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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그리고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
류동민 지음 / 코난북스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5년 쯤 전에 <사회과학 방법론 기초> 라는 카페에 가입했다. 지금은 개점휴업 상태지만 한 2년간은 매우 활발했던 카페다. 자칭 B급 경제학자 우석훈이 일반인을 상대로 한 사회과학 무료 강의를 시작하면서 개설되었다. 오프라인 강의를 듣기 전, 강의 주제에 따른 과제를 카페 게시판에 올리며, 놀고 배우는 공간이었다. 온라인 회원들도 꽤 많았고, 뒤늦게 합류한 회원들도 많아서, ‘쪽글’이라고 불리던 과제물은 강의 일정과 관계없이 들쭉날쭉 올라오기도 했다. 나도 지인의 권유로 한참 늦게 가입한 온라인 회원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강의의 목적은 ‘일반인 저자’를 키우는 것이었고, 따라서 ‘쪽글’이라는 이 희한한 이름의 과제물은 일종의 글쓰기 훈련이었다.

 

늦깎이로 합류한 내가 맨 처음 쓴 쪽글은 장소에 관한 내용이었다. 과제 제시 글에서 우석훈은 앙리 르페브르라는 학자의 ‘공간과 장소에 관한 정의’를 짧게 소개했다.

 

“나는 그렇게 강조하는 편은 아니지만, 앙리 르페브르라는 학자가 '공간(space)'과 '장소(place)'의 차이에 대해서 지적한 적이 있다. 공간은 물리적 개념이고, 장소는 거기에 사람들의 관계가 누적적으로 개입하는 곳, 그 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 기억도 없는 곳이면 공간이고, 거기에 누군가가 있다 혹은 추억이 있다, 그러면 장소로 변한다는 그런 단순한 논리지만, 이 정도만 생각해도 물리적 특징만 있는 공간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과제는 “자신의 탄생지, 거주지, 그리고 은퇴지에 대해서 서술하고, 그 공간의 의미,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자신에게 갖는 특별한 의미에 대해서 쓰시오.” 였다.

 

내가 쓴 글은 다시 읽어보니, 언제나 그렇듯이, 쌉쌀하지만, 류동민의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읽고 맨 먼저 생각난 글이다. 그 과제를 하면서 나는 사십 여 년의 삶을 주르륵 훑으며 내가 머물렀던 곳들을 짚어 보았다. 가장 오래된 기억 하나는, 출렁이던 남학생들의 물결이다.

 

하교 길이면 4차선 도로 양 쪽의 넓은 인도가 하얀 셔츠를 입은 짧은 머리 남학생들로 새까맣게 뒤덮이곤 했다. 절묘한 위치에 있던 우리 집은 버스 정류장 두어 개의 거리 안에 대여섯 개의 남자 중고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때는 아직 땅값을 이유로 학교들이 도시 외곽으로 밀려나기 전이었고, 우리 동네는 말하자면 학원(학교)가였다고 할 수 있다. 어깨를 스치도록 빽빽이 걷는 남학생들의 수풀 사이로 나는 매일 고개를 푹 숙이고 죄인처럼 집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한 번도 따라오는 남학생이 없었다는 사실이 왠지 슬펐던 기억이 난다. 예뻤던 나의 셋째 언니는 집 안까지 따라 들어오려는 남학생을 피해 비명을 지를 수 있었는데 말이다. 오래 전의 그 거리는 슬프고도 설레었던 추억의 장소이다. 그 까까머리 남학생들이 있어 그 텅 빈 거리는 고향을 떠올리는 추억의 장소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끝내 특별한 장소를 만들지 못했던 십 여 년의 삶이 있었다.

 

“나는 지금은 이곳저곳에서 산다. 십여 년을 서울과 경기의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경기의 북쪽 끄트머리든 남쪽 귀퉁이든 아파트들이 모여 이룬 소도시들은 여기가 저기 같아서 계속 한 곳에서 살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것은 그 동안의 내 삶의 모양과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나는 늘 같은 무언가를 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 십여 년 내가 머물렀던 공간들을 아직 나는 어떤 장소라고 부르지 못할 것 같다. 특별한 사람도 추억도 삶도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유랑을, (한때 그리고 지금도 유행하는 것 같은 말로 하자면) 유목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내게 너무 텅 빈 이 공간을 어떤 이야기가 있는 장소로 만들고 싶지만, 아직도 나는 미끄러지기만 하고 있다.”

 

오랜만에 찾아간 카페에서 몇 조각 긁어온 문장들을 굳이 덧붙이는 것은,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가 대충 이런 식의 기억들로부터 글을 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서울이라는 그 ‘특별’한 도시에서 주거했던 기간은 20대의 한 10년간이다. 하숙촌에서의 4년과 결혼 전 강북 여기저기에서의 6년 정도가 전부다. 신혼집은 경기도 북부에서, 그 이후로는 경기 동부와 남부 등을 맴돌다, 지금은 수도권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꼭 서울에서 살아야 할 필요도 없었지만, 애당초 서울에서의 주거 자체가 불가능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서울은 내가 모르는 곳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속들이 알고 있는 곳도 아니다.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것이 어쩌면 자연스럽다. 그런데도 이 글을 쓰는 것은 15기 알라딘 신간평가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신간평가라는 것이 신문의 서평처럼 일정한 형식을 강제하지는 않아, 나는 평소처럼 책이 촉발한 어떤 기호를 따라 자유롭게 떠돌고 있다.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의 저자 류동민은 <책머리에>서 “인문학이 필요한 자리는 사회과학으로 때우려 하고 사회과학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인문학으로 얼버무리려는 어설픈 짓을 한 것 같아 느끼는 두려움”에 대해 고백했다. 불행하게도 나는 그 두려움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저자의 인문학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까만 머리 남학생 물결에 대한 추억과 비슷한 것들이 그 범주에 들어가는 것 같다. 지젝이 잘 하듯(요즘 유행이니 꼭 지젝이라고 할 필요는 없지만 저자가 좋아한다고 한다), 영화나 드라마 등의 대중문화에 빗댄 설명들도 해당될 듯하다.

 

여하튼 많은 에피소드들이 등장하는데 새롭지는 않다. 손석희의 뉴스룸에서, 포털 뉴스들에서, 화제가 된 트윗에서, 팟캐스트에서, 어디서건 보고 들었던 듯하다. 스타벅스가 제공하는 네 가지 선택의 ‘자유’, 아파트 공화국으로서의 대한민국, 대치동 학원가와 영등포 공시생, 압구정동 성형외과, 자본에 잠식되는 대학 캠퍼스, 상업화한 대형교회, 영세 상인을 몰락시키는 마트, 학벌의 카스트화, 계급에 따른 주거의 분리, 능력신화의 파탄 등등이 추억과 함께 빼곡히 전시되어 있다.

 

이 시대 서울의 맨 얼굴, 한국사회의 민낯은 이미 훤히 드러나 있다. 그 이유도 알려질 만큼 알려져 있다. 몰라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어, 우리는 이렇게들 살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이 계몽은 아닌 것 같다.

 

문제는 출구다. 출구 없는 방에 갇혔으니 어쨌든지 살아남아야 할 것인가? 무수한 자기계발서와 멘토를 표방하는 책들의, 아름답고 싱싱한 문장들을 걷어내면, 나타나는 네 글자는 ‘각자도생’이다. 한때 유행했으나, 각자도생은 벌써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승자독식의 결과는 개미지옥임을 상징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장그래’ 다.

 

정말 출구는 없는가? 류동민이 말하는 ‘사회과학이 있어야 할 자리’는 아마도 여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두려움처럼 눈에 띄는 사회과학적 방법은 없다. 학자들 이름 몇몇이 스치듯 지나가지만, 거기서 어떤 빛을 보기는 힘들다. 자본주의 이후에 대한 전망을 한 명의 경제학자에게 요구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에필로그에 제시한 시나리오는 얼마간 논쟁의 여지가 있을 것 같다.

 

우리 사회의 미래에는 두 가지 시나리오가 있다. 하나는 자유시장경쟁의 가속화다. 류동민은 탈주자와 추격자의 관계로 묘사하는데, 추격자가 절망하여 추격을 포기할 때, 투 트랙의 사회가 완성될 것이라 본다. 빈부 격차의 극대화다. 저자가 희망하는 또 다른 시나리오는 추격이 가능한 민주적 사회다.

 

“능력주의에 대한 강력한 요구, 더 나아가 능력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대중적 요구와 문제제기가 이루어질 때 사회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민주화를 위한 투쟁의 역사가 지금 여기에서 생산적 의의를 갖는다면 바로 이 부분일 것이다. P279”

 

이 주장에 의하면 류동민은 기본적으로 ‘탈주와 추격’을 바람직한 사회의 작동원리로 보고 있다. 소위 개천에서 용이 나는 사회는 보다 민주적이고 평등하다는 말이다. 물론 자본이 능력 발현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세습사회로 가는 길 보다는 개천의 용을 꿈꾸는 과거로의 회귀가 나아보일 수는 있다. 그런데 능력사회란 승자독식 사회와 다른 것인가? 능력주의의 극단에서 우리가 맞닥뜨린 것이 바로 승자독식 아닌가?

 

“서구에서 복지국가가 신자유주의로 이행된 것이 보험의 원리에서 복권의 원리로의 이행이었다면, 복지국가를 경험한 적이 없는 한국에서 신자유주의로의 이행은 노력에 따르는 성공이라는 복권을 꿈꾸는 사회에서 각자 알아서 살아남는 사보험의 원리가 적용되는 사회로 이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자 재주껏 살아남기’ 라는 원리는 여기에서도 적용된다. 정상을 향한 것이라고 여겼던 경주가 실은 바닥을 향한 경주임을 깨닫게 될 때, 추격과 탈주의 과정이 밟을 수 있는 미래 시나리오 중에서 어느 것이 실현될지가 결정 될 것이다. p280”

 

저자의 의도와는 (아마도) 다르게 이어지는 문장은 앞서 말한 투 트랙이 사보험과 복권으로 비유되고 있는가 하는 의문까지 일으킨다. 능력주의가 복권을 꿈꾸라는 것처럼 들릴 위험이 다분하다. 그런데 능력주의와 공공성은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 저자는 능력주의에 대한 강력한 요구에 이어 곧바로 공공적 ‘도시권’에 대한 희망을 피력한다. 도시권이란 도시의 일상생활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로 정의된다.

 

“그런데 도시권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 꼭 반자본주의 투쟁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일터에의 접근권을 보장하는 것, 주거지에서 일터까지 통근에 걸리는 금전적·비금전적 비용의 복구를 요구하는 것은 자본주의 틀 안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열악한 주거 공간에서 살아야 하는 빈곤층과 젊은 세대의 주거권에 대한 사회적 보장은 자본주의 국가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노동력의 원활한 재생산이 그 자본주의 국가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p28!21”

 

여기서 저자 류동민은 마치 안심하라는 듯 도시권의 요구는 반자본주의 투쟁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권리임을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저자의 ‘증상’이 아닐까? 탈주와 추격을 사회의 기본 작동원리로 보고, 능력주의를 요구하고, 무의식중에 복권을 상위에 놓는 태도는 그가 자본주의적 틀 밖에서 사고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은 아닐까? 신자유주의는 안 되지만 자본주의적 경쟁 사회의 모델 또한 벗어날 수 없다. 결과적으로 저자가 갈 수 있는 길은, 개천의 용이 복권에 당첨되기도 하던 능력사회, 유래 없는 경제적 행운을 누렸던 그들 386세대들이 사회에 막 진출하던 과거밖에 남지 않는다. 궁금한 것은 자본주의 안에서 보다 민주적이고 평등한 사회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흔히 택하는 사민주의, 이른바 서구 복지국가의 공적보험 모델에 대해서는 왜 애시 당초 염두에 두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실패한 모델이기 때문에?

 

가장 난감한 것은 마지막 문단이다. 갑자기 앵겔스가 불려온다. 앵겔스는 사유재산 때문에 의사결정이 점점 소수의 손에 집중되는 것이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이라고 주장했다. 저자는 이 개념을 공간에 적용하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는 공적 도시권의 요구임을 강조한다.

 

“만약 공간 생산의 모순을 심화시키는 것이 자본 혹은 자본주의라면, 그것은 돈의 논리가 우리들 각자의 공간에 대한 기억을 왜곡시키면서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어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하므로 비록 추상적이지만, 돈의 논리 때문에 왜곡되는 우리의 기억, 억압당하는 이들의 기억을 복권시키는 것에서 공간 생산의 정치경제학은 시작되어야 한다. 이렇게 서울의 정치경제학은 다시 공간의 기억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p284~5”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이 결국 공적 도시권을 억압한다는 소리다. 기본모순이란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사라질 수 없는 것이다. 한편 저자는 자본주의 틀 안에서의 민주와 평등을 주장해 왔다. 저자의 논리대로라면 자본주의가 궁극적으로 허용 할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을 자본주의 안에서 요구하는 것이다. 그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리뷰가 신간평가단으로서의 글쓰기라는 사실 때문에 어떤 영향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인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상당히 입이 쓰다. 사실 개인적 취향에 맞는 책은 아니지만,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심심찮게 읽을 만한 책이다. 무엇보다 과거의 어떤 골목길, 잊었던 옛집의 우물과 개암나무 따위를 불현듯 불러오는 힘이 있다. 그럼에도 내내 아쉬웠던 것은 너무 많은 것들의 나열과 이미 알려진 분석들이 대부분일 뿐, 저자의 독창적인 관점이나 깊이 있는 해석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에필로그에 와서 저자가 어떤 관점들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는 결정적 느낌을 받게 되었다. 물론 한 사람의 독자로서 지극히 사적인 독해에 불과하다. 다른 신간평가단원들의 새로운 해석들이 지극히 편협한 나의 독해를 수정해 주기를 기대한다. 나는 파워 블로거도 아니고, 하루에 기껏해야 2~30명,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면 많아봤자 4~50명의 방문객을 맞는 한산한 서재 주인이다.  혹시 이 책의 관계자 분이 이 글을 읽게 되더라도 신경쓰지 않기를 바란다. (아..사족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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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2-01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이 책 보니 데이비드 하비가 << 반란의 도시 >> 에서 주장한 도시권가 비스무리한 것 같습니다.

말리 2015-02-02 10:25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조금 애매한 것이 사회과학적 이론을 조금씩 언급하긴 하는데 별 설명없이 넘어가 버립니다. 이미 알고 있어야 그 문맥의 깊이? 혹은 적절성을 알수 있지요. 말씀하신 책은 읽을만한지 궁금하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2-02 18:34   좋아요 0 | URL
반란의도시`도 그닥... ㅎㅎㅎㅎㅎㅎ
용두사미`로 끝나서 화딱지가 납니다.
공간지리학이 의외로 참 재미있는데 말입니다. 저는 반란의 도시보다는

피터손더스가 엮은 < 도시와 사회이론 > 을 추천합니다. 일종의 지리학 입문서인데 요거 한 권 읽고 공간 지리학 읽으면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 좋습니다.

말리 2015-02-02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고맙습니다. 찜해 두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