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22일 쓴 글입니다.
비가 오면 하지원과 현빈의 영혼이 몸을 바꿔치기하는 드라마 <시크릿 가든>은 “나는 네가 되고 싶어.”로 요약되는 연애하는 자들의 욕망을 결정(結晶)한 판타지다. 만약 그리만 된다면, 첫 목련의 개화나 혜성의 꼬리를 목격하며 “당신이 여기 함께 있다면!”(그 많은 카드에 새겨진 “Wish You were Here”)이라고 안타까워할 일 따위는 없어지겠지. 나는 때때로 어떤 대상을 아름답다고 판단내릴 때의 기분과 사랑의 감정을 또렷이 구분하는 데에 곤란을 겪는다. 이를테면 우리는 아름답다고 느끼는 상대를 사랑하는 것일까, 사랑에 빠진 대상한테서 미를 찾아내는 것일까. 아예 그 사람이 되어버리기를 바라는 사랑의 마음처럼 아름다움도 복제의 충동을 부른다. 예쁜 소녀를 보면 연필을 들어 그리고 싶고, 카메라로 찍어두고, 글로 옮겨놓고 싶어진다. 비트겐슈타인은 “눈이 아름다운 것을 보면 손은 그걸 그리고 싶어 한다”고 했다. 시각은 그처럼 촉각으로 전이된다. 현빈과 하지원은 시선으로 더듬던 상대의 피부 안에서 사는 일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닮은 아이를 갖는 일은, 아름다움을 복제하고자 하는 우리의 본능이 이르는 극점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진실은 다음과 가깝다. 정작 당신이 그가 되면, 당신은 그를 사랑하기를 멈출 것이다. 레나타 살레클이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에 쓴 대로, 사랑은 제약 속에 있다. “의례 때문에 억제된 사랑을 찾으려는 건 쓸모없는 일이다. 사랑의 일체는 그 의례들 속에 있다.” 그가 지금 여기 없기에, 있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씨네21 김혜리 기자의 글이다.
“정작 당신이 그가 되면, 당신은 그를 사랑하기를 멈출 것이다.” 를 읽으며 나는 불현듯 영화 <아바타>를 떠올렸다. 그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나비족과 그들이 타고 다니는 이크란이 서로를 교감하는 방식이다. 나비족의 긴 머리채와 이크란의 꼬리(같은 것)를 서로 잇대면 그들은 언어를 통하지 않고도 서로를 직관할 수 있다.
언어가 없이도 서로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일까. 언어는 우리를 충분하게 대변해 주지 못한다. 내 생각을 전달해야 하는 언어는 늘 나를 넘어서 있거나 혹은 뒤쳐져 있어 한 번도 나를 명중하지 못한다. 더구나 생각이란 것 자체가 언어로 이루어진 것이니 나의 생각이 온전한 나라고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잘 해봐야 왜곡된 그 무엇을 전달할 뿐인 언어라는 굴절판 없이 나와 네가 직관으로 통한다면 세상에는 오해나 거짓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언어 없는 세계는 없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신 철학자도 있단다. 인간이 시를 쓰는게 아니라 시로 쓰여진 것이 인간이라는 말도 들은 것 같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언어 없는 인간은 동물의 한 종에 불과할 뿐이라고들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말하고 또 말하고 진짜로 다 드러내놓고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도 우리는 도저히 정직하게 말할 수 없다. 언어가 우리를 대표하는(represent) 한 그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사랑의 불가해함은 바로 그것, 완전한 소통의 불가능함에 있다. “정작 당신이 그가 되면, 당신은 그를 사랑하기를 멈출 것이다.” 사랑은 그의 모든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 안에 있지만 그녀 보다 더한 어떤 X",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를 매혹하는 그 미지의 X에 기인한다고 한다. 이것을 증명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결혼한 남녀면 누구나 3개월에서 3년 사이에 체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 안에 있던 그 미지의 X가 결국 방구나 트림, 똥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녀는 더 이상 사랑의 대상이 아니다. 그 순간 그녀는 연인에서 진정한 가족으로 승화된다.
그러므로 영혼을 바꾸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가 그녀가 된다고 해서, 그가 온전한 그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녀 자신이 스스로 온전한 그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녀 안에 있는 그녀 보다 더한 어떤 X’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가 영혼을 바꾸어 그녀가 된다고 해서, 그가 그녀 안의 X와 온전히 합일할 수 없다. 그 X는 오똑한 그녀의 콧날이나, 귀엽고도 슬픈 동그란 그녀의 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월세 30의 깨진 문짝과도 상관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혼이 바뀐 후에도 서로를 사랑할 수 있었다. “정작 당신이 그가 되면..”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당신은 그를 사랑하기를 멈출 것이다.”의 불길한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불가능성이 그 안의 X를 X로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다시 그러므로, 우리는 판도라를 그리워할 필요가 없다. 완벽한 교감, 직관적 지성이 궁극적 행복인 그 곳에는 미지의 X가 없기 때문이다. 영혼의 불투명성이 없는 곳에는 사랑도 없다. 나비족과 이크란은 교감할 수 있지만 사랑하지는 않는다. 나비족들 역시 언어를 사용하지 않느냐고? 그러나 그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곳은 홈트리를 통한 완벽한 상호교감이지 않은가 ... 다행히도 혹은 나비족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 때문에 필연적으로, .... 그 홈트리는 파괴될 수밖에 없었지만. 더 이상 판도라는 없다. 인간이 그들을 발견한 한 혹은 이미 말씀이 있은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