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과 전체주의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 국민과 모든 물자를 동원한 ‘국가의 등장’과 ‘국가에 의한 총력전’입니다. 부르주아 시대의 자유주의 이론에 따르면, 국가는 허구이고 개인은 실체이므로 각자 열심히 살면 사회는 알아서 돌아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제1차 세계대전과 함께 끝났습니다. 다시 말해서 개인주의, 자유주의에 바탕을 둔 19세기 부르주아 시대가 막을 내렸습니다. p439 <역사고전강의>”

 

홉스의 사회계약론, 로크의 통치론에 바탕을 둔 근대 자유주의 국가는 경찰국가라 할 수 있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개인의 생명과 재산 즉 사적 소유권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과 함께 국가의 역할이 급부상했다. 국가의 가치는 국민 개개인의 총합 보다 더 크며, 이제 국민이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해야 하는 시대가 오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의 사이, 그 전간기戰間는 국가주의, 전체주의의 시대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이탈리아의 파시즘이나 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군국주의는 모두 경제적 위기와 관련이 있다. 19세기말부터 불황과 호황을 거듭하던 자본주의 경제는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파국을 겪고도 여전히 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베르사유 체제는 미봉책에 불과 했으므로, 제2차 세계대전은 이미 예견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1929년 10월 24일 아침, 뉴욕 월스트리트 발 세계 대공황이 일어났다. 세계 경제는 순식간에 마비되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 즉 식민지를 많이 가지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라틴아메리카를 경제적으로 착취하고 있던 미국은 각각 자국과 식민지를 묶어 블록을 형성했다. 대공황을 타개하기 위해 식민지에 자국 상품을 독점적으로 팔아야 했기 때문이다.

 

대공황의 원인은 단순했다. 대량 생산으로 인해 공급이 수요를 초과했던 것이다. 팔리지 않은 상품은 재고가 되었고, 재고가 넘치자 더 이상 생산이 필요 없게 된 기업은 노동자를 해고할 수밖에 없었고, 구매력을 상실한 실직자가 넘쳐 나자 생산은 더욱 더 위축되었다. 악순환이었다. 소위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자유방임주의 경제의 파산이었다. 이제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공황은 자본주의 역사에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겼다. 이 상처와 함께 자유방임주의 원칙에 대한 거부감이 널리 퍼지고, 자본주의를 개혁하려는 진지한 시도가 고개를 들었다. p83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뉴딜 정책을 실시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사회주의자라는 공격에 시달렸지만 수정주의 경제학자 케인즈의 이론을 적극 도입하여 수정 자본주의를 시도하였다. 국가가 대규모 공공사업을 벌여 일자리를 만들고, 노동자를 보호하고 최저 임금제도를 도입하였다.

 

자본주의는 노동자를 쥐어짜서 이윤을 많이 남기기만 하면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시장경제의 핵심은 순환이고, 이 순환의 중요 고리는 소비자이다. 구매력이 있는 소비자가 없다면 상품은 쓰레기에 불과하다. 그런데 소비자의 구매력은 곧 노동자의 임금에서 비롯된다. 적정한 수준의 임금이 상품의 구매력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또한 “한 사람이 하는 지출은 곧 다른 사람의 소득” 이라는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저축만 하면 경제는 급격히 위축될 것이다. ‘찌그러진 냄비’는 버려야하고, 무조건 가격을 깎을 것이 아니라 적정한 수준의 가격을 존중하는 것이 결국 나의 일자리와 임금을 보장할 수 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문제는 개입하려 해도 별 뾰족한 방법이 없는 국가들이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했거나 별 소득을 얻지 못한 국가들에게 가장 손쉬운 선택은 전쟁이었다.

 

전쟁, 즉 침략의 분위기는 무르익어 있었다. 경제공황이 발생하기 전에 유럽에는 이미 파시즘이 등장했다. 이탈리아는 1차 세계대전의 삼국협상 측 일원이었지만,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얻은 것이 없었다. 전쟁으로 막대한 군비를 지출했지만 식민지를 얻지 못한 이탈리아의 경제는 악화되었고 국민들의 불만이 팽배했다. 무솔리니는 이런 군중 심리를 이용하여 ‘국가 파시스트당’을 조직하였다. 1922년 무솔리니와 국가 파시스트당은 로마로 진군하였다. 검은 셔츠단을 앞세운 이 쿠데타로 무솔리니는 군부, 자본가, 그리고 우익의 지지를 등에 업고 총리가 되었다.

 

독일의 나치당과 일본의 군국주의가 집권한 것은 대공황 이후였다. ‘민족 사회주의 독일 노동당’이라는 뜻의 나치는 사회주의와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극단적인 반사회주의, 반노동자 정당이었다. 나치즘은 파시즘에 인종주의를 결합했다고 할 수 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193>

 

 

대공황은 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허덕이던 독일 경제를 붕괴시켰다. 실업자가 증가할수록 나치에 대한 지지율은 상승했다. 독일인들은 아무런 성찰 없이 이 어려운 상황이 누군가에 의해 단숨에 해결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대중은 상황이 어려울수록 포퓰리즘에 쉽게 빠지는 경향이 있다. 문제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해결은 언제나 어렵고, 누군가에게 문제의 책임을 돌리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사회가 불안하고 경제가 악화될수록 일베나 왕따 등이 극성을 부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포퓰리즘의 전략은 적을 만들어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나치즘에서 적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이 유대인이다. 나치는 독일인이 당하고 있는 모든 고통이 유대인 때문이라고 선동했다. 고통의 원인이 대공황에 있고, 대공황은 자유방임적 시장경제의 결과라는 사실을 외면한 채 엉뚱한 적을 향한 분노를 유도했다.

 

「포퓰리즘은 궁극적으로 항상 평범한 인민의 좌절과 격분에 의해, '나는 뭐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몰라. 내가 아는 것은 단지 내가 최선을 다했다는 거야. 이대로 계속될 수는 없어. 멈춰야 해!'에 의해 지속된다. 참을 수 없는 분노, 이해에 대한 거절, 복잡성에 대한 격분, 모든 혼란의 책임을 진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확신에 의해 포퓰리즘은 지속된다. 현상적 장면 뒤에서 그것을 설명해 줄 어떤 행역자가 요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기에, 이 앎에 대한 거절에, 포퓰리즘의 고유하게 물신주의적인 차원이 있다. 다시 말해서, 순수하게 형식적인 차원에서 물신은 전이의 제스처를 함축한다. 그것은 표준적인 전이 공식의 역전으로 기능한다. 물신이 구현하는 것은 정확히 앎에 대한 부인, 내가 아는 것에 대한 주관적 인정의 거절이다. 거기에 물신과 증상의 차이가 있다. 증상은 억압된 지식, 주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주체에 대한 진실을 구현한다. p423~4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앎에 대한 거절’은 ‘사유의 부재’ 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을 쓴 한나 아렌트는 수많은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낸 아이히만이 악마가 아니라 평범한, 너무도 평범한 한 사람의 관료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아렌트가 파악한 이 ‘평범한 악’의 원인은 사유의 부재였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을 학살하라는 명령에 대해 스스로 사유하기를 포기하고 다만 효율적으로 업무를 집행했을 뿐이다. 파시즘뿐 아니라 모든 포퓰리즘의 토양은 사유의 부재인 것이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적 성격을 띤 것이 에스파냐 내전이었다. 1936년 에스파냐에서는 선거를 통해 반파시즘 연합인 인민 전선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런데 파시스트 프랑코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에스파냐는 파시즘과 반파시즘의 대결장이 되었다. 프랑코를 지원한 것은 독일과 이탈리아였다. 인민전선정부를 위해 달려 온 것은 세계 각지의 50여개 나라에서 스스로 무기를 들고 달려온 총 4만여 명의 ‘국제 여단’ 이었다. 내전은 4년 간 지속되었고 프랑코의 파시즘 세력이 승리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에스파냐의 게르니카는 독일군 폭격기의 대규모 공습으로 엄청난 수의 민간인이 참혹하게 죽은 마을이다. 피카소는 게르니카의 참상을 그림으로 그려 에스파냐 내전의 실상을 세계에 널리 알렸다. 국제 여단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헤밍웨이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썼다.

 

 

 

 

 

제2차 세계대전

 

 

1938년부터 독일은 노골적인 침략정책을 펼쳐 나갔다.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주데텐란트)을 요구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 요구에 굴복하여 뮌헨 협정을 체결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나치 독일이 소련을 봉쇄하는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이렇게 세력을 확장하던 나치는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고 곧바로 폴란드를 점령해 버렸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깊은 원인은 이른바 ‘독일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긍정적인 의미에서건 부정적인 의미에서건 21세기인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문제입니다. 유럽 문제는 곧 독일의 문제이며, 따라서 우리가 신문에서 접하는 유럽의 여러 문제들에서는 항상 독일이 핵심적인 행위자입니다. 독일은 강대국이 될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유럽의 한가운데 위치하고, 유럽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인구는 6천5백만 명, 프랑스는 4천만 명이었습니다. 또한 석탄과 철 같은 경제적 자원이 풍부하고 과학기술이 발전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이 부과한 여러 제약을 이겨내고 다시 강대국으로 올라 설 수 있는 여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독일을 견제했던 유럽의 세력균형이 무너진 것도 ‘독일 문제’를 키우는데 한몫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독일 동부의 러시아 제국과 남부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했으며, 서부의 프랑스는 국력이 완전히 쇠퇴했고 영국 역시 세계를 호령하던 강대국의 지위에서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중간 원인’은 독일 문제와 관련한 ‘배상 문제’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은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독일이 점령했던 땅을 회수하고 독일 군대의 무장을 해제했으며, 독일에 전쟁 책임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함께 요구한 배상 문제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습니다.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 모든 경제적 어려움을 배상금 탓으로 돌리는 분위기가 팽배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배상 금액은 독일의 반발을 우려해서 매년 하향 조정되었고 독일 경제에 미친 영향도 그리 크지 않았지만 -당시 독일 여론과는 달리 1923년 물가 폭등, 1929년 대공황은 배상 문제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습니다. - 이러한 분위기는 독일인들에게 베르사유 조약의 족쇄에서 벗어나려는 강한 열망을 심어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촉발 원인’은 ‘단치히’ 문제입니다. 오늘날 폴란드 그단스크의 옛 지명인 단치히 자유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중립을 선포하고 자유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히틀러는 독일인이 많이 사는 이 도시를 돌려받는다는 구실로 제2차 대전 발발일인 1939년 9월 1일에 폴란드를 침공했습니다. 당시 독일과 폴란드가 팽팽한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 이 문제를 놓고 영국, 프랑스와 협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 상황이어서 한쪽이 발을 내딛으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히틀러가 합리적인 사람이었다면 도저히 전쟁을 시작하지 않을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단치히 침공을 밀어 붙였고 허를 찔린 영국과 프랑스는 이틀 뒤인 9월 3일 독일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p461~2 <역사 고전 강의> 」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나치 독일은 단숨에 프랑스까지 점령하였고 영국의 하늘은 폭격을 위하여 출격한 독일의 전투기로 뒤덮였다. 유럽은 이제 파시즘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1941년 여름, 독일이 독•소 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략하였다. 독일의 기습으로 소련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파시즘에 맞서 손을 잡게 되었다. 소련은 결사적으로 나치에 맞서 모스크바를 방어하고 1942에서 1943년에 걸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EBSi 이다지의 세계사>

 

 

제2차 세계대전은 크게 유럽과 태평양 두 곳에서 발생했다. ‘태평양 전쟁’이라고 일컬어지는 전쟁은 일본이 촉발한 것이었다. 일본도 이탈리아와 독일과 마찬가지로 대공황의 위기를 침략전쟁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에 이은 1937년 중일전쟁으로 중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하였다. 1941년 일본은 하와이의 진주만을 습격함으로써 미국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끌어들였다. 명실 공히 이제 전쟁은 세계대전이 된 것이다. 미국은 1942년 미드웨이 해전을 계기로 승기를 잡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이탈리아와 일본은 흔히 추축국이라고 불린다. 세 나라는 방공동맹을 맺고 파시즘 국가 간의 협력 관계를 과시하였다. 이 중 제일 먼저 항복한 것은 이탈리아였다. 이탈리아 파시스트 대의회가 무솔리니를 불신임하였다. 이탈리아는 1943년 국가 파시스트당을 해산하고 연합국과 휴전조약을 체결하였다. 무솔리니는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나치에 의해 구출되었지만, 결국 1945년에 다시 체포되어 총살당하였다.

 

연합군은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파리를 해방시켰다. 1945년 4월에는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점령하였다. 히틀러는 자살하고 독일은 무조건 항복하였다.

 

일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맞고 1945년 8월에 무조건 항복하였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제2차 세계대전의 희생자는 5,000만 명에 이르렀고 그 중 민간인 사망자가 군인 희생자의 2배가 넘었다. 세계 인구의 20%가 전쟁에 동원되었다. 연거푸 끔찍한 전쟁을 치른 인류는 평화를 열망하면서 국제연합을 탄생시켰다. 전범 처리를 위해 국제 군사 재판소도 설치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전쟁의 위협이 다가왔다. 파시즘에 대항해 손을 잡았던 자본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가 노골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이 곧바로 냉전의 신호탄이 된 것이다.

 

 

 

 

 

팔레스타인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분쟁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일단 분명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르며 영국이 이중계약을 했다는 것이다. 아랍인들에게는 아랍의 국가를,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의 국가를 각각 약속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팔레스타인 땅은 영국의 위임 통치 아래 놓였지만, 영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1947년 팔레인스타인 문제를 UN에 위임했다. (자세한 내용은 이전에 정리한 글이 있어 링크를 걸어 둔다.)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의 팔레스타인인 영토는 점점 줄어들어 현재 팔레스타인인들은 자기들 땅에서 이스라엘의 포로들처럼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겨우 한 뼘 남은 땅마저 이스라엘의 것으로 강제 수용하기 위해 국제적 비난을 무릅쓰고 있다. 팔레스타인의 현대사는 왜 이렇게 형극의 길을 걷게 된 걸까? 『팔레스타인 현대사』를 정리해 놓은 글이 있어 내용은 링크로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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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현대’를 1차 세계 대전부터 보는지 1,2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 보는지 잘 모르겠지만, 전례 없던 양차 대전이 세계를 뿌리부터 뒤흔들어 놓은 것은 확실하다. 규모의 면에서는 2차 세계 대전이 더 컸지만, 충격과 영향의 면에서 1차 세계 대전이야말로 ‘Great War'로 불리는 대 사건이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국가 간의 식민지 쟁탈전이 불러온 필연적 파국이었다. 그 중심에는 신생 제국 독일이 있었다. 1871년 독일 제국을 통일한 비스마르크는 세력 균형 정책을 펼쳤다.

 

“세력균형 정책을 펼친 비스마르크는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과 이른바 삼제동맹을 맺어 독일 서쪽에 있는 영국과 프랑스를 견제했습니다. 독일은 유럽 한가운데에 있어서 전쟁이 나면 전선이 동부와 서부로 나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서부와 동부 어느 한 쪽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야 했던 것입니다. 세력균형 정책 이전 시기를 포함하여 1815년에서 1870년까지는 전반적으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느슨한 다극 체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890년 비스마르크가 실각하자 독일은 러시아와 동맹을 갱신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어쩌다보니 재보장 조약을 맺지 않았고 이것은 독일이 러시아에 적대적이라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독일이 ‘엉뚱한 신호’를 보낸 결과, 러시아는 영국, 프랑스와 연합했고(삼국협상),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었습니다.(삼국동맹) 느슨한 다극 체제가 1890~1914년 사이에 양극 체제로 바뀌면서 전쟁의 긴장이 높아지게 된 것입니다. p437 <역사 고전 강의>”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독일과 영국은 각각 3B정책과 3C정책으로 식민지 확장을 위한 각축을 벌이고 있었고, 독일과 프랑스는 모로코에서 두 차례나 부딪히며 일촉즉발의 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EBSi 이다지의 세계사>>

 

더 큰 문제는 발칸반도였다. 오스만제국이 쇠퇴하면서 발칸반도 곳곳에서 민족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세르비아인들은 발칸 반도에 흩어져 있던 동족들을 모아 하나의 큰 나라를 이루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를 표방하며 세르비아를 지원하였다. 오스트리아는 1908년 오스만제국의 영토였던 보스니아를 합병하였다. 세르비아인들은 이에 크게 반발하였고, 범게르만주의를 지향하는 오스트리아를 독일이 전적으로 지원하였다. 1912년과 1913년 두 차례에 걸쳐 발칸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다양한 민족들의 오스만으로부터의 독립과 이를 둘러싼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의 대립 등 워낙 복잡한 양상이므로 자세히 알기는 어렵고, 이 전쟁 과정에서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대립은 더욱 첨예해져 갔다는 것만 알아두자.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161>

 

 

세계 제1차 대전의 총성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울렸다.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부부를 세르비아 청년이 쏘아 죽였다. 발칸의 화약고가 '콰쾅' 터졌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자,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지원하고 나섰다. 곧 동맹관계에 따라 전선이 형성되었다. 유럽 전체가 전쟁터가 되었다.

 

크게 중요하지는 않지만 여기서 헷갈리지 말 것은, 이탈리아가 줄을 바꿔 섰다는 점이다. 1882년 삼국동맹에 가입했던 이탈리아는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삼국협상에 가담했다. 일본도 삼국협상 측에 붙어 승전국으로서 열매를 따냈다. 우리로서는 가슴 아프지만... 여하튼 이탈리아가 빠져나간 자리를 운 나쁘게도 오스만이 메웠다. 오스만은 1차 세계 대전에 패배하여 영토 대부분을 잃고 가까스로 터키 공화국으로 존속할 수 있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차 세계 대전은 인류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끔찍한 전쟁이었다. 기관총, 대포, 전차 같은 현대식 무기는 무시무시한 살상력을 과시했다. 참호전이라는 무제한 버티기 작전은 전선을 고정시키고 전쟁을 장기전으로 빠져들게 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끔찍한 전쟁에서 먼저 빠져 나간 것은 러시아였다. 1917년 러시아는 ‘빵과 평화’를 외치는 혁명에 휩싸이게 되었다. 대신 전쟁에 참여한 것은 미국이었다.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자국민을 잃은 미국이 1917년 전격적으로 참전을 선언했다. 미국의 참전으로 전황은 급격히 기울었다.

 

오스트리아와 오스만이 먼저 항복하였다. 독일도 혁명에 의해 무너졌다. 1918년 킬 군항에서 독일 해군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이에 민중들이 가세하여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도망가고 독일은 새로이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독일 공화국은 1918년 11월 무조건 항복을 발표하였다. 제 1차 세계 대전이 끝났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1919년 1월 파리 강화 회의가 열렸다. 이런 끔찍한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1차 세계 대전 자체가 제국주의 국가들의 탐욕스러운 식민지 확장에 그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선악의 구도로 발생한 전쟁이, 물론 그런 것이 있다면, 아니었다. 연합국의 승리가 사필귀정도 정의의 승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은 없었다.  

 

파리 강화 회의 이후 승전국들과 독일 사이에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다. 파리 강화 회의는 승전국들의 회담이었고, 승전국들은 패전한 각 국가들과 개별적인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독일과 체결한 베르사유 조약이다.  베르사유 조약은 한마디로 보복조약이라고 할 수 있다. 승전국은 식민지 문제를 외면하고 또다시 세계 분할에 열을 올렸다. 미국의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도 패전국 식민지를 처리하는 원칙으로나 이용되었다. 승전국의 식민지들은 한껏 고무되었던 독립에의 꿈을 잃고, 제국주의의 맨얼굴에 다시 한 번 이를 갈아야 했다. 여기 저기 남발한, 전쟁을 도우면 독립을 시켜주겠다던 영국의 약속도 거짓이었다.

 

전쟁의 모든 책임은 독일이 져야 했고, 막대한 배상금도 독일이 물어야 했다. 독일인의 불만이 커져가지 않을 수 없었고, 이것은 더 참혹한 전쟁을 예고하고 있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베르사유조약 후의 국제 질서를 베르사유 체제라고 한다. 싸우지 말고 착하게(?) 살자 라는 취지로 평화조약과 군비축소를 결의하기도 했다. 국제적 분쟁을 평화적으로 조절하기 위한 국제연맹도 창설되었다. 그러나 실권이 없어 별 기능을 하지 못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172>

 

 

어쨌거나 전쟁이란 필연적으로 사회변혁을 가져온다. 1차 세계 대전 후 유럽의 민주주의도 한 단계 더 발전하였다. 독일과 오스만, 오스트리아에서 제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패전국인 오스만과 오스트리아의 식민지들도 독립하여 공화정을 수립하였다. 이제 공화정은 유럽에서 보편적인 정치 체제가 되었다.

 

여성의 참정권도 확대되었다. 총력전으로 전개된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커다란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사회적 발언권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시민혁명의 대명사 프랑스도 1944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21세 이상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혁명은 참으로 끝나지 않는 길고도 긴 과정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전쟁이 끝나고도 독립되지 못한 나라들은 독립운동을 다시 이어나갔다. 인도는 영국의 약속을 믿고 참전해서 열심히 싸웠으나 영국은 독립은커녕 탄압을 강화하였다. 인도국민회의를 이끌던 간디는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통해 자치를 획득하려 하였고, 간디의 뒤를 이은 네루는 자치가 아니라 완전한 독립을 위해 투쟁하였다.

 

베트남 역시 프랑스로부터부터 독립하기 위해 다시 싸워야 했다. 호치민은 1930년 베트남 공산당을 결성하고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

 

이슬람교가 우세한 인도네시아에서는 이슬람교 중심의 독립단체들이 네덜란드에 맞서 해방 투쟁을 벌여 나갔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중국에서는 베이징 대학생을 중심으로 5.4 운동이 일어났다. 삼국협상 측에 줄을 서서 승전국이 된 일본은 독일이 중국에 가졌던 이권을 포함한 21개조 요구 항을 국제적으로 승인받으려고 하였다. 만주군벌이 일본과 야합하여 이를 받아들이려 하자 대대적인 반일-반군벌 운동이 일어났다. 5.4운동에 도시 노동자와 상인뿐 아니라 농민들까지 참여하자 베이징의 군벌 정부는 베르사유 조약에 조인하지 못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177>

 

 

노혁명가 쑨원은 5.4운동에 고무되어 인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국민당을 조직했다. 한편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지식인들은 공산당을 조직하였다. 베이징을 중심으로 하는 북쪽에는 군벌들이, 난징 중심의 남쪽에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군벌에 반대하여 투쟁을 전개하였다. 1924년 국민당과 공산당은 제1차 국공합작을 하고 함께 군벌을 몰아내기 위해 싸웠다.

 

북벌이 마무리될 즈음 국민당을 이끌고 있던 장제스는 공산당을 공격하였다. 국공 합작은 깨어지고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고난의 대장정에 돌입하였다.

 

숙명의 라이벌, 국민당과 공산당은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2차 국공합작을 하고 일본에 투쟁하였다. 일본이 패망하자 그 즉시 국공내전에 돌입했지만.

 

 

 

 

 

 

러시아 혁명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러시아는 유럽의 강대국으로 식민지 확장을 위해 여기저기 끼어들었으나, 속은 곪아 들고 있었다. 시민혁명(혹은 시민) 없이 근대를 시작했고,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받아 지식인 중심으로 전개된 자유주의 운동들은 실패했다.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를 해방하였으나 나로드니키에 의해 암살당했고, 이후 차르들은 자유주의 운동을 탄압하면서 전제정치를 강화했다. 나로드니키의 브나로드 운동 또한 농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실패했다. 러시아는 위로부터의 개혁도, 아래로부터의 개혁도 이루지 못하고 20세기에 진입하고 있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917년 11월, 레닌이 주도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기까지 러시아는 몇 단계의 혁명 과정을 거쳤다. 그 시작은 1905년 ‘피의 일요일’ 이었다.

 

1905년 러시아는 러•일 전쟁 중이었다. 전쟁은 패색이 짙고 경제는 어려웠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들은 차르에게 심각한 경제상황을 호소하려고 겨울궁전을 향해 행진했으나 그들에게 날아든 것은 차르의 무자비한 총탄이었다. 이 피의 일요일 사건을 기화로 1905년의 혁명이 일어났다. 뚜렷한 지도부도 일치된 목적도 없이 혁명은 러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니콜라이 2세는 두마(일종의 의회) 등 개혁을 약속했지만 혁명이 어느 정도 수그러들자 차르는 절대 권력을 내두르며 혁명을 탄압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혁명 열기가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다고 판단한 니콜라이 2세는 서둘러 전쟁에 뛰어들었다. 국내의 문제를 외부와의 전쟁으로 돌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패전이 거듭되자 노동자, 농민 그리고 병사들조차 전쟁에 반대하며 ‘빵과 평화, 토지와 자유’를 외치며 봉기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1917년 3월(러시아 구력으로는 2월) 러시아 민중들이 왕궁으로 몰려들었고, 니콜라이 2세가 쫓겨나며 로마노프 왕조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자유주의 시민 즉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하는 (카렌스키)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3월 혁명의 기층 세력은 노동자, 농민, 병사들을 대표하는 소비에트였다. 성격상 소비에트와 임시정부는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임시정부는 민중들의 염원과는 달리 토지 문제에 미온적이었으며 무엇보다 전쟁을 지속하기로 결정했다. 임시정부의 부르주아들은 제국주의 전쟁인 1차 세계 대전에 승리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을까?

 

독일의 은밀한 지원 아래 러시아로 돌아온 레닌은 임시정부를 비난하고 나섰다. 레닌은 권력은 소비에트가 가져야하며 전쟁은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닌의 지도 아래 1917년 11월(러시아 구력으로는 10월),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다.

 

세계최초의 노동자•농민의 정부인 소비에트 정부,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하였다. 소비에트 정부는 즉각 전쟁 중단을 선언하고 독일 등 삼국동맹 측과 평화조약을 맺었다. 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소비에트 정부는 러시아의 많은 땅을 삼국동맹 측에 내어주었지만, 이로 인해 러시아 내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때 내준 지역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대부분 다시 소련에 병합된다.

 

혁명의 불꽃은 한순간에 붙을 수 있지만 그 불길을 지켜 끝내 혁명을 완수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반혁명 세력이 결집하여 혁명정부는 곧바로 내전에 돌입해야만 했다. 적군과 백군이 여기에서 나온 용어인데, 적군은 혁명군을, 백군은 혁명에 반대하는 귀족과 지주와 자본가들로 구성된 반혁명군을 말한다. 사회주의 혁명이 번지는 것을 두려워한 유럽의 열강들도 백군을 지원하였다. 러시아 내전 혹은 적백내전의 주요 전투는 11월 혁명직후인 1917년 11월부터 1920년 11월까지 지속되었다.

 

러시아 내전이 완전히 끝난 1922년 마침내 ‘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방(소련)’이 수립되었다.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에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자카프카지예 등 3개국이 가입하여 연방을 이루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레닌은 1919년 각 나라의 사회주의자들을 연결하는 코민테른을 건설하여 혁명의 세계화에도 나섰다. 식민지 해방 운동을 지원하겠다는 그의 약속은 세계 각 지역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25년 우리나라에도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은 조선 공산당이 결성되었고, 사회주의 사상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베트남, 중국, 인도네시아 등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레닌이 죽고 난 뒤 권력을 잡은 스탈린은 중공업 중심의 강력한 계획 경제를 실시하였다. 또한 반대파를 숙청하여 독재 체제 강화에도 힘썼다.

 

 

 

 

 

 

 

 

슬라보예 지젝의 『혁명이 다가온다. :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에서 러시아혁명의 발발 배경에 관해 조금 알아보았다. 가장 궁금한 것은 어떻게 마르크스의 이론과 정반대로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한 러시아에서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인데, 여기에 레닌의 판단과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레닌이 1917년 ‘4월 테제’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했을 때, 당 동지들의 대부분은 귀 기울이지 않았거나 혹은 그를 경멸했다. 그의 4월 테제를 정신병자의 착란증이라 비난한 사람도 있었고, 그의 아내는 레닌이 미친 것 같아 걱정이라는 말도 했다. 그렇다면 레닌은 어떻게 볼셰비키 혁명을 이루었을까?

 

1917년 2월 레닌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정치적 망명자로서 취리히에 처박혀 지냈다. 그는 러시아와 신뢰할 만한 접촉도 없이, 사건을 스위스 언론을 통해 주로 접할 뿐이었다. 그러나 10월에 그는 최초의 성공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2월에 레닌은 유일무이하고도 우발적인 상황의 결과에서 혁명의 가능성을 즉각 인식했고, 지금 이 순간을 놓친다면 혁명의 가능성은 아마도 수십 년 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았다. 위험을 무릅쓰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즉 혁명을 되풀이해야 한다고 고집스럽게 주장할 때 레닌은 외톨박이였고, 당의 대다수 중앙위원회 위원들에게 조롱당했다.

    그러나 아무리 레닌이라는 개인의 개입 없이는 불가능했더라도, 10월 혁명 전체의 역사를 방향성 없는 대중과 대결하면서 점차 자신의 비전을 제시한 고독한 천재의 이야기로 변형시켜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레닌의 주장이 당 관료들을 피해가는 대신 혁명적 미시정치학이라 불릴 만한 곳에서, 바로 풀뿌리 민주주의의 놀랄만한 확장과 러시아의 대도시마다 땅에서 솟아나듯 조직되어 모든 일을 자발적으로 수행하면서 ‘합법’ 정부의 권위를 부정하는 지역위원회의 호응으로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10월 혁명의 숨겨진 역사이고, 소수 그룹의 냉혹한 혁명가들이 쿠데타를 이루어낸 신화의 이면이다. p28~9“

 

 

레닌의 주장들 받아들인 것은 당 중앙위원회 즉 당 관료들이 아니라 각 지역의 소비에트와 민중들이었다. 왜? 부르주아들이 주도권을 쥔 임시정부가 민중의 요구를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혁명의 관건은 언제나 “morning after", 즉 그 다음날 아침이다. 광란의 열정에 도취된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오면 부스스한 얼굴과 메스꺼운 속, 더럽고 어지러운 난장판이 초췌하게 드러난다. 모든 것이 가능해 보이던 ‘순간으로서의 혁명’은 오히려 쉽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파괴 위에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는 작업은 더디고 힘들고 반동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역사에서 봉기는 수없이 일어나도 혁명은 그처럼 드문 까닭이 여기에 있다.

 

1917년의 2월 혁명도 마찬가지의 어려움에 봉착했다. 혁명의 열정은 민중들의 것이었지만 그 다음 날 아침 권력을 손에 넣은 것은 부르주아 임시 정부였다. 여기서 레닌은 혁명이 한 번 더 반복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전쟁 중단과 토지분배라는 요구를 즉각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것은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는 길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길은 아직 누구도 가보지 못한 길이었고, 마르크스도 러시아와 같은 봉건적 국가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역설적이게도 레닌은 마르크스를 배반함으로써 마르크스의 이론을 실천에 옮겼다. 혁명은 반복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레닌은 상황의 패러독스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차르 정권을 전복시킨 2월 혁명이 끝난 1917년 봄, 러시아는 전 유럽에서 가장 민주적인 국가였고 예측할 수 없는 규모의 대중 동원, 조직의 자유, 그리고 출판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자유는 오히려 상황을 불투명하고 전적으로 모호하게 만들어갔다. 만약 두 혁명 시기, 그리고 그 사이에 쓰인 레닌의 텍스트를 관통하는 공통적인 실마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다양한 정당들과 정치적 주체들 사이의 정치적 투쟁에 의한 ‘명시된’ 공식적인 정세를 현실적인 사회적 이해관계(즉각적인 평화, 토지분배, 그리고 물론 ‘소비에트에 모든 권력을’, 즉 기존의 국가기구들을 해체하고 이를 새로운 코뮌 같은 사회적 관리 형태로 대체하는 것)에서 떼어놓은 간극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간극은 열광 속에서의 자유의 상상적인 분출이자 ‘모든 것이 가능해 보이는’ 때 이루어지는 보편적인 연대의 마술과도 같은 ‘순간으로서의’ 혁명과, 이 열정적인 폭발이 사회 체계 내부에 흔적을 남길 경우에나 실행되는, 사회를 재구성하는 힘든 ‘작업으로서’의 혁명 사이에 존재한다.

   이 간극이야말로 -1789년과 1793년 사이 프랑스 혁명에서 간극이 반복되듯- 레닌의 유일무이한 개입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지점이다. 혁명적 유물론의 근본적 교훈은, 혁명이 자체의 기본적 본성 때문에 두 번에 걸쳐 발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p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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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중국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30여 년 간의 강건성세를 이루던 청나라는 아편전쟁과 함께 몰락하기 시작했다. 중국 근대를 알리는 신호탄은 영국 함대의 포성 소리였던 것이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차 아편전쟁부터 신해혁명까지, 청나라는 세계열강의 침략 아래, 아래로부터는 물론 위로부터도 끊임없이 개혁을 시도했지만, 보수 세력의 반발과 열강의 내정 간섭으로 모두 실패하고, 1912년 멸망하였다. 1616년 만주족의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운지 꼭 300년을 눈앞에 두고서이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영국과 청의 초기 무역은 일방적인 형태 즉 편무역이었다. 물자가 풍부한 청은 영국으로부터 사들일 것이 없었던 반면, 영국은 중국의 비단, 도자기 그리고 특히 차에 열광하고 있었다. 영국이 아메리카의 식민지로부터 착취한 막대한 양의 은은 청으로 흘러들어갔다.

 

광저우는 명나라 때 개방한 항구인데 청 역시 광저우 한 곳만 개방한 채 공행이라는 허가 상인에게만 무역의 권한을 주었다. 영국 등 서양열강은 공행무역에 커다란 불만을 품고 있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영국이 새롭게 찾은 해법은 아편이었다. 17~8세기 대서양 무역을 위해 고안한 삼각무역의 아시아판이라고나 할까. 새로운 삼각무역의 희생자는 청나라의 민중들이었다. 무수한 청나라 사람들이 아편쟁이가 된 대가로 영국은 은을 유출하지 않고도 차와 비단을 가져올 수 있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840년 1차 아편전쟁이 일어났다. 영국은 이 더러운 전쟁을 앞두고 의회에서 찬반 토론을 했다고 하지만, 웃기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제국주의적 침략에 언제 한번이라도 참다운 명분이 있었단 말인가. 아메리카는, 인도는 침략당할 만해서 당했다는 말인가. 여하튼 영국이 손쉽게 승리하고 1842년 난징조약이 맺어졌다. 이때 홍콩이 영국으로 넘어갔다.

 

1856년 2차 아편전쟁이 터졌다. 이번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손을 잡고 청의 수도 베이징까지 불바다를 만들었다. 1858년 텐진조약, 이어 1860년 베이징조약이 체결되었다. 청은 중재국인 러시아에 연해주를 떼어주고, 베이징에는 외국 공사관이 주재하게 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중국의 근대 부분은 학교에서 매우 상세하게 가르치는 것 같다. EBS 강의에는 조약 하나하나의 내용까지 들어있다. 강의 화면을 참고하면 될 것 같다.

 

 

우리나라의 근대사도 마찬가지지만 중국의 근대사도 흐름이 매우 중요하다. 물론 자세히 가르치니 그렇다. 1차 아편전쟁과 2차 아편전쟁 사이에는 태평천국 운동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태평천국 운동은 1851년에 시작해서 1864년에 끝나니, 2차 아편전쟁은 태평천국 운동의 와중에 시작되어 끝났다. 그런 이유로 아편전쟁이 끝난 후 외국군대가 태평천국 운동을 진압하기도 했다. 이때 지방의 한족들이 서양무기의 위력을 실감했고, 이것이 양무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태평천국 운동은 청의 지배에 가장 고통 받던 한족 농민들이 일으킨 봉기였다. 1차 아편전쟁의 결과 청이 지불해야 했던 막대한 배상금은 결국 농민들이 짊어져야 할 짐이었다. 크리스트교의 평등사상을 바탕으로 ‘멸만흥한’의 구호를 내세운 홍수전의 태평천국 운동에 한족 농민들이 열광했던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태평천국은 난징을 점령한 후 중국 영토의 절반을 차지한 채 14년간이나 청과 힘을 겨루었다.

 

태평천국 운동을 진압한 것은 청나라에서도 여전히 지배신분을 인정받고 있던 한족 신사 출신의 관료들이었다. 향용이라는 군대를 만들어 서양군대와 함께 태평천국을 진압했다. 이때 활약했던 리홍장 같은 인물이 급부상하여 양무운동을 이끌어 나가게 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양무운동은 한국사를 통해 우리나라의 근대화 모델이라고 배웠기에 매우 익숙하다. 양무운동의 중체서용과 조선의 동도서기는 같은 개념이다. 그러나 근본은 그대로 둔 채 겉모습만 바꾼다고 바뀌는 것이 아니다. 리홍장은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할 때 익히 보았던 서양 무기의 위력에 매료되어 기기국을 세우고 각종 무기 생산에 열을 올렸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청•프 전쟁, 청•일 전쟁의 패배가 그 결과를 말해주었다.

 

특히 청•일 전쟁은 비슷한 시기에 개화를 진행한 청과 일본의 근대화 성적을 판가름하는 전쟁이기도 했다. 청의 양무운동과 일본의 메이지 유신의 대결에서 외양뿐 아니라 정신까지 철저히 서양식 근대화를 추구한 일본이 승리하였다. 자그마한 일본에게 완패한 청을 보고 놀란 것은 서양 열강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제까지 잠자던 호랑이로 생각했던 청나라가 종이호랑이에 불과함을 알고 나자 거침없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청은 이제 제국주의 열강들의 반식민지가 되어 갔다.

 

물론 양무운동이 실패한 데에는 보수주의자들의 방해와 양무운동 세력 내의 분열이 커다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청•일 전쟁에 필요한 군자금을 빼돌리기도 하고, 전쟁에 협력하기를 거부하기도 했다.

 

 

양무운동의 실패로 청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캉유웨이 등이 황제를 설득하여 일본식 메이지유신을 본받은 변법자강운동을 이끌었다. 입헌군주제와 의회 설립 등을 기본으로 하는 ‘변법’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서태후 등 보수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광서제는 유폐되고, 변법자강 운동은 100일 만에 끝났다.

 

 

개혁의 실패와 거듭된 혼란 속에 제국주의 열강의 간섭은 더욱 심해지고, 민중들의 삶도 더욱 피폐해 졌다. 성난 민중들은 서양의 모든 것에 격렬한 증오를 드러냈다. 교회와 외국 공사관을 공격하고, 서양인들을 죽였다. 의화단 사건이다. 민중들은 청을 도와서라도 서양세력을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청멸양의 기치 아래 민중들이 몰려들었으나, 8개국 연합군이 이들을 물리치고 베이징을 점령하였다. 의화단 사건의 결과로 맺게 된 신축조약에서는 서양인들의 피해를 구실로 베이징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게 되었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주어야 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이제 청의 보수파들도 더 이상 개혁을 외면할 수 없었다. 광서신정은 서태후 등이 변법자강을 거의 그대로 가져와 청을 개혁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강력한 의지 없이 흉내만 내려 했던 광서신정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광서신정의 명목 아래 청 정부는 더욱 많은 세금을 수탈하려 하였다. 재정이 궁핍했던 청 정부는 민간 철도를 국유화하여 이를 담보로 외국에서 차관을 얻으려 하였다. 민간 철도는 중국 민중들이 외세의 침탈에서 벗어나려 건설한 것이었으므로, 차관을 대가로 철도 이권을 외국에 넘기는 것은 주권을 넘기는 것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민간 철도 국유화는 청나라 정부에 대한 민중들의 실낱같은 희망마저 없애버렸다. 민중들은 보로운동을 통해 정부에 대항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1911년 10월 10일, 우창에서 혁명의 불길이 솟았다. 혁명군은 쑨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선출하고, 난징에서 중화민국의 건국을 선언하였다. 이제 베이징의 청나라와 난징의 중화민국이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중국이 두 개의 나라로 쪼개질 위기였다. 청이 진압군으로 내려 보낸 위안스카이가 해결의 실마리가 되었다. 쑨원은 위안스카이를 설득하여 임시 대총통 자리를 대가로 연합하여 청나라를 멸망시켰다.

 

중국 분열의 위기는 막았지만 위안스카이는 새 시대의 새로운 지도자가 될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중국 역사의 배신의 아이콘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1916년 위안스카이는 공화정을 지키겠다던 약속을 저버리고 스스로 황제가 되려고 하였다. 위안스카이의 제제운동은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철회되었고, 그해 위안스카이가 죽음으로써 끝이 났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를 지지하던 군벌 세력들이 할거하게 되면서 중국은 다시 한 번 혼란기에 들어섰다. 북쪽은 군벌 세력들이 남쪽은 반 군벌 세력이 차지하였다. 특히 반 군벌 세력은 민족주의(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념으로 대립하면서 중국의 현대사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중국 현대사의 시작은 군벌을 몰아내기 위한 1차 국공합작, 일본을 물리치기 위한 2차 국공 합작, 그리고 마지막 국공 내전으로 정리할 수 있다. 최종 승리자는 공산당이었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현대사는 다음 2차 세계대전 이후에 ...

 

 

 

 

 

 

 

일본 제국주의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일본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정리해 본 적이 있다. 더 이상 자세하게 알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근대 부분만 다시 정리해 본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일본의 근대는 1854년 미•일 화친 조약으로 시작된다. 미국의 페리제독이 흑선이라는 함선을 이끌고 와서 일본의 문을 열었다. 뒤이어 1858년 본격 조약인 미•일 통상 장정을 맺는데, 조약을 결정한 것은 에도막부였다.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 이후 약 700 년간 천황의 존재가 거의 없다시피 하였다. 정치는 쇼군이 담당했고 천황은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개항이후 민중의 삶이 피폐해지자 에도막부에 대한 원성이 높아지면서,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던 천황의 존재가 다시 떠오르게 되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지방의 몇몇 번을 중심으로 막부타도 운동이 일어나면서 존왕양이의 기치가 올랐다. 이 과정에서 서양 무기의 위력을 맛본 일본은 양이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을 따라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존왕양이 운동은 존왕 운동으로 변형되었다. 에도막부는 이런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고 권력을 천황에게 이양하는 대정봉환을 행하였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이 단행되었다. 폐번치현을 필두로 근대화 과정이 착착 진행되어 갔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 민중의 커져 가는 자유 민권 운동도 받아 안아 1889년 메이지헌법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메이지헌법은 입헌군주제를 천명했지만, 일본의 입헌군주제는 서양의 그것과는 다르게 천황의 무한한 권력을 보장하고 있다. 메이지 유신이 주창한 문명개화가 어느 정도 성공하자, 일본은 서양을 따라 제국주의 대열에 합류하려 하였다.

 

 

1894년 그 기회가 왔다. 조선의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청과 일본이 맞붙게 된 것이다. 청나라는 양무운동으로,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각각 군사력을 키워왔다. 결과는 일본의 승리였다. 그러나 아직 새끼 제국주의자에 불과한 일본은 열강의 견제로 다 삼킨 랴오둥 반도를 토해내야 했다. 설욕전은 딱 10년 뒤인 1904년에 이루어졌다. 청나라 의화단을 진압하러 들어간 8개국 연합군 중 러시아가 철수하지 않고 만주에 군대를 잔류시켰다. 러시아를 경계하던 영국과 미국은 일본을 지원하였다. 1904년 영미의 대리전이라고도 하는 러•일 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이 승리하였다. 조선은 이제 일본의 손아귀 안에 완전히 갇혔고 일본은 제국주의의 선두 대열에 합류하였다.

 

 

일본은 첫 희생양인 조선을 발판으로 제국주의적 본성을 펼쳐갔다. 1929년 대공황을 기화로 드넓은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해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 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1945년 종말을 맞았다. 원자폭탄 두 발이 떨어진 직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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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영국에 맞서 탄생한 인도 민족주의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인도 전역을 아우르면서 성숙한 문화를 꽃피우던 무굴제국이 시들어 가자, 각지에서 분열의 조짐이 일어났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707년, 이슬람제일주의로 힌두교도와 시크교도 등의 불만을 샀던 아우랑제브가 죽자 인도 각지에서는 지방 세력들이 우후죽순으로 일어났다. 무굴제국은 수도 델리와 그 주변을 다스리는 조그만 왕국으로 전락하였다. 이 틈을 타서 영국과 프랑스 등이 해안으로 침입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7년 전쟁을 통해 유럽과 인도, 북아메리카 등에서 치열하게 다투고 있었다. 1600년 인도에 최초의 동인도회사를 세운 영국과 뒤이어 동인도회사를 세우고 인도 패권을 다투던 프랑스가 1757년 마침내 벵골 지방의 플라시 평원에서 맞붙었다. 벵골 태수와 연합한 프랑스의 전력이 우세했으나 영국은 사전에 벵골 태수의 부하를 매수하여 내부 반란을 유도했다. 그 결과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쉽게 승리하였다. 

 

프랑스를 물리친 영국은 아우랑제브 이후 조각난 인도 전역을 하나씩 점령해 나갔다. 19세기 중엽에는 인도의 거의 모든 지역을 차지하고, 경제적 착취를 통해 막대한 부를 챙겼다.

 

 

<EBS중학 필독 중학 세계사>

 

BC 3000년 경 부터 시작된 인도의 면직물 산업이 몰락했다. 인도에서 고급 면직물을 수입해 가던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값싼 면직물을 대량 생산하여 거꾸로 인도에 팔기 시작했다. 영국산 제품을 인도에 들여올 때는 거의 관세를 매기지 않다시피 한데 반해 인도산 제품을 영국으로 가져갈 때는 100%에 가까운 관세를 매기며 불평등한 무역을 조장했다. 뿐만 아니라 인도 면직물 산업 자체를 파괴했다. 인도 면직물 장인들의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방직 기계를 부수었다. 19세기 초부터 영국은 아시아 전역에 면직물을 수출하게 되었지만, 눈부시게 발달했던 인도의 면직물 산업은 완전히 몰락했다. 인도는 이제 영국산 면직물 생산을 위한 목화 재배지로 전락했다. 이런 영국의 정책에 대해 영국인조차 "갠지즈강에서 모든 것을 빨아들여 템스 강에서 짜낸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영국 부르주아지가 주장하는 소위 자유무역의 실체는 이런 것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자를 완전히 죽여 놓은 다음에야 비로소 자유무역을 내세웠던 것이다.

 

<EBS중학 필독 중학 세계사>

 

 

인도는 영국이 청으로부터 차를 수입할 수 있도록 아편을 재배해야했다. 청과의 무역에서 엄청난 적자를 보고 있던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청에 수출하여 은을 회수하려 했던 것이다. 청의 차 - 인도의 아편 - 영국의 면직물로 엮은 삼각무역을 통해 영국은 빼앗다시피 차와 비단, 도자기를 가져왔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757년 플라시 전투 이후 영국의 인도지배는 동인도회사를 통한 간접 지배였다. 넓은 인도 아대륙에는 무굴제국 이외에도 작은 왕국이 수백개가 넘었다. 영국은 초기에는 인구가 많고 풍요로운 벵골지방을 중심으로 경제적 착취에 치중했다. 이렇게 획득한 부를 이용하여 차츰 지배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플라시 전투 이후 100년 간 무굴제국은 명목상 존재했지만 영국의 통치 아래 몰락해가고 있었다. 힌두교도를 중심으로 한 브라모사마지 운동 등 근대화 노력도 있었으나 별 성과를 얻지 못했다.  

 

 <EBS중학 필독 중학 세계사>

 

사건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졌다. 동인도회사의 용병으로 영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세포이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세포이란 페르시아말로 병사(혹은 용병?)를 뜻한다. 세포이들은 영국의 인도 정복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막상 인도가 식민지로 떨어지자 영국은 세포이들을 푸대접하기 시작했고, 세포이들의 불만은 쌓여갔다. 도화선은 돼지기름과 소기름을 바른 탄약통이었다. 돼지를 혐오하는 이슬람교도와 소를 신성시하는 힌두교도로 이루어진 세포이들은 분노했다.

 

 

 <EBS중학 필독 중학 세계사>

 

그러나 2년 만에 항쟁은 실패하고 인도는 새로운 식민통치 시대를 맞아야 했다. 영국은 명목상으로나마 존속했던 무굴제국을 멸망시키고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 황제를 겸임하는 직접 통치를 시작했다. 1858년 영국 동인도 회사가 빅토리아 여왕에게 통치권을 이관하고 1877년 공식적으로 인도제국이 선포되었다. 인도제국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7년까지 인도 전역을 통치했다.

 

인도 전역을 통치하기 위해 영국은 친영파를 육성했다. 1885년 결성된 인도국민회의가 대표적 단체이다. 인도 지식인들로 구성된 인도국민회의는 영국 통치에 우호적이었으나 1905년 벵골 분할령에 반발하며 반영 단체로 돌아섰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 121>

 

 

플라시 전투 직후부터 영국에 착취당해온 벵골은 반영 운동의 중심지였다. 영국 식민정부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종교 갈등을 부추기어 반영 운동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서벵골은 힌두교도가 다수이고 동벵골은 이슬람교도가 다수였다. 그러나 벵골 분할령은 반영운동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인도국민회의는 콜카타 대회를 개최하고 스와라지(자치), 스와데시(국산품 애용), 보이콧(영국제품 불매)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민족 교육령을 채택하고 반영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결국 총독은 벵골 분할령을 철회하고, 명목상의 자치를 실시했다. 물론 이름 그대로 말뿐인 자치였다.

 

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인도인 군인이 필요했던 영국은 참전의 대가로 인도 독립을 약속했다. 그러나 승전국이 된 영국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도인에 대한 통제를 한층 더 강화하였다. 가령 1919년에는 법원의 판결 없이도 인도인을 체포·구금하고 언론·사상·집회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로래트법을 발표했다. 

 

간디와 네루가 이끄는 독립투쟁이 격화되었다.  특히 1930년 인도국민회의의 대표였던 네루는 이제부터 자치가 아닌 인도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싸우겠다고 선언했다. 갈수록 인도인의 독립운동이 거세지자 영국은 새로운 인도통치법을 발표했다. 지방정부를 책임질 권한을 인도인에게 주겠다는 자치제였지만 외교와 군사가 빠진 알맹이 없는 자치권이었다. 인도가 완전한 독립을 쟁취한 것은 2차 세계 대전 이후이다.

 

 <EBS중학 필독 중학 세계사>

 

1947년 인도제국은 공식 해체되고 인도 독립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인도는 파키스탄과 인도로 분할 독립하게 되었다. 종교 때문이었다. 파키스탄은 이슬람교가 많고 인도는 힌두교가 많다. 영국은 식민통치 시기부터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를 이간질해 왔는데, 다수의 힌두교도들에게 끊임없이 불안을 느낀 이슬람교도들은 결국 독립에 즈음하여 힌두교도들과 무력 충돌을 하게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한마을에서 형제처럼 어울려 살던 사람들이 서로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콜카타 인근에서만 3일 동안 6000여명이 죽었고 벵골 등지에서 처참한 살육과 파괴가 몇 개월 동안 이어졌다.

 

인도국민회의의 네루와 이슬람 지도자 등이 하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1947년 6월 인도국민회의는 인도를, 무슬림 연맹은 파키스탄을 세우기 위한 각각의 임시 정부를 만들었다. 파키스탄(PAKISTAN)은 펀자브, 아프간, 카슈미르, 신드의 머리글자에 '땅'을 뜻하는 '스탄'을 붙여 만든 이름이다. 파키스탄이란 이름은 1930년대에 이미 등장하여 이슬람교도의 분리 독립에 대한 염원을 보여주었다.

 

인도는 1947년 8월 15일 마침내 독립하였다. 독립 인도는 민주공화국으로, 의회주의, 세속주의, 사회주의적민주주의를 주요 국가 이념으로 내세우고 헌법 제정을 거쳐 1951년에 인도연방공화국으로 공식 출범했다. 인도는 힌두교가 80% 이상을 차지하지만 헌법상에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인도가 연방제를 채택한 것은 너무나 다양한 민족과 그들 각자의 언어(언어만 1652개라고 함) 그리고 토후국들 때문이었다. 뿐만아니라 이들은 또 제각각의 종교로 갈라져 있었다. 이 때문에 인도는 문명이 발생한 이래 한번도 하나의 통일된 국가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도 인도는 각지의 분리독립을 원하는 민족들과 종교적 갈등으로 통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분리 독립한 인도와 파키스탄도 3차례의 전쟁을 치루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분쟁 상태에 놓여있다.

 

 

 

4. 외세를 딛고 나아가는 동남아시아

 

 

향료무역의 요충지인 동남아시아에는 유럽 상인들이 도착하기 전부터 인도, 중국, 이슬람에서 온 각지의 상인들이 넘쳐났다. 다양한 민족들이 교류하던 덕분에 다양한 종교가 들어왔다.

 

 

 

전체적으로는 인도 마우리아 왕조에서 전파된 상좌부 불교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중국과 인접한 베트남에는 인도 쿠샨 왕조의 대승 불교가 들어왔다. 베트남에는 유교 문화가 뿌리 깊기도 하다. 말레이시아를 비롯해 인도네시아의 섬들은 이슬람 상인과의 거래를 위해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한편 그 이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300년 이상 에스파냐 식민통치를 겪은 필리핀은 가톨릭이 우세하다.

 

  

  <EBS중학 필독 중학 세계사>

 

 

동남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제국주의의 침략을 막아내고 독립을 유지한 국가는 타이다. 짜끄리 왕조의 라마 5세는 영국 식민지와 프랑스 식민지 사이에 위치한 타이의 지정학적 위치를 활용하여 유연한 외교 전략을 펼쳐 독립을 지켜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 123>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라고 불리었다. 영국은 인도에 인접한 미얀마와 말레이시아를 차지하였다. 17세기 전반 대서양 무역의 최강자였던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의 섬들을 차지했다. 인도네시아란 말 자체가 “인도의 섬”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 커피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만들었다. 자바 커피는 아마도 여기서 유래하는 듯하다. 펠리페 2세의 이름이 붙은 필리핀은 에스파냐의 통치를 받다가 미국의 식민지로 이양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베트남은 지리적으로 동남아시아에 속하지만 문화적으로는 동북아시아에 속한다고 할 만큼 유교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또한 외세의 침략을 끝까지 막아낸 강인하고 끈질긴 정신을 가졌다. 13세기 역사상 전무후무한 거대제국, 몽골의 침입을 끝까지 막아내었고, 19세기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긴 하였지만 끈질긴 항쟁 끝에 마침내 독립하였고, 20세기 베트남전에서도 미국을 물리쳤다.

 

제국주의에 대항한 베트남의 투쟁 중에 가장 인상 깊은 것은 ‘간뿌옹’ 운동 즉 근왕 운동이다. 황제가 직접 나서 항쟁을 촉구하며 산속으로 들어가 민중들과 함께 게릴라전을 펼쳤다.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멀리 알제리까지 유배를 갔지만, 이런 황제라면 독립운동을 할 마음이 생기겠다 싶다.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와 비교해 보면 매우 씁쓸하다.

 

  

 <EBS중학 필독 중학 세계사>

 

 

판 보이 쩌우의 독립 투쟁도 매우 흥미롭다. 간뿌옹 운동에 참여했다가 실패하자, 베트남 유신회를 만들어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배우려고 유학을 갔지만, 일본의 실체가 제국주의임을 파악하고 실망했다. 때마침 중국에서 일어난 신해혁명에서 베트남의 진로를 다시 찾은 판 보이 쩌우는 베트남 광복회를 만들어 공화정 수립 운동을 이끌었다. 친청파니 친일파니 나누어서 서로 싸우던 우리 개화파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판 보이 쩌우가 쓴 <베트남 망국사>는 우리나라의 애국 계몽 운동기에 널리 읽혔는데, 그 첫 번째 번역자가 신채호로 보인다는 연구가 있다.

 

 

  

 <EBS중학 필독 중학 세계사>

 

 

필리핀의 대표적 독립 운동가는 호세 리살과 아기날도이다. 호세 리살은 부유한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에스파냐 유학길에서 필리핀 독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귀국하여 독립운동을 펼치다 체포되어 죽었다.

 

아기날도의 독립운동 역정도 파란만장하다. 미국은 먼로 선언을 깨고 쿠바 등 에스파냐의 식민지에 눈독을 들였다. 그런 상황에서 1898년 미국과 에스파냐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손쉽게 승리한 미국은 쿠바를 보호국으로 삼고, 에스파냐의 식민지인 괌과 필리핀을 차지하였다. 이 간단해 보이는 서술에는 한낱 대상으로 전락한 한 민족의 피맺힌 투쟁이 있다.

 

필리핀은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미국의 약속을 믿고 미국-에스파냐 전쟁에 적극 가담하여 에스파냐를 물리쳤다. 1898년 필리핀은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제국주의 국가들끼리 맺은 파리조약을 들이밀며 필리핀을 에스파냐로부터 이양 받았다고 주장했다. 1899년 필리핀은 혁명정부를 수립하고, 아기날도를 대통령으로 하는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필리핀 민중들은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였지만 미국의 초토화 작전에 의해 진압당하고 다시 식민 지배를 받아야 했다. 필리핀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잠시 일본에 점령되었다가, 전쟁이 끝난 후에 완전 독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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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시대

  

 

   <EBSi 이다지의 세계사>

 

제국은 고대부터 있었고, 제국주의도 신항로 개척기부터 있었지만, “제국주의 시대”라고 불리는 시기는 19세기 후반부터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이다. 역사가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에릭 홉스봄은 1875년부터 1914년까지를 제국의 시대로 규정했다.

 

제국주의는 다른 말로 하면 식민주의다. 유럽 침략자의 용어로는 제국주의이고, 피 침략자의 입장에서는 마땅히 식민주의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근대성의 이면이 식민성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서구 안에서는 근대성이지만 서구를 벗어나면 그것은 식민성이 된다. 교회와 학교 그리고 병원 뒤에는 항상 제국의 대포와 기관총이 따라 다녔다.

 

이 시기 제국주의의 특징은 식민지와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식민지를 놓고 제국들끼리 서로 싸우는 정글이었다는 것이다. 서구가 자랑하는 사회계약의 효시 홉스 선생께서는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정글의 법칙을 벗어나 계약을 맺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사회계약을 토대로 근대 국가가 되었다는 서구 열강들은 고스란히 홉스 이전의 약육강식의 세계로 돌아간 것이다. 왜 그랬을까?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무섭게 성장한 자본주의가 그것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원자재와 시장이 필요했고, 자본에 맞서 싸우는 자국의 노동자들을 달래줄 콩고물, 혹은 낙숫물도 필요했다. 독점 자본주의 기업들은 이미 한 국가 안에서는 소화할 수 없는 엄청난 상품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식민지는 독점적 자본주의의 필수 요건이 되었다.

 

아프리카의 수많은 흑인들을 잔혹하게 살해하기 위해서는 그럴듯한 자기합리화도 필요했다. 사회진화론과 인종주의가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이걸 믿었을까 싶지만, 정신이 온전한 사람들도 믿게 만드는 것이 이데올로기의 힘이다.

 

시민혁명으로 형성된 민족주의도 한몫을 했다. 민족주의가 좋게 쓰이면 독립과 성장의 동력이 되지만, 사회진화론, 인종주의 같은 것들과 결합하면 야만적 침략주의로 돌변한다. 침략적 민족주의는 세계를 구원할 숭고한 의무, “백인의 짐” 따위의 도착적 사명감에 의해 합리화 된다.

 

 

사실 이것들은 가만히 보면 근대 시민혁명의 유산이다. 시민혁명이 유럽에 불어 넣은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끝내는 제국주의를 불러왔다. 시민혁명의 승자, 부르주아가 추구한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의 핵심은 사적 소유의 자유이다. 그 귀결이 독점적 자본주의이다. 나폴레옹에 맞서 형성된 민족주의는 애초부터 우리민족과 타민족의 대립에 기반 해 있었다. 주체와 타자의 이분법, 화합이 아니라 대결, 그것의 극단에 침략적 민족주의가 있는 것이다. 서구 근대성이 비판받는 이유 혹은 세계 1차 대전을 서구 근대성의 파국이라고 평하는 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제국주의의 시대는 시작되었고, 19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이 노린 먹이 감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였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거의 전 지역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되었다. 재빨리 제국주의에 합류하여 새끼 제국주의자가 된 일본을 제외한다면.

 

 

 

 

1. 오스만 제국을 뒤흔드는 독립의 열풍

 

 

가. 오스만 제국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오스만제국(1299~1922)은 두 개의 고대문명이 발생한 드넓은 지역을 오랫동안 지배해왔다. 1453년 비잔티움제국을 멸망시키고 유럽까지 영역을 확장한 오스만제국은 17세기 최고 전성기를 맞은 후 17세기 말부터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오스만제국의 쇠퇴를 틈타 제국 각지에서는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한때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넘보던 오스만제국은 ‘유럽의 환자’ 취급을 받을 정도가 되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오스만제국은 스스로 근대적 개혁을 시작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839년부터 1876까지 탄지마트(은혜 개혁)라고 불리는 일련의 개혁을 실행하여 아시아 최초의 헌법인 미드하트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이 러시아-튀르크 전쟁(1877~8)의 패배를 꼬투리 삼아 헌법을 정지시키고 의회를 해산하고 전제정치를 부활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탄지마트 개혁이 실패하자 1908년 청년장교들이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이를 주도한 청년 튀르크당은 입헌정부를 수립하고 오스만제국을 이끌었다. 그러나 극단적인 튀르크 민족주의로 다른 민족들의 반감을 사면서 아랍권을 오스만의 적으로 만들었다. 외교정책에도 실패하여 제1차 세계대전에서 삼국동맹 편에 가담했다. 그 결과 오스만제국은 해체되고, 무스타파 케말의 영웅적 노력에 힘입어 1923년 터키 공화국으로 재탄생,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나. 이집트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108>

 

비잔티움제국이 멸망할 무렵부터 오스만제국에 의해 지배당해 왔던 발칸반도가 제일 먼저 독립의 기치를 올렸다. 그리스가 1821년부터 1829년까지 독립전쟁을 벌였고, 유럽 국가들의 도움으로 1832년 마침내 독립국이 되었다.

 

  

  

나일강 문명을 이룩했던 이집트는 BC 6세기 경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에게 점령당한 이후부터 20세기까지 끊임없이 다양한 민족의 지배를 받았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마침내 1805년 이집트는 사실상 독립국이 되었다. 이집트 총독으로 지명된 무함마드 알리가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1841년 세습 총독권을 획득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수에즈 운하를 건설하면서 프랑스에 막대한 빚을 지게 된 것이다. 이 빚을 빌미로 서양 열강들은 이집트의 내정에 심각한 간섭을 해왔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이집트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라비 파샤는 외세 배격운동을 주도하다가 영국의 포로가 되었다. 결국 이집트는 반영투쟁에서 실패하고 영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했다. 1922년에서야 이집트 왕국으로 독립하였고, 1952년에는 이집트 아랍 공화국이 되었다.

 

 

 

다. 아리비아 반도

 

아라비아 반도는 7세기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하면서 세계사에 등장했다. 비잔티움제국과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대립으로 육로로 오가던 동서무역로가 막히자 아라비아 반도를 돌아가는 바닷길이 각광받기 시작했고, 아라비아 상인들이 번창하면서 빈부 격차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부자 귀족들에 대항해 평등 사회를 주장하며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하였다. (헤지라 622년) 무함마드는 종교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정통칼리프 시대를 거쳐 우마이야 왕조 그리고 아바스왕조까지는 아라비아 반도 전체가 이슬람국가에 속했다. 그런데 셀주크 튀르크와 오스만제국 때는 메카와 메디나를 포함한 해안가 지역만 포함된다. 일한국은 아예 아라비아반도 쪽으로 내려가지도 않았다. 당시 아라비아반도 내륙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도 오스만제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독립이 관련되어 있는 것은 메카와 메디나 등 오스만 제국이 차지하고 있던 지역을 사우디아라비아가 공격했기 때문이다. 메카와 메디나는 이슬람교의 성지로 초기 무함마드 시대의 순수한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 사우디아라비아로서는 꼭 필요했을 것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와하브 운동은 이슬람의 청교도 운동이라고 불릴 만큼 엄격한 교리를 가지고 있다. 이슬람 공동체가 예언자 무함마드가 선포한 근본원리로 돌아가야만 이슬람의 위대함을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와하브는 아라비아 반도의 약탈자(?), 사우드 가문과 연합하면서 와하브 왕국을 건설하였다. 와하브 왕국은 사우드 제1왕국과 제2왕국, 제3왕국 등으로 나뉘어 불리는데, 제3 왕국이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이다.

 

사우드 제1왕국은 메카를 점령하였다. 오스만제국이 이슬람교를 변질시켰을 뿐만 아니라 아랍인도 아니기 때문에 그 지배를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사우드 제1왕국은 오스만이 파견한 이집트 군에 의해 무너졌다.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만제국과 싸우며 여러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던 곳을 통합하고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아 1932년 탄생했다.

 

와하브 운동은 아랍 문화 부흥운동을 촉발시키며 아랍 민족주의의 기반을 마련하고 현대 아랍어를 확립시킨 계기가 되었다.

 

 

와하브 운동을 공부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IS의 종교적 뿌리가 와하브운동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아랍에 문외한인 나만 그럴지도 모르지만, ... 여하튼 민족주의가 극단에 이르면 서양처럼 제국주의가 되든가 아니면 근본주의가 되는 것 같아 참 씁쓸하다. 이슬람의 성전, 지하드가 현대에 다시 무슬림 최고의 의무로 떠오른 것도 와하비즘 때문이다.

 

<주간 경향>에 실린 기사 중에 일부를 발췌했는데, 전문을 읽어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사우디아라비아가 IS의 배후로 지목받는 것도 와하브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IS를 척결하겠다는 미국은 석유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를 비호하고 있다니, 세계의 질서는 참 요지경, 아니 역시 자본의 질서이다.

 

“IS의 이데올로기적 근거는 사우디가 믿고 있는 이슬람교의 ‘와하비즘’에 있다. 와하비즘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IS의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행동이 이해될 수도 있다.

와하비즘은 이슬람교의 코란에 대한 독특한 해석 방식으로, ‘와하브’라는 이슬람교 신학자로부터 시작됐다. 기독교로 말하자면 이슬람의 청교도주의라고 할 수 있으며 순수한 이슬람교를 지향한다.

18세기 초에 태어난 와하브는 사우디 중부 내륙 ‘나즈드’에서 자랐다. 이슬람교 학자의 눈에는 당시 유행하던 이슬람교의 성자들에 대한 숭배나 묘지 순례와 묘지에서의 죽은 자들에 대한 숭배 등은 모두 유일신 신앙을 부정하는 우상숭배 행위로 보였다. 와하브는 이를 단호하게 지적하면서 유일신 신앙을 강조했다. 당시 대중적이던 이슬람 문화를 부정하고 비판하던 그의 가르침으로 인해 그는 고향에서 쫓겨나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한동안 방황하면서 목숨까지도 위협당하는 처지로 전락해버렸다.

 

하지만 그를 품고 지켜줄 부족이 나타났다. 현재 사우디 왕가의 조상인 사우드 부족의 부족장들이었다. 1744년, 와하브는 사우드 부족장과 협약을 맺었다. 사우드 부족장은 와하브 부족을 물리력으로 보호하고 이슬람교에 대한 와하브의 신학적 가르침을 퍼뜨리고, 이에 와하브는 사우드 부족장을 지도자로 받들면서 충성하고 영광을 돌린다는 협약을 체결했다. 사우드 부족은 이전에 항상 이웃 부족들을 침공해 학살하고 약탈을 일삼아온 무장한 도적떼와 같은 부족으로 악명을 떨쳤으나 와하브와 결탁이 맺어지면서 종교적 합법성을 획득했다.

이후 와하브와 사우드 부족은 지하드라는 이름 아래 함께 연합해 일대를 정복하고 시아파를 공격하면서 영토를 넓혀 나갔고, 메카와 메디나도 정복해 나갔다. 협약을 맺었던 와하브와 사우드 부족장이 죽고 난 뒤에도 대를 이어 여전히 협약은 유효하게 지켜졌다.“

 

또 하나의 글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와하비즘 그리고 IS의 이해에 매우 도움이 되는 것 같아 링크를 걸어둔다. 제목은 “사우디 '와하비즘'을 모르면 IS를 이해할 수 없다.” 이다.

 

 

 

라. 이란

  

 

 

지금도 마라톤 경기를 하지 않는다는 이란은 페르시아의 후예를 자처하고 있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 파르티아 왕국 - 사산왕조 페르시아 이후 이 지역은 이슬람에 의해 지배 되었다. 정통칼리프 시대부터 우마이야, 아바스, 셀주크 튀르크, 일한국 시대까지 이슬람제국의 영토에 속했다.

 

일한국이 해체되면서 티무르제국이 세워졌고, 티무르가 망하면서 튀르크인 지역과 페르시아인 지역이 나뉘게 되었다. 이때 이스마일 1세가 이란 지역에 사파비 왕조를 세우고 페르시아의 영광을 되살리려 하였다. 이때부터 이란 지역은 오스만 제국에 속하지 않고 독립되어 있었다. 사파비 왕조를 이어 카자르 왕조가 20세기 초까지 페르시아의 명맥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 지역의 종교는 여전히 이슬람이었으며, 오스만 제국의 수니파에 대항한 시아파가 주를 이루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카자르 왕조는 근대적 개혁을 실시했지만, 재정 부족으로 서구 열강에게 각종 이권을 빼앗기고 있었다. 1891년 영국에 담배 독점권까지 넘기게 되자 아프가니가 촉발한 담배 불매 운동이 일어났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108>

 

 

담배 이권을 지켜내며 승리를 맛본 민중은 이어 입헌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영국과 러시아 등 외세에 의해 좌절되었다. 러시아는 이란의 북부 지방을 점령하였고, 영국은 이란의 남부 지방을 점령하였다. 이란은 1차 세계 대전 이후에야 독립할 수 있었다.

  

 

 

팔레스타인은 제1차 세계 대전을 치르면서 세계에서 가장 난해한 분쟁지역으로 떠올랐다. 팔레스타인의 역사에 대해서는 1,2차 세계 대전을 공부할 때 다루기로 한다.

 

 

 

 

2. 제국주의를 딛고 일어서는 아프리카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p29>

 

 

아프리카는 인류의 고향이다. 최초의 인류가 살았던 탄자니아의 올두바이 계곡에서는 300~500만 년 전의 인류 화석이 많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세계사 교과서의 첫 머리를 장식했던 아프리카는 19세기가 될 때까지 교과서의 어느 곳에도 제대로 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

 

19세기 아프리카의 등장도 순전히 유럽 제국주의의 침략 대상, 그 희생자로서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주로 갈라먹었고, 독일과 네덜란드가 숟가락을 얹었다는 것과, 몇몇 부족의 저항이 거의 전부이다.

 

물론 그 사이에 로마나 이슬람제국의 식민지가 된 북부 아프리카 혹은 대서양 무역의 상품으로 끌려간 아프리카 흑인노예가 언급된다. 무엇보다 나일 강 문명도 있다. 그러나 이집트는 아프리카가 아니라 지중해 문명권의 일부로 취급되고 있을 뿐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영국은 이집트의 카이로와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을 이으면서 아프리카를 수직으로 점령했다. 프랑스는 알제리를 거점으로 비스듬한 횡단 선을 그리며 마다가스카르에 이르렀다. 이른바 영국의 종단정책과 프랑스의 횡단정책이다. 두 나라의 종단선과 횡단선이 파쇼다에서 부딪혔다. 그러나 오랜 앙숙사이인 두 제국은 충돌의 위기에서 외교적 협상을 통하여 사이좋게 아프리카를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여기에 중앙아프리카의 콩고를 벨기에가 장악했고, 제국주의 후발 주자인 독일이 뒤늦게 뛰어들어 여기저기를 잔인하게 짓밟았다.

 

EBS 수능 강의를 보면 시험에 나오는 문제는 대강 이 정도라고 한다. 그나마 중학 강의는 아프리카의 저항 운동을 조금 다루어주고 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제국주의의 침탈에서 살아남은 국가는 딱 두 곳이다.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다. 라이베리아는 미국식민협회가 보낸 해방노예가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제국주의의 침탈에서 애초에 벗어나 있었다. 투쟁을 통해 제국주의를 물리친 나라는 에티오피아가 유일하다.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와의 전투에 승리하며 독립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에티오피아가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에 나오는 그 시바왕국의 일부라고 한다. 에티오피아는 예가체프라는 커피로도 아주 유명하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아프리카인의 저항도 계속되었다. 부족장이나 주술사, 국왕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싸우기도 했고, 이슬람 공동체를 기반으로 저항하기도 했다. 기관총 앞에서 창을 들고 돌격하는 아프리카인들은 일견 무모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런 저항의 물줄기가 조직적인 민족운동을 불러 일으켰다. 역사와 문화가 서로 다른 여러 종족들이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민족의식을 기르고 ‘가나인의 가나’, ‘케냐인의 케냐’ 같은 구호를 만들어 냈다.

 

 

<살아있는 세계사교과서 2>의 5장 "제국주의의 침략과 아시아 ·아프리카의 민족운동> 중 1절과 2절을 정리한 것이다. 3장 인도와 4장 동남아시아는 다음 글에서 ...

 

 

 

 

 

 

 

 

 

 

 

**추가로 제국주의에 관한 강유원의 글을 조금 옮겨 놓습니다.

 

 

.

 

 

 

 

추가1 : <역사 고전 강의>에서 p432~4

 

제국주의 시대의 경제적 상황은 흔히 ‘2차 산업혁명’ 이라는 말로 집약됩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기술이 획기적으로 바뀌면서 산업구조가 중공업 중심으로 재편되었습니다. 산업구조가 이렇게 재편됨에 따라 유럽의 열강들은 고무, 철강, 석유 등과 같은 새로운 원자재를 얻기 위해 새로운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술의 변화가 산업구조의 변화로, 다시 원자재 수급의 변화로 이어진 것입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팽창주의적 무역정책을 펼치면서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요컨대 2차 산업혁명의 최종 귀결은 전략적 식민화였습니다. 이 무렵 중심부와 주변부의 지배 종속 관계를 바탕으로 이른바 ‘근대 세계 체제’가 성립했는데, 이 체제가 전략적 식민화와 맞물리면서 제국주의적 경쟁, 즉 팽창주의적 무역 경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1876년에서 1914년까지 세계 육지의 4분의 1이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게 복속되거나 그 나라들 사이에 재분배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경쟁 상황은 너무나 치열한 반면, 해결의 방법은 마땅치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 국제사회의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상위 권위체가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결국 무력으로 사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제국주의적 경쟁을 하는 국가들끼리 사이좋게 지낼 수는 없었을까?’ (.....) 그게 안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2차 산업혁명으로 기술과 산업이 발전하면서 과잉생산이 일어났고 이것이 장기간의 이윤율 하락으로 이어지면서 불황이 발생했습니다. 이윤율이 장기간 하락했다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를 돌리는 동력이 떨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식민지를 독점하고 싼값에 원료를 공급받으려고 한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사태는 익숙한 상황이 아니어서 부르주아들 자신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기도 했습니다. p432~4

 

추가 2: <인문 고전 강의>에서 p507

 

경제사를 보면 1873년 경기침체는 1896년까지 약 20년간 이어졌습니다. 그럼에도 전 세계 자본주의 시스템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선도 국가였던 대영제국이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 부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대영제국은 그 많은 돈을 어디서 벌었는지 궁금해집니다. 바로 중국과의 아편무역을 통해서 벌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중국인들이 아편쟁이가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 당시 전 세계 자본주의 시스템은 중국인들이 유지시켜준 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전 세계 자본주의가 하나로 묶여서 움직이는 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말하는 세계화,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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