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소식 패트릭 멜로즈 소설 5부작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 지음, 공진호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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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트릭 멜로즈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이 나왔다. 제목은 '나쁜 소식'.

 소설이 시작되면 주인공 패트릭이 뉴욕에서 조지란 사람에게서 온 전화를 받는다. 그의 아버지 데이비드가 호텔에서 갑자기 죽었다는 것이다. 액면 그대로라면 이것이 나쁜 소식일 것이다. 그러나 전작 '괜찮아'에서 나왔던대로 다섯 살 때 처음 아버지에게 강간을 당한 뒤로 22살이 되는 지금까지 아버지와 단 둘이 있으면서 10분 이상 항문을 침범당하거나, 매 맞거나, 모욕당하지 않고 있어본 적이 없는 패트릭에게 과연 나쁜 소식인 걸까? 사실 그 소식을 듣고 난 뒤의 패트릭의 반응은 이러했다.


 그게 나쁜 소식이라고? 정신이라면, 거리에 나가 춤추지 않을 정신, 너무 표 나게 웃지 않을 정신이 필요하겠지.(p. 15)


 어쨌든 그는 아버지 유해를 가져오기 위해 뉴욕으로 떠난다. 이 뉴욕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나쁜 소식'의 전부를 차지한다. 뉴욕에 도착한 비행기에서 영국으로 떠나는 공항에 이르기까지의 하룻 동안의 여정이다. '괜찮아'가 단 하루를 담았던 것과 똑같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들 수 있겠다. 그렇다면 '나쁜 소식'이란 제목은 틀린 게 아닌가? 패트릭의 반응을 보자면, '좋은 소식'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하고 말이다.




 합당한 의문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제목엔 '나쁜 소식'이 더 잘 어울린다. 그는 나쁜 소식을 받는다. 그것은 결코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이 아니다. 그 소식은 패트릭 외부에 관계된 것이 아니다. 내부에 관계된 것이다. 바로 아버지가 남긴 유산에서 자신이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것. 여전히 그가 남긴 것과 동행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패트릭에게 정말 나쁜 소식이다. 뉴욕에서 겪는 그의 여정은 배반의 경험이다. 오랜 세월 그토록 아버지의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는데, 여전히 거기에 속박되어 있다는 걸 절절하게 체득하니까 말이다. 어쩌면 소설 가득 펼쳐지는 마약 중독 이야기는 바로 그 절망에서 배태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앞서 '괜찮아'의 리뷰에서 '패트릭 멜로즈'는 사실 위악과 절망 그리고 고통 밖에 물려줄 게 없는 기성 세대의 사상과 가치관을 자기 존재의 근거로 삼지 않고 젊은 세대 스스로 살아가야 할 이유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했었다. 즉 섹스 피스톨즈가 자신의 데뷔 앨범에서 '거세된 숫소들은 신경쓰지 마!'라고 외쳤던 것과 마찬가지로 기성 세대의 모든 것을 'NEVER MIND' 해 버리고 자신만의 '레종 데트르'를 구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쁜 소식'에서 패트릭은 그런 구현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절감한다. 자신이 구닥다리라고 생각했던 아버지 세대의 문화와 질서가 예의의 형태로 아직도 자신에게 끈질기게 남아있으며 자신이 바라는 대로 행할 수 없다는 것을 늘 자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언급하는 기성 세대를 만날 때마다 자신을 옥죄고 있는 족쇄를 느낀다. 마음은 탈피를 갈망하지만 자신의 정체성 일부를 이루고 있는 아버지의 세계가 가진 중력은 그를 쉽사리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마약을 찾는다. '나쁜 소식'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접하는 것은 패트릭이 끊임없이 마약을 찾아 뉴욕의 거리를 헤매고 남의 집 화장실에서 그걸 흡입하는 장면이다. 그는 왜 그토록 마약을 찾아 다니는가? 단순히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게 바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아버지 세계에 대한 저항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마약, 그것은 죄악으로 가득한 기성 세대의 대표 존재인 데이비드가 엄격하게 금지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패트릭은 그렇게 마약을 통해 아버지가 구획해 놓은 것을 위반한다. 다시 말해 패트릭은 아버지가 말끔히 소거된 자신만의 '레종 데트르'를 구현하는 것이다. 여기서 표지를 한 번 바라본다. 드라마에 나오는 한 장면을 따온 표지엔 주연인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옷을 입은 채로 물이 차 있는 욕조에 들어가 있다. '나쁜 소식'에 나오는 장면이기도 하다. 왜 그는 옷을 입고 욕조에 들어가는 것일까? 이유는 '괜찮아'에 나온다. 아버지로 상징되는 기성 세대의 사고 방식과 교양에선 옷을 입고 욕저에 들어가는 것이 명백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다섯 살의 패트릭은 아버지에게 저항하기 위해 일부러 옷을 입은 채로 물을 받아 놓은 욕조로 들어간다. 이 행위 자체가 저항인 것이다. 표지는 바로 그것을 나타낸다. 옷을 입고 욕조에 들어가는 것과 마약을 찾고 흡입하는 것은 결코 다르지 않다. 둘 모두 넌더리가 나는 기성 세대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나쁜 소식'의 여정은 어떻게 보면 뭘 얘기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기승전결이라는 게 딱히 없는 산만한 이야기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전하고 싶은 주제에 따라 아주 세부에 이르기까지 아주 정교하게 설계된 구조물로 보인다. 하필이면 소설의 배경을 뉴욕으로 정한 것도 그렇다. 영국이 경직된 문화라면 뉴욕은 자유분방한 문화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패트릭의 숨통은 뉴욕에욕서 좀 더 트였어야 한다. 그러나 질식할 것만 같은 대기는 여전한데, 그건 뉴욕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미국 문화가 실은 역사적으로 영국 문화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영국 문화가 아버지라면, 미국 문화는 아들이라 할 수 있다. 뉴욕, 그 곳은 혼재의 장소다. 옛 것의 사고 방식과 관습으로 거머쥐려는 힘이 있는 반면 맹렬하게 이탈하고자 하는 힘이 있다. 그런 두 힘이 마구 충돌하는 곳. 그 곳이 바로 뉴욕이다. 패트릭이 처음 찾았던 장례식장이 보여줬던 모습 그대로. 패트릭은 안내자가 층을 잘못 말해줘서 3층에 있는 엉뚱한 사람의 장례식장으로 간다. 그것은 유쾌한 파티가 떠들석하게 벌어지고 있다. 너무나 장례식답지 않은 분위기라 패트릭은 얼떨떨해 한다. 잘못 찾아왔다는 것을 안 패트릭은 다시 안내자에게로 가 원래 자신이 가야했던 2층으로 간다. 거기는 어둡고 쥐죽은 듯이 고요하다. 3층과 완전히 정반대의 모습이다. 거기에 아버지 시신이 있었다. 파티장과 같은 3층과 묘지와 다를 바 없는 2층. 우리는 이것이 무의식과 자아를 층으로 나누었던 프로이트와 닮았다는 걸 인지한다. 2층은 무의식, 3층은 자아. 그러나 제아무리 다른 3층이라 해도 2층에게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무의식이 그러하듯이. 다시 말해 소설 속 장례식장은 하나의 신체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하게 패트릭의 신체와 동일하다. 뉴욕이라는 공간 역시, 패트릭 신체의 확장판인 것이다.


 물론 나는 잘 알고 있다. 이 소설이 작가, 에드워드 세인트 오번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것을. 그렇다고 해도 이 소설이 아주 정교한 세공품이라는 생각을 바꿀 마음은 없다. 오래만에 아주 많이 생각하고 이래저래 헤아려 보는 소설을 만난 것 같다. 적어도 소설만큼은 내게 전혀 '나쁜 소식'이 아니다. 다음 권인 '일말의 희망'을 간절히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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