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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롤랑 바르트 지음, 변광배 옮김 / 민음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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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품을 쓸 수 없을 것 같고, 더 이상 써야 할 작품이 없으며, 내가 써야 할 유일하게 남은 것은 써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바르트는 이런 식의 작품에 대한 작품의 담론을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작품은 내가 그것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르트가 말하는 메타담론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지만, 나도 그렇다. 리뷰를 쓸 수 없을 것 같고, 내가 유일하게 쓸 수 있는 것은 쓸 수 없다는 것이다. 현대 작가들은 왜 쓸 수 없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읽고도 이해한 것이 별로 없어서 그렇다. 그래도 내가 이 책에 대해 말해야 한다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롤랑 바르트? 몇 번 들어본 이름이지만, 그다지 호기심도 없었고 아는 것도 없었다. 다만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 노트>라기에 조금 안심이 되었다. 푸코의 강의는 매우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라고 할까. 재미는 둘째 치더라도 어려웠다. 특히 1부는 더 그랬다.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는 2부로 되었다. 1부는 “소설의 준비: 삶에서 작품으로”란 제목으로 1978년 12월부터 1979년 3월까지 진행된 강의이고, 2부는 “소설의 준비: 의지로서의 작품”으로 1979년 12월에서 1980년 2월까지의 강의다. 바르트는 “소설의 준비” 강의를 마치고 이틀 후인 1980년 2월 25일에 교통사고를 당해 한 달 후에 세상을 떠났다.

 

“소설의 준비”는 말 그대로 소설을 쓰기 위한 준비 작업이다. 작가들이나 작가지망생들에게는 매우 실용적인 강의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일반적 의미의 “실용”을 생각하면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다. 작법에 관한 강의도 책도 접해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그런 것들과는 다를 것 같다. 작가의 기본적 태도?, 가치관? 이라고 해야 할까?

 

1부의 대부분은 ‘하이쿠’에 대한 칭송(?)이다. 하이쿠, 하이쿠, 하이쿠!

“5, 7, 5의 3구(句) 17자(字)로 구성되는, 일본 고유의 단시(短詩). 극소수의 단어로 많은 것을 표현하고 암시하는 예술이다.” 하이쿠의 사전적 의미다. 바르트가 인용하는 많은 하이쿠는 내가 보기에 참 평범하다. “겨울바람이 불어오자 / 고양이들의 눈이 / 깜박댄다.”

 

바르트는 하이쿠를 일종의 ‘메모하기’ 로 본다. 메모 하기는 소설의 전 단계, 글쓰기의 최소 행위다. 여하튼 하이쿠에 대한 과도한 찬사를 보며 드는 느낌은 이런 것이다. 이사람 저사람 술꾼의 손에 돌고 돌던 술병을 두고 수억이 넘는 조선 최고의 백자라 감정하는 <TV쇼 진품명품>을 지켜보는 15세기 주모의 심정이라고나 할까. 하이쿠 때문에 1부는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도 참 웃기다. 이해를 못하니 흠집을 낸다.

 

1부가 하이쿠라면 2부는 프루스트다. 발자크, 플로베르, 말라르메, 카프카도 있지만 단연 프루스트다. 마침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1,2권은 읽은 터라, 하이쿠보다는 훨씬 낫다. 그런데 펭귄클래식 코리아는 1,2권이 나온 지가 언젠데, 아직 3권을 내놓지 않는다. 7권까지 읽으려면 몇 년을 기다려야 할지 모르겠다. 프루스트가 전권을 쓴 기간보다 전권 번역이 더 오래 걸리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다. 여하튼 2부에는 조금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도 있고 심히 공감되는 부분도 있다. 가령 글쓰기 욕망.

 

바르트는 글쓰기의 편집증적 욕망에 대해 말한다. 카프카는 밤의 ‘낙서’를 자신의 욕망으로 여겼고, 플로베르는 ‘글쓰기라는 길들일 수 없는 환상’에 대해 말했다. 작가는 “궁둥이에 욕망을 달고” 산다. 편집증적 욕망은 우스꽝스럽지만, 우스꽝스러움이란 그 자체가 배제와 고독인 만큼 대단한 면이 있다. 특히 원고는 순수한 욕망의 덩어리다. 모든 원고가 지루한 것은 이 때문이다. 타인의 욕망과 소통하고 타인의 욕망에 흥미를 갖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출간된 작품과 원고는 다를 수밖에 없다. “작가의 욕망을 매개한 작품은 그에게서 그의 욕망을 조금 빼앗습니다. 내가 독자로서 그 욕망을 견딜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p241”

 

어쩌면 우리가 밤에 쓴 편지처럼 순수한 원고는 다음날 아침 우리를 질식시킬 지도 모르는 걸까? 타인의 순수한 욕망만큼 감당하기 힘든 것도 없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쓰기와 읽기의 관계다. 바르트는 글을 쓰지 않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즉 글쓰기가 읽기에서 기인한다면, 이 두 행위 사이에 강제가 있다면, 어떻게 쓰도록 강제당하지 않은 채 읽을 수 있을까요? 달리 말하자면, 이 질문은 괴물과도 같은 다음 질문입니다. 어떻게 작가들보다 독자들이 더 많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읽으면서 행복할 수 있을까요? 글쓰기 행위로 이행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어떻게 위대한 독서 애호가가 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억압일까요? 나는 이 질문에 답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단지 이 질문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만을 잘 알 뿐입니다. 결국 나는 항상 독자들이 있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다시 말해 글을 쓰지 않는 많은 독자들이 있다는 것에 놀랍니다. 여전히 같은 질문입니다. 소통 불능의 본질인 질문입니다.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어떻게 타인의 욕망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어떻게 이 욕망 -이 쾌락- 에 동일화될까요?) 관대한 태도 (이해하지 못하는 욕망을 이해하려는 척하는 태도)에 의해 묻혀 버린 전형적인 질문입니다. p242」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읽기 위해 읽는가, 쓰기 위해 읽는가? 작가도 아니고 작가가 될 의지(능력)도 없지만, 내 안에 글쓰기의 욕망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서둘러 책을 읽으며, 머릿속에 리뷰를 먼저 쓸 때가 있다. 어떤 문장이 내 기억을 강제할 때 (프루스트 식으로), 나는 책 내용보다 기억을 따라 가기를 즐긴다. 바르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글쓰기를 하고자 하는 한 주체의 이야기’ 라고 한다. 스크립투레 (글쓰기-의지)의 소설이다.

 

 

 

나는 이 리뷰에서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의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 하지 말았어야 했지만, 책을 제공받은 대가로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도 모르면서 말하고 있다. 이 글은,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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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이번달에는 조금 얇은 책이 되었으면 한다. 3월 신간평가단 책에 살짝 어금니를 깨물고 있다. 너무 두껍고 무겁다 흑;;  인문사회 분야의 책은 호불호가 분명한 편이라 취향을 빗나간 책은 부담이 두배다. 혼자 읽을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공동으로 선정해 의무적으로 읽어야하고 보니, 일반적으로 읽기 좋은 책이 어떤 것일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첫 번째 책은 지젝의 『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생각들』 이다.  작은 크기에 100쪽 정도의 책으로 매우 가뿐하고 가볍다. 사실 나는 읽었지만, 이 책을 두고 장정일과 이택광이 한겨레를 통해 한바탕 논쟁을 치루는 것을 보고, 한번 더 읽어볼까 싶다. 사실 지젝의 입장은 매우 분명한데 무엇때문에 그렇게 싸우는지 모르겠다. 지인의 말을 들어보면 전부터 두 사람 사이에 지젝을 놓고 트윗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 것과 관계없이 샤를리 에브도 사건과 IS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은 매우 시의적절하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전근대적 현상이 아니라 서구 근대가 만들어낸 외설적 증상이라는 지젝의 진단은 찬반여부를 떠나 생각해볼 만하다.

 

 

두번째 책은 솅크먼의 『우리는 왜 어리석은 투표를 하는가』다. 솅크먼은 물론 처음 듣는 이름이다.  기자, 프로그램 진행자 등 다양한 경력을 가진 역사학자로, 현재 미국 대학의 역사학과 부교수인 것 같다. 순전히 제목을 보고 선택한 책이다. 서민들이 새누리당을 찍는 것도 어리석어 보이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다. 맨날 입에 욕을 달고 있으면서도 보수적인 야당을 찍는다. 새민련이 호남의 새누리당 혹은 정부여당에 반대하는 새누리당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투표 용지 앞에서는 또 어리석은 미련을 떨치지 못한다. 나는 왜 그렇게 어리석은 것일까?

 

 

마지막으로 주래프스키의 『음식의 언어』다. 400쪽이 살짝 넘지만, 음식이 삼분의 일쯤 차지한다고 추측하면, 그다지 힘든 분량은 아니지 않을까 싶다.  저자는 언어학 교수인데, <음식의 언어>는 스탠퍼드 대학의 대표적 교양 강의라고 한다. 말하자면 강의록이겠다.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만큼 유명한 강의인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제목만으로는 샌델보다 재미는 있겠다 싶다.  "음식의 언어에 주목하며, 이를 탐구함으로써 인류의 역사와 세계의 문화, 사회, 경제를 다시 쓰고 인간의 심리, 행동, 욕망의 근원을 파헤친다." 고 출판사는 주장하고 있다. 과연 음식의 언어로 세계를 얼마나 다시 쓸 수 있는지 조금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확인해 보고는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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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국가 -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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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국가』는 2014년 여름과 가을에 걸쳐 계간 《문학동네》에 게재된 12편의 글을 엮은 책이다.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 언론학자, 정신분석학자, 정치철학자 등이 각자의 눈으로 바라본 세월호 이야기다.

 

나는 그 중 소설가 박민규와 시인 진은영 그리고 현대정치철학연구자 홍철기의 글에 주목했다. 연민과 분노, 자기 환멸을 넘어선 독창적 관점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김연수와 김서영도 좋았지만, 이 세 편의 글에 한정해서 리뷰를 쓰고 싶다.

 

 

1. 박민규의 《눈먼 자들의 국가》

 

내가 아는 박민규는 비비 틀어서 조롱하기의 대가다. 틀렸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책을 두 세권 보았을 뿐이고, 그것도 오래된 일이니, 책 내용도, 그에 대한 이미지도 흐릿하게만 남았다. 기억은 때로 아주 작은 단편을 전부로 간직하고 있다. 여하튼 그는 낄낄대며 읽는 작가로, 이미지화 되었다. 그런데 이 글은 전혀 다르다. 조롱기도 냉소도 없다. 진지하고 단호하다. 어쩌면 세월호 앞에서 글재주는 사치가 될지도 모르겠다.

 

『세월호를 기록하다』를 읽으며 그날의 실체적 진실에 가까이 갔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잊고 있었던 것들이 이 글 속에서 다시 떠올랐다. 첫째가 언딘이다. 국가가 구조마저 민영화했다고 분노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사실 그건 민영화도 아니었다. 민간업체가 더 전문적이라고 자신을 깎아 내리며 국가가 추켜세웠던 그 언딘은 한 달이 지나자 사실 자신들은 구조업체가 아니라고, 인양을 하러 온 업체라고 항변했다. 그럼 구조는 누가 맡은 거냐는 질문에 언딘은 말했다. “구조는 국가의 의무죠.” 둘째는 6.4 지방선거 결과와 특히 7.30보선 참패다. 이것은 단순히 야당의 패배가 아니었다. 세월호에 대해 국가가 획득한 면죄부였다. 보선을 분수령으로 상황은 급변했다. 정부는 대놓고 국정조사를 가로막고 자료제출을 거부했다. 세월호에 대한 역공이 시작되었다. 세월호 진상규명은 불순세력의 선전선동으로 낙인찍혔다. 면죄부를, 그것을 넘어 탄압의 명분을 준 것은 우리다. 우리 국민이 가장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그렇게 했다.

 

세월호를 바라보는 박민규의 독창성은 사고와 사건에 대한 구분에 있다. 세월호에 대한 그의 정의는 “선박이 침몰한 ‘사고’이자,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 이다. p56”

 

「사고와 사건은 다르다. 사전적 해석을 빌리자면 ‘사고’는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을 의미한다. 반면 ‘사건’은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거나 주목받을 만한 뜻밖의 일을 의미하는데 거기엔 또 다음과 같은 해석이 뒤따른다. 주로 개인, 또는 단체의 의도하에 발생하는 일이며 범죄라든지 역사적인 일 등이 이에 속한다. p57」

 

박민규에 의하면 세월호를 둘러싼 싸움은 명명의 싸움이다. 정부여당은 기를 쓰고 사고를 고집한다. 한낱 불행한 교통사고라는 것이다. 야당은 아무 생각이 없다. 세월호를 ‘사건’으로 규정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모른다. 그러니 바보다. 명명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런 말이 있다. (대충 기억한다.) 적이 우리의 언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승리한 것이다. 프레임의 싸움이다. 세월호가 사고가 되면 남은 것은 법적 책임과 적절한 보상밖에 없다. 뜻밖의 불행한 일에 무슨 대책과 정치적 책임이 필요하겠나? 수습이면 충분하다. 그렇게 보상 이외에 진실규명을 위한 일체의 주장은 불순한 세력의 선전선동으로 낙인 된다. 세월호는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다. 왜? 우리는 그 ‘사건’의 진실을 원한다.

 

 

2. 진은영의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

 

자정에 그림자가 있나? 잠시 의아했지만, 그녀는 시인이다. 그리고 니체로 학위를 받은 철학박사다. 한 다리 건너 아는 시인, 물론 시인은 나를 모르지만, 나는 10 여 년 전 시인과 잠깐 눈인사도 했고, 시인의 시집도 갖고 있다. 시인의 친구가 준 것이지만, 솔직히 나는 시인의 시를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진은영은 그날도 니체 강의를 위해 고민하고 있었다. 니체는 연민을 혐오했다. ‘고통 받는 이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대신 그 고통 앞에서 수치심을 느껴라. 연민이란 참으로 게으르고 뻔뻔한 감정이다.’ 온 나라가 슬픔과 연민에 빠진 그 시점에 니체야말로 가장 어울리지 않는 철학자이지만, 진은영은 과감히 니체로부터 세월호를 사유한다.

 

「우리가 마음껏 가엾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고통 받는 이들의 상황에 우리 자신이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생각할 때뿐이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우리는 그렇게 느낄 수 없다. p73」

 

연민을 증오하고 거렁뱅이를 몰아내라고 주장한 니체의 동류는 보들레르다. 철학자와 시인, 진은영에게 알맞아 보인다. 보들레르는 거렁뱅이를 때려눕히라고 외쳤다.

 

「시혜는 강자가 약자에게 제공하는 것으로 불평등한 관계를 전제할 때만 가능한 활동이다. 시혜와 평등은 완벽하게 대립한다. p75」

 

경남 무상급식을 중단한 홍준표를 반대하는 이유도 이것이다. 홍준표는 무상급식이라는 평등을 구걸로 바꾸어 버린다. 가난을 인증하면, 불평등을 인정하면, 시혜를 주겠다는 논리다. 거렁뱅이가 아니라 거렁뱅이를 만드는 자를 먼저 때려눕혀야 한다.

 

여기서 진은영은 한층 놀라운 연상을 한다.  6.4 지방 선거에서 여당이 들고 나온 구호는 ‘도와주세요’였다. 도와달라는 아이들을 외면한 정부여당이 어떻게 저런 뻔뻔한 구호를 외칠 수 있는지 격분했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사람들은 도와주었다. 물에서 건져주자 곧바로 내보따리 내놓으라는 협박에 시달리게 되었지만. 왜 심판을 해도 모자란 상황에서 사람들은 정부여당을 건져주었을까? 진은영은 그것이 선거를 관통한 시혜의 에토스라고 한다. 사람들은 선거의 실상을 잘 알고 있다. 어차피 그들은 우리를 대리하지 않는다. 선거는 자신을 대리할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다. 선거에서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것은 한순간 시혜자가 되는 기쁨이다. “박근혜 찍었지. 지 엄마 아부지 죽어서 불쌍하다고.” 도착적인 기쁨이다. 선거만 되면 굽실대는 국회의원 후보들이 평소에는 만나기조차 힘든 귀한 몸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표를 찍는 그 순간만은 내가 너를 구해주는 천사라는 기쁨이 더 짜릿할지도 모르겠다. 조금 억지 같은가?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시혜와 평등은 양립할 수 없다는 것, 연민은 나를 그 연민의 대상에서 제외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니체를 저마다의 필요에 따라 가져다 쓴 권력들이 존재했지만, 진은영이 말하는 연민에의 혐오는, 역설적이게도 세월호에 관한한 옳다. 우리가 세월호의 밖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국가 자체가 세월호다.

 

 

3. 홍철기의 《세월호 참사로부터 무엇을 보고 들을 것인가?》

 

홍철기는 신자유주의의 관점에서 세월호를 분석한다. 박민규도 세월호의 키워드로‘민영화’를 꼽았다. 홍철기는 박민규보다 좀 더 철학적인 접근을 한다. 2008년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신자유주의는 분명 이론상 패퇴하고 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는 예상하지 않은 곳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주체성이 사유화된 것이다.

 

「사적으로 극히 유능하도록 요구받지만 공적인 능력은 완전히 결여된 주체성을 생산하고 그에 고유한 사회적 관계를 산출한다는 의미에서 신자유주의란 정치가 ‘경제’에 의해 대체되는 기획일 뿐만 아니라 보다 본질적으로는 ‘경제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통치의 패러다임” 이기도 하다. p207」

 

신자유주의는 사회를 오직 시장으로만 표상하는데, 이러한 표상에 의거하여 사회가 재편도록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정치를 경제로 대체할 뿐 아니라, 경제로 대체되도록 정치적으로 개입한다는 뜻이다. 그 결과 공공영역이 민영화 혹은 사유화되는 것은 물론 주체성 자체가 사유화된다. ‘자기경영’, ‘자기계발’ 따위가 그 사례이다.

 

주체성의 사유화는 공적 능력의 상실을 의미한다. 공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징징거리기만 한다. 거꾸로 타인의 말을 공적인 이야기로 들을 줄도 모른다. ‘공적인 이슈들을 다루는 언어’가 사라진다. 말뿐 아니라 시각도 마찬가지다. 홍철기는 한병철의 《투명사회》 를 빌려와 투명사회의 폭력성을 설명한다. 사유화된 영역은 투명한 가시성의 범위에 남겨두고, 공공성을 보이지 않는 사회의 그림자 속에 버려둔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의 양태를 사적인 당사자로만 규정하려는 시도들은 모두 이와 같은 투명성의 정치미학 논리에 매몰되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우리의 공통의 무능력과 책임의 부재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그저 규모가 큰 교통사고로 치환하려는 사고방식, 혹은 유가족에 대한 보상 문제나 생존 학생의 대학특례입학 내지는 희생자의 의사자 지정에 관한 쟁점으로 논의의 방향을 바꾸려는 시도들은 그 배후의 정치적 의도와 함께 투명성의 폭력이라는 측면에서 비판되어야 한다. p215」

 

세월호 사고는 사적인 것이, 세월호 사건은 공적인 것이 된다. 세월호는 사건이다.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다.

 

 

 

* 제목으로 삼은 <진실은 수장될 위기에 처했고, 슬픔은 거리에서 조롱받는 중이다.>는 편집자인 평론가 신형철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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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를 기록하다 - 침몰·구조·출항·선원, 150일간의 세월호 재판 기록
오준호 지음 / 미지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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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들고 답답했던 것은

첫 째, 그 빌어먹을,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누가 왜 반복했냐는 것이고,

둘 째, 맹골수도에서 급변침한 이유는 무엇이며,

세 째, 왜 구조는 그따위로 엉망이었는지 이다.

 

그 방송만 아니었다면 훨씬 많은 생존자가 돌아올 수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명백해서 누구나 안타까움과 울분을 금하지 못했다. 급변침에 관해서는 당시 조타실을 맡았던 항해사와 조타수가 버젓이 살아 있는 상황에서 그런 기초적인 사실조차 확인하지 못한다는 것이 너무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구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다. 해경 그 누구도 선실 안으로 들어가지도, 탈출하라고 방송 한 번 하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잊고 있었다. 유병언이 백골로 발견되자, 당시에는 진짜 유병언이 맞는가 말도 많았지만, 금방 그것은 기정사실이 되고, 언론도 사람들도 세월호에 대해 급격히 관심을 잃어갔다. 간간이 재판 소식이 들려오고, 1차 재판의 최종 선고가 내려지고, 그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에도 양형이 생각보다 적다는 생각을 잠깐 했을 뿐, 어떤 실체적 진실이 밝혀졌는지 자세히 알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 얼마 전 세월호에 탔던 화물기사 김동수씨가 많은 아이들을 구조해 놓고도 스스로 살인지라고 생각하며 자살을 시도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그리고 벌써 4월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주문하다가 우연히 『세월호를 기록하다』를 보았다. 발행일이 2015년 3월 20일이니 출판된 지 열흘 정도 된 책이다. ‘150일간의 세월호 재판 기록’ 이란 문구가 눈에 들어왔고, 세월호를 제대로 정리하려면 이 책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300여 쪽의 분량이지만 하루 만에 빨려들듯 읽었다. 잠깐 청소를 하려고 책갈피를 끼워놓았다가 다시 책을 펼치며 깜짝 놀라기도 했다. 책갈피를 잘못 꽂았다고 생각했다. 조금밖에 안 읽은 줄 알았는데 어느새 반이 넘어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에 근거한 가장 객관적인 글’ 이란 평처럼 재판 기록을 토대로 사건을 재구성한 책인데 어떤 픽션보다 더 몰입도가 높았다.

 

읽으면 읽을수록 희생자들이 참 운이 없었다는 생각을 했다. 세월호가 침몰하기까지 그 많은 과정들 속에서 누구 한사람, 어떤 과정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행동하고 지켜졌다면, 브레이크를 걸었다면, 그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어쩌면 한결 같이 이기적이고 무능하고 부패했는지, 이럴 수도 있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그런데 운의 문제가 아니었다. 세월호가 특별히 불운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 사고는 일탈이 아니라 정상이, 우리가 정상으로 믿고 있던 시스템이, 필연적으로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그런 결과였다.

 

「그런데 세월호 사고는 과연 국가의 정상적인 상태로부터 일탈한 사고인가? 어쩌면 이 사고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세월호 사고를 낳은 것은 우리가 ‘정상적인 상태’라고 여긴 바로 그 국가, 그 사회 시스템이란 사실이다. …… 상식을 초월하는 이 사고에는 당연히 상식을 초월하는 어떤 거대한 ‘일격’이 있었을 것 같지만, 나는 재판 과정을 통해 참사의 배경에 있는 것은 촘촘하게 결합된 비겁하고 이기적이며 무책임하고 무능한 행동들이란 사실을 알았다. p324」

 

“세월호를 무리하게 증축하지 않았다면, 화물적재 기준을 초과하지 않았다면, 고박을 잘 했다면, 운항 관리자가 규정을 지켰다면, 조타수가 조타 실수를 하지 않았다면, 비상사태에 매뉴얼대로 했다면, 123정이 제대로 판단했다면...” 이렇게 무수히 상상해 본다. 그런데 너무너무 불행하게도 이 모든 것들이 딱 맞아 떨어졌다. 아마도 이렇게 많은 가정 아래 어떤 사건을 재구성한다면 대부분은 음모론이라 할 것이다. 어떤 특수한 상황이, 정상에서 벗어난 어떤 일탈적인 행위가 이렇게 연속적으로 일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들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그것들이 우리 사회를 움직인 정상적인 시스템이었다는 뜻이다.

 

「요컨대, 이렇게 무수한 요인의 동시다발적인 진행을 ‘소수의 일탈’로 볼 수 없다. 진실은, 우리 사회가 이런 행동들을 묵인했거나 심하면 대세로 보아 부추겼으며 그 위에서 성장과 발전을 이룩했다는 데 있다. 지붕이 무너진 것은 마지막에 떨어진 눈송이 때문만은 아니다. p325」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세월호 재판의 한계를 세 가지로 짚으며, 이렇게 평가한다. 객관적인 서술로 일관하던 저자가 그 자신의 판단과 사유를 직접 표출한 부분이다. 여기서 저자는 ‘하인리히 법칙’이란 것을 설명한다. 미국 보험사 직원인 하인리히가 직업상 연구한 산업재해 사례를 토대로 내놓은 법칙이라고 한다.

 

「산업재해 중상자가 1명 발생했다면, 그 전에 이미 경상자가 29명 발생했고, 부상을 당할 뻔한 잠재적 부상자의 수는 300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1:29:300의 하인리히 법칙은 하나의 대형 사고가 일어나기까지 반드시 그보다 작은 규모의 사고들이 ‘징후’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p318」

 

세월호 참사 이전에도 우리사회에는 무수한 징후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여전히 무수한 징후들이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세월호 참사가 가장 큰 사고가 아니라 무수한 징후들 중의 하나가 될 만큼 끔찍한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당장 잠실 롯데 제2월드는 공포의 대상이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 책이 기록한 세월호 재판은 단지 법적 책임을 묻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징역 36년의 가장 무거운 형량을 받은 이준석 세월호 선장이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걸까?

 

저자에 의하면 미국 정치철학자 아이리스 영은 ‘법적 책임’과 ‘정치적 책임’을 구분한다. 법적 책임은 직접적 원인을 제공한 사람에게 제한적으로 물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책을 죽 읽어보면 느끼겠지만 이준석 선장 같은 사람을 만들어 낸 배후의 시스템과 그 시스템을 만든 권력이야말로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 아이리스 영은 “책임을 져야 할 결과에 기여한 이들이 법적 책임이 없다고 하여 정치적 책임마저 면제되는 건 아니다. p323” 고 했다. 우리는 아직 그 누구에게도 정치적 책임을 묻지 못했다. 누구도 정치적 책임을 지려하지 않고 적반하장으로 세월호 관련자들에게 그만하라고 다그치는 실정이다.

 

 

『세월호를 기록하다』에는 어떤 거대한 음모 같은 것이 발견되지 않는다.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세 가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는 있지만, 오히려 허탈하다. 어떤 악한 의도나 숨겨진 비밀 때문이 아니다. 어린 학생들보다 더 공포에 질려 넋을 놓고 있는 선장과 울고 있는 항해사, 아무 생각 없이 와서 갈팡질팡하는 123정장, 조타실의 지시를 기다리다 자신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 방송을 되풀이한 가엾은 승무원이 있을 뿐이었다.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무능하거나 무책임하고,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는 권력 또한 무능하면서 뻔뻔했다.

 

세월호 재판과 그 재판을 기록한 이 책은 세월호의 진실을 모두 밝히지 못했다. “세월호 재판에서 ‘확정된’ 사실관계는 최선의 경우에도 확률적 가능성을 가질 뿐 다른 가능성이 절대로 없다고 할 수는 없다. p321” 세월호는 여전히 바다 아래 있고, 그 속에는 진실의 또 다른 부분이 묻혀있을지도 모른다. 세월호 인양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인양에 대해 토의조차 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할 권력이 책임을 회피하고 있고, 여론은 세월호 진실을 두고서가 아니라, 정치적 추종세력에 따라 묻지마 적대를 형성하고 있다. 사실 세월호 참사에서 가장 답답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어린 학생들의 무수한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수꼴과 좌좀으로 나뉘어 사건을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세월호를 기록하다』로 조금 객관적인 시선을 가져 보자고 한다면, 통할까?

 

 

 

추기 1 : 재판부의 세월호 사고 원인

 

첫 째 세월호는 증개축으로 복원성이 약해진 선박이었고, 둘째 해운사가 화물 최대 적재량 기준을 어기고 과적하여 복원성을 더 악화시켰으며, 셋 째 화물을 제대로 고박하지 않은 상태로 출항했고, 넷째 이런 세월호를 주의하여 운항해야 할 당직 항해사와 조타수가 4월 16일 전남 진도군 병풍도 앞바다에서 우현으로 대각도 조타를 하는 운항 과실을 범하여 8시 48분경부터 배가 우현으로 급선회하며 원심력으로 좌현으로 기울었으며, 다섯째 과적된 채 부실하게 고박된 화물이 좌현으로 쏠리면서 복원력이 상실되어 배가 30도 이상 전도되었다. 이후 침수가 시작되어 점점 크게 기울어지다가 10시 17분경 전복되었고, 10시 30분경 완전히 침몰했다. p18

 

 

 

추기 2 : 선원 재판 , 법정 외 증인 신문, 단원고 유소은 학생 (가명)

 

저희는 수학여행을 가다가 단순히 사고가 난 것이 아니라 사고 후 대처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많이 죽은 건데, 이런 것을 교통사고라고 표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p107

 

 

 

추기 3 : 추천사 <사실에 근거한 가장 객관적인 글>  중

 

대한민국이 정상적인 시스템이 확립된 나라였다면 세월호 유가족들은 절대로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국가 기관의 엄정한 수사 결과를 믿고, 법원의 객관적인 판단을 믿으면서, 먼저 간 아이를 추억하고 명복을 빌며, 힘들겠지만 일상으로 돌아가서 건강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면 되었을 것이다.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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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세월호 의인 김동수씨'가 자해했다는 뉴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느새 잊고 있던 세월호가 다시 돌아왔다. 세월호에 화물차를 싣고 승선했던 김동수씨는 소방호스로 학생 20명을 구했다. 그러나 그는 자랑스럽지도 떳떳하지도 못했다.

 

"다 보상받고 해결됐는데 왜 그때 일을 못 잊느냐는 사람들이 있어요. 학생들을 보면 그 학생들이 생각나고, 창문을 보면 세월호 창문에 (매달려) 있는 아이들이 생각나는데 어떻게 그 일을 쉽게 잊겠어요. 사는 것이 너무 비참해요.”

 

어떤 사람들에게 세월호는 다 보상받고 다 해결되었던가 보다. 그럴 수도 있겠다. 다음 달이면 세월호 1주기가 돌아오니까. 그만하면 잊을만한 시간이긴 하다. 충분히 잊어야 했을 시간이다. 그런데 세월호 생존자들에게도, 세월호 희생자들의 가족에게도 무엇 하나 해결된 것이 없다. 무엇하나 속 시원히 밝혀진 것도 없다. 제대로 책임진 사람은 있었던가.

 

사람들은 잊으라고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지긋지긋하니 잊으라하고, 어떤 사람들은 살기 위해 잊어야 한다고 걱정스레 말한다. 맞다. 잊어야 한다. 당사자들도 우리 국민들도 이제 세월호를 보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귀를 틀어막고 입을 굳게 다물고 열심히 살면 잊히는 걸까? 기억을 꼭꼭 눌러 어둠 속에 묻으면 잊을 수 있는 걸까?

 

 

이번 주 우리 독서회의 주제는 죽음이었다. 우리는 죽음을 떠나보내는 방식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했다. 벨기에 작가 브룩호번의 <쥘과의 하루>가 바로 그런 이야기다. 알리스는 아침에 일어나 남편 쥘이 돌연사한 것을 발견한다. 그녀는 남편을 곧바로 장례라는, 공적 의례에 넘겨주지 않는다. 그럴 수가 없었다. 남편은 떠났지만, 한 평생 묻고 살았던 남편의 외도와 아이의 죽음, 그 한이 남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 한만 풀어 줄 대상 없이 덩그마니 남았다. 그 응어리가 풀리지 않는 한 쥘은 알리스에게 영원히 되돌아 올 것이다. 알리스가 죽은 쥘과 일상처럼 하루를 지낸 것은 쥘을 너무 너무 사랑해서가 아니다. 쥘을 잊기 위한 알리스 식의 의식이다. 알리스는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보낸 편지를 꼼꼼히 기억해 낸다. 기억하기도 싫을 그 편지를 한자 한자 되살린다. 죽은 남편 옆에 앉아 맨 먼저 알리스가 했던 일이 남편이 사랑했던 여자를, 남편의 배신을 생생히 되살리는 것이란 사실이 처음에는 너무 의외였다. 사랑하고 행복했던 기억이 아니라 영원히 묻어두려 했던 남편의 외도를 찬찬히 되돌아보는 앨리스가 우습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알리스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애도였다. 쥘을 영원히 떠나보내기 위해서는 기억 속에 억압했던 모든 것들을 남김없이 풀어야 했기 때문이다. 억압된 것은 반드시 돌아오므로.

 

장례는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을 위한 것이다. 영원히 잊기 위한 마지막 기억이다. 망자가 유령이 되어 돌아오지 않도록 말이다. 수많은 민담에 등장하는 귀신들은 모두 단 하나의 소원을 가지고 돌아온다. 다시 살려 달라는 것이 아니다. 저승으로 가볍게 떠날 수 있도록 한을 풀어달라는 것이다. 귀신 이야기는 결국 산자들의 두려움이다. 어떤 죽음에 납득할 수 없는 의문이 있을 때, 죽은 사람의 명예가 손상되었을 때, 우리는 죽은 사람이 되돌아올까 두려워한다. 그 죽음은 잊히지 않는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어느새 되살아난다. 억압하면 할수록 되돌아온다. 이것이 귀신이나 유령 같은 허황된 이야기에 아직까지 우리가 두려워하는 이유이다. 억압된 기억이 귀신을 만들어낸다.

 

김동수씨가 지금도, 창문에 매달린 아이들을 보는 것은 그 아이들의 죽음이 여전히 의문 속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납득할 수 없는 것을 당사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300명이 넘는 목숨이 한꺼번에 물속에 가라앉은 그 죽음을, 아직 살아있는 목숨을 TV 생중계로 지켜보면서도 그대로 죽어가게 했던 그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애도하고, 어떻게 영원히 보낼 수 있을까..

 

거기다 날이 갈수록 세월호에 관한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과 폄훼가 난무한다. 우리의 외면과 무관심 속에서 미친것처럼 날뛴다. 그것을 단순히 어린 아이들의 철없고 위험한 유희라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상대할 필요도 없다고? 그 바탕에는 어른들의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닐까? 세월호는 이제 그만해도 된다고. 억울하게 죽는 목숨이 어디 그뿐이냐고. 서둘러 덮으려는, 재빨리 잊으려는 그 마음들 위에 아이들의 위험한 장난이 미친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사람을 죽이는 것이 장난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장난으로도 그런 행동은 용납될 수 없다는 단호한 여론이 형성되지 않는 한 세월호는 두 번 세 번 죽음을 되풀이 할 것이고, 우리는 그 죽음의 기억에서 놓여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독서회는 다음달에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읽기로 했다. 올해 1월에 발간된 이 책은 작가들이 세월호 유가족의 육성을 기록한 것이다. 아마도 읽기가 힘들 것이다. 나도 장바구니에만 담아놓고 구매를 미뤄왔다. 오랫동안 우리 집 근처 대형마트에는 노란 깃발들과 함께 유가족들의 편지를 판넬로 전시했다. 오다가다 잠깐 서서 조금만 읽어도 눈물이 줄줄 흐르곤 했다. 그런 이야기들이 빼곡히 적혔을 이 책을 감당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왜 이 고통을 되살려야 하는지 원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월호를 진정으로 잊기 위해서라도 정면으로 바라보고, 하나하나 기억해야 할 것이다. 세월호 생존자들과 희생자의 가족들은 여전히 극한의 고통 속에 있다. 우리가 무엇을 한다고 해도 그 고통의 천분의 일을, 만분의 일을 알 수 있을까... 김동수씨는 화물차를 잃고 생계마저 막막하다고 한다. 그들의 고통은 세월호가 제대로 해결되어야, 아니 어느 정도라도 납득이 되어야, 그나마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우리도 세월호의 상흔에서 놓여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억하기일 것이다.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 독서회는 십여 명의 작은 모임이지만, 구석지고 작은 곳에서도 세월호를 잊지 않고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세월호가 기억 아래 억압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구석구석에서 세월호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서로 서로 알리면 좋겠다.

 

 

<금요일엔 돌아오렴>이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백만부가, 천만부가 팔린다면 그것이 그대로 해일 같은 여론이 되어 정부를 압박하고, 위험한 욕설질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회원들도 이 책만큼은 사서 읽기로 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판매 부수가 그 자체로 국민의 힘을 보여주는 것일 테니 말이다. 더불어 <눈먼 자들의 국가>도 함께 구입하겠다는 회원들도 많았다. 이 책은 『문학동네』 2014년 여름호와 가을호에 게재된 12명의 작가들이 쓴 세월호 추모 글을 모은 것이다. 이 두 책과 함께 어제 나는 <세월호를 기록하다>도 주문했다. 일주일 전에 출간된 이 책은 150일간의 세월호 재판을 기록한 책이다. 세월호 사건을 다시 정리해 보기에는 딱 알맞은 책이 될 것 같다. 띄엄띄엄 뉴스로만 들었던 재판 내용 이외에 어떤 진실들이 드러났는지 혹은 어떤 조작과 은폐가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는지, 꼼꼼히 살펴볼 계획이다. 마침 택배 아저씨가 곧 도착한다는 전화가 왔다.  (그리고 잠시 후  벨이 울렸다.)  

 

 

*이글은 독서회 카페에 올린 것을 조금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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