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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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는 기원전 12~13세기 경에 실제한 것으로 추정되는 트로이아 전쟁에 관한 서사시이다.  서사시의 배경은 영웅들이 활약하는 청동기 미케네 문명의 마지막 시기로, 이 전쟁 직후 미케네 문명은 남하한 도리아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철기 시대를 맞은 희랍 세계는 이른바 암흑기를 거쳐 기원전 8세기 무렵부터 고전기 희랍문명을 꽃피우는 폴리스 시대로 접어들었다. 

 

호메로스의 실존 여부와 실존 시기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기원전 8세기 무렵 호메로스가  400년 전에 있었던 트로이아 전쟁에 관해 구전되던 전설을 서사시의 형태로 완성한 것이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라고 알려져 있다. 

 

트로이아 전쟁 10년을 다룬 , 물론 실제로는 10년 중 단 몇일에 관한 노래이지만, 『일리아스』가 영웅들의 대서사시인 반면 전쟁을 끝낸 오뒷세우스가 집으로 돌아기까지 겪어야 하는 10년 동안의 고난을 노래한 『오뒷세이아』가 영웅성을 상실한 현실적 인간들의 이야기에 가까운 것은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이행하는 시대적 배경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청동기 시대는 값비싼 전차를 타고 번쩍이는 무구들을 자랑하며 신들의 도움으로 전쟁을 하는 귀족 영웅들의 시대이지만 철기 시대는 평민들이 전쟁에 참가하여 밀집군단을 이루어 적을 밀어내는 인간들의 단결과 인내와 지혜가 요구되는 시대이다.

 

해설 (p773) 에는 "『일리아스』의 주인공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분노 때문에 수많은 영웅들을 희생시킴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는 데 반해, 『오뒷세이아』의 주인공 오뒷세우스는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지혜와 끈기로 운명을 개척해나감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입증한다. 그러므로 『일리아스』가 오직 용기와 명성만을 추구하던 옛 가치관을 이상화했다면 『오뒷세이아』는 현실에 유연하게 대처해나가는 새 시대의 가치관을 이상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고 두 작품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일리아스』는 영웅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한다. 1권 1행부터 7행까지가 서사시의 내용을 압축하고 있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아카이오이족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숱한 영웅들의 굳센 혼백을 하데스에게 보내고

 그들 자신은 개들과 온갖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한 그 잔혹한 분노를!

 인간들의 왕인 아트레우스의 아들과

 고귀한 아킬레우스가 처음에 서로 다투고 갈라선 그날부터

 이렇듯 제우스의 뜻은 이루어졌도다. "

 

 

아킬레우스가 그들의 지도자인 아가멤논 (아트레우스의 아들)과 다투고 어머니 테티스 여신에게 아카이오이족을(자기편) 패배하게 해달라고 조른 이유는 '명예' 때문이다. 아가멤논이 자신의 명예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일리아스』 에서 명예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전쟁에서 약탈한 여자, 청동 무구, 전차, 세발 솥 등의 물질로 형상화 된다. 아가멤논이 볼이 예쁜 브리세이스를 데려간 것은 여자를 뺏어간 것이 아니라 아킬레우스를 모욕하고 그의 명예를 짓밟은 것이다.  볼이 예쁜 브리세이스는 인근의 도시를 파괴하고 데려온 노예로, 전쟁에서 약탈한 사람과 재물은 공로에 따라 배분되기 때문에 그 자체가 '명예의 선물' 이다.

 

'명예의 선물'을 빼앗긴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함선에 드러누워 트로이아인들과의 전투에서 아카이오이족의 영웅들이 죽어가고 그들이 타고 온 함선들이 불타는 데에도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동료 영웅들이 찾아와 간절히 부탁을 해도 분노를 거두지 않는다. 아카이오이족이 모두 전멸하여 자신이 아니고는 아카이오이족을 구원할 영웅이 없다는 것이 입증되지 않는 한 전투에 참가할 마음이 없다. 명예는 이 세상 전체와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아킬레우스가 마음을 돌린 것은 자신의 머리만큼이나 소중한 파트로클로스를 잃고 난 이후이다. 브리세이스를 빼앗겼을 때의 분노에 비할 수 없는 펄펄 끓는 분노로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를 죽인 헥토르를 죽이고 그의 시신을 모욕한다.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이 아킬레우스에게 진정한 명예를 선택하게 한 것이다. 신들은 아킬레우스가 태어났을 때 이미 두 가지 운명 중 하나를 선택하게 예정해 놓았다. 

 

"나의 어머니 은족의 여신 테티스께서 늘 말씀하시기를,

 두 가지 상반된 죽음의 운명이 나를 죽음의 종말로 인도할

 것이라고 하셨소. 내가 이곳에 머물러 트로이아인들의 도시를

 포위한다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막힐 것이나 내 명성은

 불멸할 것이오. 하나 내가 사랑하는 고향땅으로 돌아간다면

 나의 높은 명성은 사라질 것이나 내 수명은 길어지고

 내게 죽음의 종말이 서둘러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오."

 (9권 410~416행)

 

볼이 예쁜 브리세이스를 빼앗긴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명예 때문이지만 어쩌면 주어진 운명에서 수명을 선택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약탈에 대한 댓가로 주어진 명예는 사적인 명예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지 않을까.

 

진정한 명예는 '자신을 희생하여 위기에 빠진 공동체를 구하는 것'에 있다.  철없는 분노로 머리만큼 사랑하는 파트로클로스를 잃고 나서야 아킬레우스는 공동체를 구하는 것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지키고 명예를 얻는 길임을 깨닫는다. 깨달음은 그저 오지 않는다. 자신의 반을 잃고 나서야 겨우 얻을 수 있는 것이 깨달음, 지혜이다. 그 겪음을 회피하고는 결코 지혜를 얻을 수 없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파테이 마토스'에 대한 기나긴 가르침이다.  

 

 

 

 

 

자기 희생으로 얻어진 아킬레우스의 명예는 적에 대한 관용이 보태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머리만큼 소중한 파트로클로스의 복수에 불타 올랐던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마지막 애원도 싸늘하게 거절하고 그의 시신을 전차에 매달아 끌고 다니다 개의 먹이로 던져주려고 한다.

 

"이 개자식아! 무릎이나 어버이를 들먹이며 내게 애원하지 마라.

 그대의 소행을 생각하면 너무나 분하고 괘씸해서

 내 손수 그대의 살을 저며 날로 먹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니 그대의 머리에서 개를 쫓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설령 그들이 열 곱절 또는 스무 곱절이나 되는 몸값을 가져와

 여기서 달아주고 거기다 더 많은 것을 약속한다 해도

 아니, 설령 다르다노스의 후예인 프리아모스가 그대의 몸무게만 한

 황금을 달아주라고 명령한다 해도 그대의 존경스러운 어머니는

 결코 몸소 낳은 자식인 그대를 침상에 뉘고 슬퍼하지 못할 것이며

 개 떼와 새 떼가 남김없이 그대를 뜯어먹게 하리라!"

 

그러나 트로이아의 왕인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가 단신으로 찾아와 아들의 몸값을 받고 시신을 돌려 달라고 애원하자, 아킬레우스는 고향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아버지를 떠올린다. 그의 아버지 역시 예정된 운명에 따라 다시는 사랑하는 자식인 자신을 볼 수 없을 것이며, 여기 무릎 꿇고 애원하는 프리아모스처럼 슬퍼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아버지를 통해 적개심이 아니라 공감할 수 있는 인간애를 느끼며 보편적 인간성에 대한 인식에 이른다. 아킬레우스의 명예는 사적인 명예에서 시작해서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공적인 명예, 더 나아가 인류 전체를 포용하는 명예로 완성된다.  영웅들을 그리는데 한없이 편파적인 『일리아스』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전으로 읽힐 수 있는 이유는 이 마지막 공감과 화해에 있을 것이다.

 

 

『일리아스』에는 수많은 영웅들이 나온다. 도대체 몇 명이나 되는지 헤아려 볼 엄두도 나지 않는다.  이 영웅들은 대개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기보다 '~의 아들' 로 불린다. 아킬레우스도 '펠레우스의 아들'로 더 자주 불린다. 아가멤논은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이아스는 텔라몬의 아들, 디오메데스는 튀데우스의 아들, 오뒷세우스는 라에르테스의 아들이다. 심지어는 신들의 왕인 제우스조차도 '크로노스의 아들'로 즐겨 불린다.  

 

 

 

희랍인에게 이름은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 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이었을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이름에 의해 평가받기 때문이다. 명예로운 아버지를 둔 아들은 명예롭게, 비굴한 아버지를 둔 아들은 비굴하게 여겨질 것이다.

 

이름에 의해 인간은 불멸을 획득한다.  아버지는 아들에 의해, 아들은 그의 아들에 의해 그 이름을 불리며 죽음 이후에도 살아간다. 해마다 나뭇잎은 돋아나서 떨어지고 새 잎으로 갈리지만 나무는 그 세월 속에 둥치를 늘려 가듯이 육신은 죽어도 이름은 영원토록 이어지며 명예에 명예를 더하는 것이다. DNA가 육신을 바꿔가며 영원히 유전되는 것은 모든 생물에게 공통이지만 이름으로 불멸을 획득하는 것은 인간뿐이다.

 

아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부르는 공동체가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는 그 이름을 아름답게 남기는 것, 명예일 수밖에 없다. 희랍인은 '자신을 희생하여 위기에 처한 공동체를 구하는 것'에 최고의 명예를 주었다.

 

폴리스의 시민들은 『일리아스』의 영웅들을 노래하며, 끊임없이 시민들의 덕성을 길렀을 것이다. 기원전 5~6세기에 만든 도기들에는 서사시의 장면들이 세세히 그려져 있다. 포도주를 희석하는 희석용 동이에도, 술잔에도, 항아리에도, 접시에도 피할 수 없는 운명에 굴하지 않는 당당하고 늠름한 영웅들의 모습이 생생히 살아있다. 그들의 식탁과 잔치에 올랐을 도기들이 보여주는 영웅들이 그들이 되고 싶은 모습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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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 - 그리스어 원전 번역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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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최초의 서사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 는 묵직한 돌처럼 가슴 한켠을 누르고 있었다. 이 책들을 입에 올릴 때마다 사기를 치는 느낌도 있었다. 읽어 보지도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 죄의식 같은 것을 갖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고전은 갚지 못한 빚이다. 인문학 강좌가 늘어나면서 읽지 않은 고전들에 대해 듣고 말할 기회도 점점 늘어난다. JTBC의 <차이나는 클라스> 에도 EBS의 <지식의 기쁨>에도 아킬레우스와 오뒷세우스가 되풀이 등장하여 신과 인간과 운명을 노래한다. 

 

내가 호메로스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강유원의 『인문고전강의』를 통해서였다. 'in medias res' - 사건의 한가운데로 돌진하는 서사시의 전개방식부터 흥미로웠고, 무엇보다 이들 영웅의 시대가 추구하는 가치관이 놀라웠다.

 

불멸하는 신의 혈통과 필멸하는 인간의 혈통을 반반씩 물려받은 영웅이란 존재는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플라톤의 에로스처럼 메탁시, 중간자이다. 불멸의 신성을 추구하지만 인간의 필멸성에 발목잡힌 영웅은 짧은 인간의 수명마저 채우지 못하고 자신을 희생하여 위기에 빠진 공동체를 구해야 한다. 영웅의 불멸성은 바로 그때 획득 된다.  그 희생이 영원한 이름을 역사에 새기기 때문이다. 아킬레우스는 신탁에도 불구하고 혹은 바로 그 신탁의 의미를 알기 때문에 죽음을 예언하는 전장에 무구를 갖추고 나아가야 한다.

 

『일리아스』는 일리온의 노래란 뜻이다. 일리온은 트로이를 가리키므로, 우리가 알고 있는 트로이 전쟁을 노래한 서사시이다. 이 전쟁을 끝으로 영웅의 시대는 끝나고 인간의 시대로 이행한다. 역사적으로는 청동기를 배경으로 한 미케네 문명이 끝나고 도리아인의 침입과 함께 철기 시대가 시작된다.

 

트로이에서 죽은 『일리아스』의 주인공 아킬레우스가 영웅을 대표한다면, 함께 싸우고도 살아남아 갖은 고난을 겪고 고향으로 돌아온 『오뒷세이아』의 오뒷세우스는 이행기의 인간상을 보여주는 상징적 인물이다. 

 

명예, 이름을 위해 목숨을 버린 아킬레우스와 달리 오뒷세우스는 스스로의 이름을 감추고 '아무도 아닌 자- 우티스'가 되어서라도 살아 남기를 택한다. 오뒷세우스는 살아서 저승에 내려가, 죽은 아킬레우스를 만나는데, 이때 만난 아킬레우스는 시쳇말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최고' 라며 한탄을 한다.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 이름을 남기던 영웅의 시대는 '한숨의 미풍에 날어갔다.'

 

내게는 꾀 많은 오뒷세우스보다 운명에 곧바로 뛰어드는 아킬레우스가 여전히 매혹적이지만 인간의 길을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오뒷세이아』이다. '참을성이 많은' 오뒷세우스가 기나긴 고난을 빠짐없이 겪고 나서야 고향으로 돌아와서 아들과 아내와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삶도 그러할 것이다.  지름길은 없다.  지름길은 삶 자체가 빠진 길이다. 굽고 휘어진 그 기나긴 길 위에서 비로소 인간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이 먹고 자고 뒹구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유에 있다고 믿는다면, 인간의 본질이 정신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희랍인이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파테이 마토스 pathei mathos' , 지혜는 고난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므로.

 

『오뒷세이아』를 읽는 것은 예상과 달리 어렵지 않았다. 역자의 말처럼 가능한한 서사시의 운율에 맞추어 번역했기 때문인지, 소리내어 읽어도 묵독을 해도 리듬을 타면서 술술술 읽혔다. 오뒷세우스의 기이한 모험도 그 모험이 담고 있는 의미도 놀라웠다. 『길가메쉬 서사시』를 읽을 때도 느꼈던 것처럼, 수 천 년 전의 인간, 문명의 여명기의 인간들의 사고의 깊이가 지금 우리의 그것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인간은 '본성적으로 알고 싶어' 하는 존재이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오뒷세이아』는 신이 아닌 인간이 진정한 앎에 이르는 방법, 지혜를 얻는 방법에 관한 기나긴 서사이기도 하다. 이제  두려움 없이 『일리아스』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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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운의 변동 분류

 

 

 

 

음운은 '말의 뜻을 구분하는 소리의 최소 단위'로 정의되지만, 여기서는 간단히 모음과 자음이라고 생각해도 된다. 한글의 음운은 총 40개로 모음 21개와 자음 19개이다. 음운은 音, 말 그대로 소리다.

 

 

음운의 변동이란 40개의 소리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소리가 변하는 것이다. 크게 교체, 첨가, 탈락, 축약으로 구분한다.

 

 

교체는 하나의 음이 다른 음으로 바뀌는 현상이다. 1:1로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음운 개수에는 변화가 없다.  첨가는 없던 소리가 덧나는 것이다.  음운 개수는 늘어난다.  탈락은 첨가와 반대로 소리가 떨어져 나가는 현상이다. 음운 개수는 줄어든다. 축약은 탈락과 동일하게 음운 개수는 줄어들지만, 그 방법이 다르다. 탈락은 두 소리 중 어느 하나가 없어지는 반면, 축약은 두 소리가 합쳐져 전혀 다른 하나의 소리가 된다.

 

지금까지 자음에 발생하는 중요한 음운의 변동은 거의 살펴 보았다. 모음은 자음만큼 변동이 많지 않고 비중이 높지도 않은 듯하다.  주요한 모음의 변동을 한꺼번에 모아서 간단히 정리한다.

 

 

 

 

2. 전설 모음화 ('ㅣ' 역행 동화) : 교체

 

먼저, 전설 모음화 자체는 표준 발음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도 음운의 변동에 들어가는 것은  몇몇 경우 표준 발음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특히 일상에서 긴가민가하는 것들이 많아 알아두면 좋을 것 같다.

 

 

 

 

 

모음에 대해서는 <문법2. 모음> 에서 정리했다. 단모음 10개는 혀의 위치를 기준으로 후설모음과 전설모음으로 나뉜다. 후설 모음의 기본음은 'ㅡ'이고 전설 모음의 기본음은 'ㅣ' 이다.

 

앞 음절의 후설 모음이 뒤 음절의 전설모음 'ㅣ'에 의해 전설모음으로 바뀌는 현상을 전설모음화 혹은 'ㅣ' 모음 역행 동화라 한다.  'ㅓ'라는 소리는  'ㅔ'로 'ㅏ'라는 소리는 'ㅐ'로 바뀐다.

 

한글을 창제할 때 제자원리도 이에 기반한 듯, 'ㅓ'라는 자모에  'ㅣ'를 추가하여 'ㅔ'로,  'ㅏ'라는 자모에 'ㅣ'를 추가하여 'ㅐ'로 표기하도록 하였다. 위 문단의 'ㅓ'나 'ㅏ'는 소리(母音)를, 이 문단의 'ㅓ'나 'ㅏ'는 글자(字母)를 가리킨다. 글자로 쓰면 똑같지만 , 의미상 다르다는 것이다.

 

 

 

 

 

남비는 일본어 '나베'에서 왔으므로, 원형을 밝히면 남비이지만 일본어라는 의식이 거의 사라졌으므로, 냄비를 표준어로 인정한다. 

 

'남비 → 냄비 '  : '비'에서 모음 'ㅣ'는 전설 모음이다. '남'에서 후설 모음 'ㅏ'가 'ㅣ'로 인해 전설 모음인 'ㅐ'로 바뀌어 '냄'이 된다.  뒤 음절 'ㅣ'에 의해 앞 음절의 모음이 바뀌었으므로 순서상 '역행' 이다. 전설 모음화를 'ㅣ'모음 역행 동화라고도 하는 이유이다.  남비우동이 아니고 냄비우동 ^^

 

'-나기' 는 '~로부터 나다' 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서울나기는 서울 태생이라는 의미, 시골나기는 시골 출신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런 의미를 가진 다양한 말들이 '-나기'가 아니라 '-내기'로 더 많이 쓰이고 있기 때문에 표준어는 '-내기'로 통일된다. 서울내기, 시골내기 뿐 아니라 새내기, 풋내기, 보통내기, 여간내기 등등.

 

'내기'로의 동화 현상은 '기'의 전설모음 'ㅣ'에 의해 '나'의 후설 모음 'ㅏ'가 'ㅐ'로 전설모음화 한 것이다.  따라서 '나기 → 내기' 변한다.

 

 

 

 

 

 

많이 헷갈리는 '아지랭이 vs 아지랑이' 는 아지랑이를 표준어로 삼는다.  전설 모음화는 표준 발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원칙의 대표적 사례다.  일상에서는 두 발음이  혼용되고 있으므로 구별해서 알아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전설 모음화는 음운현상이다. 그런데 동화된 발음이 표준어가 되는 경우에는 맞춤법도 동화된 소리에  따른다. 우리가 이때까지 공부한 대부분의 자음 관련 음운의 변동에서는 표기는 형태소를 밝히어 적고, 표준 발음만 음운 변동을 적용한 것과는 다르다.  아지랑이라 쓰고 그대로 〔아지랑이〕, 냄비는 〔냄비〕 등 소리나는 대로 쓴다.

 

 

붙임2는 진짜 재미있다. 장이냐? 쟁이냐? 결론은 둘 다 발음한다. 단 장이는 장인 즉 수공업 기술자에게만 붙인다. 미장이, 칠장이, 유기장이 등. 그 외의 것들은 모두 쟁이를 쓴다. 멋쟁이, 개구쟁이 등등.

 

그러면 점쟁이 ? 점장이? 는 무엇이 표준어일까? 점치는 사람은 존중의 측면에서건 비하의 측면에서건 장인은 아니다. 장인은 물질을 다루는 기술자인 반면 점쟁이는 형이상학의 영역을 다루고 있으니까. 점쟁이.

 

요즘은 지칭할 경우가 없지만, 갓장이와 갓쟁이는 둘 다 사용할 수 있다. 갓장이는 갓을 만드는 장인, 갓쟁이는 양반티를 낸다고 갓을 쓴 사람을 낮잡아 부르는 소리다.  화가를 낮잡아 부를 때는 환쟁이다.

 

 

표준어가 아닌데 'ㅣ'모음 역행동화를 적용하여 발음하는 경우도 많다. 어미와 아비를 〔에미〕〔애비〕로,  고기를 〔괴기〕로 발음하는 것은 교양있는 현대 서울내기의 언어생활이 아니다.

 

 

 

3. 반모음 첨가

 

모음에서 교체 현상의 대표가 전설 모음화라면, 첨가 현상에서는 반모음 첨가가 대표적이다.  전설 모음화가 'ㅣ모음 역행 동화' 라면 반모음 첨가는 'ㅣ 모음 순행 동화'라고 불렸다.  전설 모음인 'ㅣ'에 의해 후설 모음이 전설 모음으로 바뀌는 것은 마찬가지이나 영향을 주는 방향이 다르다.

 

두 현상 모두 일반적 법칙이 아니라 특수한 사례에서만 음운 변동으로 인정된다. 단, 전설 모음화는 표준 발음으로 인정되는 경우 맞춤법도 발음에 따라 표기된다. 그러나 반모음 첨가는 표준 발음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표준 발음 이외에 허용되는 현상이므로 표기에는 반영되지 않는다.

 

 

 

 

 

반모음 첨가는 어간이 전설 모음 ' ㅣ, ㅟ, ㅚ'로 끝나고 'ㅓ'로 시작하는 어미가 뒤이어 올 경우 두 모음의 충돌을 막기 위해 그 사이에 '반모음ㅣ'가 덧붙는 현상이다.

 

 

 

 

첨가된 '반모음 ㅣ'는 어미의 후설 모음 'ㅓ'와 결합하여 전설 이중 모음인 'ㅕ'가 된다. '반모음 ㅣ'가 전설 모음이므로 이 모음이 결합된 이중 모음도  전설 이중 모음이라고 부른다.  반모음 첨가는 어간의 전설 모음에 의해 어미의 후설 모음이 전설 모음이 되었으니 동화에 해당한다.

 

'ㅟ, ㅚ'는 'ㅣ'와 동일하게 단모음이지만,  자모상으로는 'ㅣ'로 끝나는 형태이므로 통칭하여 'ㅣ' 모음 순행 동화라고도 불렸다.  제자 원리로  'ㅚ'는 'ㅗ'에 'ㅣ'가 결합한 자모이다.  물론 소리로는 별개의 독자적인 소리다.

 

 

반모음 첨가의 사례는 많지 않다.  용언 '피어, 되어' 와 이에 준하여 변동하는 '이오, 아니오' 만 기억해 두어도 충분하다. 이 말들의 표준 발음법과 한글 맞춤법은 음운 변동과 관련이 없다. 그대로 표기하고 그대로 발음하는 것이 원칙이다. 반모음 첨가 현상은 단지 허용되는 음운의 변동일 따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피어' 와 '되어' 는 각각 '피-' 와 '되-'가 어간이다.  어간의 말음인 'ㅣ'와 'ㅚ'에 의해서 어미의 첫소리인 'ㅓ'가 'ㅕ'로 바뀌는 반모음 첨가가 허용된다.  

 

'이오'와 '아니오'는 각각 '이'와 '니'의 모음 'ㅣ'에 의해 뒤 음절의 ' 오'가 '반모음 ㅣ'의  첨가를 받아 '요'가 되는 것을 허용한다.

 

 

 

4. 모음 탈락

 

두 개의 모음이 만났을 때, 한 개의 모음이 탈락하는 현상이다.  'ㅡ' 탈락과 동음 탈락이 대표적인데,  어간의 끝소리와 어미의 첫소리가 둘 다 모음일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음운 변동이지만, 한글 맞춤법에 관련 항목들이 있다. 모음이 탈락하면 준대로 표기한다는 원칙이다.

 

 

 

 

 

문법의 기본에 해당하는 품사에 대해서는 아직 정리하지 않았다. 품사는 "단어를 기능, 형태, 의미에 따라 나눈 갈래" 로 정의된다. 쉽게 말하면  한글의 모든 낱말을 3가지 기준으로 분류해서 낱말마다, 너는 "용언/변화어/동사" 세트야 라고 라벨링을 한다는 것이다.  기능에 따라 나눌 때 낱말은 체언, 용언, 수식언, 관계언, 독립언 중 하나에 속한다.

 

용언은 문장에서 서술의 기능을 하며 동사와 형용사가 이에 해당한다. 용언은 활용한다는 특징이 있다. 모양이 변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밥'이라는 체언의 경우는 어떻게 쓰여도 '밥'으로만 쓴다. 그런데 '먹다'라는 동사는 '먹어라' '먹자' '먹니' '먹고' '먹어서' '먹지마' 등등.. 다양하게 변화한다. 이때 변하지 않는 부분을 어간이라 하고 변하는 부분을 어미라 한다. 

 

국어표준대사전에서 찾을 수 있는 용언은 기본형이다. 예를 들어 '먹다'만 사전에 등재되어 있고 '먹어라' '먹자' 등은 사전에 오르지 못한다.  이 기본형에서 '먹-'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어간이고, '-다'는 대신 각종 꼬리들이 붙을 수 있는 어미이다.  '-' 표기를 하는 이유는 독립적으로는 쓰일 수 없고 어간과 어미가 결합해야만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먹-' 은 어디에도 단독으로 쓰일 수 없다. '-어'나 '-고' 따위도 마찬가지이다.

 

용언은 활용되기 때문에 어간에 어떤 어미가 오느냐에 따라 다양한 음운 변동이 일어나고 이에 따라 맞춤법도 규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글 맞춤법 4장 2절 15항~18항은 용언이 활용될 때 어간과 어미에 대한 규정이다.

 

 

 

모음탈락 중 대표인 'ㅡ' 탈락은 규칙적인 탈락이다.  어간의 끝소리가 'ㅡ' 이고 어미의 첫소리가 'ㅓ/ㅏ' 이면 거의 예외없이 규칙적으로 탈락한다.

 

후설 단모음의 발성기관을 보면 'ㅡ' 탈락이 규칙적으로 이루어지는 이유가 짐작이 갈 듯도 하다.  후설 평순 모음인  ' ㅡ → ㅓ → ㅏ' 는 입술 모양은 평평하게, 혀의 위치는 여린 입천장이 있는 뒤쪽으로 고정시켜 놓고, 입만 점점 크게 벌리면 자연스럽게 소리가 변한다.  'ㅡ'는 가장 약하게 나는 소리다. 자음은 모음없이는 소리를 낼 수 없어 순수한 자음을 발음할 수 없다. 그런데 가장 자음 자체의 소리에 가깝게 소리 내려면 'ㅡ'를 붙인다. 'ㅡ' 가 약한 소리이기 때문이다.

 

직관적으로도  ' ㅡ → ㅓ → ㅏ' 로 갈수록 소리가 뚜렷하고 커진다.  따라서 약한 'ㅡ' 다음에 더 강한 'ㅓ'나 'ㅏ'가 잇따르게 되면 자연스럽게 약한 'ㅡ'는 탈락하기 쉽다.

 

키가 '크다'의 경우, 용언의 기본형 '크다' 는 어간 '크-' + 어미 '-다' 로 이루어졌다. 문장을 키가 '커서' 좋겠다로 바꾸어 보자.  '크다'에서 어간 '크-' 는 그대로 두고 어미를 ' - 어서' 로 바꾸어야 한다.  어간의 끝소리가 모음 'ㅡ' 이고 어미의 첫소리가 모음 'ㅓ' 가 되어,  'ㅡ'와 'ㅓ'는 잇따라 소리를 내게 된다. 입만 조금 더 벌리면 바로 'ㅡ'에서 'ㅓ'로 소리가 바뀜에 따라 약한 소리인 어간의 'ㅡ'가 탈락한다. 어간의 자음 'ㅋ'과 어미의 'ㅓ'가 바로 붙어서 '커'가 된다.

 

'바쁘다'의 경우는 어간 '바쁘-'에 어미 'ㅏ'가 결합하여 'ㅡ'가 탈락하고 '바빠'가 된다.  어미가 'ㅓ'이냐 'ㅏ'이냐는 대체로 모음 조화에 따른다. 양성 모음은 양성 모음끼리, 음성 모음은 음성 모음끼리 결합한다.

 

 

 

 

모음 탈락의 두 번째는 동음 탈락이다.  어미 첫소리가 'ㅓ/ㅏ' 일 때 어간의 끝소리도 'ㅓ/ㅏ'가 와서 똑 같은 모음이 두 번 겹치면 당연히 소리는 하나로 날 수밖에 없다. 

 

'가다'의 어간 끝소리는 'ㅏ'이고 '서다'의 어간 끝소리는 'ㅓ'이다. 모음 조화에 의해 어미는 각각 'ㅏ'와 'ㅓ'가 오게 되니 동음이 만나게 된다. '가-' + '-아'를 이어 발음하면 당연히 '가'로 소리난다. 

 

모음 탈락으로 음운이 하나 줄어들면 한글 맞춤법의 표기는 줄어든 대로 쓰는 것이 원칙이다.

 

 

 

5. 모음 축약

 

두 개의 모음이 연이어 올 때 제 3의 하나로 바뀌는 현상이다. 

 

 

 

글을 쓸 때 줄여 쓸까 원래대로 쓸까 조금은 고민을 하는 맞춤법이다. 결론은 줄여 써도 되고 본말대로 써도 된다.  

 

위의 사례는 마치  단모음 2개가 이중모음 1개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앞에 오는 단모음 'ㅣ'나' ㅜ'가 마치 반모음처럼 발음되면 자연스럽게 이중모음이 될 수 있다.  모음 축약의 원칙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재미있어서 생각해 본 것이다. 이중모음이 만들어지는 것과는 다른 형태의 축약도 얼마든지 있다.

 

 

 

위의 사례들도 줄인 말 중 어느 것이 표준어인지 많이 고심하게 만드는 것들이다. (글을) '쓰다'의 피동형인 '쓰이다' 를 활용하면, 어간 '쓰이-' + 어미 '어'가 결합하여 '쓰이어'가 된다.

 

'쓰이어'는 재미있게도 모음 3개가 나란히 온다. ' ㅡ+ㅣ+ㅓ'  축약은 두 가지 방식이 가능하다. 앞의 2개를 축약하면 'ㅢ+ㅓ'가 되어 '씌어'로, 뒤의 2개를 축약하면 'ㅡ+ㅕ' 가 되어 '쓰여'로 줄일 수 있다. 어느 것이 맞을까?  둘 다 맞다.

 

 

 

 

본말과 준말은 구분하여 잘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흔히 틀리기 쉬운 쌍이 '되어'와 '돼' 이다.  '되고'가 맞을까, '돼고'가 맞을까?  '됬고'가 맞을까,  '됐고'가 맞을까?

 

 

 

표준국어대사전에 '되다'는 있지만 '돼다'는 없다.  기본형이 '되다' 란 뜻이다. 어간은 '되-' 이다. 

 

활용을 위해 다양한 어미가 결합하는데, 어미는 어말 어미도 있고 선어말 어미도 있다. 어미가 하나가 아니라 둘 이상이 올 수 있다는 의미이고, 이때 마지막에 오는 어미는 어말 어미, 그 앞에 오는 어미는 선어말 어미이다. 문장을 완전히 끝내는 종결 어미도 있고, 다른 문장과 연결하는 연결 어미도 있다. 어미에 관한 내용은 품사를 공부할 때 정리할 예정이다.

 

어미 '-어'는 '밥 먹어' 처럼 종결 어미로 쓰일 수도 있고, '그가 죽어 슬프다' 처럼 연결 어미로 쓰일 수도 있다.

 

어간 '되-' 와 어미 '-어'가 결합하면 '되어' 가 된다. 모음 'ㅚ'와 모음 'ㅓ'가 잇따르니 제 3의 모음인 'ㅙ'로 축약할 수 있다. '되어 → 돼' 

 

이때 '돼'는 어간에 어미가 붙은 활용형이기 때문에 '돼다'라는 기본형은 없다. '돼다'가 기본형이 되려면 '돼'가 어간이어야 하는데, '돼'는 이미 어간 '되'와 어미 '어'가 결합된 활용형이다.

 

당연히 어미 '고'는 어간인 '되'에만 붙을 수 있다. '되고'는 맞지만 '돼고'는 틀린 이유가 이 때문이다.  '돼'가 들어간 말은 먼저 본말인 '되어'로 바꾼 다음 뒤 음절을 붙여 보면 맞는지 틀린지 확인할 수 있다.  '돼고'가 틀린 것은 '되어고' 라고 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어미가 두 개가 오는 경우를 보자. '어간 + 선어말 어미 + 어말 어미' 의 순이다.

'되-' + '-었' + '-고' 는 어간 '되'에 과거 시제를 나타내는 선어말 어미 '었'과 연결 어미 '고'가 이어진 활용형이다. '되었고'를 축약해서 '됐고'로 쓸 수 있다. 혹은 종결 어미 '다'를 붙여 '되었다' 로 활용하면 '됐다'로 축약할 수 있다.

 

'됬고'가 틀린 이유는 어간 '되' 다음에 붙은 'ㅆ'은 어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 시제를 나타내려면 '었'이 와야 한다. '됐고'를 본말로 풀면 '되었고'가 되므로, '됐고'가 맞춤법에 부합한다.

 

'되겠다' 를 분석해 보자. '되-' + '-겠' + '-다' 에서 '-겠'는 미래 시제를 나타내는 선어말 어미이고 '-다'는 종결 어말 어미이다.  '되겠다'는 잇따라 오는 모음의 쌍이 없다. '되'의 'ㅚ'와 '겠'의 'ㅔ' 사이에는 자음이 있다. 자음이 없다 해도 두 모음을 축약해서 만들 수 있는 모음이 없기도 하다. 여하튼 모음 축약이 가능한 음운 환경이 아니다.  '돼겠다'로 축약될 수 없다. '되어겠다'로 풀어서 말이 안되니 틀린 말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음운의 변동에 대한 정리는 이것으로 모두 마친다. 빠진 것들도 있지만 주요한 것들은 웬만큼 정리했다.  한글 맞춤법에 관한 내용들은 여럿 남아 있지만, 한꺼번에 맞춤법까지 훑으려면 머리가 너무 아플 듯하다. 

 

다음글은 형태소와 품사로 시작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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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신의 소리를 내지 않는 자음, ㅎ

 

 

 

 

 

자음 'ㅎ', 특히 받침에 오는 ㅎ은 온전히 자기 소리를 내지 않는다.  표준발음법 12항은 ㅎ이 어떻게 자기 소리를 숨기고 다른 소리를 돋보이게 하는지를 유형별로 설명하고 있다.  

 

 

 

2. 거센소리 되기 (유기음화)

 

 

 

 

목청에서 마찰되어 나오는 소리 'ㅎ'은 매우 거센 소리같지만 자기 스스로를 앞세우지는 않는다. ㅎ은 자신의 앞 뒤에 오는 다른 자음들을 센놈, 격음으로 만들어 준다.  장애음의 예사소리는 'ㅎ'을 만나면 거센소리로 바뀌는 데 이것을 거센소리되기 혹은 유기음화라고 한다.

 

 

 

 

 

 

음운개수의 면에서 보면 거센소리 되기는 축약 즉 -1이다.  두 개의 자음이 만나서 한 개의 자음으로 축약된다.

 

 

좋던이 〔조턴〕으로 발음되면서 'ㅎ'과 'ㄷ'이 'ㅌ'으로 줄어들었다. 많고는 '많'이 겹받침이지만 어차피 'ㅎ'이 뒤 음절의 'ㄱ'과 만나면 축약되니 하나를 탈락시킬 필요가 없다.  'ㄴ'은 앞 음절에 남기고 'ㅎ'만 뒤 음절에 넘겨주면, 'ㅎ'은 'ㄱ'과 만나서 'ㅋ'이 된다.  많고는 〔만코〕다.

 

ㅎ이 평음의 앞에 오든 뒤에 오든 상관없이 거센소리 되기는 일어난다.  맏형도 'ㄷ'과 'ㅎ'이 만나 축약, 〔마텽〕으로 음운 하나가 줄었다.  앉히다는 많고와 환경이 같다. 이번엔 'ㄵ'의 'ㅈ'를 뒤로 넘기면 'ㅎ'과 만나서 'ㅊ'이 된다.  앉히다는 〔안치다〕

 

꽃 한 송이는 주의가 필요하다. '못다핀 꽃 한 송이'라도 제대로 불러 주어야 한다.  앉히다의 '히'는 모음으로 시작하지 않지만 의미상으로는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형태소와 같다. 그대로 연음하기 때문에 'ㅈ'과 'ㅎ'이 만나서 'ㅊ'이 되는 것이다.

 

 

꽃 한송이의 '한'은 실질 형태소이다. 앞 음절 꽃은 연음이 아니라 절음해야 된다. 먼저 음절 끝소리 규칙을 적용하여 꽃이 〔꼳〕으로 음운 변동이 된 이후에 'ㄷ'을 뒤로 넘긴다. 넘겨진 'ㄷ'은 'ㅎ'과 결합하여 'ㅌ'이 된다. 꽃 한 송이는 〔꼬탄송이〕로 불러야 한다.

 

 

조금 어려우면 '옷 한 벌' 을 발음해 보자.  '옷'과 '한' 이 'ㅅ'과 'ㅎ'으로 만났다.  '한'은 뜻이 있는 실질 형태소이다. 앞 음절은 절음하여 대표음 〔옫〕이 된 후 '한 벌'과 만나서 축약된다. 〔오탄벌〕이다.

 

 

3. 기타,  ㅎ + 자음

 

 

 

 

 'ㅎ'과 평음이 결합하면 격음 즉 거센소리가 된다.  평음 5개 중에 격음이 없는 것이 1개 있는데, 'ㅅ'이다. 그렇다면 'ㅎ'과 'ㅅ'이 만나면 어떻게 발음해야 할까?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해야 할지.. 여하튼 경음 'ㅆ'이 된다. 닿소가 〔다:쏘〕가 되거나 많소가 〔만:쏘〕가 된다.

 

'ㅎ'과 'ㄴ'이 결합하면 특이한 현상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앞에서 공부해 온 기본적인 음운 변동이 있을 뿐이다. 받침 'ㅎ'은  1. 음절 끝소리 규칙을 받아 'ㄷ'이 된 후, 뒤 음절 초성의 'ㄴ'에 의해 2. 비음화 되는 일반적인 변동을 거친다.  예를 들자면, 놓는 → 〔녿는〕 → 〔논는〕 이다.

 

 

 

 

 

4. ㅎ의 탈락

 

받침 'ㅎ'의 뒤 음절이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형태소인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받침이라면 당연히 연음하여 뒤 음절 초성의 자리로 넘긴다. 그런데 받침의 'ㅎ'은 제 소리를 내는 법이 없으므로 넘어가지 않는다. 넘어가면 'ㅎ' 의 음가가 날 수밖에 없으니 아예 탈락시켜 버린다.

 

 

 

 

놓아는 〔노아〕이지, 〔노하〕가 아니다.  '놓다' 에서 어간 '놓-'은 활용하면 다양한 어미가 붙는다. '-아'는 어미이므로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 형태소이다. 이 경우 일반적 원칙에 따라 연음시키면 〔노하〕가 되는데, 이렇게 발음하지는 않는다. 'ㅎ'을 탈락시켜 우리는 〔노아〕라고 표준대로 발음한다.

 

 쌓다는 능동사이다. '아버지가 연탄을 쌓다' 로 쓸 수 있다. 이때 어근 '쌓-' 에 접미사 '-이'를 붙이면 피동사, 쌓이다가 된다. '연탄이 쌓이다.'  '-이'와 같은 접미사도 형식 형태소이다.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 형태소가 ㅎ받침 뒤에 왔으니 발음을 해보면 〔싸이다〕가 된다. ㅎ은 탈락 시킨다.  눈이 〔싸히다〕라고 발음하면 안된다. 눈이 〔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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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읽다'는 발음상으로도 재미있는 낱말이다.  국어문법 공부에 나름 열중인 상황에서 '읽다'가 활용될 때 나타나는 다양한 음운현상이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책을 읽다가도 한참씩 음운만 생각할 때도 있다.

 

 

1. 읽다 〔익따〕 : 자음군 단순화

 

쌍받침 'ㄺ'은 자음군 단순화에 의해 'ㄱ'이 음가를 가지고, 'ㄹ'은 탈락한다. '일따' 아니고, '익따'.  우리 발성기관으로는 받침의 자음 두 개를 모두 소리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2. 읽어 〔일거〕 : 연음

 

어간 '읽-'에 어미 'ㅓ'가 붙어 활용할 경우, 예를 들어 "책을 읽어 보아라' 에서  '읽어'는 자음군 단순화가 되지 않는다. 어미 '어'에 초성이 없기 때문에 받침 'ㄺ' 중 'ㄹ'은 받침으로 남고, 'ㄱ'은 연음되어 뒤 음절 초성으로 넘어간다. 'ㄱ+ㅓ →거' 로 되므로 읽어는 '일거'가 된다. 사이좋게 하나씩 나누어 가지기?

 

3. 읽는 〔잉는〕 : 자음군 단순화 → 비음화

 

일단 자음군 단순화가 일어나야 한다. 뒤 음절 초성에 'ㄴ'이 버티고 있으니까, 차지할 자리가 없다.  ㄹ 이 탈락하여, '읽는 → 익는' . 여기서 끝이 아니다. 코를 막고 '익는'을 해보면 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  '익는'은  대부분 코로 나오는 음운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코로 나오는 소리를 비음이라고 하는데, 비음에는 'ㅁ,ㄴ,ㅇ'가 있다. 비음이 어찌나 영향력이 센지 바로 앞에 오는 자음도 비음으로 만드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익'의 받침 'ㄱ'은 뒤에 오는 '는'의 초성인 'ㄴ'에 의해 비음으로 변한다. 'ㄱ'의 비음은 'ㅇ'이다. 따라서 '읽는 →익는→잉는' 로 음운 변동이 일어난다.

 

4. 읽지 〔익찌〕 : 자음군 단순화 → 경음화

 

읽지는 먼저 '익지'로 'ㄹ'이 탈락한다. 자음군 단순화. 그런데 '책 좀 읽지!" 를 소리내 보면 '익찌'가 된다. 왜? 물론 '일찌' 하는 사람도 있는데, 교양있는 현대 서울인의 발음은 아니다. 이른바 표준 발음법인데, 일찌 X, 익찌O.  다시 돌아가서 '익지→ 익찌' 로 즉 'ㅈ→ㅉ'이 되는 현상을 된소리되기 (경음화)라고 한다. 쌍자음이 된소리다. 이유는 '익'의 받침 'ㄱ' 뒤에 예사소리(평음) 'ㅈ'이 연이어 오기 때문이다. 이때 뒤의 예사소리는 된소리가 된다. 

 

5. 읽고 〔일꼬〕 : 자음군 단순화의 예외

 

표준 발음법의 예외에 해당한다.  '읽다'는 표준 발음법에 의해 '읽다 → 익따'로 'ㄱ'이 남는데,  어간 말음 'ㄺ' 다음에 'ㄱ'이 오는 경우는 예외적으로, 'ㄺ' 중에 ㄱ 이 탈락하고 ㄹ이 남는다. '읽고 → 일고 → 일꼬'. 경음화가 일어나는 이유는 탈락하기 전의 'ㄱ'이 뒤 음절 '고'에 영향을 주어 경음화가 일어나는 것으로 추정한다. 

 

6. 읽기 〔일끼〕 : 5와 동일

 

어간 말음 ㄺ 다음에 ㄱ으로 시작하는 어미뿐 아니라 접미사가 와도 예외가 적용되어 읽기→ 일기 → 일끼 로 변한다.  '일기' 가 무조건 '일끼' 변하는 것은 아니다. 어릴 때 숙제로 매일 썼던 일기는 발음도 그대로 〔일기〕 이다.

 

 

 

 

 

 

 

'읽다'는 발음만 다양한 것이 아니다. 읽는 행위 자체가 다양함이다. 같은 책도 어릴 때 읽는 것과 중년이 되어 읽는 것이 다르고, 학생이 읽는 것과 선생이 읽는 것이 다르고, 철학자가 읽는 것과 문학가가 읽는 것이 다르다. 이런 다양한 다름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것이 책들에 관한 책을 읽을 때이다.

 

 

 

얼마 전에 강유원의 『책읽기의 끝과 시작』을 읽었다. 책 제목에 그의 야욕이 드러나 있는 것일까? '야욕'은 강유원 선생의 강의에 가끔 등장하는 낱말이다. 요즘도 예전에 다운 받아 놓은 강유원 선생의 서양 철학사 강의를 다시 듣곤 한다. 다섯 단락으로 글을 쓰지 않으니 제대로 배웠다고 할 수도 없지만, 그의 강의처럼 여기 저기 샛길로 빠져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것도 세상사는 즐거움이니 나도 그 즐거움으로 산만한 생각을 그냥 따라간다.

 

 

책읽기의 끝과 시작은 곧 책읽기의 모든 것이란 뜻으로 전해진다. 책을 읽는다는 것에 대한 모든 것을  알려주마라는 야욕을 가감없이 드러낸 그 야욕이 강유원 선생이라 믿음직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책을 선택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서평을 쓰는 것으로 완결된다. 그냥 마구잡이로 책을 읽는 나같은 경우야 우연히 발견한 책을 중간에 던지지 않고 끝까지 읽어 내는 것만으로 다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서평을 남기지 않고서는 책읽기를 완료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서평을 통해 글쓴이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을 추출해 내고,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을 덧함으로써 사고력을 발달시키고 사유를 확장할 수 있으니 지극히 올바른 가르침이다. 다만 서평은 언감생심 버겁고, 그저 독후감이라도 시작해 보아야지라고 생각을 해본다.

 

 

 

 

 

 

 

 

 

 

 

 

 

 

 

코로나 19로 집에 붙박이가 되면서 뒤늦게 알게 된 일들이 있다. 황현산 선생이 타계하신 것을 그의 두 번째 산문집을 통해 알게 되었다. 『사소한 부탁 』 하나를 세상에 남겨 두고 가셨다.

 

여러 종류의 글들을 모아 놓은 산문집이지만, 책들에 대한 글들도 꽤 많이 있다. 직접 번역한 「어린 왕자」를 비롯한 불문학뿐 아니라 우리나라 작품들에 대해서도 여러 글들을 남겼다. 나는 특히 시 「광야」에 대한 선생의 해석이 맘에 좋았다. 

 

1942년 독립운동가 이육사가 일본 경찰에 의해 압송되던 기차 안에서 이 시를 구상했다고 한다. "민족의 가장 처절한 고난이 자신의 한 몸을 꿰뚫었던 그 시간을 민족이 자랑해야 할 가장 거룩한 시간으로 바꾸었다" 고 평하며, 「광야」를 민족의 서정시라고 규정한다. 육사가 뿌린 가난한 노래의 씨는 이제 우리가 목놓아 불러야 할 민족의 서정시가 되었다.

 

1945년 해방의 해에 태어난 황현산 선생은 민족의 현대사와 더불어 사셨다. 그의 산문집에는 굴곡 많은 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세상일을 꼬집을 때도 ,역에 대한 전문적 소견을 밝힐 때도, 서평을 할 때도 그의 글들은 민족의 삶에 뿌리내리고 있어 울림이 크고 생생하다.  고답적이지도 어렵지도 않다.  '매화향기' 처럼 '홀로 아득' 한 글이지만, 그 깊고 높은 품격이 독자에게 거리를 만들지는 않는다.

 

 

 

 

어제 다 읽은 책이다. 독어독문학 전공인데 제목은 『철학자 김진영의 전복적 소설읽기』 이다. 약력에는 철학과 미학을 공부했고 철학 아카데미의 대표를 지냈다고 되어 있다. 책은 보르헤스의 『칠일 밤』이 연상되는 구성이다. 

 

2010년에 진행된 〈전복적 소설 읽기 : 소설을 읽는 8개의 키워드〉라는 제목의 강의 녹취록을 정리한 책이다.  '전복적' 이라는 수식에서 그의 철학적 관점이 얼핏 짐작된다. 

 

8개의 작품 중 내가 읽은 것은 카프카의 『변신』과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2권과 카뮈의 『이방인』 이다. 고전과는 악 소리나게 다른 현대 소설들이다. 읽기는 하는데 뭔지는 모르겠는, 뭔가 있긴 한데 콕집어서 말할 수 없는, 그런 작품들이다.

 

현대 소설의 기점을 조이스, 울프, 카프카, 프루스트로 본다고 한다. 현대 소설에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괴테에 이르기까지 유지되어 온 서사, 이야기가 없다.  이야기가 없으니 흔히 말하듯 '밑도 끝도 없다.'

 

없는 이야기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전복적 책읽기'는 이야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불가능하게 만든 시대를 읽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전통 사회에서 이야기란 겪음 혹은 고난을 통한 삶의 완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삶의 완성이 불가능하다. 세상은 『이방인』의 뫼르소의 그것처럼 낯선 곳이고, 현대인은 그 속에 불쑥 던져진 존재다.

 

'완성' 이란 목적론적 의미를 갖고 있는 낱말이다.  삶의 완성이란 인간에게는 목적이 있다는 뜻이다. 죽기 전에 그 목적을 완전히 다 이루었다면 그 삶은 완성된 삶이다. 이 목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무엇으로부터 부여된 것인가? 인간이 궁리하고 궁리하여도 '신' 이외에 답을 찾기는 어렵다. 그런데 근대, 모던은 신과 결별하며 탄생한 시대다.

 

신 없이 홀로 살아야 하는 인간에게는 아마도 두 가지 길이 있을 것이다. 스스로 삶의 목적을 부여하거나, 목적없이 밑도 끝도 없이 살거나. 하나가 더 있긴 하다. 죽은 신을 살려 내거나.

 

처음 신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은 신났다. 해방이 아니라 새로운 신을 맞이한 셈이었다. '이성의 권위에 대한 계몽의 신앙' 이라는 말이 있다. 이성이 신이었다. 이성은 인간에게 완전가능성을 꿈꾸게 했다. 얼마가지 않아 이성이 광기를 뿜으며 모던은 박살이 나고 포스트 모던이라 불리는 시대가 왔다. 진짜 밑도 끝도 없이 던져진 세상이 왔다.

 

'전복적 소설 읽기'가 전복적인 소설을 읽는 것이든 소설을 전복적으로 읽는 것이든, 밑도 끝도 없는 세상을 이야기해야 하는 소설의 어려움, 그럼에도 밑이나 끝을 부단히 이야기하려는 소설의 열망, 밑이나 끝을 찾아 헤메는 인물들의 불가능성의 가능성, 방향없는 세상을 방향없이 이동(유목)하는 자유 같은 것들에 대한 독법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막연히 한다.  그러고 보니 밑은 근원(존재의 참된 원인, 아이티아)이고 끝은 목적(telos)인가?  

 

 

 

 

고전의 완결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헤겔 전공자 강유원의 책읽기와 처음 읽는 분이라 규정할 수는 없지만 이야기가 불가능한 현대 소설에서 삶을 찾으려는 김진영의 책 읽기는 대조적이지 않을 수 없다.  황현산 선생의 책이 '세상 읽기'로는 편안하고 그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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