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폴리앵에 지다 매그레 시리즈 3
조르주 심농 지음, 최애리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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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초엔 그저 한 우연이 있었을 뿐이다. 

 벨기에 경찰의 의뢰로 매그레는 브뤼셀로 가게 된다. 휴가삼아 떠났던 가벼운 여행. 회의도 예상 보다 일찍 끝나 한 잔이나 하려구 들른 작은 카페. 거기 구석진 자리에서 매그레는 우연히 한 남자를 보게된다. 여지없이 '전문적 백수' 로 보이는 남자. 무심코 그를 바라보게 된 순간 그 남자가 행색과는 어울리지 않게 주머니에서 수북한 지폐 다발을 꺼낸다. 그리고 그것을 종이로 포장을 하더니 그 위에 주소를 적는다. 초라하고 남루한 사내로서는 도저히 가질 법하지 않은 그 거액에 매그레의 예민한 감각은 사건의 냄새를 맡는다. 그렇게 그의 추적이 시작되고 소설이 진행된다. 

 그렇지만 보시다시피 여기엔 얼마나 많은 우연이 있는 것인지... 첫 문장 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그가 결국 사건에 착수하게 될 때까지 저 많은 우연이 단 하나라도 빠져서는 안되는 게 여기서 드러난다. 벨기에 경찰이 의뢰하지 않았다면, 회의가 예정보다 일찍 끝나지 않았다면, 한 잔하려고 무심코 작은 카페에 들르지 않았다면, 거기 한 남자가 하필 매그레가 보았을 때 그 지폐 다발을 꺼내지 않았다면, 매그레는 결국 죄책감(이 원인에 대해서는 소설을 아직 읽지 않은 분들을 위해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을 가지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결국 오래도록 묻혀 있었던 한 사건이 수면으로 떠오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이걸 읽는 순간 너무나 많은 우연의 남발에 이 소설은 치명적인 구성적 결함을 가지고 있구나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먼저 언급해두고 싶은 것은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러한 연쇄된 우연엔 분명 심농의 명확한 의도가 있으며 그것은 정확히 심농이 '생폴리앵에 지다'  작품 전체를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여기에 관해 생각해보고 싶은 것으로 이 소설이 다른 시리즈에 비해(지금 출간한 네권에 한정해서이다.) 가지고 있는 독특성이다. 그 독특성은 다른 소설과 달리 '생폴리앵에 지다'에서만은 매그레가 사건을 발견하고 수사하고 해결하게 되기까지 내내 사건에 수동적으로 관계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잘 설명이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매그레는 단서를 발견하는데서도 앞에서 말했듯이 우연히 그 단서가 주어져서 그랬던 것이고 수사를 진행하는 와중에서도 그가 직접 발견하기 보다 사건 관계자들이 알아서 그 앞에 나타나주는 식이다. 그렇게 이 소설에서 매그레는 내내 이 사건의 핵심을 향하여 누군가에게 인도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 마치 사건이 드러나기 위해서 그를 초대한 것만 같이 말이다. 그렇게 매그레는 유독 이 소설에서 너무도 수동적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매그레가 가지는 태도의 독특성은 앞서 말했던 우연의 남발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 둘을 나란히 놓고 보면 그 관계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것에 관해 앞에서 언뜻 힌트 처럼 남겨놓기도 했다. 바로 '섭리'라는 말로 말이다. 이것은 이 다음 작품 '라 프로비당스호의 마부'에서 그 '라 프로비당스'가 가진 뜻이기도 하다. 아무튼 굳이 이 말을 쓴 것은 이 소설에서 나타난 우연의 남발과 매그레의 현격한 수동성은 심농이 이를 통해 결국 그 사건이 드러나게 된 것은 일종의 '신의 섭리' 로 보여주려 했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 앞에서 모든 죄는 언젠가 다 밝혀지게된다'라는 오랜 카톨릭적 믿음 그대로 말이다. 

  이는 작가 심농 자신을 생각해 보면 더 명확해 보인다. 이 소설은 심농 자신의 자전적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 그 역시 이 소설에 나오는 '묵시록의 동지들'처럼, 그렇게 영화 '죽은 시인들의 사회'에 나오는 그 모임 처럼, 젊었을 적 그런 모임을 했었던 것이다 . '묵시록의 동지들'이 보여주었던 낭만과 열정은 사실 당시 심농이 참여했었던 그 모임의 분위기를 그대로 옮겨온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날 그 모임중의 한 사람이 목을 매달고 죽는다. 사건은 자살로 처리되었지만 타살의 의혹도 없지는 않았다. 그 때 목을 맸던 사람의 이름이 바로 '조제프 장 클라인'이었다. 책의 맨 뒤에 언급되는 이 이름은 '클랭'이라는 이름을 영어식으로 읽은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프랑스식으로 말하면 정확히는 '조제프 장 클랭'이 될 것이다. 바로 '생폴리앵의 성당'에서 '묵시록의 동지들'중 목을 매달고 죽은 '클랭'과 똑같은 이름이다.(목매달아 죽은 곳도 바로 생폴리앵 성당, 그 곳이다) 희생자의 이름도 죽은 장소의 이름도 동일하다는 것은 혹시나 심농은 이 소설을 통하여 그 사건 자체를 재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만든다. 그렇게 그저 자전적 경험을 따왔다기 보다는 오히려 심농 자신이 매그레에게 접신되어서 아직까지 그 스스로에게도 미궁으로 남아있는 사건 자체에로 뛰어들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의문을 가지게 만든다. 나는 이 질문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단순한 문학적 재현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그 사건에 제대로 아무런 대처도 못했던 스스로에 대한 일종의 참회록일까? 이건 비단 이 소설에만 국한된 문제만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이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은 바로 뒤이은 '라 프로비당스호의 마부'의 성격마저도 규정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이 두 작품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아무튼 그 연결관계는 후에 '라 프로비당스호의 마부'의 리뷰를 쓸 때 말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계속 '현재의 심농이 과거의 사건에 뛰어듦'에 대해서만 살펴보도록 하자. 

  왜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근거는 또 하나가 있다. 그 역시 목매달고 죽은 자의 이름 때문이다. 그 이름은 앞서도 말했듯 '조제프 장 클랭'이었다. 여기서 클랭이란 이름은 소설에서도 똑같이 희생자 이름으로 쓰였다. 그런데 씌여진 이름이 클랭만은 아니다 . 여기엔 또 하나의 이름이 쓰였는데 그 이름을 가진자가 이 소설에서 하는 역할 때문에 하필이면 그 이름을 가졌다는 것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그 이름은 바로 '조제프'이다. (마지막 하나 남은 '장'이라는 이름은 바로 '라 프로비당스호의 마부'에서 또 쓰인다. 이것도내가 두 작품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 근거중의 하나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조제프란 인물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본격적으로 매그레를 사건에 착수하게 만드는 자일 뿐만아니라 아예 사건의 핵심마저 다가가도록 인도하는 자이다. 매그레가 테세우스라면 조제프는 아리아드네의 실 같은 자인 것이다. 그런데 심농은 그 아리아드네의 실 같은 자에게 죽은 자의 이름을 주었다. 클랭이라는 성이 아니라, 그 시절 늘 부르곤 했을 바로 그 이름을. 나는 이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매그레를 인도했던 바로 그 자에게 그 시절에 늘 부르곤 했을 죽은 자의 이름을 주었다는 것이. 그건 심농이 늘 의혹으로 남아있는 그 비극을 생각할 때 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아니 그는 오히려 그 이름 때문에 늘 그 사건에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건 다른 어어떤 조제프가 아니라 그가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던 대로 그만의 조제프였을 테니까. 따라서 관계는 명확해 보인다. 소설속 매그레와 조제프의 관계는 현실속 심농과 조제프의 관계로 반복되고 정확히 조제프에게 매그레가 인도되었듯이 심농 역시 이 소설을 통하여 마지막 한 걸음으로서 다시금 그 사건에게로 뛰어드는 것이다.(여기서 굳이 '마지막'이라고 한 까닭은 '라 프로비당스호의 마부'가 사실상 그러한 트라우마처럼 남아있던 그 사건에 대한 심농 개인의 작별인사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때문에 유독 이 소설에서 만큼은 매그레가 수동적일 수 밖에 없었으며 어쩌면 사실 그가 직접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수사관으로서의 매그레란 캐릭터 자체를 태어나게 한 것도 근본적으로는 바로 이 사건이 동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만일 이것이 정말 내 생각대로 진짜 매그레를 통해서 근원적으로 하고 싶었던 것을 하는 거라면 그렇게 유독 이 작품에서 카톨릭적 색채가 짙게 나타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바로 이 근원적 회귀와 같은 시도를 통해서 묻는 질문은 인간에게 있어 '죄'란 무엇이고 또 그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인데 그것은 그야말로 그가 가장 처음으로 영향을 받았고 또 지속적으로 성장시켜온 카톨릭적 세계관 위에서라야 대답이 가능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생폴리앵 성당의 모습 

 

  심농의 어느 전기 작가(Lucille Frackman Becker)는 "매그레의 전체적 분위기는 일요일날 들리는 성당의 종소리와 더불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심농의 작품에 있어서 카톨릭적 세계관은 아주 중요한 밑받침이 되었음을 강조했다. 특히나 그는 어렸을 때 부터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할 때 거드는 아이로 일했고 종교 생활에 아주 열심이었다고 한다. 그 전기작가는 그 어린 시절 카톨릭 성당에서의 경험이 심농에게 '죄'라는 것, '심판'이라는 것 그리고 '죄를 짓는 인간'에 대한 원초적인 감정들과 시각들을 주었을 것이며 그것이 그대로 매그레에게 가장 근본적인 태도 'Comprendre sans juger' 즉 '심판하지 않고 이해한다'를 이루게 만들었을 것이라 한다. 아마도 매그레를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매그레가 꼭 범죄자에게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 비록 그는 수사관이지만 말이다. 그가 마지막 범죄자 앞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국가의 질서집행자라기 보다는 어쩐지 고해를 듣는 신부와도 같은 모습이다. 물론 그 고해를 남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헤아려서 거꾸로 들려준다는 점에 차이는 있지만. 아무튼 그는 법의 눈이 아니라 같은 인간의 눈으로서 범죄자의 범죄가 과연 심판 받을 만한 것인가를 가늠한다. 법의 눈이 가진 '지은 죄'라는 좁은 시야를 넘어 매그레는 왜 그러한 죄를 범했는지 맥락을 헤아리고 때로는 죄가 설령 심판받아야 하는 것임에도 그 심판이 불러올 또 다른 비극까지 감안하여 기꺼이 그 죄를 용서하는 포용을 보여준다. 이것은 고해성사를 받은 신부가 전하는, 그렇게 신의 눈으로 본 용서라고 할 수는 없을까? 아무튼 이 마지막 물음에 부정적인 대답을 하더라도 이렇게 카톨릭적 세계관이 매그레의 작품세계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만은 인정하게 되리라 믿는다. 

  그러니까 그 많은 우연의 남발은 심농의 죄에 대한 카톨릭적 세계관을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떤 죄이든 신 앞에서는 감추어질 수 없으며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결국에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하지만 그가 카톨릭적 색채를 이렇게 부여하는 것은 비단 이러한 죄의 성격만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아니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그 죄 앞의 '인간' 자체를 생각하기 위해서이다. 바로 이를 통해 그가 강조하는 인간은 모습은 그 무엇보다 '경계에 서 있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경계는 소설의 도입부 노이샨츠 역에서 부터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 노이샨츠 역은 바로 네델란드와 독일의 국경에 있는 역이었다. 그렇게 그 역은 '경계' 위에 서 있는 역이다. 거기는 양쪽의 많은 노동자들이 통근 혹은 퇴근 열차를 타고 스쳐간다. 아니, 잠시 머무르기도 한다. 국경을 건너기 위한 필요한 절차를 거치는 잠시 동안만. 그 때 그들은 우르르 요깃 거리를 찾아 식당으로 뛰어든다. 그렇지만 단 두 사람만은 갈 곳을 잃은듯 대합실에 우두커니 못박혀 있다. 그 중 한 사람이 매그레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가 지금 추적하고 있는 자이다. 

  소설의 도입부 노이샨츠 역의 모습과 또 그렇게 홀로 내버려진 두 사람의 존재는 무엇보다 앞으로 이 소설에서 하게 될 얘기를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노이샨츠 역이 경계에 서 있듯이 그 대합실의 두 사람도, 다른 사람들은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고픈 배를 채우는 그렇게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일종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정말 후반에 매그레가 쫓는 그 존재는 그렇게 삶이라는 경계 다른쪽에 있었던 인물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운명과도 같은 '죄의 밝힘'이 잘라낼래야 잘라낼 수 없는 죄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이렇게 경계 위에 서 있는 인간 존재는 그 죄로 인해 심판이 아니라 바로 이해를 받아야 하는 변호의 이유가 된다. 그것은 그들이 그만큼 강한 존재가 아니었기에 저지를 수 밖에 없던 것이기도 했고 또 이미 선택한 경계의 한 쪽 즉 특히나 '삶'을 택했던 자들은 이제는 혼자만이 아닌 자신에게 딸린 가족들까지 책임지느라 어쩔 수 없이 저지를 수 밖에 없던 것이기도 했다. 아니, 달리 보면 어쩌면 현상하는 '죄' 자체가 그렇게도 안정적이고 항구적일 것만 같았던 인간의 삶이 사실은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서 있는 것임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살아 있는 '묵시록의 동지들'의 묘사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나는데 그 중 가장 상위의 계층을 차지하고 있는 모리스와 조제프의 변화는 정확히 이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만큼 쓰고 보니 심농이 매그레를 비롯하여 묵시록의 동지들을 모두 과거의 사건으로 소환하는 그 존재가 단순히 '죄'만을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의심스러워 진다. 혹시 그 존재는 중세의 '메멘토 모리'와도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면 소설에서의 죄의 묘사는 '죽음'으로 바꿔놓고 보아도 그대로 다 들어맞는 것 같다. 아니 초반에 처음 조제프가 등장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자면 그것은 그야말로 그가 죽음으로 인해 과거의 사건으로 소환되는 것이 아닌가! 그림자처럼 삶에 결부되어 있지만 모두가 회피하려 드는, 그래서 거꾸로 삶에 더욱 더 집착하게 만드는 죽음. 하지만 그것은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영원한 얼룩이다. 그 얼룩은 안정적이라 이대로 늘 같은 모습이리라 여겼던 삶에 계속 균열을 만들고 사실은 그 삶의 기반이 그리 단단하지 못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얼룩이 커다란 입을 벌릴 때 사람들은 소설에서 매그레의 처분을 다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던 것 처럼 그렇게 그 입이 닥쳐옴을 속절없이 기다리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죄로 보았을 땐 '용서'의 관계가 '죽음'으로 치환시키자 그대로 '간구'의 몸짓이 된다. 뒤이은 '라 프로비당스호'도 그것이 배에 쓰이면 흔히 '구원자'를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만일 참회록이라면 심농은 이 경계 어디에 서 있을 것인가? 아마도 당연히 경계의 안쪽, '삶'이라는 곳에 서 있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매그레에 접신되어 과거의 사건으로 다가가서는 이제 매그레 앞에 서서 지난날의 자신을 혹은 그 상처를 안고 살아온 오늘날의 자신을 용서를 비는 것과 동시에 지금 삶을 그래도 이대로 계속 영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지 모른다. 마치 어린시절 신부에게 하곤 했던 고해성사 처럼... 

   솔직히 고백하자면 리뷰를 쓸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은 늘 이렇게 마지막이다. 지금도 이 글을 어떻게 끝맺어야 할지 난감하다. 이 쯤이면 '생폴리앵에 지다' 전체에 대해서 지금까지 해 왔던 말들을 종합해 정리해 놓아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에 딱 들어맞는 문장들을 생각해내기가 힘들다. "'생폴리앵에 지다'는 이후 매그레 시리즈의 모든 주제와 특징들이 발현되는 그 진정한 시작이라 할만하다'"고 썼다가 지우고 "'생폴리앵에 지다'는 죄에 대해 민감했던 심농을 여실히 드러내며 그가 왜 매그레 같은 추리소설을 쓰게 되었는지 보다 확실하게 우리에게 알려준다"라고 썼다가 또 지운다. 그 어느 문장도 지금까지 해 온 말들을 부분적으로 밖에는 담고 있지 못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휴우~ 하지만 어떻게든 끝은 맺어야 하는 글. 그냥 무작정 덤벼들고 보자. 따라서 이 뒤에 쓰일 말들은 그저 이 순간 아주 우연히 결정된 것임에 다름아니다라는 것을 미리 알려둔다. '생폴리앵에 지다' 자체가 모든 우연이듯이. 사실 따지고 보면 우연과 필연은 또 종이 한 장 차이 아닌가? 짝사랑을 하던 여자를 내내 기약없이 기다리고 있던 남자에게 마침 나타난 그 여자는 필연이지만 그 여자에게 있어 기다리고 있던 남자는 또 그렇게 우연이듯이... 

  아무튼 이 소설은 심농이 그 어떤 작가보다 인간이 처한 존재론적 조건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작가라는 걸 보여준다. 그가 하필이면 추리소설이라는 형식을 택했던 것은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천지창조를 그리기 위해 붓을 택했던 것 처럼 그것이 그가 추구했던 주제에 그저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 무엇보다도 그는 해명되지 않은 죽음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자였으니까 말이다.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그 죽음을 안고 거기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살아가는 자는 나날의 일상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그것으로 부터 완전히 달아나기 위해 더 삶에 집착할수도 거기에 빠져 소용돌이에 갇힌 듯이 늘 맴돌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다 그는 어릴때 부터 카톨릭적 세계관에 깊이 빠져있었다. 그렇게 그의 모든 행위를 신 앞에서 헤아려볼 수 밖에 없는 자였다. 거기서 일상이 가지는 위태로움, 죄가 드리운 어두운 그늘은 더욱 더 크게 자리잡았을지 모른다. 그는 그렇게 낮동안은 웃고 떠들다가도 밤엔 괴로워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주 활기차고 정력적인 삶을 살았던 심농이 왜 매그레는 이렇게 한없이 우울한 분위기를 띠게 되었을까 궁금하게 여겼었는데 어쩌면 바로 이와 같은 심농의 삶 자체 때문에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뉘게 된 것은 아닌가 싶다. 현실적 삶은 그 죽음이 주는 여운으로 부터 달아나기 위해 더욱 더 집착하느라 그랬던 것이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카톨릭적 세계관과 죄책감으로 환기되는 억누를 수 없는 우울은 이렇게 매그레를 통해 토로되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그렇게 매그레를 통해 보여주는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시선 역시도 혹시 그러한 자신을 신에게 이해받고 싶은 욕망에서 발현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면 죽음은 정말 '노이샨츠역'과 같다. 죽음이 삶과 단단히 결부되어 있듯이 삶은 늘 그곳을 스쳐간다. 하지만 삶이라는 기차는 그곳으로 부터 오직 멀어지기 위해 속도를 더해갈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이샨츠역'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그 경계를 넘어가기 위해 한 번은 내려야 할 곳이다. 한없이 이어지는 결말에 종지부를 찍기위해서라도 그냥 이렇게 말하자. "이 소설은 언제가 당신이 내려야 할 그 노이샨츠 역으로 불현듯 데려가는 소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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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프리트 2011-06-09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수상한 라트비아인'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둘 다 매그레 시리즈죠^^

ICE-9 2011-06-10 00:10   좋아요 0 | URL
이프리트님 오랜만이네요^ ^
네. 수상한 라트비아인이 데뷔작이고 이 소설은 세번째로 나온 작품이에요.
제 생각엔 앞으로 나올 매그레 시리즈의 어떤 원형과도 같은 작품이 아닌가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