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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ㅣ 푸른시원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양운덕 / 도서출판 숲 / 2017년 4월
평점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미케네 시대의 테바이 전쟁을 직접 다루고 있다.

테바이는 스파르타, 아테나이, 코린토스, 아르고스와 함께 희랍 패권을 다투는 5강의 하나였다.

<변신 이야기>
기원전 5세기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테바이와 코린토스는 스파르타가 주도하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가담하여 아테나이와 전쟁을 치루었다. 아르고스는 중립을 지켰다.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승리하자 테바이와 코린토스는 아테나이를 멸망시키고 아테나이 시민을 노예로 삼으려고 하였다. 스파르타는 아테나이를 존속시키는 대신 30인 참주가 통치하는 과두 정체를 수립했다.

<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2018072774101>
기원전 403년 아테나이는 과두정을 무너뜨리고 1년 만에 민주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상흔은 깊었다. '민주정 → 과두정 → 민주정 ' 으로의 체제 변혁을 거치며 분열과 반목, 보복은 되풀이 되었다.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의 죽음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2018072774101>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소포클레스가 사망하기 직전 완성했지만, 공연은 기원전 401년 손자에 의해 이루어졌다. 스파르타가 세운 과두정을 무너뜨리고 민주정을 되찾은 아테나이인들은 적국 테바이의 오래된 비극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조국 테바이에서도 쫓겨난 오이디푸스를, 희랍의 어떤 폴리스도 받아주지 않던 재앙 덩어리 오이디푸스를 오직 정의를 분별할 줄 아는 아테나이만이 받아들였다는 것, 테바이의 왕 오이디푸스가 신탁의 예언지로 아테나이를 선택하여 테바이로부터 아테나이를 지켜주겠다고 신성한 약속을 했다는 것 등은 아마도 아테나이인들의 바람이었을 것이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는 테바이 전쟁과 오이디푸스의 죽음이 중심 사건을 이룬다.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1842. 샤를 잘라베르>
테바이로부터 추방당한 오이디푸스는 안티고네에 의지해 희랍을 떠돌다 아테나이 근교의 콜로노스에 이른다. 콜로노스는 소포클레스의 고향이다. 아테나이의 왕은 테세우스이다. 크레타섬의 미궁에 사는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한 아테나이의 그 영웅이다.

<미노타우로스 , 그리스 도기, 기원전 515년 경>
오이디푸스와 테세우스가 동시대의 인물이라는 것이 생경하다. 지금도 무대에 공연되는 오이디푸스는 매우 현대적인 느낌인데 반해 테세우스는 글자 그대로 신화적이기 때문이다. 테세우스는 오이디푸스가 콜로노스에서 죽음을 맞는 것을 허락한다. 그 대가로 오이디푸스는 신탁을 걸고, 죽어서 아테나이를 수호할 것을 맹세한다.

테바이에서는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사이에 왕권 다툼이 일어나 폴뤼네이케스가 추방당한다. 폴뤼네이케스는 아르고스로 망명을 가서 일곱 부대의 창병을 모아 테바이를 공격한다. 이 테바이 전쟁에서 폴뤼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는 서로를 죽이고 동시에 죽는 운명을 맞는다. 아버지 오이디푸스의 저주는 실현된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1788. Jean-Antoine-Théodore Giroust >
폴뤼네이케스는 테바이를 공격하러 가는 길에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만나러 온다. 신탁에 따르면 테바이의 안녕은 오이디푸스에 달려 있고, 테바이 전쟁에서 오이디푸스가 편드는 쪽이 이기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내쫓은 테바이와 자신의 추방을 방관한 두 아들에 대한 분노를 폭발하고 저주를 퍼붓는다. 오이디푸스 가문의 남자는 이로써 모두 불행한 운명을 맞는다.

『오이디푸스 왕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해설에서 양운덕은 베르낭과 지라르가 오이디푸스를 희생양으로 해석하는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935487.html>
맥락이 많이 다르지만 서양 고전학자 김헌도 '제물'로서의 오이디푸스를 말한다. 비극 공연 자체가 예배이며, 무대 위에 등장한 오이디푸스는 제단 위에 바쳐진 제물이다. 재앙의 원인임이 밝혀지자 오이디푸스는 제물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눈을 찔러 도시를 정화한다. 물론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눈을 찌르는 행위에 대해서는 신에 대한 저항, 인간의 자유 의지 등으로 보는 다른 관점들이 다수 있다.

<오이디푸스왕/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232쪽>
아테나이는 실제로도 매년 폴리스를 정화하기 위해 희생양을 희생시켰다. 이때 선택되는 희생양은 전형적인 약자이다.

<오이디푸스왕/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234쪽>
베르낭에 따르면 희생양 의식은 카니발과 같다. 축제가 끝나면 반왕은 그가 구현한 모든 무질서를 짊어지고 죽어야 한다. 그의 죽음은 공동체를 정화한다.

<오이디푸스왕/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229쪽>
오이디푸스가 왕이 된 것 자체가 일종의 카니발이라는 것이다.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의 죄를 저지르고도 테바이의 영웅으로 살았던 오이디푸스는 축제가 끝나자 테바이의 모든 재앙을 짊어지고 추방당한다. 베르낭이 '오이디푸스라는 수수께끼'라고 하면서 오이디푸스를 이중적 존재로 규정할 때, 희생양의 이중적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제거되어야 하는 오물이지만 제거됨으로써 성스러워진 존재가 희생양이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신탁이 두려워 자신을 데려가려고 테바이에서 사신이 올 것이라는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한다.
이스메네 : 아버지께서는 살아 계시든 돌아가셨든, 언젠가는 테바이 인들이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아버지를 찾게 된다고 했어요.
오이디푸스 :나 같은 사람에 의해 누가 행복해질 수 있겠느냐?
이스메네 : 신탁에 따르면, 그들의 안녕은 아버지에게 달려 있대요.
오이디푸스 : 내가 아무것도 아닐 때 비로소 영웅이 된다는 말이냐?
something이라고 자부했을 때 실제로 nothing이었던 반면, 세상 모두에 nothing으로 드러났을 때 비로소 something이 되는 아이러니가 오이디푸스를 또 하나의 수수께끼로 만든다.

<오이디푸스왕/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243쪽>
베르낭이 재앙의 원인이자 구원자라는 희생양의 이중적 성격에 주목했다면, 르네 지라르는 희생양이 어떻게 희생양으로 만들어지는가를 공들여 설명하고 있다.
사회의 위기를 오염의 탓으로 돌리고 정화를 통해 벗어나려 할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 희생양이다. 희생양이 위기를 조장했는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대다수의 구성원들이 그렇게 믿을만한 지표나 징후를 만들 수 있으면 된다.

<오이디푸스왕/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249쪽>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나 랑시에르의 '몫없는 자' 같이, 배재와 차별에도 저항하지 못하는 이들이다.

<오이디푸스왕/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244쪽>
오이디푸스는 희생물의 징후를 모두 갖추고 있다. 갑자기 나타나 공동체의 명예와 부를 독차지한 이방인 오이디푸스에 대한 시기와 분노가 역병의 원인을 오이디푸스에게 덮어 씌우게 만든다. 지라르는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이 없었어도 오이디푸스에 대한 박해는 실행되었을 것이라 말한다.

1923년 일본 관동 대지진 때 희생양이 되어야 했던 것은 조선인이었다. 왜 이방인이 희생되어야 하는 것일까? 공동체의 위기는 공동체 내부에 그 원인이 있다. 그러나 내부의 원인은 쉽게 해결될 수 없으므로, 그대로 두면 분열과 그에 따른 연쇄적인 폭력이 수반된다. 공동체가 와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내부의 폭력을 분출할 외적 대상이 필요하다.


한·일 학계는 조선인 6,600여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강점기 재일 조선인들은 일본 사회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제단 위에 올려진 희생 제물이었다. 물론 다수의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이 진짜 우물에 독약을 풀고, 치마 속에 폭탄을 감추고 있다고 믿으며 학살을 자행했다.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1798. 플크랑-장 아리에>
신화와 달리 강점기 재일 조선인들은 희생 제물이었을 뿐 신성화 되지는 않았다. 베르낭은 희생양의 이중적 성격에 주목했다. 지라르도 희생제물이 신격화 되는 메커니즘을 설명한다.
테바이의 재앙으로 추방당한 <오이디푸스 왕> 은 아테나이를 지키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로 신격화된다. 희생자 sacrifice는 신성하다 sacred. 희생자에 의해 공동체가 정화되고, 질서가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왕/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250쪽>
희생양에 대한 폭력으로 공동체의 위기를 극복하려던 현대적 시도는 1930년대의 전체주의에서 폭발했고 가공할 야만성을 드러낸 채 실패했다. 그러나 사라지지는 않았다.

추기 :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中
펠로폰네소스 동맹 vs 아테나이 동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