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년 6월 26일 쓴 글입니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영화는 그가 집행유예로 풀려나와 고향 제주의 갯내음을 안고 곧장 독일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 후 7년이 지나 개봉을 했지만, 영화에는 더 이상 뒷이야기가 없다. 그는 더 이상 경계인으로 살아가기를 포기했을까?

 

내가 송두율이라는 학자의 이름을 처음 듣게 된 것은 아마 2003년, 그가 귀국하여 검찰 조사를 받고 있을 때였던 것 같다. 그가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인가 아닌가로 논란이 뜨거울 때였는데, 그때 나는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말은 석연치 않았고 그의 두리뭉실한 사과는 그 석연치 않음을 더욱 석연치 않게 했다. 나는 그때 그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알 수 없었지만, 김철수인지 아닌지, 노동당 서열 23위인지 아닌지 그가 몰랐다는 것도, 그가 모르지는 않았다는 듯이 말하는 것도,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더 이상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가 독일에서 어떤 학문을 하고, 어떤 책을 썼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 나는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다만 그가 남북의 통일을 위해 경계인으로 살고 싶어 했다는 것 외에는. 그가 김철수 논쟁에 휘말리지 않고 남북 화해 무드를 타고 남한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더라면 그가 내세운 ‘경계인’도 홍세화의 ‘똘레랑스’가 한 때 그랬던 것처럼 우리 시대의 키 워드가 될 수 있었을까? .... 나는 경계도시2를 보면서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이 영화의 모든 것은 사실 한 장면에 집중되어 있다. 송두율이 구속 수감되기 전 대국민 사과 기자 회견을 하기 위해 송두율 진영의 사람들이 모여서 대책 회의를 하는 장면이다. 검찰은 이미 송두율이 김철수라고 확신하고 있었고, 여론 뿐 아니라 민주 진영조차 그 사실에 경악하고 있을 때였다. 송두율은 여전히 애매모호한 태도를 하고 있었다. 북한에서 자기를 김철수라고 부르는 것을 인지한 시점이 스스로에게도 모호하고, 노동당에 가입했지만 일종의 요식행위라고 생각했고, 정치위원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전혀 활동을 한 바 없기 때문에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송두율은 김철수라 불리긴 했지만 사람들이 의심하는 그런 김철수는 아니고, 노동당 정치위원에 이름이 오르긴 했지만 오로지 이름으로서만 정치위원이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북한에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다.

 

그가 원한 것은 오로지 경계인이었을 뿐, 북한도 남한도 아니었다. 그의 국적은 독일이었다. 독일인으로 남과 북의 경계에 서서 두 나라의 화해와 통일에 견인차가 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남한은 그에게 실정법을 들이대며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그에게 선택을 강요한 것은 비단 국가보안법이라거나 하는 법체계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남한 사회는 한 목소리로 그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남이냐? 북이냐? 남한에서 살기 위해서는 북한을 부정해야 하고, 북에 갔던 것을 사과해야 하고, 무엇보다 그의 ‘경계인’을 포기해야 했다. 그렇다 그의 국적 독일을 포기해야 했다. 그래야만 송두율은 남한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단호한 쪽은 오히려 부인이었다. ‘경계인’은 송두율의 정체성인데, 그 정체성을 포기하고 남한에서 살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의 부인은 남편이 받아야 할 고난에는 의연했지만, 정체성을 잃은 남편은 더 이상 남편 송두율일 수 없음을 확언했다. 송두율 자신은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이것은 더 이상 송두율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송두율의 입국을 추진했던 oo씨(이름을 모름;;)는 고래고래 목청을 높였다. 송두율이 개인의 양심만을 고집할 경우 민주 진영은 박살이 난다는 것이다. 송두율이 노동당 서열23위임이 밝혀졌을 때 이미 게임은 끝났다. 통일 논의에 활력을 불어 넣고자 초빙했던 송두율이 이제 통일 세력의 핵폭탄이 되었다는 듯이, 무조건 항복 외에는 자멸뿐이라는 듯이, 그는 극단의 언어를 쏟아 내었다. 그의 부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계인’ 송두율을 포기할 수 없다는 태도를 견지하자, 화면 바깥쪽에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태극기를 휘감은 경계인도 많습니다!”

 

나는 그 때 알았다. 왜 송두율이 그렇게 매력적이지 못했는지를. 그의 ‘경계인’이 왜 그렇게 맹숭맹숭했는지를. 그가 원한 것은 제3의 자리였다. 남도 북도 아닌 제3의 자리, 그 경계에 서서 제3의 객관적 시선과 판단을 원했다. 그 전지적 시점을. ... 가능할 것인가?

 

남에도 북에도 돌아 갈 수 없었던 최인훈의 ‘명준’은 바다 속을 택했다. 실제로 6.25 정전 후 제3국을 선택한 76명의 반공포로들은 남도 북도 모두 포기하고, 그냥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택했다. 제3의 길이 가능하다면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닐까...

 

나는 실제로 그가 김철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스스로 북한에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고 했다. 나는 그가 무슨 책을 썼는지 모르지만 사실 북한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지식으로서의 북한이 아니라 실재의 북한, 북한이라는 곳의 삶, 북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말이다. 그는 아마 남한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아니 김철수 사건을 겪으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가 경계인으로서 부푼 꿈을 품고 남한의 공항에 내렸을 때, 그 때는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다. 남한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이다. 그는 비로소 알았을 것이다. 자신을 지지했던 그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는 자신을 초빙했던 당사자들까지 자신을 의심하고 몰아세우고 사과하기를 주장했을 때에야 비로소 남한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박찬욱 감독의 JSA가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지도 모른다. 따뜻한 감성과 균형 잡힌 이성으로 형제애를 나누던 그 네 명의 군인들이 순식간에 갈라서서 방아쇠를 당겨야 했던 그 순간에 말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 믿고 있던 것의 차이가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내던 그 순간에 말이다. 어쩌면 인공기를 휘감고 있던 오경필(송강호)이야말로 경계인이 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유혈과 혼란의 현장에서 차분하게 이병헌에게 총을 쥐어주며 자신의 어깨를 쏘아 현장을 수습하게 하던 오경필은 어떤 의미에서 경계인이 아닐까....

 

나는 지금 송두율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가 사실 궁금하다. 가혹한 말이지만 그가 진정으로 경계인이 되고자했다면 그의 남한에서의 경험이야말로 그 시작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남한 사회가 노동당원 김철수를 앞에 두고 자신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던 그 순간에 보았던, 그리고 겪었던 바로 그것이야말로 그에게 남한을 바라볼 수 있는 진정한 눈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그가 오히려 진정한 김철수였기를 진심으로 바래보았다. 정치위원 김철수로서 그가 하고, 보고, 느꼈던 것이야말로 그에게 북한에 대해 진정으로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경계인이 그저 제3의 외부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태극기를 휘감은 경계인이나 인공기를 휘감은 경계인 이외의 중립적, 객관적 경계인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참으로 힘들고 힘든 고난의 길이다. 이미 김구 선생이 보여주었고, 문익환 목사가 보여주었 듯이 말이다.

 

경계 도시 2에서 보이는 송두율의 모습은 착하고 유약해 보였다, 우리가 천상 학자라고 말할 때의 그런 모습처럼 말이다. 그냥 한 사람의 학자로서 남과 북의 통일에 대해 연구하고 발언하는 송두율은 나쁘지도 않고 문제될 것도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를 통일의 도구로 규정하고, 역사가 지우는 그 책임의 무게를 기꺼이 감당할 의지가 있었다면 그는 이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그저 잊히면 그만일 뿐이다. 노래 가사처럼 그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이.... 이 영화의 감독은 나레이션을 통해서 송두율 사건은 우리 사회에 던져진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고 했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만 그것은 그대로 송두율 자신에게도 하나의 리트머스 시험지였다는 것을 덧붙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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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31일에 쓴 글입니다.

 

  영국 엄마들은 딸에게 꼭 읽히고 싶은 책으로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꼽는다고 한다. 로맨스 드라마나 소설 따위를 적잖이 본 내 눈에도「오만과 편견」은 아주 세련되고 대단히 기품 있는 신데렐라 스토리로 보인다. (이 책의 문학사적 가치나 지위는 통속적 독자의 영역이 아니다.) 신데렐라 스토리는 유럽의 오래된 구전동화로, 수 백 가지의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신데렐라는 왜 왕자님을 사랑 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진 독자는 거의 없다. 왕자님은 그 자체로 충분히, 사랑의 대상이 된다. 왕자님이라는 기표 자체가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가치를 보증하는 것이다. 왕자님은 결여가 없는 전체(Whole)이다. 전체로서의 왕자님은 하나하나의 특질로 분리되지 않는다. 왕자님의 고귀함은 왕자님의 부귀와 분리되지 않고, 왕자님의 인격은 왕자님의 권력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시대의 왕자님은 분열된 대상이다. 현대적 신데렐라의 눈에 비친 왕자님의 부는 ‘타고난 운’에 불과하다. 왕자님의 부가 더 이상 왕자님의 인격 혹은 가치를 보증하지 못한다. 당차고 독립적인 신데렐라에게 왕자님의 부는 오만의 표상이거나 경멸의 대상이다. 더구나 현대판 신데렐라인 캔디는 ‘세상의 모든 일에 다 관심이 있어도, 딱 하나, 왕자님의 돈에 대해서만은 전혀 관심이 없어’야 한다.

  돈 밖에 없는 왕자님과 돈에만 무관심한 신데렐라, 이 어긋남이 어떻게 행복의 열쇠가 되는 것일까?

 

  균열이 봉합되는 방식은 왕자님의 과거에 외상을 도입하는 것이다. 왕자님은 엄마나 아버지, 사랑했던 여인으로부터 버림받은 상처를 앓고 있다. 옛날 옛적의 왕자님은 완전한 전체-Whole 이지만, 현대의 왕자님은 구멍 뚫린 전체-(W)hole 이다. W를 상실한 (W)hole 이다.

  신데렐라의 기회는 여기, 이 구멍에 있다. 우연히 눈에 뜨인 신데렐라는 왕자님이 잃어버린 ‘진실한 사랑’ -구멍 마개(hole gap) 이다. 이것이 예쁘지도 않고, 틱틱거리기까지 하는 신데렐라들에 왕자님들이 그토록 목매는 이유이다. 신데렐라의 ‘진실한 사랑’ 만이 왕자님의 구멍 뚫린 세계를 완전한 세계로 마법처럼 바꾸어 준다.

  그러나 신데렐라의 ‘진실한 사랑’이 마술을 부리는 것은 오직 왕자님의 세계 안에서 만이다. 진실한 사랑은 궁핍한 세계에서는 아무런 힘이 없다. 돌부리처럼 발을 걸어 넘어뜨릴 뿐이다.

 

 

 

 

  드라마「청담동 앨리스」는 ‘진실한 사랑’에 관한 변증법이다.

  세경과 인찬은 가난한 연인이다. “노력이 성공을 만든다.” 고 굳게 믿으며 열심히 살아왔지만 미래는 갈수록 마이너스이다. 헤어날 수 없는 빚더미 앞에 ‘진실한 사랑’은 장애물로 전락한다. 진실한 사랑을 지키려면 미래를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미래 없이는 진실한 사랑도 불가능하다.

  인찬은 세경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사랑을 배신한다. 세경은 사랑을 지키는 척 하면서, 사랑을 버린다. 세경의 꿈이 고스란히 담긴 적금 통장은 그렇게 승조에게 전달된다. 승조는 세경의 통장을 인찬에 대한 ‘진실한 사랑’의 증표로 읽는다. 세경은 인찬과의 ‘진실한 사랑’을 버리기 위해 꿈을 모은 적금 통장을 넘겼지만, 승조는 그것의 의미를 정반대로 읽었던 것이다. 세경은 실종되었다고 믿었던 ‘진실한 사랑’ 그 자체가 되어, 승조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세경의 통장은 그렇게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오해를 낳으며, 신데렐라와 왕자님의 사랑을 매개한다. 사랑의 시작은 오해이다.

  승조에게 ‘진실한 사랑’은 세상의 전부이다. 승조는 사랑을 잃어버린 구멍 뚫린 왕자님이다. 세경의 ‘진실한 사랑’은 승조의 세계를 완벽한 Whole로 만들어 줄 구멍 마개이다.

   눈부시게 변신한 것은 세경이 아니라 세경의 ‘진실한 사랑’ 이다. 돌부리, 장애물로 버림받았던 ‘진실한 사랑’은 하루아침에 구원의 천사가 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 혹은 그 보다 더 나쁜 것이었던 ‘진실한 사랑’은 세상의 ‘모든 것’으로 변신했다. 단지 인찬에서 승조로 수신자가 바뀌었기 때문에. 가난한 세계에서 부유한 세계로 장소를 이동했기 때문에, 단지.

  ‘단지’, 장소는 단지가 아니라, ‘진실한 사랑’의 가치를 결정하는 곳이다. ‘진실한 사랑’의 진정하고 보편적인 가치란 없다. 그것은 어디에, 누구에 작용하는가에 따라 아무것도 아닌 것 보다 더 나쁜 것이 될 수도, 세상을 구원하는 모든 것이 될 수도 있다.

 

 

  보통의 캔디-신데렐라 드라마는 여기서 행복하게 끝난다. 언제나 어디서나, 외로워도 슬퍼도 결국 캔디-신데렐라는 ‘진실한 사랑’을 되찾기 때문이다. 드라마 <청담동 앨리스>는 신데렐라 스토리의 변종이다. 그리고 진화가 변이라면, <청담동 앨리스> 역시 신데렐라 스토리의 진화이다.

 

  세경은 ‘진실한 사랑’을 버리고 꿈에서 깨어난다.

  “가난하다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했어. 근데 이제 알았어. 아무리 열심히 성실히 노력해도 가난하다면 그건 부끄러워해야 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향해 화를 내야 되는 거야. 훌륭한 사람들은 이럴 때 세상을 바꾸지. 근데 난 그런 사람 아니야.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나는 나를 바꿀거야. 너처럼 살거야. 나 그거 갖고 싶어. 그 옷도 갖고 싶어 나도 너처럼 남자 잘 잡아서 청담동 들어갈거야. 사고 싶은 옷 다 사고 사고 싶은 명품 다 사고 가고 싶은 데도 다 가고 천원 이천원에 벌벌 떨지 않으면서 가족들한테 사람 노릇 하면서 그렇게 살거야. 나도 너처럼!!!"

 

  세경은 더 이상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로는 왕자님을 만날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한다. 왕자들의 세상과 신데렐라의 세상은 철저히 격리되어 있다. 왕자님들은 성 밖의 신데렐라들에 더 이상 관심이 없다. 왕자님의 파티에 초대되기 위해 필요한 건 더 이상 진실한 사랑이 아니다. 작전과 계략이다.

  세경은 철저히 검어진다. 승조에게 발각 난 이후에도 세경은 멈추지 않는다. 추한 사랑이 진실한 사랑과 더 이상 구분되지 않을 때 까지 세경은 검어진다, 추해진다. 그리고 추한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 된다.

 

  대립물의 일치. 부정의 부정.

  세경은 진실한 사랑을 버리고 추한 사랑을 선택한다. 진실한 사랑에 대한 첫 번째 부정, 사랑의 내용을 부정한다. 그 다음 세경은 무엇이 진실한 사랑인가에 대한 기준을 바꾸어 버린다. 승조도 더 이상 무엇이 진실한 사랑인지 추한 사랑인지 분간하지 못한다. 사랑을 측정하는 잣대, 그 형식에 대한 부정. 이것이 부정의 부정이다. 여기서 추한 사랑은 진실한 사랑과 일치한다. 바뀐 것은 추한 것을 진실한 것으로 바라보게 되는 관점의 전환이다.

 

 

  이것이 엘리자베스의 전략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시대, 세경이 신데렐라가 되는 방법이다. 세경은 엘리자베스의 억압된 이면이다. 행복했던 신데렐라들의 시대에, 엘리자베스는 욕망을 드러내지 않고, 진실한 사랑만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그것이 불가능한 시대, 신데렐라들은 억압된 욕망을 드러내고, 사랑의 추잡함을 인정하고, 그리고 더욱 교활하고 더욱 대담하게 나아가야 한다. 그래도 성공할 수 없다면? 

  “나를 바꿀 수 없다면 나는 세상을 바꿀거야.” ...할 수 밖에 없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신데렐라에 대한 이중의 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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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12월 27일에 쓴 글입니다.

 

 

  몇 달째 드라마와 살고 있다. 외출하지 못하고 책도 읽기 힘드니 자연 드라마와 친해졌다. 물론 그 전부터 매니아는 아니라 해도, 봐야하는 드라마는 꼭꼭 챙겨보는 드라마 친구이긴 했다마는. 여하튼 VOD라는 것 덕분에 예전에 못 봤던 드라마, 띄엄띄엄 봤던 드라마, 열심히 봤던 드라마 할 것 없이 한꺼번에 좌~악 연결해 보면서 드라마를 보는 안목이 조금 훈련되었다는 나름의 성과도(ㅋㅋ) 있었다. 그렇게 지붕뚫고 하이킥도 다시 보고, 선덕여왕, 발리에서 생긴 일도 다시 봤다. 또 고현정이 강력계 형사로 나온 히트, 김현주가 변호사 역을 한 파트너 같은 숨어 있던 명작도 찾을 수 있었고, 미남이시네요나 성균관스캔들 같이 가슴을 콩닥거리게 할 줄 아는 로맨스물도 재미있게 보았다. 물론 ‘콩닥거리게 하기’라면 요즘은 시크릿 가든의 현빈을 따라올 놈이 없지만 말이다.

 시크릿 가든의 작가는 ‘영리한’이라는 말을 좀 듣는 편인 것 같은데, 가령 분명히 신데렐라 스토리인데도 인어공주를 차용해 와서 어짜피 뻔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와 스토리를 변주하는 솜씨가 뛰어나다 따위의 호의적 평가를 얻어낸다. 잘생기고 알고 보면 인간성까지도 괜찮은 재벌 2세 혹은 3세가 가난한데다 특별히 예쁘지도 않고 성격도 별로인 여자를 멀쩡한 정신으로 죽자살자 좋아한다고 뻥치기에는 이제 너무 낯간지러울만큼 영악한 세상에 발빠르게(?, 한참 늦었다고 해야겠지만, 이왕 신데렐라 외길 멜로가 우리 드라마와 작가의 앞날이라면..) 대처하는 작가의 순발력이 아닌게아니라 뛰어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인어공주는 몇달전 방영됐던 내 여자 친구는 구미호에서 먼저 차용되었다. 물론 구미호의 인어공주가 정통성을 따라갔다면(결과는 해피엔딩이었다만), 시크릿 가든의 인어공주는 변종이라고 할 수 있다. 자발적 인어공주가 아니라 하지원에게 인어공주가 되길 강요했다가 또 현빈 자신이 인어왕자가 되겠다고 나서기도 하고. 물론 해피앤딩이 아니라면 하지원이 결과적으로 자발적인 인어공주가 될 가능성이 높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대목이 제일로 문제적인 것은 사실이다. 현빈은 자신의 계급적 위치 때문에 죽었다 깨어나도 인어왕자가 될 수 없다. 현빈이 거품처럼 꺼지는 것은 그냥 하지원을 버리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도 빠득빠득 자기가 인어왕자를 하겠다고 우긴다. 가지고 놀다 버리겠다는 말을 참으로 사회적 지위에 걸맞게도 품격있게 하신다. 우리 지원이는 그 놈의 사랑이 뭔지 차마 그렇게까지는 말하지 못하고 혹은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그 말에 홀라당 넘어가 버린다. 하긴 돈 많고 잘 생긴 놈이 허구헌날 찾아와 내가 인어왕자라고 하는데 안 넘어갈 정신 멀쩡한 여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시크릿 가든이 재미있기는 하다. 화려한 볼거리, 현란한 말솜씨에, 인어공주를 선고받은 신데렐라의 달콤쌉싸름함까지. 그렇거나말거나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오늘의 드라마는 시크릿 가든이 아니라 지난주에 종영한 즐거운 나의 집이다. 서설이 좀 심하게 길었다만 ㅠ.ㅠ

 

 즐거운 나의 집은 뜯어보는 재미가 쏠쏠한 드라마에 속한다. 스토리도 탄탄하고 인물들의 내면적 갈등도 흥미롭고 드라마의 메시지도 다면적이고 연기도 훌륭하다. 대중문화 평론가처럼 그런 것들을 다 아울러 드라마에 대한 평가를 내려야 할 부담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냥 내가 맨 처음 이 드라마에 흥미를 갖게 된 지점에서 이야기를 할까 싶다.

 진서는 정신과 의사이다. 그녀가 쓴 책은 ‘나만 모르는 내 남편’ 이다. 진서의 남편 상현을 호시탐탐 유혹하는 윤희는 진서에게 이 책을 들먹이며 야릇한 웃음을 날린다. 즐거운 나의 집은 이런 면에서 보았을 때에는 ‘진서만 모르는 남편 상현’에게 얽힌 사건들로 구성된다. ‘나만 모르는 내 남편’ 을 쓸 때 정신과의사인 진서는 그 보편적 제목 속에 자신도 포함된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그 보편적 진실을 알고 있는 주체로서 자신만은 예외로 두었을까?

 이 드라마에서 진서가 정신과의사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정신과의사로서의 진서는 드라마 속에서 그리고 드라마 밖 관객에게도, 그녀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믿음을 갖게 만든다.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로서의 역할을 맡은 것이다. 그러나 드라마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진서는 오히려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 하나하나 드러난다. 진서는 남편 상현의 외도를 몰랐을 뿐 아니라 외도에 이르게 한 그 불안함의 정체와 그것이 자신에게 기인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윤희가 왜 자신을 그토록 미워하는지도 몰랐다. 드라마 내내 윤희는 진서에게 말한다. 너는 아직도 모른다, 내가 왜 이러는지를. 진서는 남편 상현에 대한 집착 때문에 윤희가 자신을 시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윤희의 진정한 대상은 상현이 아니라 진서 자신이다. 윤희는 진서 때문에 상현의 곁을 맴돈다. 그것을 알아 내지 못하는 진서에게 윤희는 비웃는 듯 답답한 듯 속삭인다. 나는 정신과 의사라는 네 직업이 참 우스워. 그리고 심지어 환자로서 찾아 온 윤희의 남편 성은필에 대해서도 진서는 알지 못한다. 6개월간 일주일에 두어번 씩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어 왔다고 생각한 성은필마저 진서를 속이지만 진서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 진서는 사실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의 자리를 떠맡아 혼돈 속에 빠진다.

 그러나 이것이 진서가 무지를 은폐한 채 앎을 가장하고 있다는 식의 기만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 로서의 진서의 위치 없이는 사건이 진행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서가 맡은 앎의 역할이 오히려 진서를 혼돈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진서를 둘러 싼 사람들은 진서가 그것을 알아 낼 것이라는 기대 혹은 믿음에 의해 자신의 욕망을 펼쳐 보인다. 윤희 역시 진서가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알아 낼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에 혹은 믿기 때문에 진서의 남편 상현을 유혹한다. 상현은 윤희의 은밀한 대상이 아니라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알려주는 단서이다. 진서와 윤희의 관계는 진서가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 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사실 이 드라마는 불륜 치정극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사학재단의 비리를 대놓고 까발린다거나, 교수 사회의 권력 다툼과 시간 강사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거나, 강제로 학교를 빼앗은 친일파 일족이 독립운동가로 둔갑하여 재단이사장이 되었다거나 하는 사회 정치적 측면뿐만 아니라 인물들의 갈등 구조가 전형적인 불륜 드라마와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갈등을 일으키는 주요 인물인 윤희가 겨냥하고 있는 대상은 상현이 아니라 진서이다. 상현은 하나의 수단일 뿐 윤희가 진정으로 스스로를 드러내기를 원하는 대상은 오로지 진서이다. 윤희는 상현을 사랑한다기 보다는 진서를 부러워하고, 상현 때문에 아파하기 보다는 진서에게 입은 상처에 평생을 집착한다. 윤희는 상현의 사랑이 아니라 진서의 이해와 용서를 통해 비로소 안식에 든다. 그래서 즐거운 나의 집은 발리에서 생긴 일을 떠올리게 한다. 발리...의 하지원 역시 즐나집의 상현과 같이 궁극적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계기일 따름이다. 조인성과 소지섭의 갈등은 하지원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열등감과 동경에 기인한다. 어떤 소통도 불가능했던 발리의 두 남자는 비극을 맞았지만, 즐나집의 두 여자는 이해를 통해 화해하며 행복한 결말을 맞았다. 윤희는 진서를 통해 증오했던 아버지와 남편이 사실은 자신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성은숙에게 이쁨받고 싶었다고 고백하며 평안하게 죽을 수 있었다. 즐거운 나의 집의 이 해피앤딩은 진서가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로서의 역할을 맡았기에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윤희는 진서가 자신을 알아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발리에서와는 다르게 즐나집은 처음부터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작년에 읽었던 책에는 이런 수수께끼가 있었다. 다섯 개의 모자가가 있고 죄수 세 명이 각각 하나씩 모자를 쓰고 있다. 둘러앉은 죄수들은 상대방의 모자는 볼 수 있지만 자신의 모자 색깔은 알 수 없다. 다섯 개의 모자는 흰색 세 개, 검은색 두 개인데 자신의 모자 색깔을 가장 먼저 맞춘 죄수는 감옥을 나갈 수 있다. 문제 나간다...

첫 째, 검은 모자 두 개, 흰색 한 개의 경우

흰색 모자를 쓴 죄수의 눈에 두 개의 검은 모자가 보인다. 답은 간단하다. 총 두 개의 검은 모자를 두 사람의 죄수가 각각 쓰고 있으니 자신의 모자는 당연 흰색이다. 이건 쉽다. ‘응시의 순간’ 만 있으면 된다.

둘 째, 검은 모자 한 개, 흰색 두 개의 경우

흰색 모자를 쓴 죄수 A의 눈에는 검은색 하나, 흰색 하나가 보인다. 그렇다면 자신의 모자는 흰색일 수도 있고 검은 색일 수도 있다. 만약 자신의 모자가 검은색이라면 흰색 모자를 쓴 죄수 B의 눈에는 검은 모자 두 개가 보일 것이다. 그러면 그 즉시 죄수 B가 일어나 자신의 모자가 흰색일 것이라고 외칠텐데, 죄수 B가 주저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나의 모자는 검은색이 아니라 흰색이다! 조금 어렵다. 나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야 하는 ‘이해를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세 째, 흰색 모자 세 개의 경우

흰색 모자를 쓴 죄수 A의 눈에 흰색 모자 두 개가 보인다. 그렇다면 자신의 모자는 흰색일 수도 있고 검은색일 수도 있다. 만약 내 모자가 검은색이라면? 죄수 B는 흰색 하나, 검은색 하나를 보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죄수 B는 죄수 A인 나 자신이 두 번째 경우에서 유추한 과정을 밟아 흰색 모자를 쓴 죄수C가 주저하는 것을 보고(최초의 지연) 자신의 모자가 흰색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일어나 외칠 것이다. 그런데 죄수 B는 움직이지 못한다. 세 명의 죄수 모두 움직이지 못하고 서로 쳐다보고만 있다. (두 번째 지연) 그렇다면 내 모자는 검은색이 아니라 흰색이다. 딴 놈들이 일어나기 전에 얼른 일어나야한다! ... 만일 세 죄수의 지능이 모두 동일하다면 이 세 명의 죄수는 동시에 일어나 흰색이라고 외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사실 이 죄수들은 끝내 자신의 모자 색깔을 확신하지 못한 채 성급히 일어나 외칠 수밖에 없다. 상대방의 머뭇거림이 내 모자 색깔이 검기 때문에 일어난 최초의 지연인지, 흰 색이기 때문에 일어난 두 번째 지연인지를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수수께끼를 예시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에서 S1으로의 이행, 즉 내가 무엇인지에 관한 근본적 불확실성으로 축약되는 주체성의 공백으로부터 상징적 정체성의 떠맡음 -그것은 나다- 으로의 이행이다..... 우리는 촉박한 주체적 제스처를 통해 “우리가 그것인 그 무엇이 된다” 이 촉박한 동일화는 대상에서 기표로의 이행을 내포한다. 모자는 내가 그것인 대상이며, 내가 그것을 볼 수 없다는 점은 내가 “내가 대상으로서 그것인 그 무엇”에 대한 통찰을 결코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즉 $와 대상a는 위상학적으로 불가능하다) 내가 나는 하얀색이라고 말할 때 나는 나의 존재에 관한 불확실성의 공백을 메우는 상징적 정체성을 떠맡는다. 이 예기적anticipatory 앞지르기를 설명해 주는 것은 인과사슬의 비결정적 성격이다. 상징적 질서는 “불충족이유율 principle of insufficient reason”에 의해 지배된다. 상징적 상호주체성의 공간 내부에서 나는 내가 무엇인지를 단지 전혀 확인할 수가 없는 것인데, 바로 이 때문에 나의 객관적 사회적 정체성은 주체적 예기를 통해 확립된다. 」

 간단히 말하자면,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OO입니다”를 떠맡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떠맡음에 끝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히스테증자이다. 「 히스테리적 질문은 “왜 나는 당신이 나라고 하는 그 무엇인가요?” 이다. 즉 나는 주인이 내게 부과한 상징적 정체성에 의문을 던진다. 나는 “내 안에 있는 나 자신 보다 더한” 어떤 것, 즉 대상a의 이름으로 그것에 저항한다. 」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것을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 주로 정신분석가가 그 역할을 담당하는, 역시 사실은 알고 있지 못한다. 단지 그 위치를 떠맡음으로 해서 질문을 던지는 자가 스스로 찾는 길의 조력자가 될 뿐이다.

 

 즐거운 나의 집은 역설이면서 동시에 사실적 진술이다. 이 드라마의 첫 회는 남편 상현이 진서와의 즐거운 한 때를 보낸 직후, 다급하게 걸려온 윤희의 전화를 받고 진서가 잠든 틈을 타 빗속을 뚫고 윤희에게 달려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 회, 상현과 진서는 또 다시 행복한 식탁에서 웃음과 반찬과 사랑을 함께 나눈다. 즐거운 나의 집은 그렇게 위태로운 동시에 즐겁다. 사실 조금 충격적이게도 첫 회의 그 행복한, ‘즐거운 나의 집’이 화면에 펼쳐지기 이전에 이미 진서는 남편 상현의 외도로 위태로움을 겪고 있었다. 진서는 즐거웠지만 동시에 즐거운 척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윤희의 유혹으로 마치 즐거운 나의 집에 위기가 찾아 온 것 같았지만 사실 이 즐거운 나의 집은 이미 벌써 위기 위에 지어져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다시 찾은 즐거운 집 역시 그것을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윤서도 상현도 그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또 다시 즐겁고 그것은 영원히 즐거울 것처럼 그렇게 행복해 보인다. 내가 진정으로 누구인지 우리는 아무도 모르지만 내가 그 누구임을 떠맡음으로 인해 우리는 아주 단단히 세상에 뿌리박고 있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 때때로 그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버려도 우리가 다시 세상에 뿌리를 내리는 이유는 그 땅이 그렇게 단단하기 때문이 아니라 뿌리 없이 우리가 살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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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22일 쓴 글입니다.

 

   비가 오면 하지원과 현빈의 영혼이 몸을 바꿔치기하는 드라마 <시크릿 가든>은 “나는 네가 되고 싶어.”로 요약되는 연애하는 자들의 욕망을 결정(結晶)한 판타지다. 만약 그리만 된다면, 첫 목련의 개화나 혜성의 꼬리를 목격하며 “당신이 여기 함께 있다면!”(그 많은 카드에 새겨진 “Wish You were Here”)이라고 안타까워할 일 따위는 없어지겠지. 나는 때때로 어떤 대상을 아름답다고 판단내릴 때의 기분과 사랑의 감정을 또렷이 구분하는 데에 곤란을 겪는다. 이를테면 우리는 아름답다고 느끼는 상대를 사랑하는 것일까, 사랑에 빠진 대상한테서 미를 찾아내는 것일까. 아예 그 사람이 되어버리기를 바라는 사랑의 마음처럼 아름다움도 복제의 충동을 부른다. 예쁜 소녀를 보면 연필을 들어 그리고 싶고, 카메라로 찍어두고, 글로 옮겨놓고 싶어진다. 비트겐슈타인은 “눈이 아름다운 것을 보면 손은 그걸 그리고 싶어 한다”고 했다. 시각은 그처럼 촉각으로 전이된다. 현빈과 하지원은 시선으로 더듬던 상대의 피부 안에서 사는 일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닮은 아이를 갖는 일은, 아름다움을 복제하고자 하는 우리의 본능이 이르는 극점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진실은 다음과 가깝다. 정작 당신이 그가 되면, 당신은 그를 사랑하기를 멈출 것이다. 레나타 살레클이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에 쓴 대로, 사랑은 제약 속에 있다. “의례 때문에 억제된 사랑을 찾으려는 건 쓸모없는 일이다. 사랑의 일체는 그 의례들 속에 있다.” 그가 지금 여기 없기에, 있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씨네21 김혜리 기자의 글이다.

“정작 당신이 그가 되면, 당신은 그를 사랑하기를 멈출 것이다.” 를 읽으며 나는 불현듯 영화 <아바타>를 떠올렸다. 그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나비족과 그들이 타고 다니는 이크란이 서로를 교감하는 방식이다. 나비족의 긴 머리채와 이크란의 꼬리(같은 것)를 서로 잇대면 그들은 언어를 통하지 않고도 서로를 직관할 수 있다.

  언어가 없이도 서로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일까. 언어는 우리를 충분하게 대변해 주지 못한다. 내 생각을 전달해야 하는 언어는 늘 나를 넘어서 있거나 혹은 뒤쳐져 있어 한 번도 나를 명중하지 못한다. 더구나 생각이란 것 자체가 언어로 이루어진 것이니 나의 생각이 온전한 나라고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잘 해봐야 왜곡된 그 무엇을 전달할 뿐인 언어라는 굴절판 없이 나와 네가 직관으로 통한다면 세상에는 오해나 거짓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언어 없는 세계는 없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신 철학자도 있단다. 인간이 시를 쓰는게 아니라 시로 쓰여진 것이 인간이라는 말도 들은 것 같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언어 없는 인간은 동물의 한 종에 불과할 뿐이라고들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말하고 또 말하고 진짜로 다 드러내놓고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도 우리는 도저히 정직하게 말할 수 없다. 언어가 우리를 대표하는(represent) 한 그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사랑의 불가해함은 바로 그것, 완전한 소통의 불가능함에 있다. “정작 당신이 그가 되면, 당신은 그를 사랑하기를 멈출 것이다.” 사랑은 그의 모든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 안에 있지만 그녀 보다 더한 어떤 X",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를 매혹하는 그 미지의 X에 기인한다고 한다. 이것을 증명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결혼한 남녀면 누구나 3개월에서 3년 사이에 체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 안에 있던 그 미지의 X가 결국 방구나 트림, 똥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녀는 더 이상 사랑의 대상이 아니다. 그 순간 그녀는 연인에서 진정한 가족으로 승화된다.

 

 

   그러므로 영혼을 바꾸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가 그녀가 된다고 해서, 그가 온전한 그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녀 자신이 스스로 온전한 그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녀 안에 있는 그녀 보다 더한 어떤 X’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가 영혼을 바꾸어 그녀가 된다고 해서, 그가 그녀 안의 X와 온전히 합일할 수 없다. 그 X는 오똑한 그녀의 콧날이나, 귀엽고도 슬픈 동그란 그녀의 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월세 30의 깨진 문짝과도 상관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혼이 바뀐 후에도 서로를 사랑할 수 있었다. “정작 당신이 그가 되면..”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당신은 그를 사랑하기를 멈출 것이다.”의 불길한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불가능성이 그 안의 X를 X로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다시 그러므로, 우리는 판도라를 그리워할 필요가 없다. 완벽한 교감, 직관적 지성이 궁극적 행복인 그 곳에는 미지의 X가 없기 때문이다. 영혼의 불투명성이 없는 곳에는 사랑도 없다. 나비족과 이크란은 교감할 수 있지만 사랑하지는 않는다. 나비족들 역시 언어를 사용하지 않느냐고? 그러나 그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곳은 홈트리를 통한 완벽한 상호교감이지 않은가     ... 다행히도 혹은 나비족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 때문에 필연적으로, .... 그 홈트리는 파괴될 수밖에 없었지만.  더 이상 판도라는 없다.  인간이 그들을 발견한 한 혹은 이미 말씀이 있은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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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1월 17일에 쓴 글입니다.

 

 

나는 내가 잉태되는 순간을 볼 수 있을까? 라는 물음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그리 낯설지 않은 설정이다.

  터미네이터, 백튜더 퓨처 같은 벌써 오래된 영화들이 그런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고 요즘은 우리나라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그런 형태를 가끔 볼 수 있다.

 

 

  작년에 나는 지인과 함께 방자전을 보았다. 대체로 야한 영화였음에도 팝콘이 떨어지자 지인은 잠에 빠져들었고, 나는 송새벽의 독특한 대사를 키득거리는 맛으로 그 시간을 버티고 있었다. 저렇게 비틀어대기만 하고 뭐가 어쨌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도통 종잡을 수 없이 끝나 갈 즈음, 나는 이 영화가 기원에 관한 영화라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되었다.

 

  ... 양반 자제 이몽룡이 기생 딸 성춘향을 오매불망 사랑하여 정실로 맞아들인다는 꿈같은 이야기를, 그 속에서는 뭐든지 다 이루어질 수 있다는 글자 그대로의 ‘이야기’- 허구가 아니라 엄연한 ‘현실’속의 non-fiction으로 만들기 위한 일종의 기원 설화 같은 것으로 말이다. 춘향전의 잉태를 지켜보는 방자전이라고나 할까. 방자는 자신의 사랑 혹은 삶에 의미meaning를 주기 위해, 이몽룡과 성춘향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춘향전을 만들어 낸다. 춘향전을 비틀어서 탄생한 것이 방자전이 아니라, 방자전이 낳은 것이 춘향전이다. 춘향전의 방자가 잉태되는 것을 지켜보는 방자전의 방자, 그것이 영화 방자전의 구조이다.

.... 라는 허무맹랑하지만 또 그럴 듯도 한 것 같은 생각을 한 것이다.

 

 

  드라마 선덕 여왕은 조금 더 분명하게 자신의 잉태를 지켜보는 눈으로서의 자신이라는 그림을 보여 주었다. 드라마의 마지막, 막 신라에 도착한 어린 덕만은 슬픈 눈을 한 어떤 여인과 마주치는데, 그 여인이 바로 선덕여왕이다. 어린 덕만이 거쳐야 할 무수한 고난의 길은 주어진 운명이 아니라, 바로 선덕 자신이 선택한 운명이라고 말하려는 듯이.

.....라는 생각도 했었다.

 

 

  어제 종방한 시크릿 가든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도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사회 지도층과 소외된 이웃의 불꽃같은 사랑도 아니고, 심지어는 애 셋을 주렁주렁 낳고도 서로 좋아 죽는 그런 이야기를 작가는 저렇게 묘하게 현실화시키는구나....라고. 그 마지막은 그냥 내용 그대로 주원이 라임에게 옛날 이야기를 해 준다고 봐도 되고, 이 모든 이야기가 하이틴 로맨스물에 푹 빠진 여고생 라임의 한바탕 꿈이었다는 암시로 봐도 되고, 그건 보고 싶은 사람들의 취향이라는 듯이 작가는 그렇게 선심을 쓰는 듯 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파리의 연인’에서 이미 뻥이요!를 써먹은 작가가 그걸 그대로 자기 표절하기는 아무래도 거시기할 것이고, 그렇다고 왕자님과 공주님은 행복하게 살았더래요 하기도 민망할 터인 참에 꽤나 훌륭한 샛길을 발견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기원에 집착하게 되는 걸까? 뭔가 우리를 설명해 줄 그럴듯한 서사가 없이는 삶이 너무 어리둥절하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우리는 어디선가 뚝 떨어졌다. 그렇게 어느 날 문득 이건 너야라는 선고를 받았다. 그렇지만 나는, 선고받은 대로 그저 살았을 뿐이야, 씨앗이 자라서 열매가 되듯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그런 것과는 뭔가 다른 것이 분명히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유전자가 나의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프로그래밍 된 로봇이 아니다. 어쩌면 로봇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로봇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우리는 ‘의식’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또 무의식이라는 것도. 설령 로봇의 것이라 해도 이 의식은 프로그램과 별개의 것이다. 매트릭스 식으로 하자면 일종의 버그처럼.

  그래서 우리는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나는 유전자나 프로그램과는 다른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 내가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뭔가 기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거기에는 항상 나의 자리가 있다. 내가 선택했다는 것, 나의 자유 의지였다는 것, 비록 그것이 운명처럼 보일지라도 언젠가, 내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그 어느 때에 나는 나의 탄생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나의 운명은 나의 책임이다.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 스스로 자신을 어찌할 수 없는 사람에게 삶은 그 자체로 부조리하다. 그러나 죽음을 선택하지 않는 한 자신의 삶은 자신의 책임이다. 왜 나는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는가.... 그 대답은 칸트와 셸링에게 거슬러 올라가자면, 그 삶은 실제로 내가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그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 맞고, 선택한 후에 그 선택의 행위 자체가 무의식으로 가라앉았을 뿐이다.

 

  아직 나는 접수하지 못한 주장이지만, 그렇다고 나의 삶이 과연 누구의 책임일 수 있을까, 나말고?

 

 

  ....... 드라마 시크릿 가든을 보면서 이런 연상을 줄줄이 했다. ‘내 삶의 자유로운 선택’ 은 나의 오랜 화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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