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기획특강 - 지식의 기쁨, 김헌의 <한눈에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 3,4 번째인 108회 올림포스 12신과 109회 인간의 탄생을 정리한 글이다.
새롭게 정확하게 알게 된 것은 고대 희랍 신화는 통일된 하나의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다. 알라딘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검색하면 1,000권이 넘는데 지은이가 각각이다. 가장 유명한 책 중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아주 오래전에 봤을 때는 이윤기가 번역한 것쯤으로 생각했는데, 그리스에서조차 고대 신화는 다양한 이야기꾼들에 의해 여러가지 판본으로 전해져 온 것이다. 김헌의 강의에는 희랍의 헤시오도스, 아폴로도로스, 플라톤 뿐 아니라 로마의 오비디우스 등이 전하는 신화를 비교해서 보여준다.

가이아로부터 평화롭게 이양된 권력은 이후 세대간 투쟁을 통해 우라노스 → 크로노스 → 제우스로 넘어간다. 친부살해 Ptroktonia를 통해 신세대가 구세대를 몰아내고 새롭게 권력을 획득한다. 크로노스는 아버지 우라노스를 거세했고, 제우스는 아버지 크로노스를 포함한 구세대와 전면전을 벌여 권력을 차지했다.
제우스는 이 과정에서 몇 번의 전쟁을 치른다. 첫 번째가 티타노마키아이고 두 번째가 기간토마키아이다. 아버지 세대인 티탄족들과의 전쟁이 티타노마키아인데 여기서 제우스는 아버지와 같은 세대이긴 하지만 주류에서 배제된 삼촌들과 연대하여 티탄신족들을 물리친다.
두 번째 기간토마키아는 거인족들과의 전쟁인데, 증조 할머니(?) 가이아가 제우스 체제에 불만을 품고 우라노스와 관계를 맺어 기간테스라는 거인신족을 낳았고 이들에 의해 일어난 전쟁이라고 설명한다.

이후에도 가이아는 타르타로스와의 사이에서 티폰을 낳아 올림포스 12신과 전쟁을 하게 만드는데 티폰은 그 자체로 세계를 뒤덮을만큼 무시무시하게 거대한 괴물이다. 티폰을 음차한 것이 한자어 태풍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이다. 가이아는 제우스의 올림포스 12신 체제가 공고히 확립될 때까지 계속해서 권력 투쟁을 촉발했다. 아들 크로노스를 사주한 것도, 손자 제우스에게 계책을 제안한 것도, 또 다른 자식들을 낳아 제우스에 도전하게 만든 것도 모두 가이아이다. 가이아는 어떤 권력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셈이다. 모계를 이끌던 가이아가 꿈꾸던 이상적인 권력은 도대체 무엇이었길래 모든 현실 권력들에 불만이었던 것일까?

제우스는 아버지 세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권력을 획득한 이후에도 계속 도전해 오는 새로운 세력과 전쟁을 치루어야 했다. 제우스가 "영원한 권력" 이 된 것은 이 전쟁들에서 모두 이기고 난 뒤였다. Patroktonia의 전통을 끊어낸 것이다. 어떻게 제우스는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김헌이 제시하는 답은 세대 통합과 권력 분점이다. 제우스는 형들인 포세이돈, 하데스와 함께 하늘, 바다, 지하를 삼분했다. 대지는 공동의 영역이다. 자신을 도와준 구세대에게도 적절한 역할을 제공하여 견제와 통합을 한꺼번에 이루었다. 결정적으로는 자신의 자식들인 신세대에게도 권력을 나누어 주었다. 신구세대를 아우르는 세대 통합이 안정적인 제우스의 시대를 지금까지(?) 유지해 주고 있다. 그러나 기간토마키아나 티푼과의 전쟁에서 보았듯이 새로운 세대의 폭력적인 도전에 대해서는 철저히 응징하여 강력한 통치권을 장악했다.
고대 희랍인들이 제우스 이후의 권력을 더 이상 만들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제우스의 세대 통합과 권력 분점이 이상적인 통치 형태라고 보았던 듯하다. 전제정보다는 귀족정 (과두정)을 더 선호하는 고대 희랍인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고도 설명한다.

제우스가 구축한 올림포스 12신 체제의 12신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전해진다. 기본적으로는 형제 자매 6신과 자식들 6신으로 신구세대를 균형있게 배치했지만, 이후 2명의 형제 자매가 빠지고 2명의 자식들이 포함되어 4신- 8신으로 변한 전승들이 많다.


메소포타미아에서도 그렇듯 희랍에서도 인간은 신들에 의해 창조된다. 그런데 누가 인간을 만들었는가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다. 인간 탄생 신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5단계 (4단계)의 인간 역사와 프로메테우스의 인간 사랑이다.

크로노스의 통치기에 탄생한 인간은 황금의 종족이다. 노동도 고통도 모르는 낙원의 인간이다. 이어서 제우스의 통치기에 은의 종족 → 청동의 종족 → 영웅 종족 → 철의 종족으로 이어진다. 금속으로 인간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데, 언뜻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로 이어지는 실제 역사를 연상할 수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희랍인들이 보여 주고 있는 인간의 역사는 타락의 역사이다.

우리가 그리스로 부르고 있는 나라의 정식 명칭은 The Hellenic Republic 이다. 그리스는 라틴어에 뿌리를 둔 영어식 명칭이고, 그리스어로는 헬라스 (현재는 엘라스로 발음)이다. 한자로 음차하면 희랍이 된다. 헬라스인들은 스스로를 헬레네스라고 하는데, '헬렌의 후손' 이라는 의미이다. 헬렌은 여신 헤라도 아니고 트로이 전쟁의 불씨 헬레네도 아니다. 헬렌은 대홍수 이후 생존한 데우칼리온 부부의 아들이고, 희랍인들은 이 헬렌의 후손들이다.

희랍도 메소포타미아나 헤브라이인들과 아주 유사한 홍수 신화를 갖고 있다. 인간에게 분노한 제우스가 홍수로 인간을 절멸시키려고 했는데 인간을 특히 사랑한 프로메테우스가 아들 데우칼리온 부부에게 알려주고 대홍수 이후 이들만 살아남게 된다. 이들은 테미스 여신으로부터 "위대한 어머니의 뼈를 등뒤로 던져라"는 신탁을 받고 대지 가이아의 돌을 등뒤로 던졌다. 거기서 새로운 인간들이 탄생했다.

프로메테우스는 매우 흥미로운 신이다. 제우스와 끝까지 대항하면서 인간을 보호한 신이다. 올림포스 12신에도 들어가지 못하지만 인간으로서는 어떤 신보다 위대한 신이 아닐 수 없다. 수메르의 신들 중 서열 3위인 엔키와 비슷한 특징을 보인다.
프로메테우스가 흙으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신화도 있고, 다른 신들이 창조한 인간에게 능력을 부여했다는 전승도 있다. 김헌은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가 전하는 두 번째 프로메테우스에 대해 설명해 준다.
Pro - Metheus 는 '먼저 생각하는 자 ' 이다. Metheus는 '생각하다 혹은 알다' 라는 뜻이다. 동생은 Epi - Metheus 이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신이 '생각' 혹은 '앎'을 의미한다는 것이 뜻 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첫 문장을 "모든 사람은 본성적으로 알고싶어 한다." 로 시작한다. 철학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말로 여겨진다. 인간의 아레테, 탁월함을 앎으로 보는 것이 서양 문명의 뿌리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아이스퀼로스의 현존하는 비극에도 그 인간사랑이 전해진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위해 불을 가져다 주고 제우스의 분노를 사서 카우카소스산에 묶여 형벌을 받으면서도 굴복하지 않고 제우스에 대항한다. 제우스를 독재자로 비난하며 아버지와 똑같이 자신의 아들로에 의해 쫓겨날 것이라고 저주한다. 제우스는 무시무시한 협박으로 그 아들이 누구인지 알아내려 하지만 아이스퀼로스는 프로메테우스의 입을 끝까지 봉하며 비극을 끝맺는다.
김헌의 강의에서는 프로메테우스가 타협을 하고 티탄신족 중 제우스가 마음에 두고 있던 이모? 고모?인 테티스와 결혼할 경우 그 아들이 제우스를 쫓아낼 것이라고 말한다. 놀란 제우스는 테티스를 다른 남자와 결혼시키는데, 이 성대한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이 등장하여 그 유명한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라고 쓰인 사과를 던진다. 이 사과는 테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가 주인공이 되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 의 발단이 된다. 이렇게 기원전 5세기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는 기원전 8세기의 <일리아스> 와 만난다. 희랍인들은 오랫동안 전승되어 온 다양한 신화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