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콘 - 진중권의 철학 매뉴얼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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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17일에 카페 과제로 쓴 글입니다. 진중권의 <아이콘>에서 지젝의 <시차적 관점>에 관한 글을 비판한 내용입니다.

 

 

내게 『시차적 관점』은 특별한 책이다. 세미나라는 새로운 공간을 열게 된 첫 책이기 때문이다. 뭔가 거창한 것 같지만, 사실 우리 세미나는 ‘죽치고 수다 떨기’가 진화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 몇 년 동안 함께 수다를 떨어온 지인들이 있고, 다들 책을 좋아하고, 나만 빼고 업이 모두 공부고, 그것도 인문·사회 쪽이고, 그러다 보니 이왕 하는 수다, 좀 체계적으로 해보자고 시작한 것이 내가 3년째 해오는 세미나라고 할 수 있다. 세미나라는 말에 떨리기는 했지만, 이왕 아는 얼굴들이고, 그것도 반은 반말, 오다가다 존댓말, 나머지는 그냥 어미도 없이 몇 시간씩 수다 삼매에 빠지는 사이라, 창피해봤자 뭐 어떠냐는 배짱으로 시작했다. 나름 업자들 사이에 실력도 족보도 가방끈도 없이 끼어드는 것이 부담이자 민폐였지만, 설레기도 했다. 마침 그때 나는 막 백수 생활을 시작했고, 남아도는 시간과 엉뚱한 의욕으로 퇴사이후 놓았던 공부를 다시 했다. 사실 대학교 때 공부에 별 흥미도 관심도 없었던 터라, 공부도 안 했고 아는 것도 별로 없이 겨우 졸업만 했는데, 회사에 턱 들어가고 보니, 공부를 안 하려야 안할 수가 없어서, 학교 때도 안하던 전공 공부를 진짜 열심히 했다. 이런 이야기하면 요즘 청년들에게는 참 미안한데, 그 때는 그렇게 하고도 어렵지 않게 취직해서 먹고 살았다. 여하튼 그렇게 한 10년 공부하고, 손 놓은 지 또 한 10년이 다 되서, 새까맣게 밑줄도 긋고, 여백에 메모도 해가며 생판 새로운 공부를 하게 됐다.

  보태는 것 없이 배우기만 할 처지고, 시간도 많고 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발제라는 것을 맡게 됐다. 물론 그게 뭔지도 모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냥 요약을 하든지, 중요한 부분 발췌를 하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해서, 무작정 덤벼들어 발제라고 나름 십여장을 만들었다. 사실은 내심 좀 놀래주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세미나 첫 날, 내가 돌린 발제를 받아들고 다들 놀라던 모습이 생각난다. 예상대로(?) 다들 놀랐다. 내가 했던 발제문은 화려했다. 직장 생활 10년 동안 갈고 닦은 파워포인트 솜씨를 십분 발휘해, 컬러풀한 도표들을 가득 그려놓은 것이다. 사업 기획안이나 제품 교육 자료를 떠올리며 정성을 쏟았다. 피땀이 흐르지는 않았지만, 좀 과장하면 그렇게 뻥쳐도 쇠고랑차지는 않을 정도였다. 안 그래도 부실한 허리가 끊어질 듯해도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붙어 앉아 있었다.

  『시차적 관점』은 어려운 책이다. 한 문장을 놓고 각자의 해석이 분분했던 세미나를 떠올려 봐도 그렇다. 이 책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현대 철학이 처한 교착 상태를 돌파하려는 지젝의 도전! 지금까지의 지젝은 잊어라! 지젝 스스로 ‘대작’이라 칭한 문제의 책~ ” 문제의 책, 맞다. 지젝이 주장하는 이론도 문제적이고, 그 이론을 이해하는 것도 어려운 문제고, 문제 많은 번역도 참기 힘든 문제고. 그런데도 나는 참 용감했다. 시퍼런 칼 날 같이 위험한 지젝의 사유를 서너 단어로 탁탁 잘라 네모 혹은 타원의 도형 안에 얌전히 가두고는 화살표를 착착 그려 넣어, A와 B를 합하면 C가 나온다는 식의 도식으로 만들었다. 나는 요즘 유행하는 뇌구조 그림처럼, 지젝에게 칸트는 뭔가 미흡하고, 헤겔은 훌륭하고, 라캉은 진리고, 그러니까 칸트가 어쩌고저쩌고하는 문장이 나오면 일단 색안경을 끼고 볼 것, 헤겔 운운하면 무조건 수용!, 뭐 이런 식으로 나의 머리를 포맷했다. 사실 그건 내가 해석할 수 없는 문장들을 어떻게 해서든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자 꼼수였다. 그렇게라도 딱딱 갈라놓지 않으면, 도저히 무슨 내용인지 윤곽조차 그리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그건 내 오래된 습관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습득했던 몸에 밴 방법이라, 지금도 나는 그렇게 사고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지,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된다는 논리는 그렇게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여하튼 결과를 말하자면, 그렇게 나는 첫 세미나에서 ‘새 됐다.’ “제 과제에서 도식 나오면 전 점수 안줘요 ㅋㅋ" 하던 지인을 민망하게 보면서, 그래도 나는, 일목요연한게 얼마나 좋은데 흥, 속으로 그랬다. 도식은 사유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고 했다. 이미 확정되어 버린, 이미 굳어 버린 사고 속에서 철학적 사유는 더 이상 살아 움직일 수 없다고 했던 것 같다.

 

 

  씨네21에서 진중권의 글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정말 반가웠다. 바로 그 『시차적 관점』을 진중권도 읽고, 글까지 썼다는 사실이 참 기뻤다. 멋진 삼촌 옆에서 괜히 우쭐한 느낌?

  푸른바다님의 막쪽글 과제인, 진중권의 『아이콘』은 2010년 4월부터 1년간 씨네21에 동명의 제목으로 연재했던 칼럼을 묶어 만든 책이다. 이 칼럼은 지금도 연재되고 있다. 주로 서양의 철학적 사유를 우리나라의 시사적 문제와 엮어서 쓴 글인데, 철학의 세계로 이끄는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다. 책 소개를 보면, ‘아이콘을 누르면 복잡한 명렁어 없이 컴퓨터를 간단하게 사용할 수 있듯, ‘개념어’를 누르면 철학 지식을 완벽하게 갖추지 않아도 철학적 수준의 깊은 사유가 가능하다‘ 는 것인데, 읽는 사람들의 판단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중적 칼럼으로는 훌륭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진중권의 『아이콘』에는 지젝의 『시차적 관점』에서 따온 ‘개념어’를 다루고 있는 칼럼이 몇 편 있다. 그런데 그 글들을 읽고 나는 왠지 서운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남이 그만큼 좋아해 주지 않을 때 느끼는, 그런 감정..., 여하튼 그랬다. 사실 진중권이 지젝을 좋아할 리는 없을 것이다. 진중권은 사민주의자로 알려진데 반해(직접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인터넷에서 그렇게 불린다.), 지젝은 사민주의자를 오히려 혁명의 장애물로 여기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것이 문제라는 것은 아니다. 내가 ‘서운’ 운운한 것은 사실, 내가 진중권에게 『시차적 관점』을 꼼꼼히 읽지 않았다는 혐의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사적으로 아는 누군가일 뿐이다) 한국의 벤야민이라고 할 정도의 진중권을 두고, 천재적이라고 할 수 있는 진중권을 두고, 그런 의심 자체가 내 자신에게도 깜짝 놀랄 일이지만, 솔직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특히 ‘촛불은 왼쪽에서도 오른쪽에서도 깜박인다.’는 칼럼은 정말 그랬다. 그래서 나는 이 막쪽글을 꼭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상황이 조금 꼬였다. 진중권의 『아이콘』과 진중권이 언급하고 있는『시차적 관점』의 관련 부분을 다시 읽어 보고 썼어야 할 글을 지난 번 『아담의 오류』감상문을 쓰면서 뜻하지 않게 주절거리고 말았던 것이다. 사실 세미나를 할 때도, ‘바틀비’가 우리나라 상황에 적절한 가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다. 유럽은 복지국가와 사민주의를 여러 가지 형태로 시험해 보았거나 실행중인 사회인데 비해 우리나라는 복지라고 할 만한 것도 없는데, 어쩌면 너무 일찍 온 ‘바틀비’는 대단히 생뚱맞게 보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제대로 끝도 맺지 못한 그 글은 진중권에 대한 성급하고도 잘못된 비판이다. ‘바틀비’는 거칠게 이해하고, 개략적으로 다룰 경우 영락없이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대단히 예민한 주제이다. 인디아나 존스에나 나오는 아득한 협곡 위,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나무다리를 건너는 것과 같다. 떨어져 죽기 십상이다. 더우기 나는 인디아나 존스도 아니고, 존스를 쫒아가다 발을 헛디뎌 떨어져 죽는 나쁜 편의 졸개 정도 급임에랴 말할 필요도 없다. 그 다리 위에는 애초에 발을 디밀지 말아야 했다. 디밀었어도 얼른 돌아 나와야 한다. 내가 지젝의 철학을 자유롭게 다루게 되는 때가 온다면, 그 때 다시 ‘바틀비’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다. 그래서 오늘은, ‘촛불은 왼쪽에서도 오른쪽에서도 깜박인다.’에 대해서만 글을 쓰려고 한다. 죄송하다. 이제 시작이다.

 

 

 

  사람마다 관점이 다르다는 것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 분야에서라면 우리는 이미 오래된 지혜를 가지고 있다. “네 말이 옳다, 그리고 네 말도 옳구나, 허허허” 그 자애로운 웃음으로 황희 정승이 무엇을 목적하고 무엇을 이루었건, 그는 그렇게 조선 최고의 영의정으로 각인되어 있다. ‘중용’이라는 말도 있다. 서적『 중용』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중용’이라면 사전적 의미대로 잘 사용하고 있다. “과하거나 부족함이 없이 떳떳하며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상태나 정도”

  그러면 지젝의 ‘시차적 관점’ 이 이런 교훈을 목적으로 하는 걸까? 전혀 그렇지 않다. 시차적 관점이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것의 정반대, 중용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덧붙일 필요도 없겠지만, 내가 이해한 바에 의하면 그렇다. 진중권 역시 이 점을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기가 가진 입장에 따라 세계는 달라 보이게 마련이다. 물론 저마다 자기의 가치는 ‘해일’만큼 중요하며, 거기에 비하면 다른 문제들은 ‘조개’만큼 하찮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모든 입장의 차이를 넘어 정말로 중요한 가치는 무엇일까?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판정해줄 객관적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경우 철학에서는 흔히 ‘통약불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다시 말해 이들 입장을 서로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게 해주는 공통의 지반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 제 입장이 바로 그 공통분모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무지막지한 독단이리라.」

  그런데 진중권은 독단도 아니고, 상대주의도 아닌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싶어 한다. 우리의 현실이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도 옳고, 너도 옳아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 말로 상대주의를 선언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문제는 현실이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한다는 데 있다. 어떤 가치가 진정으로 중요한지 말해줄 객관적 기준 없이 우리는 살기 위해 선택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선택을 대체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 또 그 선택이 선택되지 않은 다른 입장들에 부당한 것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려운 것은 이런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다. 가치의 다원성을 인정하면서도 실천에서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는 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아마도 지젝이 말한 ‘시차적 관점’이 그 해답이 될지 모르겠다. 」

  인터넷 상에서 투사의 이미지와는 달리 여기서 진중권이 추구하는 해법은 참으로 자애롭고 인자하여, 황희 정승을 떠올리게 한다. 그 태도 자체는 비판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해답을 하필이면, 그것과는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지젝을 통해서 찾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지젝이라면 아마 이렇게 답할 것이다. 나는 차라리 독단을 주장한다. 그것이 뭐 어떻다는 것인가? 적대세력에게 우리는 부당하고, 우리에게 적대세력 역시 부당하다. 중요한 것은 이 부당함이 누구를 향해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1%인가? 99%인가? 다원성을 인정하며 실천적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는 길은 없다. 그 물음 자체가 불필요하다....아마 이렇게. 진중권의 결론을 읽어 보면서, 내가 왜 이런 무모한 주장을 하는지, 변명해 보겠다.

 「 시차적 관점이란 이렇게 서로 충돌하는 두 입장을 -마치 힘껏 당겨 묶은 활줄처럼- 그 팽팽한 긴장 속에서 함께 유지하는 사유의 새로운 습관이다. 그것이 얼마나 실천적으로 효용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A만이 옳다’, 혹은 ‘B만이 옳다’는 독단보다 우리를 현실에 더 가깝게 데려다 줄 것이다. 」

  내가 읽은 『시차적 관점』에서 시차적 관점이란 정확히 이것과 반대의 개념이다. 충돌하는 두 입장을 함께 유지하는 사유의 습관이 아니라, 하나의 입장과 그 공백을 보거나, 반대의 입장과 그것의 공백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물론 두 가지 방법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을 이론의 층위에서 사유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무언가를 보는 행위의 층위에서는, 동시에 두 가지 입장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차는 동일한 X에 대한 양립 불가능한 두 개의 관점으로 구성된 대칭적인 것이 아니다. : 두 관점들 사이에는 환원불가능한 비대칭성, 극소의 반성적 왜곡이 존재한다. 우리는 두 개의 관점들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관점과 그것을 회피하는 것이 있으며, 두 번째 관점은 우리가 첫 번째 관점에서는 볼 수 없었던 공백을 채운다. (시차적 관점 PV, p63)」

  팽팽히 당긴 활시위의 양 끝처럼 대칭적인 것이 아니라, 비대칭적인 것, 혹은 뫼비우스의 띠 같은 것이다. 다른 비유를 하자면 루빈의 꽃병처럼, 하나의 꽃병을 보거나 두 개의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둘 다 볼 수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나도 해봤다. 순간적으로는 가능한 것 같지만, 다만 이경규의 눈알 굴리기처럼 눈이 재빠르게 대상을 바꾸어 가며 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될 뿐이다. 팽팽하게 눈을 부릅떠봤자 눈물이 날만큼 눈알만 아플 뿐이다.

   지젝은 책의 서주에서 두 가지 사례를 들어, 시차적 관점에 관해 설명한다. 그 중 하나가 벤야민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다. 벤야민은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을 하던 중, 나치 요원에게 붙잡히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스페인 국경 마을에서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2003년 놀라운 이야기가 어느 매체를 통해 발표되었다. 벤야민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 스탈린의 스파이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죽기 몇 달 전 벤야민이 집필한, 마르크스주의의 실패에 대한 충격적인 분석인 『역사철학테제』 때문이다. 『테제』를 우연히 읽게 된 스탈린이, 이 『테제』에 근거한 벤야민의 새로운 집필계획을 알게 되었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출판을 저지하려고 했다. 여기서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벤야민과 스탈린은 결코 조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두 이야기가(나는 한 가지 사례만 소개했다) 공유하는 것은 그것들이 구축하는 관계가 구조적인 이유들로 인해 결코 조우할 수 없는 불가능한 단락의 층위들이라는 것이다 : 예를 들어 ‘스탈린’이 대표하는 것을 ‘벤야민’과 같은 층위로 이동시키는 것, 즉 스탈린적인 관점에서 벤야민의 『테제』의 진정한 차원을 간파하는 것은 한 마디로 불가능하다. 두 이야기가 기조로 삼고 있는 허상, 즉 두 개의 양립 불가능한 현상을 동일한 차원에 배치하는 허상은 칸트가 “초월론적 가상”이라고 부른 것, 상호 번역이 불가능하며, 어떠한 종합이나 매개도 불가능한 두 지점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는, 일종의 시차적 관점으로만 포착할 수 있는 현상들에 대해 동일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믿는 가상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두 층위 간에는 어떠한 관계도 성립되지 않으며 어떠한 공유된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심지어 어떤 면에서는 일치한다 할지라도 말하자면 그것들은 뫼비우스의 띠의 상반된 양면에 있는 셈이다.( PV, p13)」

  벤야민의 암살설이 성립하려면『테제』를 놓고 벤야민과 스탈린이 같은 층위, 즉 같은 내용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스탈린은 『테제』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의 실패에 대한 분석을 읽어내지 못한다. 스탈린의 관점에서 『테제』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스탈린이 『테제』를 읽고 벤야민을 암살했다는 것은, 꽃병과 얼굴을 한꺼번에 봤다는 의미다. 왜 지젝이 스탈린을 저차원에 두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그 전제에 동의하고 보면 시차적 관점에 대해 무엇을 설명하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테제』는 하나의 실체이지만, 우리는 스탈린의 관점을 갖거나 벤야민의 관점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시차적 관점이다. 두 관점은 동시에 동일한 층위에 존재하지 못한다. 진중권이 해석한 시차적 관점은 이와 반대로, 두 개의 관점을 동일한 활시위에 올려놓고 팽팽하게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것이 「‘A만이 옳다’, 혹은 ‘B만이 옳다’는 독단보다 우리를 현실에 더 가깝게 데려다 줄 것이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시차적 관점은 지젝의 시차적 관점과는 거리가 멀 뿐 아니라, 꽃병과 얼굴을 동시에 볼 수 있다는 불가능한 주장이기도 하다. 꽃병과 얼굴을 동시에 보려할 때, 현실에 더 가깝게 갈 수 있기는커녕 현실이란 것이 구성되지도 않을 것이다.

 

 

  지난달에 나는 『위대한 유산, Great Expectations』을 읽었다. 지젝은 『시차적 관점』에서 찰스 디킨스의 이 유명한 소설을 헤겔의 ‘부정의 부정’을 설명하는 사례로 들고 있는데, 소설 읽은 자랑(?)도 할 겸하여, 조금 소개한다. 물론 시차적 관점에 대한 구체적 사례이기도 하다.

 「 핍이 “거액의 유산상속인/ 큰 기대를 걸만한 사람 man of great expectations"으로 지목될 때 사람들은 이를 그가 세상에서 성공하리라는 예견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런던의 가식적 화려함을 포기하고 남루한 어린 시절의 공동체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그가 진정 그의 인생에 각인되었던 예언에 따라 살았음을 깨닫게 된다. 런던 상류사회의 공허한 흥분을 떠날 용기를 낸 후에야 비로소 그는 “큰 기대를 걸 만한 사람” 되기에 진정한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는 여기서 일종의 헤겔의 반성과정(reflexivity)에 대해 논하고 있다. 주인공이 시련을 겪으면서 그의 성품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의 성품을 평가하는 윤리적 기준 역시 변한다. ... 이것이 “부정의 부정”이 의미하는 바다.: 그것은 실패를 진정한 성공으로 바꾸는 관점의 전환이다..( PV, p60~1) 」

  핍은 결과적으로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지 못했다. 그러나 유산상속인이 되는 것에 실패함을 통해서 문자 그대로의 man of great expectations이 되는 것에 성공했다. great expectations을 통상적인 어법에 따라 막대한 유산으로 보았을 때 핍은 그것에 실패했지만, ‘커다란 기대’ 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핍이 런던의 화려함 대신 남루하지만 진정한 공동체를 선택한 행위야말로 말 그대로 큰 기대를 걸 만한 사람임을 증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핍이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은 없다. 부가 곧 성공임을 확신하는 고향 마을의 속물들에게 핍은 그저 유산 상속에 실패하고 런던에서 쫓겨난 가난뱅이일 뿐이다. 그들의 관점에서 핍은 결코 man of great expectations일 수가 없다. 반면 핍을 친아들처럼 키워준 조에게는 빈털터리 핍의 낙향이야말로 조의 기대, great expectations에 부응하는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성공이다. 소설을 읽는 전지적 시점에서는 핍은 성공했음과 동시에 실패했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핍은 성공했거나 실패했을 따름이다. 핍이 ‘막대한 유산’과 ‘커다란 기대’를 동시에 성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누구도 신과 같이 전지적 시점으로 살지 못한다.

  여기서 핍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것은 전적으로 관점의 전환이다. 핍은 돈 한 푼 없이 고향마을로 돌아왔다. 이것은 핍이 막대한 유산을 받을 것이라는 예견에 대한 ‘부정’이다. 헤겔의 ‘부정의 부정’은, 우여곡절을 거쳐, 드라마라면 보통 유산에 대한 거절의 행위가 오히려 행운의 계기가 된다는 식으로 진행될 텐데, 핍이 원래의 유산을 물려받는 것에 성공한다는, 행복한 ‘정-반-합’이 아니다. ‘부정의 부정’에서 실제로 핍에게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핍은 여전히 빈털터리다. 바뀌는 것은 유산 상속의 실패라는 ‘부정’을 제대로 된 인간의 증거로 보는, 인간성의 성공으로 보는 관점의 전환이다. 이것이 지젝이 말하는 ‘부정의 부정’이며, 시차적 관점으로의 전환이다. 이렇게 보면 시차적 관점 역시 별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세상 일 마음먹기 달렸다는 지혜는 중용만큼이나 오래된 교훈일 것이다. 그러나 시차적 관점은 체념이나 달관 따위 현실로부터의 거리두기는 분명코 아니다. 현실의 변혁을 위해 관점을 바꾸는 것이지, 현실에서 물러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관점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진중권은 “촛불은 왼쪽에서도 오른쪽에서도 깜박인다.”고 했다. 지난 촛불집회 때, 전통 좌파와 촛불대중의 갈등을 두고, 진중권식의 시차적 관점을 적용하여 한 말이다. 전통좌파의 관점에서 촛불은 오른쪽에 있다. 촛불(대중)의 관점에서 오른쪽에 있는 것은 오히려 전통좌파이다. 촛불이 왼쪽에서도 깜박이고 동시에 오른쪽에서도 깜박인다는 그의 표현은 여기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왼쪽에서 깜박이는 촛불을 보는 것은 촛불(대중) 자신이고, 오른쪽에서 깜박이는 촛불을 보는 것은 전통좌파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왼쪽과 오른쪽에서 동시에 깜박이는 촛불을 보는 것은 누구인가? 신이 아니라면, 방관자일 뿐이다. 촛불집회를 아무 생각 없이 무심히 바라볼 수 있는 방관자, 다시 말해 촛불집회라는 세계 밖에 있는 제3의 시점만이 차지할 수 있는 관점이다. 그런데 이런 개별적 사례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세계에 대한 철학적 사유 속에는 불행히도 세계 밖이라는 것은 없다. 우리는 세계-내-존재 이다. 상대의 입장을 배려하면서도 실천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아름다운 시점은 없다. 물론 좌우의 촛불을 모두 볼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처음 내가 자유주의적 촛불대중이었다고 가정하자. 내 눈에 촛불은 전통좌파 보다 훨씬 왼쪽에 있다. 왼쪽에서 깜박이는 촛불. 그런데 집회에 참가하다가 진보신당에 가입하게 되었고 열심히 공부하다보니 어느 순간 전통좌파로 변해 버렸다. 그리고 다시 바라본 촛불, 그것은 아마도 분명히 오른쪽에서 깜박일 것이다. 이것의 의미는 내가 왼쪽의 촛불을 본 적이 있다고 해서, 이제 왼쪽과 오른쪽의 촛불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다. 전통좌파가 된 나는 더 이상 왼쪽의 촛불을 볼 수 없다. 촛불 자체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것은 이제 분명히 오른쪽에서 깜박이고 있다.

  그렇다면 타협과 화해는 불가능한 것일까? 사실 우리가 모든 일에서 자신의 관점만 주장하며 살 수는 없다. 대화를 통해 상대를 이해하게도 되고, 하나씩 양보하며 주고받기도 하고 대충 어울려 산다. 그렇지만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진중권이 해일과 조개의 비유를 통해 그 적대의 심각성을 보여준 것처럼 말이다. 그 유명한 사례가 최보은일 텐데, 운동권 출신의 페미니스트인 그녀는 오래 전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 진보일 수 있다”고 말해 진보세력을 경악케 했다. 최보은은 진보와 페미니즘을 통합한 듯 보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근본적인 적대를 드러냈다. 지젝은 이 적대를 불가피하다고 본다. 물론 어떤 적대가 가장 보편적인 적대인지 가려줄 객관적 기준은 없다. 관점에 따라 자신의 적대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정통좌파에게 그것은 물론 계급 적대이다. 페미니스트에게는 성적 적대이고, 생태주의자에게는 인공과 자연의 적대이다. 우리는 자신의 적대가 가장 보편적임을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보편은 불변의 진리는 아니다. 그것은 만들어진 보편, 구멍 뚫린 진리이다. 진리는 구성된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이 보편적 진리임을 믿어야 한다. 벤야민에 따르면 신학적 차원 없이 혁명은 승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바꾸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그것에 대한 비합리적 열정, 신학적인 믿음을 가져야 한다. 시차적 관점으로의 이동은 기존의 관점으로 구성된 세계를 완전히 붕괴시키는 ‘신념의 도약’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왼쪽에서 깜박이던 촛불은 신념의 도약에 의해서만 오른쪽에 자리할 수 있다.

 

 

  이 글은 전적으로 내가 이해한 『시차적 관점』의 관점에서 진중권의 ‘시차적 관점’을 바라본 것이다. 이것은 함께 『시차적 관점』을 읽었던 세미나 지인들의 관점과도 일치하지 않을 것이며, 더욱이 지젝 자신의 관점에는 얼마나 근접해있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힘껏 생각을 뻗쳐 보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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