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이란 무엇인가 - 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김희진.정일권 옮김 / 난장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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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6일, 카페소모임 발제입니다

 

“내 롤 모델은 차인표야.” 등 뒤에서 날아든 목소리. 연기가 전공인 듯한 청년 둘의 대화는 착하게 사는 것, 일상에 감사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 등으로 이어졌다. 카페 귀퉁이에 앉아 책을 읽노라면 별의별 말들이 다 들리지만, 유독 귀를 잡아당기는 이야기가 있다. 휴일 한낮에 카페에 마주 앉아 인생을 논하는 청년들도 드물지만, 어깨만 스쳐도 눈을 부라릴 것 같은 혈기왕성한 청년들치고는 참으로 뜻밖의 내용이라, 나는 은근히 귀를 쫑긋거리고 말았다. “내 목표는 착하게 사는 거야.” “형, 저는 조그만 일에도 감사하며 살고 싶어요.” 착하게, 감사하며, 나누며, 행복하게 ....

  나도 보았다. 차인표의 힐링캠프를. 매사에 비판적인 우리 오빠는 차인표가 보수 정치인들과 같이 논다고 싫어했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어떤가, 보수 아니라 진보를 통 털어도 저렇게 삶 자체가 사랑과 봉사와 희생인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감히 차인표를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그의 힐링캠프에 감동받은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지, 방송 후 열흘 만에 그가 활동하고 있는 ‘컴패션’이라는 단체에 6,500명의 후원자가 몰려들었다고 한다. 사랑이 사랑을, 감동이 감동을 낳는 참으로 아름다운 ‘차인표 효과’ 다.

  차인표의 힐링캠프가 그렇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것은 그가 참으로 절절한 마음과 진심어린 사랑으로 봉사활동을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달에 4만5천원이면 파리 떼를 쫒을 힘조차 없어 죽어가는 쓰레기 더미 속의 생명 하나를 희망과 미래가 있는 빛 속으로 데리고 나와 교사로, 의사로, 과학자로 길러낼 수가 있는 것이다. 내 한 달 커피 값이면 두 사람의 삶을 바꿔 놓을 수 있다. 그렇게 사는 빈곤 아동들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도 아니고, 단 돈 몇 만원이면 새 삶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도 아니지만, 새삼 차인표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았던 것은 그의 눈빛이, 그의 몸짓이 열정과 사랑으로 아름답게 타올랐기 때문이다. 착한 청년들의 아름다운 롤모델...

 

 

 

 

  지젝의 『폭력이란 무엇인가? (Violence)』는 물건을 훔쳐낸다고 의심받는 어느 일꾼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매일 저녁, 일꾼이 공장을 나설 때면 그가 밀고 가는 손수레는 샅샅이 검사를 받았다. 경비원들은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손수레는 언제나 텅 비어 있었다. 결국 진상이 밝혀졌다. 일꾼이 훔친 것은 다름 아닌 손수레 그 자체였던 것이다. p23」

  ‘폭력이란 무엇인가?’ 의 답은 사실 이 간단한 이야기 안에 있다. 사람들이 ‘폭력’이라는 단어로 떠올리는 것은 구타, 범죄, 테러 같이 눈에 바로 보이는 것들이지만, 사실 근본적 폭력은 우리가 눈 뜨고도 보지 못하는 수레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수레 안의 물건들만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지만, 문제는 수레 안의 내용물이 아니라 오히려 수레라는 형식, 그것 자체다.

 

 

  「소로스는 무자비하고 극단적인 금융투기를 통해 착취를 일삼는 동시에 고삐 풀린 시장 경제가 불러오는 파국적인 사회적 결과에 대한 인도주의적 관심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의 일과만 보더라도 스스로의 행동을 스스로 상쇄시키는 대위법이 두드러진다. 그는 업무 시간의 반은 금융 투기에, 나머지 반은 탈공산주의 국가에 문화적·민주주의적 활동 지원금을 제공하거나 저서를 집필하는 등, 인도주의적 활동에 할애한다. 궁극적으로 이는 스스로의 투기가 불러올 부작용들과 싸우려는 활동인 셈이다. 빌 게이츠의 두 얼굴은 소로스의 두 얼굴과 꼭 닮았다. 지독한 사업가로서의 그는 실질적 독점을 노리며 경쟁사들을 파산시키거나 사들이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치사한 거래 수법을 동원한다. 반면 인류 역사상 가장 커다란 규모의 자선가이기도 한 그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지 못하고 이질로 죽어간다면 컴퓨터를 가진다는 게 무슨 소용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의 윤리로는, 자선을 베풀면 무자비한 이윤 추구 행위도 상쇄된다. 자선은 경제적 착취라는 얼굴을 감추고 있는 인도주의적 가면이다. 선진국들은 원조와 차관 등을 통해 미개발 국가들을 ‘도움’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후진국의 빈곤에 연루돼 있으며, 공동책임이 있다는 핵심적 쟁점을 회피한다. 이는 초자아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거대한 기만이다. p51~52」

  제3 세계는 왜 가난할까? 제국의 식민지 개척사와 신자유주의 금융 침탈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원인을 대충은 짐작할 수 있다. 금, 석유, 다이아몬드 등 풍요로운 자원을 가진 나라일수록 더욱 철저히 파괴당했다. 그 나라 아이들이 굶주림 속에 죽어가는 것은 단지 통치자의 독재와 종족 간의 분쟁, 인종적 열등함 때문이 아니다. 그 참혹한 현실의 이면에는 선진국의 총칼이나 자본의 욕망이 있다. 그 아이들로부터 집과 음식을 빼앗은 것은 그들에게 바로 그 집과 음식이 필요하다고 호소하는 선진국들과 인도주의적 자본가들이다. 그 아이들의 또 다른 비극은 약탈자에 감사하며 그 은혜를 뼈 속 깊이 새긴다는 것이다.

 

 

  「가장 순수한 사회적-상징적 폭력은 그 대립물,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이나 들이마시는 공기와 같이 무의식적인 것으로 스스로를 드러내 보인다. 이런 이유에서, 폭력에 겁을 집어먹기도 하고, 폭력을 걱정하기도 하며, 폭력에 맞서 싸우기도 하는 세련된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와 분노를 폭발시키는 맹목적 근본주의자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라 할 수 있다. 주관적 폭력과 싸우는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구조적 폭력의 행위자가 되는데, 이 구조적 폭력이야말로 주관적 폭력을 낳는 원인이다. 관용의 정신으로 에이즈 치료나 교육에 수백만 달러를 내놓는 자선가는 그 자신이 금융 투기로 수많은 이의 삶을 파괴한 장본인이며, 그리하여 자신이 타파하고자 하는 불관용 그 자체의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

  지젝은 폭력을 주관적 폭력, 구조적 폭력, 상징적 폭력으로 나눈다. 주관적 폭력은 우리가 보통 폭력이라고 부르는 구타, 범죄, 테러 등 일상적으로 보이는 폭력이다. 반면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은 물리학의 ‘암흑 물질’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폭력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고려해야 할 객관적 폭력이다.

  「주관적 폭력은 세 가지 폭력 중 가장 가시적인 일부에 불과하다. 이 세 가지 폭력 중 나머지 둘은 객관적 폭력인데, 그 첫 번째는 하이데거가 ‘존재의 집’이라고 칭한 언어를 통해 구현되는 ‘상징적’ 폭력이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이 폭력은 습관적인 언어 사용을 통해 재생산되는 지배관계나 선동적인 언어 속에서만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례들은 충분히 연구되었다.) 보다 근본적인 형태로 폭력이 언어 자체에 들어 있으며, 언어가 의미 세계를 대상에 부과할 때 따라 붙는다. 두 번째로, 내가 ‘구조적’ 폭력이라 부르고자 하는 폭력이 있다. 그것은 어떤 경우 우리의 경제체계와 정치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나타나는 파국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문제는 주관적 폭력과 객관적 폭력을 동일 선상에서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관적 폭력은 비폭력을 배경으로 하여 경험된다. 주관적 폭력은 ‘정상적’이고 평온한 상태를 혼란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객관적 폭력은 바로 이 ‘정상적인’ 상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객관적인 폭력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무엇을 주관적 폭력이라고 지각할 때 바로 그 기준이 돼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조적 폭력은 너무도 뚜렷하게 눈에 보이는 주관적 폭력의 정반대이며, 물리학에서 말하는 악명 높은 ‘암흑물질’과도 같은 것이다. 구조적 폭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폭력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고려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폭력은 단지 주관적 폭력의 ‘비이성적’ 폭발로만 보일 것이다. p24」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지젝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객관적 폭력이다. 우리는 이런 폭력을 배제하고 살수 없다. 말 그 자체가 이미 폭력이고, 우리가 사는 세상, 자본주의, 사회주의, 국가, 법, 심지어는 민주주의까지, 이 모든 체계들은 이미 구성적으로 폭력적이다. 구조적 폭력은 그 세계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일상적인 경우에는 거의 눈에 띄지 않고 자연화 된다. 반대로 이것이 정상성의 기준이 아니라 폭력으로 인지될 때, 그 세계는 이미 무언가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FTA가 우리나라를 침탈하는 폭력으로 인지되는 한, 신자유주의 시장 체계는 더 이상 매끄럽게 작동할 수 없다. FTA에 대한 찬반의 팽팽한 대립은 우리가 어떤 이행기에 있다는 지표이기도 하다. 새로운 체계로의 이행에는 반드시 폭력이 수반된다. 알을 깨고 나오는 새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폭력은 대개 현존재의 타협을 통한 일치와 서로 협력하여 만들어준 기준에 비추어 지각된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모든 폭력은 불온 요소이자 위반으로 간주된다.... 폭력적인 자란, 침묵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창의적인 자, 사유된 적 없는 영역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자, 그때까지 결코 일어난 적 없던 일을 일어나게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나게 하는 자이다. 이 폭력적인 자는 언제나 무모하고 위험한 시도를 한다...따라서 폭력을 행하는 이에게는 일말의 친절함도, 회유의 여지도 없으며, 성공인 명성, 혹은 그런 것들에 대한 보장으로도 그를 달래거나 누그러뜨릴 수 없다. p108」

  하이데거의 말이다. 그러므로 폭력이란 그 자체로 선악의 개념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알이 새에게는 구조적 폭력인 것처럼, 알을 깨는 새의 창조적 행위가 알에게는 주관적 폭력이다. 관점과 입장에 따라 폭력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뿐이다. 새인가 알인가. 우리가 알인 동시에 새가 될 수 없는 것처럼, 구조적 폭력과 주관적 폭력은 동시에 인식될 수 없다. 시차적 관점에 따라 폭력으로 보이든가 또는 정상성으로 보일 수 있을 따름이다.

 

 

 

  지젝의 책은 이 시대에 전 지구적 양상으로 발생되고 있는 다양한 폭력들에 대한 성찰이다. 그런데 이런 폭력의 양태를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삐딱해 질” 필요가 있다.   홀바인의 "대사들"이란 그림이다. 해골이 보이시는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비딱하게 젖히고 바닥을 째려보시라.

  구조적 폭력, 상징적 폭력 또한 이렇게 ‘삐딱하게 보기’를 통해서만 보이는 폭력이다. 지젝은 행동하기 전에 먼저 ‘공부하라! 공부하라! 공부하라!’ 고 한다.

 「궁극적으로는 거대한 체계가 더 부드럽게 작동할 수 있도록 해줄 뿐인 국부적 행위에 참여하기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더 낫다. 오늘날 진짜 위협적인 것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유사능동성이다.... 진짜 어려운 일은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고 철회하는 것이다. p296」

 

  “인도주의적인 봉사를 하지 않기를 선호합니다.” 라는 기막힌 주장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아직 이런 바틀비적 태도에 대해 혼란스럽다. 그렇지만 과연 이 시대에 젊은이들이 차인표를 롤 모델로 사랑과 봉사와 감사의 삶을 목표하는 것이 바람직하기만 한 것일까....

 

  우리는 먼저 무엇이 도둑맞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수레 안에는 도둑맞은 물건이 없다. 인도주의적 자본가들은 오히려 어마어마한 돈과 식량을 제3세계 빈민들에게 기부한다. 그런데도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부자들은 더욱 부유해진다. 비밀은 수레 자체에 있다. 그들이 기부하는 식량과 의복, 학교와 미래까지도 모두, 도둑맞은 수레가 만들어 낸 것이다. 그것은 원래 제3세계의 것, 빈민들의 것이었다. 빈민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수레를 되찾는 것이다. 그리고  수레를 되찾는 투쟁에는 아마도 사랑과 감사 보다는 지식과 분노가 더 적절한 무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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