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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이 답을 줄 필요는 없다. 그저 지금까지와는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면 된다. 그것이 설령 반딧불 같은 것이라고 해도. 내 생각, 내가 보고 느끼는 세계에 객관성이 스며들 수 있는 간극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괜찮은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그래서 가즈오 이시구로를 좋아한다. 그는 밀착된 것에 주름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밀착은 단일하고 견고한 세계다. 그 안에 있으면 이것이 전부구나 여길만한 세계. 가즈오 이시구로는 자신의 작품 속에 지속적으로 이러한 '밀착'을 집어넣었다. '남아있는 나날'에서 스티븐슨이 일하던 저택, '나를 보내지마'에서의 '헤일셤' 그리고 '우리가 고아였을 때'에서의 '공동조계'. 외부의 도움이 필요없는 자족적 세계. 그리하여 격리가 얼마든지 가능한 그런 세계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들 속에서 지속적으로 얼굴을 바꿔가며 등장한다.

 그런데 문득 주름이 생겨난다. 계기는 저마다 다르다. '남아있는 나날'에선 처음으로 하게 된 여행, '나를 보내지 마'는 문득 들게 된 자신의 원본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우리가 고아였을 때'는 갑자기 가지게 된 상실이다. 하지만 데려가는 곳은 같다. 주름이 허물어버린 폐허 위에서 지금까지 전혀 몰랐던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남아있는 나날'처럼 자신이 헌신했던 세계가 실은 죄악으로 점철된 곳이었음을 깨닫는 수도 있고, '나를 보내지마'처럼 자신이 의심했던 그 곳이 정말은 유일한 구원처였음을 확인하게 되기도 하며, '우리가 고아였을 때'처럼 그 세계에서 누리던 내 편익이 진실은 무엇 덕택이었나를 보게되기도 한다. 그것이 주름의 역할이다. 내가 전혀 서보지 못했던 저 바깥으로 데려가는 것. 그래서 자신이 있던 세계의 외곽을 보도록 하는 것.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은 그런 꼬드김이며 어린 시절 같이 놀자고 밖으로 불러내는 친구의 목소리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리고 '파묻힌 거인'이 나왔다.
 이시구로의 일곱번째 장편이다. 발간은 2015년. 바로 전작인 '나를 보내지마'가 2005년에 나왔으니 무려 10년만에 나온 장편이다. 시쳇말로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이시구로의 소설은 어떨까? 지금까지 그가 걸어온 길과 많이 달라졌을까? 거기에 대답하기 전에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한 가지 팁을 주자면, 이왕이면 '우리가 고아였을 때'를 읽고 이 작품, '파묻힌 거인'을 읽으면 좋지 않을까 싶다. 두 작품 모두를 읽어봐서 하는 말인데 연속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먼저 주인공이다. '파묻힌 거인'은 한 노부부가 기억 저편에 아스라히 남아있는 아들을 찾아가는 내용이다. 그들은 아들과 왜 헤어졌는지 모른다. 존재하는 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저 있으리라는 막연한 감만 믿고 떠나는 것이다. '우리가 고아였을 때'의 주인공도 그랬다. 그는 어렸을 때 알 수 없는 이유로 부모를 잃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어서 그는 내내 자신의 삶이 뭔가 부족하다고 여긴다. 탐정이 된 근본적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의 모든 삶은 그 이유를 아는 데 있으며 결국 존재가 불확실한 부모를 찾아 고향으로 떠난다. 이렇게나 비슷하다. '우리가 고아였을 때'에선 아들이 부모를 찾고, '파묻힌 거인'은 부모가 아들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외곽을 확인하게 되는 세계도 유사하다. 그 세계란 '우리가 고아였을 때'에선 '공동조계'요, '파묻힌 거인'에선 영국이다. '파묻힌 거인'의 시대적 배경은 아서 왕 사후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때이다. 란셀롯이 등장하기 전까지 아서 왕 전설의 주역 중 하나였던 가웨인 경이 소설에 직접 등장하고 있다. 이시구로는 가웨인 경을 묘사하는 데 있어 영국식이 아니라 프랑스식을 따르고 있는데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자꾸만 존 부어맨 감독이 만든 '엑스칼리버'에 나왔던 가웨인 경이 생각나 재미있었다. 그 영화에서 '테이큰'으로 유명해진 리암 니슨이 연기했던 가웨인 경이 소설 속 가웨인 경과 유사하다. 나는 리암 니슨을 연상하며 읽었다. 그 가웨인 경은 리암 니슨이 영화계에 처음 데뷔하여 맡은 역이기도 하다.

 어쨌든 다시 본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우리가 고아였을 때'의 '공동조계'와 '파묻힌 거인'의 영국은 비슷한 점이 있다. 모두 내부의 분열을 가까스로 통합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동조계는 무시를 통해, 영국은 망각을 통해 간신히 봉합하고 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모두 외부의 압력으로 위기에 봉착한다. 공동조계는 상하이에 닥쳐오는 전쟁이, 영국은 아서 왕때 당한 원한을 풀려 하는 바다 건너 색슨 족이 위기로 몰고 간다. 이런 점에서 영국은 공동조계의 확장판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결정적인 것은 '파묻힌 거인'의 존재다. 놀랍게도 '우리가 고아였을 때'에도 파묻힌 거인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진짜 거인은 아니고 소설 '파묻힌 거인'에서 거인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통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그렇다. 바로 주인공의 어머니다. 여기서 거인은 아마도 아틀라스를 의미하는 것 같다. 아틀라스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그리스 신화 속 신이다. '우리가 고아였을 때'의 어머니가 정녕 그러하다. 그녀는 자신을 희생해 아들의 세계를 지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것은 아들인 주인공이 반드시 마주해야만 하는 진실이다. 그것은 자신이 속한 세계를 전혀 다르게 보도록 만든다. 권리라고 생각했던 것 모두가 어머니의 희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진실은 혜택이었고 그래서 부채였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살게 된 자에게 세계란 더이상 전적인 누림도, 전적인 부정도 불가능한 곳일 것이다. 올바른 마음을 가진 자라면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이 그랬듯이 누리는 모든 것에 대해 이 역시 내가 또 누군가에게 갚아야 할 채무라는 생각에 책임을 자각할 것이다. 또한 부족한 부분을 주시하기 보다는 눈을 바깥으로 돌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어떻게 더 많이 되돌려 줄 것인가를 고민하게 될 것이다. 부족이 낳았던 나를 위한 여정은 이제 공존을 향한 남을 위한 여정이 된다. 이것이 '파묻힌 거인'이 가진 진실의 힘이었다. 이는 또한, 보다 외연을 확장하자면, 우리 모두가 역사 속에서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현재는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과거 혹은 지금 누군가의 희생으로 보존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얼른 떠오르는 것은 구약에 나오는 조금은 색다른 구원관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구원관이기도 하다. 구약에서 세계의 구원은, 아니 보다 정확한 의미로는 세계의 존립이라 해야 할 텐데 그것은 거창한 존재의 능력이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소돔과 고모라'이다. 당시 가장 크고 번화한 도시였던 소돔과 고모라. 신의 심판에서 그 도시를 구하는 데 필요했던 것은 단 한 명의 의인이었다. 그 하나가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한 것이다. 이는 다른 곳에서도 나온다. 정확한 출처가 당장 기억나지 않는데 아무튼 거기서도 이스라엘이 거대한 제국의 위협에서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인으로 살고 있는 70명 때문이라는 게 하나님의 직접 음성으로 들려온다. 구약에서 세계의 지속은 그런 자들에게서 이뤄진다. 권력과 재력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선의와 그에 따르는 포기와 희생으로 이 거대한 세계가 지탱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고아였을 때'의 주인공 어머니는 그런 존재다. 

 소설 '파묻힌 거인'이 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그 어머니를 다시금 마주하게 한다.

 당신에게 나쁜 짓이 저질러졌다는 것을 살아 있는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멋진 기념비를 갖게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조악한 나무 십자가나 색칠한 바위만 달랑 있는 경우도 있고 역사의 그늘 속에 묻혀 있어야 햐는 이들도 있다. 어느 경우든 당신은 아주 오래전에 일어났던 한 과정의 일부다. 그렇기 때문에 거인의 무덤은 죄 없는 어린 사람들이 전쟁에서 살육당했던 오래전 어떤 비극의 장소를 표시하기 위해 세워두었을 가능성이 있었다.그것이 아니라면 이 무덤이 왜 여기 서 있는지 이유가 쉽게 생각나지 않는다. (...) 하지만 이렇게 멀리 떨어진 높은 지대에 무거운 돌을 어른 키보다 높게 쌓아놓은 것은 왜일까? (p. 397)

 무덤은 어머니다. 그 아래 놓여있는 희생된 수많은 넋들. 그들의 죽음이 바로 우리의 오늘을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침묵으로 증언하는 장소. 여기가 바로 가즈오 이시구로가 독자를 데려가고자 하는 섬이다. 그들을 보는 것. 그들을 기억하는 것.

 커다란 비극이 터졌을 때, 늘 나오는 반응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화합의 미명 아래 망각을 강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설령 분열이 온다고 한들, 다시는 이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끝까지 기억하는 것이다. 일본에서 3. 11이 터졌을 때, 일본 정부는 국민들에게 망각을 강요했다. 국가에게 닥친 난관을 빨리 극복하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세월호의 비극이 일어났을 때 우리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서둘러 망각할 것을 강요하고 또 강요했다. 이런 걸 우리는 너무나 많이 경험했다. 그래서 잘 안다. 이런 망각은 설령 그것이 아무리 화합을 위한 것이라 해도 독약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망각을 바탕으로 한 화합은 진정한 의미의 화합이 아니며, 그런 화합이란 그저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방기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도. 그들이 원하는 것은 희생자들을 그냥 잘라내고 싶은 것이다. 그대로 무시해버리고선 눈 앞의 소나기를 급히 피하고 싶은 것이다. 여기엔 오로지 자기 보신의 욕망 밖에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망각은 희생자들을 또 살해하는 길이기에. 기억 자체가 저항이며 망각이 버린 넋들을 다시금 되찾아 오는 일이다. 바로 거기에 우리의 구원이 있다.  '파묻힌 거인'의 무덤이 '우리가 고아였을 때'의 어머니와 이어진다는 것은 가즈오 이시구로가 바로 그것을 암시하는 것이라 본다.

  비극의 희생자들을 잊지 않는 것. 그들을 늘 뇌리의 아랫목에 거하게 하는 것. 그것이 곧 세계를 지탱하는 힘이며 우리의 구원을 향한 여정의 시작이기도 하다고 '파묻힌 거인'은 말하는 것이다.

 그들을 기억하는 한, 우리는 다른 길을 택할 것이기에...
 적어도 비극을 반복하지 않는 길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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