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너무 오랜간만에 쓰는 글이라 어쩐지 자판을 두드리는 것조차 어색할 지경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뉴스에서 귀성행렬이란 말이 들려오고 있다. 마치 타임슬립한 느낌이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버린 것일까? 어쨌든 이제 좀 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그 숨쉬기를 일단 신간 추천으로 시작해 본다.


MOST WANTED


1.  시어도어 드라이저 - '시스터 캐리'


이번 달, 가장 읽고 싶은 소설은 단연 시어도어 드라이저(예전엔 테어도어 드라이저라고 불렀던 것 같다만)의 '시스터 캐리'다. 작년 우리나라에서 가장 핫 이슈가 된 단어가 다름아닌 '금수저, 흙수저'로 수저계급론이란 말을 들었다. 드라이저의 '시스터 캐리'는 바로 그 수저계급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한 사람이 사회에서 살아가는데 그가 처한 환경이 얼마나 결정적인 지 신랄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니까 말이다. 그렇게 '시스터 캐리'는 '하면 된다'는 식으로 모든 것은 전적으로 개인 능력에 달려있다고 짓까부는 꼰대들의 입을 단번에 침묵시킬 작품이다. 독서는 동시대의 시급한 문제와 연동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그래서 더 읽고 싶은 소설이기도 하다. 








 SO SO...


 2. 어니스트 브래머 - 맹인탐정 맥스 캐러도스 

 

 얼마 전 전자책으로 나온 것은 알았는데 이렇게 책으로도 나와주었다.

 역시 독서는 종이를 넘기는 손맛을 무시할 수 없다고 여기는 나로서는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엔 이번이 처음 소개되는 것이지 싶다. 나는 이 탐정의 존재를 해문출판사에서 나온 '세계의 명탐정 108인'이란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어린 마음에 어떻게 눈이 보이지도 않는데 탐정 일을 할 수 있단 말이야 하고 엄청 궁금했었다. 자고로 탐정이라 하면 셜록 홈즈가 잘 보여주다시피 세심한 관찰이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탐정의 이야기가 무척이나 궁금했었는데 그 아주 오래된 의문을 이제 풀 수 있을 것 같다.

 자, 캐러도스.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3. 켄 브루언 - '밤의 파수꾼'


 우리나라엔 '런던 대로'로 먼저 소개되었던 작가, 켄 브루언.

 콜린 파웰이 주연한 동명 영화가 성공했다면, 어쩌면 좀 더 일찍 이 작품을 만나볼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는 문자 그대로 폭망했고 켄 브루언의 이름도 이대로 멀어지나 싶었는데 갑자기 2001년작 '밤의 파수꾼'을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이다. 와우~!


 '밤의 파수꾼'은 켄 브루언에게 아주 중요한 작품 중 하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가장 대표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는 잭 테일러 시리즈의 첫 작품이니까 말이다. 오늘날의 명성은 '런던대로'와 '밤의 파수꾼'이 견인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2001년에 나왔다. 켄 브루언은 아일랜드 특유의 반골 기질과 오래도록 남아메리카나 일본, 아프리카 등지를 떠돌며 살아서 그런지 국외자적 느낌이 작품에서 많이 묻어난다. 그런 면에 나는 끌리는데 그래서 잭 테일러 시리즈가 많이 나와주었으면 좋겠다. 



4.  벨린다 바우어 - 블랙랜드


 데뷔작으로 그해 최고의 미스터리 소설에게 주는 골든 대거상을 받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아마도 무척 희박할 것이다. 하지만 영국 작가 벨린다 바우어는 그것을 해냈다.


 어쩌면 범죄가 아니라 이미 일어난 범죄가 미치는 영향에 대해 더 천착한다는 점이 새로운 시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는 지도 모르겠다. 많은 미스터리 소설들이 흔히 놓치는 것이 바로 유가족의 아픔이다. 범죄자의 인권은 많이 조명되지만 그 범죄로 인한 피해자의 인권은 조명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런 면에서 후자에 더 포커스를 맞춘 이 작품이 기대된다.






5. 기리노 나쓰오 - 여신기


 2005년부터 꾸준히 나오고 있는 세계신화총서.

 설마 기리노 나쓰오도 참여했을 줄은 몰랐다.

 '아웃'이나 '아임 소리 마마'에서 무시무시한 여성상을 보여준 그녀가 그리는 여신기라니 팬을 떠나 그 자체만으로도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 수 없다.

 솔직히 나는 이미 그녀의 여신상을 보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바로 '도쿄섬'이란 작품에서다. 예전부터 나는 그 소설이 김기덕의 영화 '나쁜 남자'처럼 그만의 구원자적 형태, 즉 어떤 여신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적어도 그런 지평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신기'는 그런 내 생각이 맞는지 틀린지 보여주는 작품이 될 것 같다.

 그녀와 개인적으로 나누는 흥미로운 대화처럼 읽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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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08 0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11 2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나라 꼴이 막장이다 보니 한해가 가고 오는 게 아무런 감흥이 없다. 아니, 희대의 뻘짓인 정부의 위안부 협정 때문에 연말 기분까지 잡쳐버렸다.

그 땅에 있기 싫어 어디 잠깐 갔다 왔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신간 추천 마지막 날. 부리나케 12월에 나온 책들을 스캔해 보니 반가운 책들이 눈에 띈다. 일단 그것부터 가장 읽고 싶은 책으로 추천해 본다.


MOST WANTED - 데이비드 브린, 스타타이드 라이징

  '오옷!'이란 감탄사와 함께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책이다.

데이비드 브린은 해외에서 꽤 명성이 자자한 SF작가인데 특히 업리프트 사가(UPLIFT SAGA)로 유명하다. 1980년 첫 작품 '선 다이버'로 시작된 이 사가는 주로 다섯 개의 은하계로 구성된 '업리프트 우주'에서 벌어지기에 그 우주의 이름을따 '업리프트 사가'로 부르게 되었다. 업리프트 사가는 98년까지 모두 여섯 작품이 나왔고 이번에 소개된 '스타타이드 라이징'은 이 사가의 두 번째 작품이다. 발간은 1983년. 발간된 그 해, SF 작품의 최고 상의 양대 산맥인 네뷸라와 휴고 상 모두를 수상했다. 한 마디로 걸작.

 사실 우리나라에 처음 발간된 것은 아니다. 

 예전에 '움직이는 책'이란 출판사에서 '떠오르는 행성'이란 제목으로 나왔었는데 팬층이 그리 두텁지 않은 우리나라 SF 상황상, 곧 절판되고 말았다. 뒤늦게 이 책의 존재와 가치를 알고 SF를 좋아하는 많은 이들이 찾았었는데 이미 엄청 희귀해져 버린 뒤라 애만 동동 태우게 만들었다. 그런 고로 나를 비롯하여 이 책의 출간이 반가운 이들이 참 많을 것이다. 부디, 꼭 읽고 싶다.


 코니 윌리스 - 화재 감시원


 고맙게도, 정말 고맙게도 SF 작품들을 꾸준히 출판하는 출판사가 또 하나 생겼다. 바로 아작이다.

 '리틀 브라더'로 처음부터 내 마음을 설레게 만들더니 이번엔 코니 윌리스의 화재 감시원으로 완전히 아작내고 있다. 기쁘게 KO 당하련다. 하하하.

 이 책은 단편집이다. 표제작 '화재 감시원'은 코니 윌리스의 최고작으로 평가받는 단편이다.

 코니 윌리스의 대표작이라고 한다면 열린책들에서 나온 두 작품, '둠스데이 북'과 '개는 말할 것도 없고'리 할 것인데 그 두 작품 모두의 모태가 된 작품이 바로 '화재 감시원'이다.

 이만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참 보기 힘들어 코니 윌리스를 좋아하는 이들을 많이 애태웠는데, 그렇다고 번역이 안 되었던 것은 아니다.예전 두 권으로 나온 '세계여성소설걸작선'에 번역되어 실린 적이 있다. 하지만 이 책도 절판의 운명을 맞아, '떠오르는 행성'만큼이나 희귀해져 버렸다. 당연히 '화재 감시원'도 볼래야 볼 수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나와 준 것이 반갑지 않을 수 없고, 꼭 읽고 싶지 않을 수 없다.



SO SO...


  조이스 캐롤 오츠 - 그들


  조이스 캐롤 오츠의 대표작.

  읽었지만 이렇게 나오면 또 만나보지 않을 수 없다.

  캐롤 오츠와 아직 만나지 못했다면 이 책으로 그녀와의 만남을 시작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주제 사마라구 - 카인


 그렇지 않아도 오래도록 나와주기를 기다렸던 책.

 그가 재해석한 신약성서와 묵시록을 다 만나본 나는 그의 구약성서 재해석을 피할 도리가 없다.

 









 루 윌리스 - 벤허


 솔직히 루 월리스의 벤허가 나올 줄은 몰랐다.

 원래 루 월리스는 무신론자로 처음 이 책을 쓰려고 했던 목적도 예수가 허구적 존재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오래도록 그는 예수와 관계있는 자료들을 광범위하게 모았고 예루살렘마저 몇 차례나 실제 답사하기도 했다. 그렇게 오래 예수를 연구한 결과 루 윌리스는 애초의 생각과 달리 예수가 허구가 아니라 진짜로 존재했음을 깊이 믿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책의 내용도 완전 뒤집혀 버렸다. 이렇게 해서 나온 책이 바로 '벤허'였다.

 '벤허'는 오로지 예수를 중심으로 돌았던 오래된 그의 삶의 궤적 그리고 그 결과 가지게 된 그의 회심이 흥건히 배여든 노작이다. 그런 까닭에 영화의 원작이 아니라 이 소설 자체로도 얼마든지 시간을 들여 벗할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 보여진다.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말로 꼭 한 번 읽어보고픈 작품이었는데 이렇게 나와주어서 반갑다.



  다음 달에도 내 눈을 번쩍 뜨게 만드는 반가운 책들이 많이 있기를 바라며 1월의 신간 추천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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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6-01-06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새해엔 소설은 좀 자제하려고 했는데, 이러시면 도리가 없습니다여. 올해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꾸벅~(__)

희선 2016-01-07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소설을 많이 보기는 했지만, 아주 조금 본 게 SF예요 어떤 건 어렵기도 하더군요 찾아보면 재미있는 것도 있을 텐데... 코니 윌리스 책 두권은 봤네요 우연히... 재미있는 편이어서 읽기 시작하고 끝까지 봤네요 맨 위에 책도 SF군요 저같은 사람은 소설 많이 봤다고 말할 수 없는 처지네요 헤르메스 님은 소설뿐 아니라 다른 쪽도 많이 보고 많이 알아서 부럽습니다 저는 다른 걸 봐도 그때뿐이에요 거의 처음 보는 것이어서 그런 건지, 이제는 소설도 쉽지 않다는 걸 느낍니다 다른 거 생각하지 않고 재미있게 보면 좋을 텐데...

그 소설을 왜 썼는지도 알다니, 그런 게 책을 보는 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그 일은 잘 몰랐는데 인터넷에서 조금 봤습니다 뭔가 한다 해도 잘 해야지 그런 식으로 하면 될까 싶군요 빨리 해야 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시간을 들여서 제대로 해야 하는 일이 있는데...


희선

2016-01-10 0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05 2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르부아르 오르부아르 3부작 1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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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에르 르메트르의  '오르부아르'를 읽으면서 켄 키지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가 생각났다.

 '오르부아르'의 주인공 알베르 마야르는 내게 꼭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주인공 맥머피처럼 보였다. 맥머피는 온전한 정신이었지만 수감 생활을 수월하게 하려고 미친 것처럼 꾸며 한 정신병동으로 이송된다. 하지만 이제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겠구나 싶었던 그의 생각은 거기서 보기좋게 빗나가 버리고 만다. 그 곳의 책임자인 수간호사 레취르가 환자들의 자유를 마구 억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환자들은 레취르에게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는다. 맥머피는 그걸 이해할 수 없다. 왜 그들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저렇게도 쉽게 포기하는 것일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맥머피는 주위 환자들을 움직여 저항하려 한다. 하지만 레취르는 만만치 않다. 화려한 언변과 교묘한 책략으로 맥머피의 저항을 체계적으로 무너뜨려 간다. 그러나 맥머피가 진짜 힘들었던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환자들이 레취르가 만든 세계에 너무 적응되어 버린 나머지 바꿀 의지를 전혀 가지지 않는 것이다. 판단도, 의지도 남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것에 너무 길들여진 그들이라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부추기는 맥머피를 오히려 원망하기까지 한다. 그가 나타나기전까지는 편안하게 살고 있었는데 왜 힘들게 하냐면서. 그들은 지시로 강요받는 삶을 안정이라 여기고 예속을 자유라 생각한다. 자신의 부리로 자기 날개를 쪼아 날 수 없게 되어버린 키위처럼 그들은 지금의 세계를 절대라 여기고 그 둥지에서 나올 생각을 않는다. 그것이 맥머피를 고립시킨 결정적인 이유였고 결국 맥머피마저 그들 중 하나가 되어버린다.



 이러한 맥머피가 알베르 마야르와 자꾸만 겹쳤던 것은 알베르가 걸어가는 길도 그리 다르지 않았던 탓이다. 시대의 불의에 저항도 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책임도 떠 맡았지만 결국엔 그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에두아르의 사기에 가담하고 도피를 택한다. 맞다. 한 개인이 시대를 이기기란 어렵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세상엔 세 가지의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 같다. 한 편엔 레취르처럼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타인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다른 한 편엔 맥머피와 같이 타인의 공존과 해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려는 사람이 있다. 이 둘은 지향하는 바가 서로 다를 지언정 그래도 모두 능동적인 인물들이다. 어쨌든 스스로 자기의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해 나가려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마지막 한 편에 서 있는 이들은 이와 정반대의 사람들이다. 레취르에게 동조했던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생각하지도 않고 남이 이끄는 대로 한없이 끌려가기만 하는, 지극히 수동적인 사람들인 것이다. 만일 레취르와 맥머피가 벌이는 투쟁을 게임에 비유할 수 있다면, 이런 수동적인 존재들을 판돈으로 놓고 얼마나 자기 쪽으로 가져오느냐를 두고 벌이는 포커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는 편하지만 자유 없는 감옥을 주려 하고, 또 누구는 척박하지만 주체가 될 수 있는 자유를 주려 한다. 만일 당신이 판돈의 일부라면 어디에 속하고 싶을까?


 피에르 르메트르의 '오르부아르'도 다르지 않다.

 한 편에 레취르와 다를 바 없는 앙리 도네프라델이 있다면 정반대 편에 맥머피라 할만한 알베르 마야르와 에두아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 나오는 환자들과 다를 바 없는 프랑스 국민들이 있다. 그들은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하나도 모른다. 그래서 그저 앙리와 알베르 그리고 에두아르가 벌이는 거짓과 사기에 놀아나기만 한다. 그런데 이런 거짓과 사기는 조제프 메를랭이 보여준 바와 같이 적절한 관심과 적극적인 판단과 행위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전혀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고 그래서 휘둘리기만 했던 것이다. 맥머피는 그런 그들의 희생자였다. 알베르와 에두아르는 그런 맥머피의 동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알베르와 에두아르의 사기는 그런 프랑스 국민들에 대한 복수라고도 할 수 있다.


 이야기 초반에서 앙리는 전쟁에서 전과를 올려 자신의 신분 상승을 꾀하기 위해 곧 전쟁이 끝나는데도 일부러 병사들을 차출해서 정찰을 보내고는 그 중 둘을 살해하여 적군에게 살해된 것처럼 꾸며 그 보복 차원에서 자신의 부대원들을 독일군과 싸우게 한다. 바로 그 진격에서 알베르와 에두아르는 커다란 비극을 겪는다. 알베르는 앙리에게 죽을 뻔하고 에두아르는 포탄에 얼굴 일부분이 문자 그대로 날아가 버린다. 처음 읽을 때는 몰랐지만 다 읽고 보니 실은 여기에 르메트르가 '오르부아르'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이 다 드러나 있었다. 여기서 주의해 볼 것은 알베르와 에두아르가 비극을 당하게 된 계기다. 그들은 앙리의 명령에 따라 무조건 돌진하지 않았다. 자신이 마주한 상황 앞에서 스스로 생각을 했고 행동으로 옮겼다. 알베르는 문득 발견한 앙리가 조작한 시체의 자세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여 멈춰서선 진실을 찾는 행위를 했으며 에두아르는 앙리가 알베르를 파묻은 흔적을 보고 스스로 거기에 병사가 있다고 생각하고 되돌아가 온 힘을 다해 그를 구해낸다. 이렇게 그들은 비슷했다. 그들은 모두 상황을 수동적으로 대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해석하고 판단하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실천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앙리의 명령에 무작정 달려간 다른 병사들과 달랐다. 전쟁은 상황이 절대적 힘을 가진다. 명령 불복종은 무조건 총살이듯 전황이 한 개인의 의지를 압도한다. 알베르와 앙리가 있던 부대의 최고 지휘자인 장군조차 상황 때문에 자기 뜻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알베르와 에두아르는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한 것이다.


 아무리 상황이 개인을 결박해도 송곳처럼 뛰쳐 나오는 이들이 있다. 그건 앙리처럼 순전히 개인적 욕망에 따른 것일 수도 있고, 알베르와 에두아르처럼 진실을 알려는 마음 혹은 타인을 도우려는 마음으로 인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주체인 개인들이 존재한다. 어쩌면 우리 역사란 그런 그들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지도 모른다. '오르부아르'는 그런 개인들에게 실컷 활약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주려 한다. 그래서 우리는 앙리와 그 반대에 서 있는 알베르와 에두아르의 이야기를 비슷한 비중으로 읽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대적 상황에 굴하지 않고 순수한 주체성으로 가득한 존재들을 경험하기 위하여.


 그렇다면 르메트르가 '오르부아르'를 통해 독자들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려고 하는 지도 알게 되는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알베르와 에두아르의 사기가 당한 이들에게 궁극적으로 가져왔던 것. 바로 수동성의 파국이란 것을 말이다. 알베르와 에두아르의 사기가 복수로 읽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왜냐하면 전쟁이 바로 그런 수동성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언제나 그로부터 이익을 보려는 소수의 획책으로 벌어진다. 다수는 그저 거대한 파고 앞의 작은 조각배처럼 휘말릴 뿐이다. 그들이 애국에 무분별하게 선동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다면 결국 자신들마저 파멸시킬 전쟁을 막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았기에 그들은 죽었고 자신의 무덤조차 온전히 가지지 못하고 함부로 묻힌 것이다. 전쟁은 다수의 맹종 그리고 수동적인 방관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그리고 이는 전쟁을 벌이려는 소수가 전쟁이 오로지 소수인 자신들의 이익에 봉사할 뿐인데도 마치 다수에게 이익이 되는 것처럼 선전하여 가능해진 것으로 이런 소수의 선전, 선동은 그대로 사기와 마찬가지다. '오르부아르'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된 동력이 사기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개인의 의지를 가없이 억압하는 상황의 가장 대표적 존재인 전쟁 자체가 사기인 것이다. 조지 부시가 이라크 전쟁을 벌였을 때 그 이유로 든 이라크의 생화학 무기 보유가 사기로 드러났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알베르와 에두아르는 사기에 사기로 대응해 사기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다. 하지만 르메트르는 이들의 방법에 동조하지는 않는다. 르메트르는 마키아벨리가 아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건 알베르와 에두아르의 사기를 앙리의 사기와 병치시키고 있다는 것에서 드러난다. 결국 알베르와 에두아르가 아무리 선의로 자신들의 수단을 정당화하려 해도 앙리와 뭐가 다르냐고 반문하는 것이다. 에두아르의 가면과 죽음이 이것을 결정적으로 보여준다. '깨진 얼굴'의 에두아르는 사기가 벌어지는 동안 자신의 기분에 따라 이런 저런 가면을 바꿔 쓴다. 이것은 이유야 어쨌든 거짓을 말하기로 한 이상, 그 거짓 안에서 자신의 진실을 찾아낼 수 없음을 뜻한다. 그런 면에서 광기는 그에게 필연적으로 도래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에두아르와 알베르 모두 프랑스에 머물지 못하게 되는데 이는 르메트르가 독자들에게 그들의 길이 결코 올바른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에두아르는 죽어서 프랑스에 머무를 수 없고, 알베르는 도피해야 해서 머무를 수 없다.


 그러므로 구원을 향한 길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했다. 그렇기에 여기서 조제프 메를랭의 존재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그의 길이 르메트르가 생각하는 참된 길이다. 이는 또한 진정한 주체는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어디까지나 타인에 대한 책임을 적극적으로 떠맡고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길이기도 하다. 조제프 메를랭이 그렇다. 그는 앙리가 획책하던 무덤 사기를 성실한 조사로 알아챈 유일한 사람이다. 앙리는 그를 회유하기 위해 뇌물로 십만 프랑이나 제시했지만 누구보다더 보잘 것 없었고 무능력했던 조제프 메를랭은 넘어가지 않는다. 다른 무엇도 아닌 자신의 신념에 따른 결과였다.


 그는 전혀 내비치지 않았지만, 사실 이 공동묘지들은 그를 너무 가슴 아프게 했다. 이곳은 그가 아무도 원치 않은 이 직위에 임명되고 나서 세 번째로 감사하는 묘지였다. 전쟁을 식량 제한과 식민지부의 공문들로만 접했던 그에게 있어서 첫 번째 공동 묘지 방문은 실로 충격적인 체험이었다. 그의 뿌리 깊은 인간 혐오증이 뒤흔들렸다. 그것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죽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것에는 익숙해져 있었다. 지구는 늘 대재앙이나 역병으로 황폐화되기 일쑤고, 전쟁은 이 둘의 조합에 불과하다. 그를 탄환처럼 꿰뚫은 것은 죽은 이들의 나이였다. 대재앙은 만인을 죽이고 역병은 아이들과 노인들을 죽이지만, 젊은이들을 그렇게 대량으로 학살하는 것은 오직 전쟁뿐인 것이다.(p. 320)


 그는 전쟁에서 아무 이유없이 희생당한 젊은이들을 기억하고 거기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를 한 것이었다. 그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생각하거나 관심가지지 않았던 그들을 말이다. 그들만큼이나 관심받지 못했고 인정받지 못했던 조제프 메를랭.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를랭, 그만은 그들을 기억하고 적어도 그들의 죽음에 걸맞는 존엄을 찾아주려 했다. 그가 앙리의 부정을 보고하는 보고서에 그가 받은 십만 프랑 지폐를 하나하나씩 모두 붙였던 것은 그 지폐 하나로 치환되어 버린 프랑스 젊은이들의 죽음을 부디 기억해 달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메를랭을 통해 르메트르는 '오르부아르'의 여정을 끝낸 우리가 이제 어디로 시선을 향해야 하는 지 확실하게 가리켜 준다. 혼자 힘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넘어 기꺼이 타인에 대한 책임을 떠맡아 그것을 실천하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함을, 바로 그 때에 진정 자유로워지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그것을 행한 당사자인 나라는 것을 말이다. 르메트르가 에필로그의 마지막을 굳이 메를랭으로 맺은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설령 '오르부아르'에 나온 모든 이들을 잊더라도 이 사람만은 기억하길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엄청난 액수의 돈을 포기하고 그만한 부정을 바로 잡았으나 그의 삶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고 비루하기만 하다. 그러나 르메트르는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제 그는 상황에 떠밀리지 않음을. 설사 계속 보잘것 없고 약한 존재로 남을 지라도 늘 자기 뜻대로 생각하고 행위하면서 시대가 망각에 빠뜨리려는 타인들을 기억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다하려 애쓴다는 것을. 그가 결국 생소뵈르 군사 묘지의 관리인이 된 것은 그런 그의 실천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이러한 르메트르의 진심은 시대를 넘어, 국경을 넘어 세월호의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명징하게 울린다. 우리들에게 세월호에서 숨진 아이들은 메를랭에게 프랑스의 젊은 전사자들과 같다. 기억해야 하고 우리가 책임을 기꺼이 떠맡아 그를 위해 뭐든 실천해야 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오르부아르'는 그런 의지를 우리들에게 불러 일으킨다. 화가 마티스의 그림과 같은 선명함과 귀스타브 쿠르베의 리얼리즘적인 세밀함으로 그런 의지를 더욱 벼리게 만든다. 얼마전 세월호 청문회가 있었다. 중계 방송을 통해 변명과 무책임으로 일관하는 가해자들을 보면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세월호의 아이들을 얼른 망각에 묻어 버리는 것. 그런 그들의 모습은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 증인인 알베르를 묻었던 앙리 그대로였으며 그들이 누구이며 왜 죽어야 했는지 이유를 알기보다 하루라도 빨리 묻고 그것으로 서둘러 망각하려 했던 프랑스 모습 그대로였다. 에두아르의 존재하지 않는 추모 기념비는 아마도 프랑스의 그러한 거짓된 추모를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다면 에두아르의 사기는 우리들에게도 보내는 경고요, 복수의 예고가 될 것이다.


 놀랍도록 경탄하며 읽었다. 둔중한 마음의 울림을 겪었다. '오르부아르'가 그랬던 것은 분명 자꾸만 환기되는 세월호의 참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그 비극 앞에서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오르부아르'가 내내 묻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 생각하려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지만 쉽지 않다. 알베르가 앙리 때문에 흙 속에 묻혀 있을 때 그는 포격의 여파로 날아온 말머리 때문에 살아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살린 그 말 머리를 선명하게 기억하려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이것은 자신이 나아갈 곳은 알지만 도대체 어떻게 걸어가야 할 지 얼른 그 방법을 찾을 수 없는 것과 같지 않을까? 지금의 나처럼.

 그러니 나도 알베르만큼이나 어서 그 말머리를 찾고 싶다. 그것을 찾을 때까지 '오르부아르' 곁에서 꾸준히 사유하련다. 주체와 책임 그리고 실천을 화두로 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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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1 00: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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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3 0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06 0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피처럼 붉다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1
살라 시무카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누구나 안다. 삶은 동화가 아니다.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만 같았던 여름. 하지만 어느새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문득 우리는 언젠가 깨닫는다. 정말 곤혹스럽게도 외투도 없이 겨울의 추위 속에 벌벌 떨며 서 있구나 하는 것을. 겨울이 예고도 없이 찾아오듯이 삶도 예측불가능하다. 그것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지만 지금은 그게 오히려 우리의 기회인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살라 시무카의 ‘피처럼 붉다’를 읽은 것이다.


 작가의 이름이 생소하다. 당연하다. 지금 막 우리에게 소개된 작가니까. 오래도록 서평 활동을 하다가 ‘피처럼 붉다’로 데뷔했다고 한다. 나도 서평이라는 것을 끄적이고 있어서 그런가 작가가 왠지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급이야 하늘과 땅 차이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응원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제목에서 이미 눈치챘을 지도 모르지만 이 소설은 백설공주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피처럼 붉다’는 동화 ‘백설공주’의 앞부분에 나오는 말이다. 왕비가 창가에서 바느질을 하다가 그만 바늘에 손가락이 찔려 핏방울이 하얀 눈 위로 떨어진다.


[하얀 눈 위에 떨어진 여왕의 붉은 핏방울을 묘사한 그림. 이는 나중에 얘기할 안젤라 바렛의 그림책, 가장 처음에 나오는 그림이다.]


 그녀는 그것이 너무나 아름다워 피처럼 붉은 입술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길 바란다. 그것이 백설공주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보면 백설공주와 그리 관련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굳이 제목에서 또 첫 부분에서, 이 소설이 백설공주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는 걸 드러낸 것일까?


 내 취미 중 하나는 원서 그림책을 모으는 것이다. 지금까지 백설공주는 유명한만큼 많은 작가들이 자신만의 비전으로 그림책을 만들었는데 그 중에서도 영국 작가 안젤라 바렛의 것을 참 좋아한다. 살라 시무카의 ‘피처럼 붉다’를 읽으면서 틈틈이 바렛이 백설공주를 꺼내 읽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 소설의 주인공 루미키가 바렛이 묘사했던 백설공주의 면모를 많이 지니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안젤라 바렛의 백설공주 일러스트를 배경으로 '피처럼 붉다'를 찍어 보았다. 백설공주가 여왕의 계략에 의해 왕궁에서 쫓겨난 장면으로, 바렛은 백설공주에게 참으로 가련한 상황이 아닐 수 없는 이 장면을 질주하는 모습으로 그려, 해방과 자유의 분위기를 더 강조했다. 하얀 옷에다 숲의 동물들까지 같이 움직이게 하여 대지의 여신으로서의 모성 이미지를 더 강조해 보인다. 이는 백설공주가 장차 일곱 난장이에 대해 맡게 될 역할에 비추어볼 때, 가짜 모성인 여왕에 대비하여 진짜 모성으로서의 여인 이미지를 투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피처럼 붉다'의 백설공주 루미키도 이와 연장선 상에 있다.]



 바렛의 백설공주가 독특한 것은 백설공주의 이야기를 남성 사회에서 독립된 여성이라는 관점에서 풀어냈다는 것에 있다. 그것은 특히 백설공주의 아름다움을 시기하는 여왕과 백설공주를 묘사하는 것의 차이에서 두드러져 나타는데 바렛은 여왕과 백설공주를 문명과 자연 혹은 전원의 이미지로 서로 대비시킨다. 즉 여왕은 주로 폐쇄된 문명 공간 안에 갇혀 음모를 꾸미고 백설공주는 사방이 탁 트여있거나 열려 있는 공간에서 자유를 누리고 타인과 공존하는 것이다. 이는 그 문명이 왕이라는 남성에 의해 뒷받침 되는 질서라는 점에서 여왕이 가부장적 질서에 포획된 존재임을 나타내고 백설공주는 그 문명에서 탈주함으로써 독립된 존재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렇게 하여 여왕이 백설공주를 죽이려는 이유가 아름다움의 시기가 아닌 전혀 다른 것으로 되는데 그것은 바로 백설공주만이 누리고 있는 독립된 자아에 대한 질투가 되는 것이다. 바렛의 백설공주는 그런 주제의 그림책이었다.



 [여왕은 이렇게 문명의 공간에 있지만 항상 갇힌 존재로 그려진다. 이런 식으로 여왕에겐 왕이라는 남성 중심 질서에 포획되어버린 여성의 이미지가 강조되고 있다. 위의 백설공주의 그림과는 완전히 상반된다.]


 살라 시무카의 루미키도 그렇다. 즉, 여기서 백설공주를 모티브로 한 것은 바렛과 똑같이 남성 사회로부터 독립된 여성상을 그리려 한 것이란 말이다. 루미키는 정말 그러하다. 그는 여러 면에서 남성들이 바라는 여성의 모습과 다르다. 그는 남성들이 부여한 여성성에 초연하며 오로지 자신만의 삶의 원칙을 세우고 거기에만 맞춰 살아간다. 그녀는 가급적 세상과 거리를 유지하며 온전히 자신만의 세계에 웅크리려 했었다. 하지만 백설공주가 그랬듯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 일에 휘말리게 된다. 그것도 범죄에. 우연히 들른 학교의 암실에서 천장에 매달려 있는 무수한 지폐들을 보게 된 것이다. 그것도 사람 피로 범벅이 된 지폐들을...


 루미키는 처음엔 학교 당국에 고발하려 했지만 일단 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그 일을 벌인 장본인을 찾기로 한다. 그러다 동급생인 투카, 엘리사, 카스페르가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알고 보니 그 돈은 형사인 엘리사의 아버지에게 조폭들이 보낸 돈이었다. 엘리사의 아버지, 테르호 베이새넨은 조폭을 위해 일하는 나탈리아라는 러시아 여자와 몰래 정을 나누고 있었는데 그만 그녀가 지금까지의 생활을 청산하고 삶을 새로이 시작할 생각으로 조폭들이 베이새넨에게 보낸 돈을 가로챘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소설의 가장 처음에 나오는 것처럼 조폭의 총에 죽고 조폭들은 베이새넨도 거기에 가담했을 것이라 보고 협박조로 형사의 집 앞에 그 돈을 갖다 놓았다. 바로 그것을 우연히 집에 들른 엘리사와 친구들이 술김에 가져와 암실에 숨겨두었던 것이다. 돈이 사라지자 조폭과 베이새넨은 서로를 의심하고 갈등이 고조된다. 그러다 조폭은 형사에게 보다 강하게 협박하기 위해 그의 딸 엘리사를 납치하려 한다. 하지만 그 때 조폭은 그만 돈의 정체를 파헤치기 위해 엘리사의 옷을 빌려 입고서 위장 중이던 루미키를 엘리사로 오인하고는 납치하다 실패한다. 이로써 루미키는 그 돈이 아주 위험한 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엘리사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일의 결말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한다. 한편 조폭은 이 일에 제3자가 연루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제 루미키 일행을 표적으로 삼는다. 바야흐로 루미키가 조폭과 정면 대결할 순간이 무르익어 가는 것이다.


 ‘피처럼 붉다’는 이런 이야기다. 백설공주를 근간으로 한 이 이야기는 백설공주만이 아니라 빨간 두건과 신데렐라 이야기도 재치있게 엮어가면서 폭력으로 점철된 남성들에 대한 독립된 여성의 분투를 그린다. 동화 백설공주에서 분투는 아버지가 중심인 세계와 결별하고 자신만의 세상을 만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바로 일곱 난장이와 함께였다. 그것은 아버지처럼 군림을 통한 누림이 아닌(바렛의 동화는 왕인 아버지를 늘 협소한 공간에 홀로 있는 것으로 묘사하여 그 질서가 오로지 자기 혼자만을 위한 것임을 강조한다. 바렛은 백설공주가 고난을 당하는 진짜 원인이 사랑하는 왕비를 잃은 자기 아픔 밖에는 모르는 아버지에게 있음도 내비친다.) 대등한 관계에서의 책임으로 이뤄진 세계였다.


 [백설공주의 어린 시절을 묘사한 장면. 보는 방향에서 왼쪽의 작은 창에 갇힌 듯 보이는 남자가 바로 백설공주의 아버지 왕이다. 왕비를 잃은 슬픔에 빠져 있는 왕은 백설공주를 전혀 돌보지 않았고 결국 백설공주의 고난을 초래하고 말았다. 자기 본위의 남성 세계와 타자 지향 여성 세계를 극명하게 대비해서 보여주는 시퀀스다.]


 [알고보면 바렛은 처음부터 백설공주의 이런 면모를 강조했다. 인용한 그림은 여왕이 자기가 떨어뜨린 핏방울을 보고 피처럼 붉은 입술을 가진 백설공주가 태어나길 바라는 장면. 바렛은 벽을 세워 문명과 자연의 경계를 나누고 여왕이 그 벽을 건너 핏방울을 보는 것으로 묘사해 백설공주가 남성 중심 사회에서 벗어나 독립된 여성으로서의 존재할 것임을, 이렇게 처음부터 암시하고 있다.]


 루미키도 그렇다.  엘리사, 투카, 카스페르가 일곱 난장이인 것이다. 루미키가 본격적으로 북극곰 조직과 얽혀들게 된 것도 다 엘리사를 보호하고 싶다는, 그렇게 엘리사에 대한 책임 때문이었다. 이런 식으로 루미키는 바렛의 백설공주와 궤를 같이 하면서 독립된 여성의 진정한 완성은 책임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밀레니엄 시리즈의 히로인 리스벳 살란데르와 많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리스벳 살란데르 십대 버전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거침없이 남성들에게 한 방을 선사하는 그녀를 보면 더욱 그렇다. 여기에 타협은 없다. 굴종하여 배신당하느냐 아니면 맞서 싸워 자신의 독립을 지키느냐, 그 뿐이다.


 이야기 자체는 꽤나 재미있다. 무엇보다 문장이 냉소적이면서도 감각적이다. 군더더기 없이 여성의 심리를 논파하고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갈무리 한다. 마무리가 다소 허술한 감이 없진 않지만 원래가 삼부작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뒷맛은 꽤나 깔끔한 편이다. 시간을 들여 읽을만한 작품이다. 내겐 특히나 루미키가 매력적인 캐릭터라 더욱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전면으로 치고 나온 북극곰에 맞서 루미키가 어떤 활약을 펼칠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2부인 ‘눈처럼 희다’가 어서 나와주었으면 좋겠다.


              [혹시나 인용한 백설공주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실 지도 몰라서...

  가지고 있는 것은 91년의 초판이다. 물론 영어판은 발간 5년만에 절판되어 할 수 없이 프랑스 판으로 구했다. 그래서 가격이 ㅠ ㅠ 십 수년 전에 웬디북이란 곳에서 구입했는데 그 때만 해도 개인셀러로 발송 주소가 자신이 사는 아파트로 되어 있었다. 지금은 어엿한 회사가 되어 파주에 있다. 한 마디로 격세지감. '백설공주'는 현재 표지 갈이를 하여 다시 발간되었는데 여왕이 백설공주에게 빗을 꽂는 그림이 표지가 되었다. 초판본 표지와 비교하면 좀 안습ㅠ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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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21 02: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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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31 1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묻힌 거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이 답을 줄 필요는 없다. 그저 지금까지와는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면 된다. 그것이 설령 반딧불 같은 것이라고 해도. 내 생각, 내가 보고 느끼는 세계에 객관성이 스며들 수 있는 간극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괜찮은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그래서 가즈오 이시구로를 좋아한다. 그는 밀착된 것에 주름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밀착은 단일하고 견고한 세계다. 그 안에 있으면 이것이 전부구나 여길만한 세계. 가즈오 이시구로는 자신의 작품 속에 지속적으로 이러한 '밀착'을 집어넣었다. '남아있는 나날'에서 스티븐슨이 일하던 저택, '나를 보내지마'에서의 '헤일셤' 그리고 '우리가 고아였을 때'에서의 '공동조계'. 외부의 도움이 필요없는 자족적 세계. 그리하여 격리가 얼마든지 가능한 그런 세계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들 속에서 지속적으로 얼굴을 바꿔가며 등장한다.

 그런데 문득 주름이 생겨난다. 계기는 저마다 다르다. '남아있는 나날'에선 처음으로 하게 된 여행, '나를 보내지 마'는 문득 들게 된 자신의 원본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우리가 고아였을 때'는 갑자기 가지게 된 상실이다. 하지만 데려가는 곳은 같다. 주름이 허물어버린 폐허 위에서 지금까지 전혀 몰랐던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남아있는 나날'처럼 자신이 헌신했던 세계가 실은 죄악으로 점철된 곳이었음을 깨닫는 수도 있고, '나를 보내지마'처럼 자신이 의심했던 그 곳이 정말은 유일한 구원처였음을 확인하게 되기도 하며, '우리가 고아였을 때'처럼 그 세계에서 누리던 내 편익이 진실은 무엇 덕택이었나를 보게되기도 한다. 그것이 주름의 역할이다. 내가 전혀 서보지 못했던 저 바깥으로 데려가는 것. 그래서 자신이 있던 세계의 외곽을 보도록 하는 것.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은 그런 꼬드김이며 어린 시절 같이 놀자고 밖으로 불러내는 친구의 목소리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리고 '파묻힌 거인'이 나왔다.
 이시구로의 일곱번째 장편이다. 발간은 2015년. 바로 전작인 '나를 보내지마'가 2005년에 나왔으니 무려 10년만에 나온 장편이다. 시쳇말로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이시구로의 소설은 어떨까? 지금까지 그가 걸어온 길과 많이 달라졌을까? 거기에 대답하기 전에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한 가지 팁을 주자면, 이왕이면 '우리가 고아였을 때'를 읽고 이 작품, '파묻힌 거인'을 읽으면 좋지 않을까 싶다. 두 작품 모두를 읽어봐서 하는 말인데 연속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먼저 주인공이다. '파묻힌 거인'은 한 노부부가 기억 저편에 아스라히 남아있는 아들을 찾아가는 내용이다. 그들은 아들과 왜 헤어졌는지 모른다. 존재하는 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저 있으리라는 막연한 감만 믿고 떠나는 것이다. '우리가 고아였을 때'의 주인공도 그랬다. 그는 어렸을 때 알 수 없는 이유로 부모를 잃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어서 그는 내내 자신의 삶이 뭔가 부족하다고 여긴다. 탐정이 된 근본적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의 모든 삶은 그 이유를 아는 데 있으며 결국 존재가 불확실한 부모를 찾아 고향으로 떠난다. 이렇게나 비슷하다. '우리가 고아였을 때'에선 아들이 부모를 찾고, '파묻힌 거인'은 부모가 아들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외곽을 확인하게 되는 세계도 유사하다. 그 세계란 '우리가 고아였을 때'에선 '공동조계'요, '파묻힌 거인'에선 영국이다. '파묻힌 거인'의 시대적 배경은 아서 왕 사후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때이다. 란셀롯이 등장하기 전까지 아서 왕 전설의 주역 중 하나였던 가웨인 경이 소설에 직접 등장하고 있다. 이시구로는 가웨인 경을 묘사하는 데 있어 영국식이 아니라 프랑스식을 따르고 있는데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자꾸만 존 부어맨 감독이 만든 '엑스칼리버'에 나왔던 가웨인 경이 생각나 재미있었다. 그 영화에서 '테이큰'으로 유명해진 리암 니슨이 연기했던 가웨인 경이 소설 속 가웨인 경과 유사하다. 나는 리암 니슨을 연상하며 읽었다. 그 가웨인 경은 리암 니슨이 영화계에 처음 데뷔하여 맡은 역이기도 하다.

 어쨌든 다시 본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우리가 고아였을 때'의 '공동조계'와 '파묻힌 거인'의 영국은 비슷한 점이 있다. 모두 내부의 분열을 가까스로 통합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동조계는 무시를 통해, 영국은 망각을 통해 간신히 봉합하고 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모두 외부의 압력으로 위기에 봉착한다. 공동조계는 상하이에 닥쳐오는 전쟁이, 영국은 아서 왕때 당한 원한을 풀려 하는 바다 건너 색슨 족이 위기로 몰고 간다. 이런 점에서 영국은 공동조계의 확장판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결정적인 것은 '파묻힌 거인'의 존재다. 놀랍게도 '우리가 고아였을 때'에도 파묻힌 거인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진짜 거인은 아니고 소설 '파묻힌 거인'에서 거인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통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그렇다. 바로 주인공의 어머니다. 여기서 거인은 아마도 아틀라스를 의미하는 것 같다. 아틀라스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그리스 신화 속 신이다. '우리가 고아였을 때'의 어머니가 정녕 그러하다. 그녀는 자신을 희생해 아들의 세계를 지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것은 아들인 주인공이 반드시 마주해야만 하는 진실이다. 그것은 자신이 속한 세계를 전혀 다르게 보도록 만든다. 권리라고 생각했던 것 모두가 어머니의 희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진실은 혜택이었고 그래서 부채였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살게 된 자에게 세계란 더이상 전적인 누림도, 전적인 부정도 불가능한 곳일 것이다. 올바른 마음을 가진 자라면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이 그랬듯이 누리는 모든 것에 대해 이 역시 내가 또 누군가에게 갚아야 할 채무라는 생각에 책임을 자각할 것이다. 또한 부족한 부분을 주시하기 보다는 눈을 바깥으로 돌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어떻게 더 많이 되돌려 줄 것인가를 고민하게 될 것이다. 부족이 낳았던 나를 위한 여정은 이제 공존을 향한 남을 위한 여정이 된다. 이것이 '파묻힌 거인'이 가진 진실의 힘이었다. 이는 또한, 보다 외연을 확장하자면, 우리 모두가 역사 속에서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현재는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과거 혹은 지금 누군가의 희생으로 보존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얼른 떠오르는 것은 구약에 나오는 조금은 색다른 구원관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구원관이기도 하다. 구약에서 세계의 구원은, 아니 보다 정확한 의미로는 세계의 존립이라 해야 할 텐데 그것은 거창한 존재의 능력이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소돔과 고모라'이다. 당시 가장 크고 번화한 도시였던 소돔과 고모라. 신의 심판에서 그 도시를 구하는 데 필요했던 것은 단 한 명의 의인이었다. 그 하나가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한 것이다. 이는 다른 곳에서도 나온다. 정확한 출처가 당장 기억나지 않는데 아무튼 거기서도 이스라엘이 거대한 제국의 위협에서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인으로 살고 있는 70명 때문이라는 게 하나님의 직접 음성으로 들려온다. 구약에서 세계의 지속은 그런 자들에게서 이뤄진다. 권력과 재력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선의와 그에 따르는 포기와 희생으로 이 거대한 세계가 지탱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고아였을 때'의 주인공 어머니는 그런 존재다. 

 소설 '파묻힌 거인'이 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그 어머니를 다시금 마주하게 한다.

 당신에게 나쁜 짓이 저질러졌다는 것을 살아 있는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멋진 기념비를 갖게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조악한 나무 십자가나 색칠한 바위만 달랑 있는 경우도 있고 역사의 그늘 속에 묻혀 있어야 햐는 이들도 있다. 어느 경우든 당신은 아주 오래전에 일어났던 한 과정의 일부다. 그렇기 때문에 거인의 무덤은 죄 없는 어린 사람들이 전쟁에서 살육당했던 오래전 어떤 비극의 장소를 표시하기 위해 세워두었을 가능성이 있었다.그것이 아니라면 이 무덤이 왜 여기 서 있는지 이유가 쉽게 생각나지 않는다. (...) 하지만 이렇게 멀리 떨어진 높은 지대에 무거운 돌을 어른 키보다 높게 쌓아놓은 것은 왜일까? (p. 397)

 무덤은 어머니다. 그 아래 놓여있는 희생된 수많은 넋들. 그들의 죽음이 바로 우리의 오늘을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침묵으로 증언하는 장소. 여기가 바로 가즈오 이시구로가 독자를 데려가고자 하는 섬이다. 그들을 보는 것. 그들을 기억하는 것.

 커다란 비극이 터졌을 때, 늘 나오는 반응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화합의 미명 아래 망각을 강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설령 분열이 온다고 한들, 다시는 이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끝까지 기억하는 것이다. 일본에서 3. 11이 터졌을 때, 일본 정부는 국민들에게 망각을 강요했다. 국가에게 닥친 난관을 빨리 극복하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세월호의 비극이 일어났을 때 우리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서둘러 망각할 것을 강요하고 또 강요했다. 이런 걸 우리는 너무나 많이 경험했다. 그래서 잘 안다. 이런 망각은 설령 그것이 아무리 화합을 위한 것이라 해도 독약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망각을 바탕으로 한 화합은 진정한 의미의 화합이 아니며, 그런 화합이란 그저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방기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도. 그들이 원하는 것은 희생자들을 그냥 잘라내고 싶은 것이다. 그대로 무시해버리고선 눈 앞의 소나기를 급히 피하고 싶은 것이다. 여기엔 오로지 자기 보신의 욕망 밖에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망각은 희생자들을 또 살해하는 길이기에. 기억 자체가 저항이며 망각이 버린 넋들을 다시금 되찾아 오는 일이다. 바로 거기에 우리의 구원이 있다.  '파묻힌 거인'의 무덤이 '우리가 고아였을 때'의 어머니와 이어진다는 것은 가즈오 이시구로가 바로 그것을 암시하는 것이라 본다.

  비극의 희생자들을 잊지 않는 것. 그들을 늘 뇌리의 아랫목에 거하게 하는 것. 그것이 곧 세계를 지탱하는 힘이며 우리의 구원을 향한 여정의 시작이기도 하다고 '파묻힌 거인'은 말하는 것이다.

 그들을 기억하는 한, 우리는 다른 길을 택할 것이기에...
 적어도 비극을 반복하지 않는 길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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