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국가 -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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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국가』는 2014년 여름과 가을에 걸쳐 계간 《문학동네》에 게재된 12편의 글을 엮은 책이다.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 언론학자, 정신분석학자, 정치철학자 등이 각자의 눈으로 바라본 세월호 이야기다.

 

나는 그 중 소설가 박민규와 시인 진은영 그리고 현대정치철학연구자 홍철기의 글에 주목했다. 연민과 분노, 자기 환멸을 넘어선 독창적 관점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김연수와 김서영도 좋았지만, 이 세 편의 글에 한정해서 리뷰를 쓰고 싶다.

 

 

1. 박민규의 《눈먼 자들의 국가》

 

내가 아는 박민규는 비비 틀어서 조롱하기의 대가다. 틀렸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책을 두 세권 보았을 뿐이고, 그것도 오래된 일이니, 책 내용도, 그에 대한 이미지도 흐릿하게만 남았다. 기억은 때로 아주 작은 단편을 전부로 간직하고 있다. 여하튼 그는 낄낄대며 읽는 작가로, 이미지화 되었다. 그런데 이 글은 전혀 다르다. 조롱기도 냉소도 없다. 진지하고 단호하다. 어쩌면 세월호 앞에서 글재주는 사치가 될지도 모르겠다.

 

『세월호를 기록하다』를 읽으며 그날의 실체적 진실에 가까이 갔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잊고 있었던 것들이 이 글 속에서 다시 떠올랐다. 첫째가 언딘이다. 국가가 구조마저 민영화했다고 분노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사실 그건 민영화도 아니었다. 민간업체가 더 전문적이라고 자신을 깎아 내리며 국가가 추켜세웠던 그 언딘은 한 달이 지나자 사실 자신들은 구조업체가 아니라고, 인양을 하러 온 업체라고 항변했다. 그럼 구조는 누가 맡은 거냐는 질문에 언딘은 말했다. “구조는 국가의 의무죠.” 둘째는 6.4 지방선거 결과와 특히 7.30보선 참패다. 이것은 단순히 야당의 패배가 아니었다. 세월호에 대해 국가가 획득한 면죄부였다. 보선을 분수령으로 상황은 급변했다. 정부는 대놓고 국정조사를 가로막고 자료제출을 거부했다. 세월호에 대한 역공이 시작되었다. 세월호 진상규명은 불순세력의 선전선동으로 낙인찍혔다. 면죄부를, 그것을 넘어 탄압의 명분을 준 것은 우리다. 우리 국민이 가장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그렇게 했다.

 

세월호를 바라보는 박민규의 독창성은 사고와 사건에 대한 구분에 있다. 세월호에 대한 그의 정의는 “선박이 침몰한 ‘사고’이자,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 이다. p56”

 

「사고와 사건은 다르다. 사전적 해석을 빌리자면 ‘사고’는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을 의미한다. 반면 ‘사건’은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거나 주목받을 만한 뜻밖의 일을 의미하는데 거기엔 또 다음과 같은 해석이 뒤따른다. 주로 개인, 또는 단체의 의도하에 발생하는 일이며 범죄라든지 역사적인 일 등이 이에 속한다. p57」

 

박민규에 의하면 세월호를 둘러싼 싸움은 명명의 싸움이다. 정부여당은 기를 쓰고 사고를 고집한다. 한낱 불행한 교통사고라는 것이다. 야당은 아무 생각이 없다. 세월호를 ‘사건’으로 규정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모른다. 그러니 바보다. 명명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런 말이 있다. (대충 기억한다.) 적이 우리의 언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승리한 것이다. 프레임의 싸움이다. 세월호가 사고가 되면 남은 것은 법적 책임과 적절한 보상밖에 없다. 뜻밖의 불행한 일에 무슨 대책과 정치적 책임이 필요하겠나? 수습이면 충분하다. 그렇게 보상 이외에 진실규명을 위한 일체의 주장은 불순한 세력의 선전선동으로 낙인 된다. 세월호는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다. 왜? 우리는 그 ‘사건’의 진실을 원한다.

 

 

2. 진은영의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

 

자정에 그림자가 있나? 잠시 의아했지만, 그녀는 시인이다. 그리고 니체로 학위를 받은 철학박사다. 한 다리 건너 아는 시인, 물론 시인은 나를 모르지만, 나는 10 여 년 전 시인과 잠깐 눈인사도 했고, 시인의 시집도 갖고 있다. 시인의 친구가 준 것이지만, 솔직히 나는 시인의 시를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진은영은 그날도 니체 강의를 위해 고민하고 있었다. 니체는 연민을 혐오했다. ‘고통 받는 이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대신 그 고통 앞에서 수치심을 느껴라. 연민이란 참으로 게으르고 뻔뻔한 감정이다.’ 온 나라가 슬픔과 연민에 빠진 그 시점에 니체야말로 가장 어울리지 않는 철학자이지만, 진은영은 과감히 니체로부터 세월호를 사유한다.

 

「우리가 마음껏 가엾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고통 받는 이들의 상황에 우리 자신이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생각할 때뿐이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우리는 그렇게 느낄 수 없다. p73」

 

연민을 증오하고 거렁뱅이를 몰아내라고 주장한 니체의 동류는 보들레르다. 철학자와 시인, 진은영에게 알맞아 보인다. 보들레르는 거렁뱅이를 때려눕히라고 외쳤다.

 

「시혜는 강자가 약자에게 제공하는 것으로 불평등한 관계를 전제할 때만 가능한 활동이다. 시혜와 평등은 완벽하게 대립한다. p75」

 

경남 무상급식을 중단한 홍준표를 반대하는 이유도 이것이다. 홍준표는 무상급식이라는 평등을 구걸로 바꾸어 버린다. 가난을 인증하면, 불평등을 인정하면, 시혜를 주겠다는 논리다. 거렁뱅이가 아니라 거렁뱅이를 만드는 자를 먼저 때려눕혀야 한다.

 

여기서 진은영은 한층 놀라운 연상을 한다.  6.4 지방 선거에서 여당이 들고 나온 구호는 ‘도와주세요’였다. 도와달라는 아이들을 외면한 정부여당이 어떻게 저런 뻔뻔한 구호를 외칠 수 있는지 격분했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사람들은 도와주었다. 물에서 건져주자 곧바로 내보따리 내놓으라는 협박에 시달리게 되었지만. 왜 심판을 해도 모자란 상황에서 사람들은 정부여당을 건져주었을까? 진은영은 그것이 선거를 관통한 시혜의 에토스라고 한다. 사람들은 선거의 실상을 잘 알고 있다. 어차피 그들은 우리를 대리하지 않는다. 선거는 자신을 대리할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다. 선거에서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것은 한순간 시혜자가 되는 기쁨이다. “박근혜 찍었지. 지 엄마 아부지 죽어서 불쌍하다고.” 도착적인 기쁨이다. 선거만 되면 굽실대는 국회의원 후보들이 평소에는 만나기조차 힘든 귀한 몸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표를 찍는 그 순간만은 내가 너를 구해주는 천사라는 기쁨이 더 짜릿할지도 모르겠다. 조금 억지 같은가?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시혜와 평등은 양립할 수 없다는 것, 연민은 나를 그 연민의 대상에서 제외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니체를 저마다의 필요에 따라 가져다 쓴 권력들이 존재했지만, 진은영이 말하는 연민에의 혐오는, 역설적이게도 세월호에 관한한 옳다. 우리가 세월호의 밖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국가 자체가 세월호다.

 

 

3. 홍철기의 《세월호 참사로부터 무엇을 보고 들을 것인가?》

 

홍철기는 신자유주의의 관점에서 세월호를 분석한다. 박민규도 세월호의 키워드로‘민영화’를 꼽았다. 홍철기는 박민규보다 좀 더 철학적인 접근을 한다. 2008년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신자유주의는 분명 이론상 패퇴하고 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는 예상하지 않은 곳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주체성이 사유화된 것이다.

 

「사적으로 극히 유능하도록 요구받지만 공적인 능력은 완전히 결여된 주체성을 생산하고 그에 고유한 사회적 관계를 산출한다는 의미에서 신자유주의란 정치가 ‘경제’에 의해 대체되는 기획일 뿐만 아니라 보다 본질적으로는 ‘경제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통치의 패러다임” 이기도 하다. p207」

 

신자유주의는 사회를 오직 시장으로만 표상하는데, 이러한 표상에 의거하여 사회가 재편도록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정치를 경제로 대체할 뿐 아니라, 경제로 대체되도록 정치적으로 개입한다는 뜻이다. 그 결과 공공영역이 민영화 혹은 사유화되는 것은 물론 주체성 자체가 사유화된다. ‘자기경영’, ‘자기계발’ 따위가 그 사례이다.

 

주체성의 사유화는 공적 능력의 상실을 의미한다. 공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징징거리기만 한다. 거꾸로 타인의 말을 공적인 이야기로 들을 줄도 모른다. ‘공적인 이슈들을 다루는 언어’가 사라진다. 말뿐 아니라 시각도 마찬가지다. 홍철기는 한병철의 《투명사회》 를 빌려와 투명사회의 폭력성을 설명한다. 사유화된 영역은 투명한 가시성의 범위에 남겨두고, 공공성을 보이지 않는 사회의 그림자 속에 버려둔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의 양태를 사적인 당사자로만 규정하려는 시도들은 모두 이와 같은 투명성의 정치미학 논리에 매몰되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우리의 공통의 무능력과 책임의 부재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그저 규모가 큰 교통사고로 치환하려는 사고방식, 혹은 유가족에 대한 보상 문제나 생존 학생의 대학특례입학 내지는 희생자의 의사자 지정에 관한 쟁점으로 논의의 방향을 바꾸려는 시도들은 그 배후의 정치적 의도와 함께 투명성의 폭력이라는 측면에서 비판되어야 한다. p215」

 

세월호 사고는 사적인 것이, 세월호 사건은 공적인 것이 된다. 세월호는 사건이다.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다.

 

 

 

* 제목으로 삼은 <진실은 수장될 위기에 처했고, 슬픔은 거리에서 조롱받는 중이다.>는 편집자인 평론가 신형철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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