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장소를 옮겨 환하고 깨끗한 카페에서 만났습니다.

모두들 엄청 맘에 들어 하시는데, 아쉽게도 정기 모임에는 휴일이네요...

열 한 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지난 주에 『철학으로서의 철학사』 아리스토텔레스까지 마치고

 오늘은  『인문 고전 강의』 중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함께 공부하였습니다. 

니코마코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들이고요. 아들의 이름을 딴 것은 그가 편집했다고 추정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들에게 헌정했다는 말도 있고요.

 

완역본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두껍고요. 읽기도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모두 읽지는 못했고    『인문 고전 강의』 에 나오는 내용을 중심으로 부분 부분 읽었습니다. '중용'의 정확한 개념이 궁금해서 도서관에서 빌려온 것입니다. 너무 꼼꼼해서 하악 하악 소리가 나오려고 했지만 후대의 칸트나 헤겔에 비하면 그리 심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탁월함은 두 가지입니다. 지적 탁월함과 성격적 탁월함입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의 핵심은 지적 탁월함으로 실천적 지혜를 기르고, 성격적 탁월함으로 중용을 실천하여 훌륭한 시민이 되고 , 나아가 신의 영역에 도전하여 관조적 삶을 누릴 수 있으면 최고로 좋은 삶 즉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그렇습니다.

 

여기서 니코마코스는 중용이라는 성격적 탁월함에 대해 공을 많이 들이는 것 같습니다. 중용의 개념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과녁에 맞추는 화살에 대한 비유였습니다. 중용은 양 극단을 배제한 적당히 중간적 위치가 아니라 정확하게 과녁을 맞추는 태도입니다. 중용 즉 성격적 탁월함과 대립되는 품성 상태는 악덕인데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모자람과 지나침입니다. 우리는 오늘 중용으로서의 '용기'를 예로 들어서 그 지나친 태도인 무모함과 모자란 태도인 비겁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건 지난 주에도 조금 이야기해 보았던 것입니다. 어떤 두려운 상황에서 예를 들어 강도를 당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 용기는 적당히 양심을 무마시킬 수 있는 정도의 행동을 말하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용기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으니까요. "이성이 명하는대로 고귀한 것들을 위해 그것들(두려움)을 견뎌낼 것이다." 즉 용기의 목적은 고귀함입니다. 지난 주말에 끝난 드라마 <도깨비>에서 은탁은 유치원 버스의 수많은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브레이크 풀린 거대한 탑차 앞을 자기의 자동차로 막고 죽습니다. 이걸 우리는 용기라고 부르나요? 무모함이라 부르나요? 어쩌면 중용이라는 것은 이렇게 극단적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중용을 몸에 익히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외에도 윤리학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강유원 선생님의 강의 중에 '윤리학의 황금률' 에 대한 설명이 있었습니다. 공자는 그걸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己所不欲 勿施於人" 이걸 긍정문 형태로 바꾸면 칸트의 정언명령과 비슷합니다. 성경에도 유사한 구절이 있다고도 하네요. 이렇듯 모든 문명권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윤리적 규범이 바로 이 황금률입니다. 뭐, 남을 욕하고 싶을 때 그 욕을 내가 들어도 좋은가 생각해 본다면, 남에게는 손해가 되지만 내게는 이득이 되는 일에 유혹될 때 상황을 거꾸로 놓아본다면 즉 이 황금률을 적용한다면 세상은 분명 달라질 것 같습니다. 

 

 

다음주는 명절 휴일이고요.

8회 모임은 다다음주 2월 6일에 있습니다.

8회 공부할 내용입니다.

 

<철학으로서의 철학사>

 

p 154~ 178

 

Ⅴ 지혜로운 인간의 이상

Ⅵ 신플라톤 주의

 

<2012 서양 철학사>

 

파일 13

파일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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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4 17: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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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4 21: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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