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남경태 선생님이 팟 캐스트 <만화 조선왕조실록>에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우리는 일본 역사를 너무 모른다. 삼국시대에 잠깐 나왔다가 뚝 떨어져 임진왜란에 한번 나오고, 또 한참 지나서 강화도 조약에 나오는 식. 일본역사는 이렇게 찔끔 찔끔 할 것이 아니라 전체 역사를 조금 자세히 배울 필요가 있다.” 대충 이런 의미의 말이었다. 맞는 말씀이다 싶었는데, 그렇다고 따로 일본사를 읽어봐야 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일본은 일본이니까..., 왠지 알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또 거부감도 들고.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에도 일본은 곁다리로 찔끔 나오는 식이다. 물론 제한된 책에 세계 모든 나라의 역사를 통으로 다룰 수는 없다. 그랬다가 공부하는 우리 머리도 터져 버릴 것이다. 세계사적 사건만 따라가기에도 벅차니 말이다.

 

하지만 또 일본은 일본이다. 우리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일 뿐 아니라, 근현대 시기에는 제국주의 국가의 하나로 세계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미치고 있다. 우리 역사의 차원에서도, 세계사의 차원에서도 소홀히 다룰 수 없는 나라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초보적 차원이나마 일본 역사를 개괄해 본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기원전 1만년 경은 세계사적으로 신석기 시대이다. 일본도 그런데, 일본은 이 시대를 조몬 시대라고 부른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조몬 토기가 발굴되었다고 붙인 이름이다. 조몬은 새끼줄이란 뜻으로, 조몬 토기에는 새끼줄 모양의 무늬가 있다.

 

기원전 300년경에 한반도에서 벼농사와 철기가 전파되면서 일본은 야요이 시대를 맞는다.  도쿄의 야요이 지역에서 조몬 토기와는 다른 특징을 가진 야요이 토기가 발굴되었다.

 

조몬 시대와 야요이 시대의 일본에는 이렇다 할 국가가 없이, 수백의 부족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일본사 편지 p35>

 

일본 역사에서 처음으로 중앙 집권 국가가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은 4세기부터다. 이 시기를 야마토 정권기라고 부르는데, 야마토 지역에서 이런 거대한 무덤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우리나라의 고인돌, 이집트의 피라미드, 영국의 스톤헨지 등도 마찬가지지지만 그 용도가 무엇이든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강력한 권력이 존재해야 한다. 즉 거대 건축물은 계급 사회와 강력한 권력의 존재를 입증한다.

  

 

<EBSi 세계사개념다지기>

 

야마토 정권이 중앙 집권 국가를 이루었다고 해도 여전히 지방 호족 세력들이 매우 강성했다. 일본은 당대 중국이나 한반도와 같이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지 못했다.

 

쇼토쿠 태자(574~622)는 일본 최초의 헌법을 제정하고 불교를 중흥하여 호류사를 창건하는 등 국가체제를 정비하였다. 아스카 문화 발전에도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현재 학계에서 쇼토쿠 태자가 실존 인물인지를 놓고 논란이 있다는 것이다.

 

쇼토쿠 태자가 죽고 호족인 소가 씨 가문이 세력을 잡자 정변이 일어나 다시 강력한 중앙집권화가 추진되었다. 호족들의 토지를 덴노에게 귀속시킨 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세금을 부과하는 등 당을 모방한 율령체계를 구축하였다. 이를 다이카 개신(645)이라고 한다. 다이카는 일본이 처음으로 사용한 연호이다.

 

660년 백제가 멸망하자 3년 뒤인 663년 일본은 수 백 척의 배를 만들어 백제를 돕기 위해 달려왔다. 백제와 왜(당시 명칭)의 밀접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인데, 왜는 지금의 금강 하구인 백강에서 나․당 연합군에게 크게 패했다. 이후 왜와 한반도의 긴밀한 관계도 끊어졌다.

 

7C 말에 덴무 천왕은 처음으로 ‘일본’이라는 국명과, ‘덴노(천황)’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EBS강의에서는 8C 나라시대에 '본격' 사용했고, 그 이전부터 있었다고 했다.

 

일본은 백강에서 당과의 전투 이후 당의 문물을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710년에는 수도를 아스카에서 나라로 옮겼다. 나라시대(710~784 or 794)가 열린 것이다.

 

나라시대의 핵심 기치는 ‘당풍’ 이다. 당처럼 따라 하기 위해 견당사를 파견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한자를 적극 사용하여 <일본서기>라는 역사서를 편찬했다. 당나라 수도 장안의 주작대로를 본떠 헤이조쿄를 만들었다. 왕권 강화를 위해 도다이사를 짓기도 했다. 일본이라는 국호도 이때부터 본격 사용되었다. 그러나 당풍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755년 안록산의 난 이후 쇠퇴해 가는 당을 지켜보며 일본은 당풍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고유문화를 되찾기 시작했다. 

 

덴노 가문의 거듭된 불행을 계기로 수도를 지금의 교토에 있는 헤이안쿄로 옮겼다. 이때부터를 헤이안 시대(794~1185)라고 하는데, 헤이안 시대는 당풍에 대비되는 국풍의 시대였다. 국풍의 핵심은 다시 지방 세력이 권력을 잡는 지방분권 제도와 일본 고유문화이다.

 

일본 고유 문자인 가나 문자가 만들어지고, 가나 문자로 쓴 문학 작품이 인기를 끌었다. 현재 일본의 2000엔짜리 지폐에도 이 시대 최고의 인기 소설인 <겐지 모노가타리>의 한 장면이 담겨 있을 정도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헤이안 시대에 새로이 등장한 직업(?)이 있으니, 일본의 대표적 아이콘인 사무라이다. 지방 분권 세력들은 권력이 커지고 재산이 많아질수록 자신을 지켜줄 존재가 필요했다. 사무라이가 이 역할을 담당했는데, 경호뿐만 아니라 세금을 걷고 토지를 지키는 일을 했다. 사무라이라는 말은 가까이에서 호위하는 사람, ‘侍’의 일본식 발음이다.

 

사무라이는 점점 세력이 커지면서 집단을 이루었고, 크게 성장한 ‘무사단’은 귀족뿐 아니라 덴노에 맞설 정도로 강력해졌다.

 

12세기 말 미나모토 요리토모는 일본 최고의 사무라이에 올랐다. 덴노 보다 강한 권력을 쥐게 된 미나모토는 덴노로 부터 쇼군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덴노를 쫓아내는 대신 상징적 입지를 보존해 주고, 일본을 통치할 실질적인 권한을 갖게 된 것이다. 이렇게 쇼군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시대를 막부 시대라고 부른다. 이슬람 왕조로 비교해 보자면 칼리프와 술탄이 분리된 것과 비슷하다.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는 정교일치의 수장이었으나 셀주크 튀르크의 침략을 받자, 정치적인 실권을 튀르크에게 넘겨주고 종교적 수장으로서의 상징성만 가졌다. 물론 일본의 덴노는 종교적 수장이 아니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EBSi 세계사개념다지기>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된 1192년부터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1868년까지 약 700년 동안 쇼균이 지배하는 막부 시대가 지속되었다. 우리로 치면 무신정권이 700년간 지속된 셈이다. 그동안 덴노는 상징적으로 존재했지만, 사람들로부터 거의 잊혀 갔다.

 

막부체제는 기본적으로 봉건제이다. 쇼군이 지방의 영주 즉 다이묘에게 토지를 나눠주면 다이묘는 이에 대한 대가로 충성을 맹세한다. 중국이나 유럽의 봉건제도 그랬지만 봉건제는 지방분권 체제이므로 언제든지 다이묘가 세력을 키워 쇼군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다. 또한 충성의 대가로 더 이상 줄 것이 없는 쇼군은 쇼군으로서 군림하기 힘들다.

 

1192년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세운 가마쿠라 막부는 몽골의 침입 이후 1333년경에 몰락했다. 일본은 카미카제라는 태풍 덕분에 몽골을 막아낼 수 있었지만, 그 대가가 적지 않았다. 대몽 방어전에 다이묘들이 참전하여 싸웠지만, 일본 땅에서 치러진 전쟁에서 쇼군이 다이묘에게 나눠줄 수 있는 영토나 재물은 전혀 확보될 수 없었다. 전쟁 준비에 막대한 군비를 쏟아 넣은 데다 다이묘들이 떠나가면서 가마쿠라 막부는 몰락했다.

 

일본의 두 번째 막부는 아시카가 가문이 세운 무로마치 막부이다. 무로마치 막부는 1338~1573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후반기 100년(1467~1573)은 전국시대라고 불린다. 막부의 권한이 약화되고 다이묘들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일본 역사상 가장 걸출한 3명의 인물이 서로 다투던 때가 바로 전국시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오다 노부나가는 포르투갈 상인으로부터 조총을 수입하여, 전쟁 양상을 바꾸어 놓은 인물이다. 통일을 목전에 두고 사망하여, 그의 부하였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시대를 통일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열도를 통일하였지만 그의 시대는 그리 길지 않았다. 1585~1598까지 14년 간 일본을 통치했다. 이 사이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는 조선을 거쳐 명과 나아가 인도를 정복하려 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하지만 최후의 승자는 참고 기다렸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도요토미가 죽자 에도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이에야스가 반대 세력을 누르고, 1603년 덴노로부터 쇼군의 칭호를 받았다. 에도막부(1603~1868)가 열린 것이다.

 

  

  <EBSi 세계사개념다지기>

 

애도막부의 대표적 정치체제는 산킨고타이제 - 參勤交代 제도이다. 전국의 다이묘들은 모두 2년에 한번씩 1년 동안 에도에 와서 살아야 했고, 1년을 채우고 돌아갈 때도 자신의 아내를 인질로 남겨두어야 했다. 봉건제의 기본은 유지하되 대신 다이묘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강력한 중앙 집권적 감시체계를 마련한 것이다.

 

산킨고타이 제도는 경제 ․문화적으로 뜻하지 않은 발전을 가져왔다. 전국의 다이묘들이 많은 일행을 데리고 에도로 오고가게 되자 교통이 확대되고 숙박 시설이 늘어났다. 일본은 해양 국가이지만 전 국토의 80%가 산지이기도 하다. 화산 폭발로 인한 높고 험준한 산 때문에 교통이 불편하고 물자의 왕래도 어려웠다. 오랫동안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지 못했던 이유도 지형에 따른 영향이 컸다. 그런데 산킨고타이 제도로 교통이 확대되고 숙박 시설이 많아지자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활발해졌다. 상업과 문화가 발달하면서 지역 간의 격차도 점점 줄어들게 되고 일본 열도는 점차 하나로 통합되어갔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에도막부 시대에 아리타 자기가 유행하였다. 아리타 자기의 시조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끌려간 이삼평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아리타 자기는 네덜란드 상인을 통해 서양에 수출되었다. 도자기가 깨지지 않게 종이로 잘 싸서 배에 실었는데, 이때 사용했던 종이 중에 우키요에가 많았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우키요에는 에도시대에 유행했던 풍속화로 목판으로 대량 인쇄되어 싼값에 살 수 있는 장식용 그림이었다. 서양인들은 아리타 자기와 함께 포장지인 우키요에에도 매료되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19세기 프랑스 인상파들에게 특히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데, 고흐의 작품들에도 배경으로 그려져 있다.

 

에도시대는 평화의 시대였고 일본의 문화라고 할 만한 것이 꽃을 피운 시기이다. 가부키가 처음 공연된 것도 이때이다. 우키요에나 가부키와 같은 문화는 에도시대에 급성장한 상공업자들 사이에 유행했기 때문에 조닌 문화라고 불린다.  

임진왜란 이후 단절되었던 조선과의 관계도 1609년 기유약조를 통해 회복되었고, 이후 조선으로부터 12차례의 통신사가 다녀갔다. 조선의 통신사는 선진문물을 배울 수 있는 매우 소중한 기회였다. 임란의 영향으로 이삼평 등 도공들만 많이 끌려간 것이 아니라 성리학 특히 이황의 성리학이 전해져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황에 대한 연구가 얼마나 활발했던지 지금도 이황을 연구하려면 일본으로 가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에도막부도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처럼 쇄국정책을 썼는데, 단 네덜란드하고만 교역하며 서양문물을 접했다. 네덜란드와 교역을 위해 나가사키에 인공섬인 데지마를 만들었다. 네덜란드를 통해 발달된 서양 학문이 도입되어 난학이라 불렸다.

 

에도 시대 말기에는 외국에서 유입된 성리학이나 난학에 대항하여 일본 고전 문화를 강조하는 국학 운동이 일어났다. 국학은 19세기 존왕양이 운동과 정한론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

  

 

  <EBSi 세계사개념다지기>

 

19세기는 서양 제국주의가 아시아로 눈을 돌린 시기다. 청은 아편 전쟁에 패배하고 1842년 영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 난징조약으로 홍콩을 영국에 뺏겼을 뿐 아니라 이후 몰려든 서양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반식민지 상태로 들어가게 되었다.

 

청의 패배를 지켜본 일본은 1854년 별다른 충돌 없이 미국과 화친조약을 맺었다. 4년 뒤에는 미․일 통상 조약을 맺으며 경제적 침탈을 더욱 거세게 받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런 불평등 조약을 체결한 에도막부에 대한 반대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다이묘들이 “막부의 쇼군을 몰아내고 덴노를 다시 중심에 세워서 서양 세력을 물리치자” 며 존왕양이 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이 운동의 성공으로 에도막부는 권력을 덴노에게 이양하고 종말을 맞았다. 17세의 청년 덴노 메이지가 전권을 가지며, 일본 근대사의 획을 긋는 메이지 시대(1868~1912)가 열렸다.

 

 <EBSi 세계사개념다지기>

 

메이지 덴노는 일본의 122대 덴노이다. 700년 의 막부시대 동안 덴노는 아무런 실권도 없었고 심지어는 먹고 살기가 힘든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도 관심이 없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던 덴노가 19세기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으면서 갑자기 권력의 핵심으로 수직 상승했다.

 

이런 상황에서 메이지 정부는 전국을 돌며 덴노의 존재를 알리고 더 나아가 덴노를 신격화해야 했다. 그들은 BC 660년 진무 덴노가 일본을 건국했다는 신화를 실제 역사로 바꾸었다. 신화에 따르면 덴노는 태양의 신 아마테라스의 자손이므로 인간이면서 동시에 신이다. 일본 역사 2500년 동안 덴노 가문은 한 번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왔으므로 메이지 덴노 역시 인간인 동시에 신이 된다.

 

1945년 쇼와 덴노가 항복 선언을 하면서 신이 아닌 인간임을 고백했다는 우스꽝스럽고도 기이한 이야기는 이런 신격화의 결과이다. 우리가 일제강점기 때 강요당했던 “황국신민의 서” 같은 것들도 사실 급조된 것이나 다름없다. 덴노는 위기의 순간 거지에서 왕자가 된 일종의 신데렐라가 아닌가 ! 하지만 지금도 많은 일본사람들은 여전히 덴노를 존경하고 떠받들기까지 하고 있다. 지금 덴노는 상징적 존재이지만 제국주의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덴노를 언제 다시 신격화할지 모르는 일이다. 일본의 요즘 위험한 행보를 보면.

 

 

다시 근대사로 돌아가 보면 메이지 유신을 성공적으로 단행한 메이지 정부는 1889년 메이지 헌법을 만들고 본격적으로 서양 열강을 따라 제국주의의 길로 나아갔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청나라에 승리하고, 10년 뒤 1904년 러일전쟁으로 러시아마저 꺽은 뒤,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점했다. 1929년 발생한 세계 대공황을 타계하기 위해 제국주의 전쟁을 확대한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1941년 마침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제2차 세계대전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그 결과는 쇼와 덴노의 인간고백과 함께한 무조건 항복 선언이다.

 

전쟁에 참패하고도 운 좋게도 일본은 부활했다. 2차 대전 종전과 함께 격화된 미소 냉전체제에서 미국의 파트너(?)로 선정되었을 뿐 아니라, 냉전체제의 대리전이었던 한국전쟁을 통해 경제적으로 급격한 성장을 이루고 오늘날의 경제대국으로 도약했다.

 

일본의 우익이 득세하고 있는 배경에도 미국의 반공정책이 크게 작용했다. 광복 후 우리나라의 친일파들이 미국의 필요에 의해 살아남아 권력을 행사했듯이, 태평양전쟁의 전범인 일본의 우익 역시 미국의 반공정책을 빌미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현재 아베 수상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만 해도 A급 전범 피의자였지만 석방이 되어 일본 자민당을 이끌고 수상까지 한 인물이다. 아베가 자꾸 망언을 하고 군사대국화를 꿈꾸는 이유도 여기에 뿌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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