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허문명 이래 漢나라까지가 중국의 고대로, 중국의 정체성이 확립되었던 시기다. 중국의 중세는 위진남북조와 수․ 당 시대로, 세계 제국으로 성장한 시기다.
7장 <장안에서 나라까지 굽이치는 동아시아>는 중국의 중세와 그 주변국(우리나라를 포함)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1. 통일로 가는 유목 세계와 농경 세계

<아틀라스 세계사 p28>
유라시아 대륙은 강을 중심으로 한 4대 문명 지역 즉 농경민 지역과 그 위쪽의 유목민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한나라 때 장건에 의해 비단길이 개척되었다지만, 이미 그 위쪽에는 유목민족에 의한 초원길이 만들어져 동서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출처: http://blog.naver.com/phklove0531/34769007>
중국은 역사 이래 끊임없이 다양한 유목민족에 의해 침략을 당해왔다.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은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유목민족들은 교역이 가능할 때는 교역을, 불가능할 때는 침략을 통해 농경민족과 교류(?)를 해왔지만, 유목이라는 생활 습성 때문에 약탈이 끝나면 항상 초원지대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한나라 말기, 혼란이 시작되면서 북방민족들이 장성 아래로 내려와 한족과 섞여 살기 시작했다. 게다가 위나라를 이은 진의 왕족들이 패권다툼을 치열하게 벌이면서, 싸움을 잘 하는 유목민을 서로 자기편으로 끌어 들이는 바람에, 유목민의 세력이 엄청나게 성장하였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결국 진은 흉노족에게 망하였다. 이후 화북지방에는 다섯 부족의 호족들이 다투어 나라를 세웠는데 이를 5호16국이라고 한다. 진 왕실의 일족은 양쯔강 유역의 강남으로 내려가 새로이 나라를 세웠는데 이를 동진이라고 한다. 이후 황허를 중심으로 한 화북지방은 호족들이, 양쯔강을 중심으로 한 강남지방은 한족들이 양분하여 흥망성쇠를 거듭했는데, 이를 두고 남북조시대(북위부터 남북조라 부르기도 한다. 이때는 가운데 5호16국을 넣어야 한다.: 위진-5호16국-남북조) 라고 부른다.
위진남북조시대는 한나라가 멸망하고 삼국이 경쟁하던 AD 220년부터 수나라가 남북조를 재통일한 589년까지, 약 370년 정도의 혼란기를 이른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북조에서 5호 16국을 통일한 나라는 북위(439)이다. 북위는 선비족인데, 효문제는 화북지방의 한족을 다스리기 위해 한화정책을 채택했다. 한족을 호족의 문화로 흡수한 것이 아니라, 호족을 한족의 문화에 흡수시킨 것이다. 호족과 한족을 융합하려는 효문제의 노력은 어느 정도 효과도 있었지만, 내부의 갈등을 낳기도 했다.
남조에서는 동진 시대부터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었다. 남하한 귀족들은 유랑민과 빈민을 모아 농토를 개간하여 거대한 장원을 소유하고 새로운 귀족 사회를 이루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북조에서는 불교가 발전했다. 한족의 우월감에 맞서 호족은 평등의식을 강조하는 불교를 받아들였다. 남조에서는 도교가 융성했다. 노장사상에 전통신앙과 신선사상을 결합한 도교는 혼란기 중국의 의지할 데 없던 민중 속을 파고들었다.
왕희지, 도연명, 죽림칠현 등이 이 시대의 귀족문화를 이끌었다. 귀족들은 현실 정치를 외면한 채 철학적 논의를 일삼으며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였다.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를 대표하는 네 가지 사상이 있다. 그 중 법가는 진나라의 사상적 기반이, 유가는 한나라의 통치 이념이 되었다. 도가는 위진남북조 시대에 와서 귀족들과 민중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그런데 차별 없는 사랑과 평등을 주창하는 묵가의 시대는 과연 올 수 있을까?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581년 수나라를 세운 양견이 589년 마침내 남북조를 통일했다. 농경민인 한족과 유목민인 호족이 하나의 나라를 이룬 호․ 한 일체의 세계가 마련된 것이다.
수나라는 대운하 사업과 고구려 정벌에 무리하게 국력을 쏟은 나머지 건국 후 40년도 못가 망하고 말았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짧은 치세였으나 수나라는 이후 동아시아에 큰 영향을 끼치는 율령체제를 마련하였다. 민중들에게 토지를 균등하게 나누어 주는 균전제(북위에서 처음 실시)를 근간으로 하여, 조용조의 세법과 부병제라는 군사제도를 확립하고, 과거제를 실시하였다. 수의 율령체제는 당나라로 계승되어 발전하였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2. 말 달리는 한반도, 일어서는 일본
3. 백강에서 겨루는 동아시아 삼국
2절과 3절은 우리역사의 삼국시대를 다루고 있다. 한국사에서 자세히 공부했으므로 이전에 간략히 정리한 글을 링크하고, 여기서는 생략한다.
http://blog.aladin.co.kr/753199155/7916096
다만 한국사에 등장한 위진남북조 시대의 몇몇 나라들에 대해서 잠깐 살펴보겠다. 한국사 공부할 때 열심히 외웠던 나라들을 여기서 보니 새삼 반갑다. ^^ 연대별로 들여다보면 쉽게 연결이 된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170>
위나라는 3세기 동천왕 때 고구려를 침략했다.
고구려와 백제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4세기인데, 고구려에는 소수림왕 때 전진의 순도가, 백제에는 침류왕 때 동진의 마라난타가 전해주었다. 전진은 5호16국 시대에 저족이 세운 나라이고, 강남의 동진 역시 5호16국과 경쟁하던 동시대의 나라이다. 고구려는 북조의 호족이, 백제는 남조의 한족이 불교를 전해준 것이다.
북위가 활약하던 5세기는 고구려의 전성기이기도 하다. 당시 동북아시아는 고구려를 비롯한 북위와 유연 그리고 남조가 4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6세기 전반의 양나라는 백제와 활발히 교류하였다. 무령왕릉은 양나라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이고, 성왕 때는 백제의 사신이 양나라의 그림에 등장한다. 양직공도 속의 백제 사신은 기품이 있어 보인다.
이 시기 한반도가 삼국시대로 나뉘어 오랫동안 경쟁할 수 있었던 것도 중국이 혼란기였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당장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마자 고구려를 침공했고, 곧이어 나당연합군에 의해 고구려와 백제가 망한 것을 보아도, 안심하고 우리민족끼리 경쟁할 수 있었던 배경은 중국이 한반도에 눈을 돌릴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4. 비단길에 실려 온 당나라의 봄바람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당나라는 안으로 제도를 정비하고 밖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세계 제국을 건설 하였다. 당나라의 제도와 문물은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에 퍼져 나가, 당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문화권이 형성되었다. 신라는 물론 발해와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정치 체제에도 오랜 기간 영향을 미쳤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618년에 건국한 당나라는 2대 태종과 6대 현종 시기의 전성기를 거쳐 현종 말기부터 쇠퇴하였다. 안사의 난과 황소의 난 등 반란에 시달리다 907년 주전충의 난으로 멸망하였다. 이때부터 조광윤이 송나라를 세워 통일한 979년까지 70여년은 절도사들이 난립한 5대10국 시대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당태종 시기는 정관의 치로 불리며, 정치적 황금기를 이루었다. 영토를 확장하고 율령체계를 정비하였다. 아버지 당고조를 도와 건국한 과정이나 이후 황제에 오르는 과정이 조선의 태종 이방원과 비슷하다. 우리역사에도 고구려 정벌을 왔다가 안시성에서 패퇴하여 물러간 황제로 기록되어 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자 황제라는 측천무후는 태종의 후궁으로 들어왔다가 태종의 아들인 고종의 황후가 되었다. 고종대신 실권을 장악한 것도 모자라 아들들을 연이어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측천무후가 실권을 쥐고 있던 시기, 당나라는 신라와 동맹을 맺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영토를 확장하였다.
현종의 통치 시기는 둘로 뚜렷이 나누어진다. 개원의 치로 불리며 문화적 황금기를 이룬 전반기와 양귀비를 만나 몰락해 가던 후반기이다. 후반기에는 이슬람의 아바스 왕조와의 탈라스 전투에서 패해 비단길을 잃었다. 연이어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을 겪으며 현종뿐만 아니라 당나라도 급격히 쇠퇴했다. 8년에 걸친 안사의 난은 얼마나 재앙적이었던지 당나라 인구가 거의 1/4로 줄어 들었다.
비단길을 잃은 당나라는 동서무역을 위해 바닷길을 개척했다. 이로써 초원길, 비단길, 바닷길이 모두 열렸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한나라가 고대제국을 완성하여 중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확립하였다면, 당나라는 세계적 제국을 건설하여 동아시아라는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특히 중앙행정 체제는 중세뿐만 아니라 근세까지도 여러 나라의 통치체제에 바탕이 되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중앙 행정체제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토지제도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토지 문제가 대두되고 이에 따른 세금이 국가의 중심 이슈로 떠오르게 되면, 왕조가 무너지거나 뿌리부터 흔들렸다.
당나라의 토지제도는 ‘균전제’ 이다. 국가가 일정 기준에 따라 농민에게 토지를 균등하게 지급하면, 농민은 이에 대한 대가로 국가에 세금과 역을 제공한다. 균전제는 당나라에서 처음 시행된 것은 아니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북위가 처음 도입했고, 수나라가 이를 이어받아 제도화한 것을 당나라가 계승하여 확립한 것이다. 이전 한나라 때는 한전제를 실시하여 토지 소유 상한선을 두었지만, 실패하고 대농장이 발달했다. 균전제 역시 당이 쇠퇴함에 따라 장원제로 가는 수순을 밟게 된다.
국가의 기틀은 귀족이나 특권층이 아니라 民, 일반 백성이다. 민중의 기반이 튼실해야 세금을 통해 국가재정을 확보하고, 징병으로 국방을 튼튼히 할 수 있다. 그런데 동서를 막론하고 계급 사회에서는 점차 토지가 특권층에게 집중되고, 살기가 힘들어진 민중은 노비로 전락한다. 노비가 되면 국가에 대한 모든 의무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특권층에게 토지가 집중되어 민중이 줄어들고 노비가 늘어나면 국력 또한 약화된다. 멸망으로 가는 수순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사회도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재벌이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도, 빈부격차가 극심하여 1%에게 부가 집중되면 국가의 재정은 악화된다. 사회복지 제도인 의료보험, 국민연금 등도 덩달아 약화되어, 사회문제는 더욱 심각하게 된다. 소위 trickle down이라는 논리로 재벌로의 부의 집중을 옹호하는 것은 이론의 유희에 불과하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당나라는 안사의 난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 균전제를 바탕으로 한 조용조와 부병제는 안사의 난 이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토지제도는 특권층이 대토지를 소유함에 따라 장원제로 바뀌었다. 국가가 더 이상 농민에게 나누어줄 토지가 없어지게 되자, 세금제도와 군역제도도 바뀔 수밖에 없었다. 세금은 양세법으로, 군역은 모병제로 바뀌었다. 경제적 평등 사회가 차등 사회로, 균등 과세가 차등 과세로 변화했다.
현종 후기부터 절도사를 중심으로 일어난 각종 반란에 의해 시달리다 당나라가 멸망했다고 하지만, 그에 더하여 혹은 그로 인하여 토지제도의 근간이 무너지고 민생이 극심하게 악화된 것이 또 다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188>
당나라의 수도 장안(시안)은 ‘거대한 용광로’라고 불릴 만큼 국제적인 도시였다. 각국의 사신은 물론 유학생과 유학승, 화가와 음악가, 종교적 망명자들까지 북적거리며 화려하고 국제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주변 국가들은 발달한 당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다투어 받아들였다. 율령체제는 물론 유교와 불교, 한자를 수용하였고, 도읍을 만드는데 장안의 형태를 본떴다. 그리하여 동아시아는 점차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당나라의 천재 시인인 이백과 두보도 당 현종 시기에 활약한 인물이다. 이백이 자유분방하고 심미적이라면 두보는 사회비판적이었다.

<수능특강 이다지의 세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