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빌스 스타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5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 네스뵈가 때론 영화 감독 홍상수처럼 보일 때가 있다. 왜냐하면 요 네스뵈도 홍상수처럼 지속적으로 불륜을 그리기 때문이다. 둘 다 작품의 중심 세계에 불륜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데 홍상수야 그렇다 치고 요 네스뵈는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늘 의문이 있었다. 아니, 정말 궁금했었다. 전에 요 네스뵈가 방한 했을 때 물어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하필이면 그 때 이사하느라 바빠서 천금과도 같은 기회를 그만 놓치고 말았다. 별 수 없이 홀로 그 이유를 추정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엔 물론 노르웨이의 높은 이혼률이라는 현실적 사정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지만 그간의 작품들을 가만 헤아려 보면 그 보다는 이를테면 미국의 하드보일드 작가 로스 맥도널드의 노선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경로가 유사하다는 것일 뿐, 둘 사이에 직접적인 영향 관계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일단 로스 맥도널드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겠다. 로스 맥도널드는 흔히 레이먼드 챈들러의 계승자로서 언급되는 작가인데 정작 그는 이전 세대와 스스로를 차별시키려 했다. 무엇보다 이전 세대 작가들과는 달리 이야기의 중심을 철저하게 가정에만 국한했다. 그의 페르소나인 탐정 루 아처(이 이름도 그가 차별화를 추구했다는 것의 한 증거이다. 아처는 하드보일드의 시조격인 작가 대쉴 해미트의 소설 '말타의 매'에 나오는 주인공 샘 스페이드와 같은 사무실을 썼던 동료 탐정 이름에서 따왔다. 그는 의뢰인의 부탁을 받아 미행 도중 살해당하는데 여러모로 냉혈한 샘 스페이드와 대조되는 인물이다. 로스 맥도널드는 이전 세대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캐릭터인 샘 스페이드와 정확히 반대되는 인물을 가져옴으로써 차별화를 시도한 것이다.)가 쫓는 것은 모두 문제적 가정이 낳은 피해자 뿐이다. 가정 속에서 오래도록 숨겨왔던 죄의 결과물들. 그렇다고 해서 로스 맥도널드가 그런 가정을 묘사하는 선에서만 그친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가정 내의 문제는 언제나 교묘하게 사회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로스 맥도널드는 사회 문제와 가정 문제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면서 사회에 만연한 부조리가 집약되어 발현되는 장소로 가정을 고른 것이다.

 요 네스뵈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불륜에 천착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홍상수의 불륜이 그냥 불륜이 아니듯, 요 네스뵈의 불륜도 그저 불륜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의도로 불륜을 가져오고 있는 것일까?




 단서는 오슬로 3부작의 시작이 되는 '레드 브레스트'에서 찾을 수 있다. 거기서 요 네스뵈는 처음으로 노르웨이의 역사에 다가갔는데 그 중에서 그가 담으려 했던 역사는 다름 아닌 세계 2차 대전 당시 노르웨이 국민들이 나치 독일에 협력했던 역사로서 지금의 노르웨이라면 감추고만 싶은 부끄럽기 그지 없는 역사였다. 사실 '레드 브레스트'는 그 과거의 역사가 지금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묻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요 네스뵈가 찾아낸 것은 여전히 친일파가 떵떵거리며 잘먹고 잘사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노르웨이 역시도 그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거기에 대한 그 어떤 반성과 참회도 없이 그저 남들 눈에 보이지 않게 은폐만 시켜 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그런 노르웨이는 샌드위치나 마찬가지였다. 현재의 노르웨이와 그 이면에 도사린 수치스런 과거가 한겹으로 포개어져 있는 형국이었던 것이다. 난 그것이 요 네스뵈에게 불륜을 가져다 주었다고 본다. 그런 노르웨이의 모습은 정확히 한 가정 안에서 남녀가 함께 사는 모습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불륜은 그러한 동반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레드 브레스트'라는 새의 모습 그대로 그런 모순된 이중 관계는 파열을 일으키게 된다. 바로 그 파열이 불륜인 것이다.

 그것은 정면과 이면과의 불화이자, 은폐된 죄가 노출되는 상황이다. 공존이 기만일 뿐이라는 것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숨겨진 권력구조도 비에 씻겨 흙 안에 숨겨진 돌부리가 드러나듯 부상시킨다. 바로 그런 움직임, 시작의 동요가 불륜인 것이다.

 <레드 브레스트>, <네메시스> 그리고 <데빌스 스타>를 <오슬로 3부작>으로 묶는다. 이유는 일단 모두 이야기가 오슬로를 무대로 벌어지기 때문이고 세 작품에 걸쳐 해리 홀레가 맞서야 하는 숙적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더 있는데 그것은 물론 불륜이다. 마지막인 <데빌스 스타>는 3부작 내내 지속된 불륜의 여정에 있어, 종착역답게 정점에 서 있다.


 도입부 부터 남다르다. 흥미롭게도 요 네스뵈는 한 집의 역사를 상세하게 기술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1898년에 세워졌고 누수는 1968년에 일어났으며 여기에 사용된 벽돌은 누가 어떻게 만들었으며 그것은 또 어떤 괴담을 낳았나 하는 식으로 길게 설정한다. 이건 전작인 '네메시스'와는 전혀 다른 언급인데 그래서 뭔가 의도가 있을 것 같다.(<네메시스>는 은행 강도 장면이 녹화된 CCTV에서 시작되는데 실은 보여지는 것과 전혀 다른 일이 발생했음이 나중에 밝혀진다. 보고 있어도 보지 못하는, 그렇게 노르웨이에게 현재 존재하는 이면을 형상화한 도입부다.) 그러면 눈에 들어오는 것이 바로 역사다. 그리고 역사라고 한다면 이것은 처음으로 역사를 다루었던 <레드 브레스트>를 우리에게 환기시킨다. 요 네스뵈는 도입부를 이렇게 함으로써 <데빌스 스타>를 <레드 브레스트>와 묶으려 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은 집에 간직된 역사를 하나의 물줄기가 지나가는 경로로 보여주는 것에서 나타난다. 앞서 요 네스뵈에게 있어 집은 노르웨이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물줄기가 보여주는 집의 역사란 그대로 노르웨이의 역사라 할 것이다. 실제로 여기 밝혀진 연도는 노르웨이 역사에 있어 의미있는 시점들이다. 그렇다고 본다면 왜 시작부터 '레드 브래스트'를 환기시키는 지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데빌스 스타>가 시작이 되었던 <레드 브레스트>의 결과라는 걸 나타내기 위해서다. 결국 물줄기는 흐르다가 어떤 집에서 한창 물이 끓고 있는 냄비 속으로 방울져 떨어진다. 놀랍게도 물줄기는 그냥 물이 아니었다. 실은 피였다. 그것도 살해당한 여성에게서 흘러나온 피였다. 참회와 성찰 없는 은폐의 역사가 종국엔 무엇을 가져오는지를 이것만큼 잘 보여주는 도입부가 또 있을까 싶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 <데빌스 스타>다.

 길어진 은폐만큼 <데빌스 스타>엔 도처에 불안과 아픔이 만연되어 있다. 이어지는 <연쇄 살인>은 중의적으로는 그것의 고발과 같다. 그런데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은 여성이다. 불륜의 파열은 <데빌스 스타>에서 여성 신체 파괴로 나타나는 것이다. 여성들은 죽었고 손가락 하나는 잘린데다 하나의 눈꺼풀 안쪽에는 별 모양의 다이아몬드 하나가 들어있다. 범인으로부터의 메시지다. 여성이 죽은 자리마다 이 별은 새겨져 있다. 제목이 '데빌스 스타'인 것은 바로 그래서다. '악마의 별'인 팬타그램.

 고통을 당하는 자가 주로 여성이라는 것과 '팬타그램'이 지닌 진짜 의미는 서로 이어져 있다. 그냥 흥미를 돋우기 위한 소재가 아니라 주제를 위해 신중하게 선택된 소품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악마의 별'이 아니라 원래 팬타그램이 가지고 있었던 상징적 의미다. 팬타그램은 중세 기독교 신앙에서 널리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그랬던 이유는 팬타그램이 바로 예수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시다시피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할 때 모두 다섯 군데에 상처를 입었다. 바로 가시면류관을 쓴 머리, 십자가에 못 박힌 두 손과 두 발. 별의 다섯 모서리는 각각 이 상처를 지시하고 있으며 그런 이유로 중세 기독교에서 팬타그램을 사용했던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팬타그램이 원래는 예수를 지칭했다는 것. 왜냐하면 예수야 말로 기독교로 대표되는 서양 가부장적 사상의 대표적 상징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범인이 여자의 신체에 새겨 놓는 별은 사실 부권의 각인이다. 죽음은 죽인 자에게 절대적으로 소유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므로 죽은 여인에게 별을 새긴다는 것은 그 여인을 영구히 소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정적으로 해리 홀레는 한 신부에게서 이 판타그램이 '마레코쉬'라는 악마의 별이며 그건 사실 살인을 뜻한다는 말을 듣게 된다. 아시다시피 바로 여기에도 '이면'이 들어가 있다. 정위로 놓고 보면 '예수'지만 역위로 보면 살인인 것이다. 타로카드처럼 말이다. 이렇게 보이는 것과 전혀 다른 이면의 진실이 존재한다. 마치 그들이 말하는 구원의 복음이란 실은 영혼을 절대적으로 장악하려는 살인이라는 듯이. 누가? 바로 예수로 대표되는 남성 중심의 질서다. 여성의 고통과 팬타그램은 이렇게 연결된다. 이런, 너무나 정교한 설정이지 않은가? 내가 이래서 요 네스뵈의 해리에게 홀리는 것이다. 천년 묵은 구미호 같으니!

 이런 식으로 <데빌스 스타>에는 대치 중인 두 세력 사이의 전선이 선명하게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남성과 여성이다. 이러한 관계는 뮐레르가 사건 수사를 누구에게 맡기면 좋을까 생각할 때 얼른 떠오르는 두 사람의 대비에서마저 존재한다. 그 두 사람이 바로 경찰에서 가장 촉망받는 톰 볼레르와 언제 해고당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해리 홀레다. 톰 볼레르는 남성적 특질이 강하고 해리 홀레는 여성적 특질이 강하다. 요 네스뵈 소설에서 경계선 밖으로 쉽게 떨어질 수 있는 존재는 모두 여성적 특질을 떠안는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우울증, 무기력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해리 홀레는 여성적 특질을 있는 대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작품 중에서 가장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사건 해결을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현재 그는 극도로 절망해 있다. <레드 브레스트>에서 살해당했던 동료 여형사 엘렌 옐텐의 범인을 못 잡았기 때문이다. <네메시스>에서 그는 유력한 용의자를 포착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전력을 다해 옭아맬 증거를 찾았으나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지금 자신의 무능에 좌절해 있다. 덕분에 라켈과도 소원해졌다. 고독과 무한정한 음주 속에서 그는 스스로를 망쳐가고 그래도 신경쓰지 않는다. 그는 늘 같은 꿈을 꾼다. 악몽이다. 여동생 쇠스와 엘렌 옐텐 그리고 라켈이 엘리베이터에 갇혀 목만 내놓고 올라가는 꿈이다. 그는 아래서 지켜보고 있는데 아무리 해도 구할 수가 없다. 공교롭게도 세명의 여성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들이다. 그런데도 그는 구하지 못한다. 무기력하게 손만 허공에 내저을 뿐이다.

 늘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홀레는 오히려 그래서 이면의 진실을 볼 수 있는 자였다. <네메시스>에서도 오직 그만이 누구도 보지 못했던 진실을 본다. 

  그건 <데빌스 스타>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제는 보아도 어찌 할 수가 없다.(특히나 중반에 미리 피해자를 특정하고 오슬로 경찰들이 함정을 파놓고 범인을 기다리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여기서 요 네스뵈는 우리에게 <네메시스>의 도입부를 환기시킨다. 경찰의 요청으로 도촬 장비를 대여해주는 '오토'란 남자로 시점을 옮겨 CCTV로 모든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나 <네메시스>처럼 CCTV는 진실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 장비가 아니라 애초부터 바탕이 되는 세계가 잘못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서 범인이 한 시체 처리도 주제와 상관이 있어 흥미롭다. 그는 시체의 악취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가황고무라는 것으로 밀봉한다. 이것은 그대로 노르웨이가 감추고 싶은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과 닮아있지 않은가. 하지만 아무리 은폐하고 밀봉시켜도 노출이 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이것은 물론 요 네스뵈가 노르웨이에게내는 경고라 하겠다. 그런데 이 이면의 은폐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범인의 직업도 그렇고 눈꺼풀 안에 놓여 있던 다이아몬드도 실은 '블러드 다이아몬드'라고 해서 시에라 시온에서의 끔직한 학살의 소산이다. 이런 사소한 것 하나까지 다 정교하게 계산되어 있는 것을 보노라면 문득 이런 말을 하고 싶어진다. 아악! 당신 혹시 셜록 홈즈의 재래 아냐? 그런데, 헉! 괄호 안을 너무 길게 썼다. 수고스럽겠지만 괄호 앞으로 돌아가서 먼저 나온 문장을 확인한 다음 뒷 문장을 읽어주시길) 그것은 이면의 세력이 가지고 있는 힘이 강대해졌기 때문은 아니다. 해리 홀레가 싸우는 것은 실체하는 적이 아니라 그 적을 근본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 다시 말해 노르웨이의 이면을 은폐하고 그러면서 계속 존치시키는 사상인 것이다.

 이제 그는 보다 본질적인 대상을 상대해야 한다. <데빌스 스타>의 시간적 배경이 한창 더운 여름이라는 설정은 바로 그 때문이다. 오슬로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이 휴가를 가 버려 도시는 현재 텅 비어있다. 경찰 조직도 마찬가지다. 요 네스뵈가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를 떠올려 보라 . 주인공 네오가 궁극의 적과 맞서 싸울 때 도시는 말끔히 비어 있었다. 남은 것은 오로지 싸워야 할 적 말고는 없었다. 그것과 같다. 해리 홀레가 이제 고통을 방치하고 과오를 누적시킨 궁극의 장본인인 사상 자체와 결전을 치른다는 의미에서 요 네스뵈는 오슬로를 텅 비워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사상의 정체를 팬타그램으로 알린 것이다.

 해리 홀레는 오래도록 서양 문명을 지배해 온 가부장적인 사유와 싸워야 한다. 하이데거의 말에 따르면 자신과 같지 않은 타자는 용납지 않고 같게 만들지 못하면 무조건 배척해 버리는 고대 그리스 이후로 지속되어온 사상 자체인 것이다.
 
 그렇기에 요 네스뵈는 해리 홀레에게 끝도 모를 무기력을 선사했다. 그만큼 해리 홀레는 여성적 특질로 충만해 있다. 더하여 우리는 두 명의 여성을 아울러 보게 된다.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은 희생하려는 정숙한 여인(이 여인에 대한 남자의 생각을 주의 깊게 바라보면 이 여성과 바로 다음에 얘기하는 어머니가 비슷한 특질을 가지고 있고 그 특질은 또한 해리 홀레의 특질과 연결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요 네스뵈가 이것을 의도했음은 말한 세 명 모두가 한 남자와 모두 묶인다는 점에서 입증된다. 해리 홀레는 소설에서 '5'가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요 네스뵈는 독자에게 지속적으로 '3'을 떠올리게 만든다. '5'가 악마의 계략이었듯이 그렇다면 '3'도 계략인 것일까? 혹시 기독교 사상의 핵심인 삼위일체는 아닐까 생각도 해 보지만 너무 무리한 해석이라는 생각도 든다. 뭐, 아무튼.)과 과거의 잘못으로 사회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았으나 여전히 인간적인 품격을 유지하고 있는 어머니다. 특히 해리는 이 여인의 눈에서 할머니를 떠올리는데 그만큼 둘이 연결되어 있음을 뜻한다. 해리 홀레는 이 작품에서만큼은 여성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 

 결국 무기력은 소설에서 이중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고통의 현상이자 정체성의 확립이다. 요 네스뵈는 후자를 통해 해리 홀레가 어느 진영에 서 있는가를 밝힌다. 물론 그것은 범인의 존재에 투영되어 있듯이 보이는 것은 진실과 다르다는 의미에서 위선의 가면을 쓰고 배척과 은폐 밖에는 할 줄 모르는 졸렬한 가부장적 사상에게 핍박받고 희생당한 여성의 편이다. 동시에 사회적 약자의 편이며 반성과 참회를 요구하는 진실된 역사의 편이다. 그런 이유로 여기서의 무기력은 사실 무기력이 아닌 것이다. 그건 차라리 모든 것이 허위와 기만일 뿐인, 하지만 현재를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가부장적 사상으로부터  달아나려는 몸짓이라 해야 한다. 말하자면 그 몸짓이란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의 그 것과 같다. 무기력은 가부장이 바라는 모습이 아니다. 톰 볼레르의 활력이 그가 바라는 것이다. 오슬로 경찰의 평가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들에게 해리 홀레는 가장 약하고 쓸모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래서 해리 홀레는 누구보다 강한 자가 되어 맞서 싸울 수가 있는 것이다. 설득하고 세뇌하여 장악한 그 사상에서 가장 멀리 달아나 있기 때문이다. 해리 홀레가 쓰고 있는 무기력의 외피가 가진 의미란 그런 것이다.

 더없이 불안하고 약한 자가 되는 것이 오히려 강한 자가 되는 길이다. 상식의 견지에서 보자면 얼른 납득하기 어려운 이것이 요 네스뵈에겐 현실의 노르웨이를 구원할 대안의 무기가 된다. 해리 홀레가 알콜 중독에 빠지게 되는 본질적 이유도 사실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주류에서 이탈하기 쉬운 모든 몸짓이 거꾸로 구원을 향한 도약이 되는 것이다.

 과연 3부작의 마지막다운 결전이 아닐 수 없다.(여기에 대해 보다 더 많은 설명이 있어야 하겠지만 지금도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는 지금 세기의 복싱 대결이라며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들고 있는  매니 파퀴아오와 플로이드 메이웨더의 결전보다 더 흥미로운 싸움이 아닐 수 없다.

 결과가 궁금하신가? 그렇다면 '500원!'(이런 철지난 개그를! 안다. 나는 지금 당신의 실소를 보고 있다 아니, 경멸인가? 어쨌든 그것)이 아니라 직접 관전하시길.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읽는 편이 이 승부를 즐기기에 훨씬 더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관람료가 아까우면 어쩌지 하고 염려할 필요는 더욱 없다. 끝까지 결말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흥미롭게 전개되며 조금의 긴장감도 늦추지 못하게 만든다. 그건 라운드가 올라갈 수록 더욱 그렇다. 15R 쯤 가면 말 그대로 폭발이다.

 감히 말하지만 요 네스뵈가 얼마나 천부적인 이야기꾼인지 다시 한 번 실감했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었다. 분명 결코 놓쳐서는 안될 작품이다!X100.(다른 글보다 이 글에서 특히 괄호를 많이 썼는데 그건 이면의 진실을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는 요 네스뵈에게 나름의 오마쥬를 바치려 한 것임을 알아 주시길. 절대 글을 제대로 정리 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박박 우김!).)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양철나무꾼 2015-05-01 0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헤르메스 님의 장르소설 리뷰를 읽을 때마다 ×100의 느낌표와 ×100의 공감을 날리고 싶어집니다. 왜 문장끝마다 좋아요 버튼은 없는걸까요?
덕분에 이 아침 기분 좋게 시작합니다, 꾸벅~(__)

ICE-9 2015-05-01 06:36   좋아요 0 | URL
아앗! 양철나무꾼님 이런 과분한 칭찬을 해주시다니! 저야말로 메이데이의 아침을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릴 수밖에 없네요.. 오늘은 양철나무꾼님의 이 말씀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것 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연신 꾸벅~^ ^)

수이 2015-05-01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에서 헤르메스님의 유머와 어조가 그대로 느껴져서 흐뭇해요. 여전하시구나 싶어서. 잘 지내시죠? 그리고 곱하기 100_이라니! 헤르메스님이 이리 강추하시니 한번 슬쩍 관심을 가져볼까_ 하고 있어요.

ICE-9 2015-05-18 21:42   좋아요 0 | URL
오오! 야나님 너무 반가워요^ ^ 이렇게 반가운데 5월달은 정말 폭풍과 같았던지라 이제야 들어와 이렇게 댓글을 다는군요. 사는게 뭔지 ㅠ ㅠ 제가 아직 야나님 취향을 확실하게 몰라 선뜻 권하기엔 좀 망설여지지만 그래도 요 네스뵈는 믿고 권할만한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슬쩍 관심가져 보세요. 냐하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