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현대사 - 하나의 땅, 두 민족 커리큘럼 현대사 5
일란 파페 지음, 유강은 옮김 / 후마니타스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팔레스타인 현대사』를 쓴 일란 파페는 이스라엘인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지금도 극한 대립을 벌이고 있는 비극의 땅, ‘팔레스타인’ 에 관해 이스라엘인이 쓴 역사를 믿어도 될까? 일란 파페는 이 땅에 살면서 초연하고 중립적인 역사를 쓰기는 불가능하다고 고백한다. 사실과 ‘진실’을 고수하라는 동료들의 조언은 오히려 헛될 뿐이라며, 저자는 과감히 ‘편견’을 선택한다. “이 책은 식민자가 아니라 피식민자에 대해 공감하는 사람, 점령자가 아니라 피점령자에 동조하는 사람, 사장이 아니라 노동자 편에 서는 사람이 쓴 것이다.” 불가능한 진실 대신 이른바 몫 없는 자part of no part의 관점을 채택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에는 자연스런 균형이 있다. 팔레스타인인의 편에 서겠다는 저자의 단호한 의식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유대인이라는 어쩔 수 없는 민족적 무의식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어쨌든 팔레스타인인을 미화하지도, 유대인을 단순한 악마로 그리지도 않는 미덕이 있다.

 

제목의 ‘팔레스타인’은 팔레스타인 국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1948년에 국가를 선포하고 즉각적으로 영국, 소련의 인정을 받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팔레스타인은 겨우 이 년 전인 2012년 11월에 UN으로 부터 non-member observer state의 자격을 승인받았다. 회원국도 아니고 참관국(?)에 불과하지만, ‘state', 국가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팔레스타인’은 무엇인가? 물론 땅이름이다. 그런데 현재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자기들이 사는 땅을 팔레스타인으로, 그리고 스스로를 팔레스타인 민족과 팔레스타인인으로 여기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팔레스타인은 (근)현대사modern 외에는 역사가 없다고 할 수 있다. 팔레스타인의 정체성은 20세기 초 서구 제국주의와 시온주의의 침략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과 이스라엘이 없었다면 아마도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도 없었을 것이다.

 

「팔레스타인에 산다는 것은 이제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응집력 있는 지정학적 단위에 속하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이런 식민주의의 노력의 결과로 이제 팔레스타인에는 민족과 종교가 조화를 이루는 구조가 어느 정도 자리 잡게 되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하나의 뚜렷한 실체가 아니었던 팔레스타인에게 이런 변화는 과거와의 결정적인 단절을 이루었다 1918년에 이르면 팔레스타인은 오스만제국 시기에 비해 한층 더 행정적으로 통일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세 지역이 하나의 행정 체제로 융합되었기 때문이다. 1923년에 팔레스타인의 지위에 관한 국제사회의 최종적인 승인을 기다리는 동안, 영국 정부는 최종적인 국경선을 교섭하면서 민족운동이 쟁취하기 위해 싸우게 될 뚜렷한 공간을 만들어냈고,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분명한 소속감을 불어넣었다. p134」

 

근현대 이전의 팔레스타인 지역은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 이전에는 셀주크 투르크가, 더 이전 그러니까 7세기 무렵부터는 아랍인들의 왕조에 속해 있었다. 팔레스타인인의 대다수가 아랍-무슬림인 이유가 이 때문이다. 투르크 족들도 제국을 이룬 후 무슬림으로 개종했기 때문에, 약 1400년 동안 이 땅은 아랍-무슬림들의 터전이었다. (조금 자세한 내용과 지도는 여기 ^^)

 

‘팔레스타인 문제’라고 할 때 연상되는 것들은 가자지구, 서안지구, 인티파다, PLO, 하마스, 지하드, 정착촌, 점령지, 시온주의 등등이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명쾌하게 아는 것도 없고, 더욱이 어떤 맥락 속에 놓여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복잡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현대사』를 읽다보면 이런 어지러운 개념들이 오롯이 제 자리를 잡으며,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 속에 그 비극적 의미를 드러낸다. 모든 역사는 이야기다. 특히 『팔레스타인 현대사』는 잔인하고 슬픈 이야기다. 우리에겐 더욱 그렇다. 일제 강점기와 미 군정기의 압제와 학살을 겪고도, 동족간의 전쟁으로 땅도 민족도 마음도 나뉘어 원수처럼 대립하고 있는 우리에게 이 이야기는 너무도 익숙하고 그래서 더욱 서러운 이야기다. 말하자면 500쪽이 넘는 이 역사책이, 그것도 팔레스타인이라는 머나먼 땅의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고 그리고 뜻밖에 흡인력이 있다는 말이다.

 

 

19세기 팔레스타인은 여전히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다. 그러나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노리며 선교사, 의사, 교육자들을 앞세운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 땅에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초기 시온주의자들은 선교사들과 거의 같은 무렵에 이 땅에 도착했다. 팔레스타인은 제국주의와 더불어 시온주의라는 두 마리의 늑대를 맞닥뜨린 것이다. 그리고 시온주의는 100년 가까이 이 땅을 피로 물들이고 있다.

 

「시온주의는 유럽의 현상이었고 따라서 다른 서구인들과 마찬가지로 현지인을 등한시했다. 또한 시온주의는 오스만의 지배자들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취하면서 그 대신 유럽 식민 강대국들의 선의에 의지했다. 다른 식민자들과 마찬가지로, 시온주의자들도 유럽에서 박해받는 유대인들을 위한 안식처를 만들기 위해 영토를 개척했다. 시온주의는 원래 유럽의 민족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지도자들이 민족 부흥의 전망을 팔레스타인 땅에서 실현하기로 결정하는 순간 식민주의 운동으로 바뀌었다. p67」

 

한마디로 시온주의는 식민주의이고, 남아메리카에서 스페인 개척자들이 그랬듯 팔레스타인에서 원시적인 아랍인들을 내쫒고 문명화된 유대인의 나라를 건설하려 했다. 유럽에서 박해받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서 그 역할을 뒤집어 박해자가 되었던 것이다. 초기 시온주의 운동에는 그 유명한 로스차일드도 잠깐 등장한다. 막대한 자금력과 서구 열강에 대한 로비력을 발휘하는데, 이후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시온주의에서 손을 떼었다.

 

1차 세계 대전은 팔레스타인 비극의 본격적인 신호탄이 되었다. 전쟁의 결과 오스만 제국은 폭삭 망하고,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 통치 아래 놓였다. 1917년에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영국은 1948년까지 주둔하는데, 이 때 시온주의에 넘어간 영국이 팔레스타인의 운명을 결정짓고 말았다. 1917년 11월 2일, 벨푸어 경은 영국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고국을 세우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벨푸어 선언으로 이스라엘 건국의 토대가 놓인 것이다. 이 시기 팔레스타인에는 무슬림 65만 명, 기독교도 8만 명, 유대인 6만 명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대부분을 유대인이 차지하고 있다.

 

물론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도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지도부와 시온주의 지도부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거의 씨족중심의 생활을 하던 팔레스타인은 명사 가문들이 지도부를 형성했지만, 파벌간의 분열과 대립으로 무기력했다. 시온주의자들은 법률·교육·정치 구조를 확립하고 실질적인 국가기구를 운영했다. 또한 그들은 팔레스타인의 땅을 사들이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아랍인 부재지주들은 많은 돈을 받고 땅을 매각했으며, 그 결과 팔레스타인인 소작인들은 땅을 잃고 쫓겨났다. 농촌은 더욱 빈곤해졌다. 반란이 일어났고, 영국은 벨푸어 선언을 철회한다고 약속했지만, 영국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영국은 2차 세계 대전의 끝 무렵 여러 식민지의 독립운동과 미국의 경제적 압박 등에 시달리다, 1947년 2월 팔레스타인 문제를 UN에 위임했다. 이 무렵 아랍연맹은 팔레스타인에 아랍 독립 국가 수립을 약속했고, 유대인 지도부는 미국에 팔레스타인 전체를 유대 국가로 내놓기를 요구했다. 최후의 결전이 다가오고 있었다.

 

1947년 8월 UN은 팔레스타인의 운명을 갈랐다. UN이 내놓은 ‘팔레스타인 분할안’은 1400년 가까이 이 땅에 살아온 아랍인들로서는 결단코 수용할 수 없는 폭거로, 분노가 폭발했다. 위키 백과를 빌어 분할안의 내용에 대해 잠시 살펴보겠다.

 

「 당시 인구비에서 아랍 인의 3분의 1, 전체 면적의 7퍼센트만을 소유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 전역의 56퍼센트를 분할한다는 게 이 분할안의 골자였다. 특히 지역 생계 기반인 올리브 농장과 곡창 지대의 80퍼센트, 아랍 인 공장의 40퍼센트가 유대인에게 배정되었다. 이로써 경작 가능한 대부분의 비옥한 땅이 유대인 차지가 된 것이다[1]. 팔레스타인 내(內) 아랍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중동의 반미주의도 이때부터 싹트게 되었다. 아랍인들은 이 분할안 채택이 미국의 주도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분할안은 미국과 소련 주도로 강행 통과되었으며, 영국은 기권하였다. <위키백과> 」

 

    

 

 

  

 

UN 결의안이 채택된 뒤 12일 만에 유대 땅으로 예정된 곳에서 팔레스타인인의 추방이 시작되었다. 팔레스타인의 원주민 상당수가 나라를 떠났고, 팔레스타인의 엘리트들은 외국으로 탈출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가 선포되었다. 다음날 미국은 곧바로 이스라엘을 승인하는 내용을 발표했고, 이틀 뒤 소련은 이스라엘을 법적으로 승인했다. 영국은 이스라엘 국가 선포 한 시간 전에 마지막 고등판무관이 팔레스타인을 떠났다. 이제 팔레스타인 땅에는 서구 열강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과 아랍국을 배후에 둔 팔레스타인인 사이에 어떤 완충제도 존재하지 않았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1948년 5월에서 1949년 1월까지 계속되었다. 이집트, 시리아, 레바논 군대들이 아랍군단을 이루었지만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과 동시에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인종청소가 시작되었다. 유대 국가로 지정된 곳 중의 팔레스타인 마을 370개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유대인들은 마을을 파괴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을 학살 또는 추방했으며 팔레스타인인의 재산을 몰수했다. 영국의 위임통치 시절에도 땅을 잃고 쫓겨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있었지만, 이제 바야흐로 대규모의 난민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난민들은 대부분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로 쫓겨났고,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등의 인접국가로도 갔다. 곳곳에 거대한 난민촌이 형성되었다. 난민들은 미국 복지 단체와 국제 구호 기구에 의지하여 살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 난민공동체는 뜻하지 않게도 “과거의 어떤 이데올로기나 정치도 도달하지 못한 수준으로 정치화되었다.” 사실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대대로 살아왔던 땅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나 거지 신세가 된 사람들이 그들을 그렇게 내몬 ‘정치’ 에 대해 무관심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가끔 들어본 무슬림 형제단이 조직된 곳도 가자 지구에서다. 무슬림 형제단은 훗날 그 유명한 하마스, 지하드 같은 조직을 낳는다. 1950년대 말 팔레스타인 민족 운동은 팔레스타인 단독 국가 창설과 난민 귀환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싸워나갔다. 1993년 오슬로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으로서는 두 눈뜨고 빼앗긴 땅인데, 이스라엘을 인정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무리 ‘눈앞의 현실’ 이 그렇다 해도.

 

1967년 팔레스타인은 더 큰 비극으로 빠져든다. 1967년 6월에 발생해 6일 만에 끝난 소위 ‘6일 전쟁’에서 팔레스타인 지역 모두가 이스라엘에 점령당했다. 요르단강 서안, 가자지구, 시나이 반도, 골란 고원이 모두 이스라엘의 수중에 떨어졌다. 한마디로 팔레스타인 지역 전체와 시나이 반도까지 이스라엘이 장악한 것이다. 이 지역을 이스라엘은 점령지로 지배했다. 요르단강 서안 59만 명, 가자지구 38만 명이 이스엘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동예루살렘은 새로운 유대인 주거지역이 되었다. 시나이 반도에서는 1977년이 되어서야 이스라엘 군대가 모두 철수하였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팔레스타인 문제들의 대부분은 이 6일 전쟁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근본 원인은 1947년의 분할안 이지만 말이다.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는 보호관리 지역으로 선포되었다. 그것은 이 지역 팔레스타인인의 인권과 시민권이 박탈되었음을 의미했다. 이스라엘은 점령지에 대한 제네바 협약을 무시하고, 가옥파괴, 추방, 가택수색, 통행금지, 검문, 재판 없는 구금을 실행하였으며, 이때부터 점령지에 대한 메시아 담론을 확산시켰다. 점령지역을 성스러운 땅으로 규정하고, 종교적인 근거에 따라 향후 이 지역에서의 철수를 금지했다. 유대 율법으로 팔레스타인 전역에 대한 이스라엘 지배를 정당화한 것이다. UN은 아랍국가들과의 평화 유지를 대가로 점령지에서 이스라엘의 철수를 결의했지만,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철수를 거부하였다.

 

    

 

 

  

 

이스라엘이 새로 점령한 지역에서 도망치거나 강제로 쫓겨난 사람들에 의해 난민 공동체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등록된 난민만 1972년에 150만 명, 1982년에 200만 명이었다. 난민들은 이스라엘과 인접 국가들의 최하층 프롤레타리아가 되거나 UN의 기금으로 생존했다. 난민들은 팔레스타인 사회의 땅 없는 프롤레타리아가 되었다. 난민들은 매일 출퇴근을 하면서 이스라엘 검문소에서 아침마다 학대와 괴롭힘을 당했고, 노예시장이라 불리는 곳에서 하루 일당의 노동자로 선택되기 위해 기다려야 했다. 사실 이스라엘 경제는 점령지에 의해 유지되었다.

 

「1987년에 이르면 이스라엘 경제는 이미 레이건이나 대처식 자유 시장 자본주의 체제로 바뀐 상태였다. 이런 경제는 점령 지역 출신의 값싸고 유순한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이는 지방자치 복지, 경제 등의 권한을 협조적인 지방의 시장들과 의회 수장들에게 위임하는 일종의 신식민주의적 관계를 통해 촉진되었다. 이런 구조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점령 지역이 제공해야만 하는 모든 것을 완전히 착취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경제는 여러 면에서 점령 지역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p360」

 

이런 상황에서 민중봉기와 테러리즘은 이상할 것이 없다. 1987년 12월 1차 인티파다가 일어났다. 봉기로 번역되는 인티파다는 ‘뒤흔들기’ 라는 뜻을 가졌다. 1947년 UN 분할 40년, 1967년 이스라엘 점령 20년 만에 대규모의 민중봉기가 발생한 것이다. 가자 난민촌에서 시작된 인티파다는 농촌마을로 불붙었고, 여성과 어린아이와 청소년이 가세했다. 난민촌과 유대지역 안의 팔레스타인인들이 협력했다. 그 결과 1993년 오슬로 협정이 체결되었다.

 

오슬로 협정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처음으로 서로의 존재를 인정했다. 이스라엘은 PLO를 협상의 상대로 인정하고, PLO는 팔레스타인 분할을 처음으로 공식 인정했다. ‘눈앞의 현실’은 턱없이 달랐지만 그때까지도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을 몰아내고 아랍민족의 단일 국가를 세운다는 이상을 품고 있었다. 1993년 9월 유대국가의 생존권 승인과 그 대가로 요르단 강 서안 지구, 가자 지구에 5년간의 잠정자치를 단계적으로 도입하는 '잠정해결'을 위한 오슬로 합의(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잠정설치에 관한 원칙선언)가 선언되었다. 오슬로 협정에 따라 1994년 5월부터 5년간에 걸친 잠정자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협정은 수시로 위반되었다.

 

「국경 폐쇄가 되풀이되고 가자 지구를 벗어나는 이동에 자의적인 제한이 가해지면서 오슬로 과정이 가자 지구를 팔레스타인 국기만 걸렸을 뿐 이스라엘 병사들이 지키는 거대한 감옥으로 바꿔 놓았다는 인식이 생겨나는 데는 1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슬람 저항 단체인 하마스와 이슬람지하드가 협정에 반대하는 캠페인의 일환으로 폭탄 공격을 가하자 이스라엘은 국경 폐쇄를 재개했다. p379」

 

「1996년 경 정치 지도자들이오슬로 과정에 관해 만들어낸 이미지의 자리에 현실이 들어섰다. 그 뒤에는 이제 오슬로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으로 찢긴 땅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는지 여부가 아니라 근시안적인 정치인들이 팔아먹은 환상을 위해 사람들이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가 문제가 되었다. p380」

 

2000년 10월 2차 인티파다가 발발했다.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해 미국은 항상 이스라엘의 관점을 받아들였다. 이스라엘의 관점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분쟁은 1967년 요르단 강 서안과 가자 지구를 점령하면서 시작되었고, 따라서 평화란 이 두 지역에서 철수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문제의 시작은 시온주의와 1947년의 UN 분할안이었다. 미국과 오슬로 과정은 팔레스타인에게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는 요르단 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 대한 제한된 주권일 뿐임을 설득했다. 그것은 UN이 인정한 권리인 1948년 이스라엘에 의해 추방당한 난민들의 귀환권을 포기하라는 주문이었다. 2000년 여름 클린턴은 팔레스타인 지도부에 이를 승인할 것을 요구했고, 팔레스타인은 거부했다.

 

이스라엘은 국경폐쇄, 검문소에서의 학대, 가옥 파괴, 군사·정치 활동가 암살, 대규모 체포, 요르단 강 서안 지역을 이스라엘 영토와 분리하는 장벽 건설 개시 등을 계속해 나갔다. 분리 장벽은 1990년대 중반에 이미 가자 지구에 먼저 건설되었다. 가자 지구는 전기 담장과 감시탑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포로수용소가 되었다. 최고 8m 높이의 요르단강 서안의 장벽은 지금도 건설 중이다. 올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분리 장벽 앞에서 평화의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국가는 여전히 두 개의 거대한 포로수용소이다.

   

 

 

 

 

2차 인티파다 중에 자살 테러가 세계의 관심을 끌었다. 자살 테러는 알려진 것과는 달리 종교와는 무관하다. 이슬람법은 자살을 비난하며, 팔레스타인의 이슬람주의자들이 속한 수니파 이슬람은 지하드보다는 관용과 평화를 장려한다. 종교는 법으로든 경전에 근거해서든 자살 행위를 전혀 지지하지 않는다. 자살 폭탄 테러는 정치적 이슬람 그룹이 투쟁에서의 독창성과 헌신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선택한 전술의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2차 인티파다 무렵 자살 폭탄 공격이 무력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방식이 되었다. 이스라엘의 전투기와 탱크에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살 폭탄으로 대응했다.

 

「실업률이 50퍼센트에 육박하고, 요르단 강 서안 도시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봉쇄가 계속되고, 전기 장벽이 가자 지구를 에워싸고, 정치적 해결책에 대한 희망이 전혀 없는 가운데, 이제 설교자나 ‘진리의 전달자’는 필요가 없고 폭발물과 수류탄의 끊임없는 공급만이 필요했다. p436」

 

희망이 전혀 없는 ‘포로수용소’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자살 테러를 선택했다고 해서, 우리가 쉽게 비난할 수 있을까? 이 책은 2004년에 씌어졌고, 당시에도 별다른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딱 10년이 지난 지금도 하마스와 팔레스타인은 서로 로켓을 주고받고 있다. 물론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것은 팔레스타인 쪽이다. 지난 달 이스라엘은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토지를 강제 수용하고 초대형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30년 만에 최대 규모의 강제 수용이 될 것이란다. 미국마저도 철회를 촉구했지만, 팔레스타인의 운명은 갈수록 위태롭다.

 

 

『팔레스타인 현대사』를 읽으며 든 생각은 팔레스타인 문제는 해법이 없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해결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속내는 팔레스타인 전체를 이스라엘 영토로 삼는 것일 테니 어떤 중재도 내심 귀찮게 여길 것이다. 미국은 중동의 아랍 국가들을 견제하기 위해 강력한 이스라엘이 필요하다. 아랍 국가들은 각기 자국의 이해타산에 따라 친미적 혹은 반미적 성격을 띤다. 그들에게 팔레스타인 문제는 자국의 이해를 실현할 기회가 될 때만 의미가 있다. 초기 팔레스타인 지도부는 명사 가문들로서 팔레스타인 전체 보다는 가문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다. 하마스와 지하드 등의 무장 단체는 어쩌면 팔레스타인 민중의 적대를 먹고 산다. 남한과 북한이 서로의 적대 위에 정권을 유지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극우주의자도 팔레스타인의 근본주의자도 서로의 적대에 뿌리박고 있다. 적대가 사라지면 존재도 사라질 것이다. 절박한 것은 오직 고통 속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민중뿐이다. 그 누구도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을 것이다. 인권에 호소하는 것은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을지라도, 결코 실질적인 해법은 되지 않을 것이다. 국제 관계는 희랍의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대의 그것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눈앞의 현실 즉 힘의 관계에 의해 결정될 뿐이다. 운 좋게 국제 역학관계가 뒤집어 지지 않는 한, 남아 있는 방법은 오직 힘을 기르는 방법뿐일 것 같다. 두 차례에 걸친 인티파다는 민중봉기의 힘을 보여 주었다. 비록 또다시 꺾인다 해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저항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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