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시대

<EBSi 이다지의 세계사>
제국은 고대부터 있었고, 제국주의도 신항로 개척기부터 있었지만, “제국주의 시대”라고 불리는 시기는 19세기 후반부터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이다. 역사가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에릭 홉스봄은 1875년부터 1914년까지를 제국의 시대로 규정했다.
제국주의는 다른 말로 하면 식민주의다. 유럽 침략자의 용어로는 제국주의이고, 피 침략자의 입장에서는 마땅히 식민주의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근대성의 이면이 식민성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서구 안에서는 근대성이지만 서구를 벗어나면 그것은 식민성이 된다. 교회와 학교 그리고 병원 뒤에는 항상 제국의 대포와 기관총이 따라 다녔다.
이 시기 제국주의의 특징은 식민지와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식민지를 놓고 제국들끼리 서로 싸우는 정글이었다는 것이다. 서구가 자랑하는 사회계약의 효시 홉스 선생께서는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정글의 법칙을 벗어나 계약을 맺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사회계약을 토대로 근대 국가가 되었다는 서구 열강들은 고스란히 홉스 이전의 약육강식의 세계로 돌아간 것이다. 왜 그랬을까?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무섭게 성장한 자본주의가 그것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원자재와 시장이 필요했고, 자본에 맞서 싸우는 자국의 노동자들을 달래줄 콩고물, 혹은 낙숫물도 필요했다. 독점 자본주의 기업들은 이미 한 국가 안에서는 소화할 수 없는 엄청난 상품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식민지는 독점적 자본주의의 필수 요건이 되었다.
아프리카의 수많은 흑인들을 잔혹하게 살해하기 위해서는 그럴듯한 자기합리화도 필요했다. 사회진화론과 인종주의가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이걸 믿었을까 싶지만, 정신이 온전한 사람들도 믿게 만드는 것이 이데올로기의 힘이다.
시민혁명으로 형성된 민족주의도 한몫을 했다. 민족주의가 좋게 쓰이면 독립과 성장의 동력이 되지만, 사회진화론, 인종주의 같은 것들과 결합하면 야만적 침략주의로 돌변한다. 침략적 민족주의는 세계를 구원할 숭고한 의무, “백인의 짐” 따위의 도착적 사명감에 의해 합리화 된다.
사실 이것들은 가만히 보면 근대 시민혁명의 유산이다. 시민혁명이 유럽에 불어 넣은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끝내는 제국주의를 불러왔다. 시민혁명의 승자, 부르주아가 추구한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의 핵심은 사적 소유의 자유이다. 그 귀결이 독점적 자본주의이다. 나폴레옹에 맞서 형성된 민족주의는 애초부터 우리민족과 타민족의 대립에 기반 해 있었다. 주체와 타자의 이분법, 화합이 아니라 대결, 그것의 극단에 침략적 민족주의가 있는 것이다. 서구 근대성이 비판받는 이유 혹은 세계 1차 대전을 서구 근대성의 파국이라고 평하는 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제국주의의 시대는 시작되었고, 19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이 노린 먹이 감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였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거의 전 지역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되었다. 재빨리 제국주의에 합류하여 새끼 제국주의자가 된 일본을 제외한다면.
1. 오스만 제국을 뒤흔드는 독립의 열풍
가. 오스만 제국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오스만제국(1299~1922)은 두 개의 고대문명이 발생한 드넓은 지역을 오랫동안 지배해왔다. 1453년 비잔티움제국을 멸망시키고 유럽까지 영역을 확장한 오스만제국은 17세기 최고 전성기를 맞은 후 17세기 말부터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오스만제국의 쇠퇴를 틈타 제국 각지에서는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한때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넘보던 오스만제국은 ‘유럽의 환자’ 취급을 받을 정도가 되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오스만제국은 스스로 근대적 개혁을 시작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839년부터 1876까지 탄지마트(은혜 개혁)라고 불리는 일련의 개혁을 실행하여 아시아 최초의 헌법인 미드하트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이 러시아-튀르크 전쟁(1877~8)의 패배를 꼬투리 삼아 헌법을 정지시키고 의회를 해산하고 전제정치를 부활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탄지마트 개혁이 실패하자 1908년 청년장교들이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이를 주도한 청년 튀르크당은 입헌정부를 수립하고 오스만제국을 이끌었다. 그러나 극단적인 튀르크 민족주의로 다른 민족들의 반감을 사면서 아랍권을 오스만의 적으로 만들었다. 외교정책에도 실패하여 제1차 세계대전에서 삼국동맹 편에 가담했다. 그 결과 오스만제국은 해체되고, 무스타파 케말의 영웅적 노력에 힘입어 1923년 터키 공화국으로 재탄생,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나. 이집트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108>
비잔티움제국이 멸망할 무렵부터 오스만제국에 의해 지배당해 왔던 발칸반도가 제일 먼저 독립의 기치를 올렸다. 그리스가 1821년부터 1829년까지 독립전쟁을 벌였고, 유럽 국가들의 도움으로 1832년 마침내 독립국이 되었다.

나일강 문명을 이룩했던 이집트는 BC 6세기 경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에게 점령당한 이후부터 20세기까지 끊임없이 다양한 민족의 지배를 받았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마침내 1805년 이집트는 사실상 독립국이 되었다. 이집트 총독으로 지명된 무함마드 알리가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1841년 세습 총독권을 획득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수에즈 운하를 건설하면서 프랑스에 막대한 빚을 지게 된 것이다. 이 빚을 빌미로 서양 열강들은 이집트의 내정에 심각한 간섭을 해왔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이집트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라비 파샤는 외세 배격운동을 주도하다가 영국의 포로가 되었다. 결국 이집트는 반영투쟁에서 실패하고 영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했다. 1922년에서야 이집트 왕국으로 독립하였고, 1952년에는 이집트 아랍 공화국이 되었다.
다. 아리비아 반도
아라비아 반도는 7세기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하면서 세계사에 등장했다. 비잔티움제국과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대립으로 육로로 오가던 동서무역로가 막히자 아라비아 반도를 돌아가는 바닷길이 각광받기 시작했고, 아라비아 상인들이 번창하면서 빈부 격차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부자 귀족들에 대항해 평등 사회를 주장하며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하였다. (헤지라 622년) 무함마드는 종교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정통칼리프 시대를 거쳐 우마이야 왕조 그리고 아바스왕조까지는 아라비아 반도 전체가 이슬람국가에 속했다. 그런데 셀주크 튀르크와 오스만제국 때는 메카와 메디나를 포함한 해안가 지역만 포함된다. 일한국은 아예 아라비아반도 쪽으로 내려가지도 않았다. 당시 아라비아반도 내륙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도 오스만제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독립이 관련되어 있는 것은 메카와 메디나 등 오스만 제국이 차지하고 있던 지역을 사우디아라비아가 공격했기 때문이다. 메카와 메디나는 이슬람교의 성지로 초기 무함마드 시대의 순수한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 사우디아라비아로서는 꼭 필요했을 것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와하브 운동은 이슬람의 청교도 운동이라고 불릴 만큼 엄격한 교리를 가지고 있다. 이슬람 공동체가 예언자 무함마드가 선포한 근본원리로 돌아가야만 이슬람의 위대함을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와하브는 아라비아 반도의 약탈자(?), 사우드 가문과 연합하면서 와하브 왕국을 건설하였다. 와하브 왕국은 사우드 제1왕국과 제2왕국, 제3왕국 등으로 나뉘어 불리는데, 제3 왕국이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이다.
사우드 제1왕국은 메카를 점령하였다. 오스만제국이 이슬람교를 변질시켰을 뿐만 아니라 아랍인도 아니기 때문에 그 지배를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사우드 제1왕국은 오스만이 파견한 이집트 군에 의해 무너졌다.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만제국과 싸우며 여러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던 곳을 통합하고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아 1932년 탄생했다.
와하브 운동은 아랍 문화 부흥운동을 촉발시키며 아랍 민족주의의 기반을 마련하고 현대 아랍어를 확립시킨 계기가 되었다.
와하브 운동을 공부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IS의 종교적 뿌리가 와하브운동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아랍에 문외한인 나만 그럴지도 모르지만, ... 여하튼 민족주의가 극단에 이르면 서양처럼 제국주의가 되든가 아니면 근본주의가 되는 것 같아 참 씁쓸하다. 이슬람의 성전, 지하드가 현대에 다시 무슬림 최고의 의무로 떠오른 것도 와하비즘 때문이다.
<주간 경향>에 실린 기사 중에 일부를 발췌했는데, 전문을 읽어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사우디아라비아가 IS의 배후로 지목받는 것도 와하브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IS를 척결하겠다는 미국은 석유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를 비호하고 있다니, 세계의 질서는 참 요지경, 아니 역시 자본의 질서이다.
“IS의 이데올로기적 근거는 사우디가 믿고 있는 이슬람교의 ‘와하비즘’에 있다. 와하비즘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IS의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행동이 이해될 수도 있다.
와하비즘은 이슬람교의 코란에 대한 독특한 해석 방식으로, ‘와하브’라는 이슬람교 신학자로부터 시작됐다. 기독교로 말하자면 이슬람의 청교도주의라고 할 수 있으며 순수한 이슬람교를 지향한다.
18세기 초에 태어난 와하브는 사우디 중부 내륙 ‘나즈드’에서 자랐다. 이슬람교 학자의 눈에는 당시 유행하던 이슬람교의 성자들에 대한 숭배나 묘지 순례와 묘지에서의 죽은 자들에 대한 숭배 등은 모두 유일신 신앙을 부정하는 우상숭배 행위로 보였다. 와하브는 이를 단호하게 지적하면서 유일신 신앙을 강조했다. 당시 대중적이던 이슬람 문화를 부정하고 비판하던 그의 가르침으로 인해 그는 고향에서 쫓겨나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한동안 방황하면서 목숨까지도 위협당하는 처지로 전락해버렸다.
하지만 그를 품고 지켜줄 부족이 나타났다. 현재 사우디 왕가의 조상인 사우드 부족의 부족장들이었다. 1744년, 와하브는 사우드 부족장과 협약을 맺었다. 사우드 부족장은 와하브 부족을 물리력으로 보호하고 이슬람교에 대한 와하브의 신학적 가르침을 퍼뜨리고, 이에 와하브는 사우드 부족장을 지도자로 받들면서 충성하고 영광을 돌린다는 협약을 체결했다. 사우드 부족은 이전에 항상 이웃 부족들을 침공해 학살하고 약탈을 일삼아온 무장한 도적떼와 같은 부족으로 악명을 떨쳤으나 와하브와 결탁이 맺어지면서 종교적 합법성을 획득했다.
이후 와하브와 사우드 부족은 지하드라는 이름 아래 함께 연합해 일대를 정복하고 시아파를 공격하면서 영토를 넓혀 나갔고, 메카와 메디나도 정복해 나갔다. 협약을 맺었던 와하브와 사우드 부족장이 죽고 난 뒤에도 대를 이어 여전히 협약은 유효하게 지켜졌다.“
또 하나의 글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와하비즘 그리고 IS의 이해에 매우 도움이 되는 것 같아 링크를 걸어둔다. 제목은 “사우디 '와하비즘'을 모르면 IS를 이해할 수 없다.” 이다.
라. 이란

지금도 마라톤 경기를 하지 않는다는 이란은 페르시아의 후예를 자처하고 있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 파르티아 왕국 - 사산왕조 페르시아 이후 이 지역은 이슬람에 의해 지배 되었다. 정통칼리프 시대부터 우마이야, 아바스, 셀주크 튀르크, 일한국 시대까지 이슬람제국의 영토에 속했다.
일한국이 해체되면서 티무르제국이 세워졌고, 티무르가 망하면서 튀르크인 지역과 페르시아인 지역이 나뉘게 되었다. 이때 이스마일 1세가 이란 지역에 사파비 왕조를 세우고 페르시아의 영광을 되살리려 하였다. 이때부터 이란 지역은 오스만 제국에 속하지 않고 독립되어 있었다. 사파비 왕조를 이어 카자르 왕조가 20세기 초까지 페르시아의 명맥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 지역의 종교는 여전히 이슬람이었으며, 오스만 제국의 수니파에 대항한 시아파가 주를 이루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카자르 왕조는 근대적 개혁을 실시했지만, 재정 부족으로 서구 열강에게 각종 이권을 빼앗기고 있었다. 1891년 영국에 담배 독점권까지 넘기게 되자 아프가니가 촉발한 담배 불매 운동이 일어났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108>
담배 이권을 지켜내며 승리를 맛본 민중은 이어 입헌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영국과 러시아 등 외세에 의해 좌절되었다. 러시아는 이란의 북부 지방을 점령하였고, 영국은 이란의 남부 지방을 점령하였다. 이란은 1차 세계 대전 이후에야 독립할 수 있었다.

팔레스타인은 제1차 세계 대전을 치르면서 세계에서 가장 난해한 분쟁지역으로 떠올랐다. 팔레스타인의 역사에 대해서는 1,2차 세계 대전을 공부할 때 다루기로 한다.
2. 제국주의를 딛고 일어서는 아프리카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p29>
아프리카는 인류의 고향이다. 최초의 인류가 살았던 탄자니아의 올두바이 계곡에서는 300~500만 년 전의 인류 화석이 많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세계사 교과서의 첫 머리를 장식했던 아프리카는 19세기가 될 때까지 교과서의 어느 곳에도 제대로 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
19세기 아프리카의 등장도 순전히 유럽 제국주의의 침략 대상, 그 희생자로서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주로 갈라먹었고, 독일과 네덜란드가 숟가락을 얹었다는 것과, 몇몇 부족의 저항이 거의 전부이다.
물론 그 사이에 로마나 이슬람제국의 식민지가 된 북부 아프리카 혹은 대서양 무역의 상품으로 끌려간 아프리카 흑인노예가 언급된다. 무엇보다 나일 강 문명도 있다. 그러나 이집트는 아프리카가 아니라 지중해 문명권의 일부로 취급되고 있을 뿐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영국은 이집트의 카이로와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을 이으면서 아프리카를 수직으로 점령했다. 프랑스는 알제리를 거점으로 비스듬한 횡단 선을 그리며 마다가스카르에 이르렀다. 이른바 영국의 종단정책과 프랑스의 횡단정책이다. 두 나라의 종단선과 횡단선이 파쇼다에서 부딪혔다. 그러나 오랜 앙숙사이인 두 제국은 충돌의 위기에서 외교적 협상을 통하여 사이좋게 아프리카를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여기에 중앙아프리카의 콩고를 벨기에가 장악했고, 제국주의 후발 주자인 독일이 뒤늦게 뛰어들어 여기저기를 잔인하게 짓밟았다.
EBS 수능 강의를 보면 시험에 나오는 문제는 대강 이 정도라고 한다. 그나마 중학 강의는 아프리카의 저항 운동을 조금 다루어주고 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제국주의의 침탈에서 살아남은 국가는 딱 두 곳이다.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다. 라이베리아는 미국식민협회가 보낸 해방노예가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제국주의의 침탈에서 애초에 벗어나 있었다. 투쟁을 통해 제국주의를 물리친 나라는 에티오피아가 유일하다.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와의 전투에 승리하며 독립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에티오피아가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에 나오는 그 시바왕국의 일부라고 한다. 에티오피아는 예가체프라는 커피로도 아주 유명하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아프리카인의 저항도 계속되었다. 부족장이나 주술사, 국왕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싸우기도 했고, 이슬람 공동체를 기반으로 저항하기도 했다. 기관총 앞에서 창을 들고 돌격하는 아프리카인들은 일견 무모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런 저항의 물줄기가 조직적인 민족운동을 불러 일으켰다. 역사와 문화가 서로 다른 여러 종족들이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민족의식을 기르고 ‘가나인의 가나’, ‘케냐인의 케냐’ 같은 구호를 만들어 냈다.
<살아있는 세계사교과서 2>의 5장 "제국주의의 침략과 아시아 ·아프리카의 민족운동> 중 1절과 2절을 정리한 것이다. 3장 인도와 4장 동남아시아는 다음 글에서 ...

**추가로 제국주의에 관한 강유원의 글을 조금 옮겨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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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1 : <역사 고전 강의>에서 p432~4
제국주의 시대의 경제적 상황은 흔히 ‘2차 산업혁명’ 이라는 말로 집약됩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기술이 획기적으로 바뀌면서 산업구조가 중공업 중심으로 재편되었습니다. 산업구조가 이렇게 재편됨에 따라 유럽의 열강들은 고무, 철강, 석유 등과 같은 새로운 원자재를 얻기 위해 새로운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술의 변화가 산업구조의 변화로, 다시 원자재 수급의 변화로 이어진 것입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팽창주의적 무역정책을 펼치면서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요컨대 2차 산업혁명의 최종 귀결은 전략적 식민화였습니다. 이 무렵 중심부와 주변부의 지배 종속 관계를 바탕으로 이른바 ‘근대 세계 체제’가 성립했는데, 이 체제가 전략적 식민화와 맞물리면서 제국주의적 경쟁, 즉 팽창주의적 무역 경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1876년에서 1914년까지 세계 육지의 4분의 1이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게 복속되거나 그 나라들 사이에 재분배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경쟁 상황은 너무나 치열한 반면, 해결의 방법은 마땅치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 국제사회의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상위 권위체가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결국 무력으로 사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제국주의적 경쟁을 하는 국가들끼리 사이좋게 지낼 수는 없었을까?’ (.....) 그게 안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2차 산업혁명으로 기술과 산업이 발전하면서 과잉생산이 일어났고 이것이 장기간의 이윤율 하락으로 이어지면서 불황이 발생했습니다. 이윤율이 장기간 하락했다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를 돌리는 동력이 떨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식민지를 독점하고 싼값에 원료를 공급받으려고 한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사태는 익숙한 상황이 아니어서 부르주아들 자신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기도 했습니다. p432~4
추가 2: <인문 고전 강의>에서 p507
경제사를 보면 1873년 경기침체는 1896년까지 약 20년간 이어졌습니다. 그럼에도 전 세계 자본주의 시스템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선도 국가였던 대영제국이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 부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대영제국은 그 많은 돈을 어디서 벌었는지 궁금해집니다. 바로 중국과의 아편무역을 통해서 벌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중국인들이 아편쟁이가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 당시 전 세계 자본주의 시스템은 중국인들이 유지시켜준 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전 세계 자본주의가 하나로 묶여서 움직이는 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말하는 세계화,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의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