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목 국가에서 정복 국가로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만리장성 위쪽의 유목민족이 처음 한족지역으로 내려와 왕조를 세우기 시작한 것은 남북조 시대부터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단순히 호․한 융합기라고 하고, 당 멸망 이후부터에야 비로소 정복왕조라고 부른다. 요, 금, 원, 청이 대표적 정복왕조인데, 만리장성 아래의 한족 땅에 유목민이 세운 나라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왜 북위 같은 북조의 나라들은 제외되는 것일까? 답은 역사가 마음(?)이다. ^^

 

정복왕조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비트포겔에 의하면 정복왕조란 두 가지 요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강의에서 보는 것처럼, 한족 땅에 왕조를 세우는 것뿐만 아니라 유목민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한다. 남북조 시대에 북쪽의 5호 16국을 통일한 북위는 한화정책을 채택하여 선비족 고유의 문화와 제도를 버렸다. 호족이 한족에게 흡수된 것이다.

 

이에 반해 요와 금과 원은 한족과 호족을 분리하는 이중 통치 체제를 만들어, 문화 수준이 높은 한족을 원활하게 통치하면서도 유목민 특유의 제도를 지켜 나갔다. 또한 고유의 문자를 개발하여 한족에 동화되는 것을 방지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최초의 정복 왕조는 거란(요)이다. 907년 당나라가 망하고 5대 10국의 혼란기가 오자, 그 틈을 타고 916년에 거란족이 세웠다. 거란은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936년에 황허 강 북쪽의 연운 16주를 점령하고 나라 이름도 요로 바꾸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절도사들이 권력을 분점 하던 5대 10국 시대는 960년에 건국된 송나라에 의해 979년에 마감되고, 송나라는 중국을 재통일하였다. 그러나 완전한 통일은 아니어서 만리장성 아래의 연운16주는 여전히 요가 차지하고 있었다. 송과 요의 계속된 대치 과정에서 1004년, 결국 요가 승리하고 송과 요는 ‘전연의 맹’을 통해 형제 관계를 맺었다. 송이 형님으로 체면치레를 하였으나, 실상은 돈으로 산 평화와 다름없었다. 이후 100년 넘게 송은 해마다 요에게 막대한 양의 선물을 해야 했다.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에 요나라는 고려를 세 차례 침입하는데, 그 배경에는 송이 있었다. 송과 대립하는 상황에서 요는 배후에 있는 고려와 친선을 맺어 후방을 안정시키려 했던 것이다. 고려의 영토가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1차 침입에서 거란은 송과의 단교를 약속받고 오히려 강동6주를 고려에 넘겨주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거란은 재차 삼차 침입을 했지만, 귀주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더 이상 고려를 침략하지 않고, 송-요-고려가 세력 균형을 유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북동쪽에서 서서히 세력을 키워가던 또 하나의 유목민족이 있었다. 여진족이다. 요나라와 싸우면서 힘을 기른 여진족은 1115년에 금나라를 세웠다. 송나라는 금을 이용하여 요가 차지하고 있는 연운 16주를 회복하려고 금과 손을 잡았다. 금은 1125년 요를 멸망시키고, 약속을 지키지 않은 송을 공격하여 수도를 점령하였다. 이를 정강의 변이라고 부른다. 이로 인해 금나라는 화북지방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고, 송은 양쯔강 유역으로 쫓겨 가서 1127년 남송을 건국하였다. 이로부터 100여 년간은 화북의 금과 강남의 남송이 마주보는 형국이 지속되었다.

 

 

2. 양쯔 강 이남에서 일어난 송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당나라는 절도사에 의해 망했다. 현종 후기의 안록산도 절도사였고, 907년 당을 멸망시킨 주전충도 절도사였고, 이후 70년간 계속된 5대10국 시대도 절도사들이 주도했다. 그리고 960년 송나라를 건국한 조광윤도 절도사였다. 절도사는 변방(번진)의 군사뿐만 아니라 행정과 치안을 책임진 수장이었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무인세력이라 할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호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칼을 싸악 거두어 철조 불상을 만들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가, 하남 하사창동 철조 석가여래 좌상에 얽힌 이야기로 전해오는데, 그만큼 새로운 왕조가 만들어지면 제일 무서운 것이 지방 세력이 가지고 있는 무력이다.

 

본인이 무장이었던 조광윤과 그의 후계자 또한 중국을 통일한 후에 무장 세력을 견제하면서 송나라를 철저히 문치의 나라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 결과 송나라의 군사력은 크게 쇠퇴하였고, 유목 왕조인 요와 금 뒤이어 원에 의해 계속되는 침략을 받았다. 다행히 강남 유역의 농업생산력이 크게 발달하고 각종 기술에 힘입은 수공업도 발달하면서 송나라는 유래 없는 경제적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공부는 잘하고 부자인데 싸움은 못해서 힘센 놈들한테 연이어 터지거나 돈을 갖다 바치는 부자 글방 도령의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이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송나라의 정치는 정복 왕조와 밀접히 얽혀 있다. 송나라가 온전히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 대륙을 차지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용은 정복왕조에서 다룬 그대로이다.

 

송을 건국한 조광윤은 황제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모든 관리를 과거 시험을 통해 선발하였다. 과거제는 수나라 때 도입되었지만, 송나라에 와서야 확립되었다. 송나라는 특히 황제 앞에서 직접 시험을 보는 전시를 시행하여 선발된 관리의 충성심을 높였다. 과거제는 유교적 지식을 갖춘 사대부가 사회를 주도하게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다.

 

송나라의 문치주의는 국방력 약화를 가져왔다. 송나라는 이웃나라와 형제관계 혹은 군신관계를 맺어 평화를 유지하였지만, 그 실상은 돈으로 평화를 산 것과 다름없었다. 해마다 막대한 양의 선물을 보내야 했는데, 전쟁 비용보다는 적었지만 커다란 재정적 압박이 아닐 수 없었다. 부국강병이 송나라의 당면과제가 되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204>

 

11세기 후반 신종 때에 왕안석은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는 가난한 소 농민과 임노동자, 중소 상인을 보호하여 국가재정과 국방력을 확충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대지주나 대상인의 이익과 상충되었고 맹렬한 반대에 부딪혀 실패하고 말았다.

 

개혁에 실패한 송나라는 금나라의 공격을 받아 수도 카이펑을 빼앗기고 양쯔강 이남의 임안에 남송을 세웠다. 송나라의 영토는 대폭 축소되었지만, 바다를 통한 무역이 활발해지고 강남의 경제력도 크게 증가하여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강남의 경제력이 화북의 경제력을 능가하게 되었다.

 

남송은 1279년 몽골이 세운 원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송나라의 경제․사회․문화는 4 개의 'ㅅ‘ 으로 정리할 수 있다. 사대부, 성리학, 상업혁명, 서민문화 이다.

 

과거제와 문치주의에 의해 송나라는 사대부의 나라가 되었다. 성리학은 대의명분을 강조함으로써 황제권 강화에 이바지 했을 뿐 아니라, 화이사상을 통해 정복왕조의 침략으로 상처 입은 자존심을 회복시켜 주었다. 경제가 발전하고 활판 인쇄술의 발명으로 서적이 널리 보급되자 더불어 서민문화도 발달하였다.

 

이앙법 등 농업기술의 발달로 양쯔강 하류는 최대의 곡창지대가 되었다. 석탄이 널리 사용되면서 제철업과 자기산업 등의 수공업도 발전하였다. 농업과 수공업의 발달과 더불어 해상무역이 발전하면서 상업혁명이라고 할 만큼 상업이 발달하였다.

 

성리학적 질서를 바탕으로 사대부가 주도하는 문치의 나라,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 등은 마치 조선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다. 물론 규모의 차이와 제국주의의 침략에 의해 조선 후기의 상품화폐 경제는 꽃을 피우기 전에 망하지만 말이다. 여하튼 송나라의 모습이 조선의 모습과 닮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중국의 4대 발명품이라고 부르는 것 중 제지술은 한나라 때이고 나머지 3가지는 모두 송대의 것이다. 제지술은 당과 아바스 왕조의 탈라스 전투 때 이슬람으로 전파되었다. 활판 인쇄술과 화약과 나침반은 원나라 때 모두 유럽으로 전파되어, 유럽의 르네상스를 촉발하였다.

 

 

 

3. 몽골의 정복, 이에 맞선 항쟁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206년 쿠릴타이(부족장 회의)에서 테무친이 칭기즈 칸으로 추대되었다. 몽골이 정복활동을 시작하자 이를 누구보다 환영하고 적극 협력한 사람은 이슬람 상인이었다. 중국에서 서아시아와 유럽까지 분열의 시대가 지속되자 초원길과 비단길이 몹시 위험해진 이슬람 상인들은 통합과 안정을 바랐다.

 

정복활동은 1227년 칭기즈 칸이 죽은 후에도 후계자들에 의해 계속 되었다. 자손들은 물려받은 정복지를 중심으로 4개의 한국(칸이 지배하는 나라)을 세워 분할 통치했지만 몽골제국은 하나의 거대한 유라시아제국이 되었다. 1271년 원나라를 세운 쿠빌라이가 1279년 마침내 남송을 물리쳤다. 유목민족이 처음으로 중국의 모든 지역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4한국의 건국과 멸망 연대는 명확하지가 않다. 인터넷을 찾아보아도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온다. 모든 나라의 멸망이 그렇듯 단번에 망하기 보다는 거의 망했어도 또 백 여 년 이상 분열되어 명맥을 이어가기도 하기 때문에 연구자마다 시점을 다르게 잡는 것이 아닌가 싶다. 연대를 꼭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대한 몽골제국이 언제까지 지속되었고 어떻게 사라져갔는지가 궁금해서 대략 감이나마 잡아보려고 연대를 기록했다. 연대는 아래의 블로그를 참고했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tslee599&logNo=220221521179

 

 

 

 

4. 유라시아가 하나의 세계로 통합되다

 

칭기즈 칸이 거대한 제국을 세운 비법(?)은 누구나 궁금할 것이다. 칭기즈 칸은 부족 중심으로 뭉쳐 있던 전통 체제를 해체하고 용기와 충성심을 기준으로 군대를 편성했다. 이민족이라도 항복 시에는 몽골인으로 통합했다. 천호백호제라는 편제 시스템과 그의 친위 부대가 정복활동의 힘이 되었다.

 

몽골의 풍습에 따라 칭기즈 칸은 그의 아들들에게 영토를 분할해 주었다. 자손들은 정복활동을 계속했지만, ‘칸’이라는 후계자 자리를 놓고 극심하게 다투었다. 특히 맏아들 주치는 칭기즈 칸의 핏줄이 아니라 아내 보르테의 아들이라는 약점 때문에 주치와 그의 후손들은 계속 정통성 문제에 시달렸다.

 

여하튼 칸의 자리는 칭기즈 칸에서 오고타이, 구유크, 몽케, 쿠빌라이로 이어졌다.

 

오고타이 한국은 원 및 차가타이와 대립하다가 1310년에 통치자는 원에 항복하고, 영토의 다수가 차가타이에 병합되었다.

 

차가타이 한국은 중앙아시아를 차지했는데, 몽골제국이 망하고 난 뒤에 몽골의 후계를 자처한 티무르가 제국을 세웠던 곳이다.

 

킵차크 한국은 칭기즈 칸의 핏줄이 아니라고 소외되었던 주치의 아들 바투가 러시아 남부 지역에 세운 국가이다. 바투는 유럽 원정을 주도했다.

 

일한국은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명목뿐인 아바스 왕조를 무너뜨렸다. 처음에는 이슬람을 탄압하였으나, 이후에 이슬람을 국교로 삼기도 했다. 티무르에 의해 실질적으로 멸망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원나라를 건국하고 남송을 멸망시킨 쿠빌라이 칸은 수도를 유목지역의 카라코룸에서 오늘날의 베이징인 대도로 옮겼다. 원은 넓은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중국의 통치 기술과 제도를 받아들였지만, 몽골인 제일주의의 원칙을 고수하였다.

 

정치와 군사는 몽골인이 독점하고, 제국 건설의 길잡이 역할을 한 색목인(이슬람인)에게 재정과 경제를 맡겼다. 양쯔강 아래에서 끝까지 저항한 남송의 한족은 가장 차별 당하였다. 세법도 달라서 한족은 더욱 무거운 세금 부담을 져야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몽골제국은 초원길과 사막길 그리고 바닷길까지 장악하며 유라시아의 육지와 바다를 하나로 묶었다. 대제국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교통․통신, 즉 ‘길’ 이다. 페르시아도 로마도 모두 수도로 통하는 길을 닦았다. 원의 수도 대도로 통하는 길은 역참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주요 도로를 따라 일정 간격으로 배치된 역참에서는 숙박은 물론 수레나 말, 식량을 이용할 수 있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초원이나 사막까지 설치된 역참 덕분에 몽골의 관리는 하루에 450킬로미터를 달릴 수 있었다.

 

몽골제국은 남송을 무너뜨림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앞서 있던 강남의 풍부한 경제력을 확보하였고, 이슬람 상업망을 통해 새로운 경제 질서를 만들었다. 송 대의 3대 발명품도 모두 원을 통해 서양세계에 전해졌다.

 

몽골제국에는 많은 외국인이 드나들었다. 가톨릭이 전해졌고 라마교가 유행했다. 몽골은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보장하여, 각 종교 수도사들이 한자리에 앉아 일종의 종교 배틀을 벌이기도 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도 원의 수도 대도를 다녀온 여행기이다. 실제로 다녀왔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고는 하나 워낙 유명한 책이라.. 1492년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항해한 것도 대도를 찾아 나선 여행이었다고 한다. 몽골제국은 망했지만 아시안 드림은 여전했다고나.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217>

 

하나 된 유라시아제국을 통해 교류했던 것이 사람과 물자뿐만이 아니었다. 14세기 유럽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페스트균도 이 길을 따라 서양에 전파되었다. 흑사병은 중국 윈난 지방의 풍토병으로 들쥐가 그 매개체였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219>

 

마지막으로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들을 쓰윽 살펴본다. 주로 중국 왕조들과 대립했지만, 우리나라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선비족이 북위를 세우고 화북지방을 차지하자 몽골초원을 장악한 유연은 당시 북위, 남조, 고구려와 함께 동아시아 4강 체제를 구축했다. 6~7세기에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돌궐제국은 7세기 동아시아의 십자외교의 한축을 담당했다. 가로축으로 수․당과 신라가 손을 잡고 세로축으로 돌궐-고구려-백제-왜가 연합하여 대결 구도를 형성했다. 수양제가 고구려를 공격한 배경에는 돌궐과 고구려의 연합을 저지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발해도 당을 견제하기 위해 돌궐과 손을 잡았다.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를 3차례나 침략했으며, 거란을 물리친 여진족의 금나라는 고려에 사대를 요구해서 관철시켰다. 몽골제국이야 말할 것도 없이 고려를 침략하여 전국을 초토화시키고 문화재를 불태우고, 고려를 부마국으로 삼고 내정에 간섭했다.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도 두 차례의 호란을 일으키며 조선에 재앙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사대부에게는 오랑캐에게 사대하는 굴욕도 안겨주었다.

 

 

중국을 마지막으로 중세편이 끝났다.

중국은 수와 당까지를 중세로 보는 강의도 있고, 송과 원까지를 중세로 보는 강의도 있다.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자의적일 수밖에 없으니 일률적으로 정해진 기준은 없는가 싶다.

여하튼 중세를 도표로 한번 정리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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