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년 1월 17일에 쓴 글입니다.
나는 내가 잉태되는 순간을 볼 수 있을까? 라는 물음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그리 낯설지 않은 설정이다.
터미네이터, 백튜더 퓨처 같은 벌써 오래된 영화들이 그런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고 요즘은 우리나라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그런 형태를 가끔 볼 수 있다.
작년에 나는 지인과 함께 방자전을 보았다. 대체로 야한 영화였음에도 팝콘이 떨어지자 지인은 잠에 빠져들었고, 나는 송새벽의 독특한 대사를 키득거리는 맛으로 그 시간을 버티고 있었다. 저렇게 비틀어대기만 하고 뭐가 어쨌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도통 종잡을 수 없이 끝나 갈 즈음, 나는 이 영화가 기원에 관한 영화라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되었다.
... 양반 자제 이몽룡이 기생 딸 성춘향을 오매불망 사랑하여 정실로 맞아들인다는 꿈같은 이야기를, 그 속에서는 뭐든지 다 이루어질 수 있다는 글자 그대로의 ‘이야기’- 허구가 아니라 엄연한 ‘현실’속의 non-fiction으로 만들기 위한 일종의 기원 설화 같은 것으로 말이다. 춘향전의 잉태를 지켜보는 방자전이라고나 할까. 방자는 자신의 사랑 혹은 삶에 의미meaning를 주기 위해, 이몽룡과 성춘향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춘향전을 만들어 낸다. 춘향전을 비틀어서 탄생한 것이 방자전이 아니라, 방자전이 낳은 것이 춘향전이다. 춘향전의 방자가 잉태되는 것을 지켜보는 방자전의 방자, 그것이 영화 방자전의 구조이다.
.... 라는 허무맹랑하지만 또 그럴 듯도 한 것 같은 생각을 한 것이다.
드라마 선덕 여왕은 조금 더 분명하게 자신의 잉태를 지켜보는 눈으로서의 자신이라는 그림을 보여 주었다. 드라마의 마지막, 막 신라에 도착한 어린 덕만은 슬픈 눈을 한 어떤 여인과 마주치는데, 그 여인이 바로 선덕여왕이다. 어린 덕만이 거쳐야 할 무수한 고난의 길은 주어진 운명이 아니라, 바로 선덕 자신이 선택한 운명이라고 말하려는 듯이.
.....라는 생각도 했었다.
어제 종방한 시크릿 가든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도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사회 지도층과 소외된 이웃의 불꽃같은 사랑도 아니고, 심지어는 애 셋을 주렁주렁 낳고도 서로 좋아 죽는 그런 이야기를 작가는 저렇게 묘하게 현실화시키는구나....라고. 그 마지막은 그냥 내용 그대로 주원이 라임에게 옛날 이야기를 해 준다고 봐도 되고, 이 모든 이야기가 하이틴 로맨스물에 푹 빠진 여고생 라임의 한바탕 꿈이었다는 암시로 봐도 되고, 그건 보고 싶은 사람들의 취향이라는 듯이 작가는 그렇게 선심을 쓰는 듯 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파리의 연인’에서 이미 뻥이요!를 써먹은 작가가 그걸 그대로 자기 표절하기는 아무래도 거시기할 것이고, 그렇다고 왕자님과 공주님은 행복하게 살았더래요 하기도 민망할 터인 참에 꽤나 훌륭한 샛길을 발견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기원에 집착하게 되는 걸까? 뭔가 우리를 설명해 줄 그럴듯한 서사가 없이는 삶이 너무 어리둥절하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우리는 어디선가 뚝 떨어졌다. 그렇게 어느 날 문득 이건 너야라는 선고를 받았다. 그렇지만 나는, 선고받은 대로 그저 살았을 뿐이야, 씨앗이 자라서 열매가 되듯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그런 것과는 뭔가 다른 것이 분명히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유전자가 나의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프로그래밍 된 로봇이 아니다. 어쩌면 로봇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로봇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우리는 ‘의식’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또 무의식이라는 것도. 설령 로봇의 것이라 해도 이 의식은 프로그램과 별개의 것이다. 매트릭스 식으로 하자면 일종의 버그처럼.
그래서 우리는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나는 유전자나 프로그램과는 다른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 내가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뭔가 기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거기에는 항상 나의 자리가 있다. 내가 선택했다는 것, 나의 자유 의지였다는 것, 비록 그것이 운명처럼 보일지라도 언젠가, 내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그 어느 때에 나는 나의 탄생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나의 운명은 나의 책임이다.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 스스로 자신을 어찌할 수 없는 사람에게 삶은 그 자체로 부조리하다. 그러나 죽음을 선택하지 않는 한 자신의 삶은 자신의 책임이다. 왜 나는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는가.... 그 대답은 칸트와 셸링에게 거슬러 올라가자면, 그 삶은 실제로 내가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그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 맞고, 선택한 후에 그 선택의 행위 자체가 무의식으로 가라앉았을 뿐이다.
아직 나는 접수하지 못한 주장이지만, 그렇다고 나의 삶이 과연 누구의 책임일 수 있을까, 나말고?
....... 드라마 시크릿 가든을 보면서 이런 연상을 줄줄이 했다. ‘내 삶의 자유로운 선택’ 은 나의 오랜 화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