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부아르 오르부아르 3부작 1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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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에르 르메트르의  '오르부아르'를 읽으면서 켄 키지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가 생각났다.

 '오르부아르'의 주인공 알베르 마야르는 내게 꼭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주인공 맥머피처럼 보였다. 맥머피는 온전한 정신이었지만 수감 생활을 수월하게 하려고 미친 것처럼 꾸며 한 정신병동으로 이송된다. 하지만 이제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겠구나 싶었던 그의 생각은 거기서 보기좋게 빗나가 버리고 만다. 그 곳의 책임자인 수간호사 레취르가 환자들의 자유를 마구 억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환자들은 레취르에게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는다. 맥머피는 그걸 이해할 수 없다. 왜 그들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저렇게도 쉽게 포기하는 것일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맥머피는 주위 환자들을 움직여 저항하려 한다. 하지만 레취르는 만만치 않다. 화려한 언변과 교묘한 책략으로 맥머피의 저항을 체계적으로 무너뜨려 간다. 그러나 맥머피가 진짜 힘들었던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환자들이 레취르가 만든 세계에 너무 적응되어 버린 나머지 바꿀 의지를 전혀 가지지 않는 것이다. 판단도, 의지도 남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것에 너무 길들여진 그들이라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부추기는 맥머피를 오히려 원망하기까지 한다. 그가 나타나기전까지는 편안하게 살고 있었는데 왜 힘들게 하냐면서. 그들은 지시로 강요받는 삶을 안정이라 여기고 예속을 자유라 생각한다. 자신의 부리로 자기 날개를 쪼아 날 수 없게 되어버린 키위처럼 그들은 지금의 세계를 절대라 여기고 그 둥지에서 나올 생각을 않는다. 그것이 맥머피를 고립시킨 결정적인 이유였고 결국 맥머피마저 그들 중 하나가 되어버린다.



 이러한 맥머피가 알베르 마야르와 자꾸만 겹쳤던 것은 알베르가 걸어가는 길도 그리 다르지 않았던 탓이다. 시대의 불의에 저항도 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책임도 떠 맡았지만 결국엔 그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에두아르의 사기에 가담하고 도피를 택한다. 맞다. 한 개인이 시대를 이기기란 어렵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세상엔 세 가지의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 같다. 한 편엔 레취르처럼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타인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다른 한 편엔 맥머피와 같이 타인의 공존과 해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려는 사람이 있다. 이 둘은 지향하는 바가 서로 다를 지언정 그래도 모두 능동적인 인물들이다. 어쨌든 스스로 자기의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해 나가려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마지막 한 편에 서 있는 이들은 이와 정반대의 사람들이다. 레취르에게 동조했던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생각하지도 않고 남이 이끄는 대로 한없이 끌려가기만 하는, 지극히 수동적인 사람들인 것이다. 만일 레취르와 맥머피가 벌이는 투쟁을 게임에 비유할 수 있다면, 이런 수동적인 존재들을 판돈으로 놓고 얼마나 자기 쪽으로 가져오느냐를 두고 벌이는 포커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는 편하지만 자유 없는 감옥을 주려 하고, 또 누구는 척박하지만 주체가 될 수 있는 자유를 주려 한다. 만일 당신이 판돈의 일부라면 어디에 속하고 싶을까?


 피에르 르메트르의 '오르부아르'도 다르지 않다.

 한 편에 레취르와 다를 바 없는 앙리 도네프라델이 있다면 정반대 편에 맥머피라 할만한 알베르 마야르와 에두아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 나오는 환자들과 다를 바 없는 프랑스 국민들이 있다. 그들은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하나도 모른다. 그래서 그저 앙리와 알베르 그리고 에두아르가 벌이는 거짓과 사기에 놀아나기만 한다. 그런데 이런 거짓과 사기는 조제프 메를랭이 보여준 바와 같이 적절한 관심과 적극적인 판단과 행위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전혀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고 그래서 휘둘리기만 했던 것이다. 맥머피는 그런 그들의 희생자였다. 알베르와 에두아르는 그런 맥머피의 동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알베르와 에두아르의 사기는 그런 프랑스 국민들에 대한 복수라고도 할 수 있다.


 이야기 초반에서 앙리는 전쟁에서 전과를 올려 자신의 신분 상승을 꾀하기 위해 곧 전쟁이 끝나는데도 일부러 병사들을 차출해서 정찰을 보내고는 그 중 둘을 살해하여 적군에게 살해된 것처럼 꾸며 그 보복 차원에서 자신의 부대원들을 독일군과 싸우게 한다. 바로 그 진격에서 알베르와 에두아르는 커다란 비극을 겪는다. 알베르는 앙리에게 죽을 뻔하고 에두아르는 포탄에 얼굴 일부분이 문자 그대로 날아가 버린다. 처음 읽을 때는 몰랐지만 다 읽고 보니 실은 여기에 르메트르가 '오르부아르'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이 다 드러나 있었다. 여기서 주의해 볼 것은 알베르와 에두아르가 비극을 당하게 된 계기다. 그들은 앙리의 명령에 따라 무조건 돌진하지 않았다. 자신이 마주한 상황 앞에서 스스로 생각을 했고 행동으로 옮겼다. 알베르는 문득 발견한 앙리가 조작한 시체의 자세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여 멈춰서선 진실을 찾는 행위를 했으며 에두아르는 앙리가 알베르를 파묻은 흔적을 보고 스스로 거기에 병사가 있다고 생각하고 되돌아가 온 힘을 다해 그를 구해낸다. 이렇게 그들은 비슷했다. 그들은 모두 상황을 수동적으로 대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해석하고 판단하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실천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앙리의 명령에 무작정 달려간 다른 병사들과 달랐다. 전쟁은 상황이 절대적 힘을 가진다. 명령 불복종은 무조건 총살이듯 전황이 한 개인의 의지를 압도한다. 알베르와 앙리가 있던 부대의 최고 지휘자인 장군조차 상황 때문에 자기 뜻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알베르와 에두아르는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한 것이다.


 아무리 상황이 개인을 결박해도 송곳처럼 뛰쳐 나오는 이들이 있다. 그건 앙리처럼 순전히 개인적 욕망에 따른 것일 수도 있고, 알베르와 에두아르처럼 진실을 알려는 마음 혹은 타인을 도우려는 마음으로 인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주체인 개인들이 존재한다. 어쩌면 우리 역사란 그런 그들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지도 모른다. '오르부아르'는 그런 개인들에게 실컷 활약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주려 한다. 그래서 우리는 앙리와 그 반대에 서 있는 알베르와 에두아르의 이야기를 비슷한 비중으로 읽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대적 상황에 굴하지 않고 순수한 주체성으로 가득한 존재들을 경험하기 위하여.


 그렇다면 르메트르가 '오르부아르'를 통해 독자들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려고 하는 지도 알게 되는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알베르와 에두아르의 사기가 당한 이들에게 궁극적으로 가져왔던 것. 바로 수동성의 파국이란 것을 말이다. 알베르와 에두아르의 사기가 복수로 읽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왜냐하면 전쟁이 바로 그런 수동성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언제나 그로부터 이익을 보려는 소수의 획책으로 벌어진다. 다수는 그저 거대한 파고 앞의 작은 조각배처럼 휘말릴 뿐이다. 그들이 애국에 무분별하게 선동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다면 결국 자신들마저 파멸시킬 전쟁을 막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았기에 그들은 죽었고 자신의 무덤조차 온전히 가지지 못하고 함부로 묻힌 것이다. 전쟁은 다수의 맹종 그리고 수동적인 방관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그리고 이는 전쟁을 벌이려는 소수가 전쟁이 오로지 소수인 자신들의 이익에 봉사할 뿐인데도 마치 다수에게 이익이 되는 것처럼 선전하여 가능해진 것으로 이런 소수의 선전, 선동은 그대로 사기와 마찬가지다. '오르부아르'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된 동력이 사기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개인의 의지를 가없이 억압하는 상황의 가장 대표적 존재인 전쟁 자체가 사기인 것이다. 조지 부시가 이라크 전쟁을 벌였을 때 그 이유로 든 이라크의 생화학 무기 보유가 사기로 드러났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알베르와 에두아르는 사기에 사기로 대응해 사기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다. 하지만 르메트르는 이들의 방법에 동조하지는 않는다. 르메트르는 마키아벨리가 아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건 알베르와 에두아르의 사기를 앙리의 사기와 병치시키고 있다는 것에서 드러난다. 결국 알베르와 에두아르가 아무리 선의로 자신들의 수단을 정당화하려 해도 앙리와 뭐가 다르냐고 반문하는 것이다. 에두아르의 가면과 죽음이 이것을 결정적으로 보여준다. '깨진 얼굴'의 에두아르는 사기가 벌어지는 동안 자신의 기분에 따라 이런 저런 가면을 바꿔 쓴다. 이것은 이유야 어쨌든 거짓을 말하기로 한 이상, 그 거짓 안에서 자신의 진실을 찾아낼 수 없음을 뜻한다. 그런 면에서 광기는 그에게 필연적으로 도래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에두아르와 알베르 모두 프랑스에 머물지 못하게 되는데 이는 르메트르가 독자들에게 그들의 길이 결코 올바른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에두아르는 죽어서 프랑스에 머무를 수 없고, 알베르는 도피해야 해서 머무를 수 없다.


 그러므로 구원을 향한 길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했다. 그렇기에 여기서 조제프 메를랭의 존재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그의 길이 르메트르가 생각하는 참된 길이다. 이는 또한 진정한 주체는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어디까지나 타인에 대한 책임을 적극적으로 떠맡고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길이기도 하다. 조제프 메를랭이 그렇다. 그는 앙리가 획책하던 무덤 사기를 성실한 조사로 알아챈 유일한 사람이다. 앙리는 그를 회유하기 위해 뇌물로 십만 프랑이나 제시했지만 누구보다더 보잘 것 없었고 무능력했던 조제프 메를랭은 넘어가지 않는다. 다른 무엇도 아닌 자신의 신념에 따른 결과였다.


 그는 전혀 내비치지 않았지만, 사실 이 공동묘지들은 그를 너무 가슴 아프게 했다. 이곳은 그가 아무도 원치 않은 이 직위에 임명되고 나서 세 번째로 감사하는 묘지였다. 전쟁을 식량 제한과 식민지부의 공문들로만 접했던 그에게 있어서 첫 번째 공동 묘지 방문은 실로 충격적인 체험이었다. 그의 뿌리 깊은 인간 혐오증이 뒤흔들렸다. 그것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죽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것에는 익숙해져 있었다. 지구는 늘 대재앙이나 역병으로 황폐화되기 일쑤고, 전쟁은 이 둘의 조합에 불과하다. 그를 탄환처럼 꿰뚫은 것은 죽은 이들의 나이였다. 대재앙은 만인을 죽이고 역병은 아이들과 노인들을 죽이지만, 젊은이들을 그렇게 대량으로 학살하는 것은 오직 전쟁뿐인 것이다.(p. 320)


 그는 전쟁에서 아무 이유없이 희생당한 젊은이들을 기억하고 거기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를 한 것이었다. 그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생각하거나 관심가지지 않았던 그들을 말이다. 그들만큼이나 관심받지 못했고 인정받지 못했던 조제프 메를랭.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를랭, 그만은 그들을 기억하고 적어도 그들의 죽음에 걸맞는 존엄을 찾아주려 했다. 그가 앙리의 부정을 보고하는 보고서에 그가 받은 십만 프랑 지폐를 하나하나씩 모두 붙였던 것은 그 지폐 하나로 치환되어 버린 프랑스 젊은이들의 죽음을 부디 기억해 달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메를랭을 통해 르메트르는 '오르부아르'의 여정을 끝낸 우리가 이제 어디로 시선을 향해야 하는 지 확실하게 가리켜 준다. 혼자 힘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넘어 기꺼이 타인에 대한 책임을 떠맡아 그것을 실천하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함을, 바로 그 때에 진정 자유로워지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그것을 행한 당사자인 나라는 것을 말이다. 르메트르가 에필로그의 마지막을 굳이 메를랭으로 맺은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설령 '오르부아르'에 나온 모든 이들을 잊더라도 이 사람만은 기억하길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엄청난 액수의 돈을 포기하고 그만한 부정을 바로 잡았으나 그의 삶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고 비루하기만 하다. 그러나 르메트르는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제 그는 상황에 떠밀리지 않음을. 설사 계속 보잘것 없고 약한 존재로 남을 지라도 늘 자기 뜻대로 생각하고 행위하면서 시대가 망각에 빠뜨리려는 타인들을 기억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다하려 애쓴다는 것을. 그가 결국 생소뵈르 군사 묘지의 관리인이 된 것은 그런 그의 실천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이러한 르메트르의 진심은 시대를 넘어, 국경을 넘어 세월호의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명징하게 울린다. 우리들에게 세월호에서 숨진 아이들은 메를랭에게 프랑스의 젊은 전사자들과 같다. 기억해야 하고 우리가 책임을 기꺼이 떠맡아 그를 위해 뭐든 실천해야 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오르부아르'는 그런 의지를 우리들에게 불러 일으킨다. 화가 마티스의 그림과 같은 선명함과 귀스타브 쿠르베의 리얼리즘적인 세밀함으로 그런 의지를 더욱 벼리게 만든다. 얼마전 세월호 청문회가 있었다. 중계 방송을 통해 변명과 무책임으로 일관하는 가해자들을 보면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세월호의 아이들을 얼른 망각에 묻어 버리는 것. 그런 그들의 모습은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 증인인 알베르를 묻었던 앙리 그대로였으며 그들이 누구이며 왜 죽어야 했는지 이유를 알기보다 하루라도 빨리 묻고 그것으로 서둘러 망각하려 했던 프랑스 모습 그대로였다. 에두아르의 존재하지 않는 추모 기념비는 아마도 프랑스의 그러한 거짓된 추모를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다면 에두아르의 사기는 우리들에게도 보내는 경고요, 복수의 예고가 될 것이다.


 놀랍도록 경탄하며 읽었다. 둔중한 마음의 울림을 겪었다. '오르부아르'가 그랬던 것은 분명 자꾸만 환기되는 세월호의 참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그 비극 앞에서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오르부아르'가 내내 묻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 생각하려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지만 쉽지 않다. 알베르가 앙리 때문에 흙 속에 묻혀 있을 때 그는 포격의 여파로 날아온 말머리 때문에 살아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살린 그 말 머리를 선명하게 기억하려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이것은 자신이 나아갈 곳은 알지만 도대체 어떻게 걸어가야 할 지 얼른 그 방법을 찾을 수 없는 것과 같지 않을까? 지금의 나처럼.

 그러니 나도 알베르만큼이나 어서 그 말머리를 찾고 싶다. 그것을 찾을 때까지 '오르부아르' 곁에서 꾸준히 사유하련다. 주체와 책임 그리고 실천을 화두로 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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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1 0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03 0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06 03: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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