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맞아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갔습니다.

열 세명이 모였고요.

지난주에 동양의 지혜에 관해 공부하면서 예전에 읽다가 남겨둔 『인문 고전 강의』의 <논어>편을 읽어보기로 하였습니다.

오늘 그 공부를 했습니다.

어떠셨나요?

따로 정리하지는 않겠습니다.

 

 

다음주는 서아시아에서 발생한 종교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철학>

 p 186 ~ 222 ( p207~211의 필론은 그 다음주에 하니 건너 뛰어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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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하고 길었던 전근대사가 끝났습니다.

오늘 아홉 명이 참석하였습니다.

두 분이 하차해서 이제 정원이 열 한명입니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걱정이 많았습니다.

워낙 내용은 많은데, 거의 대부분이 당장 목표가 없는 탓에 얼마나 오래할 수 있을까 우려했습니다.

열 여섯명으로 시작했으니 많이 빠졌지만 예상보다는 많은 인원이 전근대를 함께 마쳤습니다.

남은 근현대사는 10주 정도 예상합니다.

열 한명은 이왕 완주하기로 결정하신 분들이니 열심히 공부하여 뿌듯함을 느껴보도록 합시다. ^^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이수광은 조선 후기 실학의 대표적 선구자입니다. 최초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지봉유설>은 아시아와 유럽을 포함한 세계 50여 국의 지리, 풍속, 물산 등을 소개하고 있어 세계에 대한 문화인식의 폭을 확대하였다는 평을 듣습니다.

 

 

 

  

18세기 전반 숙종· 영조 시대에 활약했던 이익은 학파를 형성할 정도로 제자를 많이 길러냈습니다. 성호학파는 서학을 연구하였으나 이익 본인을 비롯해 성호 우파로 분류되는 안정복은 종교로서의 천주교는 배척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성호 좌파의 맥을 잇는 정약용, 정약전 등은 천주교 수용으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정약용은 초계문신에 임명되어 정조의 개혁 정치에 참여하였습니다. 정조 사후 신유박해에 연루되어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500여권의 저술을 남겼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농업 중심의 개혁론을 내세운 중농학파와는 달리 중상학파는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을 주장하였습니다. 청의 문물을 수용하여 부국강병과 이용후생에 힘쓰려 했던 이들을 북학파라고도 합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노론 출신의 북학파들은 베이징을 다녀온 후 발달한 청의 문물을 소개하는 기행문을 다수 남겼습니다. 홍대용의 <연기>, 박지원의 <열하일기>, 박제가의 <북학의> 등이 있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조선 후기에는 국학 연구도 활발하였습니다. 실증적이고 자주적인 관점을 도입한 역사연구가 대표적입니다. 안정복은 스승 이익의 역사관을 토대로 강목체 형식의 편년체인 『동사강목』을 썼습니다.  『동사강목』은 '마한 정통론'을 내세워 위만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였고, 삼국시대는 정통이 없는 시대로 분류하여 신라 중심의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비판하였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발해를 민족사에 포함한 이종휘의 『동사』, 유득공의 『발해고』는 협소한 반도적 사관을 극복하고 고대사 연구의 시야를 만주 지방까지 확대하였습니다. 고려말 이승휴의  『제왕운기』는 발해를 우리 역사로 기록한 최초의 역사서입니다. 당대 일연의  『삼국유사』는 발해를 말갈족의 역사로 분류하였습니다. 안정복의 『동사강목』도 발해를 말갈족의 역사로 서술하였습니다.

 

 

 

 

 

 

 

다음주는 근현대사입니다.

 

<전한길의 한국사 합격생 노트>

p 87 ~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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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명이 참석하였습니다.

방학동안 카페에서 매주 화요일에 스타디 모임을 가졌습니다.

3월부터는 매주 월요일, 도서관에서 모입니다.

매달 마지막주에만 화요일에 별도 공지한 장소에서 공부할 예정입니다.

일정에 혼란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2부 신과 철학자들_ 종교적인 중세 철학>,  첫 시간을 가졌습니다.

서양을 기준으로 할 때 중세철학은 종교와 분리될 수 없을텐데요.

동양은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자들이 동양철학을 종교와 관련하여 설명하면서 주제에 맞추어 중세에 배치한 것 같습니다.

오늘 공부했던 시대는 중세는 아니었습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는 기원전 770년경부터 기원전 221년까지입니다.

시대상으로는 고대철학에 해당하겠지요.

 

인도불교의 기초 중에 기초는 사성제四聖諦 와 팔정도八正道  그리고 삼학三學 입니다.

사성제四聖諦는 불교의 근본적 교리로, 고·집·멸·의 네가지 진리입니다.

조악하게라도 설명을 붙이자면, 불교가 바라보는 이 세계는 고입니다.

불교 수행의 목표는 이 세계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르는 것 즉 멸·입니다.  

고통의 원인은 집착, 욕망 즉 집입니다.

에서 벗어나 멸·에 이르는 길을 팔정도八正道라고 합니다.

팔정도八正道는 불교 수행의 여덟가지 올바른 길입니다.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을 말합니다.

기독교의 10계명에 비유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삼학三學은 불교 수행자의 세가지 공부방법으로  계학戒學 · 정학定學 · 혜학慧學을 말합니다.

는 계율을 지키는 것, 정은 마음을 통일하여 수행하는 것,  혜는 진리를 깨우치는 지혜입니다.

삼학을 풀어 놓으면 팔정도가 되고, 팔정도를 간추리면 삼학이 된다는 설법도 있습니다.

삼학과 팔정도는 열반으로 가는 수행의 방법입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는 제자백가의 시대입니다.

가장 혼란했던 시기에 가장 찬란한 사유가 꽃피었다는 것이 역설처럼 들리지만 삶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기존 사회의 틀이 철저히 파괴될 때 출현하였습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고 공자와 노자가 그렇습니다.

 

중국철학 혹은 사상이라고 하면 우리는 제일 먼저 유교를 떠올립니다.

유교가 이천년이 넘게 동아시아의 지배적 이념으로 군림했다는 면에서 당연할 것입니다.

하지만 중국 철학의 바탕에는, 동아시아 문화권의 기저에는, 유교보다 먼저 그리고 가장 깊이 도교적 사유가 흐르고 있습니다.

때를 기다리면 운이 돌아오리라는 생각, 달이 차면 기울듯 우리 생도 일치일란一治을 거듭한다는 낙관적 믿음은 만물은 변화하며 순환한다는 도교적 가치에 근거한 에토스입다.

도교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하며 관점의 차이가 크다고 합니다.

우리 스타디는 교재와 더불어 강유원 선생님의 강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동양철학에 대해 언급할 때는 강유원 선생님의 해석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강유원 선생님도 매우 조심스럽다고 언급하신 바가 있습니다.

다른 책을 읽거나 다른 강의를 들으실 때 유연한 자세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도교道敎 의 도는 만물을 관통하는 법칙이자 만물의 근원입니다.

그 법칙 즉 도는 한마디로 입니다.

만물이 변한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 법칙입니다.

마치 거짓말장이의 역설처럼 들리지요?

물극필반物極必反이니 눈앞의 상황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은 '사물의 형세는 발전이 극에 다다르면 반드시 뒤집히게 마련이라는 뜻으로 사물이나 형세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흥성과 쇠망을 반복하게 마련이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안달복달 허둥지둥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서 노자의 무위無爲가 나옵니다.

무위無爲를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가 중요할 텐데요.

우리가 생각해도 그냥 아무것도 하지말고 감나무 아래서 입만 벌리고 있자는 말은 아닐 것 같습니다.

도교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조금 더 공부하여 가르쳐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동양의 종교철학(?)은 간략히 윤곽만 살펴보는 수준이라 (일명 수박 겉핥기) 내용상으로 우리가 공부한 것은 거의 없습니다.

차츰 성취를 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도교와 대척점에 있는 사상이 유교儒敎입니다.    

유교는 철저히 인문적입니다.

도교에서 는 만물을 관통하는 법칙으로 그 법칙은 자연의 입니다.

유교에서 하늘의 이치인 동시에 인간이 마땅히 해야할 바입니다.

마땅히 해야한다는 것은 도교의 무위無爲와는 상반되는 작위作爲입니다.

인간 행위의 규범, 근거로서의 도입니다.

는 예로써 표현됩니다.

희랍철학에 빗대보면 physis와 nomos라고 해도 될까요?

오늘은 유교에 대해 일반적인 상식 몇 가지만 살펴보고 끝냈습니다.

다음주에 조금 구체적으로 공부할 예정입니다.

 

예전에 남겨 두었던 『인문고전강의』의 마지막 고전인 <논어> 편을 읽으며 공부하겠습니다.

 

 p 525 ~ 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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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사 중에서 가장 힘들지는 않지만 가장 이해하기는 어려운 공부를 하였습니다.

성리학 내부의 사상 논쟁입니다.

16세기 사단칠정 논쟁, 이기논쟁, 18세기 호락논쟁을 조금 이해해보려 하였습니다.

열 명이 함께했고요.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

 

공자를 원류로 삼은 유학은 현실정치를 위한 학문이었습니다.

공자는 15세에 배움에 뜻을 둔 (志學) 이후, 15년간 공부를 하였습니다.

30세에 배움에 자신을 얻어 세상에 나가게 됩니다 (而立). 

무엇인가 조금 알게되자 자기 뜻을 펼쳐보려 한 것입니다.

이무렵 제나라의 경공과 안영이 찾아와 공자에게 진나라 목공이 패자가 된 원인을 물었습니다.

패자가 되고 싶었던 경공이 부국강병책을 물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답이 공자가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은 공식적 발언입니다.

사마천은 『사기』의 <공자세가> 편에 이 내용을 기록함으로써 공자 사상의 기본이 정치라는 것을 밝혀주었습니다.

공자는 어떻게 정치를 할 것인가를 평생동안 묻고 답했던 것입니다.

춘추전국의 난세에 만발했던 제자백가는 이런 혼란한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정치 사상이 주를 이룹니다.

유학을 국가에서 공식 이념으로 받아들인 한나라 때에도 유학은 현실정치를 위한 학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위진남북조, 수, 당을 거치며 유학이 쇠퇴했습니다.

이 시기에 철학적 사색을 주로하는 불교, 도교 등이 유행했습니다.

송대에 다시 부상한 유학은 이런 영향을 받아 철학적, 사변적으로 변모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사조를 신유학 혹은 이학, 도학이라고 합니다.

신유학을 주희가 집대성하였기 때문에 성리학을 주자학이라고도 부르지만, 성리학은 주희의 독자적 사상은 아닙니다.

협의로 볼 때만 주자학이 성리학과 일치합니다.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

 

성리학은 13세기 말 충렬왕 때 안향에 의해 도입되었습니다.

조선의 통치이념으로 정착된 성리학은 16세기에 꽃을 피웁니다.

16세기 성리학을 둘러싼 논쟁의 핵심 주제는 이기론理氣論 이었습니다.

를 중심으로 볼 것인가, 기氣를 중심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 주리론과 주기론으로 나뉘었습니다.

주리론主理論은 이언적에서 이황으로 이어져 영남학파가, 주기론主氣論은 서경덕에서 기대승, 이이로 계승되어 기호학파가 주장하였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

 

이들의 논쟁 중 치열했던 것이 사단칠정론입니다.

사단칠정론(사칠논변)은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 8년간이나 지속 되었던 논쟁입니다.

이이는 이 논쟁에서 기대승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사단칠정론은 양대 학파를 중심으로 이후로도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내노라하는 대학자들이 수백년을 이어 이 까다로운 논쟁을 그치지 않았으니, 누가 옳은지 우리로서는 알기 어렵습니다.

성리학 자체를 학문적으로 배워본 적이 없으니 당연할 것입니다.

여기서 이가 무엇이고 기氣가 무엇이고를 정의한다는 것 자체가 당치않은 일이 될 것입니다.

다만 주리론主理論은 이기불상잡理氣不相雜을, 주기론主氣論은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를 주장했다는 사실만 옮겨놓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기논쟁을 이해하는 가장 쉬운 단서가 아닐까 싶기 때문입니다.

주리론의 입장은 이와 기氣는 서로 섞일 수 없고, 각각 발현된다는 것입니다. (이기호발설, 이기이원론)

주기론은 이와 기氣는 서로 분리될 수 없고, 발현되는 것은 오로지 기氣이고 이는 기氣에 올라탄다고 합니다. (기발이승일도설, 일원론적 이기이원론,이통기국론)

서양 철학에서 플라톤은 형상(이데아)과 사물은 분리되어 각각 다른 세계에 있다는 두 세계 이론을 주장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과 사물은 분리될 수 없고 형상은 사물 안에 있다는 형상 내재론을 주장하였습니다.

불상잡과 불상리도 같은 맥락으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理(원리,법칙)는 서양 철학의 형상(본질, 원리)에 해당하고, 기氣는 사물과는 다르지만 여하튼 유형의 것이라 할 수 있으니 대응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

 

양란 이후 성리학은 교조화, 절대화하였습니다.

성리학적 통치이념 위에 세워진 조선은 양란으로 국토가 철저히 유린되고 백성들의 삶이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책임을 져야할 왕조도 지배층도 붕괴되지 않았습니다.

땅에 떨어진 권위를 다시 세워 백성을 통치하기 위해서 지배층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실패한 성리학을 절대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자도 신격화 하였고, 집권 서인-노론을 이끌었던 송시열도 송자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

 

권력에서 밀려난 남인과 소론을 중심으로 성리학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습니다.

성리학은 유학에 대한 주자의 해석입니다.

유학에 대한 하나의 주석에 불과한 것입니다.

양란은 통치이념으로서의 성리학이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에 대한 비판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자의 시각을 벗어나 초기 유학을 스스로 해석하여 당대의 모순을 해결하려 했던 이들 비판적 학자들은 서인-노론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매도당합니다.

사문斯文 즉 이 문화란 원래는 공자가 주나라의 문화를 가리켜 썼던 용어입니다.

논어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문왕의 사후 문화 전통은 내 몸에 있지 않은가? 하늘이 이 문화를 멸망시키려고 한다면 나를 이곳에서 죽게 하여 후세 사람들이 문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이 문화를 보존하려고 한다면 광인들이 나를 어찌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 집권층은 주자학을 사문으로 규정하여 주자학이 아닌 모든 유학 해석을 사문난적으로 몰았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

 

새로운 유학에 대한 요구가 조선 전기부터 있었습니다.

중종 때 소개된 양명학이 그것입니다.

서경덕 학파에 의해 수용되었는데, 이황에 의해 배척되었습니다.

이황은 양명학의 창시자 왕양명이 쓴 『전습록』을 비판한  『전습록변』을 지었습니다.

서경덕 학파는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반면 이황은 문묘에 종사되는 등 조선 후기 사림의 한 축으로 군림했기 때문에 양명학은 주류 학계에서 퇴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황이 양명학을 거칠게 비판한 이유는 양명학이 내포한 평등사상이 성리학의 대의명분론과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명분名分이란 이름과 신분에 걸맞게 지켜야 할 도리입니다.

양반은 양반답게, 서민은 서민답게 지켜야 할 도리가 달리 있습니다.

명분은 신분에 따른 명확한 구분과 신분 차별 사회의 논리로 기능한 것입니다.

명분론을 뒷받침하는 성리학의 중심사상은 격물치지格物致知입니다.

『대학』에 나오는 구절인데 성리학적 신분질서를 뒷받침하는 논거로 해석되었습니다.

앎은 물物에 대한 깊은 탐구(格) 끝에 이를 수 있습니다.

공부를 해야 이치와 도리를 알 수 있고, 이치와 도리를 알아야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선지후행先知後行 입니다.

신분제 사회에서 공부 할 수 있는 계층은 양반뿐입니다.

양반만이 올바른 앎과 올바른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의미가 내포된 것입니다.

 

양명학의 핵심은 양지良知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 이미 올바른 앎을 갖고 있습니다.

보편적, 선험적 앎은 행위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앎과 행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일치되어 있습니다.

지행합일知行合一 입니다.

지배계층만이 아니라 누구나 올바른 행위를 통해 이치와 도리를 깨닫고 실행할 수 있습니다.

양명학에 내포된 사상은 평등입니다.

조선후기 양명학을 계승 발전시킨 강화학파는 신분제도의 폐지를 주장합니다.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

 

성리학을 교조화하고 그외의 학문을 모두 사문난적으로 내모는데 앞장선 인물은 단연 송시열입니다.

효종, 현종, 숙종까지 세명의 왕을 모시면서  서인-노론의 영수로 군림한 송시열은 기사환국의 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사약을 받았습니다.

송시열이 죽을 때 제자 권상하에게 유언하여 지은 것이 만동묘입니다.

만동묘는 후에 노론의 소굴이 되어 많은 폐해를 끼치는데, 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었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

 

18세기에 집권 노론 내부에서 일어난 논쟁이 호락논쟁입니다.

송시열의 제자인 권상하의 제자들 사이에서 호락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호락논쟁의 핵심은 인물성동이논쟁입니다.

충청 노론인 호론파는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조선과 오랑캐인 청은 본성이 다르기 때문에 청의 문물이 아무리 발전했다 하더라도 오랑캐, 짐승의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경기,서울 노론인 낙론파는 인성과 물성이 같다고 주장하며 청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호론은 위정척사파로, 낙론은 북학파로 계승됩니다.

 

 

다음주는 전근대 마지막 시간입니다.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

  p 83 ~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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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후 첫 스타디했습니다.

열 세명이 참석했고요.

고대 철학을 마무리했습니다.

 

제목에 붙은 험난한 시대는 대략 기원전 330년경부터 기원후 200년 경까지의 약 500년을 가리킵니다.

알렉산드로스가 아메케네스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대제국을 건설한 이후 희랍의 문화는 지중해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제국은 분열되어 알렉산드로스를 따르던 세 장군이 각각 왕조를 만들었습니다.

안티고노스, 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그것입니다.

 

<용선생 세계사>

 

알렉산드로스 제국부터 이 세왕조가 멸망한 기원전 30년경까지를 보통 헬레니즘 시대라고 부릅니다.

헬레니즘 시대 이후에 지중해 세계의 패권은 로마제국이 쥐었습니다. 

기원전 27년에 로마의 첫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 이후 약 200년간 로마제국은 전성기를 구가하였습니다.

특히 5현제에 의해 구가된 시기를 팍스 로마나라고 부르는데, 5현제의 마지막이 스토아 철학자의 대표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입니다.

그는 기원후 180년에 살해되었습니다.

대략 이 시대까지 유행한 철학이 우리가 오늘 살펴본 '험난한 시대'의 철학입니다.

 

이 시기 철학은 '앎을 폐기하고 삶의 방식으로서의 철학'을 추구하였습니다.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고민한 처세술로서의 윤리학과 행복과 안락의 추구, 따라서 지적 조악함을 드러낸 통속성 등이 그 특징입니다.

 

희랍의 폴리스시대의 붕괴는 정치적 삶의 소멸이기도 합니다.

희랍 폴리스가 알렉산드로스 제국으로 병합되면서 시민이 사라지고 신민이 등장하였습니다.

폴리스의 시민은 폴리스를 떠나서 즉 정치적 삶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공공의 영역에서 폴리스의 정치를 고민했던 시민이 사라지자 정치적 활력도 소멸되었습니다.

코스모폴리스의 신민은 더 이상 정치에 참여할 수 없으므로, 개인 속으로 침잠하였습니다.

공적 영역이 붕괴되자 사적 영역으로 퇴각한 것입니다.

이 시대 철학의 목적은 안심입명, 평온하고 자족적인 삶에 관한 사색입니다.

 

대표적 철학으로는 에피쿠로스 학파, 스토아 학파, 회의주의가 있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아타락시아, 불안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였습니다.

방법으로는 마음맞는 친구들끼리 모여 삶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입니다.

스토아 학파는 아파테이아, 정념을 억누르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흔히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스토아는 금욕을 주장했다고 하면서 두 학파를 대립시킵니다.

얼핏 보기에 두 학파가 극단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방법의 면에서 차이가 있을 뿐 목적은 거의 유사합니다.

쾌락을 통하건 금욕을 통해서건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마음의 평온과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기 충족적인 삶입니다. 

이 시대 철학은 지적인 조악함이라는 표현이 말해 주듯  철학적으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대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력이라는 면에서는 철학의 두 거장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능가합니다. 

 

" 스토아 철학은 극단적인 철학이지만 어렵고 혼란한 시대에 많은 영혼에 봉사할 수 있는 철학이었다. 그리하여 로마와 로마제국 전역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이 시대 철학을 조금 엿볼 수 있는 책이 있어 소개합니다.

알랭 드 보통의 『철학의 위안』은 제목에서도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적 특징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책에는 철학사 전반에 걸쳐 위안을 줄 수 있는 철학이 소개되어 있어 헬레니즘 시대 철학은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어렵지 않게 가볍게 읽을 수 있습니다.

 

 

 

 

다음주에는 2부 신과 철학자들 - 종교적인 중세 철학에 들어갑니다.

그 첫번 째로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 사상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세상의 모든 철학>

 p 155 ~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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