의 나열과 이미 알려진 분석들이 대부분일 뿐, 저자의 독창적인 관점이나 깊이 있는 해석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에필로그에 와서 저자가 어떤 관점들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는 결정적 느낌을 받게 되었다. 물론 한 사람의 독자로서 지극히 사적인 독해에 불과하다. 다른 신간평가단원들의 새로운 해석들이 지극히 편협한 나의 독해를 수정해 주기를 기대한다. 나는 파워 블로거도 아니고, 하루에 기껏해야 2~30명,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면 많아봤자 4~50명의 방문객을 맞는 한산한 서재 주인이다.  혹시 이 책의 관계자 분이 이 글을 읽게 되더라도 신경쓰지 않기를 바란다. (아..사족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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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2-01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이 책 보니 데이비드 하비가 << 반란의 도시 >> 에서 주장한 도시권가 비스무리한 것 같습니다.

말리 2015-02-02 10:25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조금 애매한 것이 사회과학적 이론을 조금씩 언급하긴 하는데 별 설명없이 넘어가 버립니다. 이미 알고 있어야 그 문맥의 깊이? 혹은 적절성을 알수 있지요. 말씀하신 책은 읽을만한지 궁금하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2-02 18:34   좋아요 0 | URL
반란의도시`도 그닥... ㅎㅎㅎㅎㅎㅎ
용두사미`로 끝나서 화딱지가 납니다.
공간지리학이 의외로 참 재미있는데 말입니다. 저는 반란의 도시보다는

피터손더스가 엮은 < 도시와 사회이론 > 을 추천합니다. 일종의 지리학 입문서인데 요거 한 권 읽고 공간 지리학 읽으면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 좋습니다.

말리 2015-02-02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고맙습니다. 찜해 두겠습니다.
 
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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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올해 독서회 첫 소설. 재미있다. 그런데 하고싶은 말은 없다. 속죄라기 보다는 변명이 아닌가? 교훈이라면 우리가 안다고 믿고 있는 것들의 진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것. 그러나 진실을 오해하는 것 보다 진실 자체가 없다는 것, 그 진실을 깨달았을 때, 그것이야말로 충격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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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깡과 언어와 철학
러셀 그릭 지음, 김종주 옮김 / 인간사랑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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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그릭의 『라깡과 언어와 철학』은 지난해 11월 도서 정가제가 종료되기 직전, 『세계 철학사』와 『헤겔 또는 스피노자』와 함께 구입한 책이다. 취향대로라면 맨 먼저 읽었어야 할 책이지만, 이제야 읽었다. ..아니 읽다가 또 다시 던졌다. 처음 책이 도착했을 때도 손에 잡았다가, 던졌다. 순전히 번역 때문이다. 저자 러셀 그릭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지젝의 책이나 다른 정신분석학 책들에서 들어본 기억이 없는 걸로 보아, 브루스 핑크나 자크 알랭 밀르 같은 급의 정신분석학자는 아닌듯 싶다. 물론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내용이 읽을만 하면 그걸로 좋은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은 도대체 내용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번역 때문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출판사 <인간사랑>과 번역자 김종주의 조합을 보았을 때 (김이영이라는 공동 번역자도 있다), 훌륭한 문장에 대한 기대는 애당초 접었다.  내가 처음 이 환상적인 조합에 깜짝 놀랐던 것은 지젝의 『환상의 돌림병』 을 읽었을 때였다. 10여년 전이었을 듯 한데,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비문들로 가득한 책이었다. 나는 지젝의 책을 거의 다 가지고 있는데, 이 책만은 소장하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다. 물론 지금은 품절이기도 하다. 제대로 읽을 수만 있다면, 중고라도 사겠지만 어차피 읽을 수 없을테니 가지나 안가지나 다를 바 없다.

 

번역의 1차적 책임은 번역자에게 있겠지만, 나는 번역에 관한한 출판사 <인간사랑>도  신뢰하기 무척 어렵다. 불행히도 적지 않은 지젝의 책들이 <인간사랑>에서 출판되었는데, 그 번역들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대표적인 것으로, 제목 자체가 오역인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이 책은 재작년에 다른 출판사에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으로 바뀌어 출간되었다),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향락의 전이』 등이 있다. 내 기억으로는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도  『환상의 돌림병』 못지 않은 압권이다. 이 책도 지금은 절판 상태다. 물론 이 책들은 그 자체로 어렵다. 그러나 어려운 책을 출판하겠다는 의지라면, 맨 먼저 신경써야 할 것이 번역 아닐까?  원서의 어려움에 번역의 혼란을 더해 놓고서 어떻게 독자를 이해시키고, 어떻게 책을 판매하려 하는 것일까?

 

번역의 문제는 어떤 특정  출판사나 특정 번역가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번역서를 읽다보면 좋은 번역이라는 생각보다는 왜 이렇게 말도 안되는 번역이 많은지 한숨이 나올 때가 더 많다. 그만큼 번역이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구조가 전혀 다른 두 개의 언어를 하나로 연관짓는 일이 녹록할 리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적확한 번역에 대한 필요는 더욱 절실하다.

 

오래전에 트윗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로렌초 키에자의 『주체성과 타자성』을 번역한 분에게  '전 번역서에서 평등의 실현을 봅니다' 라고 했었다. 그분도 동의하셨다. 요즘은 공부하고 싶으면 원서를 읽어라 따위의 조언이 많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영어로 전 과목 수업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고의 흐름을 막고, 문자 해독에 매달리게 하여, 결과적으로 깊은 사유를 가로막는다. 전문가에게는 원서 독해능력이 필수적이겠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 전문가란 사람들은 단순히 언어 해독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요즘은 고전 소설들도 대부분 해당 작가의 전공자들이 맡는다. 그 만큼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높기 때문이고, 그 이해력이 번역에 고스란히 배어나기 때문이다. 전문성은 인문학 특히 철학 번역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그건 단순한 언어능력만으로는 번역할 수 없는 철학 고유의 맥락과 해석이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에 의해 적확하게 번역된 책들이야말로 인문학의 대중화를 위한 바탕이다. 그 바탕 위에 비로소 누구나 평등한 배움의 권리와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제발 번역 좀 잘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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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1-28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 인간사랑 하니 그 유명한 < 비평과 진단 > 생각이 나네요.

말리 2015-01-28 20:27   좋아요 0 | URL
들뢰즈네요. 근데 무슨 일이?
 
펭귄클래식 6
프란츠 카프카 지음, 홍성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소송』을 읽은 김에 카프카의 『성』도 읽었다. 몇 년 전에 『변신』을 읽었으니, 유명한 작품은 대충 훑었나 싶지만, 『시골의사』가 남았다. 그런데 작가 소개를 보니 카프카의 고독 3부작이란 것이 있다. 『소송』 ,『성』 그리고 제목도 처음 보는 『아메리카』가 그것인데, 3편 모두 미완성이라고 한다. 『성』은 누가봐도 미완성이지만,  『소송』도 그런지는, 읽어 놓고도 몰랐다. 요제프 K가 처형당하는 10장< 종말> 다음에 미완성 원고들이 6편 실려 있기는 하다. 제목이 <종말>이고, 요제프가 죽었으니 당연히 끝났다고 생각하고, 부록처럼 실려 있는 짧은 글들은 읽어보지도 않았다. 그에 비하면 『성』은 마치 카프카가 마지막 문장을 쓰다가 갑자기 쓰러지기라도 한 것처럼 끝난다.

 

 "그녀는 K에게 떨리는 손을 내밀어 자기 옆에 앉게 하고는 힘들여 말했는데, 알아듣기는 힘들었지만 그녀가 한말은. p453" 

 

그녀는 게어슈테커의 어머니인데, 게어슈테커가 누구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직까지 별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거나 어쩌면 처음 등장한 인물인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우리는 그녀가 한 말에 대한 궁금증을 영원히 풀 수 없게 되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다지 궁금한 것도 아니다. 그녀에 의해 뭔가 반전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다. K의 운명도  『소송』의 요제프 K 보다 크게 나을 것이 없을 것이다. 죽고 사는 것이 다르다면 다르겠지만.

 

카프카에 대해서는 무수한 연구와 해석들이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도  『소송』과  『성』은 무척 비슷해 보인다....를 너머, 같다고 해도 될 것 같다. 요제프 K와 K를 둘러싼 사회는 안개와 같다. 내가 가진 알라딘 책베개에는 김승옥의 『무진기행』 중 안개에 관한 구절이 빼곡이 적혀 있다. 마지막 한 문장은 이렇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는 실체일까? 존재하지만 손에 잡히지 않고, 다가갈수록 흩어져 사라지고, 그러면서도 모든 삶을 지배하는 것. K와 요제프 K가 안간힘을 다해 들어가려는 사회는 그렇게 오리무중이다.  

 

카프카는 1924년에 폐결핵으로 죽고, 『소송』과  『성』은 그의 유언을 어긴 친구에 의해 사후에 출간되었지만, 정작 집필은 각각 1914년과 1922년에 시작되었다. 20세기 초에 그린 카프카의 세계는 100년 간의 비약적 변화로 탄생한 21세기 초의 현대 세계와 분명히 다르다. 현대는 무엇보다 '투명사회'다. 밥먹는 것은 물론 혼잣말과 무의식적 탄성까지도 투명하게 공개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회다. 투명사회가 유리알처럼 반사한 투명한 빛은 옅은 안개의 가능성마저 날려 버린다. 그런데도 카프카의 이름만 나오면 자동적으로 포스트모던이 따라 나오는 것 같다.

 

옮긴이의 작품해설에 따르면 카프카의 『성』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조이스의 『율리시스』와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그의 소설은 근대적인 소설 형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카프카의 '모더니즘'은 문학형식상의 근대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따라서 카프카는 '모더니즘'이란 말조차 그 반대의 의미를 갖는 역설적인 것이 되게 만든다. 카프카의 작품은 읽을수록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이해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만든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은 후기구조주의의 해체주의적 글 읽기에 모범적 범례가 되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논의의 문맥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p456"

 

말하자면 옮긴이조차 '이해불가능'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해불가능하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완전한 일치, 완벽한 공감, K에 대한 독자의 절대적 감정이입인 것 같다. 도대체 이게 뭐야?, 왜 성에 들어갈 수 없지?, 클람은 있기는 한거야?, K는 진짜 측량사이긴 한거야? 등등의 의문은 독자의 답답함이자 그대로 K자신의 의문이기도 해 보인다. 독자의 답답함은  『성』의 독해에 대한 답답함이지만, 또한 삶 자체에 대한 답답함이기도 하다.

 

포스트모던의 시대는 투명사회인 동시에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안개사회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는 안개사회의 이해불가능성을 일거수일투족을 투명하게 현시함으로써 감추려 애쓰는지 모르겠다. 칸트의 '내 마음 속의 도덕법칙' 도 없고 루카치가 그리워하는 '별이 빛나는 밤하늘' 도 없다. 카프카는 "목표는 있지만 길은 없다. 우리가 길이라고 부르는 것은 망설임일 뿐이다.p455" 고 했지만, 이 시대에 과연 목표라는 것이 있을까... 목표도 없고 길도 없고, 별도 없고 도덕도 없다. 있는 것은, SNS의 투명성과 IS다.  극단적인 일상과 극단적 일탈이 삶을 해체한다. 한편에는 눈만뜨면 아멘처럼 찰칵대며 시시콜콜한 일상을 나열하고, 한편에는 도시락 폭탄에서 삶의 목표를 발견한다.  투명사회는 안개사회의 외설적 이면이다.  대의는 사라지고 일상의 현시를 거부하는 자들은 실재를 찾아 요르단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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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또는 스피노자 프리즘 총서 2
피에르 마슈레 지음, 진태원 옮김 / 그린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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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잘못 골랐다. 『헤겔 또는 스피노자』라는 제목만 보고, 헤겔과 스피노자를 일타쌍피할 야무진 꿈을 꾸었으나, 몇 장 넘기지 못하고 좌절했다. 헤겔 또는 스피노자는커녕 헤겔도 스피노자도 알 수 없었다. 말하자면 공리도 정리도 모른 채 고차 함수에 달라 든 셈이다. 마슈레의 이 책은 헤겔도 잘 알고 스피노자도 잘 알아야 비로소 균형을 갖고 읽을 수 있다. 초보자는 읽기도 힘들지만 읽어봤자 헤겔은 참 나쁜 놈이구나, 하는 선입견만 갖게 될 위험이 크다.

 

 

「스피노자의 학설이 불충분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헤겔은 스피노자에게 스피노자 자신의 것이 아닐뿐더러 내재적 합리성의 관점과는 양립할 수 없는 추상적 인식관에 속하기 때문에 그가 명시적으로 거리를 두었던 몇 가지 철학적 입장들을 전가한다. 이 문제에 있어서 이상한 것은, 헤겔이 스피노자가 이미 데카르트주의자들에게 맞서 전개했던 것과 아주 유사한 논변을 스피노자에게 맞서 제시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헤겔이 제기했던 논박에 미리 답변한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헤겔의 태도는 명백히 설명하기 어려운 놀라운 오해를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헤겔은 다른 어느 누구보다 그 자신이 그 중요성과 의미를 더 잘 인지할 수 있었던 것을 스피노자에게서 읽어내지 못하고 망각하고 말았다. p121」

 

마슈레는 이렇게 헤겔의 전제 자체를 비판(난?)한다. 스피노자의 것이 아닌 것을 스피노자의 것으로 전제해놓고, 스피노자의 오류로 비판한다는 것이다. 헤겔은 왜 그랬을까? 스피노자의 어려운 철학을 잘 이해 못해서? 마슈레는 헤겔이 일부러 그랬다고 본다.

 

「만약 헤겔이 스피노자를 항상 잘 이해한 것 같지 않다면, 또는 잘 이해하려고 들지 않은 것 같다면, 그것은 스피노자가 헤겔을 아주 잘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는 헤겔식의 목적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분명 참 을 수 없는 것이다. p339」

 

헤겔은 자신의 철학적 체계를 위해서 스피노자를 의도적으로 왜곡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헤겔 체계 자체 안에서만 찾을 수 있으며, 이 체계는 그 고유한 운동에 따라 헤겔이 스피노자주의의 실상을 왜곡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사실 스피노자주의와 좀 더 분명히 거리를 두기 위한 목적으로 헤겔은 자신의 입장을 변론하기 위해 가공된 허구적 학설로 실제의 스피노자주의를 대체해야 했으며, 이는 스피노자 체계가 거둔 모든 역사적 성과를 제거해 버린다. p121」

 

역사적으로 보자면, 데카르트 - 스피노자 - 칸트 - 헤겔의 순이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를 비판했고, 헤겔은 데카르트를 비판한 스피노자를 수용하면서도, 데카르트와 동시에 스피노자의 한계를 신랄히 비판했다. 물론 철학자들의 비판은 대개 비판 대상을 기본적으로 수용한다. 스피노자도 데카르트의 근대철학을 수용했다. 여하튼 철학자들의 전략은 대략 대표적 철학자 하나를 물고 뜯으면서 자신의 체계를 세우거나, 고대의 철학자를 전적으로 찬양하고 되살리면서 자신의 이론을 만들어 가거나, 뭐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개인적으로 가시지 않는다. 어떨 때 보면 참 치졸해 보이는데, 문외한인 내가 읽어도 그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 말이라고 우기면서 막 비판하는 것을 현대 철학자들에게서도 보게 된다. 그가 잘못하지 않았으면, 내가 잘못한 것이 된다! 마슈레가 지적하는 헤겔이 딱 이런 모양새다. 그런데 그렇다면 마슈레는 전적으로 옳은가?

 

『헤겔 또는 스피노자』가 초보자에게 위험한 이유가 이것이다. 헤겔을 알고 스피노자를 알아야, 마슈레를 판단할 수 있다. 마슈레 역시 그가 비판하는 헤겔처럼 헤겔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있을 수도 있다. 물론 일상적인 일이라면, 자초지종과 전하는 사람의 말만 들어 보고도 어느 정도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헤겔과 스피노자다. 글자를 안다고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이 아니다. 게다가 마슈레에게도 스피노자를 편들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다.

 

<옮긴이 해제>에 따르면, 20세기 후반 프랑스 철학계의 두드러진 특징은 두 가지다. 구조주의 운동과 스피노자 연구의 르네상스다. 대부분의 스피노자 연구자들은 좌파적 성향을 띄고 있고, 구조주의 운동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돌파할 개념적 수단을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찾고자 했다. 들뢰즈, 발리바르, 알튀세르, 네그리 그리고 마슈레 등이 이에 속한다.

 

물론 마슈레는 1991년판 서문에서 이 책이 단지 스피노자를 위한 헤겔 비판이 아님을 명시한다. 책 제목이 의미하는 바가 그렇다. ‘헤겔 또는 스피노자’ 는 두 가지 의미다. 헤겔이냐 스피노자냐 라는 선택의 의미가 그 하나다. 그러나 ‘또는’ 은 ‘헤겔 즉 스피노자’, 헤겔과 스피노자의 동일성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읽는다면, 이 책은 일차적으로 스피노자에 대한 헤겔의 오해, 오독에 맞서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헤겔 철학을 재비판하려는 시도이지만, 또한 동시에 이 책은 헤겔과 스피노자가 공유하고 있는 것, 이 양자의 철학 안에서 공통으로 발생하고 있는 것을 읽어 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p372」

 

그런데 읽어보면, 비판 혹은 비난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는다. 시종일관 헤겔이 잘 알면서도 일부러 스피노자를 왜곡했다고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있는데, 헤겔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태도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마슈레가 무엇을 근거로 헤겔을 비판하고 있느냐다. 이것이 핵심이지만, 이것을 딱 부러지게 정리할 능력이 있으면 내가 전문가지 일반 독자이겠나! 그렇다고는 해도 마슈레가 주구장창 읊어대는 주제가 한두 가지 있어, 몇 대목을 찾아 옮길 수는 있다. 헤겔 철학은 목적론적이고 진화론적인데 반해 스피노자는 목적론을 배척하며 자기원인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마슈레의 주장이 맞는지 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헤겔에 관한 책을 몇 권 읽으며 실은 나도 늘 걸리던 것이 목적론이기는 하다.

 

「따라서 폭력적으로 시간을 거스르는 대가를 치러야겠지만, 스피노자가 헤겔을 논박한다고 말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논박이 겨냥하는 것은 변증법에 대한 관념론적 설명이다. 관념론은 사유는 그 내적 반성 능력 때문에 실재, 모든 실재의 탁월한 형식이라는 전제 위에 자신의 주장의 보편성을 확립한다. 따라서 사유는 자신의 총체화의 운동 안으로 다른 모든 질서를 결집하고 흡수하는 절대적인 합리적 질서로 제시된다. 자기 자신을 원들의 원으로 서술하는 헤겔의 변증법은, 자신이 궁극적으로 재통합하는 모든 요소들 사이의 위계적 종속 관계를 전제하며, 이러한 종속은 변증법적 진보의 전체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왜냐하면 이 진보는 하나의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종국적 관점으로부터 반성된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전제를 처음부터 멀리한다. 그는 실재, 실체에 대한 자신의 관점에서 요소들 사이의 위계적 종속 관계에 관한 일체의 생각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실체의 속성으로서 사유는 전체와 동일하며, 따라서 속성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사유가 실현되는 연쇄는, 실체가 표현되는 다른 모든 형식들 -이는 수적으로 무한하다- 과 사유의 절대적 동등성을 정립한다. 반대로 헤겔은 실재로서 생산되는 모든 것을 정신에 종속시키도록 강제하는 탁월성의 관점에 따라 정신을 주체로, 전체로 사유한다. 합리적 운동 안에 형식들의 위계를 설립하는 이러한 종속이 헤겔 목적론의 열쇠다. 그리고 이 목적론이야말로 바로 스피노자가 배격하는 것이다. p123~4」

 

관념론, 총체화, 위계적 종속관계, 진보, 목적론.. 등이 헤겔에게 돌아가는 용어들이다. 반대로 스피노자는 “비진화론적 방식에 따라 인식 과정을 목적 없는 과정으로 사유한다. p125” 헤겔은 결코 ‘목적 없는 과정’을 사유할 수 없다. 마슈레는 헤겔의 목적론이 결국 고전적 이성 주체의 합리성과 일치한다고 비판한다.

 

「고전적 합리성의 경우, 진리 서술의 전제조건인 형식적 조건들과 규칙들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모순은 처음부터 회피된다. 헤겔의 경우는 복합적이고 힘겨운 여정 끝에 이르러 최종적으로 모순이 극복되며 이 여정 중에 모순은 자기 자신에 맞서 진리 주체를 긍정하게 된다. 그리고 이 주체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모든 가능한 제한들을 뽑아냈기 때문에 현실적이며, 이 제한들을 극복했기 때문에 무한하다. 이리하여 이 주체는 절대적인 자기 정립이 된다. 두 경우 모두에 어떤 주체와 관련된 합리성이 존재하는데, 이 주체는 자신 안에서 일체의 부정성을 제거해야 할 이유를 발견하며 이를 통해 진리의 우월성을 보증한다. 양자 사이의 차이는, 헤겔이 맞서 싸우고 있는 이전의 표상에서는 이 주체가 이미 시초부터 완전하게 구성되어 있고 완전하게 실정적인 원칙에 따라 실현되어 있는 유한한 주체이며, 바로 이 주체의 영속성이 증명의 일관성 또는 순서를 보장한다는 점에 있을 뿐이다. 반면 헤겔식의 전개 과정에서 이 주체는 무한 주체로서, 이는 이 주체를 달성하는 과정의 말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된다. p329」

 

엎어치나 메치나 똑 같다는 소리다. 헤겔의 목적론이 데카르트의 신과 같은 전통적인 척도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으로 복귀하는 거역할 수 없는 운동으로서 개념의 무한성은 어떤 목적으로 향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으며, 이 목적은 모든 진리의 질서를 떠받치고 있는 데카르트의 진실한 신이 그렇게 하듯이, 개념의 노동은 무익하게 실행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전진적인 발전 안에, 곧 불확실한 시초에 놓여 있던 정신을 필연적인 완성으로 이끌어 가는, 연속적인 동시에 단절적인 진화 과정 안에 기입되어 있다는 것을 보증한다. 그리하여 헤겔은 명시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목적성 개념을 빌려 오면서 “이성은 합목적적 행위다” 라고 쓸 수 있는 것이다. p330」

 

마슈레는 헤겔 목적론의 다른 이름이 바로 부정의 부정이라고 한다. 부정에는 유한 부정과 무한 부정이 있는데, 유한 부정은 방향 없는 정류장이고, 무한 부정은 “자신이 해소하는 모순들의 매개를 통해, 자신이 실현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는 이 목적을 향해 필연적으로 방향 설정되어 있다.p331” 이에 반해 스피노자는 결단코 목적론을 배격한다.

 

「스피노자적 의미에서 영원성은 본질적으로 인과적이다. 이 영원성은 자신 안에 자신의 원인을 지니고 있으며, 일체의 목적론적인 전개 과정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무한자에 속한다. 따라서 실체는 헤겔의 정신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리는 실체가 자기 곁에 머물러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실체란, 일체의 시간적 규정을 배제한 가운데 자신의 모든 변용들 속에서 동시에 스스로를 긍정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행위는 영원한데, 왜냐하면 이 행위는, 이를 어떤 잠재적 무한자의 조건들로 귀결시키는 모종의 현재화의 운동에 전혀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원성은 목적들의 부재다. p335」

 

이 책을 읽다보면 스피노자에게 중요한 개념은 실체, 자기원인, 영원성, 긍정성 따위인 것으로 보인다. 이 개념들이 정리되면 좋겠지만 불가능하고, 여기서는 마슈레가 해석하는 헤겔의 목적론을 중심으로 헤겔과 스피노자를 비교한 몇 부분만 인용해 보았다. 누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껏 읽어 온 지젝의 책들은 헤겔에 대해 전혀 다른 말을 하는 것 같아, 점점 머리가 아프다. 여기서 지젝의 헤겔을 쌈빡하게 정리하여 딱 대조해 보면 참 좋겠지만, 물론 그것도 불가능하다. 지젝은 ‘부정성’을 헤겔의 핵심개념으로 높이 평가하는데, 마슈레는 헤겔의 부정성을 기껏해야 목적론으로 폄하하며 스피노자의 긍정성과 대비한다.

 

 

지젝도 많은 책에서 스피노자를 언급한다. 그렇게 나쁘게 평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몇 권의 책에서 목차를 읽어보니 이런 것이 있다. 『헤겔 레스토랑』의 2부 6장 중 <헤겔, 스피노자 .... 그리고 히치콕>이라는 절이다. 마슈레의 논점과는 빗나있지만 기껏 찾았으니, 두 부분만 옮겨 놓는다.

 

「헤겔을 스피노자로부터 분리시키는 간극을 정식화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클리나멘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다. 스피노자적 실체는 다수의 클리나멘을 낳는 생산적 역능으로, 그리고 그 자체로서 자신의 산물들에 완전히 내재적이며, 오직 그러한 산물들, 클리나멘들 속에서만 현실적인 잠재적 독립체로 파악될 수 있다. 하지만 헤겔에게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다수의 클리나멘들은 실체 자체 속의 보다 철저한 클리나멘 -전도 또는 부정성-을 전제한다. (실체가 또한 주체로서도 파악되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p675~6」

 

「따라서 스피노자에 대한 철저한 독해를 통해 실체는 다름 아니라 그것의 클리나멘의 과정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 여기서 실체는 일자로 남아 있으며, 원인은 결과들에 내재적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관계를 뒤집어야 한다. 즉 실체는 없으며, 오직 절대적 간극, 비동일성으로서의 실재만 있을 뿐이며, 특수한 현상들(양식들)은 이 일자들, 이 간극을 안정시키기 위한 수많은 시도들이다.

하지만 두 진공이라는 이러한 개념은 우리를 다시 헤겔에게로, 절대자는 ‘실체일 뿐만 아니라 주체이기도 하다’는 유명한 공식에서 암시되고 있는 실체와 주체 사이의 간극으로 데려간다. 헤겔적 총체성은 유기적 전체라는 이상이 아니라 비판적 개념이다. - 현상을 총체성 속에 위치시킨다는 것은 전체의 숨겨진 조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증상’, 적대성, 비정합성들을 체계 안의 필수불가결한 부분들로 포함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독법에 따르면 ‘가짜 진공’은 기만적인 안정성과 조화를 갖고 현존하는 유기적 전체를 가리키는 반면 진짜 진공은 자신의 생산에 필요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붕괴를 초래하는) 모든 탈안정적인 초과들을 이 전체로 통합시킨다. 따라서 헤겔적인 변증법적 과정은 ‘진짜 진공’에 의한 ‘가짜 진공’의 반복적인 잠식으로, 실체로부터 주체로의 반복적 전환으로 기능한다. 이 간극은 가장 근본적으로는 불교와 헤겔 변증법 사이의, 평화의 달성과 끈질긴 ‘그래도 지구는 돈다.’ 사이의 최소한의 윤리적 차이로 나타난다. p677~8」

 

 

대충 보아도 마슈레가 말하는 헤겔과는 달라 보일 것이다. 마슈레가 말하는 헤겔의 체계는 (목적을 향한) 진화의 결과 완결된 유기적 총체로 보이지만, 지젝은 헤겔의 총체성이 내부에 절대적 간극을 가진 채 그 부정성으로 지탱되고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은 철학자도 예외가 아닌 걸까? 객관적 진실이란 없다면 오히려 당연한 것은 아닐까? 해석은 관점 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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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15-02-01 1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랑스에서 스피노자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경우 특유의 반헤겔적 분위기 때문에 헤겔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것 같고 거꾸로 지젝의 경우 스피노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있다고 비판하기도 하더군요.

http://blog.aladin.co.kr/balmas/2259526 진태원씨가 대표적..

그리고 헤겔이 스피노자를 비판하지만 결국은 스피노자와 헤겔은 많은 부분에서 유사성이 있지 않은가 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http://ddpa98.org/tn/board.php?board=book3&command=body&no=7

요기서 양우석씨 논문...

이렇게 전공자분들끼리도 논의가 분분한게 스피노자, 헤겔과의 관계인것 같습니다. 마슈레의 책은 사실좀 지젝같은 헤겔주의자의 입장에선 편향적인건 맞는것 같아요. 헤겔을 특히 지젝처럼 부정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말이죠.

http://philinst.snu.ac.kr/thought/46/09.%20%EC%84%B1%EC%B0%BD%EA%B8%B0.pdf

이 논문 참조해보면 말이죠.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저렇게 의견이 갈리는것을 보니 정답이 있다라기보다는 강조하는 관점의 차이정도가 아닐까라고 이해하는 수밖에요. ㅎㅎ


말리 2015-02-02 10:2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이렇게 도움 자료까지 찾아주시고요. 잘 읽어보겠습니다. 일반 독자 입장이라 이 사람 말을 들으면 이렇게, 저사람 말을 들으면 또 저렇게, 어쩔수 없이 갈대가 됩니다. 공부 좀 제대로 해 볼걸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