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영국에 맞서 탄생한 인도 민족주의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인도 전역을 아우르면서 성숙한 문화를 꽃피우던 무굴제국이 시들어 가자, 각지에서 분열의 조짐이 일어났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707년, 이슬람제일주의로 힌두교도와 시크교도 등의 불만을 샀던 아우랑제브가 죽자 인도 각지에서는 지방 세력들이 우후죽순으로 일어났다. 무굴제국은 수도 델리와 그 주변을 다스리는 조그만 왕국으로 전락하였다. 이 틈을 타서 영국과 프랑스 등이 해안으로 침입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7년 전쟁을 통해 유럽과 인도, 북아메리카 등에서 치열하게 다투고 있었다. 1600년 인도에 최초의 동인도회사를 세운 영국과 뒤이어 동인도회사를 세우고 인도 패권을 다투던 프랑스가 1757년 마침내 벵골 지방의 플라시 평원에서 맞붙었다. 벵골 태수와 연합한 프랑스의 전력이 우세했으나 영국은 사전에 벵골 태수의 부하를 매수하여 내부 반란을 유도했다. 그 결과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쉽게 승리하였다. 

 

프랑스를 물리친 영국은 아우랑제브 이후 조각난 인도 전역을 하나씩 점령해 나갔다. 19세기 중엽에는 인도의 거의 모든 지역을 차지하고, 경제적 착취를 통해 막대한 부를 챙겼다.

 

 

<EBS중학 필독 중학 세계사>

 

BC 3000년 경 부터 시작된 인도의 면직물 산업이 몰락했다. 인도에서 고급 면직물을 수입해 가던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값싼 면직물을 대량 생산하여 거꾸로 인도에 팔기 시작했다. 영국산 제품을 인도에 들여올 때는 거의 관세를 매기지 않다시피 한데 반해 인도산 제품을 영국으로 가져갈 때는 100%에 가까운 관세를 매기며 불평등한 무역을 조장했다. 뿐만 아니라 인도 면직물 산업 자체를 파괴했다. 인도 면직물 장인들의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방직 기계를 부수었다. 19세기 초부터 영국은 아시아 전역에 면직물을 수출하게 되었지만, 눈부시게 발달했던 인도의 면직물 산업은 완전히 몰락했다. 인도는 이제 영국산 면직물 생산을 위한 목화 재배지로 전락했다. 이런 영국의 정책에 대해 영국인조차 "갠지즈강에서 모든 것을 빨아들여 템스 강에서 짜낸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영국 부르주아지가 주장하는 소위 자유무역의 실체는 이런 것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자를 완전히 죽여 놓은 다음에야 비로소 자유무역을 내세웠던 것이다.

 

<EBS중학 필독 중학 세계사>

 

 

인도는 영국이 청으로부터 차를 수입할 수 있도록 아편을 재배해야했다. 청과의 무역에서 엄청난 적자를 보고 있던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청에 수출하여 은을 회수하려 했던 것이다. 청의 차 - 인도의 아편 - 영국의 면직물로 엮은 삼각무역을 통해 영국은 빼앗다시피 차와 비단, 도자기를 가져왔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757년 플라시 전투 이후 영국의 인도지배는 동인도회사를 통한 간접 지배였다. 넓은 인도 아대륙에는 무굴제국 이외에도 작은 왕국이 수백개가 넘었다. 영국은 초기에는 인구가 많고 풍요로운 벵골지방을 중심으로 경제적 착취에 치중했다. 이렇게 획득한 부를 이용하여 차츰 지배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플라시 전투 이후 100년 간 무굴제국은 명목상 존재했지만 영국의 통치 아래 몰락해가고 있었다. 힌두교도를 중심으로 한 브라모사마지 운동 등 근대화 노력도 있었으나 별 성과를 얻지 못했다.  

 

 <EBS중학 필독 중학 세계사>

 

사건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졌다. 동인도회사의 용병으로 영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세포이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세포이란 페르시아말로 병사(혹은 용병?)를 뜻한다. 세포이들은 영국의 인도 정복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막상 인도가 식민지로 떨어지자 영국은 세포이들을 푸대접하기 시작했고, 세포이들의 불만은 쌓여갔다. 도화선은 돼지기름과 소기름을 바른 탄약통이었다. 돼지를 혐오하는 이슬람교도와 소를 신성시하는 힌두교도로 이루어진 세포이들은 분노했다.

 

 

 <EBS중학 필독 중학 세계사>

 

그러나 2년 만에 항쟁은 실패하고 인도는 새로운 식민통치 시대를 맞아야 했다. 영국은 명목상으로나마 존속했던 무굴제국을 멸망시키고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 황제를 겸임하는 직접 통치를 시작했다. 1858년 영국 동인도 회사가 빅토리아 여왕에게 통치권을 이관하고 1877년 공식적으로 인도제국이 선포되었다. 인도제국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7년까지 인도 전역을 통치했다.

 

인도 전역을 통치하기 위해 영국은 친영파를 육성했다. 1885년 결성된 인도국민회의가 대표적 단체이다. 인도 지식인들로 구성된 인도국민회의는 영국 통치에 우호적이었으나 1905년 벵골 분할령에 반발하며 반영 단체로 돌아섰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 121>

 

 

플라시 전투 직후부터 영국에 착취당해온 벵골은 반영 운동의 중심지였다. 영국 식민정부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종교 갈등을 부추기어 반영 운동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서벵골은 힌두교도가 다수이고 동벵골은 이슬람교도가 다수였다. 그러나 벵골 분할령은 반영운동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인도국민회의는 콜카타 대회를 개최하고 스와라지(자치), 스와데시(국산품 애용), 보이콧(영국제품 불매)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민족 교육령을 채택하고 반영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결국 총독은 벵골 분할령을 철회하고, 명목상의 자치를 실시했다. 물론 이름 그대로 말뿐인 자치였다.

 

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인도인 군인이 필요했던 영국은 참전의 대가로 인도 독립을 약속했다. 그러나 승전국이 된 영국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도인에 대한 통제를 한층 더 강화하였다. 가령 1919년에는 법원의 판결 없이도 인도인을 체포·구금하고 언론·사상·집회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로래트법을 발표했다. 

 

간디와 네루가 이끄는 독립투쟁이 격화되었다.  특히 1930년 인도국민회의의 대표였던 네루는 이제부터 자치가 아닌 인도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싸우겠다고 선언했다. 갈수록 인도인의 독립운동이 거세지자 영국은 새로운 인도통치법을 발표했다. 지방정부를 책임질 권한을 인도인에게 주겠다는 자치제였지만 외교와 군사가 빠진 알맹이 없는 자치권이었다. 인도가 완전한 독립을 쟁취한 것은 2차 세계 대전 이후이다.

 

 <EBS중학 필독 중학 세계사>

 

1947년 인도제국은 공식 해체되고 인도 독립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인도는 파키스탄과 인도로 분할 독립하게 되었다. 종교 때문이었다. 파키스탄은 이슬람교가 많고 인도는 힌두교가 많다. 영국은 식민통치 시기부터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를 이간질해 왔는데, 다수의 힌두교도들에게 끊임없이 불안을 느낀 이슬람교도들은 결국 독립에 즈음하여 힌두교도들과 무력 충돌을 하게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한마을에서 형제처럼 어울려 살던 사람들이 서로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콜카타 인근에서만 3일 동안 6000여명이 죽었고 벵골 등지에서 처참한 살육과 파괴가 몇 개월 동안 이어졌다.

 

인도국민회의의 네루와 이슬람 지도자 등이 하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1947년 6월 인도국민회의는 인도를, 무슬림 연맹은 파키스탄을 세우기 위한 각각의 임시 정부를 만들었다. 파키스탄(PAKISTAN)은 펀자브, 아프간, 카슈미르, 신드의 머리글자에 '땅'을 뜻하는 '스탄'을 붙여 만든 이름이다. 파키스탄이란 이름은 1930년대에 이미 등장하여 이슬람교도의 분리 독립에 대한 염원을 보여주었다.

 

인도는 1947년 8월 15일 마침내 독립하였다. 독립 인도는 민주공화국으로, 의회주의, 세속주의, 사회주의적민주주의를 주요 국가 이념으로 내세우고 헌법 제정을 거쳐 1951년에 인도연방공화국으로 공식 출범했다. 인도는 힌두교가 80% 이상을 차지하지만 헌법상에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인도가 연방제를 채택한 것은 너무나 다양한 민족과 그들 각자의 언어(언어만 1652개라고 함) 그리고 토후국들 때문이었다. 뿐만아니라 이들은 또 제각각의 종교로 갈라져 있었다. 이 때문에 인도는 문명이 발생한 이래 한번도 하나의 통일된 국가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도 인도는 각지의 분리독립을 원하는 민족들과 종교적 갈등으로 통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분리 독립한 인도와 파키스탄도 3차례의 전쟁을 치루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분쟁 상태에 놓여있다.

 

 

 

4. 외세를 딛고 나아가는 동남아시아

 

 

향료무역의 요충지인 동남아시아에는 유럽 상인들이 도착하기 전부터 인도, 중국, 이슬람에서 온 각지의 상인들이 넘쳐났다. 다양한 민족들이 교류하던 덕분에 다양한 종교가 들어왔다.

 

 

 

전체적으로는 인도 마우리아 왕조에서 전파된 상좌부 불교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중국과 인접한 베트남에는 인도 쿠샨 왕조의 대승 불교가 들어왔다. 베트남에는 유교 문화가 뿌리 깊기도 하다. 말레이시아를 비롯해 인도네시아의 섬들은 이슬람 상인과의 거래를 위해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한편 그 이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300년 이상 에스파냐 식민통치를 겪은 필리핀은 가톨릭이 우세하다.

 

  

  <EBS중학 필독 중학 세계사>

 

 

동남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제국주의의 침략을 막아내고 독립을 유지한 국가는 타이다. 짜끄리 왕조의 라마 5세는 영국 식민지와 프랑스 식민지 사이에 위치한 타이의 지정학적 위치를 활용하여 유연한 외교 전략을 펼쳐 독립을 지켜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 123>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라고 불리었다. 영국은 인도에 인접한 미얀마와 말레이시아를 차지하였다. 17세기 전반 대서양 무역의 최강자였던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의 섬들을 차지했다. 인도네시아란 말 자체가 “인도의 섬”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 커피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만들었다. 자바 커피는 아마도 여기서 유래하는 듯하다. 펠리페 2세의 이름이 붙은 필리핀은 에스파냐의 통치를 받다가 미국의 식민지로 이양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베트남은 지리적으로 동남아시아에 속하지만 문화적으로는 동북아시아에 속한다고 할 만큼 유교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또한 외세의 침략을 끝까지 막아낸 강인하고 끈질긴 정신을 가졌다. 13세기 역사상 전무후무한 거대제국, 몽골의 침입을 끝까지 막아내었고, 19세기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긴 하였지만 끈질긴 항쟁 끝에 마침내 독립하였고, 20세기 베트남전에서도 미국을 물리쳤다.

 

제국주의에 대항한 베트남의 투쟁 중에 가장 인상 깊은 것은 ‘간뿌옹’ 운동 즉 근왕 운동이다. 황제가 직접 나서 항쟁을 촉구하며 산속으로 들어가 민중들과 함께 게릴라전을 펼쳤다.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멀리 알제리까지 유배를 갔지만, 이런 황제라면 독립운동을 할 마음이 생기겠다 싶다.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와 비교해 보면 매우 씁쓸하다.

 

  

 <EBS중학 필독 중학 세계사>

 

 

판 보이 쩌우의 독립 투쟁도 매우 흥미롭다. 간뿌옹 운동에 참여했다가 실패하자, 베트남 유신회를 만들어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배우려고 유학을 갔지만, 일본의 실체가 제국주의임을 파악하고 실망했다. 때마침 중국에서 일어난 신해혁명에서 베트남의 진로를 다시 찾은 판 보이 쩌우는 베트남 광복회를 만들어 공화정 수립 운동을 이끌었다. 친청파니 친일파니 나누어서 서로 싸우던 우리 개화파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판 보이 쩌우가 쓴 <베트남 망국사>는 우리나라의 애국 계몽 운동기에 널리 읽혔는데, 그 첫 번째 번역자가 신채호로 보인다는 연구가 있다.

 

 

  

 <EBS중학 필독 중학 세계사>

 

 

필리핀의 대표적 독립 운동가는 호세 리살과 아기날도이다. 호세 리살은 부유한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에스파냐 유학길에서 필리핀 독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귀국하여 독립운동을 펼치다 체포되어 죽었다.

 

아기날도의 독립운동 역정도 파란만장하다. 미국은 먼로 선언을 깨고 쿠바 등 에스파냐의 식민지에 눈독을 들였다. 그런 상황에서 1898년 미국과 에스파냐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손쉽게 승리한 미국은 쿠바를 보호국으로 삼고, 에스파냐의 식민지인 괌과 필리핀을 차지하였다. 이 간단해 보이는 서술에는 한낱 대상으로 전락한 한 민족의 피맺힌 투쟁이 있다.

 

필리핀은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미국의 약속을 믿고 미국-에스파냐 전쟁에 적극 가담하여 에스파냐를 물리쳤다. 1898년 필리핀은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제국주의 국가들끼리 맺은 파리조약을 들이밀며 필리핀을 에스파냐로부터 이양 받았다고 주장했다. 1899년 필리핀은 혁명정부를 수립하고, 아기날도를 대통령으로 하는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필리핀 민중들은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였지만 미국의 초토화 작전에 의해 진압당하고 다시 식민 지배를 받아야 했다. 필리핀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잠시 일본에 점령되었다가, 전쟁이 끝난 후에 완전 독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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