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남경태 선생님이 팟 캐스트 <만화 조선왕조실록>에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우리는 일본 역사를 너무 모른다. 삼국시대에 잠깐 나왔다가 뚝 떨어져 임진왜란에 한번 나오고, 또 한참 지나서 강화도 조약에 나오는 식. 일본역사는 이렇게 찔끔 찔끔 할 것이 아니라 전체 역사를 조금 자세히 배울 필요가 있다.” 대충 이런 의미의 말이었다. 맞는 말씀이다 싶었는데, 그렇다고 따로 일본사를 읽어봐야 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일본은 일본이니까..., 왠지 알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또 거부감도 들고.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에도 일본은 곁다리로 찔끔 나오는 식이다. 물론 제한된 책에 세계 모든 나라의 역사를 통으로 다룰 수는 없다. 그랬다가 공부하는 우리 머리도 터져 버릴 것이다. 세계사적 사건만 따라가기에도 벅차니 말이다.

 

하지만 또 일본은 일본이다. 우리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일 뿐 아니라, 근현대 시기에는 제국주의 국가의 하나로 세계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미치고 있다. 우리 역사의 차원에서도, 세계사의 차원에서도 소홀히 다룰 수 없는 나라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초보적 차원이나마 일본 역사를 개괄해 본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기원전 1만년 경은 세계사적으로 신석기 시대이다. 일본도 그런데, 일본은 이 시대를 조몬 시대라고 부른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조몬 토기가 발굴되었다고 붙인 이름이다. 조몬은 새끼줄이란 뜻으로, 조몬 토기에는 새끼줄 모양의 무늬가 있다.

 

기원전 300년경에 한반도에서 벼농사와 철기가 전파되면서 일본은 야요이 시대를 맞는다.  도쿄의 야요이 지역에서 조몬 토기와는 다른 특징을 가진 야요이 토기가 발굴되었다.

 

조몬 시대와 야요이 시대의 일본에는 이렇다 할 국가가 없이, 수백의 부족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일본사 편지 p35>

 

일본 역사에서 처음으로 중앙 집권 국가가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은 4세기부터다. 이 시기를 야마토 정권기라고 부르는데, 야마토 지역에서 이런 거대한 무덤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우리나라의 고인돌, 이집트의 피라미드, 영국의 스톤헨지 등도 마찬가지지지만 그 용도가 무엇이든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강력한 권력이 존재해야 한다. 즉 거대 건축물은 계급 사회와 강력한 권력의 존재를 입증한다.

  

 

<EBSi 세계사개념다지기>

 

야마토 정권이 중앙 집권 국가를 이루었다고 해도 여전히 지방 호족 세력들이 매우 강성했다. 일본은 당대 중국이나 한반도와 같이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지 못했다.

 

쇼토쿠 태자(574~622)는 일본 최초의 헌법을 제정하고 불교를 중흥하여 호류사를 창건하는 등 국가체제를 정비하였다. 아스카 문화 발전에도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현재 학계에서 쇼토쿠 태자가 실존 인물인지를 놓고 논란이 있다는 것이다.

 

쇼토쿠 태자가 죽고 호족인 소가 씨 가문이 세력을 잡자 정변이 일어나 다시 강력한 중앙집권화가 추진되었다. 호족들의 토지를 덴노에게 귀속시킨 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세금을 부과하는 등 당을 모방한 율령체계를 구축하였다. 이를 다이카 개신(645)이라고 한다. 다이카는 일본이 처음으로 사용한 연호이다.

 

660년 백제가 멸망하자 3년 뒤인 663년 일본은 수 백 척의 배를 만들어 백제를 돕기 위해 달려왔다. 백제와 왜(당시 명칭)의 밀접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인데, 왜는 지금의 금강 하구인 백강에서 나․당 연합군에게 크게 패했다. 이후 왜와 한반도의 긴밀한 관계도 끊어졌다.

 

7C 말에 덴무 천왕은 처음으로 ‘일본’이라는 국명과, ‘덴노(천황)’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EBS강의에서는 8C 나라시대에 '본격' 사용했고, 그 이전부터 있었다고 했다.

 

일본은 백강에서 당과의 전투 이후 당의 문물을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710년에는 수도를 아스카에서 나라로 옮겼다. 나라시대(710~784 or 794)가 열린 것이다.

 

나라시대의 핵심 기치는 ‘당풍’ 이다. 당처럼 따라 하기 위해 견당사를 파견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한자를 적극 사용하여 <일본서기>라는 역사서를 편찬했다. 당나라 수도 장안의 주작대로를 본떠 헤이조쿄를 만들었다. 왕권 강화를 위해 도다이사를 짓기도 했다. 일본이라는 국호도 이때부터 본격 사용되었다. 그러나 당풍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755년 안록산의 난 이후 쇠퇴해 가는 당을 지켜보며 일본은 당풍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고유문화를 되찾기 시작했다. 

 

덴노 가문의 거듭된 불행을 계기로 수도를 지금의 교토에 있는 헤이안쿄로 옮겼다. 이때부터를 헤이안 시대(794~1185)라고 하는데, 헤이안 시대는 당풍에 대비되는 국풍의 시대였다. 국풍의 핵심은 다시 지방 세력이 권력을 잡는 지방분권 제도와 일본 고유문화이다.

 

일본 고유 문자인 가나 문자가 만들어지고, 가나 문자로 쓴 문학 작품이 인기를 끌었다. 현재 일본의 2000엔짜리 지폐에도 이 시대 최고의 인기 소설인 <겐지 모노가타리>의 한 장면이 담겨 있을 정도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헤이안 시대에 새로이 등장한 직업(?)이 있으니, 일본의 대표적 아이콘인 사무라이다. 지방 분권 세력들은 권력이 커지고 재산이 많아질수록 자신을 지켜줄 존재가 필요했다. 사무라이가 이 역할을 담당했는데, 경호뿐만 아니라 세금을 걷고 토지를 지키는 일을 했다. 사무라이라는 말은 가까이에서 호위하는 사람, ‘侍’의 일본식 발음이다.

 

사무라이는 점점 세력이 커지면서 집단을 이루었고, 크게 성장한 ‘무사단’은 귀족뿐 아니라 덴노에 맞설 정도로 강력해졌다.

 

12세기 말 미나모토 요리토모는 일본 최고의 사무라이에 올랐다. 덴노 보다 강한 권력을 쥐게 된 미나모토는 덴노로 부터 쇼군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덴노를 쫓아내는 대신 상징적 입지를 보존해 주고, 일본을 통치할 실질적인 권한을 갖게 된 것이다. 이렇게 쇼군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시대를 막부 시대라고 부른다. 이슬람 왕조로 비교해 보자면 칼리프와 술탄이 분리된 것과 비슷하다.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는 정교일치의 수장이었으나 셀주크 튀르크의 침략을 받자, 정치적인 실권을 튀르크에게 넘겨주고 종교적 수장으로서의 상징성만 가졌다. 물론 일본의 덴노는 종교적 수장이 아니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EBSi 세계사개념다지기>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된 1192년부터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1868년까지 약 700년 동안 쇼균이 지배하는 막부 시대가 지속되었다. 우리로 치면 무신정권이 700년간 지속된 셈이다. 그동안 덴노는 상징적으로 존재했지만, 사람들로부터 거의 잊혀 갔다.

 

막부체제는 기본적으로 봉건제이다. 쇼군이 지방의 영주 즉 다이묘에게 토지를 나눠주면 다이묘는 이에 대한 대가로 충성을 맹세한다. 중국이나 유럽의 봉건제도 그랬지만 봉건제는 지방분권 체제이므로 언제든지 다이묘가 세력을 키워 쇼군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다. 또한 충성의 대가로 더 이상 줄 것이 없는 쇼군은 쇼군으로서 군림하기 힘들다.

 

1192년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세운 가마쿠라 막부는 몽골의 침입 이후 1333년경에 몰락했다. 일본은 카미카제라는 태풍 덕분에 몽골을 막아낼 수 있었지만, 그 대가가 적지 않았다. 대몽 방어전에 다이묘들이 참전하여 싸웠지만, 일본 땅에서 치러진 전쟁에서 쇼군이 다이묘에게 나눠줄 수 있는 영토나 재물은 전혀 확보될 수 없었다. 전쟁 준비에 막대한 군비를 쏟아 넣은 데다 다이묘들이 떠나가면서 가마쿠라 막부는 몰락했다.

 

일본의 두 번째 막부는 아시카가 가문이 세운 무로마치 막부이다. 무로마치 막부는 1338~1573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후반기 100년(1467~1573)은 전국시대라고 불린다. 막부의 권한이 약화되고 다이묘들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일본 역사상 가장 걸출한 3명의 인물이 서로 다투던 때가 바로 전국시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오다 노부나가는 포르투갈 상인으로부터 조총을 수입하여, 전쟁 양상을 바꾸어 놓은 인물이다. 통일을 목전에 두고 사망하여, 그의 부하였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시대를 통일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열도를 통일하였지만 그의 시대는 그리 길지 않았다. 1585~1598까지 14년 간 일본을 통치했다. 이 사이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는 조선을 거쳐 명과 나아가 인도를 정복하려 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하지만 최후의 승자는 참고 기다렸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도요토미가 죽자 에도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이에야스가 반대 세력을 누르고, 1603년 덴노로부터 쇼군의 칭호를 받았다. 에도막부(1603~1868)가 열린 것이다.

 

  

  <EBSi 세계사개념다지기>

 

애도막부의 대표적 정치체제는 산킨고타이제 - 參勤交代 제도이다. 전국의 다이묘들은 모두 2년에 한번씩 1년 동안 에도에 와서 살아야 했고, 1년을 채우고 돌아갈 때도 자신의 아내를 인질로 남겨두어야 했다. 봉건제의 기본은 유지하되 대신 다이묘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강력한 중앙 집권적 감시체계를 마련한 것이다.

 

산킨고타이 제도는 경제 ․문화적으로 뜻하지 않은 발전을 가져왔다. 전국의 다이묘들이 많은 일행을 데리고 에도로 오고가게 되자 교통이 확대되고 숙박 시설이 늘어났다. 일본은 해양 국가이지만 전 국토의 80%가 산지이기도 하다. 화산 폭발로 인한 높고 험준한 산 때문에 교통이 불편하고 물자의 왕래도 어려웠다. 오랫동안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지 못했던 이유도 지형에 따른 영향이 컸다. 그런데 산킨고타이 제도로 교통이 확대되고 숙박 시설이 많아지자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활발해졌다. 상업과 문화가 발달하면서 지역 간의 격차도 점점 줄어들게 되고 일본 열도는 점차 하나로 통합되어갔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에도막부 시대에 아리타 자기가 유행하였다. 아리타 자기의 시조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끌려간 이삼평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아리타 자기는 네덜란드 상인을 통해 서양에 수출되었다. 도자기가 깨지지 않게 종이로 잘 싸서 배에 실었는데, 이때 사용했던 종이 중에 우키요에가 많았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우키요에는 에도시대에 유행했던 풍속화로 목판으로 대량 인쇄되어 싼값에 살 수 있는 장식용 그림이었다. 서양인들은 아리타 자기와 함께 포장지인 우키요에에도 매료되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19세기 프랑스 인상파들에게 특히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데, 고흐의 작품들에도 배경으로 그려져 있다.

 

에도시대는 평화의 시대였고 일본의 문화라고 할 만한 것이 꽃을 피운 시기이다. 가부키가 처음 공연된 것도 이때이다. 우키요에나 가부키와 같은 문화는 에도시대에 급성장한 상공업자들 사이에 유행했기 때문에 조닌 문화라고 불린다.  

임진왜란 이후 단절되었던 조선과의 관계도 1609년 기유약조를 통해 회복되었고, 이후 조선으로부터 12차례의 통신사가 다녀갔다. 조선의 통신사는 선진문물을 배울 수 있는 매우 소중한 기회였다. 임란의 영향으로 이삼평 등 도공들만 많이 끌려간 것이 아니라 성리학 특히 이황의 성리학이 전해져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황에 대한 연구가 얼마나 활발했던지 지금도 이황을 연구하려면 일본으로 가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에도막부도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처럼 쇄국정책을 썼는데, 단 네덜란드하고만 교역하며 서양문물을 접했다. 네덜란드와 교역을 위해 나가사키에 인공섬인 데지마를 만들었다. 네덜란드를 통해 발달된 서양 학문이 도입되어 난학이라 불렸다.

 

에도 시대 말기에는 외국에서 유입된 성리학이나 난학에 대항하여 일본 고전 문화를 강조하는 국학 운동이 일어났다. 국학은 19세기 존왕양이 운동과 정한론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

  

 

  <EBSi 세계사개념다지기>

 

19세기는 서양 제국주의가 아시아로 눈을 돌린 시기다. 청은 아편 전쟁에 패배하고 1842년 영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 난징조약으로 홍콩을 영국에 뺏겼을 뿐 아니라 이후 몰려든 서양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반식민지 상태로 들어가게 되었다.

 

청의 패배를 지켜본 일본은 1854년 별다른 충돌 없이 미국과 화친조약을 맺었다. 4년 뒤에는 미․일 통상 조약을 맺으며 경제적 침탈을 더욱 거세게 받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런 불평등 조약을 체결한 에도막부에 대한 반대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다이묘들이 “막부의 쇼군을 몰아내고 덴노를 다시 중심에 세워서 서양 세력을 물리치자” 며 존왕양이 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이 운동의 성공으로 에도막부는 권력을 덴노에게 이양하고 종말을 맞았다. 17세의 청년 덴노 메이지가 전권을 가지며, 일본 근대사의 획을 긋는 메이지 시대(1868~1912)가 열렸다.

 

 <EBSi 세계사개념다지기>

 

메이지 덴노는 일본의 122대 덴노이다. 700년 의 막부시대 동안 덴노는 아무런 실권도 없었고 심지어는 먹고 살기가 힘든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도 관심이 없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던 덴노가 19세기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으면서 갑자기 권력의 핵심으로 수직 상승했다.

 

이런 상황에서 메이지 정부는 전국을 돌며 덴노의 존재를 알리고 더 나아가 덴노를 신격화해야 했다. 그들은 BC 660년 진무 덴노가 일본을 건국했다는 신화를 실제 역사로 바꾸었다. 신화에 따르면 덴노는 태양의 신 아마테라스의 자손이므로 인간이면서 동시에 신이다. 일본 역사 2500년 동안 덴노 가문은 한 번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왔으므로 메이지 덴노 역시 인간인 동시에 신이 된다.

 

1945년 쇼와 덴노가 항복 선언을 하면서 신이 아닌 인간임을 고백했다는 우스꽝스럽고도 기이한 이야기는 이런 신격화의 결과이다. 우리가 일제강점기 때 강요당했던 “황국신민의 서” 같은 것들도 사실 급조된 것이나 다름없다. 덴노는 위기의 순간 거지에서 왕자가 된 일종의 신데렐라가 아닌가 ! 하지만 지금도 많은 일본사람들은 여전히 덴노를 존경하고 떠받들기까지 하고 있다. 지금 덴노는 상징적 존재이지만 제국주의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덴노를 언제 다시 신격화할지 모르는 일이다. 일본의 요즘 위험한 행보를 보면.

 

 

다시 근대사로 돌아가 보면 메이지 유신을 성공적으로 단행한 메이지 정부는 1889년 메이지 헌법을 만들고 본격적으로 서양 열강을 따라 제국주의의 길로 나아갔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청나라에 승리하고, 10년 뒤 1904년 러일전쟁으로 러시아마저 꺽은 뒤,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점했다. 1929년 발생한 세계 대공황을 타계하기 위해 제국주의 전쟁을 확대한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1941년 마침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제2차 세계대전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그 결과는 쇼와 덴노의 인간고백과 함께한 무조건 항복 선언이다.

 

전쟁에 참패하고도 운 좋게도 일본은 부활했다. 2차 대전 종전과 함께 격화된 미소 냉전체제에서 미국의 파트너(?)로 선정되었을 뿐 아니라, 냉전체제의 대리전이었던 한국전쟁을 통해 경제적으로 급격한 성장을 이루고 오늘날의 경제대국으로 도약했다.

 

일본의 우익이 득세하고 있는 배경에도 미국의 반공정책이 크게 작용했다. 광복 후 우리나라의 친일파들이 미국의 필요에 의해 살아남아 권력을 행사했듯이, 태평양전쟁의 전범인 일본의 우익 역시 미국의 반공정책을 빌미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현재 아베 수상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만 해도 A급 전범 피의자였지만 석방이 되어 일본 자민당을 이끌고 수상까지 한 인물이다. 아베가 자꾸 망언을 하고 군사대국화를 꿈꾸는 이유도 여기에 뿌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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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목 국가에서 정복 국가로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만리장성 위쪽의 유목민족이 처음 한족지역으로 내려와 왕조를 세우기 시작한 것은 남북조 시대부터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단순히 호․한 융합기라고 하고, 당 멸망 이후부터에야 비로소 정복왕조라고 부른다. 요, 금, 원, 청이 대표적 정복왕조인데, 만리장성 아래의 한족 땅에 유목민이 세운 나라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왜 북위 같은 북조의 나라들은 제외되는 것일까? 답은 역사가 마음(?)이다. ^^

 

정복왕조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비트포겔에 의하면 정복왕조란 두 가지 요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강의에서 보는 것처럼, 한족 땅에 왕조를 세우는 것뿐만 아니라 유목민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한다. 남북조 시대에 북쪽의 5호 16국을 통일한 북위는 한화정책을 채택하여 선비족 고유의 문화와 제도를 버렸다. 호족이 한족에게 흡수된 것이다.

 

이에 반해 요와 금과 원은 한족과 호족을 분리하는 이중 통치 체제를 만들어, 문화 수준이 높은 한족을 원활하게 통치하면서도 유목민 특유의 제도를 지켜 나갔다. 또한 고유의 문자를 개발하여 한족에 동화되는 것을 방지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최초의 정복 왕조는 거란(요)이다. 907년 당나라가 망하고 5대 10국의 혼란기가 오자, 그 틈을 타고 916년에 거란족이 세웠다. 거란은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936년에 황허 강 북쪽의 연운 16주를 점령하고 나라 이름도 요로 바꾸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절도사들이 권력을 분점 하던 5대 10국 시대는 960년에 건국된 송나라에 의해 979년에 마감되고, 송나라는 중국을 재통일하였다. 그러나 완전한 통일은 아니어서 만리장성 아래의 연운16주는 여전히 요가 차지하고 있었다. 송과 요의 계속된 대치 과정에서 1004년, 결국 요가 승리하고 송과 요는 ‘전연의 맹’을 통해 형제 관계를 맺었다. 송이 형님으로 체면치레를 하였으나, 실상은 돈으로 산 평화와 다름없었다. 이후 100년 넘게 송은 해마다 요에게 막대한 양의 선물을 해야 했다.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에 요나라는 고려를 세 차례 침입하는데, 그 배경에는 송이 있었다. 송과 대립하는 상황에서 요는 배후에 있는 고려와 친선을 맺어 후방을 안정시키려 했던 것이다. 고려의 영토가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1차 침입에서 거란은 송과의 단교를 약속받고 오히려 강동6주를 고려에 넘겨주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거란은 재차 삼차 침입을 했지만, 귀주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더 이상 고려를 침략하지 않고, 송-요-고려가 세력 균형을 유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북동쪽에서 서서히 세력을 키워가던 또 하나의 유목민족이 있었다. 여진족이다. 요나라와 싸우면서 힘을 기른 여진족은 1115년에 금나라를 세웠다. 송나라는 금을 이용하여 요가 차지하고 있는 연운 16주를 회복하려고 금과 손을 잡았다. 금은 1125년 요를 멸망시키고, 약속을 지키지 않은 송을 공격하여 수도를 점령하였다. 이를 정강의 변이라고 부른다. 이로 인해 금나라는 화북지방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고, 송은 양쯔강 유역으로 쫓겨 가서 1127년 남송을 건국하였다. 이로부터 100여 년간은 화북의 금과 강남의 남송이 마주보는 형국이 지속되었다.

 

 

2. 양쯔 강 이남에서 일어난 송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당나라는 절도사에 의해 망했다. 현종 후기의 안록산도 절도사였고, 907년 당을 멸망시킨 주전충도 절도사였고, 이후 70년간 계속된 5대10국 시대도 절도사들이 주도했다. 그리고 960년 송나라를 건국한 조광윤도 절도사였다. 절도사는 변방(번진)의 군사뿐만 아니라 행정과 치안을 책임진 수장이었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무인세력이라 할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호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칼을 싸악 거두어 철조 불상을 만들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가, 하남 하사창동 철조 석가여래 좌상에 얽힌 이야기로 전해오는데, 그만큼 새로운 왕조가 만들어지면 제일 무서운 것이 지방 세력이 가지고 있는 무력이다.

 

본인이 무장이었던 조광윤과 그의 후계자 또한 중국을 통일한 후에 무장 세력을 견제하면서 송나라를 철저히 문치의 나라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 결과 송나라의 군사력은 크게 쇠퇴하였고, 유목 왕조인 요와 금 뒤이어 원에 의해 계속되는 침략을 받았다. 다행히 강남 유역의 농업생산력이 크게 발달하고 각종 기술에 힘입은 수공업도 발달하면서 송나라는 유래 없는 경제적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공부는 잘하고 부자인데 싸움은 못해서 힘센 놈들한테 연이어 터지거나 돈을 갖다 바치는 부자 글방 도령의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이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송나라의 정치는 정복 왕조와 밀접히 얽혀 있다. 송나라가 온전히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 대륙을 차지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용은 정복왕조에서 다룬 그대로이다.

 

송을 건국한 조광윤은 황제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모든 관리를 과거 시험을 통해 선발하였다. 과거제는 수나라 때 도입되었지만, 송나라에 와서야 확립되었다. 송나라는 특히 황제 앞에서 직접 시험을 보는 전시를 시행하여 선발된 관리의 충성심을 높였다. 과거제는 유교적 지식을 갖춘 사대부가 사회를 주도하게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다.

 

송나라의 문치주의는 국방력 약화를 가져왔다. 송나라는 이웃나라와 형제관계 혹은 군신관계를 맺어 평화를 유지하였지만, 그 실상은 돈으로 평화를 산 것과 다름없었다. 해마다 막대한 양의 선물을 보내야 했는데, 전쟁 비용보다는 적었지만 커다란 재정적 압박이 아닐 수 없었다. 부국강병이 송나라의 당면과제가 되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204>

 

11세기 후반 신종 때에 왕안석은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는 가난한 소 농민과 임노동자, 중소 상인을 보호하여 국가재정과 국방력을 확충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대지주나 대상인의 이익과 상충되었고 맹렬한 반대에 부딪혀 실패하고 말았다.

 

개혁에 실패한 송나라는 금나라의 공격을 받아 수도 카이펑을 빼앗기고 양쯔강 이남의 임안에 남송을 세웠다. 송나라의 영토는 대폭 축소되었지만, 바다를 통한 무역이 활발해지고 강남의 경제력도 크게 증가하여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강남의 경제력이 화북의 경제력을 능가하게 되었다.

 

남송은 1279년 몽골이 세운 원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송나라의 경제․사회․문화는 4 개의 'ㅅ‘ 으로 정리할 수 있다. 사대부, 성리학, 상업혁명, 서민문화 이다.

 

과거제와 문치주의에 의해 송나라는 사대부의 나라가 되었다. 성리학은 대의명분을 강조함으로써 황제권 강화에 이바지 했을 뿐 아니라, 화이사상을 통해 정복왕조의 침략으로 상처 입은 자존심을 회복시켜 주었다. 경제가 발전하고 활판 인쇄술의 발명으로 서적이 널리 보급되자 더불어 서민문화도 발달하였다.

 

이앙법 등 농업기술의 발달로 양쯔강 하류는 최대의 곡창지대가 되었다. 석탄이 널리 사용되면서 제철업과 자기산업 등의 수공업도 발전하였다. 농업과 수공업의 발달과 더불어 해상무역이 발전하면서 상업혁명이라고 할 만큼 상업이 발달하였다.

 

성리학적 질서를 바탕으로 사대부가 주도하는 문치의 나라,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 등은 마치 조선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다. 물론 규모의 차이와 제국주의의 침략에 의해 조선 후기의 상품화폐 경제는 꽃을 피우기 전에 망하지만 말이다. 여하튼 송나라의 모습이 조선의 모습과 닮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중국의 4대 발명품이라고 부르는 것 중 제지술은 한나라 때이고 나머지 3가지는 모두 송대의 것이다. 제지술은 당과 아바스 왕조의 탈라스 전투 때 이슬람으로 전파되었다. 활판 인쇄술과 화약과 나침반은 원나라 때 모두 유럽으로 전파되어, 유럽의 르네상스를 촉발하였다.

 

 

 

3. 몽골의 정복, 이에 맞선 항쟁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206년 쿠릴타이(부족장 회의)에서 테무친이 칭기즈 칸으로 추대되었다. 몽골이 정복활동을 시작하자 이를 누구보다 환영하고 적극 협력한 사람은 이슬람 상인이었다. 중국에서 서아시아와 유럽까지 분열의 시대가 지속되자 초원길과 비단길이 몹시 위험해진 이슬람 상인들은 통합과 안정을 바랐다.

 

정복활동은 1227년 칭기즈 칸이 죽은 후에도 후계자들에 의해 계속 되었다. 자손들은 물려받은 정복지를 중심으로 4개의 한국(칸이 지배하는 나라)을 세워 분할 통치했지만 몽골제국은 하나의 거대한 유라시아제국이 되었다. 1271년 원나라를 세운 쿠빌라이가 1279년 마침내 남송을 물리쳤다. 유목민족이 처음으로 중국의 모든 지역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4한국의 건국과 멸망 연대는 명확하지가 않다. 인터넷을 찾아보아도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온다. 모든 나라의 멸망이 그렇듯 단번에 망하기 보다는 거의 망했어도 또 백 여 년 이상 분열되어 명맥을 이어가기도 하기 때문에 연구자마다 시점을 다르게 잡는 것이 아닌가 싶다. 연대를 꼭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대한 몽골제국이 언제까지 지속되었고 어떻게 사라져갔는지가 궁금해서 대략 감이나마 잡아보려고 연대를 기록했다. 연대는 아래의 블로그를 참고했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tslee599&logNo=220221521179

 

 

 

 

4. 유라시아가 하나의 세계로 통합되다

 

칭기즈 칸이 거대한 제국을 세운 비법(?)은 누구나 궁금할 것이다. 칭기즈 칸은 부족 중심으로 뭉쳐 있던 전통 체제를 해체하고 용기와 충성심을 기준으로 군대를 편성했다. 이민족이라도 항복 시에는 몽골인으로 통합했다. 천호백호제라는 편제 시스템과 그의 친위 부대가 정복활동의 힘이 되었다.

 

몽골의 풍습에 따라 칭기즈 칸은 그의 아들들에게 영토를 분할해 주었다. 자손들은 정복활동을 계속했지만, ‘칸’이라는 후계자 자리를 놓고 극심하게 다투었다. 특히 맏아들 주치는 칭기즈 칸의 핏줄이 아니라 아내 보르테의 아들이라는 약점 때문에 주치와 그의 후손들은 계속 정통성 문제에 시달렸다.

 

여하튼 칸의 자리는 칭기즈 칸에서 오고타이, 구유크, 몽케, 쿠빌라이로 이어졌다.

 

오고타이 한국은 원 및 차가타이와 대립하다가 1310년에 통치자는 원에 항복하고, 영토의 다수가 차가타이에 병합되었다.

 

차가타이 한국은 중앙아시아를 차지했는데, 몽골제국이 망하고 난 뒤에 몽골의 후계를 자처한 티무르가 제국을 세웠던 곳이다.

 

킵차크 한국은 칭기즈 칸의 핏줄이 아니라고 소외되었던 주치의 아들 바투가 러시아 남부 지역에 세운 국가이다. 바투는 유럽 원정을 주도했다.

 

일한국은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명목뿐인 아바스 왕조를 무너뜨렸다. 처음에는 이슬람을 탄압하였으나, 이후에 이슬람을 국교로 삼기도 했다. 티무르에 의해 실질적으로 멸망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원나라를 건국하고 남송을 멸망시킨 쿠빌라이 칸은 수도를 유목지역의 카라코룸에서 오늘날의 베이징인 대도로 옮겼다. 원은 넓은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중국의 통치 기술과 제도를 받아들였지만, 몽골인 제일주의의 원칙을 고수하였다.

 

정치와 군사는 몽골인이 독점하고, 제국 건설의 길잡이 역할을 한 색목인(이슬람인)에게 재정과 경제를 맡겼다. 양쯔강 아래에서 끝까지 저항한 남송의 한족은 가장 차별 당하였다. 세법도 달라서 한족은 더욱 무거운 세금 부담을 져야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몽골제국은 초원길과 사막길 그리고 바닷길까지 장악하며 유라시아의 육지와 바다를 하나로 묶었다. 대제국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교통․통신, 즉 ‘길’ 이다. 페르시아도 로마도 모두 수도로 통하는 길을 닦았다. 원의 수도 대도로 통하는 길은 역참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주요 도로를 따라 일정 간격으로 배치된 역참에서는 숙박은 물론 수레나 말, 식량을 이용할 수 있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초원이나 사막까지 설치된 역참 덕분에 몽골의 관리는 하루에 450킬로미터를 달릴 수 있었다.

 

몽골제국은 남송을 무너뜨림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앞서 있던 강남의 풍부한 경제력을 확보하였고, 이슬람 상업망을 통해 새로운 경제 질서를 만들었다. 송 대의 3대 발명품도 모두 원을 통해 서양세계에 전해졌다.

 

몽골제국에는 많은 외국인이 드나들었다. 가톨릭이 전해졌고 라마교가 유행했다. 몽골은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보장하여, 각 종교 수도사들이 한자리에 앉아 일종의 종교 배틀을 벌이기도 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도 원의 수도 대도를 다녀온 여행기이다. 실제로 다녀왔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고는 하나 워낙 유명한 책이라.. 1492년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항해한 것도 대도를 찾아 나선 여행이었다고 한다. 몽골제국은 망했지만 아시안 드림은 여전했다고나.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217>

 

하나 된 유라시아제국을 통해 교류했던 것이 사람과 물자뿐만이 아니었다. 14세기 유럽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페스트균도 이 길을 따라 서양에 전파되었다. 흑사병은 중국 윈난 지방의 풍토병으로 들쥐가 그 매개체였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219>

 

마지막으로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들을 쓰윽 살펴본다. 주로 중국 왕조들과 대립했지만, 우리나라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선비족이 북위를 세우고 화북지방을 차지하자 몽골초원을 장악한 유연은 당시 북위, 남조, 고구려와 함께 동아시아 4강 체제를 구축했다. 6~7세기에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돌궐제국은 7세기 동아시아의 십자외교의 한축을 담당했다. 가로축으로 수․당과 신라가 손을 잡고 세로축으로 돌궐-고구려-백제-왜가 연합하여 대결 구도를 형성했다. 수양제가 고구려를 공격한 배경에는 돌궐과 고구려의 연합을 저지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발해도 당을 견제하기 위해 돌궐과 손을 잡았다.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를 3차례나 침략했으며, 거란을 물리친 여진족의 금나라는 고려에 사대를 요구해서 관철시켰다. 몽골제국이야 말할 것도 없이 고려를 침략하여 전국을 초토화시키고 문화재를 불태우고, 고려를 부마국으로 삼고 내정에 간섭했다.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도 두 차례의 호란을 일으키며 조선에 재앙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사대부에게는 오랑캐에게 사대하는 굴욕도 안겨주었다.

 

 

중국을 마지막으로 중세편이 끝났다.

중국은 수와 당까지를 중세로 보는 강의도 있고, 송과 원까지를 중세로 보는 강의도 있다.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자의적일 수밖에 없으니 일률적으로 정해진 기준은 없는가 싶다.

여하튼 중세를 도표로 한번 정리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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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허문명 이래 漢나라까지가 중국의 고대로, 중국의 정체성이 확립되었던 시기다.  중국의 중세는 위진남북조와 수․ 당 시대로, 세계 제국으로 성장한 시기다. 

 

7장 <장안에서 나라까지 굽이치는 동아시아>는 중국의 중세와 그 주변국(우리나라를 포함)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1. 통일로 가는 유목 세계와 농경 세계

  

<아틀라스 세계사 p28>

 

유라시아 대륙은 강을 중심으로 한 4대 문명 지역 즉 농경민 지역과 그 위쪽의 유목민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한나라 때 장건에 의해 비단길이 개척되었다지만, 이미 그 위쪽에는 유목민족에 의한 초원길이 만들어져 동서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출처: http://blog.naver.com/phklove0531/34769007>

 

중국은 역사 이래 끊임없이 다양한 유목민족에 의해 침략을 당해왔다.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은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유목민족들은 교역이 가능할 때는 교역을, 불가능할 때는 침략을 통해 농경민족과 교류(?)를 해왔지만, 유목이라는 생활 습성 때문에 약탈이 끝나면 항상 초원지대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한나라 말기, 혼란이 시작되면서 북방민족들이 장성 아래로 내려와 한족과 섞여 살기 시작했다. 게다가 위나라를 이은 진의 왕족들이 패권다툼을 치열하게 벌이면서, 싸움을 잘 하는 유목민을 서로 자기편으로 끌어 들이는 바람에, 유목민의 세력이 엄청나게 성장하였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결국 진은 흉노족에게 망하였다. 이후 화북지방에는 다섯 부족의 호족들이 다투어 나라를 세웠는데 이를 5호16국이라고 한다. 진 왕실의 일족은 양쯔강 유역의 강남으로 내려가 새로이 나라를 세웠는데 이를 동진이라고 한다. 이후 황허를 중심으로 한 화북지방은 호족들이, 양쯔강을 중심으로 한 강남지방은 한족들이 양분하여 흥망성쇠를 거듭했는데, 이를 두고 남북조시대(북위부터 남북조라 부르기도 한다. 이때는 가운데 5호16국을 넣어야 한다.: 위진-5호16국-남북조) 라고 부른다.

 

위진남북조시대는 한나라가 멸망하고 삼국이 경쟁하던 AD 220년부터 수나라가 남북조를 재통일한 589년까지, 약 370년 정도의 혼란기를 이른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북조에서 5호 16국을 통일한 나라는 북위(439)이다. 북위는 선비족인데, 효문제는 화북지방의 한족을 다스리기 위해 한화정책을 채택했다. 한족을 호족의 문화로 흡수한 것이 아니라, 호족을 한족의 문화에 흡수시킨 것이다. 호족과 한족을 융합하려는 효문제의 노력은 어느 정도 효과도 있었지만, 내부의 갈등을 낳기도 했다. 

  

남조에서는 동진 시대부터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었다. 남하한 귀족들은 유랑민과 빈민을 모아 농토를 개간하여 거대한 장원을 소유하고 새로운 귀족 사회를 이루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북조에서는 불교가 발전했다. 한족의 우월감에 맞서 호족은 평등의식을 강조하는 불교를 받아들였다. 남조에서는 도교가 융성했다. 노장사상에 전통신앙과 신선사상을 결합한 도교는 혼란기 중국의 의지할 데 없던 민중 속을 파고들었다.

 

왕희지, 도연명, 죽림칠현 등이 이 시대의 귀족문화를 이끌었다. 귀족들은 현실 정치를 외면한 채 철학적 논의를 일삼으며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였다.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를 대표하는 네 가지 사상이 있다. 그 중 법가는 진나라의 사상적 기반이, 유가는 한나라의 통치 이념이 되었다. 도가는 위진남북조 시대에 와서 귀족들과 민중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그런데 차별 없는 사랑과 평등을 주창하는 묵가의 시대는 과연 올 수 있을까?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581년 수나라를 세운 양견이 589년 마침내 남북조를 통일했다. 농경민인 한족과 유목민인 호족이 하나의 나라를 이룬 호․ 한 일체의 세계가 마련된 것이다.

 

수나라는 대운하 사업과 고구려 정벌에 무리하게 국력을 쏟은 나머지 건국 후 40년도 못가 망하고 말았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짧은 치세였으나 수나라는 이후 동아시아에 큰 영향을 끼치는 율령체제를 마련하였다. 민중들에게 토지를 균등하게 나누어 주는 균전제(북위에서 처음 실시)를 근간으로 하여, 조용조의 세법과 부병제라는 군사제도를 확립하고, 과거제를 실시하였다. 수의 율령체제는 당나라로 계승되어 발전하였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2. 말 달리는 한반도, 일어서는 일본

3. 백강에서 겨루는 동아시아 삼국

 

2절과 3절은 우리역사의 삼국시대를 다루고 있다. 한국사에서 자세히 공부했으므로 이전에 간략히 정리한 글을 링크하고, 여기서는 생략한다.

 

http://blog.aladin.co.kr/753199155/7916096

 

 

다만 한국사에 등장한 위진남북조 시대의 몇몇 나라들에 대해서 잠깐 살펴보겠다. 한국사 공부할 때 열심히 외웠던 나라들을 여기서 보니 새삼 반갑다. ^^ 연대별로 들여다보면 쉽게 연결이 된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170>

 

위나라는 3세기 동천왕 때 고구려를 침략했다.

 

고구려와 백제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4세기인데, 고구려에는 소수림왕 때 전진의 순도가, 백제에는 침류왕 때 동진의 마라난타가 전해주었다. 전진은 5호16국 시대에 저족이 세운 나라이고, 강남의 동진 역시 5호16국과 경쟁하던 동시대의 나라이다. 고구려는 북조의 호족이, 백제는 남조의 한족이 불교를 전해준 것이다.

 

북위가 활약하던 5세기는 고구려의 전성기이기도 하다. 당시 동북아시아는 고구려를 비롯한 북위와 유연 그리고 남조가 4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6세기 전반의 양나라는 백제와 활발히 교류하였다. 무령왕릉은 양나라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이고, 성왕 때는 백제의 사신이 양나라의 그림에 등장한다. 양직공도 속의 백제 사신은 기품이 있어 보인다.

 

이 시기 한반도가 삼국시대로 나뉘어 오랫동안 경쟁할 수 있었던 것도 중국이 혼란기였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당장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마자 고구려를 침공했고, 곧이어 나당연합군에 의해 고구려와 백제가 망한 것을 보아도, 안심하고 우리민족끼리 경쟁할 수 있었던 배경은 중국이 한반도에 눈을 돌릴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4. 비단길에 실려 온 당나라의 봄바람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당나라는 안으로 제도를 정비하고 밖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세계 제국을 건설 하였다. 당나라의 제도와 문물은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에 퍼져 나가, 당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문화권이 형성되었다. 신라는 물론 발해와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정치 체제에도 오랜 기간 영향을 미쳤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618년에 건국한 당나라는 2대 태종과 6대 현종 시기의 전성기를 거쳐 현종 말기부터 쇠퇴하였다. 안사의 난과 황소의 난 등 반란에 시달리다 907년 주전충의 난으로 멸망하였다. 이때부터 조광윤이 송나라를 세워 통일한 979년까지 70여년은 절도사들이 난립한 5대10국 시대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당태종 시기는 정관의 치로 불리며, 정치적 황금기를 이루었다. 영토를 확장하고 율령체계를 정비하였다. 아버지 당고조를 도와 건국한 과정이나 이후 황제에 오르는 과정이 조선의 태종 이방원과 비슷하다. 우리역사에도 고구려 정벌을 왔다가 안시성에서 패퇴하여 물러간 황제로 기록되어 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자 황제라는 측천무후는 태종의 후궁으로 들어왔다가 태종의 아들인 고종의 황후가 되었다. 고종대신 실권을 장악한 것도 모자라 아들들을 연이어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측천무후가 실권을 쥐고 있던 시기, 당나라는 신라와 동맹을 맺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영토를 확장하였다.

 

현종의 통치 시기는 둘로 뚜렷이 나누어진다. 개원의 치로 불리며 문화적 황금기를 이룬 전반기와 양귀비를 만나 몰락해 가던 후반기이다. 후반기에는 이슬람의 아바스 왕조와의 탈라스 전투에서 패해 비단길을 잃었다. 연이어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을 겪으며 현종뿐만 아니라 당나라도 급격히 쇠퇴했다. 8년에 걸친 안사의 난은 얼마나 재앙적이었던지 당나라 인구가 거의 1/4로 줄어 들었다.  

 

비단길을 잃은 당나라는 동서무역을 위해 바닷길을 개척했다. 이로써 초원길, 비단길, 바닷길이 모두 열렸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한나라가 고대제국을 완성하여 중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확립하였다면, 당나라는 세계적 제국을 건설하여 동아시아라는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특히 중앙행정 체제는 중세뿐만 아니라 근세까지도 여러 나라의 통치체제에 바탕이 되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중앙 행정체제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토지제도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토지 문제가 대두되고 이에 따른 세금이 국가의 중심 이슈로 떠오르게 되면, 왕조가 무너지거나 뿌리부터 흔들렸다.

 

당나라의 토지제도는 ‘균전제’ 이다. 국가가 일정 기준에 따라 농민에게 토지를 균등하게 지급하면, 농민은 이에 대한 대가로 국가에 세금과 역을 제공한다. 균전제는 당나라에서 처음 시행된 것은 아니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북위가 처음 도입했고, 수나라가 이를 이어받아 제도화한 것을 당나라가 계승하여 확립한 것이다. 이전 한나라 때는 한전제를 실시하여 토지 소유 상한선을 두었지만, 실패하고 대농장이 발달했다. 균전제 역시 당이 쇠퇴함에 따라 장원제로 가는 수순을 밟게 된다.

 

국가의 기틀은 귀족이나 특권층이 아니라 民, 일반 백성이다. 민중의 기반이 튼실해야 세금을 통해 국가재정을 확보하고, 징병으로 국방을 튼튼히 할 수 있다. 그런데 동서를 막론하고 계급 사회에서는 점차 토지가 특권층에게 집중되고, 살기가 힘들어진 민중은 노비로 전락한다. 노비가 되면 국가에 대한 모든 의무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특권층에게 토지가 집중되어 민중이 줄어들고 노비가 늘어나면 국력 또한 약화된다. 멸망으로 가는 수순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사회도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재벌이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도, 빈부격차가 극심하여 1%에게 부가 집중되면 국가의 재정은 악화된다. 사회복지 제도인 의료보험, 국민연금 등도 덩달아 약화되어, 사회문제는 더욱 심각하게 된다. 소위 trickle down이라는 논리로 재벌로의 부의 집중을 옹호하는 것은 이론의 유희에 불과하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당나라는 안사의 난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 균전제를 바탕으로 한 조용조와 부병제는 안사의 난 이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토지제도는 특권층이 대토지를 소유함에 따라 장원제로 바뀌었다. 국가가 더 이상 농민에게 나누어줄 토지가 없어지게 되자, 세금제도와 군역제도도 바뀔 수밖에 없었다. 세금은 양세법으로, 군역은 모병제로 바뀌었다. 경제적 평등 사회가 차등 사회로, 균등 과세가 차등 과세로 변화했다.

 

현종 후기부터 절도사를 중심으로 일어난 각종 반란에 의해 시달리다 당나라가 멸망했다고 하지만, 그에 더하여 혹은 그로 인하여 토지제도의 근간이 무너지고 민생이 극심하게 악화된 것이 또 다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188>

 

당나라의 수도 장안(시안)은 ‘거대한 용광로’라고 불릴 만큼 국제적인 도시였다. 각국의 사신은 물론 유학생과 유학승, 화가와 음악가, 종교적 망명자들까지 북적거리며 화려하고 국제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주변 국가들은 발달한 당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다투어 받아들였다. 율령체제는 물론 유교와 불교, 한자를 수용하였고, 도읍을 만드는데 장안의 형태를 본떴다. 그리하여 동아시아는 점차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당나라의 천재 시인인 이백과 두보도 당 현종 시기에 활약한 인물이다. 이백이 자유분방하고 심미적이라면 두보는 사회비판적이었다.

 

 

 <수능특강 이다지의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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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펭귄클래식 1
토머스 모어 지음, 류경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강유원의 『인문 고전 강의』나 『역사 고전 강의』는 매우 재미있는 책이지만, 그가 ‘강의’에서 다루고 있는 ‘고전’들은 읽을 엄두를 내기가 어렵다.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나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기』는 물론이고 단테의 『신곡』, 벤담의 『파놉티콘』 등도 마음만 들썩일 뿐 집어 들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르네상스시기에 대한 역사 공부를 하면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꼭 읽으려 했다. 두 책 모두 강유원이 책과 라디오 방송을 통해 ‘강의’한 것들이다. 『군주론』은 몇 년 전에 읽기는 했는데, 그다지 큰 느낌은 없었다. 딱딱하고 너무 처세술적이어서 당대의 이탈리아에서 어떤 반향을 일으켰던,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던 상관없이, 내게는 그다지 교훈적이지도 흥미롭지도 않았다. 무장한 예언가 armed prophet 정도가 고개를 끄덕일 만 했다. 힘도 없고 비전도 없는 정치 지도자들에게 지쳐가던 때였기, 지금은 더욱 그렇지만, 때문이다.

 

그렇게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읽게 되었다. 토마스 모어는 1478~1535, 에라스뮈스 1466(?)~1536, 마키아벨리 1469~1527 와 함께 15~6세기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사상가이다. 막 신으로부터 벗어나 인간에 대한 탐구를 새롭게 하던 시대의, 500여 년 전의 인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책은 놀․ 랍․ 다.

 

펭귄 코리아 판의 서문을 쓴 폴 터너는 또 다른 면에서의 놀라움을 이렇게 쓰고 있다.

 

「진정한 어려움은 이런 것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유토피아 사회의 여러 양상들 때문에 생겨난다. 독실한 가톨릭 저자였던 저자가 과연 안락사, 성직자의 결혼, 성격 불화가 원인인 부부의 협의이혼 같은 일들을 옹호할 수 있겠는가? 자신의 묘비명에 스스로를 ‘이단자들에게 눈엣가시 같았던 사람“으로 묘사했고, 이단자들을 비난하는 글 수백 페이지를 썼던 사람이 과연 종교적 관용을 권장할 수 있었겠는가? 엄청난 사유지 소유자였으며 나중에 부를 황금 알을 낳는 암탉에까지 비유했던 사람이 과연 최초의 공산주의자일 수 있었겠는가? p15」

 

위키백과 정도의 약력 소개를 보고 『유토피아』를 읽으면 정말로 폴 터너와 같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삶이 보여주는 궤적과 『유토피아』가 그리고 있는 이상향의 이런 괴리가 이 책에 대한 분분한 해석과 논쟁을 낳고 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폴 터너는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토마스 모어가 살던 당대의 영국이 이런 나라였기 때문이다.

 

「당시의 영국은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고 단지 음식을 훔쳤다는 죄목으로 교수형에 처해지고 있던 상황에서도, 한 사람이 막대한 부를 향유하는 일이 가능했던 나라였다. .. 개인의 자유에 대해 말한다면, 튜더 왕조 시대의 영국에는 언론의 자유가 없었다. 모어 자신도 그가 실제로 말한 내용이나 행동한 내용 때문에 처형당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결연하게 품고 있던 개인적 견해 때문에 처형된 것이다. 교회의 수장으로 놀랍게 변신한 헨리8세의 처신에 대해 아무런 코멘트도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했다. 그가 침묵했다는 사실 자체가 정치적 범죄였던 것이다. ... p23」

 

『유토피아』가 전해주는 유토피아는 우리에게 유토피아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요소가 많다. 집단적이고 획일화된 모습은 언뜻 우리가 그 실패를 지켜보았던 사회주의 국가들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러나 15~6세기의 영국 사회를 감안한다면, 왜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위해 이런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만하다.

 

유토피아의 흥미로운 모습을 몇 가지 옮겨 적으려고 한다. 논자들이 그런 것처럼 이 책은 찬사를 바칠 부분도 비판을 할 부분도 많다. 하지만 새롭지도 재미도 없을 그런 말을 보태기보다는 토마스 모어의 놀라운 상상과 통찰을 새겨 둠으로써 기억의 쇠퇴에 대비하는 것이 유익할 듯하다.

 

 

1. 사유재산이 없는 유토피아에서 외국과의 통상과 전쟁을 위해 필요한 금을 다루는 방식 p143~5

 

이런 상황에서 돈을 만드는 원재료인 금과 은은 유토피아 인 누구로부터도 그것들이 원래 받아야 할 본질적인 가치 이상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두 귀금속의 가치는 철의 가치보다도 훨씬 더 낮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철이 없다면 인간의 생활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불이나 물이 없을 때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금이나 은이 없어도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희소성의 가치라는 바보 같은 개념만 빼놓는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어머니와도 같은 자애로운 자연은 신중하게도 흙, 공기, 물처럼 가장 위대한 은총을 바로 우리의 눈앞에 배치해 놓으셨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게 몰래 감추어두셨습니다.

 

그러나 만약 유토피아 인들이 이런 귀금속들을 귀중품 보관실에 넣고 자물쇠로 잠가 놓는다면, 거리의 평범한 시민들은 시장이나 벤치이터들이 자기들을 속이고 있거나 그 귀금속들을 이용하여 사익을 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바보 같은 의심을 할지도 모릅니다. (평범한 시민들이 그런 의심을 하는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알고 계시겠지요.) 물론 귀금속을 장식용 접시나 예술 작품으로 환원해 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우 그것들을 다시 녹여야 하거나 용병들에게 지불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그건 주인에게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 난점들을 극복하기 위해 유토피아 인들은 귀금속을 다루는 한 가지 방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그들의 다른 관습들과 완벽하게 일치하지만 우리의 관습과 정반대되는 방법입니다. 특히 금을 보관하는 우리의 관습과 반대입니다. 그러니 두 분께서 실제로 직접 보시기 전까지는 이런 일이 도저히 믿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방식에 의하면 접시나 음료 용기는 비록 아름다운 장식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유리나 흙 같은 매우 값싼 재료로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개별 가정이나 공동 식당에서 요강 같은 가정용 비품을 만들 때에 은이나 금도 보통의 재료로 사용됩니다. 그들은 또 단단한 금으로 만든 사슬과 족쇄를 이용하여 노예를 억류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불명예스러운 죄를 지은 자들은 귀와 손가락에 금반지를 달고, 목에 금목걸이를 차고, 머리에 금관을 강제로 쓰고 다녀야 합니다. 그들은 사실 금과 은, 두 귀금속을 경멸의 대상으로 만드는 일이라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합니다.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금은과 헤어져야 하는 상황이 갑자기 생기더라도 누구든 단 한마디도 애석하다는 소리를 하지 않을 거라는 것입니다.

 

 

2. 치료가 불가능하고 극심한 통증을 일으키는 만성 질환을 앓는 환자에게 존엄사를 권장 p174

 

“현실을 직시합시다. 당신은 결코 정상적인 생활을 다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그저 다른 사람들에게 폐가 되고 당신 스스로에게도 짐이 될 뿐입니다. 사실상 당신은 실질적으로 사후 체험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당신의 삶이 이토록 비참한 마당에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당신은 고문실에 수감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걸 깨부수고 더 나은 세상으로 탈출하지 않습니까? 아니라면 지시만 하십시오. 우리가 당신의 탈출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온갖 손실에서 손을 떼는 일은 상식에 불과한 일입니다. 그리고 성직자의 조언을 받아들이는 일은 신앙적으로 경건한 일이기도 합니다. 성직자는 하느님의 대변자이기 때문입니다.”

 

 

3. 전쟁을 싫어하지만 꼭 필요한 경우 비날리아 용병(스위스 용병으로 추정)을 고용하는 것에 대하여 p195

 

아시다시피 유토피아 인들은 고용 목적을 위해 착한 사람들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것 못지않게 전쟁 목적을 위해 활용할 악한 사람들을 찾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그들은 넉넉하고도 후한 돈을 미끼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전쟁 사업에 뛰어들도록 비날리아 인들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비날리아 용병들은 좀처럼 무사히 살아 돌아와서 자신이 받아야 할 보상금을 요구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일단 무사히 살아 돌아오는 용병들은 늘 충분한 보상을 받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앞으로도 이 일이 똑같은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유토피아 인들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비날리아 인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는지 괘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 지상에서 비날리아 인들처럼 더러운 인간쓰레기들을 청소하는 것만으로도 자신들이 인류에게 더없는 친절을 베푸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4. 종교적 관용 p205~7

 

물론 많은 유토피아 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을 막으려고 하지도 않고 개종자들을 공격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곳에 있던 동안 우리 신도들 중 한 명이 어려움에 빠진 적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우리가 그러지 말라고 만류했는데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자마자 즉시 기독교 신앙에 대한 대중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설교를 하며 그는 신중한 분별력보다는 다소 과한 신앙적 열정을 내보였습니다. 결국 너무 흥분한 나머지 그는 우리 종교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다른 모든 종교들을 비난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는 최고조로 목소리를 높여 다른 종교들은 모두 타락한 미신들이며, 그런 것들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불경스러운 괴물들이고 영원히 지옥 불에 빠져 벌 받는 운명에 처하게 될 거라고 외쳐댔습니다. 얼마 동안 이런 식으로 설교를 계속하고 다닌 끝에, 결국 그는 체포되고 기소되었습니다. 신성모독죄가 아니라 안녕질서 교란죄로 말입니다. 그들 나라의 헌법 내용 중 가장 오래된 원칙 하나가 바로 종교적 관용이었기 때문에 이런 형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런 종교적 관용의 원칙은 그 기원이 정복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정복 전까지만 해도 이 섬나라에서는 끊임없이 종교 분쟁들이 일어나고 있었고, 다양한 적대적 종파들이 심지어 나라를 지키는 일에도 협력을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그런 행태를 들은 정복자 유토포스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자신이 그들 모두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깨달았습니다. 따라서 승리를 거두자마자 즉시 그는 한 가지 법을 만들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종교 행위를 할 수 있고, 합리적인 설득에 의하여 조용히 예의바르게 하기만 한다면 자유롭게 다른 사람들을 자기 종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노력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혹 다른 사람들을 개종시키는데 실패한다 하더라도 다른 종교들에 대해 적대적인 공격을 가한다거나 폭력이나 개인적인 학대를 행사하는 일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종교 논쟁에서 지나치게 공격적인 태도를 지니는 데 대한 보통의 징벌은 추방이나 노역 형에 처하는 것입니다.

 

유토포스가 이 법을 만든 이유는 사회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바로 이런 법이 종교 자체에도 최선의 이익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떤 신조가 올바른 것인지 주제넘게 나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그는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숭배를 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신조들을 믿게 만드셨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다른 신조를 믿고 있는 사람들을 겁주어서 자신의 특정한 신조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일은 어리석고 오만한 일이라는 점을 명백하고 확실하게 확신했습니다. 설령 진정한 종교는 오직 하나밖에 없고 그 밖의 다른 종교들은 모두 말이 안 되는 거짓 종교들이라 하더라도 이 문제가 조용히 합리적으로 논의되기만 한다면 궁극적으로 언젠가는 참된 진리가 저절로 우세를 점하게 될 거라는 사실이 그에게는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처럼 생각됐습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만약 무력의 힘으로 결정된다면 가장 훌륭하고 가장 영적인 형태의 종교가 가장 어리석은 형태의 미신들 앞에서 굴복을 해버리는 결과가 초래될 것입니다. 마치 가시나무나 들장미 넝쿨들이 밀이나 옥수수보다 더 잘 자라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가장 못된 사람들이 항상 가장 집요한 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신앙을 선택하는 일을 자신의 생각에 따라 개인이 결정하는, 자유로운 의사 결정의 문제로 맡겨 놓았습니다.

 

 

 

특히 종교에 관한 부분은, 토마스 모어 자신이 가톨릭의 수호자로서 여섯 명의 루터파를 화형대에 올리고 마흔 명을 교도소에 보냈던 사실에 비추어 보면, 믿어지지 않는 서술이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 어떻게 이토록 다른 두 사상이 공존할 수 있었을까? 이 간극에 맞닥뜨린 토마스 모어는 “여기가 바로 로도스다!”고 외치는 대신 유토피아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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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토마스 모어, 코페르니쿠스, 셰익스피어, 갈릴레이, 세르반테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 눈부신 이름들은 어떻게 중세 천년의 암흑으로부터 한꺼번에 튀어 나왔을까?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십자군 전쟁 이후 교황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교회는 분열했다. 신 중심의 세계에 균열이 일어났다. 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 인간에게는 신을 대신할 새로운 규범이 필요했다. 그들이 찾은 것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였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에 대한 탐구와 더불어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탄생했다.

 

르네상스Renaissancce는 재생이란 뜻을 가진다. 르네상스가 재생시킨 것은 ‘고대’이다. 신에게 얽매이지 않는 자립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었고, 자연과학이 그 방법을 제시했다. 14~16세기 르네상스 시대를 이어, 17세기 과학혁명의 시대가 뒤따른 것은 이런 맥락 아래에서이다. 세속화, 인문주의, 자연과학적 방법은 하나로 엮여 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르네상스를 “화약의 발명에 적응해 간 시대”로 규정한 학자도 있다. 르네상스라고 하면 먼저 피렌체의 예술을 떠올리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화약과 대포가 널리 쓰이게 된 것이다.

 

화약은 전쟁 양상, 도시 설계 방식, 군대 규모, 삶의 방식 등을 바꾸었다. 화약과 대포가 등장하면서 중세의 무기 체제가 쓸모없어졌다. 유지비가 많이 드는 화약과 대포 때문에 지역의 영주가 아닌 중앙의 군주가 세금을 거두어야 했다. 전쟁의 규모와 비용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고 그로 인해 중앙집권적 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화약뿐만 아니라 송나라의 3대 발명품인 나침반과 인쇄술 역시 유럽이 중세에서 벗어나 근대로 도약하는 데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동양은 물론 전 세계가 유럽의 식민지로 전락했지만.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교과서적인 의미의 르네상스에 조금 집중해 보자. 르네상스는 14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16세기에는 알프스를 넘어 북유럽에서 꽃을 피웠다. 이탈리아가 먼저 르네상스를 구가했던 것도, 북유럽으로 그 주도권이 넘어간 것도, 모두 중계무역과 관련이 있다.

 

십자군 전쟁이후 지중해 무역으로 부유해진 이탈리아는 상인과 왕의 지원으로 주로 미술 분야에서 ‘부흥’했다. 대표적 후원자는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었다. 그런데 유럽의 다른 나라들이 절대왕정 체제를 구축하던 것과는 반대로 내부분열이 계속되던 이탈리아는 무역의 주도권마저 대서양무역로에 뺏기자, 르네상스 문화도 쇠퇴했다.

 

대서양무역으로 급성장한 16세기 (알프스 북쪽) 북유럽은 예술 보다는 사회비판과 종교개혁이 르네상스를 주도했다. 『유토피아』 ,『우신예찬』,『돈키호테』 등의 작품들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으로 현실을 신랄하게 풍자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학자들은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를 ‘서로 경합하는 쌍둥이’ 혹은 ‘종교개혁은 전형적인 르네상스 운동’이라고 말한다. 르네상스는 14~16세기에 걸쳐있고, 종교개혁은 16세기에 일어났다. 14~16세기를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로 잡는다면, 그 안에 중세의 위기와 해체에 해당하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모두 포함된다. 이 시기를 거쳐서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유럽의 근대성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 운동이 짧은 시간에 많은 세력을 얻었던 이유는 첫째, 프로테스탄트가 세속적 통치자(제후)와 영합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사람들이 가톨릭에 회의와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은 교황 레오 10세가 면벌부를 팔면서 시작되었다. 처음 루터가 문제 삼은 것은 면별부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남발하는 것이었다. 1517년 뷔텐베르크 교회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내걸 때에도 교황에 대해 완전히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교황 레오 10세의 대처가 미온적이었다.

 

이때부터 종교개혁은 순수한 종교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가 되었다. 교황의 미온적 대처를 목격한 독일 영주들이 자신들의 땅 곳곳에 있는 가톨릭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들은 루터가 교황에 맞설 수 있도록 정치적으로 뒷받침했고, 이와 동시에 영지 내에 있는 교황의 재산을 몰수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시작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대립은 30년 전쟁(1618~1648)으로까지 이어졌다.

 

종파분쟁은 극단으로 치달았고, 사람들은 종교분쟁에 환멸을 느꼈다. 겉으로는 신앙의 이름을 내걸고 있지만, 사실상 정치적․ 경제적 싸움일 뿐이며, 종교는 이것을 은폐하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30년 전쟁을 겪으며 과학에 대한 의존도가 급속도로 높아졌다. 종교를 명분으로 세상이 극도로 혼란해지자 종교를 대체할 확실한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회의주의적인데다가 느긋하게 생각하는 힘을 필요로 했는데, 당시 사람들의 심란한 정서에 더 이상 맞지 않았다.

 

시대의 요구에 부응한 것은 데카르트와 뉴턴이었다. 고전적 권위에서 탈피하여 수학적 확실성에 의존하는 과학, 과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 물리적 세계를 파악하기 위한 새로운 학문들에 대한 요구 등이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지배계급은 재빨리 과학 아카데미를 설립하거나 후원하며 과학을 통한 지배의 정당화를 모색했다.

 

과학이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등장하면서 17세기 중반에 르네상스는 완전히 끝이 났다. 중세의 신을 대신할 규범으로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등장했지만, 종교전쟁의 혼란 끝에 사람들이 선택한 것은 고대로의 복귀가 아니라 과학이었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고대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의 투쟁에서 근대적인 것이 승리했다. 고대적인 것이란 자기 지식의 최종 근거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의 텍스트에 두는 것이라면, 근대적인 것은 과학, 특히 실험과학에 두는 것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았거나 종파간의 대립이 극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수학적 확실성을 추구하는 대신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전통 속에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학교에서 종교개혁을 다루는 방식을 잠깐 살펴보자. 가톨릭이 신과 인간 사이에 반드시 교황과 성직자를 매개로 삼았다면, 프로테스탄트는 성서지상주의를 주장했다. 성직자 따위 없어도 성서를 통해 곧바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독일의 루터파는 파문과 전쟁, 화의를 거쳐 종교적 자유를 획득했다. 개인적 자유가 아니라 제후만이 종교를 선택할 수 있고, 제후가 선택한 종교를 그의 농노들은 무조건 믿어야하지만 말이다.("다스리는 자가 하나인 곳에는 종교도 하나이다.")  개인이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30년 전쟁 이후에야 주어졌다.

 

스위스의 칼뱅파가 주장하는 예정설은 역설적이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과는 아무 상관없이 이미 정해져 있는데, 구원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인간의 노력과 성공이 제시된다. 열심히 일하여 성공하면 그것이 곧 구원에 대한 증빙이 되는 것이다. 노력과 성공이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노력하고 성공한다는 역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무신론자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이런 이유로 칼뱅파는 부르주아지에게 환영받고 자본주의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영국국교회는 루터파와 칼뱅파에 비해서 이질적이다. 이혼과 재정 문제로 국왕이 일으킨 개혁이다. 우리나라의 성공회(聖公會)가 영국국교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545~1563년까지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는 ‘개신교의 종교개혁에 맞선 가톨릭 개혁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상은 개혁이 아니라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탄압을 공식적으로 결의한 것으로 평가된다.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졌다. 구교는 유럽이 신․구교로 쪼개지자 교세 확장을 위해 예수회를 조직하여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선교에 나섰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30년 전쟁은 유럽의 핵심 강국이 모두 참전한 국제전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과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 제후들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나뉘어 대립했다. 또한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제후의 종교적 자유는 인정하되, 제후의 종교가 곧 그 영지의 종교로 규정되어, 제후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618년 보헤미아(체코)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가톨릭교도인 페르디난트 2세의 탄압에 대항해 일어난 폭동이었다. 이 폭동으로 페르디난트 2세가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스페인과 오스트리아가 개입했다. 그러자 가톨릭 세력을 저지하기 위해 루터파인 덴마크와 스웨덴이 개입했고 마지막으로 프랑스가 참전했다.

 

30년 전쟁은 주로 독일 땅에서 벌어졌는데, 당시 독일 인구의 3분의 1이 죽었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용병을 고용했기 때문에 전쟁은 더욱 잔인했고, 살육을 위한 살육의 양상으로 치달았다.

 

이 전쟁은 종교에 대한 극심한 의심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종교에 의해 지배되는 낡은 세계에 대해 절망했다. 보통 베스트팔렌조약 이후를 근대의 출발로 보는 것은 이런 이유이다.

 

이 전쟁을 통해 용병전쟁의 문제점이 드러나며 국민군이 탄생했다. 국민군 유지에는 막대한 물자가 필요했다. 상업이 국민군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이른바 ‘군상 복합체’가 만들어졌다. 전쟁과 시장이라는,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두 개의 축이 이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국민군은 곧 해외 정복에 나섰다. 서구 제국주의의 막이 오른 것이다.

 

그건 그렇고 베스트팔렌조약으로 루터파는 개인의 종교 자유를 획득했고, 칼뱅파도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았다. 종교전쟁이 곧 독립전쟁이었던 네덜란드의 독립도 베스트팔렌조약에서 승인되었다.

  

 

중세를 끝내기 전에 꼭 덧붙여야 할 것은 마녀사냥이다. 마녀사냥은 십자군 전쟁 이후 교황의 권위가 추락하고, 종교전쟁으로 사회가 혼란에 빠지면서 더욱 심해졌다. 중세의 절정기가 아니라 중세가 붕괴되던 시점에서 마녀사냥의 열풍이 불었다는 점은 매우 시사적이다. 교회는 종교적․ 정치적 혼란과 불안의 원인을 모두 마녀 탓으로 돌리며, 책임을 회피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려 했다. 마녀로 몰린 이들은 노파나 하녀, 과부 같은 힘없는 여성들이었다. 통치자들이 궁지에 몰렸을 때 사용하는 전형적인 수법이 등장한 것이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나 공산주의에 대한 매카시즘 열풍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에서도 빨갱이는 사회 혼란기 때마다 등장했다.

 

마녀가 불안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불안이 마녀를 만들어 낸다. 사회의 근본 모순을 은폐하기 위해 화형대 위의 마녀를 필요로 했던 것은 권위를 잃고 추락하던 통치자들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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