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소식 패트릭 멜로즈 소설 5부작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 지음, 공진호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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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트릭 멜로즈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이 나왔다. 제목은 '나쁜 소식'.

 소설이 시작되면 주인공 패트릭이 뉴욕에서 조지란 사람에게서 온 전화를 받는다. 그의 아버지 데이비드가 호텔에서 갑자기 죽었다는 것이다. 액면 그대로라면 이것이 나쁜 소식일 것이다. 그러나 전작 '괜찮아'에서 나왔던대로 다섯 살 때 처음 아버지에게 강간을 당한 뒤로 22살이 되는 지금까지 아버지와 단 둘이 있으면서 10분 이상 항문을 침범당하거나, 매 맞거나, 모욕당하지 않고 있어본 적이 없는 패트릭에게 과연 나쁜 소식인 걸까? 사실 그 소식을 듣고 난 뒤의 패트릭의 반응은 이러했다.


 그게 나쁜 소식이라고? 정신이라면, 거리에 나가 춤추지 않을 정신, 너무 표 나게 웃지 않을 정신이 필요하겠지.(p. 15)


 어쨌든 그는 아버지 유해를 가져오기 위해 뉴욕으로 떠난다. 이 뉴욕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나쁜 소식'의 전부를 차지한다. 뉴욕에 도착한 비행기에서 영국으로 떠나는 공항에 이르기까지의 하룻 동안의 여정이다. '괜찮아'가 단 하루를 담았던 것과 똑같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들 수 있겠다. 그렇다면 '나쁜 소식'이란 제목은 틀린 게 아닌가? 패트릭의 반응을 보자면, '좋은 소식'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하고 말이다.




 합당한 의문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제목엔 '나쁜 소식'이 더 잘 어울린다. 그는 나쁜 소식을 받는다. 그것은 결코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이 아니다. 그 소식은 패트릭 외부에 관계된 것이 아니다. 내부에 관계된 것이다. 바로 아버지가 남긴 유산에서 자신이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것. 여전히 그가 남긴 것과 동행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패트릭에게 정말 나쁜 소식이다. 뉴욕에서 겪는 그의 여정은 배반의 경험이다. 오랜 세월 그토록 아버지의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는데, 여전히 거기에 속박되어 있다는 걸 절절하게 체득하니까 말이다. 어쩌면 소설 가득 펼쳐지는 마약 중독 이야기는 바로 그 절망에서 배태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앞서 '괜찮아'의 리뷰에서 '패트릭 멜로즈'는 사실 위악과 절망 그리고 고통 밖에 물려줄 게 없는 기성 세대의 사상과 가치관을 자기 존재의 근거로 삼지 않고 젊은 세대 스스로 살아가야 할 이유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했었다. 즉 섹스 피스톨즈가 자신의 데뷔 앨범에서 '거세된 숫소들은 신경쓰지 마!'라고 외쳤던 것과 마찬가지로 기성 세대의 모든 것을 'NEVER MIND' 해 버리고 자신만의 '레종 데트르'를 구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쁜 소식'에서 패트릭은 그런 구현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절감한다. 자신이 구닥다리라고 생각했던 아버지 세대의 문화와 질서가 예의의 형태로 아직도 자신에게 끈질기게 남아있으며 자신이 바라는 대로 행할 수 없다는 것을 늘 자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언급하는 기성 세대를 만날 때마다 자신을 옥죄고 있는 족쇄를 느낀다. 마음은 탈피를 갈망하지만 자신의 정체성 일부를 이루고 있는 아버지의 세계가 가진 중력은 그를 쉽사리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마약을 찾는다. '나쁜 소식'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접하는 것은 패트릭이 끊임없이 마약을 찾아 뉴욕의 거리를 헤매고 남의 집 화장실에서 그걸 흡입하는 장면이다. 그는 왜 그토록 마약을 찾아 다니는가? 단순히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게 바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아버지 세계에 대한 저항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마약, 그것은 죄악으로 가득한 기성 세대의 대표 존재인 데이비드가 엄격하게 금지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패트릭은 그렇게 마약을 통해 아버지가 구획해 놓은 것을 위반한다. 다시 말해 패트릭은 아버지가 말끔히 소거된 자신만의 '레종 데트르'를 구현하는 것이다. 여기서 표지를 한 번 바라본다. 드라마에 나오는 한 장면을 따온 표지엔 주연인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옷을 입은 채로 물이 차 있는 욕조에 들어가 있다. '나쁜 소식'에 나오는 장면이기도 하다. 왜 그는 옷을 입고 욕조에 들어가는 것일까? 이유는 '괜찮아'에 나온다. 아버지로 상징되는 기성 세대의 사고 방식과 교양에선 옷을 입고 욕저에 들어가는 것이 명백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다섯 살의 패트릭은 아버지에게 저항하기 위해 일부러 옷을 입은 채로 물을 받아 놓은 욕조로 들어간다. 이 행위 자체가 저항인 것이다. 표지는 바로 그것을 나타낸다. 옷을 입고 욕조에 들어가는 것과 마약을 찾고 흡입하는 것은 결코 다르지 않다. 둘 모두 넌더리가 나는 기성 세대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나쁜 소식'의 여정은 어떻게 보면 뭘 얘기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기승전결이라는 게 딱히 없는 산만한 이야기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전하고 싶은 주제에 따라 아주 세부에 이르기까지 아주 정교하게 설계된 구조물로 보인다. 하필이면 소설의 배경을 뉴욕으로 정한 것도 그렇다. 영국이 경직된 문화라면 뉴욕은 자유분방한 문화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패트릭의 숨통은 뉴욕에욕서 좀 더 트였어야 한다. 그러나 질식할 것만 같은 대기는 여전한데, 그건 뉴욕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미국 문화가 실은 역사적으로 영국 문화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영국 문화가 아버지라면, 미국 문화는 아들이라 할 수 있다. 뉴욕, 그 곳은 혼재의 장소다. 옛 것의 사고 방식과 관습으로 거머쥐려는 힘이 있는 반면 맹렬하게 이탈하고자 하는 힘이 있다. 그런 두 힘이 마구 충돌하는 곳. 그 곳이 바로 뉴욕이다. 패트릭이 처음 찾았던 장례식장이 보여줬던 모습 그대로. 패트릭은 안내자가 층을 잘못 말해줘서 3층에 있는 엉뚱한 사람의 장례식장으로 간다. 그것은 유쾌한 파티가 떠들석하게 벌어지고 있다. 너무나 장례식답지 않은 분위기라 패트릭은 얼떨떨해 한다. 잘못 찾아왔다는 것을 안 패트릭은 다시 안내자에게로 가 원래 자신이 가야했던 2층으로 간다. 거기는 어둡고 쥐죽은 듯이 고요하다. 3층과 완전히 정반대의 모습이다. 거기에 아버지 시신이 있었다. 파티장과 같은 3층과 묘지와 다를 바 없는 2층. 우리는 이것이 무의식과 자아를 층으로 나누었던 프로이트와 닮았다는 걸 인지한다. 2층은 무의식, 3층은 자아. 그러나 제아무리 다른 3층이라 해도 2층에게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무의식이 그러하듯이. 다시 말해 소설 속 장례식장은 하나의 신체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하게 패트릭의 신체와 동일하다. 뉴욕이라는 공간 역시, 패트릭 신체의 확장판인 것이다.


 물론 나는 잘 알고 있다. 이 소설이 작가, 에드워드 세인트 오번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것을. 그렇다고 해도 이 소설이 아주 정교한 세공품이라는 생각을 바꿀 마음은 없다. 오래만에 아주 많이 생각하고 이래저래 헤아려 보는 소설을 만난 것 같다. 적어도 소설만큼은 내게 전혀 '나쁜 소식'이 아니다. 다음 권인 '일말의 희망'을 간절히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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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트랜드
서레이 워커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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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모든 일에 나 자신을 열외로 간주했었다. 남들이 떠들어대는 데이트와 애인과 성관계는 내게 딴 세상 이야기였다. 트리스탄이 나타나 내게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기 전까지는 내가 어느 정도로 배제되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나도 드디어 그들의 일원이 된 것이다.(p. 170)


 외모 때문에 평생 타인과 자기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선이 있다고 생각한 여자가 있다. 자신은 늘 그 선 밖에 홀로 격리된 존재라고. 그의 이름은 플럼. 현재 135kg인 그녀는 뚱뚱한 자신의 몸을 싫어한다. 그녀를 계속 살게 하는 것은 딱 두 가지 뿐이다. 하나는 우울증 치료약인 Y. 다른 하나는 날씬한 여자로 만들어주는 수술이다. 오직 그 둘에 의지하여 플럼은 오늘도 '데이지 체인' 잡지의 편집장 키티를 대신하여 키티에게 메일로 외모와 연애에 대해 상담해 오는 십대 소녀들에게 키티인 척 하면서 답변을 해주고 있다. 그런데 최근 플럼을 미행하는 여자가 나타난다. 어디를 가든 족족 나타나 심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닌데, 어느 날 키티의 사무실에서 그 여자가 두고 간 책을 하나 발견한다. 바로 '다이어트 랜드 대모험'이란 책을.


 그 책의 발견을 계기로 플럼의 삶은 완전히 바뀐다. 자신이 전혀 모르고 있었던 세계가 갑자기 전면에 다가온 것이다. 그 세계를 만들고 이끌어 가는 사람은 베레나 뱁티스트라는 여성. 그런데 그녀의 존재는 플럼에겐 악몽이다. 플럼은 아주 어릴 때부터 시선의 공포를 느껴왔다. 어릴 때, 할머니 집에서 지낸 적이 있는데 하필이면 그 집이 1920년대의 무성 영화 시절 스타였던 머나 제이드가 살았던 집이라 그녀의 자취를 찾아 온 관광객들이 시시각각 나타나 플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메라로 마구 찍어댔던 것이다. 날씬한 몸이 되어 그런 시선의 공포에서 자유롭고자 플럼은 실제로 자신처럼 뚱뚱한 몸에서 아주 날씬한 몸으로 변한 여성인 뱁티스트를 TV에서 보고 그녀가 운영하는 다이어트 식단으로 살을 빼도록 도와주는 뱁티스트 프로그램 회원이 된다. 그러나 갑자기 일어난 교통사고로 뱁티스트 부부가 죽고 그녀의 딸인 베레나는 전격적으로 프로그램을 취소하여 플럼이 가진 유일한 희망을 날려버린다. 그 충격으로 플럼은 폭식을 감행하게 되어 결국 오늘의 몸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베레나는 사실 현재의 고통을 가져다 준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그런 플럼에게 베레나는 부모의 프로그램은 윤리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하면서 그 때의 상처에 대해 사죄라도 할 겸, 2만 달러를 줄테니 자신이 하는 뉴 뱁티스트 프로그램을 받아 볼 것을 권한다. 그렇지 않아도 수술 비용이 부족했던 플럼은 베레나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날씬한 몸이 되면 플럼의 과거는 모조리 지워버리고 완전히 새롭개 살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얼리샤'라는 이름까지 새로이 지어 뉴 뱁티스트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한편, 미국은 여성을 성폭행한 남자들이 잔인하게 살해되고 여성을 성상품으로 만드는 기업의 고위층 자녀들이 연속적으로 납치되어 일대 혼란에 빠진다. 동일범의 소행이라 미국은 더욱 충격에 빠지는데, 사람들은 어느새 그 범인을 '제니퍼'라 부르게 된다. '제니퍼'가 처형하고 협박하는 대상은 오로지 여성의 권익을 무시하거나 방해하는 자들 뿐이었으므로 '제니퍼'는 기존 권력에 거센 추격을 받는 한편 많은 지지를 얻기도 한다. 플럼은 그러한 제니퍼의 활동을 보며 제니퍼가 혹시 자신을 베레나와 만나게 한 리타가 아닐까 의심한다.



 이처럼 원래는 여성 문제애 대해 많은 글을 썼던 칼럼니스트인 서레이 워커의 첫 소설, '다이어트 랜드'는 제목 때문에 다이어트에 관한 책이라고 생각하고 읽었다간 낭패를 볼 작품이다.

 이 소설은 다이어트에 대한 것은 하나도 알려주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정반대의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플럼이 받게 되는 뉴 뱁티스트 프로그램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금단과 정면 대결 그리고 변신의 단계로 이루어진 '뉴 뱁티스트 프로그램'의 궁극적인 목적은 플럼의 소망과는 정반대로 플럼이 아니라 얼리샤를 지우는 데 있기 때문이다. 플럼에게 다이어트는 무리가 되고자 하는 갈망에서 나온 것이었다. 플럼은 비대한 몸 때문에 남들은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마저 할 수 없는 자신을 많이 비관했었다. 다른 사람이 다 하는 행동을 하고 있을 뿐인데도 여기저기서 들려오거나 보여지는 자신을 비웃는 킥킥거리는 웃음, 조소어린 눈길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오직 뚱뚱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쏟아지는 조소와 경멸 속에서 플럼은 외롭고 두렵기만 했다. 다이어트는 거기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도대체 플럼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죄는 조소와 경멸을 보낸 이들에게 있었다. 그녀는 책임지지 않아도 좋을 책임 때문에 괴로워했고, 짓지 않은 죄 때문에 힘들어했다. '뉴 뱁티스트 프로그램'은 이를테면 시선 교정이다. 외롭고 두렵다면 외롭고 두려운 이유를 똑똑히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 원인은 결코 플럼에게 있지 않다. 플럼은 오로지 피해자일 뿐이며 부당하게 당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이유가 플럼에게 있지 않은데 왜 자학하는가? 베레나는 플럼이 가져야 할 것은 공포가 아니라 분노라고 말한다. 그리고 외로워 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플럼이 일원이 되고자 갈망하는 그들은 절대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뉴 뱁티스트 프로그램을 생각한다면 왜 작가가 플럼과 '제니퍼' 사건을 병행시키는 지 어느 정도 납득이 된다. '제니퍼'는 사회를 바꾸려는 외적인 변화를, 플럼은 내적인 변화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사자가 된 생쥐가 여전히 생쥐의 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고양이가 나타나면 달아나기 바쁜 옛 이야기처럼 양성 평등은 제도적 개선만으로 이뤄지진 않는다. 내적인 변화 역시 함께 이뤄질 때 그것은 보다 제대로 자리 잡는다. 하지만 소설에서 '제니퍼'의 부분이 제대로 매조지 되지 못하고 약간 흐지부지 된 감이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래도 범죄라는 형식을 통해 진행된 것이라 그렇게 된 것 같은데, 그래도 좀 더 살을 더 붙여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재밌는 소설이었다. 개그 프로그램에서 너무나 쉽게 희화화 되는 뚱뚱한 여자가 정말 얼마나 커다란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제대로 알게 되었다. 그 고통을 너무나 적나라하고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기에 혹시 작가가 몸소 겪은 것을 투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끝까지 흥미롭게 읽게 하면서도 말하고 싶은 주제마저 놓치지 않으니, 지(知)와 정(情) 모두에서 포만감을 주는 작품이다. 띠지에 보면, '시녀 이야기'를 쓴 마거릿 애트우드의 말이 나와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와우, 맹렬하고 기막히게 재미있다.'


 나도 동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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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8-07-20 0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는 이런저런 사람이 있듯 몸도 마른 사람이 있고 살찐 사람이 있는 거겠지요 예전에는 살찐 걸 더 좋게 봤다고 하던데, 지금은 반대가 되다니... 어제 라디오 방송에서 그런 걸 잠깐 들었어요 예전에는 귀족이나 부자는 잘 먹어서 살찐 것을 자랑으로 여겼는데 누구나 잘 먹게 되고는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다른 게 없어져서 부자는 자신은 다르다는 걸 나타내려고 반대로 마른 걸 좋게 여기게 했다고 합니다 그 말 맞는 것 같아요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지 않나 싶습니다

겉모습이 중요하지 않다 생각해도 그런 데서 자유로운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 같기도 해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남보다 자신부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좋겠네요


희선
 
전쟁과 평화 1~4 세트 - 전4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레프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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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고전이라도 등장인물들과 사는 형편이 너무 다르다 보면 이야기에 몰입이 잘 안 되기 마련이다. 레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도 그 중 하나가 아닐까? 신자유주의가 피워 놓은 매운 연기가 아직 채 가시지 않고 소득 불평등에 더하여 자산 불평등까지 극심해진 요즘 같은 세상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꾸만 불안해져가는 현재의 생활과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한 잔의 커피조차 여유롭게 마시기 어려운데, '전쟁과 평화'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하나같이 대저택에다 많은 토지를 소유한, 당장은 먹고 살 걱정이 없는 귀족 계급이니까 말이다. 그들이 아무리 아프고 힘들다 해도 그들이 가진 재산과 여유를 떠올리게 되면 얼른 '다 배 부르고 등 따뜻하니까 저러는 거다'하는 생각부터 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귀족이라는 것을 벗기고 보면 사실 그리 딴 얘기로 여겨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전쟁 상황이라는 게 그렇다. 그것은 오늘의 상황과 비슷하다. 물론 이제 막 시작된 남북 평화시대에 찬물이나 끼얹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것처럼 나라 사이의 전쟁을 뜻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넘쳐나고 있는 증오 또는 혐오를 두고 하는 말이다. 신문을 보면 날마다 증오 범죄가 늘어난다. 혐오도 다반사로 쏟아낸다. 정치와 성별, 직업과 세대, 빈부를 비롯해 이제는 제주도의 예멘 난민 문제에 대한 인터넷 댓글에서 보듯 국적까지, 여기저기서 편을 가르고 상대를 경멸하는 온갖 명칭을 새롭게 만들어가며 적대시 하기 바쁘다. 형편이 이러하니 어떻게 전쟁으로 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전쟁과 평화'에서 러시아 공작을 위해 일했던 프랑스인 요리사를 오직 프랑스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잡아서 스파이란 누명을 씌워 처형했던 러시아 사람이나 일단 러시아의 도시에 입성하면 사정 봐주지 않고 무조건 약탈부터 감행했던 프랑스인과 하등 다를 것이 없는데.


 그렇기에 우리는 '전쟁과 평화'의 주연이라 할 만한 안드레이와 피예르에게 공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 역시 지금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적대가 강요되는 상황 속에서 어느 것이 거짓이고 또 어느 것이 진실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는 가운데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늘 쓰러지고 넘어지며 방황한다. 러시아와 프랑스 사이에서, 자유 의지와 운명 사이에서, 영웅과 순응하는 필부 사이에서, 황제와 민중 사이에서, 사랑과 배신 사이에서 그리고 전쟁과 평화 사이에서. 나폴레옹과 쿠푸조트가 보여주는 선명한 대립처럼,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 속에 이분법적인 구도를 많이 만든다. 이토록 대립각이 분명하게 세워져 있지만 그 사이에서 헤매는 이들의 눈엔 그 모든 것이 온통 짙은 안개에 가리워진 것으로만 보인다.




 그들은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여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찾고자 갈망한다. 그 확보가 그들에겐 깨달음이다. 그러나 그러한 각성은 이제야 비로소 손에 쥔 것 같았으나 다시 또 어느새 손가락 틈 사이로 다 빠져 나가버리는 모래알에 다름 아니다. 오늘 찾은 해답이 내일이 되면 오답으로 변해버린다. 안드레이를 보자. 그는 1권의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자신이 헌신했던 국가가 한낱 허망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보다 고귀한 가치를 쫓아 거기에 걸맞는 진보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요 의무라고 생각했지만 자신과 약혼한 나타샤가 아나톨과 눈이 맞아 자기를 배신하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배신감과 복수심에 사로잡혀 원대한 이상을 쉽게 포기해 버린다. 피예르는 또 어떠한가? 그 또한 예기치 않게 베주호프 백작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어 비로소 자신의 이상을 구현할 기회를 얻었지만 아내 옐렌이 돌로호프와 바람을 피우자 비탄과 허무의 늪 속에 빠져 모든 이상과 희망을 내려놓는다. 이처럼 각성은 곧 쓸모 없는 것으로 밝혀지고 삶은 점점 더 빠져나갈 수 없는 미로가 된다. 마치 톨스토이가 작정하고 그들에게 정주(定住)의 희망을 포기시키는 것도 같다. 


 어쩌면 이러한 지속적인 추방이 톨스토이의 진의(眞意)는 아닌 걸까? 세상은 사실 나와 너를 쉽게 구분할 수 없는 안개요 미로라는 것. 전선(戰線)의 가시 철조망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내려다보면서 하는 생각들이 잘 보여주듯이, 선별(選別)은 나를 높이고자 하는 욕망의 소산이다. 세상을 오로지 자기 목소리로 채우고자 하는 마음. 그러나 거대한 세상은 그에게 너도 한낱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그저 세상을 움직이는 수많은 톱니바퀴 중 하나일 뿐이라고. 겸허하라는 뜻이다. 쿠푸조트가 자신의 뜻을 주장하기 보다는 운명에 조용히 순응한 것처럼. 나폴레옹은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싸웠지만 쿠푸조트는 세상의 움직임을 살피고 그에 따라 모스크바를 내어주기까지 하면서 물러났다. 도시에 들어간 프랑스군이 자행한 약탈은 사실 나폴레옹 싸움의 본질이다. 남의 것을 취하여 자신을 높이는 극단의 행태이니까. 그 약탈에 쿠푸조트는 포기로 맞섰고 결국 승리했다. 안드레이와 피예르 그리고 그들이 함께 사랑했던 나타샤의 구원도 바로 거기서 찾아왔다. 내어놓는 것, 물러서는 것, 조용히 순응하는 것.


 무엇보다 나타샤의 변화가 그러하다. 가장 밝은 삶의 색채로 가득했던 그녀는 그 밝기가 절정에 이른 순간, 그러니까 세상을 자기 뜻대로 다 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순간에 어리석은 현혹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망치고 말았다. 그 때의 그녀는 피예르의 아내, 옐렌이었고 또 다른 나폴레옹이었다. 그 실패가 그녀를 변화시켰고 부상당한 안드레이의 간호를 통해 구원을 얻게 되었다. 톨스토이는 그 때의 나타샤를 조도를 아주 많이 낮춘 공간에다 담는다. 움직임도 많이 줄인다. 어둠과 수동성의 장막을 겹겹이 휘두른 쿠푸조트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진정한 사랑과 구원은 나타샤가 가장 어둡고 가장 낮은 자리에 처했을 때 도래했다. 피예르가 농부의 모습이었다가 프랑스군의 포로까지 되는, 그렇게 가장 많이 추락한 지점에서 가장 높은 성찰을 얻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안드레이 또한 부상을 당해 꼼짝도 못하고 누웠을 때에 참된 구원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이것은 끝까지 자신을 내려놓지 못하는 로스토프의 미래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렇기에 톨스토이는 우리에게 부단한 떠남을 권유하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혼돈과 불안의 안개로 보이는 것은 알고보면 하나의 편을 정하고 거기에 편승하여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 자체에서 비롯된다면서 말이다. 결국은 자기애(自己愛)가 인식의 착란을 일으켜 무분별한 적대에 현혹되도록 하는 것이다. 운명의 순응이라는 형태의 겸허는 그것을 억누르고자 함이다. 처음 나폴레옹에 현혹되어 그를 찬미하기 바빴던 피예르가 점점 거기서 벗어나 기층 민중에 대한 애정을 가지게 되듯이 기실은 연대를 향한 몸짓이다. 톨스토이는 누누이 말한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것은 영웅이라는 개인이 아니라 민중이라는 전체라고. 


 이처럼 톨스토이는 분리가 아니라 통합을 추구한다. 이것은 안드레이피예르 그리고 로스토프에게도 나타난다. 나는 이 셋이 실은 톨스토이의 분신이 아닐까 싶다. 각 자 톨스토이 영혼의 어떤 한 부분을 나타내는 존재. 톨스토이의 전기를 쓴 영국 작가 앤드루 노먼 윌슨은 톨스토이가 내적 모순으로 가득찬 존재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면서 가장 격렬한 모순은 탕자와 성자 사이의 모순이라고 했다. 나는 세 사람이 그 모순을 반영한 존재로 보인다. 로스토프는 탕자, 안드레이는 성자 중 이지적인 부분 그리고 피예르는 성자 중 감성적인 부분을. 문득 피예르가 자신에게 지리를 가르쳤던 노교사의 말을 떠올렸을 때가 생각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중심에 신이 있고, 그래서 어느 물방울이나 되도록 신을 크게 투영하기 위해 퍼지려고 노력하는 거야. 그리고 커지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고, 표면에서 사라진 것은 깊숙이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오르지 봐. 이것이 카라타예프야, 흘러넘치다가 사라졌어, 알겠지, 얘야." (4권, p. 250)


 세 사람은 그런 물방울이다. 이 말처럼 처음엔 선명했던 세 사람의 분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경계가 점점 흐릿해진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통합은 물방울에 대한 말에 나타난 바대로 완전히 하나로 합치는 것이 아니다. 겸허에 기반한 그의 통합은 모으되 억지로 붙잡지 않는다. 강요가 아닌 자발적으로 형성된 하나, 중심과 주변이 따로 없이 모두가 다 그 자체로 중심인 하나인 것이다. 이건 다만 형상이다. 높은 하늘 위에서 내려다 보면 고층 빌딩도 논밭도 모두 평면에 지나지 않는 것과 똑같이. 신의 눈으로 바라 본 세상인 것이다. 궁극적으로 톨스토이는 우리가 그러한 신의 눈을 갖기를 바란다. 그럴 때 대립은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경쟁이 아니라 보다 더 온전한 하나로 나아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이 평화의 소중함을 각인시키고 실연이 사랑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둘로 나뉘지 않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물론 거기엔 겸허가 기본 태도로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 사랑은 그 겸허의 가장 대표적인 형태이다. '전쟁과 평화'는 1805년부터 1820년까지의 시간 속에 펼쳐지는 전쟁 이야기이자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타샤의 변화는 애정과 사랑이 어떻게 구분되는지 보여준다. 사랑은 나타샤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타인만을 생각할 때 비로소 발현된다. 톨스토이가 사랑을 가져 온 것은 그 때문이다. 타자에게 나를 내어주는 것. 공작 영애 마리야가 로스토프와의 결혼 후에 그에 대해 실망하는 것도 타자를 믿지 않는 태도 때문이 아니었던가. 사랑이 신의 눈을 갖게 한다. 온갖 적대에 휘둘리지 않고 현명하게 뚜벅뚜벅 걸어가게 한다. 나만의 불안을 보지 않고 타인과 시대의 불안부터 먼저 보게 만든다. 그러는 가운데 자신의 불안마저 잊고 진정한 대안을 찾아 나서게 한다. 그 때, 평화는 저절로 찾아온다. 순응과 겸허의 사랑은 그런 걸 가능하게 만든다.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서도 과연 정말 그렇게 될까 나조차도 얼른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말년의 톨스토이가 몸소 실천했던 걸 보노라면 그렇게 될 것도 같다. 아니, 그렇게 된다고 믿고 싶다. 이토록 혐오와 증오가 판을 치는 세상을 공존과 평화의 세상으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 아무리 작은 희망이라도 없는 것 보다는 나으니까. '전쟁과 평화'는 광막한 어둠 속에서 손으로 미로를 더듬는 우리들을 출구로 인도하는 둥둥 울리는 북소리이다. 들을 준비가 된 자는 듣게 되리라. 그러므로 '전쟁과 평화'는 결코 고릿적 얘기가 아니다. 나와 그들이 처한 상황이 다르지 않고 그들과 나의 고민이 차이나지 않기에 바로 오늘의 이야기다. 지금처럼 증오와 혐오의 화염이 분별과 상식을 집어 삼키고 있는 매캐한 대기 속에서 숨막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은 귀를 기울여야 할. '걸작에 관하여'를 쓴 샤를 단치는 걸작은 절대 엄청나게 많은 수의 사람이 읽는 책이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수의 사람이 한 번은 들어봄 직한 책이라고 한다. 그러나 '전쟁과 평화'만은 듣지만 말고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북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려 이 대기를 뒤흔들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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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이름은
조남주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예전에 인기 있었던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주인공 삼순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심장이 딱딱해졌으면 좋겠어.'


 삶엔 정말 그런 바람이 생겨나는 순간들이 참 많다. 하도 많이 넘어지고 상처받는 게 우리네 삶이라 그런가 보다. '82년생 김지영'을 쓴 조남주 작가의 또 다른 책, '그녀 이름은'은 그러한 신신한 삶들을 엽편의 길이로 줄줄이 엮어낸 소설집이다. 그야말로 특별하지도 별나지 않는 여성들의 삶이 더 많이 드러나고 기록되면 좋겠다는 작가의 바람이 충실하게 반영된 책인 것이다. 가장 앞부분에 있는 소진의 삶부터 가장 마지막에 있는 초등학생 최은서의 삶까지, 여기에는 여성이라는 공통점만 있을 뿐, 연령도 직업도 처지도 다른 이들의 삶이 스펙트럼처럼 죽 나열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집을 '오늘의 한국을 살아가는 여성의 삶을 보여주는 전시회'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모든 여성들이 심장이 딱딱해져버렸으면 하는 상황을 만난다. 소진은 직속 상사에게서 성추행을 당하고 계약서 한 장 없이 업무 내용도 시간도 페이도 아무 것도 모른 채 일을 시작하여 퇴근도 제대로 못하고 회사에서 칼잠을 자야할만큼 온갖 궂은 일은 도맡아 하는 막내 방송 작가도 있다. 어릴 때 엄마에게 버림 받은 기억 때문에 갑작스런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만남조차 허락받지 못한 딸이 있는가 하면 양승태 대법원장이 재판 거래하여 대법원에서 어이없는 판결이 나는 바람에 갑자기 날아온 배상금 상환 명령 때문에 어마어마한 액수를 감당할 수 없어 자살한 동료를 보아야 하는 전 KTX 여승무원도 있다. 이처럼 소설엔 성별로 차별받는 이만 나오지 않는 것이다. 흙수저라서, 사회적 약자라서 차별을 당해야 했던 삶도 허다한 것이다.


 아마도 작가는 그들의 목소리를 소설집에 모아 독자에게 들려주려 했던 것 같다. 특별하지 않다는 이유로, 별 거 아니라는 이유로,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평범한 삶이라는 이유로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없었고 용기를 내어 말해도 잘 귀를 기울여 주지 않았던 목소리들을. 기껏 반응을 받아도 그저  '너만 왜 그래?' 혹은 '괜히 과민 반응 하는 거 아니야?' 또는 '거 참 예민하게 구네.' 같은 것만 있었던 목소리들을. 그런 목소리를 채집하여 되도록 온전히 복원, 이 소설집에서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의 삶은 당신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다. 분명 어느 순간 당신의 발길이 머물고 한참을 응시하게 되는 삶의 초상화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땐 그랬지' 하면서 잊혀졌던 추억을 소환하거나, 그 때 참 아팠던 당신을 위로하는 느낌도 받게 되리라. 그리고 대답하리라. 당신의 눈길이 머문 초상화의 그녀 이름은 바로 자신의 이름이었다고.


 '82년생 김지영'이 그랬듯, '그녀 이름은'도 발굴에 중점을 둔다. 몰라서 내버려두기도 했고 알긴 하지만 누구나 다 겪는 흔한 것이기에 시류에 편승하여 바로 잡을 생각도 없이 무심히 흘려 보냈던 것들을 다시금 찬찬히 들여다 보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당신을 단순한 감상자를 넘어 고고학자로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당신의 삶일 수도 있고 혹은 부모나 자식의 삶일 수도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이웃의 삶일 수도 있는 것들을 보며, 아무렇지 행한 말과 일 속에 상처 입히는 가시는 없었는지,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남들도 다 이러고 사는 거라고 합리화 하면서 더 많은 상처들을 더 심하게 곪게 만들진 않았는지 따져보게 되니까 말이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은 복수하려는 유지태에게 그에게 상처를 준 것은 고의가 아니었고 아주 사소한 잘못에 불과했다고 항변한다. 그런 최민식에게 유지태는 이렇게 답한다.

 '모래든 자갈이든 가라앉는 건 똑같아.'


 사소하다는 것, 별거 아니라는 것은 그저 상처를 준 자에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당하는 입장에선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온갖 갑질들, 비리들은 늘 이런 변명을 해댄다. 한 집의 귀한 자식을 무릎 꿇리고 억 대의 돈을 특별 활동비로 많아 사적인 일에 마음껏 유용하면서도 그리 큰 잘못은 아니지 않느냐, 관례였다는 변명으로 일관한다. 알고 보면 우리 사회의 적폐들은 거악에 의해 쌓인 게 아니라 이러한 사소한 범행들의 누적이다. 그 사람의 신분에 비해 저지른 잘못이 별 거 아니라는 이유로 재판부가 쉽게 눈 감아 준 덕분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우리 사회는 사소하고 별 거 아닌 것도 사람을 가린다고 봐야 한다. 돈 많고 위세 등등한 이들에겐 일반인이 저지르면 엄청난 죄도 별 거 아니게 되고, 뒷배도 없고 돈도 없는 일반인은 아주 별 거 아닌 잘못도 크게 처벌 받으니까 말이다. 오늘도 편의점에서 겨우 담배 두 갑 훔쳤고 그걸 돌려줬는데도 판사가 징역 1년을 선고하고 구속시켰다는 보도가 있었다. 같은 날 법원은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은 수백 억에 달하는 세금을 탈루했음에도 피의자의 방어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로 구속 영장을 기각했다. 담배 두 갑에는 보장되는 않는 피의자의 방어권이 어찌하여 수백 억 탈루에는 보장되는 것인지. 대기업 회장 쯤 되면 그 정돈 별 거 아닌 잘못이라 그런 건가? 사소한 잘못도 별 거 아니라고 해서 자꾸 눈 감게 되면 이처럼 사소한 잘못의 범위가 점점 늘어난다. 이재용 재판처럼 우리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수준으로 말이다. 사소하다고 해서 방치하면 안 되는 이유다.


 '그녀 이름은'은 그런 사소함의 중요성을 차분히 되새기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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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평전 - 문익환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판 문익환 평전
김형수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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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문익환이라는 이름은 낯익은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의 삶에 대해선 그만큼 친숙하지 못하다. 아는 건 이름과 목사라는 그의 직업 그리고 단편적으로 접했던 그가 했던 일 정도. 가장 큰 기억은 역시 단신으로 북으로 가 김일성을 만난 일이다. 때는 1989년. 87년의 6월 항쟁으로 6.29 선언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국가보안법의 서슬이 퍼렀던 시절이다. 국가의 허락 없이 북으로 넘어간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그를 감행하게 만든 것일까? 그 일을 들으면서 난 그게 가장 먼저 궁금했다. 그의 발길을 이끈 것. 마치 자력처럼 거기로 가야만 한다고 끌어 당긴 것이 과연 무엇인지 궁금했다. 얼마 전 싱가포르에서 북미회담이 성공적으로 열리고 이제 평화 시대로 가는 길목에 서 있으니 더욱 궁금해진다. 마침 올해가 고 문익환 목사가 태어난지 100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 그 100년에 남북관계에 이토록 커다란 성과가 주어졌으니 어쩌면 지금은 하늘에 있는 그의 가호가 함께 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시인 김형수가 쓴 '문익환 평전'이 특별판의 모습으로 새로이 나왔다. 맞다. 첫 출간이 아니다. 14년 전에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바 있다. 나는 그 때 만나지 못했다가 특별판으로 비로소 만났다. 이제야 그 궁금증을 풀어 볼 기회를 간신히 가지게 된 셈이다.




 읽어 보니 평전이라는 게 참 무서운 것이더라. 어쩌면 이 책에만 해당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토록 한 사람이 걸어 온 삶의 길을 낱낱이 파헤치다니! 마치 그가 돌길을 걸었다면 그가 밟은 돌 하나하나를 전부 뒤집어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만큼 문익환 목사의 삶이 온전히 그리고 생생하게 복원되어 있다. 그의 삶의 결을 세부에 이르기까지 알고 싶은 이에겐 정말 좋은 선물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은 전기가 아니고 평전이다. 대상이 되는 인물에 대한 저자의 평가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어보니 그냥 전기를 쓰는 것보다 평전을 쓰는 게 더 어려운 것 같다. 전기는 있는 사실을 잘 정리해 쓰면 되지만 평전은 저자의 평가까지 들어가니까 말이다. 그런데 너무 주관적으로 쓰면 독자의 공감을 얻기 힘들다. 좋은 전기란 언제나 독자에게 공감을 이끌어내고 감동까지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공감과 감동은 특히나 저자의 평가의 경우 독자들이 따져봐도 객관적으로 올바를 때, 적어도 납득될 때 가능하다. 결코 자기 기분이나 주관에 좌우되어선 안되며 사실을 바탕으로 냉철하게 분석하면서 독자들이 미처 헤아리지 못한 깊은 뜻마저 설득력있게 짚어줄 수 있어야 한다. '문익환 평전'은, 감히 말하건대, 그렇게 한다. 그런 책이다. 김형수는 문익환 목사의 일대기를 일화나 업적 소개에 그치지 않는다. 문익환 목사가 삶을 걸으며 어떤 선택을 할 때, 단순히 한 개인의 삶 차원에서 그것을 평가하는 것도 아니다. 문익환 목사의 선택을 김형수는 언제나 사회나 민족 그리고 시대 전체의 맥락 안에다 두고 의미를 살피고 가치를 평가한다. 그러므로 여기엔 문익환 목사의 삶만 있지 않다. 그와 함께 연동하면서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사회와 민족, 시대의 초상까지 같이 어우러져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공감하고 문익환 목사의 삶에 감명 받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개인의 삶은 개인의 삶으로 그치지 않는다. 수면 위에 생겨난 작은 동심원도 스쳐가는 바람을 만나 수면 전체를 변화시키는 파문이 될 수 있듯이 아무리 작은 개인의 삶도 결국엔 전체의 삶과 결부되어 상호 영향을 주고 받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그런 개인의 삶에 의해 역사 전체가 새로운 물줄기로 흐르는 것도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이 보아왔는가? 김형수의 '문익환 평전'은 단순히 문익환 목사의 삶을 잘 알려준다는 것을 넘어 개인과 시대가 어떻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지 잘 알려주는 책이기도 하다. 시대가 없이 개인이 있을 수 없듯이, 시대 역시 개인이 없으면 있을 수 없는 것이란 걸 말이다. 어쩌면 바로 그것이 문익환 목사의 삶을 방관자에서 참여자로, 상아탑에서 민중이 고통 받는 현장으로, 기독교라는 종교의 세계에서 세속의 세계로, 지켜보는 자에서 막중한 책임을 스스로 떠맡는 자로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 이 책은 그런 것을 보여준다. 변하기 전 그도 한낱 필부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런 필부가 시대의 거인이 된 것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실수와 후회에서 배우고 과오를 올바른 각성 속에서 반복하지 않으며 앞으로 나서고 기꺼이 넘어질 수 있는 용기를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것이 바로 뒤늦게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여 스스로 늦봄이라 자신을 칭했던 문익환 목사의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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