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의 언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음식의 언어 -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인문학 음식의 언어
댄 주래프스키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만 보고 고른 책이 예상과 딱 맞아떨어지기는 어렵다. 댄 주래프스키의 『음식의 언어』도 그렇다. 알라딘 신간평가단 4월의 주목신간으로 추천한 책이지만 내가 생각했던 그 책은 아니다. 나는 무엇을 기대했던가? (모르겠다. 아무튼 이것은 아니다;;)

 

사실 ‘언어’에 함정이 있었다. 주래프스키의 언어는 우리의 언어가 아니다. 고추장의 기원을 따라가는 여정은 재미있겠지만, turkey(칠면조)의 기원을 찾아 멜리아그리스 갈로파보 갈로파보라든가 토틀린, 후엑솔로틀, 몰레 포블라노 데 과홀로테, 갈로파보, 갈린 드 튀르키, 뿔 댕드, 기니파울, 피칸 등등의 언어 여행을 하자면 멀미가 난다. 솔직히 말하면 얼른 내리고 싶었다.

 

물론 흥미로운 부분이 없지는 않다. 가령 1장 <메뉴 고르기 : 메뉴판 앞에서 당황하지 않는 네 가지 방법>. 당황하지 않기 보다는 속지 않는 방법이 더 적절할 것 같다. 고급식당과 대중식당, 비싼 음식과 싼 음식은 메뉴판의 어휘에서부터 차이가 확연하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아주 값비싼 레스토랑은 값싼 레스토랑에 비해 음식의 출처를 거론하는 횟수가 15배나 많다. “더티걸 농장 로마노 빈 덴 푸라” “허브를 넣고 로스트한 엘리전 필즈 농장 양고기” 같은 식이다. 의외인 것은 싼 레스토랑일수록 요리의 가짓수가 많고 선택의 폭이 넓다는 것이다. 고급 레스토랑은 메뉴도 건방지다. 주방장 추천이나 주방장 선택 혹은 정식 메뉴가 대부분이다. 따지지 말고 주는 대로 먹으라는 것이다. 품질은 레스토랑 이름과 비싼 가격이 보증 한다는 걸까? 패스트푸드점이나 카페체인의 빽빽한 메뉴와 시답잖은 선택지들은 결국 싸구려 품질을 감추기 위한 포장?

 

또 다른 것은 요리에 대한 설명이 길면 길수록 음식 값이 높이 매겨진다는 것이다. 어떤 음식을 묘사하는데 평균길이 보다 글자 하나가 늘어날수록 18센트가 비싸진단다. “다섯 가지 향신료를 넣은 오리 : 이국적인 다섯 가지 향신료를 넣고, 뼈를 바르고, 톡 쏘는 식초와 함께 낸 어린 오리” 이 정도면 식당 주인은 얼마를 더 받겠다는 뜻일까?

 

세 번째 주의해야 할 사항은 형용사다. 여기서 형용사의 기능은 사실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불특정한 인상을 주입하는 것이다. 신선한, 풍부한, 짜릿한, 다채로운, 맛있는, 부드러운, 잘 익은, 바삭바삭한 따위의 표현들이다. 이런 공허한 형용사들을 많이 사용하는 레스토랑은 고급 레스토랑일까, 값싼 레스토랑일까? 답은 중간 가격대의 레스토랑이다. TGI 프라이데이, 캘리포니아 피자 치킨, 치즈케이크 팩토리.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TGI 프라이데이밖에 없지만 미루어 짐작컨대 이런 종류의 패밀리 레스토랑이 그렇다는 말이겠다. 그 이유는 뭘까? 불안하다는 것이다. 소비자가 의심할까봐 불안하고, 소비자가 의심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불안하고, 스스로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니 불안하다. “손님은 이게 덜 익었을까봐 걱정이지만, 그럴 필요 없어요. 여기서 제가, 다 익었다고 장담합니다.” 식당이라면 당연히 신선한 재료를 사용하고 맛있는 음식을 내놓아야 한다. 그런데 굳이 이런 표현을 한다는 것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일종의 자백이 아닐까?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서 먹어보면 그들의 불안이 이해가 간다.;;

 

「언어학자 마크 리버먼은 우리가 이런 과잉언급을 ‘지위불안’의 징후로 여긴다고 주장한다. 값비싼 레스토랑은 절대 잘 익은 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잘 익어야 하는 음식은 당연히 잘 익었으리라고, 또 모든 식재료가 당연히 신선하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중간 가격대의 레스토랑은 그곳이 충분히 근사한 곳이 아니어서 손님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봐 걱정한다. 그래서 거듭 확신시키려고 애쓰는 것이다. 변명이 너무 많다. p44」

 

마지막은 가격이 진짜를 말해준다는 것이다. 맛있는, 신선한과 같은 형용사만큼이나 주의해야 할 것은 ‘진짜, 진정한’ 이다. 진짜 휘핑크림, 진짜 게, 진짜 치즈를 보장하는 것은 ‘진짜’라는 단어가 아니라 오히려 가격이다. 진짜 식당은 변명이 필요 없는 곳이다.

 

메뉴판의 진실을 삶에서 발견할 때도 있다. 누군가 “걱정마라, 나만 믿어라”를 되풀이할 때 오히려 걱정이 되고 불안하다. 거기엔 무언가 걱정하고 의심할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걱정할까봐 두려워한다는 것은 나도 걱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오빠만 믿어! 라는 놈치고 믿을만한 놈이 얼마나 될까? 포테이토칩이 ‘저지방’ ‘콜레스테롤 제로’를 외친다고 건강식품이 되지는 않는다.

 

ps: 가장 인상적인 것은 케첩의 기원이 중국의 ‘생선 젓갈’ 이라는 사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뽈쥐의 독서일기 2015-05-19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에 낚인 느낌이긴하지만.. 오호 그랬구만.. 하는 글이에요.ㅎㅎ

말리 2015-05-19 15:46   좋아요 0 | URL
ㅎㅎ;; 넘 자극적이었나요? 읽어주셔서감사합니다.
 

이번 주에 배운 60갑자.

모두들 갑자년을 서기년으로 환산해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인터넷에 찾아보면 여러 가지 방법이 나온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은 계산법도 있지만, 그만큼 학습방법으로 유행이란 말이겠다. 하긴 이 방법을 알면 연도순으로 나열하라는 문제는, 예전에는 이런 문제 많았다, 외우지 않고도 풀 수 있다. 가령 조선 말기에 연이어 터진 복잡한 사건들, ‘을미사변 갑오개혁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사조약’ 정도는 그냥 풀 수 있다. 역사가 아니라 수학문제가 되는 셈이다. 수학에도 반드시 외워야 할 공식이 있는 것처럼 갑자년에도 꼭 외워야 할 두 가지가 있다. 천간(天干)과 지지(地支).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소위 ‘간지干支’라는 것을 외우고 있었다. 외웠다기보다는 저절로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매일 손가락을 짚어가며 운세를 살피셨던 덕분이다. 천간은 하늘의 기氣를, 지지는 땅의 (물)질質을 나타내며, 각각 10개와 12개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암기법으로는 10간과 12지가 조합하여 60갑자를 이루는 법칙만 알면 된다. 그런데 한걸음만 더 나가보면 사주팔자四柱八字라는 것의 의미도 조금 알 수 있다.

 

음양오행이란 말은 참 지겹도록 들었다. 이 지겨움 속에는 남자는 양, 여자는 음이라는 성차별 문화에 대한 반감이 숨겨져 있다. 그러나 음양오행은 음과 양의 차별이 아니라 음과 양의 끊임없는 변화를 성찰한다. 양이 극에 달하면 음이 되고 음이 그 끝에 이르면 양이 된다. 양이 곧 음이고, 음이 곧 양이다. 오행은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 다섯 가지를 말한다. 이 다섯 가지는 상생과 상극의 관계에 있다.

 

사주 四柱는 말 그대로 네 개의 기둥이다. 보통 점을 본다고 하지만, 명리학 같은 동양철학은 점이 아니라 사주를 본다. 우리가 태어난 연월일시年月日時. 이 네 가지가 우리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다. 사주가 진실로 운명을 좌우한다면 제왕절개야말로 부모가 줄 수 있는 최고의 탄생 선물이 될 것이다. 사주가 팔자를 바꾼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맞는 것도 같고 틀린 것도 같다. 사주가 곧 팔자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기둥은 각각 두 개의 글자를 갖는다. 4*2=8. 그래서 사주팔자四柱八字다. 이 여덟 개의 글자에는 내 삶의 음양과 오행이 들어있다.

 

여기서 다시 우리의 주관심사인 육십갑자로 돌아가야 한다. 천간과 지지를 보자.

 

 

 

 

 

해가 바뀔 때 마다 반짝 유행하는 것이 띠와 갑자년이다. 2015년은 을미년, 양의 해다. 갑자년 표기가 뭔지 몰라도 습관처럼 그렇게 한다. 임진왜란이니 병자호란이니 갑오농민혁명이니 하는 것들을 우리 때만해도 고유명사처럼 외웠지, 임진년에 왜구가 일으킨 난이라는 식의 풀이는 생각지도 않았다.

 

갑자년을 구성하는 방식은 천간의 한 글자와 지지의 한 글자를 결합하는 것이다. 그래서 맨 처음이 ‘갑자’가 된다. 두 번째는 갑축이 아니라 ‘을축’ 이다. 병인, 정묘... 이런 결합 방식이기 때문에 절대로 ‘갑축’이 나올 수 없다. 왜 그럴까? 천간이 10개, 지지가 12개이기 때문에 천간을 한 바퀴 돌면 지지는 두 글자가 남는다. 그래서 갑술, 을해, 병자... 로 연결된다. 홀수 천간은 홀수 지지와 짝수 천간은 짝수 지지와만 결합한다. 그 결과 60갑자가 된다. 만약 지지가 11개였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110갑자가 되지 않았을까?

 

천간이 10개라는 것은 수험생의 입장에서는 횡재라고 할 수 있다. 서기가 10진법이니 서기년의 끝자리와 갑자년의 앞 글자는 일대일 대응한다. 아마도 옛 문서를 대조해서 찾아낸 것이겠지만, 천간의 갑은 연도 끝자리 4에 해당한다. 1894년은 갑오년, 1904년은 갑진년, 1914년은 갑인년, 1924년은 갑자년, 1934년은 갑술년, 1944년은 갑신년, 1954년은 다시 갑오년. 갑오농민혁명이 일어난 해를 묻는 4지선다형이라면, 정확한 연대는 몰라도 일단 끝자리 4가 붙은 것이 정답 후보가 된다. 그런 행운을 허용하지 않는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할까? 4개 모두 4로 끝난다면, 다른 방법은 없을까?

 

인터넷에는 갑자년의 뒷 글자 즉 지지와 숫자를 대응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나온다. 그런데 나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내 방식은 이런 거다.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들 중 하나만 외우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05년 을사늑약만은 확실히 외운다. 그렇다면 1904년은? 갑진년이다. 천간의 ‘을’ 앞이 ‘갑’. 지지의 ‘사’ 앞이 ‘진’. 그렇다면 갑오년은 몇 년일까? 갑진년의 전후로 10년 단위씩만 찾아보면 된다. 이걸 어떻게 하냐고? 해답은 천간이 10개, 지지가 12개라는 것에 있다. 천간 한 바퀴에 지지는 두 자씩 남는다. 그러면 두 바퀴에는 네 자, 세 바퀴에는 6자, 네 바퀴에 8자, 5바퀴에 10자, 6바퀴에 12자! 즉 6바퀴 다시 말해 60년이 돌면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환갑이다.

 

  

 

 

 

 

올해는 을미년이다. 작년은 갑오년이었다. 1894년에서 120년, 즉 60년이 두 번 지나서, 2014년이고, 당연히 갑오년이다. 올해는 1895년 즉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120년 되는 해, 2015년의 을미년이다.

 

차라리 그냥 연도를 외우고 말겠다고? 이것이 더 복잡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사주 이야기 조금 보태서 머리를 더 어지럽게 만들어 보자.

 

60갑자는 연도에만 쓰이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황제시대라고 하는데, 날짜에 쓰다가, 나중에, 한나라 때부터, 연도에도 60갑자를 사용했다고 한다. 인터넷에 떠도는 것이라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2000년 이상 사용된 것으로, 60갑자는 연도뿐만 아니라 월, 일, 시에도 사용했다. 즉 사주를 모두 60갑자로 표기했다. 그래서 사주가 곧 팔자가 된다. 어떤 사람의 사주가 갑자年 을축月 병인日 정묘時라면, 이 사람은 ‘갑자을축병인정묘’ 라는 8개의 글자를 갖게 된다. 사주팔자. 그런데 이게 뭐? 운명과 이 여덟 글자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걸 파고들면 그때부터 명리학이라든지 뭐 사주팔자를 보는 학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명리학에서 들은 풍월을 조금만 예로 들자면 이렇다. 10개의 천간과 12개의 지지는 각각 오행을 갖고 있다. 갑과 을은 木. 병정은 火. 무기는 土. 경신은 金. 임계는 水. 인묘는 木. 사오는 火. 신유는 金. 해자는 水. 축진미술은 土.

 

나의 기본 성질은 무 토다. 무신일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일간 즉 태어난 날의 천간이 내 본성이라는 말이다. ‘무’는 土이므로, 나는 말하자면 산과 같다. 그런데 여덟 개의 글자, 팔자 중 나는 4개의 金을 갖고 있다. 나의 기본은 토이지만 환경은 금이 세다. 토와 금의 관계는 土生金 즉 내가 생산하는 것이 많다는 뜻이다. 이런 식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명리학에서 사주를 보는 방법이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일단 받아들이고 나면 매우 과학적이다. 차라리 매우 수학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이 틀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수학의 공리처럼 사주라는 것이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을 가정해야 한다. 물론 증명할 방법은 없다. 공리는 증명하지 않고 자명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쨌거나 단지 사주의 여덟 글자만으로 인간과 우주의 원리를 풀고자 하는 그 뜻은 매우 흥미롭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늦었습니다 ;;
4월부터 몸이 좀 안좋아서, 병원 치료겸 휴식겸 친정에 왔습니다.
이제야 컴퓨터 앞에 앉을 여유가 생겼습니다.
기한이 지나서 유효한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올려 봅니다. 
 
 
 

1. 김한식의 <세계문학여행>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김한식의 《세계 문학 여행》 입니다. '소설로 읽은 세계사' 라는 부제만 보아도 어떤 책인지 짐작이 가는데요.  저 역시 재작년부터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고전 소설 읽기였습니다. 고전이 시대를 초월한 가치를 지닌다지만 고전은 또한 당대의 문제를 가장 깊이있게 그리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고전을 온전히 읽으려면 그 시대를 더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꾸로 한 시대를 입체적으로 감각하기 위해서도 고전이 필수가 아닐까 합니다.  역사로 문학읽기, 문학으로 역사읽기는 직접해보는 것이 좋겠지만, 타인의 방법을 살짝 배워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2. 심강현의 <시작하는 철학여행자를 위한 안내서>

 저자가, 말하자면 아마추어입니다.  철학 공부를 하는 의사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이런 책은 읽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책보다 입문서야말로  해박한 지식과 깊이있는 성찰 끝에 씌여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없지만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안다고 책소개가 제 마음과 딱 맞아떨어집니다.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개별 철학자의 사상만큼이나 "철학의 역사가 전개되어 온 전체적인 맥락에서 해당 철학자의 사상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하는 것도 중요" 합니다. 일반적인 철학사 책들은 맥락이나 전체적인 흐름보다는 유명 철학자들의 사상을 조각조각 모아놓은 것이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자 심강현의 철학적 깊이가 일정한 경지에 이르렀다면 "2500년 서양철학사의 큰 그림이 한 눈에 들어오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는 행운을 가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물론 책소개의 말을 글자그대로 믿기는 힘들겠지만 말입니다. ^^ 
 
 
 

3. 폴킹혼의  <성서와 만나다>


 성서는 늘 읽으려 했지만 아직 완독하지 못하고 있는 "책"입니다.  네, 책입니다. 비종교인이라 신앙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양철학과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꼭 읽어봐야 할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쉽지가 않습니다.  마침 우회해서 읽을만한 책이 보이길래 추천 목록에 올려봅니다.  존 폴킹혼 교수의 책입니다. 케임브리지 물리학 교수로 은퇴했는데, 중간에 사제 서품을 받고 목회 활동도 했다고 합니다.  "지적 균형감을 잃지 않으면서 성서를 풍요롭게 읽는 방법을 제시한다."고 소개해 놓고 있습니다. 성서에 다시 한번 도전하는 기회가 되길 바래봅니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5-05-07 1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07 19: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말리 2015-05-09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악;; 아이패드로 먼댓글 추가했더니 책이 전부 사라졌 ㅠㅠ
 

이번주 독서회는 『빨래하는 페미니즘』을 다루는데,

모두들 고개를 살래살래 흔든다.

재미도 없고 지루하고 읽다가 던졌다는 소문이 분분.

발제도 하고 토론도 해야하는데,

고민하다 최근 이슈에서부터 접근해 보기로 했다.

(이글은 카페에 올린 발제문을 조금 다듬은 것이다.)

 

 

얼마 전 개그맨 장동민이 SNS를 발칵 뒤집어 놓았지요. JTBC <마녀사냥>에서 한혜진(근데 누군지는 모름;;) 의 어떤 점이 싫으냐는 질문에, “설치고, 떠들고, 말하고, 생각하고. 아무튼 모든 걸 갖췄다" 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전한 연예기사는 이것을 유쾌한 농담, 웃음 폭탄으로 오히려 칭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트위터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장동민의 이전 발언까지 드러나면서, 빅데이터 시대라 감출 방법이 없군요, 방송에서 퇴출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거세었습니다.

 

그때 조나단이라는 분이 이런 트윗을 올리게 됩니다.  혼잣말처럼 쓴 것인데, 엄청난 주목을 끌며 폭풍 리트윗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페미니스트 구호가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다양한 버전으로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조만간 티셔츠나 에코백 같은 것들이 나올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웃자고 한 소리에 예민한 페미니스트들이 죽자고 달려드는 것일까요?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적 특징인데,

그것 때문에 싫다는 것은

'여자'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겠죠.

역시 동서양 모두 Man 은 오로지 man이군요.

 

설치고 떠들고 말많고 생각하는 여자란 어떤 여자인걸까요?

빨간 머리 앤은 어떤가요?

 

 

 

  

 

소설가 김훈이 이런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의 남성중심주의는 『칼의 노래』만 읽어도 감이옵니다만,

이렇게 대놓고 이야기를 하시는 군요.

 

 

페미니즘이 뭐 별거겠습니까?

우리 주위에 널리고 널린 이런 시각들,

우리 자신조차 별 거부감 없이 내면화 해버린 차별들,

이런 것들을 삐딱하게 바라보고 떠들어대는 것이 아닐까요?

역시 설치고 생각하고 떠들어야 하는군요. ^^

 

 

 

 

 

 

 

 

 

 

 

『빨래하는 페미니즘』의 원제목은

『Reading Women: How the Great Books of Feminism Changed My Life (2011년)』입니다.

 

책 내용에 관해서는 몇 달 전에 써놓은 리뷰를 올려놓겠습니다. http://blog.aladin.co.kr/753199155/7321680

 

토론 주제를 제안한다면,

첫 째는 우리 각자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무엇인가? 입니다.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다면 없는대로,

부정적이라면 또 그런대로,

흔히 말하는 꼴페미라면 투사로서,

페미니즘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얘기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들 째는 엄마로서, 혹은 엄마의 딸로서 바라보는  "자기희생" 입니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가 먼저 생각나는군요.

이 책이 아마존 랭킹에 오르며 미국에서 인기를 끈다는 뉴스를 들으며 저는 미국사람들이 왜?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명시적인 주제와는 반대로

독자들이 이 책에서 그리워하는 것은

자기희생을 하는 헌신적인 엄마가 아닐까,

그런 삐딱한 생각을 했습니다.

미국이 가져보지 못한(어쨌든 우리보다 훨씬 빨리, 많이 잃어버린) 것에 대한 동경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엄마가 자기 욕망을 온전히 드러낼 때,

자식들은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빨래하는 페미니즘』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본질적이지 않은 것은 포기할 수 있어요.

돈과 생명은 아이들에게 내줄 수 있어요.

하지만 나 자신을 내주지는 않을 거예요. p156”

 

돈과 생명이 아닌 나 자신이란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그런 것이 있기는 할까요?

나에게 본질적인 것을 생각해보는 것,

그것 자체가 하나의 각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입장을 바꿔 문제를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생명이든 본질이든 엄마의 자기 희생을 댓가로 성장한 자식은

행복할까요?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건 아직까지도 유행하고 있고,

고부갈등의 바탕에 깔린 시어머니의 당담함과 자신감이기도 합니다.

 

희생이 희생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엄마는 배신을 느낍니다.

배신자가 되지 않으려면 자식은 '희생-은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엄마의 희생은 댓가를 바라지 않는다고요?

엄마가 희생하지 않으려는 단 한가지가 바로 희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엄마가 희생을 고수하는 한, 자식은 가해자라는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청준의 <눈길>이나 <살아있는 늪>은

엄마에 대한 원죄의식과 그 부채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자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청준은 옛날분이지요..

엉엉소리내어 울게 만들지만, 한발 더 나아가지는 못합니다.  

 

요즘 직장맘들은 여기에 하나더,

슈퍼우먼 컴플렉스까지 가져야 합니다.

드라마 <미생>의 선차장을 보셨지요?

페미니즘의 승리로 직장으로 진출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자기희생의 당위를 떨쳐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희생하지 않는 직장맘은 죄의식에 빠져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들,

주위에 참 많습니다.

전업주부들에게는 또 나름의 고충이 있겠지요?

이번 토론회는 이런 것들에서 시작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ㅇㅇ 2015-06-20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런 유래가 있었군요 문구가 하도 멋있길래 원래부터 페미니스트들이 만든 줄 알았는데...
 
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병철은 2010년 『피로사회』 이후 2012년에 『투명사회』, 2014년에 『심리정치』를 독일어로 출판했다. 대단히 압축적인 이 세 권의 책은 신자유주의 사회를 분석한 일종의 시리즈물이다. 종합하자면 ‘피로사회’와 ‘투명사회’는 신자유주의의 통치술인 ‘심리정치’가 만들어 낸 자기착취와 자기감시의 사회다.

 

『피로사회』는 자기계발이란 환상 아래 자기착취에 빠져드는 성과사회의 모습을 간명히 드러냈다. 『투명사회』는 SNS 상의 자기현시와 인정욕구가 결국 디지털 판옵티콘에 봉사하는 자기감시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심리정치』는 이것들의 배후에 신자유주의의 숨겨진 통치술이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사실 신자유주의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을 투명하게 드러냄으로써 거대한 ‘빅 데이터’의 숲을 만들뿐이다. 체스터턴은 추리소설 <부러진 검>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명한 사람은 나뭇잎을 숲속에 숨긴다.” 나뭇잎은 드러남으로써 숨겨진다.

 

데이비드 브룩스라는 분이 <뉴욕 타임즈> 칼럼에서 데이터 혁명의 도래를 선포했다. 현대의 선지자가 예언한 이 새로운 신앙의 이름은 “다타이즘 Dataismus,데이터주의”이다. 그에 의하면 데이터는 “감정적, 이데올로기적 편견을 걸러내는 투명하고 신뢰할 만한 렌즈이며, 우리에게 이를테면 미래를 예언하는 것 같은 놀랄 만한 능력을 준다. p80”

 

데이터에 관한 신앙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다. 볼테르의 시대에 ‘통계학’은 계몽주의를 의미했다. “통계학은 신화적 이야기에 맞서서 숫자로 증명된, 숫자에서 나오는 객관적 지식을 내세운다. p81” 이성은 신화를 폐기하고 통계에 의존했다. 그러나 계몽의 변증법은 곧이어 이성의 또 다른 얼굴이 야만임을 드러냈다.

 

이데올로기적 편견에 반기를 든 다타이즘은, 한병철은 이것을 제2차 계몽주의라고 부른다, 어떨까? 오늘날의 이데올로기는 계몽주의 시대의 신화와 같은 처지로 전락했다. 제2차 계몽주의의 구호는 투명성이다. 데이터는 물화된 투명성이다.

 

「이론조차 이데올로기의 혐의에 빠진다. 데이터가 충분하기만 하다면 이론은 불필요하다. 2차 계몽주의는 데이터를 동력으로 하는 지식의 시대다. 크리스 앤더슨은 예언자적 수사법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언어학에서 사회학에 이르기까지 인간 행동에 관한 모든 이론은 과거지사가 되었다. 분류법도, 존재론도, 심리학도 모두 잊어라. 왜 인간이 이러저러한 행동을 하는지 대체 누가 말해줄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그저 그렇게 행동할 뿐이다. 우리는 유례없이 정확하게 그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알아내고 측량할 수 있게 되었다. 데이터가 충분하기만 하다면,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P82」

 

그러나 2차 계몽주의에도 변증법은 어김없이 작동한다. 다타이즘은 디지털 전체주의로 귀결될 운명이다. 모든 이데올로기를 기각하고 투명한 데이터를 신봉하고자 하는 다타이즘 또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데이터 야만주의로 돌변할 것이다.

 

눈을 감으면 어딘가 재생된 데이터가 만든 또 하나의 세계가 있을 것만 같다. 수 십 억 명의 사람들이 쏘아올린 글과 이미지와 수치들이 우주의 빈 공간에 새로운 천지를 창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실세계의 복사판을 만들만큼 방대한 이 데이터들은 빅브라더가 강제적으로 수집한 것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 자랑스럽게 현시한 것들이다. 컴퓨터, 스마트폰 그리고 시계처럼 신체에 직접 장착한 기기들이 우리의 모든 것을 데이터로 만들어 전송한다.

 

「오늘날 우리가 하는 모든 클릭, 우리가 입력하는 모든 검색어는 저장된다. 웹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보는 관찰되고 기록된다. 우리의 삶은 디지털망에 완벽하게 모사된다. 우리의 디지털 습관은 우리의 인격, 우리의 영혼을 매우 정확하게 재현한다. 디지털 습관을 통한 재현은 어쩌면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보다 더 정확하고 완벽할지도 모른다. P87」

 

웹은 디지털 파놉티콘이다. 웹 위의 주체는 자기 감시자다. 디지털 파놉티콘은 벤담의 파놉티콘 보다 효율적이다. 오웰의 빅브라더는 수감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소망하는지는 전혀 모른다. 그러나 빅 데이터는 우리의 욕망과 심리, 심지어는 무의식까지 읽어낼 수 있다.

 

우리가 스스로 헌납한 빅데이터는 빅딜과 마이크로 마케팅의 대상이 된다. 하루에도 몇 통씩 걸려오는 스팸 광고는 이미 우리의 외형적 데이터가 탈탈 털리고 팔려서 마케팅 도구가 되었음을 입증한다. 트위터나 카톡이 추천하는 네가 좋아할만한 친구, 알라딘이 제공하는 네가 혹할 것 같은 책, 끈질기게 쌓이는 스팸 메일은 나의 취향과 습관과 욕망에 딱 맞춘 상품들이다. 나의 욕망은 미사일의 표적처럼 마이크로 타게팅 되어 있다.

 

「오늘날 빅데이터는 빅브라더의 모습으로만 등장하지 않는다. 빅데이터는 빅딜이기도 하다. 빅데이터는 무엇보다 큰 장사다. 개인 관련 데이터는 남김없이 상품화되어 금전적 거래의 대상이 된다. 오늘날 인간은 경제적 이익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패키지로 다루어지고 거래된다. 인간 자신이 상품으로 전락한다. 빅브라더와 빅딜은 동맹을 맺는다. 감시국가와 시장은 하나가 된다. P92~3」

 

오늘날 빅데이터에 대한 열광은 통계학에 대한 18세기의 열광과 비슷하다. 하지만 통계학적 이성은 낭만주의 운동과 같은 저항에 부딪혔다. “평균적인 것, 범상한 것에 대한 혐오는 낭만주의의 근본 정서에 속한다. P105” 니체는 통계학적 이성을 혐오했다. “통계학은 역사에 법칙이 있음을 증명한다. 그렇다. 통계학은 군중이 얼마나 구역질 날 정도로 천박하게 획일적인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P105”

 

획일화는 오늘날의 투명사회, 정보사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즉시 드러난다면 일탈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투명성으로부터 이질성에 대한 배제가 발생한다. 다타이즘은 동일화를 강화한다. 빅데이터는 통계 밖의 유일무이한 것을 알지 못한다.

 

「빅데이터는 사건을 보지 못한다. 역사를, 인류의 미래를 규정하는 것은 통계적 개연성이 아니라 개연적이지 않은 것, 유일한 것, 사건이다. 따라서 빅데이터는 미래도 보지 못한다. P107」

 

한병철이 말하는 사건은 푸코의 ‘사건’ 개념이다. 사건은 이전 상태에는 전혀 없었던 무언가가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한병철은 한번도 지젝이나 바디우를 언급한 적이 없다.(지젝은 확실하고, 바디우는 그런 것 같다.) 그런데 『투명사회』와 『심리정치』의 곳곳에서 나는 지젝과 바디우를 읽는 듯 했다. 헤겔의 부정성을 강조하는 것은 지젝을 연상시킨다. 단절과 불연속성으로서의 사건은 내게 바디우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내가 읽은 것이 그들뿐이라서 그럴 것이다.)

 

한병철이 결론으로 제시하는 것은 사건과 바보다. 우리는 바보가 됨으로써 진정한 자유의 공간을 여는 사건을 맞이할 수 있다. 바보는 그 자체로 자유롭기 때문이다. 바보는 기존의 질서, 네트워크에서 자유로운 자, 아웃사이더, 일종의 면역학적 이물질이다. 정상적 작동을 가로막는 면역반응은 시스템을 방해하고 지연시킨다.

 

「바보는 현대의 이단아다. 이단häresie은 본래 선택을 의미한다. 즉 이단아는 자유로운 선택권을 쥐고 있는 자다. 그는 정통에서 이탈할 용기가 있다. 그는 순응의 압력을 용감하게 떨쳐 버린다. 이단아로서의 바보는 합의의 폭력에 맞서는 저항의 형상이다. 그는 아웃사이더의 마력을 보존한다. 순응의 압박이 점점 더 강화되어가는 오늘날, 이단적 의식의 날을 벼려야 할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하다. P114」

 

처음에 디지털 네트워크는 무제한의 자유를 주는 매체로 인식되었다. 네그리의 다중은 네트워크를 통해 승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무제한의 자유와 커뮤니케이션은 해방이 아니라 디지털 파놉티콘을 가져왔다.

 

주체는 원래 예속된 존재다. 글자 그대로 subject이다. 자유는 막간극에 불과하다. 자유의 감정은 하나의 삶의 형태에서 다른 삶의 형태로 넘어갈 때 잠깐 지속될 뿐이다. 주체가 진정한 주인이 되는 것은 혁명의 짧은 순간이다. 시스템 안에서의 자유는 본질적으로 가짜 자유다. 아메리카노에 시럽을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하는 자유와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신자유주의 시대가 특히 자유의 위기로 다가오는 것은 신자유주의가 자유 자체를 착취하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성과주체는 자기착취의 주체다. 자유로운 데이터 교환은 디지털 빅브라더를 만든다. 감시와 억압, 타자에 대한 착취는 큰 성과를 올리지 못한다. 주체가 구속을 느끼고 저항하기 때문이다. “자유 자체의 착취야말로 최상의 수익을 낳는다. p12”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주체는 스스로 착취에 봉사한다.

 

신자유주의가 자유를 착취하는 기술, 통치술을 한병철은 ‘심리정치’ 라고 부른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감성을 이용한다. 규율사회의 합리성은 감성으로 대체된다. 감성은 자유의 감정, 개성의 자유로운 발산을 동반한다. 감성자본주의는 자유를 이용한다.

 

「신자유주의 경제는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 점점 더 연속성을 해체하고 가변적 요소를 도입하면서 생산과정의 감성화를 촉진한다. 커뮤니케이션의 가속화 역시 커뮤니케이션의 감성화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p68 」

 

더 많이 더 빠르게 팔기 위해 자본주의는 욕망을 가속화시킨다. 오늘 기분과 내일 기분이 다르고 작년에 좋아보이던 것이 올해는 쳐져 보여야 상품의 회전 속도가 빨라진다. 일 년만 지나면 스마트폰이 구형이 되고, 오년만 지나면 TV가 고물이 된다.

 

「게다가 소비자본주의는 구매를 충동하는 자극을 늘리고 더 많은 욕구를 생성하기 위해 기분을 동원한다. 감성 디자인은 기분을 모델링한다. 즉 소비의 극대화를 위해 표본적 기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결국 사물이 아니라 기분을 소비한다. 사물은 무한히 소비할 수 없지만 기분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기분은 사용가치의 피안에서 전개되어 간다. 이로써 새로운 소비의 장이 무한히 펼쳐진다. p68」

 

소비자의 심리는 그들 자신이 기꺼이 바친 빅데이터에 의해 마이크로마케팅의 대상이 된다. 제니 홀저의 “내가 원하는 것에서 나를 지켜줘.” 는 백화점으로 돌진하는 쇼퍼홀릭의 마지막 비명처럼 들린다. 신자유주의의 감성팔이에서 벗어나는 길은? 감성도 욕망도 지능도 없는 백치가 되는 것. 주체를 포기하는 것.

 

「그것은 주체를 그 자신에게서 해방시켜, “저 측량할 수 없는 텅 빈 시간 속으로” 보내는 부정성이다. 바보는 주체가 아니다. “차라리 꽃의 실존. 빛을 향한 단순한 트임.” p118 」

 

헤겔의 세계의 밤이 떠오른다면 너무 생뚱한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