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사전'을 읽으면 김승옥 작가의 '서울 1964년 겨울'이라는 소설이 생각난다. 1964년 서슬퍼런 군부독재 시절 그렇게 암울한 시대적 분위기에 짓눌려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잃고 그저 익명화된 존재로 살던 주인공들이 남들은 모르는 오로지 자기만이 알고 있는 사실과 지식들을 들먹이며 애써 그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려 애달아하던 그 모습이 왠지 떠오른다. 그런데 왜 그들은 오로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려 했던 것일까?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무척 닮아보이는 '미셀 푸코'는 지식마저도 근대에 이르러서는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양산된다고 했던가? 그래서 그 지식을 선택하고 배제하는 지식-권력이야말로 근대의 핵심적 권력이라고. 그렇게 그 권력은 사회 성원들이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체제 유지를 위해서 알아야 할 것만을 주입시켰고 근대에 이르러 자리잡게된 교육 체제는 성원들이 필요한 지식 보다는 체제가 필요한 지식을, 거기에 감겨든 진정한 의도는 슬쩍 가려둔 채, 상식이라는 시멘트까지 발라 더욱 견고한 것으로 만들고 말았다 . 그렇게 의도 자체에 이미 체제 유지를 위해 유용한지의 여부가 중요했던 것 처럼 그렇게 양산되고 관리된 지식들 역시도 당연히 오로지 '쓸모' 여부에 의해 그 가치와 생존여부를 심판받게 되었다. 그것이 소위 '잡다한 지식'이라는 말이 태어나게 된 배경이었다. 우리는 자주 '잡다한 지식'이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그 말을 할 때 우리는 분명 지식들의 위계질서를 스스로 세우고 있다. 그런데 누가 그렇게 지식들의 위계질서를 세우고 당당하게 '잡다한 지식'들이라 규정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반대편에 있는 쓸모있는 지식이란 뭘까? 그것은 최소한 자본으로 교환가능한 지식을 말한다. 그렇게 개인에게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고 나아가서는 자본의 교환으로 그 체제를 지속해야만 하는 자본주의 자체에 도움이 되는 그런 지식들 말이다. 따라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들의 위계질서란 오로지 현실적으로 쓸모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나누어졌을 뿐 거기엔 어떠한 진리치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근대에 이르러 헤게모니를 쥐게 된 자본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협소한 시야로만 지식을 바라보게 했고 우리는 근대에 이르러 편재된 기성교육 덕택에 그러한 관점을 스스로 내면화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체제는 본질적으로 지식의 확산을 싫어한다. 그래야 안정을 구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세가 천년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신부나 수사들만이 글을 알았기 때문이다. 왕을 비롯하여 그 어떤 귀족도 스스로 성경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 또한 마찬가지다. 인쇄술의 발달이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 혁명은 도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체제든 스스로의 안정을 위해서는 지식을 관리하고 통제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자기들 입맛에 맞는 지식만 존치시키기 위하여 많은 지식들이 유통되는 것을 막는다. 그리고 그 유통의 억제를 위해서 아예 그 구성원들 마저도 체제가 싫어하는 지식들을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하도록 내면화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구성원들을 아주 협소한 시야로만 지식을 바라보도록 만드는 것이다. 때문에 지속적인 검열은 그 어떤 체제든, 특히나 뒤가 구린 체제일 수록 필수적이다. 굳이 사회가 원하는 지식만 유통시키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사회내의 구성원들이 항상적으로 편협한 지식에 대한 시각을 가지도록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피에르 부르디외에 따르면 지식을 넘어 개인 스스로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라 여기기 쉬운 취향마저도 그렇게 사회적으로 재생산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우리의 의식과 신체를 횡단하고 있는 지식이나 취향들은 모두 사회가 암암리에 새겨놓은 코드들에 불과하다. 따지고 보자면 그 코드로 부터 벗어난 정말 나만의 것이란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 속의 네오는 사실 그리 먼 인물이 아닌 것이다. 이미 우리 자신이 네오인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시각이 비단 지식을 바라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나 '감시와 처벌'은 그렇게 지식들의 체계적인 분류와 통제가 결국 윤리학적인 문제로 연결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지식에 대한 체제의 유용성 기준이 그대로 사람에게까지 통용되는 것이다. 정상인과 비정상인을 나누는 기준 역시도 지식과 똑같이 체제에 얼마나 쓸모있느냐 하는 것으로 결정되고 그렇게 정해진 기준은 지식과 마찬가지로 또 그렇게 성원 개인들에게 내면화되어 그들 역시 다른 사람들을 오로지 '쓸모' 여부에 따라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지금 우리들의 모습도 이와 같지 아니한가. 이렇게 지식을 바라보는 시각은 결국은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으로까지 연결된다. 때문에 내가 지식들을 대하는 태도는 어쩌면 정말 중요한지 모른다. 유용성의 기준 따위는 던져버리고 그 모든 지식들을 다 나름대로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받아들이면 그렇게 타인들마저도 받아들이게 될 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처럼 이렇게 '잡다한 지식'들이 가득차 있는 책이 정말 소중하다고 믿는다. 어디가서 '사람의 입맞춤이 개미들이 얼굴을 맞대고 영양교환행위를 모방한 것'이며 '빈대들의 성(性)'이라든지, '쥐의 똥구멍을 꿰맨 여공'의 얘기를 들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사회가 쓸모없다며 한 켠으로 치워버린 지식, 혹은 묘지 속에다 봉인해버린 지식들이 이렇게 다시금 생명을 얻고 스스로를 내보일 기회를 만들어주는, 그래서 모든 지식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의 얼굴을 들이미는(이 책의 지식들이 최소한의 항목으로도 나눠지지 않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사실 그 항목으로 나누고 체계화시키는 것이야 말로 근대 지식-권력의 소행이라고 푸코는 말하지 않았던가! 항목의 부재와 무질서한 지식의 나열은 그 자체로 모든 지식이 동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런지.), 이런 책들이 난 정말 소중하다고 믿는다. 김승옥의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의 주인공들이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오로지 자신만이 아는 사실과 지식으로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고 했던 것 처럼 누군가가 내게 원했던 지식이 아니라 바로 내가 스스로 원하는 지식들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이런 책들이 그동안 사회로 부터 오염되고 세뇌된 내 의식과 영혼을 조금은 정화화고 껍질을 벗겨서 보다 더 '본래적' 나로 다가갈 수 있게 만들어줄 것이라 믿는다. 

  세상에 그냥 몰라도 좋은 지식, 잡다한 지식 같은 건 없다. 그런 지식들의 위계질서를 만들고 분류하고 통제했던 근대 자체를 낳게 했던 지식들만 봐도 그렇다. 그 지식들은 당시 어떠한 지식들이었나? 흔히들 근대는 르네상스로 부터 탄생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르네상스를 낳게 한 그리스 로마 고전에 대한 연구는 당시 가장 쓸모없는 짓거리 중의 하나였다. 쾌쾌묵은 옛날 얘기들을 연구하는 건 정말 할 일없고 바보들이나 하는 짓으로 여겨졌었다. 그런데 그렇게 쓸모없는 지식, 잡다한 지식이 결국은 근대를 낳고 말았다. 여기서 보듯이 그 어떤 지식이든 쓸모없는 것은 없으며 그대로 다 소중하다. 다만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해 그 빛을 발휘하고 있지 못할 뿐. 그러니 '상상력 사전'에 나오는 그 어떤 지식들이라도 한 반 꼼꼼하게 읽으실 것을 권하고 싶다. 혹 누가 아는가? 그 중 어떤 것이 근대를 가져왔던 그 지식 처럼 또 시대를 들어올릴만한 지렛대가 되어줄 지... 

 ps.  더 하여 이러한 '쓸모없음'으로 치부되어 버려진 모든 지식들의 진정한 가치 회복을 위하여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도 꼭 읽어보실 것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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