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인종의 요리책
카를로스 발마세다 지음, 김수진 옮김 / 비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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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첫 장면에서 기겁했다. 안그래도 제목이 으스스한데 첫장면부터 고어적 연출이 심상치 않아서 대체 어떤 이야기가 전개되려고 이렇게 세게나가는가 싶었다. 처음 들어보는 작가인데다 작품에 대한 정보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했기에 얼른 든 생각으론 정말 제목처럼 내내 사람으로 만든 요리의 향연이 펼쳐지는 것이 아닐까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아르헨티나 출신 작가 카를로스 발마세다의 두번째 소설인, '식인종의 요리책'은 단순하게 말하자면 요리와 정치의 관계를, 더 세부적으로 말하자면 아르헨티나 군부 독재와 요리와의 관계를 다룬 소설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얼른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영국 감독 피터 그리너웨이의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라는 영화다. 상영되자마자 컬트의 반열에 올라서버린 그 영화에서도 이 소설 처럼 카니발리즘(食人)과 독재와의 관계를 다루었었다. 아마도 결말이 요리사가 독재자를 정성껏 요리해 파티에 참석한 고관들에게 대접하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이 영화처럼 이 소설도 그렇게 카니발리즘과 독재와의 관계를 다룬다고 할 수 있다. 세계1차대전으로 갑작스레 부흥하게된 한 해변 도시의 레스토랑 알마센의 70여년에 걸친 흥망성쇠를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은 그렇게 허구의 역사와 현실의 역사를 교묘히 교차시켜 70여년에 걸친 아르헨티나의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도록 하고 있다. 겨우 274페이지의 짧은 분량으로 말이다. 

  이렇게 하나의 공간에 집약된 기다란 역사적 줄기를, 그것도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내력을 동등하게 소상히 다뤄가며 드러낸다는 점에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을 강하게 연상시키는 한편,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요리사들과 그들의 요리책을 마치 진짜 존재하는 것처럼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도 떠올리게 하는 이 소설은 그렇게 그야말로 마르케스와 보르헤스의 행복한 결합이라 할 만하다. 

  기이하게도 발마세다는 아르헨티나의 역사를 얘기하면서 이탈리아와 독일을 끌어들인다. 모두 파시즘이란 전체주의를 경험한 나라들이다. 소설의 초반 그러니까 알마센의 근원이 되는 레스토랑을 세웠으며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요 동력이기도 한 신비의 요리책 '남부해안지역 요리책'을 쓴 저자이기도 한 카글리오스트로 쌍둥이 형제는 어쩐지 로마를 세웠던  로물루스, 레무스 쌍둥이 형제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들이 그렇게 고향을 떠나 로마라는 나라를 건국했듯이, 카글리오스트로 형제도 고국을 떠나 머나 먼 아르헨티나에서 그들만의 레스토랑을 만든다. 그렇게 레스토랑은 어쩌면 정말 '로마'를 의미할지도 모른다. 아르헨티나에 있으면서도 '로마'인, 그렇게 아르헨티나의 '외부'로서 존재하는지 모른다. 카글리오스트로 형제에게 신비의 요리법들을 전수했던 마시모 롬브로소 역시도 이탈리아인이었다.(롬브로소란 이름때문에 자꾸만 '생래범죄인설'을 만든 체자레 롬브로소가 떠올랐다. 롬브로소는 현재 프로파일링 기법의 창시자라고도 일컫는데 그렇게 그는 범죄인의 외모를 집중 연구하여 범죄인이 가지고 있는 외모적 특징들을 추려내어 진짜 범죄 수사에 응용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범죄인의 외모를 찬찬히 관찰하는 롬브로소의 모습은 왠지 어떻게 요리할까 하면서 사람 고기들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는 세사르 롬브로소의 모습과 많이 닮아보인다. 아무래도 그런 이미지의 연상적 작용을 위해서 롬브로소의 이름을 정말 택했던 것은 아닐런지....) 알마센은 바로 이들 세사람의 힘으로 완성된 것이었는데, 사실 마시모는 늘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꿈꿨지만 1차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돌아가지 못하고 결국은 아르헨티나에 눌러 앉아 레스토랑을 열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1차대전은 알마센을 탄생시킨 장본인이었고 더구나 앞서도 말했듯, 알마센을 부흥시킨 결정적 계기이기도 했다. 그렇게 된 이유는 1차대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바다를 넘어 아르헨티나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원래 불행이란 부자와 가난한 자를 구분하지 않는 법이고, 재앙이란 사회적 계층 같은 건 무시하기 마련이며, 처절한 액운이란 혈통 같은 건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민자들 역시 유럽에서 먼저 건너온 친지들을 찾아내는 데 실패해 거지꼴이 되어버렸고, 그러는 사이 엉겁결에 대서양이라는 바다가 되돌가갈 수 없는 철조망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 탓에 수많은 아이들이 부모 잃은 고아가 되었고, 수많은 남자들이 아내를 잃은 홀아비 신세가 되었으며, 요란한 굉음을 내며 달려든 전쟁이라는 괴물은 마을 곳곳을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아르헨티나에도 상당수의 유럽인들이 돌아갈 곳을 잃고 눌러앉게 되었다(p.43) 

  이렇게 말하자면 알마센은 1차대전으로 고향을 잃은 자들로 만들어진 그들이 아르헨티나에 만든 새로운 영토 혹은 고향이었으며 그렇게 아르헨티나의 외부였다. 그렇게 발마세다는 이 알마센이 가진 '아르헨티나의 외부로써의 특성'을 형성하고는 뒤이어 바로 그 외부적 성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준다. 바로 그 뒤 초창기 맴버들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고 다시금 이탈리아에서 그들의 새로운 후손들이 알마센으로 오게되는 장면을 통해서다. 그들이 이탈리아를 떠나 알마센으로 오게되었던 것은 바로 무솔리니가 총리에 당선되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전체주의화되어가는 이탈리아를 떠나 알마센으로 오게된 것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보다 분명하게 발마세다가 알마센이 가진 외부적 특성을 통하여 무엇을 말하려하는 것인지 알 수있다. 그것은 '알마센'이 다름아니라 바로 전체주의 자체에 대한 저항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알마센을 만든 카글리오스트로의 형제가 사실은 로마의 창시자 로물루스, 레무스 쌍둥이 형제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했던 우리의 의심이 사실은 맞는 것임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그 쌍둥이 형제에 의해서 건국된 로마가 초창기에 공화정의 형태를 띄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더욱 더 그렇다. 그렇게 로마 초창기 공화정은 전체주의에게 있어 극단의 정치적 형태라 할 만하니까 말이다. 이렇게 발마세다는 아르헨티나에 있어 알마센의 의미를 아르헨티나 독재에 대한 저항 공간으로 만든다. 그가 이렇게 하필이면 레스토랑을 그런 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요리가 가진 이타적 특성 때문인지 모르겠다. 요리는, 특히 레스토랑의 요리는 더욱 더 그렇듯이, 내가 먹기 위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남들을 위해 혹은 더불어 먹기 위해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애초부터 이타적 행위인 요리와 오로지 이기적일 수 밖에 없는 독재적 권력을 그렇게 대비시키려는 뜻에서 레스토랑을 그런 저항의 공간으로 설정했을 것이다. 마치 그것을 방증이라도 하듯, 소설은 알마센을 거쳐가는 세대들이 모두 전체주의와 독재에 저항하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모든 신념들이 세대를 거치는 동안 희석되어 가듯이 그렇게 알마센을 통해 변함없이 이어져온 그들의 모습도 끝내 그들의 가장 마지막 후예 '세사르 롬브로소'에 이르러서는 단절되고 마는데, 바로 그가 소설의 초반부 자기 엄마를 물어뜯었던 그 사람이다. 

  마지막 후손, 세사르에 와서 알마센은 열린 이타적 공간에서 폐쇄적인 이기적 공간으로 변질되고 요리의 의미도 더이상 이타적 행위가 아니라 오로지 개인의 욕망을 충족하는 행위로 변질된다. 그것은 그가 그의 이모와 나누는 사랑을 통해서 더욱 견고해지는데, 발마세다는 여기서 궁극적으로 카니발리즘과 독재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 지 드러내준다. 소설은 이렇게 말한다. 

  아르헨티나의 정국은 육식문화를 부채질했다. 역사르 되짚어보면, 각각의 시대별로 어떤 스타일의 음식이 유행했는지를 세세히 설명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러나 결국 각각의 시기는 나름의 음식 문화의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며, 유행하는 맛과 풍미는 늘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의 얼과 별개일 수 없음이 확인된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머리' 보다는 '위'가 훨씬 더 많은 것을 명료하게 이야기하지 않는가? 음식을 보면 시대적 열광과 두려움이 무엇인지, 결함과 문제점은 무엇인지,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혐오하고 집착하는 것은 무엇인지, 어떤 결점과 어떤 미덕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수 있으니까 말이다. 피의 기록에 따르면 독재정권이 마련한 화려한 연회를 즐길 수 있는 자들은 매우 한정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독재자가 군림하면 대다수의 대중은 굶주리고 허기지게 되며, 대부분의 평범한 가정에서는 최후의 만찬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처럼 차분한 슬픔 속에서 빵 한조각을 나누었고, 그런 그들에게 포도주는 수세기 전 부터 그래왔듯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여겨졌다.(p.238 ~ 239) 

 이렇게 독재정권과 인육이 자주 관계를 맺는 것은 인육이야말로 여기 언급한 대로 독재정권의 얼 그렇게 정수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인간을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 욕망 충족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만 본다는 것이다.  독재정권의 향연이란 오로지 내 배를 불리기만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그에게 핍박 받고 고통받는 가난한 서민들이 빵 한 조각이나 포도주 한 잔을 나누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마지막에서 발마세다가 굳이 예수님의 보혈을 운운하는 것은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이타적 향연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리라. 

 세사르의 존재를 통해 발마세다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여기서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어쩌다 세사르가 그런 존재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도대체 거기엔 무엇이 작용한 것일까? 소설은 세사르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상세하게 말해준다.

 세사르의 아버지는 친구들과 술을 먹고 취해서는 우연히 경찰청장의 장례식을 차로 들이받는다. 그리고 그 때문에 테러리스트로 오해 받아 총알 세례를 맞고 숨진다. 그 후 정권에 의해서 앎센 자체가 반정부테러세력으로 의심받으면서 알마센 마저 폐쇄되기에 이른다. 세사르의 엄마는 세사르를 임신한 채 경찰에 끌려가 모진 심문을 받는다. 이전에도 페론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탄압은 받았지만 지금에 비하면 오히려 하찮을 정도다. 세사르는 바로 그러한 와중에서 태어났다. 그렇게 권력에 의해 완전한 단절이 있고나서 변해버린 세사르가 태어난 것이다. 지금까지 이 소설이 아르헨티나의 역사를 담아왔음을 상기한다면 이것 역시도 어쩌면 오랜 군부 독재를 거친 탓에 이전의 아르헨티나와는 결정적으로 변해버린 지금의 아르헨티나 국민들을 은근히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세사르'는 발마세다가 바라보는 현대 아르헨티나의 은유일지도 모른다. 오랜 군부독재를 경험한 탓에 이제는 완전하게 변해버린 현재의 아르헨티나 국민들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인지도 모른다.(어쩐지 현재 한국의 모습과도 통하는 것 같다.) 

  아르헨티나 역사가 어쩌고 카니발리즘과 독재가 어쩌구 했지만 이 책은 작고 채 300페이지가 안되는 가벼운 소설이다. 그리고 그 크기와 무게 만큼 놀랍도록 빨리 읽히는 작품이다. 하지만 담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얘기해온 것 처럼  그렇게 작거나 가볍지가 않다. 한 번쯤 읽어 볼만한 작품으로 진심으로 추천하고 싶다. 마르케스와 보르헤스의 분위기를 좋아하신다면 더더욱 추천한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은 배고플 때는 이 책을 읽지마시라는 것! 여기엔 아주 많은 상세한 음식의 묘사가 나온다. 읽으면 절로 식욕이 인다. 그래서 깊은 밤에 읽으면 문득 라면 생각이 간절해지곤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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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타이거
페넬로피 라이블리 지음, 김선형 옮김 / 솔출판사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개인적으로 정말 마음에 드는 커버인데, 이렇게 나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나저나 라이블리가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말하기를, 자신은 부커상을 받았을 때도 그저 그러려니 했는데, 정작 펭귄출판사에서 모던 클래식으로 선정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스릴을 느꼈다고 한다. 정확히 그녀가 한 말은 이랬다. "It made me feel dead." 문장만 놓고보면 과연 이게 좋다는 뜻인지 나쁘다는 뜻인지 잘 알수가 없는데 원래 라이블리 자신이 이렇게 모순적인 단어로 감정을 표현한다고 하니 그대로 수긍할 밖에... 그런데, 왠지 '문타이거'의 주인공 클라우디아와 어쩐지 좀 닮은 것 같다. 기성의 관습을 제멋대로 거스른다는 점에서... 

  서두를 이렇게 라이블리 개인으로 부터 시작하는 까닭은 사실 '문타이거'가 추구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문타이거'가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문타이거'는 종군기자였고 또한 대중 역사서로서 성공한 역사가이기도 한 여자가 이제 늙고 병들어 임종을 앞두고 자신의 과거사를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저 그런 객적은 회고담인 것은 아니다. 그녀는 처음부터 당당하게 이렇게 선언한다. 자기 개인의 역사이지만 세계의 역사 처럼 쓰겠다고! 

  개인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 그렇게 이 소설은 그 두개의 역사(라기 보다는 시선)이 교차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주관성과 객관성이 혹은 단독성(가라타니 고진식의 개념이다. 여기에 대해선 뒤에 따로 설명을 할 것이다.)과 일반성이 씨줄과 날줄처럼 얽히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은 소설의 가장 처음 부분 부터 확실히 드러난다. 소설에 들어가자 마자 우리는 명확하게 구분된 두 개의 장면을 보게 된다. 하나는 '그녀'로 지칭되어 '세계의 역사를 쓰고 있어요.'라고 간호사에게 말하는 장면. 다른 하나는 바로 뒤이어 나오는 이제 '나'로 지칭되어 자신의 역사를 세계의 역사로 쓰겠다고 말하는 장면. 

  이 연속해서 나오는 두 가지 장면은 정말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두 장면이 가지는 관계가 바로 '문타이거'가 직조하는 세계의 핵심에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얘기를 쉽게 풀어가기 위해 일단 이 둘을 대립관계로 놓고 보자. 여기서 대립되는 두 관계는 각각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첫 장면은 '그녀'에게서 드러나듯이 3인칭 객관화된 세계이다. 거기서의 서술은 그대로 일반 역사 기술과도 같다. 역사란 언제나 3인칭으로 기술되니까 말이다. 그런데 뒤이은 장면은 '나'에서 드러나듯이 1인칭 주관화된 세계이다. 거기서의 서술은 역사적 기술로는 불가능한 온전한 내면의 영역이 된다.(그렇게 '문타이거' 자체가 소설이니까 소설의 영역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시 말해 첫장면은 보편적 역사로 편입된 클라우디아, 다음 장면은 그대로 고유한 개체로 남아있는 클라우디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보편적 역사로 편입된 클라우디아는 그대로 고유의 개체성을 잃고 그저 하나의 이름만 남은 익명적 존재가 된다. 라이블리는 뒤이은 간호사들끼리의 대화에서 그 간호사들이 저 할머니가 과연 유명한 역사를 썼는지를 두고 수군거리는 장면을 통해 이것을 보여준다. 보편적 역사로 편입되자 역사가로서의 클라우디아는 사라지고 간호사들로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늙고 병든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편의상 둘을 대립관계로 세운다고 했는데 사실 소설 초반에서 부터 이렇게 둘의 대립관계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물론 라이블리가 '문타이거'를 통해 하려는 말도 여기서 드러난다. 그것은 보편화로서 개인을 그저 익명적 존재로 만드는 역사에 대항해 그 개인 자신만의 고유한 존재성을 드러내는 새로운 역사를 재현하려 한다는 것을. 

 따라서 바로 뒤이어 보여지는 클라우디아의 선언은 사실 이 소설을 시작하는 라이블리 자신의 선언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연대기는 짜증난다. 내 머리속에 연대기는 없어. 나는 수면 위에 부서지는 햇살의 파편들처럼빙글빙글 돌고 뒤섞이고 갈라지는 무수한 클라우디아로 이루어진 존재거든. 내가 들고 다니는 카드 한 팩은 한 없이 뒤섞이고 또 뒤섞이지. 연속성은 없고 모든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 (...) 희한하게도, 집단적 과거라는 게 죄다 이런 식이야. 공공의 자산이지만 심오하게 사적이기도 하거든. 우리는 모두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니까.(...) 나의 7세기는 당신이 7세기가 아니야. (..) 내 과거의 신호들은 내가 수용한 과거에서 나오는 거야. 타인들의 삶은 내 삶의 틈새에 끼워져서 칠해지기 마련이라고. 나, 나, 바로 클라우디아 H.(P. 9 ~ 10) 

  이 선언에서 드러나는 것은 일반적인 역사적 기술의 철저한 파행이다. 클라우디아는(그렇게 라이블리는) 보편적인 역사적 기술 방법의 그 어느 것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게 그녀는 전혀 새로운 규칙으로 역사를 다시 쓰려 한다. 그것도 오로지 자기가 중심인 역사를. 

  이 흐름에 대한 거스름과 개체성의 전면적인 내세움은 나로 하여금 문득 가라타니 고진이 '탐구'에서 했던 말을 떠올리게 만든다. 

  나는 10대에 철학책을 읽기 시작한 무렵 부터 거기엔 언제나 '이 나'가 빠져 있다고 느껴왔다. 철학적 담론은 반드시 '나' 일반만을 말하고 있었다. 그것을 주관이라 해도 실존이라 해도 인간 존재라해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만인에게 타당하지만 언제나 '이 나'는 빠져 있었다. (...) 내가 생각했던 것은 '나'라는 것이 아니다. 또 '이 나'가 특수하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전혀 특수하지 않다. 나는 나 자신이 얼마나 흔한지를 알고 있다. 그러한데도 '이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니라고 느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나'의 '이'이지 나라는 의식이 아니다. (...) 예컨대 내가 '이 개'라고 말할 때 그것은 개라는 유(類)속의 특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바둑이라 불리는 이 개의 '이'것임은 외양이나 성질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다만 '이 개'인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이 나'나 '이 개'의 '이'것임을 단독성(SINGULARITY)이라 부르고 그것을 특수성과 구별하기로 한다. 단독성은 하나밖에 없다는 뜻이 아니다. 특수성이 일반성에서 본 개체성인데 대해 단독성은 이미 일반성에 속하지 않는 개체성이다. (가라타니 고진, '탐구' P.11 ~ 12) 

  일부러 길게 인용한 것은 '단독성'을 반복해서 설명하지 않기 위함이다. 인용한 부분에서 '단독성'은 충분히 설명되었을 것으로 믿는다. 그렇게 나는 클라우디아가 스스로를 '나'로서 말하며 그녀 자신의 고유한 개체성을 내세우는 것을 고진이 말한 '단독성'의 표출이라 여긴다. 사실 클라우디아 존재 자체가 아예 '단독성'이라고도 볼 수 있다. 소설 속 그녀의 모습은 정말 남다르다. 특히나 엄마로서의 모습은 기성의 관습을 철저히 벗어난다. 딸 리사와의 관계에 있어 그녀는 전형적인 의미에서의 모성애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건 남편 재스퍼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거의 별거로 이루어지는 그녀의 결혼생활 또한 일반적인 결혼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더구나 그녀는 오빠 고든과 모든 사회에서 금기시하는 근친애적 관계마저 맺는다. 그녀는 어디서나 논쟁을 벌이고 스스로 그것을 즐긴다. 마치 모든 것과 철저하게 타협하지 않으려는 듯이! 그렇게 그녀는 바위산에 매달린 프로메테우스적 존재, 즉 일반성의 그물로는 도저히 건져올릴 수 없는 '단독성'의 존재인 것이다.  초반부 라이블리는 클라우디아가 일반적인 의미에서 여성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사회적 관계를 맺는 걸 보여준다. 하지만 그 어떤 사회적 관계도 클라우디아를 포섭하는데 결국 실패함으로써 라이블리는 클라우디아의 단독성을 강조한다.  그렇게 라이블리는 클라우디아를 '단독성'의 존재로 만들고 늘 고유한 단독자로서의 존재를 익명화 시켜서 그저 보통명사화 시키는 역사 자체를 가로지르도록 만드는 것이다. 라이블리는 이렇게 단독성과 일반성을 서로 대립각으로 세운다. 하지만 이 대립관계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또 하나의 대립적 관계를 만들어 이 단독성과 일반성의 대립을 더욱 더 극명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그 또 하나의 대립적 관계가 바로 '신화와 이야기'이다. 앞에서 클라우디아를 프로메테우스적 존재라고 말했지만 이는 그녀 스스로 소설속에서 자신을 그렇게 부르기도 했다. 더구나 어린시절 그녀의 집에 놀러온 '엄마를 주눅들게 했던 부유한 친척'마저 그녀를 '신화'라고 부른다. 여기서 우리는 라이블리가 계속 클라우디아에게 '신화적' 외피를 둘러씌우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대체 신화가 무엇이길래 라이블리는 이토록 클라우디아에게 그 외피를 입도록 하는 것일까? 그것에 대해 마치 답하기라도 하듯 라이블리는 소설에서 클라우디아로 하여금 이렇게 말하도록 만든다. 

  신화는 역사보다 훨씬 훌륭한 소재야. 형식도 있고 논리도 있고 메세지도 있거든. 한 때는 내가 신화인 줄 알았지 (p.19) 

   이 단순한 비교.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라이블리가 신화와 역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금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야기가 아니라 언급되는 것은 역사다. 대체 역사는 또 무엇이관대 라이블리는 역사를 가져오는 것일까? 정말 역사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어쩐지 그것을 제대로 밝혀야만 이 소설에서 신화가 정말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역사란 궁극적으로 무엇일까? 당신의 시간 낭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시간을 다루는 이야기 정도가 아닐까. 서양 최초의 역사서라 불리는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읽어보셨는지? 그 책을 보시면 헤로도토스가 마치 호메로스가 청중들 앞에서 '일리아드'를 읊어주듯이, 그렇게 하나 하나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실 것이다. 그렇게 헤로도토스의 '역사'도 그의 이야기 'HIS STORY'였다. 결국 역사란 이야기인 것이다. 프랑스어에서 이야기와 역사가 동일한 단어로 쓰이지 않는가. 그렇게 라이블리는 이 소설에서 역사를 하나의 이야기로 바라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가의 말하기와 소설가의 말하기는 겹치는 것이다. 라이블리에게 있어서 이 둘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신화와 이야기의 대립'은 사실 '신화와 역사'의 대립이지만 여기에 라이블리는 소설가의 시선까지 포함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모두 아우르기 위하여 '신화와 이야기의 대립'으로 또 하나의 항목이 추가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엔 또 하나의 반론이 가능하다. "그래서 역사가 이야기라고 치고 그것이 신화와 무슨 대립을 이룬다는 거야? 신화도 어차피 이야기 아닌가?"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기 위하여 나는 여기서 폴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를 끌어들이려 한다. 거기에 나와있는 폴 리쾨르의 논의가 라이블리가 바라보는 이야기의 관점과 통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쉽게 이해시킬 자신은 없지만 아무튼 풍덩 뛰어들어 보자. 폴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에서 리쾨르는 이야기와 시간과의 관계를 알기 위하여 우선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의 '뮈토스' 만드는 법을 대비시킨다. 여기서 '뮈토스'는 이야기를 뜻하며 시학에서는 '줄거리 만들기'를 의미한다. 

 먼저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시간이란 오로지 현재밖에는 없다. 과거는 지나간 현재고 미래는 아직오지 않은 현재일 뿐이다. 그렇게 그것은 하나로 모이지 않는, 사라져버려 한 마디를 이루고 아직 도래하지 않아서 또 한 마디를 이루는, 균열과 불협화음으로 가득차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작용은 이 균열을 참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억지로 메우려고 드는데 바로 여기서 '시간 경험'이라는 게 생긴다고 하였다. 즉 사람들이 시간을 순서대로 여기는 것은 그렇게 균열과 불협화음이 가득한 것을 어떻게든 하나로 모아보려는 의지의 작용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시간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사람 외부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작위적으로 만들어낸 일종의 허구로 여겼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뮈토스'만드는 방법을 보여주는데, 여기서 '뮈토스'란 이리저리 개별적으로 흩어져있는 사건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을 말하고 거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떻게 모아야 제대로 모았다고 할 수 있는지를 말해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가장 제대로 모으는 방법은 바로 '시간'을 참조하여 그 순서대로 모으는 것이다. 폴 리쾨르는 바로 여기서 '시간'이 나온다는 점에 주목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는 시간이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던 것 처럼 하나의 작위적 환상 같은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좋은 이야기를 짓기 위해서 끊임없이 참조해야만 하는 일종의 규칙이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를 초월하는 외부의 엄연한 실재로서 존재하며 끊임없이 인간의 이야기 짓기에 간섭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 시간은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경험이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시간이란 자신만의 이야기를 남들에게도 납득시키기 위한 그렇게 보편적으로 만들기 위한 일종의 '트랜스포머'와 같은 것이 된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뮈토스' 만들기는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간'이란 외부적 규칙에 맞도록 다듬어야 하는 것처럼 개별적인 주체가 보편적인 집단에 편입되기 위하여 스스로를 규격화시키는 것과 다를바 없다. 라이블리가 '신화와 이야기 관계'에서 바라보고 있는 이야기에 대한 시각도 이와 똑같다. 라이블리가 그렇게 신화가 역사(실은 이야기)보다 훨씬 훌륭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야기가 그렇게 단독성의 주체들을 그 고유성을 잘라내어 그렇고 그런 일반적 존재로 만드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독성의 표출인 클라우디아에게 신화의 외피를 둘러씌우는 것은 라이블리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의문은 남는다. 그것은 내가 빠뜨린 것 때문인데, 아마도 그 의문은 이렇게 될 것이다. "그런데 신화가 어떻기에 굳이 그것의 외피를 둘러씌우려드는 것인가?"라고. 그건 신화가 보여주는 특징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폴 리쾨르의 논의를 다시 떠올리자면 우리는 이야기라는 것이 무엇보다 연대기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대해 우리는 얼른 앞서 인용한 클라우디아의 다음과 같은 말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연대기는 짜증난다." 바로 이 대사에서도 라이블리가 이야기를 왜 싫어하는지 분명히 드러난다. 그렇다면 신화는 왜 클라우디아에게 짜증을 불러일으키지 않는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신화가 연대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신화의 대부분은 파편적이다. 그들을 하나로 모으기는 상당히 어렵다. 당신은 그리스 신화의 순서들을 제대로 말할 수 있는가? 나는 그럴 수 없다.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그리스 신화'의 저자 토마스 불핀치 조차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금의 그리스 신화와 같은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신화엔 연대기가 불가능하다. 또한 신화는 이야기와 달리 철저하게 오로지 개체에만 집중한다. 모든 신화는 그저 개별적 존재하나만 담는다. 이야기가 보편성의 공간이라면 그렇게 신화는 오로지 개체의 공간이며 그렇게 단독성의 공간이다. 바로 이와 같은 신화가 가지는 특성 때문에 라이블리는 클라우디아를 일종의 '신화'적 존재로 만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소설을 주의해서 읽어보면 클라우디아와 마찬가지로 단독성의 표출이라 할 만한, 그리고 클라우디아가 유일하게 온전히 사랑했던(바로 그 사랑의 모습이 톰 역시도 클라우디아 만큼 단독성의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근거가 된다.) 톰과 만나 사랑을 이루어가는 '이집트'가 내내 소설의 다른 곳과는 달리 신화적 색채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우리는 그 이집트에서 클라우디아가 보여주는 대조적인 모습에서 그것을 알 수있는데, 다른 곳에서는 늘 한 마디라도 더 보태지 못해 안달하던 그녀가(구체적으로는 미국의 개척민시대를 재현한 곳에서 그 과거의 개척민을 연기하고 있는 사람에게 자꾸만 클라우디아가 참견하던 장면이 대표적일 것이다. 라이블리는 이렇게 클라우디아의 대표적인 관광 경험 두 가지를 병치함으로써 이집트가 가진 '신화적 공간'으로써의 특성과 아울러 클라우디아의 '신화적 존재'로서의 특성마저 강조해서 보여준다.) 이집트에서 만큼은 내내 톰의 이야기에 말없이 귀기울이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렇게 이집트에서는 누구의 말이 다른 이의 말을 지우지 않는다. 그렇게 모든 목소리들이 각자의 이야기들이 저마다 개별적으로 동등하게 존재한다. 더구나 그 당시가 2차대전와중이었음을 상기한다면, 그렇게 전체주의와의 투쟁이 가열차던 시기였음을 기억한다면 이러한 이집트에서 보여주는 톰과 클라우디아의 관계는 정말 동등한 단독성들이 만나 이루어가는 관계라 아니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루트레티우스의 말을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루크레티우스는 같은 시대 플라톤이 말했던 이데아라는 것에 가장 많이 반감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그는 그저 개인만 있을 뿐 그 개인을 넘어서는 어떤 초월적 존재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그는 세계를 오로지 단독성들만이 존재하는 곳이라 여겼다. 그 단독성 존재를 그는 '원자'라고 생각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그 '원자'말이다. 무엇으로도 쪼개지지 않고 그 어떤 것으로도 변하지 않는 절대적 개체 '원자'말이다. 라이프니츠라면 그것을 '모나드'라고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루크레티우스는 그 원자들이 늘 평행선을 이루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 원자들로 가득한 자연은 그 어떤 것도 만들어내지 못할 텐데 지금의 세계란 온갖 존재들로 넘쳐나고 있으니까 말이다.  무엇보다 자손들이 생겨나고 있지 아니한가.  그래서 루크레티우스는 원자들이 비처럼 떨어지다가 무슨 원인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우연히' 서로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어떤 의도의 개입없이 아주 우연하게 원자들이 만나는 바람에 존재들이 지금처럼 생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루크레티우스가 하는 말은 이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어떤 초월적 존재라든가 섭리 같은 것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우연에 의해 태어났을 뿐이라는 것. 그렇게 '보편'이라든지 '일반'이라든지 하는 것은 없으며 있는 것은 오로지 단독성의 '원자'들 뿐이라는 것.  톰과 클라우디아의 만남은 바로 이와같은 루크레티우스의 말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루크레티우스의 이와 같은 말은 정확히 라이블리가 왜 하필이면 소설을 이렇게 여러명의 목소리가 병렬적으로 전개되는 '다중 화자'적으로 구성했는지, 또 모든 사건들이 시간적 순서에 관계없이 그 때 그 때에 따라 '만화경'적으로 펼쳐지는지 알 수 있게 한다. 바로 라이블리 자신이 루크레티우스의 말로 정의내려지는 신화적 특성들을 소설 자체에 아로새겨지길 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결국 이 모든 과정을 거쳐 여기서 우리가 확인하는 건, 라이블리의 '문타이거'는 그야말로 단독성의 복권을 위한 새로운 '역사'적 글쓰기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녀는 어쩌면 그 누구에게도 반감을 불러일으킬지 모를 지극히 자신밖에는 생각하지 않는 그래서 무례하고 이기적인 그녀를  전면에 내세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역사'는 보편을 담는다. 역사가들은 거기에 개인적인 견해를 덧붙이기를 주저하면 덧붙일때 조차 늘 그것이 설득가능한 것이 되도록, 그렇게 보편적인 둥지에 깃들수 있도록 말한다. 어디까지나 루크레티우스가 말하는 단독성만이 존재하는 세계를 원하는 라이블리는 기존의 이러한 역사적 글쓰기는 불편했다. 그래서 교감하지 않는, 교감될 수도 없는, 그래서 일반성의 그물로는 절대 건져낼 수 없는, 그렇게 날카로운 송곳처럼 보편성의 장막을 찢고 나오는 그렇게 오로지 단독성으로 충만한 존재를 내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존재의 울리는 목소리로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감으로써 라이블리는 그녀가 원하는 세계가 어떤 것인지 독자들로 하여금 경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어쩌면 많은 이들이 이 소설에 대해 불편함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은 라이블리가 의도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이렇게 소통하기를 거부하는, 오로지 홀로 존재하는 '천상천하유아독존'식 개체들이 되기만을 바라는 소설은 경험해보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다. 생각해보면 이 소설의 충격 혹은 낯설음은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 '퍼니게임'하고도 비슷할 것 같다. 나는 아직도 극장에서 그 영화를 처음 보았던 날이 선명하게 떠오를 정도로 충격속에서 보았는데(같이 관람한 한 여성 역시 내내 충격에 의한 창백한 표정으로 영화에 대한 곤혹스러움을 말했었다.) 하지만 그런 시도들이 그저 부정적이라고만을 할 수 없다고 여겼다. 나는 그런 영화들 그리고 라이블리의 '문타이거' 같은 작품들은 바흐친이 말했던 일종의 '카니발적 효과'를 일으키는 작품으로 본다. 그렇게 그 작품들은 우리의 굳건한 일상에 균열을 만들고 결국은 그 토대를 허물어 전복시키는 존재들이라고.  그들은 어떤 것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며 늘 돌아다보게 만드는 생채기가 되어 나를 둘러싼 이 일상을 늘 다시금 반추시키게 만드는 존재들이라고. 그렇게 열어보이는 다른 가능성으로 나를 둘러싼 이 상식적이고=일반적이고=보편적인 세상도 결국 하나의 가능한 세계임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존재들이라고. 그렇게 나를 '보편'으로 억누르지 않게 하며 '일반'에다 날 맞도록 타협하지 않게하며 그 상식적이고=일반적이고=보편적인 세상을 나 역시 단독자로서, 하나의 대등한 존재로서 바라보게 만드는 존재들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면 제목 '문타이거'는 그야말로 얼마나 적절한 제목인가! 

  '문타이거'는 모기향을 가리킨다. 라이블리는 어느날 우연히 2차대전 다큐멘터리를 보는데 그 장면들이 이상하게도 자신에게 어린시절 있었던 이집트에서 매일 맡았던 '문타이거', 즉 모기향의 향기를 환기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2차대전이 배경이 되는 이 소설에 그것을 제목으로 쓴 것이라고 한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소설에서 '문타이거'는 이집트에서 톰과 같이 있던 어느 새벽에 등장한다. 바로 그 새벽에 클라우디아는 처음으로 톰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톰의 목소리로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 오로지 우리는 클라우디아의 귀를 거쳐서 톰의 얘기를 듣게된다. 기이하게도 클라우디아 만큼이나 단독성의 상징인 톰에게 왜 라이블리는 목소리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일까? 간단하다. 그것은 역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대중 역사서를 쓴다. 그 역사서들은 모두 한 개인에 관한 것이었다. 그건 톰의 이야기와 똑같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역사서들을 쓸 때 클라우디아는 늘 자신만의 개인적 견해를 꼭 덧붙였다. 아니 아예 자기식으로 해석한 그들의 얘기를 썼었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에게 맞도록 타인의 이야기를 교정했고 재배치했다. 그런데 톰의 얘기만은 그러지 못한다. 그녀는 톰의 얘기에 전혀 개입할 수 없다. 그저 들어야만 하는 이야기. 때문에 소설의 후반 톰의 일기는 일기 그대로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건 클라우디아가 도저히 개입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클라우디아 만큼이나 단독성의 존재인 톰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런 톰의 이야기가 들려지는 밤. '문타이거'는 홀로 피어오른다. 단 하나의 어둠의 장막으로 모든 걸 '보편'으로 만드는 그 밤에, '문타이거'는 라이블리가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가운데서도 문득 떠올릴 수 있었을 만큼 강한 향내를 그 밤 전체에 걸쳐 피워내고 있는 것이다. 연기는 이내 어둠에게 먹혀 사라지더라도 향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톰은 전장에서 사라졌지만 그의 존재에 대한 기억은 내내 클라우디아에게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 밤에 들었던 톰의 이야기는 결국 나중에 실체로 나타나게 된다. 향기는 실체를 잃은 오히려 그 '흔적'에 불과할 지 모르지만 오히려 실체보다 더 강하게 더 오래 그 실체 자체를 보존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자극으로 그리고 그 자극에 기반한 기억이 되어 늘 실체를 떠올리게 만들고 그렇게 떠오른 실체는 일상속에서 그렇게 균열을 만든다. 

  문타이거의 '향기'는 이 모든 것이다. 일반화에 대항하는 단독성의 상징이자 일반화와 대등하게 싸워가면서 오래도록 단독성을 보존할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의 상징임과 동시에 단독성이 바흐친의 '카니발적 효과'를 하게 될 것이라는, 그렇게 저 펭귄클래식의 잠든 여인의 머리맡에서 그녀를 모기로 부터 보호하고 있는 모기향을 그린 커버처럼 그렇게 보편성에 짓눌려 우리의 단독성이 잠들게 되더라도 언제 어느때라도 그 향기로 균열을 일으키고 보편성을 전복하여 우리의 단독성을 보존해 줄 것이라는 수호의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라이블리의 '문타이거'는 바로 그런 소설이다. 

   일반성이라는 장막으로 모든 고유한 존재들을 덮어씌워 익명화시키려 것에 맞서 끝까지 개인이 가지는 단독성을 보존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소설! 라이블리는 문학적으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단독성에 새로운 목소리를 주려고 이 소설을 썼다. 보다 외연을 확장하자면, 이렇게 라이블리가 새로운 목소리를 단독성에게 주려하는 것은 어쩌면 남성 중심으로 씌여진 그 보편적 역사에서 소외되고 묻혀진, 그렇게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린 여성들에게 새로운 목소리를 돌려주려는 시도와도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문타이거'는 그러한 무시된 여성성을 단독성으로 새로이 복원하여 그것을 전면에 내세우는 글쓰기가 가능한가에 대한 탐색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의 입장에선 개인적으로 충분히 성공했다고 보여진다. 아무튼 독특한 독서 경험만으로도 단독성을 체감하게 만들었던 이 소설은 다른 건 몰라도 이제 여름내내 모기향 내음을 맡을 때 마다 이내 '문타이거'를 떠올리게 만들 것 만큼은 확실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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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사전'을 읽으면 김승옥 작가의 '서울 1964년 겨울'이라는 소설이 생각난다. 1964년 서슬퍼런 군부독재 시절 그렇게 암울한 시대적 분위기에 짓눌려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잃고 그저 익명화된 존재로 살던 주인공들이 남들은 모르는 오로지 자기만이 알고 있는 사실과 지식들을 들먹이며 애써 그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려 애달아하던 그 모습이 왠지 떠오른다. 그런데 왜 그들은 오로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려 했던 것일까?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무척 닮아보이는 '미셀 푸코'는 지식마저도 근대에 이르러서는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양산된다고 했던가? 그래서 그 지식을 선택하고 배제하는 지식-권력이야말로 근대의 핵심적 권력이라고. 그렇게 그 권력은 사회 성원들이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체제 유지를 위해서 알아야 할 것만을 주입시켰고 근대에 이르러 자리잡게된 교육 체제는 성원들이 필요한 지식 보다는 체제가 필요한 지식을, 거기에 감겨든 진정한 의도는 슬쩍 가려둔 채, 상식이라는 시멘트까지 발라 더욱 견고한 것으로 만들고 말았다 . 그렇게 의도 자체에 이미 체제 유지를 위해 유용한지의 여부가 중요했던 것 처럼 그렇게 양산되고 관리된 지식들 역시도 당연히 오로지 '쓸모' 여부에 의해 그 가치와 생존여부를 심판받게 되었다. 그것이 소위 '잡다한 지식'이라는 말이 태어나게 된 배경이었다. 우리는 자주 '잡다한 지식'이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그 말을 할 때 우리는 분명 지식들의 위계질서를 스스로 세우고 있다. 그런데 누가 그렇게 지식들의 위계질서를 세우고 당당하게 '잡다한 지식'들이라 규정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반대편에 있는 쓸모있는 지식이란 뭘까? 그것은 최소한 자본으로 교환가능한 지식을 말한다. 그렇게 개인에게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고 나아가서는 자본의 교환으로 그 체제를 지속해야만 하는 자본주의 자체에 도움이 되는 그런 지식들 말이다. 따라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들의 위계질서란 오로지 현실적으로 쓸모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나누어졌을 뿐 거기엔 어떠한 진리치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근대에 이르러 헤게모니를 쥐게 된 자본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협소한 시야로만 지식을 바라보게 했고 우리는 근대에 이르러 편재된 기성교육 덕택에 그러한 관점을 스스로 내면화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체제는 본질적으로 지식의 확산을 싫어한다. 그래야 안정을 구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세가 천년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신부나 수사들만이 글을 알았기 때문이다. 왕을 비롯하여 그 어떤 귀족도 스스로 성경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 또한 마찬가지다. 인쇄술의 발달이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 혁명은 도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체제든 스스로의 안정을 위해서는 지식을 관리하고 통제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자기들 입맛에 맞는 지식만 존치시키기 위하여 많은 지식들이 유통되는 것을 막는다. 그리고 그 유통의 억제를 위해서 아예 그 구성원들 마저도 체제가 싫어하는 지식들을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하도록 내면화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구성원들을 아주 협소한 시야로만 지식을 바라보도록 만드는 것이다. 때문에 지속적인 검열은 그 어떤 체제든, 특히나 뒤가 구린 체제일 수록 필수적이다. 굳이 사회가 원하는 지식만 유통시키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사회내의 구성원들이 항상적으로 편협한 지식에 대한 시각을 가지도록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피에르 부르디외에 따르면 지식을 넘어 개인 스스로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라 여기기 쉬운 취향마저도 그렇게 사회적으로 재생산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우리의 의식과 신체를 횡단하고 있는 지식이나 취향들은 모두 사회가 암암리에 새겨놓은 코드들에 불과하다. 따지고 보자면 그 코드로 부터 벗어난 정말 나만의 것이란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 속의 네오는 사실 그리 먼 인물이 아닌 것이다. 이미 우리 자신이 네오인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시각이 비단 지식을 바라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나 '감시와 처벌'은 그렇게 지식들의 체계적인 분류와 통제가 결국 윤리학적인 문제로 연결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지식에 대한 체제의 유용성 기준이 그대로 사람에게까지 통용되는 것이다. 정상인과 비정상인을 나누는 기준 역시도 지식과 똑같이 체제에 얼마나 쓸모있느냐 하는 것으로 결정되고 그렇게 정해진 기준은 지식과 마찬가지로 또 그렇게 성원 개인들에게 내면화되어 그들 역시 다른 사람들을 오로지 '쓸모' 여부에 따라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지금 우리들의 모습도 이와 같지 아니한가. 이렇게 지식을 바라보는 시각은 결국은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으로까지 연결된다. 때문에 내가 지식들을 대하는 태도는 어쩌면 정말 중요한지 모른다. 유용성의 기준 따위는 던져버리고 그 모든 지식들을 다 나름대로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받아들이면 그렇게 타인들마저도 받아들이게 될 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처럼 이렇게 '잡다한 지식'들이 가득차 있는 책이 정말 소중하다고 믿는다. 어디가서 '사람의 입맞춤이 개미들이 얼굴을 맞대고 영양교환행위를 모방한 것'이며 '빈대들의 성(性)'이라든지, '쥐의 똥구멍을 꿰맨 여공'의 얘기를 들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사회가 쓸모없다며 한 켠으로 치워버린 지식, 혹은 묘지 속에다 봉인해버린 지식들이 이렇게 다시금 생명을 얻고 스스로를 내보일 기회를 만들어주는, 그래서 모든 지식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의 얼굴을 들이미는(이 책의 지식들이 최소한의 항목으로도 나눠지지 않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사실 그 항목으로 나누고 체계화시키는 것이야 말로 근대 지식-권력의 소행이라고 푸코는 말하지 않았던가! 항목의 부재와 무질서한 지식의 나열은 그 자체로 모든 지식이 동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런지.), 이런 책들이 난 정말 소중하다고 믿는다. 김승옥의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의 주인공들이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오로지 자신만이 아는 사실과 지식으로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고 했던 것 처럼 누군가가 내게 원했던 지식이 아니라 바로 내가 스스로 원하는 지식들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이런 책들이 그동안 사회로 부터 오염되고 세뇌된 내 의식과 영혼을 조금은 정화화고 껍질을 벗겨서 보다 더 '본래적' 나로 다가갈 수 있게 만들어줄 것이라 믿는다. 

  세상에 그냥 몰라도 좋은 지식, 잡다한 지식 같은 건 없다. 그런 지식들의 위계질서를 만들고 분류하고 통제했던 근대 자체를 낳게 했던 지식들만 봐도 그렇다. 그 지식들은 당시 어떠한 지식들이었나? 흔히들 근대는 르네상스로 부터 탄생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르네상스를 낳게 한 그리스 로마 고전에 대한 연구는 당시 가장 쓸모없는 짓거리 중의 하나였다. 쾌쾌묵은 옛날 얘기들을 연구하는 건 정말 할 일없고 바보들이나 하는 짓으로 여겨졌었다. 그런데 그렇게 쓸모없는 지식, 잡다한 지식이 결국은 근대를 낳고 말았다. 여기서 보듯이 그 어떤 지식이든 쓸모없는 것은 없으며 그대로 다 소중하다. 다만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해 그 빛을 발휘하고 있지 못할 뿐. 그러니 '상상력 사전'에 나오는 그 어떤 지식들이라도 한 반 꼼꼼하게 읽으실 것을 권하고 싶다. 혹 누가 아는가? 그 중 어떤 것이 근대를 가져왔던 그 지식 처럼 또 시대를 들어올릴만한 지렛대가 되어줄 지... 

 ps.  더 하여 이러한 '쓸모없음'으로 치부되어 버려진 모든 지식들의 진정한 가치 회복을 위하여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도 꼭 읽어보실 것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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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폴리앵에 지다 매그레 시리즈 3
조르주 심농 지음, 최애리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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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초엔 그저 한 우연이 있었을 뿐이다. 

 벨기에 경찰의 의뢰로 매그레는 브뤼셀로 가게 된다. 휴가삼아 떠났던 가벼운 여행. 회의도 예상 보다 일찍 끝나 한 잔이나 하려구 들른 작은 카페. 거기 구석진 자리에서 매그레는 우연히 한 남자를 보게된다. 여지없이 '전문적 백수' 로 보이는 남자. 무심코 그를 바라보게 된 순간 그 남자가 행색과는 어울리지 않게 주머니에서 수북한 지폐 다발을 꺼낸다. 그리고 그것을 종이로 포장을 하더니 그 위에 주소를 적는다. 초라하고 남루한 사내로서는 도저히 가질 법하지 않은 그 거액에 매그레의 예민한 감각은 사건의 냄새를 맡는다. 그렇게 그의 추적이 시작되고 소설이 진행된다. 

 그렇지만 보시다시피 여기엔 얼마나 많은 우연이 있는 것인지... 첫 문장 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그가 결국 사건에 착수하게 될 때까지 저 많은 우연이 단 하나라도 빠져서는 안되는 게 여기서 드러난다. 벨기에 경찰이 의뢰하지 않았다면, 회의가 예정보다 일찍 끝나지 않았다면, 한 잔하려고 무심코 작은 카페에 들르지 않았다면, 거기 한 남자가 하필 매그레가 보았을 때 그 지폐 다발을 꺼내지 않았다면, 매그레는 결국 죄책감(이 원인에 대해서는 소설을 아직 읽지 않은 분들을 위해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을 가지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결국 오래도록 묻혀 있었던 한 사건이 수면으로 떠오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이걸 읽는 순간 너무나 많은 우연의 남발에 이 소설은 치명적인 구성적 결함을 가지고 있구나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먼저 언급해두고 싶은 것은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러한 연쇄된 우연엔 분명 심농의 명확한 의도가 있으며 그것은 정확히 심농이 '생폴리앵에 지다'  작품 전체를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여기에 관해 생각해보고 싶은 것으로 이 소설이 다른 시리즈에 비해(지금 출간한 네권에 한정해서이다.) 가지고 있는 독특성이다. 그 독특성은 다른 소설과 달리 '생폴리앵에 지다'에서만은 매그레가 사건을 발견하고 수사하고 해결하게 되기까지 내내 사건에 수동적으로 관계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잘 설명이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매그레는 단서를 발견하는데서도 앞에서 말했듯이 우연히 그 단서가 주어져서 그랬던 것이고 수사를 진행하는 와중에서도 그가 직접 발견하기 보다 사건 관계자들이 알아서 그 앞에 나타나주는 식이다. 그렇게 이 소설에서 매그레는 내내 이 사건의 핵심을 향하여 누군가에게 인도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 마치 사건이 드러나기 위해서 그를 초대한 것만 같이 말이다. 그렇게 매그레는 유독 이 소설에서 너무도 수동적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매그레가 가지는 태도의 독특성은 앞서 말했던 우연의 남발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 둘을 나란히 놓고 보면 그 관계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것에 관해 앞에서 언뜻 힌트 처럼 남겨놓기도 했다. 바로 '섭리'라는 말로 말이다. 이것은 이 다음 작품 '라 프로비당스호의 마부'에서 그 '라 프로비당스'가 가진 뜻이기도 하다. 아무튼 굳이 이 말을 쓴 것은 이 소설에서 나타난 우연의 남발과 매그레의 현격한 수동성은 심농이 이를 통해 결국 그 사건이 드러나게 된 것은 일종의 '신의 섭리' 로 보여주려 했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 앞에서 모든 죄는 언젠가 다 밝혀지게된다'라는 오랜 카톨릭적 믿음 그대로 말이다. 

  이는 작가 심농 자신을 생각해 보면 더 명확해 보인다. 이 소설은 심농 자신의 자전적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 그 역시 이 소설에 나오는 '묵시록의 동지들'처럼, 그렇게 영화 '죽은 시인들의 사회'에 나오는 그 모임 처럼, 젊었을 적 그런 모임을 했었던 것이다 . '묵시록의 동지들'이 보여주었던 낭만과 열정은 사실 당시 심농이 참여했었던 그 모임의 분위기를 그대로 옮겨온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날 그 모임중의 한 사람이 목을 매달고 죽는다. 사건은 자살로 처리되었지만 타살의 의혹도 없지는 않았다. 그 때 목을 맸던 사람의 이름이 바로 '조제프 장 클라인'이었다. 책의 맨 뒤에 언급되는 이 이름은 '클랭'이라는 이름을 영어식으로 읽은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프랑스식으로 말하면 정확히는 '조제프 장 클랭'이 될 것이다. 바로 '생폴리앵의 성당'에서 '묵시록의 동지들'중 목을 매달고 죽은 '클랭'과 똑같은 이름이다.(목매달아 죽은 곳도 바로 생폴리앵 성당, 그 곳이다) 희생자의 이름도 죽은 장소의 이름도 동일하다는 것은 혹시나 심농은 이 소설을 통하여 그 사건 자체를 재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만든다. 그렇게 그저 자전적 경험을 따왔다기 보다는 오히려 심농 자신이 매그레에게 접신되어서 아직까지 그 스스로에게도 미궁으로 남아있는 사건 자체에로 뛰어들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의문을 가지게 만든다. 나는 이 질문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단순한 문학적 재현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그 사건에 제대로 아무런 대처도 못했던 스스로에 대한 일종의 참회록일까? 이건 비단 이 소설에만 국한된 문제만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이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은 바로 뒤이은 '라 프로비당스호의 마부'의 성격마저도 규정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이 두 작품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아무튼 그 연결관계는 후에 '라 프로비당스호의 마부'의 리뷰를 쓸 때 말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계속 '현재의 심농이 과거의 사건에 뛰어듦'에 대해서만 살펴보도록 하자. 

  왜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근거는 또 하나가 있다. 그 역시 목매달고 죽은 자의 이름 때문이다. 그 이름은 앞서도 말했듯 '조제프 장 클랭'이었다. 여기서 클랭이란 이름은 소설에서도 똑같이 희생자 이름으로 쓰였다. 그런데 씌여진 이름이 클랭만은 아니다 . 여기엔 또 하나의 이름이 쓰였는데 그 이름을 가진자가 이 소설에서 하는 역할 때문에 하필이면 그 이름을 가졌다는 것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그 이름은 바로 '조제프'이다. (마지막 하나 남은 '장'이라는 이름은 바로 '라 프로비당스호의 마부'에서 또 쓰인다. 이것도내가 두 작품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 근거중의 하나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조제프란 인물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본격적으로 매그레를 사건에 착수하게 만드는 자일 뿐만아니라 아예 사건의 핵심마저 다가가도록 인도하는 자이다. 매그레가 테세우스라면 조제프는 아리아드네의 실 같은 자인 것이다. 그런데 심농은 그 아리아드네의 실 같은 자에게 죽은 자의 이름을 주었다. 클랭이라는 성이 아니라, 그 시절 늘 부르곤 했을 바로 그 이름을. 나는 이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매그레를 인도했던 바로 그 자에게 그 시절에 늘 부르곤 했을 죽은 자의 이름을 주었다는 것이. 그건 심농이 늘 의혹으로 남아있는 그 비극을 생각할 때 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아니 그는 오히려 그 이름 때문에 늘 그 사건에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건 다른 어어떤 조제프가 아니라 그가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던 대로 그만의 조제프였을 테니까. 따라서 관계는 명확해 보인다. 소설속 매그레와 조제프의 관계는 현실속 심농과 조제프의 관계로 반복되고 정확히 조제프에게 매그레가 인도되었듯이 심농 역시 이 소설을 통하여 마지막 한 걸음으로서 다시금 그 사건에게로 뛰어드는 것이다.(여기서 굳이 '마지막'이라고 한 까닭은 '라 프로비당스호의 마부'가 사실상 그러한 트라우마처럼 남아있던 그 사건에 대한 심농 개인의 작별인사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때문에 유독 이 소설에서 만큼은 매그레가 수동적일 수 밖에 없었으며 어쩌면 사실 그가 직접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수사관으로서의 매그레란 캐릭터 자체를 태어나게 한 것도 근본적으로는 바로 이 사건이 동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만일 이것이 정말 내 생각대로 진짜 매그레를 통해서 근원적으로 하고 싶었던 것을 하는 거라면 그렇게 유독 이 작품에서 카톨릭적 색채가 짙게 나타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바로 이 근원적 회귀와 같은 시도를 통해서 묻는 질문은 인간에게 있어 '죄'란 무엇이고 또 그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인데 그것은 그야말로 그가 가장 처음으로 영향을 받았고 또 지속적으로 성장시켜온 카톨릭적 세계관 위에서라야 대답이 가능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생폴리앵 성당의 모습 

 

  심농의 어느 전기 작가(Lucille Frackman Becker)는 "매그레의 전체적 분위기는 일요일날 들리는 성당의 종소리와 더불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심농의 작품에 있어서 카톨릭적 세계관은 아주 중요한 밑받침이 되었음을 강조했다. 특히나 그는 어렸을 때 부터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할 때 거드는 아이로 일했고 종교 생활에 아주 열심이었다고 한다. 그 전기작가는 그 어린 시절 카톨릭 성당에서의 경험이 심농에게 '죄'라는 것, '심판'이라는 것 그리고 '죄를 짓는 인간'에 대한 원초적인 감정들과 시각들을 주었을 것이며 그것이 그대로 매그레에게 가장 근본적인 태도 'Comprendre sans juger' 즉 '심판하지 않고 이해한다'를 이루게 만들었을 것이라 한다. 아마도 매그레를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매그레가 꼭 범죄자에게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 비록 그는 수사관이지만 말이다. 그가 마지막 범죄자 앞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국가의 질서집행자라기 보다는 어쩐지 고해를 듣는 신부와도 같은 모습이다. 물론 그 고해를 남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헤아려서 거꾸로 들려준다는 점에 차이는 있지만. 아무튼 그는 법의 눈이 아니라 같은 인간의 눈으로서 범죄자의 범죄가 과연 심판 받을 만한 것인가를 가늠한다. 법의 눈이 가진 '지은 죄'라는 좁은 시야를 넘어 매그레는 왜 그러한 죄를 범했는지 맥락을 헤아리고 때로는 죄가 설령 심판받아야 하는 것임에도 그 심판이 불러올 또 다른 비극까지 감안하여 기꺼이 그 죄를 용서하는 포용을 보여준다. 이것은 고해성사를 받은 신부가 전하는, 그렇게 신의 눈으로 본 용서라고 할 수는 없을까? 아무튼 이 마지막 물음에 부정적인 대답을 하더라도 이렇게 카톨릭적 세계관이 매그레의 작품세계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만은 인정하게 되리라 믿는다. 

  그러니까 그 많은 우연의 남발은 심농의 죄에 대한 카톨릭적 세계관을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떤 죄이든 신 앞에서는 감추어질 수 없으며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결국에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하지만 그가 카톨릭적 색채를 이렇게 부여하는 것은 비단 이러한 죄의 성격만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아니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그 죄 앞의 '인간' 자체를 생각하기 위해서이다. 바로 이를 통해 그가 강조하는 인간은 모습은 그 무엇보다 '경계에 서 있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경계는 소설의 도입부 노이샨츠 역에서 부터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 노이샨츠 역은 바로 네델란드와 독일의 국경에 있는 역이었다. 그렇게 그 역은 '경계' 위에 서 있는 역이다. 거기는 양쪽의 많은 노동자들이 통근 혹은 퇴근 열차를 타고 스쳐간다. 아니, 잠시 머무르기도 한다. 국경을 건너기 위한 필요한 절차를 거치는 잠시 동안만. 그 때 그들은 우르르 요깃 거리를 찾아 식당으로 뛰어든다. 그렇지만 단 두 사람만은 갈 곳을 잃은듯 대합실에 우두커니 못박혀 있다. 그 중 한 사람이 매그레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가 지금 추적하고 있는 자이다. 

  소설의 도입부 노이샨츠 역의 모습과 또 그렇게 홀로 내버려진 두 사람의 존재는 무엇보다 앞으로 이 소설에서 하게 될 얘기를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노이샨츠 역이 경계에 서 있듯이 그 대합실의 두 사람도, 다른 사람들은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고픈 배를 채우는 그렇게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일종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정말 후반에 매그레가 쫓는 그 존재는 그렇게 삶이라는 경계 다른쪽에 있었던 인물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운명과도 같은 '죄의 밝힘'이 잘라낼래야 잘라낼 수 없는 죄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이렇게 경계 위에 서 있는 인간 존재는 그 죄로 인해 심판이 아니라 바로 이해를 받아야 하는 변호의 이유가 된다. 그것은 그들이 그만큼 강한 존재가 아니었기에 저지를 수 밖에 없던 것이기도 했고 또 이미 선택한 경계의 한 쪽 즉 특히나 '삶'을 택했던 자들은 이제는 혼자만이 아닌 자신에게 딸린 가족들까지 책임지느라 어쩔 수 없이 저지를 수 밖에 없던 것이기도 했다. 아니, 달리 보면 어쩌면 현상하는 '죄' 자체가 그렇게도 안정적이고 항구적일 것만 같았던 인간의 삶이 사실은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서 있는 것임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살아 있는 '묵시록의 동지들'의 묘사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나는데 그 중 가장 상위의 계층을 차지하고 있는 모리스와 조제프의 변화는 정확히 이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만큼 쓰고 보니 심농이 매그레를 비롯하여 묵시록의 동지들을 모두 과거의 사건으로 소환하는 그 존재가 단순히 '죄'만을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의심스러워 진다. 혹시 그 존재는 중세의 '메멘토 모리'와도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면 소설에서의 죄의 묘사는 '죽음'으로 바꿔놓고 보아도 그대로 다 들어맞는 것 같다. 아니 초반에 처음 조제프가 등장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자면 그것은 그야말로 그가 죽음으로 인해 과거의 사건으로 소환되는 것이 아닌가! 그림자처럼 삶에 결부되어 있지만 모두가 회피하려 드는, 그래서 거꾸로 삶에 더욱 더 집착하게 만드는 죽음. 하지만 그것은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영원한 얼룩이다. 그 얼룩은 안정적이라 이대로 늘 같은 모습이리라 여겼던 삶에 계속 균열을 만들고 사실은 그 삶의 기반이 그리 단단하지 못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얼룩이 커다란 입을 벌릴 때 사람들은 소설에서 매그레의 처분을 다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던 것 처럼 그렇게 그 입이 닥쳐옴을 속절없이 기다리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죄로 보았을 땐 '용서'의 관계가 '죽음'으로 치환시키자 그대로 '간구'의 몸짓이 된다. 뒤이은 '라 프로비당스호'도 그것이 배에 쓰이면 흔히 '구원자'를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만일 참회록이라면 심농은 이 경계 어디에 서 있을 것인가? 아마도 당연히 경계의 안쪽, '삶'이라는 곳에 서 있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매그레에 접신되어 과거의 사건으로 다가가서는 이제 매그레 앞에 서서 지난날의 자신을 혹은 그 상처를 안고 살아온 오늘날의 자신을 용서를 비는 것과 동시에 지금 삶을 그래도 이대로 계속 영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지 모른다. 마치 어린시절 신부에게 하곤 했던 고해성사 처럼... 

   솔직히 고백하자면 리뷰를 쓸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은 늘 이렇게 마지막이다. 지금도 이 글을 어떻게 끝맺어야 할지 난감하다. 이 쯤이면 '생폴리앵에 지다' 전체에 대해서 지금까지 해 왔던 말들을 종합해 정리해 놓아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에 딱 들어맞는 문장들을 생각해내기가 힘들다. "'생폴리앵에 지다'는 이후 매그레 시리즈의 모든 주제와 특징들이 발현되는 그 진정한 시작이라 할만하다'"고 썼다가 지우고 "'생폴리앵에 지다'는 죄에 대해 민감했던 심농을 여실히 드러내며 그가 왜 매그레 같은 추리소설을 쓰게 되었는지 보다 확실하게 우리에게 알려준다"라고 썼다가 또 지운다. 그 어느 문장도 지금까지 해 온 말들을 부분적으로 밖에는 담고 있지 못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휴우~ 하지만 어떻게든 끝은 맺어야 하는 글. 그냥 무작정 덤벼들고 보자. 따라서 이 뒤에 쓰일 말들은 그저 이 순간 아주 우연히 결정된 것임에 다름아니다라는 것을 미리 알려둔다. '생폴리앵에 지다' 자체가 모든 우연이듯이. 사실 따지고 보면 우연과 필연은 또 종이 한 장 차이 아닌가? 짝사랑을 하던 여자를 내내 기약없이 기다리고 있던 남자에게 마침 나타난 그 여자는 필연이지만 그 여자에게 있어 기다리고 있던 남자는 또 그렇게 우연이듯이... 

  아무튼 이 소설은 심농이 그 어떤 작가보다 인간이 처한 존재론적 조건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작가라는 걸 보여준다. 그가 하필이면 추리소설이라는 형식을 택했던 것은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천지창조를 그리기 위해 붓을 택했던 것 처럼 그것이 그가 추구했던 주제에 그저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 무엇보다도 그는 해명되지 않은 죽음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자였으니까 말이다.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그 죽음을 안고 거기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살아가는 자는 나날의 일상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그것으로 부터 완전히 달아나기 위해 더 삶에 집착할수도 거기에 빠져 소용돌이에 갇힌 듯이 늘 맴돌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다 그는 어릴때 부터 카톨릭적 세계관에 깊이 빠져있었다. 그렇게 그의 모든 행위를 신 앞에서 헤아려볼 수 밖에 없는 자였다. 거기서 일상이 가지는 위태로움, 죄가 드리운 어두운 그늘은 더욱 더 크게 자리잡았을지 모른다. 그는 그렇게 낮동안은 웃고 떠들다가도 밤엔 괴로워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주 활기차고 정력적인 삶을 살았던 심농이 왜 매그레는 이렇게 한없이 우울한 분위기를 띠게 되었을까 궁금하게 여겼었는데 어쩌면 바로 이와 같은 심농의 삶 자체 때문에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뉘게 된 것은 아닌가 싶다. 현실적 삶은 그 죽음이 주는 여운으로 부터 달아나기 위해 더욱 더 집착하느라 그랬던 것이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카톨릭적 세계관과 죄책감으로 환기되는 억누를 수 없는 우울은 이렇게 매그레를 통해 토로되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그렇게 매그레를 통해 보여주는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시선 역시도 혹시 그러한 자신을 신에게 이해받고 싶은 욕망에서 발현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면 죽음은 정말 '노이샨츠역'과 같다. 죽음이 삶과 단단히 결부되어 있듯이 삶은 늘 그곳을 스쳐간다. 하지만 삶이라는 기차는 그곳으로 부터 오직 멀어지기 위해 속도를 더해갈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이샨츠역'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그 경계를 넘어가기 위해 한 번은 내려야 할 곳이다. 한없이 이어지는 결말에 종지부를 찍기위해서라도 그냥 이렇게 말하자. "이 소설은 언제가 당신이 내려야 할 그 노이샨츠 역으로 불현듯 데려가는 소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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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over 2011-06-09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수상한 라트비아인'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둘 다 매그레 시리즈죠^^

오드득 2011-06-10 00:10   좋아요 0 | URL
이프리트님 오랜만이네요^ ^
네. 수상한 라트비아인이 데뷔작이고 이 소설은 세번째로 나온 작품이에요.
제 생각엔 앞으로 나올 매그레 시리즈의 어떤 원형과도 같은 작품이 아닌가 싶어요.
 
소설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어느새 또 5월의 신간을 추천하는 시간이 닥쳐왔군요. 

  아직 선정된 책중 단 한권도 리뷰를 쓰지 못한 시점인데 

  정말 제가 마치 헤라클레스가 태양을 향해 쏘았던 그 화살에 매달린 것 처럼 

  눈깜짝할 속도로 여기로 날아오고 말았네요. 

 

  신간 추천 페이퍼를 작성하기 위해서 신간들을 훑어봤습니다. 

  5월 한 달동안 어마어마한 신간들이 출간되었더군요. 

  신간 평가단을 하면서 처음으로 새로나온 책들을 훑어보게되었는데 

  그렇게 많은 책들이 정말 소리 소문도 없이 나오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나라가 세계 출판 시장 3위라는 말이 새삼 실감 났습니다  . 

  그 많고 많은 신간들 중에 이번달만큼 주목 신간을 고르기가 힘든 달도 없는 것 같군요. 

  아무튼 그 중에서 제가 주목한 신간들은 이렇습니다 . 

 

    

 

 

 

 

 

 

 

  일단, 뭐랄까요. 제 어린시절에 가장 충격을 주었던 그런 의미에서 정신적 스승이라고나 할까요. 하여간 그러한 분들의 신간들이 드디어 나왔길래 반가운 마음에 먼저 소개하려 합니다 . 

 '화성의 타임슬립'은 필립 K 딕의 걸작선 중 가장 첫번째로 나온 책입니다.  이렇게 멋진 디자인으로 진정한 의미의 걸작선이 나오다니 일단 딕의 팬으로서 감격입니다. 저는 어릴 때 말하자면 도서관 키드였는데요. 거기서 딕의 '사기꾼 로봇(THE IMPOSTER)'를 처음 만났습니다. 주위 사람 모두가 주인공을 외계인이 보낸 자살 폭탄 로봇으로 의심하는데 주인공은 끝까지 자신이 진짜 사람이라고 주장하죠. 당연히 독자들은 그의 입장에 서서 주위 사람들의 무지를 안타까워 하는데 그런데 결국 밝혀지는 진실이란... 문자 그대로 충격에 빠졌던 작품이었습니다. 한동안 어린 마음에 제 자신도 그러한 로봇이 아닐까 의심스러워했을 정도로... 그 때는 딕의 작품들이 아직 우리나라에 유명하지 않아서 제가 읽어볼 수 있던 단편도 딱 그 하나 뿐이었죠. 그 뒤 차츰 그의 소설들이 영화화되면서 주요 작품들도 번역되더니 드디어 완전한 의미의 걸작선으로 발간되었네요. 반갑고기쁘기 그지 없습니다.(전 이미 국내에 나온 딕의 소설들을 다 구매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중복 소장을 하게 되었지만 말이죠. ㅠ ㅠ) 아서 G 클라크도 그러한 의미에서 딕과 동일한 정신적 스승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책 '유년기의 끝'이 제게 아주 많은 영향을 미쳤죠. 그런 의미에서 아서 G 클라크의 단편집들이 나오는 것은 제게 아주 반가운 일입니다. 첫번째 두 권이 나오고 이번에 나오기까지 거의 1년 넘게 걸렸지만 말이죠(아서 G 클라크도 할 말이 많지만 추천 페이퍼에 그걸 다 쓰면 두 권 얘기만으로도 엄청 길게 쓸 것 같아서 클라크는 이 정도로만 언급하는게 좋을 것 같네요ㅠ ㅠ) 

 

  황석영 작가가 또 이렇게 새로운 소설을 들고 찾아왔군요 

  부끄럽게도 저의 인연은 '심청'에서 멈춰져있습니다. 그 후의 작품들이 아직 공백으로 남아있는 터라 그것을 건너 뛰고 새로이 나온 책부터 읽는다는게 왠지 조심스럽지만 황석영 작가의 말중에 이런 말이 있더군요 

 "지금의  세계는 우리와 더불어 살아온 도깨비를 끝없이 살해한 과정이었다. 나는 이들 우리 속의 정령을 불러내어 그이들의 마음으로 질문을 해보고 싶었다. 내 속에 그게 정말 아직도 살아 있는 거냐?" 이 말이 왠지 마음을 울려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다시금 '손님' 때의 그 황석영 작가를 볼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특히나 하드보일드 소설들에 있어서 탐정들(혹은 형사들)은 자주 작가들의 분신들로 평가받곤 합니다. 탐정들(혹은 형사들)은 그렇게 그야말로 작가들의 신념과 세상에 대한 분노를 육화시켜 놓은 인물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탐정들(혹은 형사들)을 창조시켰는지에 대해 듣는다는 것은 작가들이 그의 작품들에 어떤 의미를 주고자 하는지 혹은 그의 작품들에 대해 어떤 태도들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굳이 그런 것을 제외하더라도 좋아하는 시리즈의 주인공이 어떻게 해서 창조되었는가 하는 궁금증을 해소시키고 싶은 것은 팬심으로서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아무튼 작품의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해서나 팬으로서나 어차피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무진장 나와 있어서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무작정 닥치는대로 읽고 싶은 그런 책이기도 합니다. 

  

 

  

살만 루슈디의 새 소설도 나왔습니다. 

2008년에 나온 이 소설은 액면만 보면 출생의 비밀이 얽힌 인도의 무굴제국을 배경으로 한 옛 이야기 같지만 살만 루슈디 자신은 이 책에 관해서 말하길 자신의 책중 가장 재해석이 많이 될 작품으로 매년 끊임없이 읽을 것이 요구되는 소설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제임스 조이스가 자신의 소설 '율리시스'를 두고 했던 말과 비슷한데 그는 여기다 조이스 처럼 그 어떤 수수께끼들을 숨겨놓은 것일까요? 퍼즐러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분들이시라면 한번쯤 도전해보고 싶은 작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의 신간 추천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빨리 남은 숙제들 마치러 가야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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