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부터 읽던 고전을 잠시 중단하고 있었다. 모임 제한으로 카페에서 만나기도 힘든데다, 플라톤을 읽기로 한 터여서 과제만으로는 진행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지난주에 강유원 선생의 고전 강독을 발견했다. EBS 클래스e의 곁가지(?) 프로그램으로 고전 강독이 있고, 거기에 20강으로 된 <소크라테스의 변론> 강독이 올라와 있었다. 고전 읽기를 다시 시작하라는 계시구나 싶을 만큼 반가웠다. 안그래도 플라톤 대화편 중 <소크라테스의 변론>과 <향연>을 읽기로 계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 변론 : 강유원의 소크라테스 변론 강독 / 강유원 (ebs.co.kr)








일정을 짜서 강의를 들으며 정리하고, 줌에서 모여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강의를 정리하면서 좀 더 생각해 볼 것들도 과제로 제출하기로 했다. 










1강.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읽는 까닭




저 멀리 발칸 반도의 한 귀퉁이에서 2500년 전에 있었던 재판 하나를, 그때 쓰여진 글을, 오늘 이 땅의 우리가 읽어야 하는 이유를 탐색해 보는 데서 강의는 시작된다. 







가장 보편적인 답은 플라톤주의가 서양 철학과 종교, 사상에 미친 거대한 영향 때문이다. 플라톤은 인문학이란 것에 조금이나마 호기심을 가져 보려면 반드시 거쳐 가야 할 관문이란 뜻이다.  


플라톤주의에 관한 간략한 정리는 작년에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기 위해 써 둔 글에 있다.  [알라딘서재]희랍 철학을 읽기 전에 (aladin.co.kr)




그렇다면 30여 편의 대화편들 중 유독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읽는 까닭은 무엇일까?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소크라테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그가 고민했던 당대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드러내는 텍스트일 뿐만 아니라 그 문제가 바로 민주정, 민주주의라는 데에 이 대화편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우리 삶의 틀을 이루는 민주주의의 뿌리가 고대 희랍의 아테네에 있고, 그 민주정의 전성기이자 그 민주정의 문제점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던 시공간이 바로 소크라테스가 살았고, 사형을 선고 받았던 아테나이였으며, 이 갈등과 혼란을 장엄하게 보여주고 있는 텍스트가 <소크라테스의 변론>이다.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가 걷고 있는 탐욕과 무지, 선동과 분열은 아테나이의 민주정과 너무도 유사하다.  소크라테스는 목숨과 맞바꾸어서라도 아테나이인들에게 인간이 가야할 길을 역설하고자 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영원히 철학자의 혹은 사상가의 에이도스(형상)로 남았다. 


강유원의 <소크라테스의 변론> 강독은 민주주의에 대한 고찰이다. 





2강. 고전 텍스트를 읽는 방법 (1)



전체 20강의 강독 중 1강에서 6강까지는 서론에 해당하고, 7강부터 18강까지가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읽는 본론이고, 19강과 20강은 결론이라 구분해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2강은 고전 일반을 읽는 방법론에 대한 설명이다.  강유원 선생의 말로 옮기면 1강은 '왜 읽는가'라면 2강과 3강은 '어떻게 읽는가' 이다. 


고전을 제대로 읽으려면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 구조적 형식이다. 나는 여전히 형식보다는 내용을 본다. 사실 형식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설명을 들으면 그렇구나 하는 정도이지, 아! 진짜 멋진 형식미를 가졌구나 하는 식의 독해 능력은 없다. 


강유원 선생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단테의 <신곡>을 예로 서사시의 형식을 설명한다.  <일리아스>의 원환 구조와 <신곡>의 경이로운 각운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강의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부분이다.  












작년에 <일리아스>를 읽으면서 들은 강의를 토대로 정리도 했었다.  <오뒷세이아>의 구조도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연구자들은 문학 최초의  flash back 기법이 도입되었다고 한다.  이 도표들에 대한 나름의 설명은 예전에 썼던 글들에 있다.  [알라딘서재]오뒷세이아 읽기 마지막 준비 (aladin.co.kr)  [알라딘서재]오뒷세이아 2 : 작품 구조 및 초반부 (aladin.co.kr) 











<어린왕자>를 가지고도 구조를 한번 따져 보았는데 ring composition을 뚜렷하게 찾을 수 있었고, 더불어 플라톤의 대화편에 자주 쓰이는 액자 소설의 형식도 나타났다.  여기에 관련된 글도 링크해 둔다.  [알라딘서재]원환 구조와 1장 (aladin.co.kr)








형식미가 경이로울 정도라는 <신곡>에 관해서는 아쉽게도 우리말 번역번으로는 그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힘들다.  물론 이탈리아어를 모르니  <신곡>을 제대로 읽어 내기는 영영 글렀다.  그래서 그런지,  여태까지 읽은 고전들 중에서 가장 힘든 작품을 꼽으라면 내게는 단연 <신곡>임이 틀림없다.  나름 노력도 해보고 정리해서 글도 올려 놓았으나 여전히 머리에 남아 있는 것은 별로 없다. 







강유원 선생이 하나 더 꼽은 텍스트는 <성경>이다.  <일리아스>와 <신곡>은 고전의 형식을 설명하기 위해,  <성경>은 고전의 의미를 파악하는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사례로 삼고 있다.  처음 듣는 방법론이지만 '성서 읽기의 네 겹 방법론' 이라고 한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사실로 읽는 방식이 오늘날의 과학적· 상식적 사고와 충돌하는 것처럼 고전을 읽을 때도 우의적 의미와 도덕적 실천, 신적 지향 등을 고려하여야 한다.  커피는 쓴맛과 단맛과 신맛과 말하기 힘든 오묘한 맛을 모두 감추고 있지만 똑같은 커피에서 어떤 맛을 느끼는가는 그것을 다루는 사람에 달려있다. 





3강 고전 텍스트를 읽는 방법 (2)




3강은 고전 텍스트들 중에서도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을 때 유의해야 할 사항들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은 철학서이지만 그 형식은 희랍 문학에 가깝다. 몇몇 인물들이 특정한 장소를 배경으로 특정 주제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형식이다.  주인공은 주로 소크라테스이고 대화 상대의 이름이 그 대화편의 제목인 경우가 많다. 


이때 대화가 이루어지는 장소는 우연적인 배경이 아니라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소크라테스의 대화 상대자들 역시 당대 아테나이의 시대 상황에서 뚜렷한 상징성을 가진 인물들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고대 희랍에 대한 자세한 배경 지식이 없이는 알아 내기 힘들다.  플라톤을 읽을 때 이끌어 주는 선생님이 절실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독서의 선생이 되어 줄 또 하나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이다.  소크라테스가 당대에 겪었던 참혹한 내전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이 책에 대해서도 앞에 링크한 글에 조금 정리해 두었다.  읽기 쉽지 않은 책이었지만 무척 흥미로운 부분이 꽤 있는 책이기도 했다.  내전 상황에서 주고 받는 연설들이 얼마나 멋지든지 깜빡 넘어갈 뻔 하기도 했다.  [알라딘서재]희랍 철학을 읽기 전에 (aladin.co.kr)  하지만 그 연설들 이면에서 똑바로 보아야 할 것은 부와 명성을 좇는 추악한 탐욕이 어떻게 공동체를 망가뜨리는가 하는 점이다. 



하지만 3강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내용은 이러저러한 배경 지식이라기 보다는 대화를 전달하는 형식, 액자 소설의 형식 그 자체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어떤 사람과 나눈 대화를 현재 시제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과거에 있었던 대화를 시간이 지난 후 다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 주는 형식으로 서술한다.  이때 전달하는 사람은 단순한 캐리어가 아니다.  대화의 내용 그대로를 암기하여 전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그것은 불가능하다, 자기가 이해한 방식으로 그 중요성을 재평가하여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전해주기 마련이다. 즉 이 전달의 형식, 액자 소설의 형식은 그 자체가 철학함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철학적 사유가 바로 이렇게 돌이켜 보고, 곱씹어 보고, 정리하는 반성적 사유이기 때문이다.  


<어린왕자>도 그렇다.  6년 전에 있었던 어린왕자와의 만남을 6년이 지난 시점에서 전달하는 서술자는 그 만남을 6년 동안 돌이키고 곱씹고 그 의미를 하나씩 하나씩 찾아 낸 끝에 드디어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6년은 철학적 사유의 시간이다.  서술자를 만난 어린왕자도 그렇다.  자신의 작은 별을 떠나 이웃 별들을 여행하고, 지구에 도착해 1년 간 지구라는 세계를 겪고 난 이후에야 어린왕자는 사막에서 만난 서술자에게 자신의 별과 두고 온 꽃과 뱀과 여우에 대해 말할 수 있었다. 이렇게 <어린왕자>는 이중의 액자 구조를 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전해 준다는 것은 그 일에 대해 어느 정도는 말할 준비가 되었다는, 철학적 반성이 있었다는 뜻이다.  힘이 있는 이야기일수록 사유의 속이 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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