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처럼 붉다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1
살라 시무카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누구나 안다. 삶은 동화가 아니다.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만 같았던 여름. 하지만 어느새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문득 우리는 언젠가 깨닫는다. 정말 곤혹스럽게도 외투도 없이 겨울의 추위 속에 벌벌 떨며 서 있구나 하는 것을. 겨울이 예고도 없이 찾아오듯이 삶도 예측불가능하다. 그것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지만 지금은 그게 오히려 우리의 기회인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살라 시무카의 ‘피처럼 붉다’를 읽은 것이다.


 작가의 이름이 생소하다. 당연하다. 지금 막 우리에게 소개된 작가니까. 오래도록 서평 활동을 하다가 ‘피처럼 붉다’로 데뷔했다고 한다. 나도 서평이라는 것을 끄적이고 있어서 그런가 작가가 왠지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급이야 하늘과 땅 차이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응원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제목에서 이미 눈치챘을 지도 모르지만 이 소설은 백설공주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피처럼 붉다’는 동화 ‘백설공주’의 앞부분에 나오는 말이다. 왕비가 창가에서 바느질을 하다가 그만 바늘에 손가락이 찔려 핏방울이 하얀 눈 위로 떨어진다.


[하얀 눈 위에 떨어진 여왕의 붉은 핏방울을 묘사한 그림. 이는 나중에 얘기할 안젤라 바렛의 그림책, 가장 처음에 나오는 그림이다.]


 그녀는 그것이 너무나 아름다워 피처럼 붉은 입술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길 바란다. 그것이 백설공주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보면 백설공주와 그리 관련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굳이 제목에서 또 첫 부분에서, 이 소설이 백설공주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는 걸 드러낸 것일까?


 내 취미 중 하나는 원서 그림책을 모으는 것이다. 지금까지 백설공주는 유명한만큼 많은 작가들이 자신만의 비전으로 그림책을 만들었는데 그 중에서도 영국 작가 안젤라 바렛의 것을 참 좋아한다. 살라 시무카의 ‘피처럼 붉다’를 읽으면서 틈틈이 바렛이 백설공주를 꺼내 읽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 소설의 주인공 루미키가 바렛이 묘사했던 백설공주의 면모를 많이 지니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안젤라 바렛의 백설공주 일러스트를 배경으로 '피처럼 붉다'를 찍어 보았다. 백설공주가 여왕의 계략에 의해 왕궁에서 쫓겨난 장면으로, 바렛은 백설공주에게 참으로 가련한 상황이 아닐 수 없는 이 장면을 질주하는 모습으로 그려, 해방과 자유의 분위기를 더 강조했다. 하얀 옷에다 숲의 동물들까지 같이 움직이게 하여 대지의 여신으로서의 모성 이미지를 더 강조해 보인다. 이는 백설공주가 장차 일곱 난장이에 대해 맡게 될 역할에 비추어볼 때, 가짜 모성인 여왕에 대비하여 진짜 모성으로서의 여인 이미지를 투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피처럼 붉다'의 백설공주 루미키도 이와 연장선 상에 있다.]



 바렛의 백설공주가 독특한 것은 백설공주의 이야기를 남성 사회에서 독립된 여성이라는 관점에서 풀어냈다는 것에 있다. 그것은 특히 백설공주의 아름다움을 시기하는 여왕과 백설공주를 묘사하는 것의 차이에서 두드러져 나타는데 바렛은 여왕과 백설공주를 문명과 자연 혹은 전원의 이미지로 서로 대비시킨다. 즉 여왕은 주로 폐쇄된 문명 공간 안에 갇혀 음모를 꾸미고 백설공주는 사방이 탁 트여있거나 열려 있는 공간에서 자유를 누리고 타인과 공존하는 것이다. 이는 그 문명이 왕이라는 남성에 의해 뒷받침 되는 질서라는 점에서 여왕이 가부장적 질서에 포획된 존재임을 나타내고 백설공주는 그 문명에서 탈주함으로써 독립된 존재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렇게 하여 여왕이 백설공주를 죽이려는 이유가 아름다움의 시기가 아닌 전혀 다른 것으로 되는데 그것은 바로 백설공주만이 누리고 있는 독립된 자아에 대한 질투가 되는 것이다. 바렛의 백설공주는 그런 주제의 그림책이었다.



 [여왕은 이렇게 문명의 공간에 있지만 항상 갇힌 존재로 그려진다. 이런 식으로 여왕에겐 왕이라는 남성 중심 질서에 포획되어버린 여성의 이미지가 강조되고 있다. 위의 백설공주의 그림과는 완전히 상반된다.]


 살라 시무카의 루미키도 그렇다. 즉, 여기서 백설공주를 모티브로 한 것은 바렛과 똑같이 남성 사회로부터 독립된 여성상을 그리려 한 것이란 말이다. 루미키는 정말 그러하다. 그는 여러 면에서 남성들이 바라는 여성의 모습과 다르다. 그는 남성들이 부여한 여성성에 초연하며 오로지 자신만의 삶의 원칙을 세우고 거기에만 맞춰 살아간다. 그녀는 가급적 세상과 거리를 유지하며 온전히 자신만의 세계에 웅크리려 했었다. 하지만 백설공주가 그랬듯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 일에 휘말리게 된다. 그것도 범죄에. 우연히 들른 학교의 암실에서 천장에 매달려 있는 무수한 지폐들을 보게 된 것이다. 그것도 사람 피로 범벅이 된 지폐들을...


 루미키는 처음엔 학교 당국에 고발하려 했지만 일단 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그 일을 벌인 장본인을 찾기로 한다. 그러다 동급생인 투카, 엘리사, 카스페르가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알고 보니 그 돈은 형사인 엘리사의 아버지에게 조폭들이 보낸 돈이었다. 엘리사의 아버지, 테르호 베이새넨은 조폭을 위해 일하는 나탈리아라는 러시아 여자와 몰래 정을 나누고 있었는데 그만 그녀가 지금까지의 생활을 청산하고 삶을 새로이 시작할 생각으로 조폭들이 베이새넨에게 보낸 돈을 가로챘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소설의 가장 처음에 나오는 것처럼 조폭의 총에 죽고 조폭들은 베이새넨도 거기에 가담했을 것이라 보고 협박조로 형사의 집 앞에 그 돈을 갖다 놓았다. 바로 그것을 우연히 집에 들른 엘리사와 친구들이 술김에 가져와 암실에 숨겨두었던 것이다. 돈이 사라지자 조폭과 베이새넨은 서로를 의심하고 갈등이 고조된다. 그러다 조폭은 형사에게 보다 강하게 협박하기 위해 그의 딸 엘리사를 납치하려 한다. 하지만 그 때 조폭은 그만 돈의 정체를 파헤치기 위해 엘리사의 옷을 빌려 입고서 위장 중이던 루미키를 엘리사로 오인하고는 납치하다 실패한다. 이로써 루미키는 그 돈이 아주 위험한 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엘리사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일의 결말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한다. 한편 조폭은 이 일에 제3자가 연루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제 루미키 일행을 표적으로 삼는다. 바야흐로 루미키가 조폭과 정면 대결할 순간이 무르익어 가는 것이다.


 ‘피처럼 붉다’는 이런 이야기다. 백설공주를 근간으로 한 이 이야기는 백설공주만이 아니라 빨간 두건과 신데렐라 이야기도 재치있게 엮어가면서 폭력으로 점철된 남성들에 대한 독립된 여성의 분투를 그린다. 동화 백설공주에서 분투는 아버지가 중심인 세계와 결별하고 자신만의 세상을 만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바로 일곱 난장이와 함께였다. 그것은 아버지처럼 군림을 통한 누림이 아닌(바렛의 동화는 왕인 아버지를 늘 협소한 공간에 홀로 있는 것으로 묘사하여 그 질서가 오로지 자기 혼자만을 위한 것임을 강조한다. 바렛은 백설공주가 고난을 당하는 진짜 원인이 사랑하는 왕비를 잃은 자기 아픔 밖에는 모르는 아버지에게 있음도 내비친다.) 대등한 관계에서의 책임으로 이뤄진 세계였다.


 [백설공주의 어린 시절을 묘사한 장면. 보는 방향에서 왼쪽의 작은 창에 갇힌 듯 보이는 남자가 바로 백설공주의 아버지 왕이다. 왕비를 잃은 슬픔에 빠져 있는 왕은 백설공주를 전혀 돌보지 않았고 결국 백설공주의 고난을 초래하고 말았다. 자기 본위의 남성 세계와 타자 지향 여성 세계를 극명하게 대비해서 보여주는 시퀀스다.]


 [알고보면 바렛은 처음부터 백설공주의 이런 면모를 강조했다. 인용한 그림은 여왕이 자기가 떨어뜨린 핏방울을 보고 피처럼 붉은 입술을 가진 백설공주가 태어나길 바라는 장면. 바렛은 벽을 세워 문명과 자연의 경계를 나누고 여왕이 그 벽을 건너 핏방울을 보는 것으로 묘사해 백설공주가 남성 중심 사회에서 벗어나 독립된 여성으로서의 존재할 것임을, 이렇게 처음부터 암시하고 있다.]


 루미키도 그렇다.  엘리사, 투카, 카스페르가 일곱 난장이인 것이다. 루미키가 본격적으로 북극곰 조직과 얽혀들게 된 것도 다 엘리사를 보호하고 싶다는, 그렇게 엘리사에 대한 책임 때문이었다. 이런 식으로 루미키는 바렛의 백설공주와 궤를 같이 하면서 독립된 여성의 진정한 완성은 책임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밀레니엄 시리즈의 히로인 리스벳 살란데르와 많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리스벳 살란데르 십대 버전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거침없이 남성들에게 한 방을 선사하는 그녀를 보면 더욱 그렇다. 여기에 타협은 없다. 굴종하여 배신당하느냐 아니면 맞서 싸워 자신의 독립을 지키느냐, 그 뿐이다.


 이야기 자체는 꽤나 재미있다. 무엇보다 문장이 냉소적이면서도 감각적이다. 군더더기 없이 여성의 심리를 논파하고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갈무리 한다. 마무리가 다소 허술한 감이 없진 않지만 원래가 삼부작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뒷맛은 꽤나 깔끔한 편이다. 시간을 들여 읽을만한 작품이다. 내겐 특히나 루미키가 매력적인 캐릭터라 더욱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전면으로 치고 나온 북극곰에 맞서 루미키가 어떤 활약을 펼칠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2부인 ‘눈처럼 희다’가 어서 나와주었으면 좋겠다.


              [혹시나 인용한 백설공주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실 지도 몰라서...

  가지고 있는 것은 91년의 초판이다. 물론 영어판은 발간 5년만에 절판되어 할 수 없이 프랑스 판으로 구했다. 그래서 가격이 ㅠ ㅠ 십 수년 전에 웬디북이란 곳에서 구입했는데 그 때만 해도 개인셀러로 발송 주소가 자신이 사는 아파트로 되어 있었다. 지금은 어엿한 회사가 되어 파주에 있다. 한 마디로 격세지감. '백설공주'는 현재 표지 갈이를 하여 다시 발간되었는데 여왕이 백설공주에게 빗을 꽂는 그림이 표지가 되었다. 초판본 표지와 비교하면 좀 안습ㅠ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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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21 02: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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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31 17: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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