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1~4 세트 - 전4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레프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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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고전이라도 등장인물들과 사는 형편이 너무 다르다 보면 이야기에 몰입이 잘 안 되기 마련이다. 레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도 그 중 하나가 아닐까? 신자유주의가 피워 놓은 매운 연기가 아직 채 가시지 않고 소득 불평등에 더하여 자산 불평등까지 극심해진 요즘 같은 세상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꾸만 불안해져가는 현재의 생활과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한 잔의 커피조차 여유롭게 마시기 어려운데, '전쟁과 평화'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하나같이 대저택에다 많은 토지를 소유한, 당장은 먹고 살 걱정이 없는 귀족 계급이니까 말이다. 그들이 아무리 아프고 힘들다 해도 그들이 가진 재산과 여유를 떠올리게 되면 얼른 '다 배 부르고 등 따뜻하니까 저러는 거다'하는 생각부터 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귀족이라는 것을 벗기고 보면 사실 그리 딴 얘기로 여겨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전쟁 상황이라는 게 그렇다. 그것은 오늘의 상황과 비슷하다. 물론 이제 막 시작된 남북 평화시대에 찬물이나 끼얹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것처럼 나라 사이의 전쟁을 뜻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넘쳐나고 있는 증오 또는 혐오를 두고 하는 말이다. 신문을 보면 날마다 증오 범죄가 늘어난다. 혐오도 다반사로 쏟아낸다. 정치와 성별, 직업과 세대, 빈부를 비롯해 이제는 제주도의 예멘 난민 문제에 대한 인터넷 댓글에서 보듯 국적까지, 여기저기서 편을 가르고 상대를 경멸하는 온갖 명칭을 새롭게 만들어가며 적대시 하기 바쁘다. 형편이 이러하니 어떻게 전쟁으로 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전쟁과 평화'에서 러시아 공작을 위해 일했던 프랑스인 요리사를 오직 프랑스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잡아서 스파이란 누명을 씌워 처형했던 러시아 사람이나 일단 러시아의 도시에 입성하면 사정 봐주지 않고 무조건 약탈부터 감행했던 프랑스인과 하등 다를 것이 없는데.


 그렇기에 우리는 '전쟁과 평화'의 주연이라 할 만한 안드레이와 피예르에게 공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 역시 지금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적대가 강요되는 상황 속에서 어느 것이 거짓이고 또 어느 것이 진실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는 가운데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늘 쓰러지고 넘어지며 방황한다. 러시아와 프랑스 사이에서, 자유 의지와 운명 사이에서, 영웅과 순응하는 필부 사이에서, 황제와 민중 사이에서, 사랑과 배신 사이에서 그리고 전쟁과 평화 사이에서. 나폴레옹과 쿠푸조트가 보여주는 선명한 대립처럼,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 속에 이분법적인 구도를 많이 만든다. 이토록 대립각이 분명하게 세워져 있지만 그 사이에서 헤매는 이들의 눈엔 그 모든 것이 온통 짙은 안개에 가리워진 것으로만 보인다.




 그들은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여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찾고자 갈망한다. 그 확보가 그들에겐 깨달음이다. 그러나 그러한 각성은 이제야 비로소 손에 쥔 것 같았으나 다시 또 어느새 손가락 틈 사이로 다 빠져 나가버리는 모래알에 다름 아니다. 오늘 찾은 해답이 내일이 되면 오답으로 변해버린다. 안드레이를 보자. 그는 1권의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자신이 헌신했던 국가가 한낱 허망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보다 고귀한 가치를 쫓아 거기에 걸맞는 진보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요 의무라고 생각했지만 자신과 약혼한 나타샤가 아나톨과 눈이 맞아 자기를 배신하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배신감과 복수심에 사로잡혀 원대한 이상을 쉽게 포기해 버린다. 피예르는 또 어떠한가? 그 또한 예기치 않게 베주호프 백작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어 비로소 자신의 이상을 구현할 기회를 얻었지만 아내 옐렌이 돌로호프와 바람을 피우자 비탄과 허무의 늪 속에 빠져 모든 이상과 희망을 내려놓는다. 이처럼 각성은 곧 쓸모 없는 것으로 밝혀지고 삶은 점점 더 빠져나갈 수 없는 미로가 된다. 마치 톨스토이가 작정하고 그들에게 정주(定住)의 희망을 포기시키는 것도 같다. 


 어쩌면 이러한 지속적인 추방이 톨스토이의 진의(眞意)는 아닌 걸까? 세상은 사실 나와 너를 쉽게 구분할 수 없는 안개요 미로라는 것. 전선(戰線)의 가시 철조망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내려다보면서 하는 생각들이 잘 보여주듯이, 선별(選別)은 나를 높이고자 하는 욕망의 소산이다. 세상을 오로지 자기 목소리로 채우고자 하는 마음. 그러나 거대한 세상은 그에게 너도 한낱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그저 세상을 움직이는 수많은 톱니바퀴 중 하나일 뿐이라고. 겸허하라는 뜻이다. 쿠푸조트가 자신의 뜻을 주장하기 보다는 운명에 조용히 순응한 것처럼. 나폴레옹은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싸웠지만 쿠푸조트는 세상의 움직임을 살피고 그에 따라 모스크바를 내어주기까지 하면서 물러났다. 도시에 들어간 프랑스군이 자행한 약탈은 사실 나폴레옹 싸움의 본질이다. 남의 것을 취하여 자신을 높이는 극단의 행태이니까. 그 약탈에 쿠푸조트는 포기로 맞섰고 결국 승리했다. 안드레이와 피예르 그리고 그들이 함께 사랑했던 나타샤의 구원도 바로 거기서 찾아왔다. 내어놓는 것, 물러서는 것, 조용히 순응하는 것.


 무엇보다 나타샤의 변화가 그러하다. 가장 밝은 삶의 색채로 가득했던 그녀는 그 밝기가 절정에 이른 순간, 그러니까 세상을 자기 뜻대로 다 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순간에 어리석은 현혹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망치고 말았다. 그 때의 그녀는 피예르의 아내, 옐렌이었고 또 다른 나폴레옹이었다. 그 실패가 그녀를 변화시켰고 부상당한 안드레이의 간호를 통해 구원을 얻게 되었다. 톨스토이는 그 때의 나타샤를 조도를 아주 많이 낮춘 공간에다 담는다. 움직임도 많이 줄인다. 어둠과 수동성의 장막을 겹겹이 휘두른 쿠푸조트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진정한 사랑과 구원은 나타샤가 가장 어둡고 가장 낮은 자리에 처했을 때 도래했다. 피예르가 농부의 모습이었다가 프랑스군의 포로까지 되는, 그렇게 가장 많이 추락한 지점에서 가장 높은 성찰을 얻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안드레이 또한 부상을 당해 꼼짝도 못하고 누웠을 때에 참된 구원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이것은 끝까지 자신을 내려놓지 못하는 로스토프의 미래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렇기에 톨스토이는 우리에게 부단한 떠남을 권유하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혼돈과 불안의 안개로 보이는 것은 알고보면 하나의 편을 정하고 거기에 편승하여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 자체에서 비롯된다면서 말이다. 결국은 자기애(自己愛)가 인식의 착란을 일으켜 무분별한 적대에 현혹되도록 하는 것이다. 운명의 순응이라는 형태의 겸허는 그것을 억누르고자 함이다. 처음 나폴레옹에 현혹되어 그를 찬미하기 바빴던 피예르가 점점 거기서 벗어나 기층 민중에 대한 애정을 가지게 되듯이 기실은 연대를 향한 몸짓이다. 톨스토이는 누누이 말한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것은 영웅이라는 개인이 아니라 민중이라는 전체라고. 


 이처럼 톨스토이는 분리가 아니라 통합을 추구한다. 이것은 안드레이피예르 그리고 로스토프에게도 나타난다. 나는 이 셋이 실은 톨스토이의 분신이 아닐까 싶다. 각 자 톨스토이 영혼의 어떤 한 부분을 나타내는 존재. 톨스토이의 전기를 쓴 영국 작가 앤드루 노먼 윌슨은 톨스토이가 내적 모순으로 가득찬 존재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면서 가장 격렬한 모순은 탕자와 성자 사이의 모순이라고 했다. 나는 세 사람이 그 모순을 반영한 존재로 보인다. 로스토프는 탕자, 안드레이는 성자 중 이지적인 부분 그리고 피예르는 성자 중 감성적인 부분을. 문득 피예르가 자신에게 지리를 가르쳤던 노교사의 말을 떠올렸을 때가 생각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중심에 신이 있고, 그래서 어느 물방울이나 되도록 신을 크게 투영하기 위해 퍼지려고 노력하는 거야. 그리고 커지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고, 표면에서 사라진 것은 깊숙이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오르지 봐. 이것이 카라타예프야, 흘러넘치다가 사라졌어, 알겠지, 얘야." (4권, p. 250)


 세 사람은 그런 물방울이다. 이 말처럼 처음엔 선명했던 세 사람의 분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경계가 점점 흐릿해진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통합은 물방울에 대한 말에 나타난 바대로 완전히 하나로 합치는 것이 아니다. 겸허에 기반한 그의 통합은 모으되 억지로 붙잡지 않는다. 강요가 아닌 자발적으로 형성된 하나, 중심과 주변이 따로 없이 모두가 다 그 자체로 중심인 하나인 것이다. 이건 다만 형상이다. 높은 하늘 위에서 내려다 보면 고층 빌딩도 논밭도 모두 평면에 지나지 않는 것과 똑같이. 신의 눈으로 바라 본 세상인 것이다. 궁극적으로 톨스토이는 우리가 그러한 신의 눈을 갖기를 바란다. 그럴 때 대립은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경쟁이 아니라 보다 더 온전한 하나로 나아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이 평화의 소중함을 각인시키고 실연이 사랑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둘로 나뉘지 않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물론 거기엔 겸허가 기본 태도로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 사랑은 그 겸허의 가장 대표적인 형태이다. '전쟁과 평화'는 1805년부터 1820년까지의 시간 속에 펼쳐지는 전쟁 이야기이자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타샤의 변화는 애정과 사랑이 어떻게 구분되는지 보여준다. 사랑은 나타샤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타인만을 생각할 때 비로소 발현된다. 톨스토이가 사랑을 가져 온 것은 그 때문이다. 타자에게 나를 내어주는 것. 공작 영애 마리야가 로스토프와의 결혼 후에 그에 대해 실망하는 것도 타자를 믿지 않는 태도 때문이 아니었던가. 사랑이 신의 눈을 갖게 한다. 온갖 적대에 휘둘리지 않고 현명하게 뚜벅뚜벅 걸어가게 한다. 나만의 불안을 보지 않고 타인과 시대의 불안부터 먼저 보게 만든다. 그러는 가운데 자신의 불안마저 잊고 진정한 대안을 찾아 나서게 한다. 그 때, 평화는 저절로 찾아온다. 순응과 겸허의 사랑은 그런 걸 가능하게 만든다.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서도 과연 정말 그렇게 될까 나조차도 얼른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말년의 톨스토이가 몸소 실천했던 걸 보노라면 그렇게 될 것도 같다. 아니, 그렇게 된다고 믿고 싶다. 이토록 혐오와 증오가 판을 치는 세상을 공존과 평화의 세상으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 아무리 작은 희망이라도 없는 것 보다는 나으니까. '전쟁과 평화'는 광막한 어둠 속에서 손으로 미로를 더듬는 우리들을 출구로 인도하는 둥둥 울리는 북소리이다. 들을 준비가 된 자는 듣게 되리라. 그러므로 '전쟁과 평화'는 결코 고릿적 얘기가 아니다. 나와 그들이 처한 상황이 다르지 않고 그들과 나의 고민이 차이나지 않기에 바로 오늘의 이야기다. 지금처럼 증오와 혐오의 화염이 분별과 상식을 집어 삼키고 있는 매캐한 대기 속에서 숨막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은 귀를 기울여야 할. '걸작에 관하여'를 쓴 샤를 단치는 걸작은 절대 엄청나게 많은 수의 사람이 읽는 책이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수의 사람이 한 번은 들어봄 직한 책이라고 한다. 그러나 '전쟁과 평화'만은 듣지만 말고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북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려 이 대기를 뒤흔들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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