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다시 벚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2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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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평안해도 번의 금고가 텅비고 가신들이 먹지 못하고 흉작으로 영민이 굶주리면 소용없지. 그런 `평안`은 몽매에 불과하오. (p.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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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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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에서 마음이 찔렸다. 리베카 솔닛이 결정적으로 이 책을 쓰도록 만들었던 에피소드를 언급했을 때는 화끈거렸다. 제목의 남자는 언젠가의 나였고, 에피소드의 남자도 언젠가의 나였다. 나는 공범이었다. 나 역시 자주 상담을 자처하며 다 아는 척을 했으며 때로는 내가 옳다고 강요까지 했던 것이다. 딴에는 상대방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했었지만 과연 동기가 그것만이 전부였나고 물으면 섣불리 자신하지 못한다. 솔직히 우월해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쉽게 옹졸로 치닫는 남자의 자존심과 아무 곳에나 손을 뻗치는 무분별한 정복욕이 '맨스플레인'의 엔진을 더욱 가열시켰을 것이다. 분명.



 이런 반성과 더불어 책을 읽었다. 저자인 리베카 솔닛과의 만남은 두 번째다. 이전에 '이 폐허를 응시하라'란 책으로 첫 만남을 가진 적이 있다. 그 책은 내게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의 진실을 보여주었다. 재난 현장을 세밀하게 스케치했던 그 책은 특히나 재난이 터졌을 때와 그 이후 사람들이 진실로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보게 함으로써 지금까지의 인간에 대한 생각 자체를 바꿔 버렸다.


 우리는 흔히 재난이 일어나면 카오스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저마다 자신의 안전을 획득하고 싶은 욕구로 질서는 무너지고 아비규환이 펼쳐지리라 쉽게 여긴다.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그것을 강화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진실은 아니었다. 결코 그렇지 않았다. 리베카 솔닛은 전혀 다른 진실을 보여주었다. 재난이 터졌을 때나 그 이후에도 사람들은 무질서 하지 않았다. 아비규환을 초래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욱 질서를 지켰으며 평상시 보다 더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세월호 참사가 터졌을 때, 아이들이 침착하게 질서를 지키며 구조되기를 기다렸다고 보도로 들었을 때, 나는 리베카 솔닛의 책을 읽었기에 사실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동영상을 보았을 때 결국은 리베카 솔닛의 말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그렇게 위기의 순간 오로지 자신만을 위하는 괴물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괴물로만 생각할까? 그만큼 타인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볼까? 거기에 바로 권력의 힘이 작용했다. 권력은 언제나 다수를 두려워한다. 서로 믿고 결집한 다수의 힘을.


 세월호 참사가 그러하듯 재난은 권력의 위기를 가져온다. 권력이 가장 약화된 그 시점에 다수가 하나된 힘으로 뭉치면 언제든 무너질 위험이 있다. 그래서 권력은 더욱 사람들 서로를 불신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다양한 미디어를 통한 상징 조작으로 위험에 처하면 자기만 살자고 내뺄 놈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우리는 그렇게 당했다. 그러나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커다란 위험이 닥치면 당신은 더 먼 곳을 보고 어떤 행동이 나와 모두를 구할 수 있는가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당신의 진실이다. 당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고 그저 약하고 이기적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권력이 주문한 결과일 뿐. 당신은 스스로를 오해하고 있다. 재난이 오히려 당신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조금은 어이없게 생각될 정도로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 대해 길게 썼다. 하지만 이유가 있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책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난 두 가지를 말했다. 하나는 우리가 스스로의 진실된 모습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권력이 주입한 것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불안을 낳는 재난이 오히려 우리에게 진실과 더 나은 자신을 위한 기회를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바로 이 두 가지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도 이어지는 것이다.


 이 책은 하나의 동기에서 나왔다. 저자가 언젠가 참여한 파티에서 주최한 남자가 저자가 쓴 책인지도 모르고 그 책에 관하여 저자에게 주절주절 떠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거기에 대해 제대로 반박하지도 못하고 듣기만 했다. 남자가 알량한 자신의 권위를 자꾸만 드높여갈 때, 그녀는 침묵했다. 왜 그랬던 것일까? 그 이유를 생각하다 진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 남자처럼 남자들이 자꾸만 가르치려 드는 이유가 여성 스스로 자신을 왜소하다고 여기게 만들어 남성들의 지배를 강고히 만들려는 것임을.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어느 분야에서나 종종 괴로움을 겪는다. 용감하게 나서서 말하기를 주저하고, 용감하게 나서서 말하더라도 경청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길거리 성희롱과 마찬가지로 젊은 여자들에게 이 세상은 당신들의 것이 아님을 넌지시 암시함으로써 여자들을 침묵으로 몰아넣는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자기불신과 자기절제를 익히게 되는 데 비해 남자들은 근거 없는 과잉 확신을 키운다. (p. 15)


 바로 여기에 '이 폐허를 응시하라'의 첫 번째 주제가 들어가 있다. 권력이 사람들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오해하게 만들었듯이 여성들 스스로 자신의 능력과 가치에 대해 잘못된 평가를 하고 있는데 그건 진실이 아니라 남성 권력이 조장한 결과인 것이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이러한 남성 권력이 덧씌운 편견의 껍질을 깨어 여성들에게 더이상 주눅들 필요도, 참을 필요도 없다고 말하는 책이다.



 애석한 일이지만 요즘은 페미니즘의 주가가 많이 떨어졌다. 이제는 옛날과 다르게 오히려 여성상위시대 아니냐고 하는 사람도 있고 그동안의 투사적 모습에 질렸음인지 공공연히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는 사람들도 많이 보게 된다. 언젠가 한 개그 프로그램엔 오히려 남성의 권익을 보장하라고 외치는 코너도 있었다만 과연 정말로 많이 달라진 것일까?


 리베카 솔닛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다. 남성들의 폭력과 성희롱에 노출된 불안한 여성의 위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바뀐 것이 없다. 미국만 해도 6.2분마다 한번씩 경찰에 신고되는 강간이 벌어지고 여성 다섯명중 한명은 살면서 강간을 당한다. 매년 8,7000건이 넘는 강간이 벌어진다. 거기다 구타는 9초마다 당한다.(리베카 솔닛이 강조한 대로 9분이 아니라 9초다.) 배우자에 의한 부상은 미국 여성의 부상 원인 중 첫번째다. 미국 임산부의 사망 원인 중 수위에 꼽히는 것 역시 배우자 폭행이라고 한다. 9.11 이후부터 2012년까지 가정 폭력으로 사망한 여성의 수는 11,766명이라고 한다. 이 수치를 두고 과연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리베카 솔닛은 말한다.


 폭력에는 인종도 계급도 종교도 국적도 없다. 그러나 젠더는 있다.(p. 37)


 마치 이 말을 입증하듯 우리가 '재스민 혁명' 또는 '아랍의 봄'이라 불렀던 민주화의 열기가 드높았던 그 때조차 남성 시위자들은 여성 시위자들에 대해 100건이 넘는 집단성폭행, 성추행, 성희롱을 벌였다. 그러고 보니 나도 처음 폭력이란 걸 휘둘렀을 때가 생각난다. 대학 다닐 때였는데 무슨 모임 세미나 뒤풀이였는데 맞은 편에 앉은 남자 선배 하나가 술에 취한 것을 빙자에 후배 여학우를 자꾸만 노골적으로 더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여학우는 싫은데도 선배라 뭐라 대거리를 못하고 있었는데 보다 못한 내가 그만두라고 소리치면서 막걸리 잔을 머리에 던져버렸다. 물론 술자리가 아수라장이 된 건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나는 선배들에게 불려가서 정말 엄청 혼났는데 그 때도 오직 내 하극상이 오르내렸을뿐, 성추행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남자들의 세계가 이렇다. 설령 민주주의를 떠들어도 말이다. 이런 사실은 최영미 작가가 자신의 운동권 시절을 회상한 자전적 소설인 '청동정원'만 읽어봐도 다 나온다. 말하자면, 우리에겐 역사가 거듭되어도 언제나 변하지 않고 있는 전장이 하나 있다는 거다. 바로 여자와 남자의 전쟁이다. 그런 이유로 리베카 솔닛은 2장의 제목을 '가장 긴 전쟁'으로 붙였다. 그런데도 페미니즘이 유통기한이 다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바로 얼마전에도 우리나라 여군을 아가씨라 비하한 국회의원이 있었고 상관이 성적인 수작을 걸면 가만히 있으라는 공식적인 여군 매뉴얼이 존재하며 부하 직원인 것을 악용하여 잠자리까지 끌여들었는 데도 성추행이 아니라고 법원이 판단하는 지경인데.


 리베카 솔닛의 말대로 여성의 진정한 해방이란 밤길을 안심하고 다닐 수 있을 때일 것이다. 그 때까지는 여성은 계속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리베카 솔닛은 여성들에게 주눅들지도,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하지도 말라고 주문하는 것이다. 말해야 할 이 때에, 더 많은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맨스플레인'에도 투영되어 있듯이 남성 권력의 속성은 분리하는데 있다. 여성과 남성을 나누고 부국과 빈국을 나누며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나눈다. 바로 자신들을 중심으로 하여 질서를 편성하기 위해서다. 남성 권력이 원하는 세계란 서열이 확고한 코스모스다. 그들은 태양이고 나머지는 그저 자신을 맴도는 별이 되길 원한다. 홀로 빛나기 위해서 나머지는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아래의 존재들에게 끊임없이 열등하다고 세뇌시킨다. 그들은 그것을 정상이라고 부르며 그것을 위반하는 존재들은 비정상이라는 굴레를 씌우다가 급기야는 19세기의 여성 작가들을 '다락방의 미친 여자'라 불렀듯이 광기로 몰아간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스스로 표현하는 여성이야말로 남성 권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라는 걸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를 위한다면 그들이 가장 무서워할 존재가 되어야 한다. 리베카 솔닛이 바라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여성이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거미줄처럼 짓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떤 여자들은 한번에 조금씩 삭제되고, 어떤 여자들은 단번에 몽땅 삭제된다. 어떤 여자들은 도로 나타난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모든 여자들은 지금도 그들을 사라지게 하려는 세력들과 싸우고 있는 셈이다. 여자의 이야기를 자기가 대신 말하려는 세력들과, 여자를 이야기와 족보와 인권헌장과 법률에 기록하지 않으려는 세력들과, 자신의 이야기를 단어로든 이미지로든 스스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은 그 자체로 이미 승리다. 그 자체로 이미 반란이다.(p. 112)


 하지만 이 이야기에선 배제가 있어서는 안된다. 여기서 우리는 페미니즘의 진정한 의미를 이제 생각해야 한다. '여성주의'란 의미에 대하여. 그것은 정말 어떤 의미인가? 단순하게 말하면 그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태도로 사유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말한다. 동일성과 타자라는 이분법에 침윤된 남성 권력의 방식이 아닌, 그렇게 선별과 배제가 아닌 방식을. 여성 해방을 일종의 권력 투쟁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페미니즘에 반하는 길일 것이다. 권력 투쟁은 지극히 남성 권력의 방식이므로.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같은 길 없는 곳에서 길 만들기이며, 광막한 미로를 더듬어 경로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여기엔 고정된 것이 하나도 없다. 모든 건 유동적이며 그래서 더욱 개별적이다. 하지만 그 어느 개별적인 것도 놓치지 않는 포용의 과정이다. 그것은 배제된 영향력을 아우르는 작업인데 그것을 두고 리베카 솔닛은 '할머니'라 부른다.


 누구나 그처럼 정규 교육에 앞선 사건들, 일상에 불현듯 등장한 사건들에서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그 배제된 영향력들을 나는 할머니들이라고 부른다.(P. 105)

 


 이 말은 다음과 같은 글에서 더 자세히 표현된다.

 

 사실 그 옛날에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여자가 거의 없었다. 여자가 어떤 이미지를 공개적으로 만들고, 세상을 보는 방식을 드러내고, 그럼으로서 생계를 꾸리고, 그로부터 오백년이 흐른 뒤에도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을 제작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페르난데스의 그림에서 주름과 그림자로 많은 것을 표현하고 있는 흰 천은 침대보다. 침대보는 집을, 침대를, 침대에서 벌어지는 일과 사후에 씻겨나가는 일을, 집 청소를, 여성의 노동을 말한다. 이런 것들이 바로 그림이 말하지만 그림에서 안 보이는 것들이다. 그림에 표현된 여자는 가려져 있지만, 그림으로 표현한 여자는 그렇지 않다.(p. 116)


 이런 식으로 드러내는 것. 그래서 리베카 솔닛을 특별히 거미줄이라 부른다. 아시다시피 거미줄엔 정형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정형한데다 언제나 과정 중에 있다. 그물을 짜되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 남성 권력이 하듯이 지향하는 목표 같은 것은 없다. 그저 매일 조금씩 더 많이 새롭게 창조해 나갈 뿐이다. 그것이 바로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는 방식이다.


 그물을 짜되 그물에 걸리지 않는 것. 세상을 창조하는 것. 자신의 운명을 다스리는 것, 아버지들만이 아니라 할머니들을 호명하는 것, 직선만이 아니라 그물을 그리는 것, 청소부만이 아니라 제작자가 되는 것, 침묵당하지 않고 노래하는 것, 베일을 걷고 모습을 드러내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내가 빨랫줄에 너는 현수막들이다.(p. 118)



 물론 이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리베카 솔닛은 구체적 사례를 하나 가져온다. 바로 가장 목소리를 내었다고 볼 수 있는 버지니아 울프다. 그는 울프의 다음과 같은 말을 하나의 지표로 삼으려 한다.

 

  미래는 어둡고, 나는 그것이 미래로서는 최선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p. 121)


 이 말에 따라 리베카 솔닛은 미래의 어둠을 어둠으로 두려고 한다. 섣불리 현재의 욕망을 미래에다 투사하지 않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아무 것도 규정할 수 없기에 희망이라 여긴다.


 무언가를 규정하기 힘든 밤이란 한편으로는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다. 사물들이 합쳐지고 변화하고 매료되고 흥분하고 충만해지고 사로잡히고 풀려나고 재생되는 시간이다.(p. 123)


 여기서 리베카 솔닛은 사고의 전환을 꾀한다. 앞서 '이 페허를 응시하라'에서 두 번째 지적했던 것과 같다. 재난이 오히려 자신과 인간의 진실된 모습을 보게 했듯이, 열려있는 어둠, 불확실하기에 불안할 뿐인 상황 자체가 오히려 여성에겐 희망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언가를 다 안다고 착각할 때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보다 사실 더 모르기 (p. 125)때문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낯선 골목에서 방황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그럴 때 그녀는 사회가 규정한 온갖 정체성에서 해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느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 아니 할 수 없는 자신을 느꼈다. 그녀는 모든 것이었고 모든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녀는 자기 내부의 다수성과 환원불가능성을 긍정하는 방식으로 글을 썼으며 그렇게 모든 것이 미스터리로 남길 원했다. 리베카 솔닛은 여기에 '할머니와 거미줄'을 지향하는 이야기하기의 구체적 방법이 있음을 본다. 다수성의 긍정은 배제된 영향력까지 아우르는 모든 할머니의 보존이면서 환원불가능성은 중심과 목적을 두지 않는 거미줄 짓기와 통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미스터리다. 미스터리는 결정적인 진실은 없다는 것을 함의한다. 미스터리란 문득 들어선 샛길과 같아서 원래 가고자 했던 곳과 전혀 다른 곳에 날 데려다 놓을 수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그런 식으로 자신과 독자마저 스스로에게 벗어날 수 있도록 했다. 모든 것이 미스터리가 되면 무엇이 남는가? 하나다. 진실은 이제 믿음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현대의 여성들의 카산드라의 운명을 따르고 있다. 진실된 예언을 말해도 신뢰를 못 받았던 카산드라처럼 아무리 사실을 말해도 우리나라 법원도 그러하듯 남성 권력은 믿어주지 않는 것이다. 여성이 성추행을 당하면 다짜고짜 네가 원인 제공을 하지 않았느냐는 말부터 떨어진다. 


 여자가 무언가 남자를 힐책하는 말을 하면 특히 그것이 기득권의 핵심에 놓인 남자에 대한 말이라면 사람들은 그 발언의 진실성을 의심할 뿐 아니라 그녀에게 그렇게 말할 능력이 있는가 심지어 권리가 있는가 의심하는 반응을 보인다.(p. 154)


 이런 일은 우리 주위에 비일비재하다. 뭔가 바른 소리를 하는 여성에게 남자들은 곧잘 '히스테리'라는 딱지를 붙인다. 남자들은 언제나 자신이 하는 말과 스스로의 인격을 구별해 주길 바라면서 여자들의 말은 언제나 인격과 결부지어 생각한다. 말은 들어오지 않고 감춘 저의만 캐내려 애쓴다. 흔히 쓰는 '여성어'라는 말 자체가 이미 비하인 것이다. 진실 따위는 상관없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여성만이라도 같은 여성의 말을 믿고 더 귀기울여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하자면 이것은 리베카 솔닛이 여전히 기나긴 전쟁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여성에게 보내는 연대의 요청이다. 여성들 중 누군가 목소리를 낼 때 그녀를 믿고 같이 목소리를 내자는 것이다. 2014년 5월에 일어난 남성 아일리비스타의 여성 학살 사건 뒤, 여성들이 트위터에 '여자들은 다 겪는다'란 태그로 그간 자신이 당했던 남성들로부터의 온갖 희롱과 폭력을 다 올렸던 것처럼.


 그 중 제니 추라는 여인은 이렇게 말했다.


 물론 모든 남자가 다 여성 혐오자나 강간범은 아니다. 그러나 요점은 그게 아니다. 요점은 모든 여자는 다 그런 남자를 두려워하면서 살아간다는 점이다.(p. 183)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전혀.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추행이나 폭력, 강간이 비일비재하고 여성들의 두려움이 존재하는 한, 양성평등은 아직 요원한 것이다. 그러니 여성을 경청할만한 존재로 만드는 페미니즘은 필요하고 여성들은 계속 목소리를 내야 한다. 지금 여성들이 그나마 권리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면 그건 모두 같은 여성이 합심하여 목소리를 내어 쟁취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어느 것도 남성 권력에게서 자발적으로 주어진 것이 없다. 여성들이 항의 전화를 하고 피켓을 들고 집회를 하는 등의 적극적인 행위로 빼앗아 온 것이다. 아직도 여성에겐 가져와야 할 것이 많다. 더구나 지금 남성 권력은 더욱 여성을 길들이려 하고 여성에게서 주체성을 앗아가려고 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아주 발버둥치는 느낌이다. 여성 혐오가 곳곳에서 자주 표출되는 것을 보노라면.


 이런 상황에서 리베카 솔닛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다. 자신의 능력과 힘을 믿고 연대하라는 것이다. 가야할 길이 천마일이 넘는 먼 길이라고 해도 '길은 원래부터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나아가며 만드는 것이다'라는 말도 있듯이 원하는 세상은 거미줄처럼 걷는 와중에 어느덧 도래할 것이라며. 설령 도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기억은 남을 것이며 그러면 또 누군가 그 기억을 이어갈 것이라며.


 그녀가 얼마나 더 가야 할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되돌아오지 않으리란 것은 안다. 그리고 그녀는 혼자 걷지 않는다. 수많은 남자, 여자들, 그보다 더 흥미로운 다양한 젠더의 사람들이 함께할 지 모른다. 여기 판도라가 손에 들었던 상자와 지니가 풀려난 호리병이 있다. 지금 그것들은 감옥과 관처럼 보인다. 이 전쟁에서 사람들은 죽을지언정, 생각들은 지워지지 않는다.(p. 227)


 (덧붙여, 인용한 그림은 모두 책에 인용된 그림으로 아나 떼레사 페르난데스의 그림이다.)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으므로, 자기 자신이든 자기 어머니든 다른 유명인이든 누군가의 삶에 대해서 혹은 어떤 사건이나 어떤 위기나 다른 문화에 대해서 진실하게 쓴다는 것은 드문드문 존재하는 어두운 부분과 역사의 밤들과 미지의 장소들을 거듭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어둠들은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는 본질적인 미스터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실은 정확한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누군가의 생각이나 감정을 정확히 알 수 있다고 보는 개념부터가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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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5-23 0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꼼하고 유익한 리뷰 감사합니다. 이 폐허를 응시하라,와 함께 찜해둡니다. 즐거운 토요일 보내세요, 헤르메스님

오드득 2015-06-01 07:25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말씀 감사합나^ ^ 이 페허를 응시하라도 제겐 정말 좋은 책이었는데 프레이야님 마음에도 드셨으면 좋겠네요. 벌써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어요. 이번 한 주도 잘 보내시길 바랄게요^ ^

아무개 2015-05-23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리뷰 감사합니다!

오드득 2015-06-01 07:26   좋아요 0 | URL
감동댓글, 감사합니다! 아무개님^ ^

다락방 2015-05-26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이 폐허를 응시하라]를 보관함에 넣게 되었네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오드득 2015-06-01 07:28   좋아요 0 | URL
웃! 다락방님, 말씀 감사합니다.^ ^ 이 폐허를 응시하라는 어떻게 읽으실지 정말 궁금해지네요^ ^
 
우리가 고아였을 때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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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다보니, 어쩐지 가즈오 이시구로의 최고 걸작이라고 평가 받고 있는 '남아있는 나날'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작품의 주된 사건들이 주로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그랬고 '우리가 고아였을 때'는 1958년이라는 시점에서 끝나는데 소설의 전체는 그 때의 회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남아있는 나날'은 1956년에서 시작하고 그 소설 역시 주인공 집사 스티븐스가 과거를 회상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이렇게 시점과 진행 방식이 비슷했다. 주인공의 성품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고아였을 때'의 주인공 크리스토퍼 뱅크스 역시 스티븐스과 마찬가지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한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그는 정의를 관철하기 위해 탐정이 되려하고 스티븐스는 '위대한 인간이 되는 열쇠는 위엄에 있다'라는 아버지 말씀에 따라 그 위엄을 지키기 위해 완벽하고도 충실한 집사가 되려 한다. 그만큼 그들의 세계는 단일했고 또한 그랬기에 평안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상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크리스토퍼 뱅크스는 10살 때, 상하이에서 살다가 부모님이 모두 알 수 없는 이유로 실종되는 바람에 떠나기 싫었던 그 곳을 떠나 영국으로 와야 했다. 스티븐스 또한 나중에 나치 동조자로 밝혀지는 주인인 달링턴 경이 유대인이란 이유로 하녀 캔턴을 쫓아냈을 때 옳지 않다는 건 알았지만 집사로서의 직분에 충실하느라 방조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결국 그것이 그들 모두에게 풀어야 할 숙제가 되는 것도 같다. 크리스토퍼 뱅크스는 부모님 실종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탐정이 되어 상하이로 떠나고 스티븐스는 캔턴을 찾기 위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행을 한다. 그리고 모두 떠난 그 곳에서 그들이 정말로 알아야 했던 진실을 비로소 찾게 된다. 이 진실들이 껍질처럼 단단했던 자기 세계가 여지없이 허물어진 경험을 통해서 온다는 것도 동일하다.




 '남아있는 나날'은 89년에 나왔다. 그것은 '대처리즘'으로 집약되는 힘있고 부유한 소수를 위하여 다수의 국민이 희생되었던(대처가 죽었을 때 영국 국민들은 죽음을 환영한다며 피켓을 들고 나오기도 했다. 대처에 대한 반감이 얼마나 컸는지 드러나는 대목이다.) 80년대의 영국을 엄격한 계급 구분이 진리라 믿는 집사라는 시대에 뒤떨어진 캐릭터를 통하여 우회해서 풍자하며 비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비슷한 궤적을 보여주는 '우리가 고아였을 때'는 무엇을 보려주려 함일까? 이 소설은 2000년에 나왔다. 그리고 이 소설은 37년의 난징대학살이라는 미증유의 비극을 낳았던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와 일본 제국주의가 치열하게 교전하던 중국을 담고 있다. 영국과 동떨어진 곳에서의, 그렇게 관망이 가능한 전쟁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90년대에 일어난 미국과 이라크 전쟁을 얼른 떠올릴 수 있다. 사실 이 소설의 한 장면은 아주 강하게 그 전쟁을 암시하기도 한다. 바로 225페이지에서 펼쳐지는 일본 군함의 포격 장면이다.


 군중의 왁자지껄한 소음 너머 어딘가 먼 곳에서 아득한 대포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는 것을 점점 알아차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방을 뒤흔드는 요란한 굉음으로 그레이슨의 말이 중단되었다. 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모두 손에 여전히 칵테일 잔을 든 채 미소를 짓거나 심지어 웃기까지 했다.(P. 255)


 지금 이 곳은 상하이고 크리스토퍼는 외국인 거주 지역에서 개최된 영국인들의 파티에 참석한 상태다. 바로 근처에 포탄이 떨어지고 있는데도 인용한 글에서처럼 파티에 참석한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창가로 날아가는 포탄을 쌍안경까지 가져와 마치 폭죽놀이를 구경하듯 웃고 떠들고 즐기고 있을 뿐이다. 주인공은 이런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 사실 그가 처음 본 전쟁이기도 하다. 그는 말한다. "저런 것이 전쟁이로군요. 아주 흥미로워요. 사상자도 꽤 많이 날 테지요?" 누군가가 무심히 말한다. "저쪽 차페이에는 사망자가 많을 겁니다. 하지만 일본군은 며칠 더 저렇게 볶아 댈 테고 그런 다음에는 다시 조용해지겠지요."(P. 228) 이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전에 크리스토퍼는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보복 살인을 뜻하는 '노란 뱀 살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영국 영사관 의전 담당인 맥도널드에게 도움을 구한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그런 것엔 신경쓰지 말라고 한다. "그건 모두 중국인 사이의 문제랍니다. 그냥 내버려두는 편이 최선이지요."(P. 224) 그들이 무심한 방관자가 되어 웃고 떠들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나랑 상관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안전이 보장되는 외국인 거주 구역에 머물 수 있으니까.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전쟁은 나만 죽지 않으면 꽤나 흥미로운 볼거리라고. 그들은 그런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 마음은 우리도 경험한 적이 있다. 그것이 바로 미국의 이라크 침공 장면이었다. 이 전쟁은 우리에게 어떻게 소개되었던가? 실제로 소설에서 묘사한 창가에서 보여지는 하늘로 곡선을 그리고 날아가는 포격 장면은 바로 그것을 강하게 연상시킨다. 그 전쟁은 무엇보다 우리에게 TV 화면으로 다가왔다. 수백개의 미국 크루즈 미사일이 이라크 본토로 쏟아지는 장면이 마치 스포츠 중계를 하듯 전 세계로 방영되었다. 옛 세대처럼 전쟁을 실시간으로 경험해보지 못했던 세대에게는 그것이 전쟁에 대한 첫 경험이었다. 우리는 모두 그것을 보며 전쟁이 가진 비참함 보다는 스펙타클한 면에 압도되었고 크리스토퍼와 똑같은 질문을 누군가에게 물었다. 그리고 크리스토퍼가 들었던 대답을 그 때 우리 역시 들었다. 그것은 전쟁의 의미를 변화시켰다. 더 이상 그것은 살육과 비극으로 점철된 시궁창이 아니었다. 그저 화려하고 말초신경을 잔뜩 흥분시키는 스펙타클일 뿐이었다. 그 속에서 사유는 정지되었고 전쟁은 소비되기만 했다. 그래서 우리는 크루즈 미사일 아래 희생당한 타인에 대한 생각은 없이 태연히 강 건너 불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고아였을 때'는 바로 그것을 가져오고 있다. '대처리즘'과 다를 바 없는 90년대를. 후쿠야마 프랜시스는 동구권의 몰락을 두고 헤겔이 말한 역사의 종언이 왔다고 떠들어 대었고 곳곳에서 이제 이념 따위는 내버리고 현실적인 욕망의 충족에나 충실하자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재잘거리고 있을 때 가즈오 이시구로는 '남아있는 나날'의 세계로 다시 한 번 걸어들어가 달라진 것은 전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말한다. 우리가 안전과 안락이 보장된 (소설에서는 '공동조계'라고 부르는) 외국인 거주 구역을 보편 세계라 여기고 머무르려 하거나 추구하는 한 결코 언제까지나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게 이 소설은 내가 속한 세계를 전부라 믿어 그 너머를 보려하지 않기에 타자가 겪는 아픔, 당하는 비극에 무심해 버린 우리 모두를 아프게 찌르고 있다. 실은 지금도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일이다. '세월호 참사'가 그렇다. 단식하는 유족들 앞에서 어묵을 먹고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라 부르는 이들을 보라. 그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은 소설 속 영국인들과 다르지 않다. 자신들은 절대로 그런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속한 세계의 경계선은 절대로 허물어지지 않고 비극은 오로지 경계선 밖에서만 일어난다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무너지지 않는 경계선 안에서 안전을 보장받고 있다는 확신이 그들을 파렴치할 정도로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가즈오 이시구로는 과연 그 경계선이 튼튼한가 반문한다. 소설에서 외국인 거주 구역은 다양한 공간으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대표적으로는 크리스토퍼가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 떠오르는 자신이 공부했던 집 안의 '도서실'이 그러하고, 그가 탐정으로 성공을 거두고 세실 경을 처음 만났던 사교 파티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이 공간들은 결코 단단하지 않다. 모두 뜻하지 않게 허물어진다. 완벽하게 고요와 집중이 보장되었던 도서실은 부모님의 싸움으로 평온이 무너지고 사교 파티는 배제된 여인, 세라 헤밍스가 일으킨 소란으로 으스러진다. 그 어느 곳도 자신의 경계선을 올곶이 지켜내지 못한다. 크리스토퍼의 어머니는 집에서 납치당하고 '공동조계'조차 전쟁 중에 허물어진다. 결국 경계선이 확실하다는 믿음은 작위적인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여기서 가즈오 이시구로는 우리들을 타인의 아픔에 냉담한 괴물로 만드는 진짜 이유를 드러낸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세계가 한 발 물러나도 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당신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노라 핑계를 대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실제 원인은 세계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었다. 우리가 그걸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 자체가 우리에게 책임을 가지도록 한다고 말했다. 타인에게 현상된 고통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뭔가 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그건 곧 나의 욕망을 억제하고 나를 희생하는 길이다. 우리는 그러기 싫었다. 책임을 떠맡기 싫었다. 그래서 핑계를 대었다. "세계가 이런 걸 어쩌란 말이야!" 아편 밀수를 두고 비난하는 아내에게 크리스토퍼의 아버지가 그랬듯이.(그것이 도서실의 평온이 깨어진 사건이었다.)


 한번은 어머니가 "당신은 우리 모두를 공범으로 만들고 있어요! 우리 모두를 말이에요! 수치스러운 일이라고요!" 말했다. 아버지의 목소리 역시 성이 나 있기는 했지만 어딘가 방어적이고 자포자기한 느낌이었다. 아버지는 계속해서 이런 말을 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오. 결코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란 말이오." 그러다 어떤 시점에서 아버지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건 너무 심하군! 난 필립이 아니란 말이오. 난 그런 식으로 생겨 먹은 인간이 아니라고. 정말 너무하군. 너무 심해!"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 아버지의 음성에는 뭔가가, 무시무시한 체념 같은 것이 있었다.(P.104)


 거기에 대해 가즈오 이시구로의 마음을 대변하여 어머니는 이렇게 비난한다.


 "당신은 그런 회사에서 일한다는 것이 수치스럽지 않아요? 이런 사악한 부에 빌붙어 생계를 유지하면서 어떻게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거예요?"(같은 페이지)


 이것이야말로 가즈오 이시구로가 '우리가 고아였을 때'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진심이다. 왜냐하면 이건 소설이 보여주는 최후의 진실이고 거기서 크리스토퍼 뱅크스의 삶조차 (자신은 몰랐지만) 사실은 사악한 부에 빌붙어 생계를 유지해 왔음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부는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사악한 부가 가능하려면 착취 당하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크리스토퍼 어머니가 그렇고 상하이의 공동 조계 바로 바깥에 위치하고 있는 토끼굴이 또한 그러하다. 경계선에 대한 확신이 작위적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도 그래서다. 크리스토퍼와 그 어머니의 관계처럼 이미 우리의 삶 자체가 보다 광범위한 타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급 운동화가 동남아시아의 아동 노동 착취를 통해 만들어지고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이 굶주리는 것이 사실은 서방 세계의 육류 소비로 인한 사료 작물의 재배로 곡물을 재배할 땅이 부족해서이듯 말이다. 그렇게 희생당하고 있는 토끼굴 같은 공간은 이미 우리 내부로 깊숙이 들어와 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소설의 여러 부분에서 그것을 보여준다. 상하이에서의 어린 시절 친구 아키라 집에 있는 하인 링 텐의 방이 그러하고 상하이로 다시 돌아와 찾아가 본 어릴 때의 집은 아예 중국인 가족이 들어와 살고 있다. 그들은 도처에 있다. 크리스토퍼의 어머니가 갇혀 있다는 옌 친 노인의 맞은 편 집처럼 바로 지근거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보이지 않을 리가 없다. 안 볼 수가 없다. 안 보이는 이유는 단 하나다. 우리가 보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알면서도 무시해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의 잘못 아냐! 그들이 책임져야지 뭐."하면서. 이 사악한 부에 빌붙어 생계를 유지하려고 말이다.


 그러므로 가즈오 이시구로가 이 소설을 통해 하고자 하는 것은 '시야의 열림'이다. 아니, 알고도 못 본 척 한 것이니 '시야의 강제'라고 해야 할까? 보게 만드는 것이다. 보도록 하는 것이다. 타인의 아픔을, 당하는 비극을. 그것이 설령 아무리 멀리 있는 것이라 한들 말이다. 여기에 대한 관심, 사유를 하도록 만드는 것. 나는 그것이 가즈오 이시구로가 크리스토퍼 뱅크스의 회상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라 믿는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나오는 크리스토퍼의 다음과 같은 고백이 나에게 굉장한 울림을 갖는 것이다.


 이런 필생의 관심사에 속박당하지 않고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의 운명은, 사라진 부모의 그림자를 오랜 세월 뒤쫓으면서 고아로서 세상과 대면하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그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그 임무를 완수하려는 것 외에 달리 길이 없다. 그러기 전까지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P. 441)


 이런 마음을 갖도록 하는 것. 타인의 비극을 나와 별개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필생의 관심사로 만드는 것. 부모의 그림자처럼 비록 보이지 않을 지라도 세상의 그 어떤 타인의 아픔이든 나와 이어져 있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그것을 뒤쫓게 만드는 것. 그렇게 우리를 고아로 만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소설이 우리들에게 주고자 하는 모든 것이며 제목인 '우리가 고아였을 때'에 투영된 진심이다. 읽고나면 이제 우리는 크리스토퍼의 마지막 말처럼 이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P. 442)' 여기게 된다. 무엇보다 우리에겐 여전히 현재형인 '세월호 참사'가 있기 때문이다. '남아있는 나날'에서 스티븐스가 그랬던 것처럼 너무 늦게 자각하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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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슈퍼히어로
김보영 외 지음 / 황금가지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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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서 장르 소설을 쓰는 작가들 중에 오래전부터 슈퍼 히어로에게 매료된 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슈퍼 히어로에 대해서라면 물 한 컵만 두고도 밤을 새워 이야기할 수 있는 그들. 사랑은 감기와 같아서 숨길 수 없다고 하던가. 쟁여놓은 애정은 언젠가 출구를 찾아 나오기 마련. 그 애정을 담뿍 담아 외국의 히어로가 아닌 우리만의 슈퍼 히어로 단편집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고 한다. 결국 그 소망은 한 권의 단편집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이웃집 슈퍼 히어로'다.(어쩐지 변사 톤 같다 ㅠ ㅠ)


 왠지 제목이 촌스럽다. 아마도 단편집의 슈퍼 히어로들이 무엇보다 한국을 무대로 활동하는 '신토불이' 슈퍼 히어로인지라 그것을 강조하느라 위해서 굳이 '이웃집'이란 표현을 쓴 게 아닐까 싶다. 표지도 꽤나 '빈티지'하다. 나는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므로 마음에 드나 정작 내용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지라 그래도 살짝 아쉬움이 감도는 걸 어찌할 수가 없다. 본문과 상관 있는 일러스트였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지만 포장이 무슨 상관이랴. 꽃등심이라면 설령 신문지에 싸서 준다고 해도 맛나게 먹을 수 있다는 것엔 변함 없는 것을.
 자, 그럼 애정이 어느만한 순도의 결정으로 나타났는지 포크로 탁 찍어 그 맛을 음미해 보기로 할까?

 먼저 외관부터 찬찬히 돌려볼라치면, 여기엔 9편의 단편과 2개의 해설이 실려있다.

 일단 단편의 작가들 이름을 죽 훑어본다. 그동안 한국의 장르 소설을 읽어본 이들이라면 익숙할 이름들이 주르르 달려나온다. 진산부터 시작해서 듀나, 좌백, 김이환 그리고 김보영 같은 이름들. 무협과 SF 그리고 판타지에서 나름 명망을 떨친 존재들이라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기대감이 확 솟구치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으음, 이 정도면 훌륭해. 입에 넣는다.

 첫 맛은 진산의 '존재의 비용'이다. 설정이 재밌다. 여기엔 평범한 사람을 초인으로 만들어주는 설계사가 하나 있다. 맞다. 짐작한 대로 하는 일이 보험설계사랑 똑같다. 초인을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지불할 수 있는 금액에 맞춰 가능한 초인을 설계해주는 것이다. 공짜가 아니다. 나름의 대가를 치뤄야 한다. 그렇게 초인이 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바로 제목의 '존재의 비용'이다. '존재'라 말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이 '초인'이라는 비범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비범한 능력을 그 대가로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돈이 아니다. 이유는 만고불변의 우주 법칙인 에너지 보존의 법칙 때문(인 듯 싶다). 하지만 주인공은 지극히 평범한데다 존재감도 거의 투명에 가까운 지라 지불해야 할 '비범'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자칭 뛰어난 초인설계사라 자부하는 그녀는 거기에 굴하지 않고 결국 의뢰인을 '보이드'란 이름의 초인으로 만들어 주고 마는데...

 그렇다면 과연 의뢰인이 무엇을 그 비용으로 지불했을까? 스포일러가 되기에...


 그런데 이 비용이라는 게 참 재밌다. 그게 소설을 읽는 우리도 혹시 보이드와 같은 초인인 것은 아닐까 상상해 볼 여지를 슬쩍 남기기 때문이다. 그런 상상을 하다보면 뭐랄까 이 소설이 근본으로 묻고자 하는 것을 툭 캐내는 것도 가능한데, 그건 바로 슈퍼 히어로란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인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영웅은 주어진 존재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진 신념과 그것의 지속적인 실천으로 빚어진다는 것. 이것이 아마도 '존재의 비용'이 들려주려는 진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즉, '존재의 비용 =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라는 등식 같은 것.

 이어지는 DCDC의 '월간영웅홍양전'은 재기발랄하다. 제목이 특이할텐데 사실 여기엔 단편의 설정이 집약되어 있다. 일단 영웅은 물론 슈퍼 히어로를 말하며 홍양은 당연히 히어로의 이름이다.
 그렇다면 월간은? 살짝 힌트를 드려본다면 홍양이 여성인 것과 관계가 있다. 여성들이 달마다 치르는 것. 그래서 '월간'이다. 홍양은 특이하게도 그 때의 스트레스가 초인적 능력으로 나타난다. 이 단편은 은근슬쩍 페미니즘적인데 그것은 악당 때문이다. 악당이 한마디로 가부장적 사고로 똘똘뭉친 남성 '꼰대'인 것이다. 그건 대사에서 직접 나타난다. 하지만 단순히 일반적인 페미니즘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이 단편은 분명 구체적인 지점 하나를 가져오고 있는데 그건 바로 '생리 휴가'이다. 홍양의 초인 능력 설정이 그렇게 된 것은 '생리휴가'에 얽힌 남성 차별적 사고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아시다시피 기업체에서 생리 휴가를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다. 어떤 사업체에서는 먼저 생리확인서를 제출하라고까지 요구한다. 여기에 대한 울화, 분노가 이 단편에 담겨 있다고 한다면 너무 나간 말일까? 그렇지 않다. 아마도 그것이 아니었다면 악당을 굳이 회사 사장으로 설정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이야기 자체도 재밌지만 이런 은근하게 배여든 주제 때문에 더욱 맛있게 삼킬 수 있었던 단편이다.

 세번째는 좌백이 쓴 것으로 '배트맨'을 무협물로 로컬라이징한 '편복협과 옥나찰'이다. 개명이 재밌다. '편복협'은 물론 배트맨이고 포청의 총책임자인 고둔은 형사부장 '고든'이며 집사인 알파도는 집사 알프레드 페니워스다. 그럼 '옥나찰'은 누구일까? 당연히 악당이다. 키가 10미터가 넘고 독채찍을 휘두르는 그는 사실 영화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 따왔다고 보여진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단편의 후반이 '다크나이트 라이즈'와 많이 비슷하기 때문이다.(두리뭉실하게 말하는 것은 물론 스포일러를 막기 위해서다.) 뭔가 지금 정세에 대한 간접적인 발언도 있으나 그보다는 재밌게 읽을만한 거리가 되고 싶다는 목적에 더 치중한 듯 보인다. 순식간에 흡입된다.

 네번째 김수륜의 '소녀는 영웅을 선호한다.'는 슈퍼 히어로와 슈퍼 빌란의 대결에 집중하는 단편인데 초점은 슈퍼 빌란에 더 맞춰져 있다. 제목의 소녀가 바로 슈퍼 빌란이다. 그녀는 영화 '초능력자'의 강동원처럼 사람의 손을 잡으면 그 사람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 그녀는 그 능력을 자신보다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사용하는데 그러니 당연히 슈퍼 히어로와 맞장을 뜰 수밖에 없다. 재미지게 읽히나 설정에 빈 곳이 많고(구성상 허점이 아니라 설정에 대한 설명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다.) 결말도 열려있다. 아니나 다를까 작가가 장편으로 만들 생각이라 한다. 아마도 불충분한 부분은 거기서 메워질 것 같다. 어쨌든 육체적 능력이 강한 자와 정신 능력이 강한 자의 대결. 흥미로운 결전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예전 나이트 샤말란의 영화 '언브레이커블'처럼 기묘한 로맨스가 될 수도 있을 성 싶다.

 다섯 번째는 '절망의 구'로 유명한 김이환의 '초인은 지금'이다. 초인에게 경찰권을 부여하는 법안의 국민투표 결과를 앞두고 초인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초인에 대해 그간 알고 있는 정보들을 나눈다는 게 기본 줄거리. 초인의 시점이 아니라 그 바깥에서, 일반인의 시점으로 초인을 거꾸로 들여다보려 한다는 것이 흥미로운데 궁극적으로는 '인간다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초인이 어째서 사람들을 도우는 것일까?'를 헤아리려 한다. 이렇게 말해도 될 지 모르겠지만 인류학적이 시선이 여기에 담겨 있는 것 같다. 이 단편은 원래 장편으로, 작가는 이미 완성해 놓았다고 한다.
 
 여섯 번째는 내게는 번역가로 더 친근한 이수현 작가의 '선과 선'이다. 레드 스파크라는 슈퍼 히어로와 한 경찰의 대결에 집중하는 작품인데 한국이라서 더욱 실감나게 읽히는 단편이었다. 사실 이 단편의 진짜 강자는 따로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언론이다. 언론이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따라 슈퍼 히어로도 한 순간에 빌런이 되고 경찰도 단번에 악당이 된다. 물론 그 언론은 보다 거대한 권력의 입맛에 따라 좌우되고 있다.(지금 우라나라의 현실 그대로다.) 즉 여기엔 개인을 압도하는 구조가 있다. 대치 중인 슈퍼히어로와 경찰이 제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 한들 구조의 권력을 이길 수는 없다. 개인이 가지는 한계와 그러므로 거기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는 연대의 필요성을 짧지만 설득력있게 말해준다.

 일곱번째는 듀나의 '아퀼라의 그림자'라는 작품이다. 어쩌면 '어벤져스 2'의 등장인물들이 촬영차 서울을 방문했을 때 이 단편의 아이디어를 떠올렸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흥미롭게도 듀나는 여기서 슈퍼 히어로들을 걸그룹 혹은 아이돌 밴드와 연결시키는데 촬영을 위해 방한 했을 때 몰려든 인파의 이미지랑 많이 겹친다.
 적사병이 발생하여 국민의 3분의 1이 죽고 감염의 위험 때문에 한국 전체가 20년간 격리된다. 그런데 그 적사병의 원인인 '프로스페로'는 슈퍼 히어로들을 만들어내기도 했는데 그런 존재가 이제 슈퍼스타급 인기를 얻게 된 것이다. 사실 이 슈퍼 히어들은 특정 회사에 소속되어 있으며 그 회사는 연예 기획사나 마찬가지다. 더우기 그들을 주인공으로 한 수많은 팬픽이 연일 인터넷 게시판을 오르내린다. 아무튼 이 와중에 빌런 슈퍼 히어로들을 통솔하는 라스푸틴이 사상 초유의 폭탄 테러를 감행하고 주인공이 그림자로 통솔하고 있는 아퀼라는 숙적 라스푸틴과 최후의 결전을 벌이려 한다. 듀나의 작품답게 설정이 세부에 이르기까지 잘 정리되어 있으며 일단 아이디어가 기발하기 때문에 잘 읽힌다.

 여덟번째는 김보영의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람'이다. 제목에서 얼른 플래시맨을 떠올렸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단편의 주인공은 플래시맨보다 더 빠르다. 1초에 지구를 7바퀴 반을 도는 슈퍼맨처럼 빛의 속도로 움직이니까 말이다. 날지는 못한다. 달리는 것 뿐이다. 그것말고는 달리 특별한 능력은 없는 평범한 남자다. 세상은 그의 존재를 알고 있고 그의 활약 때문에 세간의 관심은 그에게 초집중된 상태다. 바깥의 세상은 여지없이 뜨거울 지 몰라도 가속 능력을 발휘하여 빛의 속도로 달리는 그에겐 세상이란 그저 차분하기만 한 공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시간이 정지해 있기 때문이다. 아인쉬타인의 말대로 빛의 속도는 영원한 시간의 정지이니까. 사람들은 1초도 안되는 시간에 백명의 사람을 구해내는 그에게 놀라고 열광하지만 사실 주인공에게 있어서만큼은 한 달, 혹은 1년이 걸려 행하는 일이다. 누군가에겐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 정작 장본인에겐 오랜 시간이 축적된 결과라는, 이 시차(視差)가 참으로 흥미롭다.

 외연을 보다 확장하면 역사에 대한 어떤 발언 같으로 여길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들은 흔히 어떤 역사의 성과를 단순간에 이뤄진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조차 사실은 그렇게 되기 위하여 누군가가 아주 오래도록 노력한 것이었다는 것을 이 '시차'는 알려주고 있다. 더하여 단번에 원하는 역사가 이뤄지지 않더라도 미리 실망하지 말고 조급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누군가는 이 어둔 밤을 밝히기 위하여 아주 오랫동안 포기하지 않고 둥둥 북을 울리고 있으므로...  뭔가 그런 것이 느껴지는 단편이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눈물이 찔끔 나왔던 단편이기도 하다. 특히 이 대목에서

 얘가 혼자 건물 하나를 다 떠받치고 있었다. 내가 수원역에서 가기 싫다고 실랑이 하는 동안, 책임져야 할 사람이 다 튀어버리고 신고도 않고 대피방송도 없이, 지금도 어디선가는 내 잘못이 아니라고 책임이나 떠넘기고 있는 동안.
 내가 안 왔으면 여기서 며칠을 있었을까. 아니, 몇 달을 있었을까. 숨이 다하도록 버텼을 거다. 숨이 다하고도 버텼을 거다. 이대로 파묻혀버렸을 지도 모른다. 아니 그랬을 거다. 내 뒤로 아무도 오지 않았겠지. 번개가 사람 다 구했다는 속보나 한 줄 나가고 영웅 만들어 줄 궁리나 하다가 덮어버렸을 것이다. 사건 키우지 않으려고 실종자 수색도 끝까지 안 했겠지.(p. 326 ~ 327)

 난 여기서 세월호 참사에서 희생당한 아이들을 떠올렸다. 누군가는 정말 그랬을 것이다. 구조대를 기다리며 친구를 위해 버티고 선 아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국가는, 그런 일을 하라고 세금을 내고 있는 국가는 그들을 버렸다. 몇 시간이 지나도록 구조하지 않았다. 그들이 차창으로 멀리서 맴돌기만 하는 구조선을 보며 수면으로 가라앉아갈 때 참으로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 그걸 생각하니 눈에 물기가 어리고 한동안 먹먹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잡것의 세상. 어쩌다 나라가 이런 막장이 되어 버렸을까? '이기'는 지혜가 되고 '이타'는 바보가 되는 세상이다. 원래 사람들이 악했던 것은 아니나 악한 자들을 자꾸만 뽑아주는 바람에 감염되어 버렸다.(혹시 듀나의 '적사병'은 그런 악한 자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종북몰이', 즉 레드컴플렉스를 은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정말로 마지막 단편인 이서영의 '노병들'에선 이런 존재들이 나온다. 탑골 공원에서 열심히 종북몰이를 하며 정권의 나팔수를 자임하고 있는 노인들 말이다. 그가 주인공이다. 이름은 철구. 그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데 바람을 조종해 사람을 공격할 수 있다. 덕분에 청소년 시절부터 정권의 개가 되어 활약했다. 평생 그렇게 살았다. 민주화와 노동 해방을 부르짓는 이들을 마구 짓밟으며. 하지만 잘못을 모른다. 마치 지금 다른 쪽에 발을 내딛었다간 살아온 인생 전부가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국정원에서 운영하는 트위터 전사까지 되어 여전히 정권의 개로 남는다. 진짜 답이 없는 인생. 물론 소설은 더이상 그대로 살 수 없는 충격의 순간을 선사한다. 하지만 이름 그대로 쇠머리나 다름없는 그가 변할리는 여전히 미지수다. 아무리 불법을 자행해도 선거철만 되면 우리가 남이가 하면서 무턱대고 표를 주는 우리 주위의 허다한 노인들처럼...

 이제 소개를 다했다. 헉,헉,헉. 내리 달려오느라 얼마나 숨이 찼는지 여기서 숨을 좀 돌려야겠다.
전체적인 느낌으로 '이웃집 슈퍼 히어로'는 비록 슈퍼 히어로에 대한 애정에서 태어났을지언정 꼭 그것만 이야기하는 단편집은 아니었다. 그것 보다는 현재 사회에 대한 어떤 갑갑증 같은 것이 더 많이 투사되어 있었다. 왜 이런 사회가 되었나? 이런 사회는 도대체 누가 만들었나에 대한 것들을 슈퍼 히어로라는 존재를 통해서 풀어보려 했던 것은 아닌지 생각되기도 한다. 그래서 실감나게 읽을 수 있었고 그렇기에 슈퍼 히어로라는 것만 보고 나랑 관계없는 장르야 하면서 내치지 말고 혹시나 뭔가 이 사회에 대해 어떤 해갈되지 않는 갈증을 느끼고 있다면 대리 해소 차원으로 읽어보면 어떨까 권하고 싶어진다.

 힘든 세상이다. 슈퍼 히어로도 없으니 이렇게라도 해서 버텨야 되지 않을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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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빌스 스타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5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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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네스뵈가 때론 영화 감독 홍상수처럼 보일 때가 있다. 왜냐하면 요 네스뵈도 홍상수처럼 지속적으로 불륜을 그리기 때문이다. 둘 다 작품의 중심 세계에 불륜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데 홍상수야 그렇다 치고 요 네스뵈는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늘 의문이 있었다. 아니, 정말 궁금했었다. 전에 요 네스뵈가 방한 했을 때 물어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하필이면 그 때 이사하느라 바빠서 천금과도 같은 기회를 그만 놓치고 말았다. 별 수 없이 홀로 그 이유를 추정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엔 물론 노르웨이의 높은 이혼률이라는 현실적 사정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지만 그간의 작품들을 가만 헤아려 보면 그 보다는 이를테면 미국의 하드보일드 작가 로스 맥도널드의 노선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경로가 유사하다는 것일 뿐, 둘 사이에 직접적인 영향 관계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일단 로스 맥도널드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겠다. 로스 맥도널드는 흔히 레이먼드 챈들러의 계승자로서 언급되는 작가인데 정작 그는 이전 세대와 스스로를 차별시키려 했다. 무엇보다 이전 세대 작가들과는 달리 이야기의 중심을 철저하게 가정에만 국한했다. 그의 페르소나인 탐정 루 아처(이 이름도 그가 차별화를 추구했다는 것의 한 증거이다. 아처는 하드보일드의 시조격인 작가 대쉴 해미트의 소설 '말타의 매'에 나오는 주인공 샘 스페이드와 같은 사무실을 썼던 동료 탐정 이름에서 따왔다. 그는 의뢰인의 부탁을 받아 미행 도중 살해당하는데 여러모로 냉혈한 샘 스페이드와 대조되는 인물이다. 로스 맥도널드는 이전 세대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캐릭터인 샘 스페이드와 정확히 반대되는 인물을 가져옴으로써 차별화를 시도한 것이다.)가 쫓는 것은 모두 문제적 가정이 낳은 피해자 뿐이다. 가정 속에서 오래도록 숨겨왔던 죄의 결과물들. 그렇다고 해서 로스 맥도널드가 그런 가정을 묘사하는 선에서만 그친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가정 내의 문제는 언제나 교묘하게 사회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로스 맥도널드는 사회 문제와 가정 문제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면서 사회에 만연한 부조리가 집약되어 발현되는 장소로 가정을 고른 것이다.

 요 네스뵈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불륜에 천착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홍상수의 불륜이 그냥 불륜이 아니듯, 요 네스뵈의 불륜도 그저 불륜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의도로 불륜을 가져오고 있는 것일까?




 단서는 오슬로 3부작의 시작이 되는 '레드 브레스트'에서 찾을 수 있다. 거기서 요 네스뵈는 처음으로 노르웨이의 역사에 다가갔는데 그 중에서 그가 담으려 했던 역사는 다름 아닌 세계 2차 대전 당시 노르웨이 국민들이 나치 독일에 협력했던 역사로서 지금의 노르웨이라면 감추고만 싶은 부끄럽기 그지 없는 역사였다. 사실 '레드 브레스트'는 그 과거의 역사가 지금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묻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요 네스뵈가 찾아낸 것은 여전히 친일파가 떵떵거리며 잘먹고 잘사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노르웨이 역시도 그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거기에 대한 그 어떤 반성과 참회도 없이 그저 남들 눈에 보이지 않게 은폐만 시켜 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그런 노르웨이는 샌드위치나 마찬가지였다. 현재의 노르웨이와 그 이면에 도사린 수치스런 과거가 한겹으로 포개어져 있는 형국이었던 것이다. 난 그것이 요 네스뵈에게 불륜을 가져다 주었다고 본다. 그런 노르웨이의 모습은 정확히 한 가정 안에서 남녀가 함께 사는 모습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불륜은 그러한 동반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레드 브레스트'라는 새의 모습 그대로 그런 모순된 이중 관계는 파열을 일으키게 된다. 바로 그 파열이 불륜인 것이다.

 그것은 정면과 이면과의 불화이자, 은폐된 죄가 노출되는 상황이다. 공존이 기만일 뿐이라는 것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숨겨진 권력구조도 비에 씻겨 흙 안에 숨겨진 돌부리가 드러나듯 부상시킨다. 바로 그런 움직임, 시작의 동요가 불륜인 것이다.

 <레드 브레스트>, <네메시스> 그리고 <데빌스 스타>를 <오슬로 3부작>으로 묶는다. 이유는 일단 모두 이야기가 오슬로를 무대로 벌어지기 때문이고 세 작품에 걸쳐 해리 홀레가 맞서야 하는 숙적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더 있는데 그것은 물론 불륜이다. 마지막인 <데빌스 스타>는 3부작 내내 지속된 불륜의 여정에 있어, 종착역답게 정점에 서 있다.


 도입부 부터 남다르다. 흥미롭게도 요 네스뵈는 한 집의 역사를 상세하게 기술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1898년에 세워졌고 누수는 1968년에 일어났으며 여기에 사용된 벽돌은 누가 어떻게 만들었으며 그것은 또 어떤 괴담을 낳았나 하는 식으로 길게 설정한다. 이건 전작인 '네메시스'와는 전혀 다른 언급인데 그래서 뭔가 의도가 있을 것 같다.(<네메시스>는 은행 강도 장면이 녹화된 CCTV에서 시작되는데 실은 보여지는 것과 전혀 다른 일이 발생했음이 나중에 밝혀진다. 보고 있어도 보지 못하는, 그렇게 노르웨이에게 현재 존재하는 이면을 형상화한 도입부다.) 그러면 눈에 들어오는 것이 바로 역사다. 그리고 역사라고 한다면 이것은 처음으로 역사를 다루었던 <레드 브레스트>를 우리에게 환기시킨다. 요 네스뵈는 도입부를 이렇게 함으로써 <데빌스 스타>를 <레드 브레스트>와 묶으려 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은 집에 간직된 역사를 하나의 물줄기가 지나가는 경로로 보여주는 것에서 나타난다. 앞서 요 네스뵈에게 있어 집은 노르웨이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물줄기가 보여주는 집의 역사란 그대로 노르웨이의 역사라 할 것이다. 실제로 여기 밝혀진 연도는 노르웨이 역사에 있어 의미있는 시점들이다. 그렇다고 본다면 왜 시작부터 '레드 브래스트'를 환기시키는 지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데빌스 스타>가 시작이 되었던 <레드 브레스트>의 결과라는 걸 나타내기 위해서다. 결국 물줄기는 흐르다가 어떤 집에서 한창 물이 끓고 있는 냄비 속으로 방울져 떨어진다. 놀랍게도 물줄기는 그냥 물이 아니었다. 실은 피였다. 그것도 살해당한 여성에게서 흘러나온 피였다. 참회와 성찰 없는 은폐의 역사가 종국엔 무엇을 가져오는지를 이것만큼 잘 보여주는 도입부가 또 있을까 싶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 <데빌스 스타>다.

 길어진 은폐만큼 <데빌스 스타>엔 도처에 불안과 아픔이 만연되어 있다. 이어지는 <연쇄 살인>은 중의적으로는 그것의 고발과 같다. 그런데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은 여성이다. 불륜의 파열은 <데빌스 스타>에서 여성 신체 파괴로 나타나는 것이다. 여성들은 죽었고 손가락 하나는 잘린데다 하나의 눈꺼풀 안쪽에는 별 모양의 다이아몬드 하나가 들어있다. 범인으로부터의 메시지다. 여성이 죽은 자리마다 이 별은 새겨져 있다. 제목이 '데빌스 스타'인 것은 바로 그래서다. '악마의 별'인 팬타그램.

 고통을 당하는 자가 주로 여성이라는 것과 '팬타그램'이 지닌 진짜 의미는 서로 이어져 있다. 그냥 흥미를 돋우기 위한 소재가 아니라 주제를 위해 신중하게 선택된 소품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악마의 별'이 아니라 원래 팬타그램이 가지고 있었던 상징적 의미다. 팬타그램은 중세 기독교 신앙에서 널리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그랬던 이유는 팬타그램이 바로 예수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시다시피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할 때 모두 다섯 군데에 상처를 입었다. 바로 가시면류관을 쓴 머리, 십자가에 못 박힌 두 손과 두 발. 별의 다섯 모서리는 각각 이 상처를 지시하고 있으며 그런 이유로 중세 기독교에서 팬타그램을 사용했던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팬타그램이 원래는 예수를 지칭했다는 것. 왜냐하면 예수야 말로 기독교로 대표되는 서양 가부장적 사상의 대표적 상징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범인이 여자의 신체에 새겨 놓는 별은 사실 부권의 각인이다. 죽음은 죽인 자에게 절대적으로 소유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므로 죽은 여인에게 별을 새긴다는 것은 그 여인을 영구히 소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정적으로 해리 홀레는 한 신부에게서 이 판타그램이 '마레코쉬'라는 악마의 별이며 그건 사실 살인을 뜻한다는 말을 듣게 된다. 아시다시피 바로 여기에도 '이면'이 들어가 있다. 정위로 놓고 보면 '예수'지만 역위로 보면 살인인 것이다. 타로카드처럼 말이다. 이렇게 보이는 것과 전혀 다른 이면의 진실이 존재한다. 마치 그들이 말하는 구원의 복음이란 실은 영혼을 절대적으로 장악하려는 살인이라는 듯이. 누가? 바로 예수로 대표되는 남성 중심의 질서다. 여성의 고통과 팬타그램은 이렇게 연결된다. 이런, 너무나 정교한 설정이지 않은가? 내가 이래서 요 네스뵈의 해리에게 홀리는 것이다. 천년 묵은 구미호 같으니!

 이런 식으로 <데빌스 스타>에는 대치 중인 두 세력 사이의 전선이 선명하게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남성과 여성이다. 이러한 관계는 뮐레르가 사건 수사를 누구에게 맡기면 좋을까 생각할 때 얼른 떠오르는 두 사람의 대비에서마저 존재한다. 그 두 사람이 바로 경찰에서 가장 촉망받는 톰 볼레르와 언제 해고당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해리 홀레다. 톰 볼레르는 남성적 특질이 강하고 해리 홀레는 여성적 특질이 강하다. 요 네스뵈 소설에서 경계선 밖으로 쉽게 떨어질 수 있는 존재는 모두 여성적 특질을 떠안는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우울증, 무기력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해리 홀레는 여성적 특질을 있는 대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작품 중에서 가장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사건 해결을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현재 그는 극도로 절망해 있다. <레드 브레스트>에서 살해당했던 동료 여형사 엘렌 옐텐의 범인을 못 잡았기 때문이다. <네메시스>에서 그는 유력한 용의자를 포착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전력을 다해 옭아맬 증거를 찾았으나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지금 자신의 무능에 좌절해 있다. 덕분에 라켈과도 소원해졌다. 고독과 무한정한 음주 속에서 그는 스스로를 망쳐가고 그래도 신경쓰지 않는다. 그는 늘 같은 꿈을 꾼다. 악몽이다. 여동생 쇠스와 엘렌 옐텐 그리고 라켈이 엘리베이터에 갇혀 목만 내놓고 올라가는 꿈이다. 그는 아래서 지켜보고 있는데 아무리 해도 구할 수가 없다. 공교롭게도 세명의 여성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들이다. 그런데도 그는 구하지 못한다. 무기력하게 손만 허공에 내저을 뿐이다.

 늘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홀레는 오히려 그래서 이면의 진실을 볼 수 있는 자였다. <네메시스>에서도 오직 그만이 누구도 보지 못했던 진실을 본다. 

  그건 <데빌스 스타>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제는 보아도 어찌 할 수가 없다.(특히나 중반에 미리 피해자를 특정하고 오슬로 경찰들이 함정을 파놓고 범인을 기다리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여기서 요 네스뵈는 우리에게 <네메시스>의 도입부를 환기시킨다. 경찰의 요청으로 도촬 장비를 대여해주는 '오토'란 남자로 시점을 옮겨 CCTV로 모든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나 <네메시스>처럼 CCTV는 진실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 장비가 아니라 애초부터 바탕이 되는 세계가 잘못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서 범인이 한 시체 처리도 주제와 상관이 있어 흥미롭다. 그는 시체의 악취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가황고무라는 것으로 밀봉한다. 이것은 그대로 노르웨이가 감추고 싶은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과 닮아있지 않은가. 하지만 아무리 은폐하고 밀봉시켜도 노출이 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이것은 물론 요 네스뵈가 노르웨이에게내는 경고라 하겠다. 그런데 이 이면의 은폐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범인의 직업도 그렇고 눈꺼풀 안에 놓여 있던 다이아몬드도 실은 '블러드 다이아몬드'라고 해서 시에라 시온에서의 끔직한 학살의 소산이다. 이런 사소한 것 하나까지 다 정교하게 계산되어 있는 것을 보노라면 문득 이런 말을 하고 싶어진다. 아악! 당신 혹시 셜록 홈즈의 재래 아냐? 그런데, 헉! 괄호 안을 너무 길게 썼다. 수고스럽겠지만 괄호 앞으로 돌아가서 먼저 나온 문장을 확인한 다음 뒷 문장을 읽어주시길) 그것은 이면의 세력이 가지고 있는 힘이 강대해졌기 때문은 아니다. 해리 홀레가 싸우는 것은 실체하는 적이 아니라 그 적을 근본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 다시 말해 노르웨이의 이면을 은폐하고 그러면서 계속 존치시키는 사상인 것이다.

 이제 그는 보다 본질적인 대상을 상대해야 한다. <데빌스 스타>의 시간적 배경이 한창 더운 여름이라는 설정은 바로 그 때문이다. 오슬로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이 휴가를 가 버려 도시는 현재 텅 비어있다. 경찰 조직도 마찬가지다. 요 네스뵈가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를 떠올려 보라 . 주인공 네오가 궁극의 적과 맞서 싸울 때 도시는 말끔히 비어 있었다. 남은 것은 오로지 싸워야 할 적 말고는 없었다. 그것과 같다. 해리 홀레가 이제 고통을 방치하고 과오를 누적시킨 궁극의 장본인인 사상 자체와 결전을 치른다는 의미에서 요 네스뵈는 오슬로를 텅 비워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사상의 정체를 팬타그램으로 알린 것이다.

 해리 홀레는 오래도록 서양 문명을 지배해 온 가부장적인 사유와 싸워야 한다. 하이데거의 말에 따르면 자신과 같지 않은 타자는 용납지 않고 같게 만들지 못하면 무조건 배척해 버리는 고대 그리스 이후로 지속되어온 사상 자체인 것이다.
 
 그렇기에 요 네스뵈는 해리 홀레에게 끝도 모를 무기력을 선사했다. 그만큼 해리 홀레는 여성적 특질로 충만해 있다. 더하여 우리는 두 명의 여성을 아울러 보게 된다.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은 희생하려는 정숙한 여인(이 여인에 대한 남자의 생각을 주의 깊게 바라보면 이 여성과 바로 다음에 얘기하는 어머니가 비슷한 특질을 가지고 있고 그 특질은 또한 해리 홀레의 특질과 연결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요 네스뵈가 이것을 의도했음은 말한 세 명 모두가 한 남자와 모두 묶인다는 점에서 입증된다. 해리 홀레는 소설에서 '5'가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요 네스뵈는 독자에게 지속적으로 '3'을 떠올리게 만든다. '5'가 악마의 계략이었듯이 그렇다면 '3'도 계략인 것일까? 혹시 기독교 사상의 핵심인 삼위일체는 아닐까 생각도 해 보지만 너무 무리한 해석이라는 생각도 든다. 뭐, 아무튼.)과 과거의 잘못으로 사회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았으나 여전히 인간적인 품격을 유지하고 있는 어머니다. 특히 해리는 이 여인의 눈에서 할머니를 떠올리는데 그만큼 둘이 연결되어 있음을 뜻한다. 해리 홀레는 이 작품에서만큼은 여성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 

 결국 무기력은 소설에서 이중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고통의 현상이자 정체성의 확립이다. 요 네스뵈는 후자를 통해 해리 홀레가 어느 진영에 서 있는가를 밝힌다. 물론 그것은 범인의 존재에 투영되어 있듯이 보이는 것은 진실과 다르다는 의미에서 위선의 가면을 쓰고 배척과 은폐 밖에는 할 줄 모르는 졸렬한 가부장적 사상에게 핍박받고 희생당한 여성의 편이다. 동시에 사회적 약자의 편이며 반성과 참회를 요구하는 진실된 역사의 편이다. 그런 이유로 여기서의 무기력은 사실 무기력이 아닌 것이다. 그건 차라리 모든 것이 허위와 기만일 뿐인, 하지만 현재를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가부장적 사상으로부터  달아나려는 몸짓이라 해야 한다. 말하자면 그 몸짓이란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의 그 것과 같다. 무기력은 가부장이 바라는 모습이 아니다. 톰 볼레르의 활력이 그가 바라는 것이다. 오슬로 경찰의 평가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들에게 해리 홀레는 가장 약하고 쓸모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래서 해리 홀레는 누구보다 강한 자가 되어 맞서 싸울 수가 있는 것이다. 설득하고 세뇌하여 장악한 그 사상에서 가장 멀리 달아나 있기 때문이다. 해리 홀레가 쓰고 있는 무기력의 외피가 가진 의미란 그런 것이다.

 더없이 불안하고 약한 자가 되는 것이 오히려 강한 자가 되는 길이다. 상식의 견지에서 보자면 얼른 납득하기 어려운 이것이 요 네스뵈에겐 현실의 노르웨이를 구원할 대안의 무기가 된다. 해리 홀레가 알콜 중독에 빠지게 되는 본질적 이유도 사실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주류에서 이탈하기 쉬운 모든 몸짓이 거꾸로 구원을 향한 도약이 되는 것이다.

 과연 3부작의 마지막다운 결전이 아닐 수 없다.(여기에 대해 보다 더 많은 설명이 있어야 하겠지만 지금도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는 지금 세기의 복싱 대결이라며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들고 있는  매니 파퀴아오와 플로이드 메이웨더의 결전보다 더 흥미로운 싸움이 아닐 수 없다.

 결과가 궁금하신가? 그렇다면 '500원!'(이런 철지난 개그를! 안다. 나는 지금 당신의 실소를 보고 있다 아니, 경멸인가? 어쨌든 그것)이 아니라 직접 관전하시길.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읽는 편이 이 승부를 즐기기에 훨씬 더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관람료가 아까우면 어쩌지 하고 염려할 필요는 더욱 없다. 끝까지 결말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흥미롭게 전개되며 조금의 긴장감도 늦추지 못하게 만든다. 그건 라운드가 올라갈 수록 더욱 그렇다. 15R 쯤 가면 말 그대로 폭발이다.

 감히 말하지만 요 네스뵈가 얼마나 천부적인 이야기꾼인지 다시 한 번 실감했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었다. 분명 결코 놓쳐서는 안될 작품이다!X100.(다른 글보다 이 글에서 특히 괄호를 많이 썼는데 그건 이면의 진실을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는 요 네스뵈에게 나름의 오마쥬를 바치려 한 것임을 알아 주시길. 절대 글을 제대로 정리 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박박 우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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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5-05-01 0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헤르메스 님의 장르소설 리뷰를 읽을 때마다 ×100의 느낌표와 ×100의 공감을 날리고 싶어집니다. 왜 문장끝마다 좋아요 버튼은 없는걸까요?
덕분에 이 아침 기분 좋게 시작합니다, 꾸벅~(__)

오드득 2015-05-01 06:36   좋아요 0 | URL
아앗! 양철나무꾼님 이런 과분한 칭찬을 해주시다니! 저야말로 메이데이의 아침을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릴 수밖에 없네요.. 오늘은 양철나무꾼님의 이 말씀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것 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연신 꾸벅~^ ^)

수이 2015-05-01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에서 헤르메스님의 유머와 어조가 그대로 느껴져서 흐뭇해요. 여전하시구나 싶어서. 잘 지내시죠? 그리고 곱하기 100_이라니! 헤르메스님이 이리 강추하시니 한번 슬쩍 관심을 가져볼까_ 하고 있어요.

오드득 2015-05-18 21:42   좋아요 0 | URL
오오! 야나님 너무 반가워요^ ^ 이렇게 반가운데 5월달은 정말 폭풍과 같았던지라 이제야 들어와 이렇게 댓글을 다는군요. 사는게 뭔지 ㅠ ㅠ 제가 아직 야나님 취향을 확실하게 몰라 선뜻 권하기엔 좀 망설여지지만 그래도 요 네스뵈는 믿고 권할만한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슬쩍 관심가져 보세요. 냐하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