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재익, 크리에이터 - 소설.영화.방송 삼단합체 크리에이터 이재익의 거의 모든 크리에이티브 이야기
이재익 지음 / 시공사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리뷰라는 걸 써본지가 이제 한 일년 남짓 된다.

 리뷰도 일단은 스스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라 쓰다보니 저절로 '크리에이티브'에 관심이 가게 된다.

 여기서 '크리에이티브(creative)'란 이재익 작가에 따르면,

 

 광고업계뿐 아니라 방송, 영화, 연극, 문학, 각종 이벤트 기획 등등 아이디어로 시작해 구체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모든 행위에 크리에이티브란 표현을 쓸까 한다.

 아, 또 되도록이면 상업적인 결과물 위주로 범위를 좁히자. 어차피 이 책은 크리에이티브를 팔아서 먹고사는 크리에이터들, 또 그런 직업을 갖고 하는 사람들이 볼 테니까. (P. 16)

 

 이런 것이다. 내가 쓴 리뷰들을 훑어보면 장르 소설에 대한 리뷰가 훨씬 많은데 장르 소설을 즐겨 읽다보면 자연히 나도 한 번 장르소설을 써볼까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고 하지만 문창과는 커녕 국문과 언저리에도 가보지 못한 나는 거기에 대해서는 아는 것 하나 없으니 맨땅에 헤딩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뭔가 도움 받을 만한 것을 찾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니 그런 이유로 상업적 크리에이티브에 있어서라면 최전선이라 할 수 있는 이재익 작가의 뭐라고 할까 크리에이티브가 되기 위한 실전 지침서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런 책을 이렇게 잡게 된 것이다.

 

 

 

 

 혹시 당신이 나처럼 크리에이티브에 관심을 가졌다면 그래서 그에 관련된 책을 찾다가 이 리뷰를 읽게 되었다면,

 그런 당신에게 이 책은 두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줄 수 있다.

 

 하나는 진짜 페이지 넘어가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다라는 것.

 몰랐는데 원래 이재익 작가에게 따라다니는 별명 중 하나가 '페이지터너'라고 한다. 그만큼 더운 여름 날에 아이스크림을 핥아대듯 술술 읽힌다. 입담에 있어 둘째 가라면 서러울 '두시탈출 컬트쇼'의 담당 PD라서 그런지 이야기를 끌고가는 재담이 뛰어나다. 20대 중반의 등단에서 부터 지금 라디오 PD를 하면서 겪었던 사연까지 자기 이야기를 돼지고기 두루치기에 고추장 양념 들어가듯 적절하게 섞어 독자의 관음증적 욕구마저 충동질하고 있어 마른 들판에 번지는 불길처럼 활활 읽힌다.

 그렇게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내처 읽힌다는 것. 그래서 책이 아니라 어쩐지 낭독하는 오디오 같다는 느낌이 날 정도라는 것. 이것이 첫번째 장점이다.

 

 두번째는 확고한 정체성이다.

 이 책을 가장 잘 정의할 수 있는 말은 아무래도 실전 지침서일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자기 정체성에 더없이 충실하다.

 말 그대로 이론은 상관없이 크리에이티브에 있어서 현장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는 것.

 현장이라는 의미 그대로 실제 크리에이티브한 행위를 할 때 실제적으로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들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두번째 장점이다.

 

 이 책이 그러한 실천에 있어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앞서도 말했듯이 이재익 작가가 누구보다 왕성하게 크리에이티브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는 현재 세 가지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나는 '두시탈출 컬트쇼'의 라디오 PD. 다른 하나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 그가  20대 중반 부터 시나리오(등단 작품이 바로 영화로 까지 만들어지는 바람에)를 썼으며 '목포는 항구다'의 원작자이고 '원더풀 라디오' 시나리오도 직접 썼다는 것은 지금에서야 알았다. 마지막 하나는 소설가다. 그는 지금까지 열 두편의 장편소설을 냈다고 한다. 그 중 '41'과 '씽크홀'은 현재 영화로 제작중이라고 한다. 뭐 이정도면 크리에이티브에서 방귀 좀 뀐다고 해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이런 그이기에 그만의 크리에이티브적 실천 비법을 가르쳐준다고 하니 귀가 솔깃해질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저런 왕성한 창작활동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궁금해서라도 그 비법을 보고 싶은 것이다. 책은 총 세 개의 파트로 나뉘어 이루어져 있는데 가장 처음은 크리에이티브에 대한 소개와 그런 일을 하는 크리에이터가 된다는 것에 대한 것으로 대부분은 이재익 작가가 어떻게 하여 지금과 같이 될 수 있었던가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난 개인적인 삶에는 관심없어. 내가 원하는 건 어디까지나 창작 비법 뿐이라구!'하는 사람은 바로 '파트 2'로 넘어가도 상관없다.

 

 파트 2와 파트 3가 말하자면 붕어빵의 앙꼬다.

 하지만 다루고 있는 부분은 다른데 파트 2가 크리에이터의 원칙 같은 것을 말한다면

 파트 3는 실제 크리에이티브를 할 때 있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실천적 지침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진짜 맛난 것은 가장 나중에 나오는 과자 종합 세트와도 같은 형국이다.

 

 2부의 원칙에서 이재익 작가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근성이다.

 

 중요한 것은 생각만 하지 말고 무조건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덤비는 것이다.

 장르소설의 신이라 할 수 있는 스티븐 킹은 '작품은 엉덩이로 쓰는 것'이라 말했는데 그것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에이터는 어떻게 단련되는가'는 크리에이터가 되고 싶은 분들의 정신무장을 위해 꼭 읽어두면 좋은 글이다.

 나조차 크리에이터도 아니면서 읽으면서 왠지 스스로 반성하는 기분이 되었으니까...

 여기서 이재익 작가가 진정한 크리에이터가 되기 위해서 강조하는 건 결국 하나다.

 그건 생활 자체를 크리에이티브로 바꾸는 것이다. 즉 아예 크리에이티브 중심으로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항상 크리에이티브 중심적 습관을 지녀야 한다. 천재적인 직관을 지니지 못한 크리에이터에게 크리에이티브 중심적 습관은 꼭 필요하다. 노력은 의지가 있어야 가능하지만 습관이 몸에 배면 노력 없이도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으니 (P.110)

 

 한 마디로 일상의 모든 시간을 생존을 위한 필수 시간 외에는 다 크리에이티브에 할애하는 것이다. 그건 단순히 창작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만나는 사람도 크리에이티브적 관점에서 뭔가 활용할만한 점이 없을까 관찰하고 보게 되는 책이나 영화, 신문 그리고 드라마에 있어서도 어떻게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갈등을 고조시켜나가며 클라이막스에서 그것을 해결하는가와 같은 창작의 관점에서 감상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는 것, 생각하는 것 모두를 크리에이티브 중심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이재익 작가가 강조하는,  크리에이터가 되기 위해 그 무엇보다 가져야할 습관이다.

 

 하지만 당연히 이런 일이 쉬울 수 없다. 자칫 그런 습관이 지나치면 미친놈이란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만나는 사람마자 뚫어져랴 쳐다보게 될테고 사람들이 가볍게 감상을 말하는 자리에서 진지한 난도질식 분석으로 분위기를 망쳐놓을테니까. 그래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재익 작가는 바로 그 뒤에 '크리에이터의 맛'이란 글을 달아두었다. 이는 당근 같은 글이다. 성공한 크리에이터가 어떤 달콤한 과실을 맛보는지 절절히 보여서 계속 달리게 만들기 위한...

 장미의 아름다움을 만지기 위해서는 가시에 찔리는 고통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이치의 글이다. 

 

 그렇게 꼭 가져야 할 습관을 말한 다음 그는 이제 진짜 창작은 어떻게 하는지 그 자신 '씽크홀'과 '41'을 썼을 때의 경험을 가지고 세세하게 이야기해준다.  개인적으론 여기서 꽤 배울게 많았다. 사실 지금까지 창작에 대해서 별로 생각조차 해본적이 없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야기를 구성하는데 있어 이재익 작가가 구사하는 대화법은 참신했고 꽤나 유용하게도 보였다. 언젠가 만화가 강풀은 모든 이야기는 한 문장으로 요약되지 않으면 재미없다고 말했는데 그것과 이재익 작가의 대화법이 어쩐지 통하는 것 같기도 하다. 최대한 단순화 시켜서 단단한 뼈대를 구축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지껏 남이 만든 이야기만 소비해왔던 나는 사실 이렇게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 참으로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런 건 모두 선천적으로 재능을 타고 난 사람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재능이 아니라 노력, 스스로 한계를 지워 포기하려는 마음이 무엇보다 가장 커다란 문제라는 이재익 작가의 말을 듣고는 좀 용기도 생겼다. 아무튼 그저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이야기 만드는 일에 대해 뭔가 좀 체계 같은 것이 잡혔다고나 할까 그것이 이 책에서 내가 얻은 최고의 수확이라 할 것이다.

 

 크리에이티브에 관심을 한 번 가져봤던 분들이라면 이재익 작가의 이 책을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하지만 읽을 때 주의 사항 하나가 있다.

 근처에 복통약을 준비해 놓을 것...

 소설, 영화, 방송 삼단 합체로 잘나가는 분의 이야기라 읽으면 본능적으로 배가 아파 오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귀 세트 - 전5권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레밍이라는 동물을 아시나요?

  실물은 이렇게 생겼습니다만...

 

 

 

 노르웨이에 사는 들쥐과에 속하는 동물입니다.

 이 레밍에게는 기이한 습성이 하나있는데요 간혹 떼를 지어 절벽에서 우르르 뛰어내려 자살하는 습성이 있다고 합니다.

 하멜의 피리부는 사나이가 바로 이 레밍을 보고 지어진 얘기가 아니냐하는 설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 동물들이 왜 그렇게 집단 자살을 하는 것인지는 아직도 그 이유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레밍들의 이유를 알 수 없는 집단 자살을 보면서 숙명이 있다면 바로 저런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새삼스레 노르웨이의 조그맣고 앙증맞은 동물 이야기와 아무 관계도 없어 보이는 숙명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번에 새로운 번역으로 완간된(여기다 방점을 꼭 찍어두고 싶습니다. 이전에 판에 생략되었던 내용들이 모조리 복원된 것이 이번 판본의 가장 큰 의의이기 때문이죠.) 오노 후유미의 '시귀'는 바로 이 숙명이 중심 사건을 일으키는 주된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전나무로 빽빽히 둘러싸인 '소토바 마을'.

 그 폐쇄성 만큼이나 오래도록 이 마을은 변함없이 옛 모습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는데요. 어느 날. 기이한 가족 하나가 이사를 오면서 마을은 차츰 변모하기 시작합니다. 시작은 일단 죽은 사람이 유례없이 늘어난 것이었죠. 그것도 비슷한 증세로. 그래서 마을의 유일한 의사. 토시오는 전염병이 아닐까 여겨 소꼽친구 절의 주지 세이신과  조사에 나섭니다만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죽는 자는 나날이 급증. 이윽고 둘은 평범한 병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세이신은 자주 가는 옛 교회의 터에서 스나코라는 정체 불명의 여자 아이와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그러던 중 결국 죽어서 이미 매장된 자들이 다시 돌아와 산자들을 습격한다는 것을 알게되면서 이 급속하게 불어난 죽음의 원인이 바로 그런 자들 때문임을 알게되고 토시오는 그들을 '시귀'라 이름 짓습니다. 시귀들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나면서 이제 이야기의 비중은 시귀에게도 할애되어 본격적으로 시귀대 인간의 구도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시귀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이 인간의 습격 없이 안전하게 거주할 수 있는 장소. 그것을 위해 그들은 소토바 전체를 자기들의 마을로 만들기 위해 은밀하게 움직여왔는데요 그것이 결국은 드러나 토시오를 리더를 하는 인간과 이제는 전면전으로 나아갑니다.

 

  네, 시귀는 흡혈귀 입니다. 오노 후유미는 시귀를 스티븐 킹의 '살렘즈 롯'에 대한 오마쥬라고도 말했는데 이 말대로 시귀는 흡혈귀의 특징을 그대로 가집니다. 사람의 피를 빨아야 생존할 수 있고 햇빛을 받으면 타버리기 때문에 밤에만 활동할 수 있으며 한 번 피를 빨린 인간에게 암시를 걸어 제 마음대로 조종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살렘즈 롯에 나오는 흡혈귀와 같지만 차이가 나는 점이 있다면 일단 그것 말고는 그냥 보통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냥 살아 생전에 할 수 있었던 것 만큼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약합니다. 약해서 두려움도 큽니다. 낮에는 그저 무방비하게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 두려움은 더욱 커집니다. 때문에 그들이 안심하고 있을 수 있는 장소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클지는 이해가 됩니다. 문제는 그들이 공존 가능한 존재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피를 빨고 마셔야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먹지 않으면 그냥 죽습니다. 더구나 시귀에게 굶주림에서 오는 고통은 사람들 보다 훨씬 더 격합니다. 그래서 직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에...

 

 타인의 삶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존재들. 그것이 바로 시귀입니다.  여기엔 아무런 중간 지점이 없습니다. 타협의 여지도 없습니다. 그냥 남의 피를 빨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 뿐입니다.  레밍 처럼 이유 없이 따를 수 밖에 절대적 명령. 일종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죠. 바로 여기에 시귀의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무서운 건 잘 못 그려서^ ^; 한 번 이렇게 간략하게 표현해보았습니다만... 

 

 

 보다 본질적으로 그들의 비극은 그들 스스로 생명을 이어나갈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타인의 피에 기생해야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죽은 자들을 만들어낼 뿐입니다. 더구나 그 수단 역시 하나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더욱 생존이 절박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스스로의 노동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는 자들이기에 오로지 남의 생명에 빌붙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그들이기에 그렇습니다. 동물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오로지 생존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군집을 이루고 사는 생물들은 대단히 사회 공학적입니다. 이는 개미를 보면 확실해지지요. 생존을 위해서는 뭉쳐야 하기  때문에 동료애가 강하고 또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뚜렷한 위계질서가 존재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저항은 허용되지 않으므로 거의 전체주의와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 말이죠. 시귀들의 사회 역시 그렇습니다. 나츠오는 자신을 물라는 명령에 따라 시귀가 되어 돌아온 토오루에게 죽어서까지 그런 녀석들의 명령이나 받고 다니나며 비난하지요. 오노 후유미가 3권 후반부에서 보여주는 시귀 사회의 모습은 정말로 실망스럽습니다. 먹고 자는 것 밖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삶. 더구나 어떤 명령이든 따라야 하고 따르지 않으면 이유를 막론하고 벌을 받는 삶. 거기다 살아 생전 친했던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다는 죄책감까지. 나초노 처럼 이렇게 살려고 다시 살아났냐고 묻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시귀가 된 자들은 저항하지 않습니다. 빨지 않으면 죽으니까 이 절대적 숙명 앞에서 모든 걸 묵인하고 살아갑니다. 토오루에서 보듯 아무리 커다란 죄책감을 느꼈다 해도 그저 울부짖고 말 뿐입니다.

 

 이 거대한 숙명 앞에서 죽음은 영원한 끝이라는 세상의 근본 섭리를 뛰어넘은 자들 조차 무기력할 뿐입니다.

 

 문제는 이들이 오래도록 변함없이 그 모습 그대로를 유지해 온 소토바에게 변화를 가져오는 존재라는 것이죠. 물론 그 채색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어두운 색깔일테지만 말이죠. 토시오느 시귀들이 번창하는 것을 보며 마을이 내년 봄까지 과연 남아있을 수 있을지 걱정합니다. 정확히 그가 생각했던 마을은 지금까지 그 모습 그대로 이어져 온 소토바 이겠죠. 그렇게 토시오도 변화를 거부하는 존재입니다. 시귀들이 시귀의 숙명에 순응하듯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인간의 숙명에 순응하는 자입니다. 시귀가 인간을 먹이 이상의 존재로 취급하지 않듯이 그 역시 시귀를 인간을 위협하는 적 이상의 존재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아내라고 해도 시귀가 되어버리면 승리를 위한 정보를 얻는 동정의 여지가 전혀 없는 포로에 불과합니다. 사실 토시오의 교코 연구 장면은 그대로 포로 심문 과정이라고 보아도 상관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 둘 사이엔 전면전 밖에는 남아있지 않는 것입니다. 변화를 가져오는 존재도 원래 있던 존재도 사실은 다들 변화를 거부하는 존재들이니까요. 변화란 서로 공존한다는 것과 같은 말인데 둘 다 변화를 거부하니 남은 건 모조리 절멸될 때까지 배척하는 것 밖에는 없는 셈이죠. 그리고 결국 그렇게 된 것은 그들이 숙명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들 스스로 숙명을 벗어나려는 노력을 전혀 해보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 모두가 그에 맞는 형벌을 결국 받은 셈입니다.

 

 타인의 삶을 짓밟음으로써 자신의 삶을 연명했던 시귀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내어 줌으로써

 소토바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모습을 항구적으로 지키고자 했던 토시오는 결국 소토바가 불에 타 없어짐으로써...

 

 벌을 받은 셈입니다.

 이는 곧 후유미의 대안이 여기에 있지 않다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흔히 서로 이질적인 두 사회가 서로 섞이게 될 때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받아들임과 받아들여짐'의 문제를 그저 변화의 수용과 거부의 관점으로만 해석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오노 후유미는 더 깊이 내려가 그 근본에 무엇이 있는지 직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이 '시귀'에서 오노 후유미가 보여주는 가장 놀라운 점입니다. 자아, 당신의 확대경이 정말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건 당신 자신입니다.

 

 왜냐구요? 그건 변화를 수용하거나 하지 않거나의 여부가 바로 자신의 숙명을 어느정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고 또한 그 객관화를 통해 어느정도 자유로워질 수 있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결정된 상태로 태어납니다. 인종적으로, 국적으로, 게층적으로 그리고 신체적으로. 한 번 그렇게 결정되면 우리는 왠만해서는  거기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아무리 무국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외국에 나가면 태극기만 봐도 뭉클해지고 아무리 인종 차별을 하지 않으려 해도 인종 따라 달리 감정을 가지게 되는 스스로를 인식하게 됩니다. 거창하게 숙명이라고 이름 붙이는 바람에 위화감이 들 수 있지만 그런 식으로 결정되어진 조건들은 우리들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판단하고 행위하게 만듭니다. 시귀나 토시오나 다를 바 없죠. 덜 극한적이라는 차이 밖에는 없습니다. 웃기는 것은 이렇게 영향을 미치는 조건(숙명이 너무 거창한 것 같아서 조건으로 달리 부르겠습니다.)들이 우연적으로 결정되었다는 겁니다. 지금 나를 형성하고 있는 모든 조건들은 확률의 결과일 뿐입니다. 주사위를 던져서 나온 수와 같은 것이죠. 주사위가 이유를 따져서 스스로 눈을 나타내지 않듯이 우리를 이루는 조건들 역시 마찬가지죠. 그런데도 이 조건들이 한 번 결정되어 버리자 마치 진짜 이유가 있는 양, 거기엔 그 누구도 반대하지 못할 절대적 진리가 있는 양 존재하게 됩니다. 모래 위에 세워진 탑일 뿐인데 스스로 단단한 반석 위에 있다고 여기고 있는 꼴입니다. 오노 후유미는 시귀에게 내려진 숙명 역시 우연의 산물임을 강조합니다. 시귀들에게 같이 피를 빨려 죽더라도 다시 깨어나는 자와 그러지 못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통해서 말이죠. 그런데 누가 다시 살아나고 영영 죽을지는 시귀들 조차도 알 수 없습니다. 그것 역시 확률의 결과입니다. 인간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한 번 시귀가 되면 숙명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오노 후유미가 이렇게 숙명이 우연의 소산임을 밝혀서 드러내고 싶은 것은  이러한 어이없는 모순입니다.

 

 알고보니 우리의 목을 옥죄고 있었던 숙명이라는 쇠사슬이 아주 형편없이 녹슬어 있었다는 그것입니다. 어차피 우연으로 결정된 것일 뿐이어서 달리 마음 한 번 먹는 것 만으로도 그냥 똑 하고 부서질 만큼 연약한 것임을 깨달아라는 것입니다. 결국 나의 조건을 찬찬히 살피면 드러나는 것은 그런 모순이요 조건들의 허약함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숙명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가 숙명의 힘을 그토록 강하게 생각했던 건 시귀가 피를 빨린 인간에게 거는 암시와 똑같은 자기가 스스로에게 걸어 놓은 암시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스스로 조종당하도록 내버려둔 것입니다. 시귀와 인간이 만나는 순간이 암시로 인한 조종 밖에는 안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스스로에게 건 암시로 숙명에게 조종당하는 존재들이 할 수 있는  것 역시 암시로 타인을 자기 뜻대로 종속시키는 것 밖에는  없기 때문이죠. 이것은 거짓의 공존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만 살아남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오노 후유미가 보여주는 진정한 공존의 모습은 바로 대화입니다. 서로 극단적인 입장에 서 있지만 서로의 선택을 존중하는 토시오와 세이신의 대화도 그렇지만 이미 시귀가 되어버린 토오루와 아직은 인간인 나츠노의 대화와 세이신과 스나코의 대화가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다 관심가져야 할 것은 오노 후유미가 그 진정한 대화가 무엇을 가져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대화인지 아닌지는 그것이 야기하는 효과를 통해 알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한데요. 그 효과란 다름아니라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내어줌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나츠노의 경우(여기엔 어쩐지 반론도 충분히 제기가능할 것 같군요.) 그는 토오루에게 자신의 피를 내어줍니다. 세이신 역시도 자신이 맺지 못했던 소설의 이야기를 스나코와의 대화를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허물고 내어줌으로써 차츰 찾아가죠. 그러다 궁극에 가서는 전적으로 아예 내줘 버립니다.다시 말하면 그들은 변화를 받아들입니다. 나츠노든 세이신이든 그럴 때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한결 같습니다. 바로 스스로를 회의하는 것이죠. 나츠노는 자신이 문득 그렇게까지 시귀를 없애려 하는 것에 대해 무의미함을 느낍니다. 세이신은 스나코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생각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 갑니다. 이렇게 둘은 똑같은 반응을 보여주는데 바로 이것이 자신의 목에 걸린 숙명의 쇠사슬이 녹슬었다는 것을 알아보는 일에 다름아님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길고도 지루하게 썼습니다만 즉 돋보기를 자신에게 들이대라는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어떤 타인이 출현하여 우리가 가진 숙명(거창하다면 조건)을 각성시켜 본능적으로 배쳑하려 할 때 먼저 내가 가진 그 숙명이 타인을 배척할 만큼 절대적인 것인지 제대로 한번 객관화시켜 살펴보라는 것이죠. 여기서 객관화란 다른게 아니라 스스로 거기에 대해 대화해보라는 그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오노 후유미가 나츠노와 세이신을 통해 보여준 그대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숙명이라는 것에 대해 이것이 과연 절대적인지 아니면 옿은 것이지 스스로 자문해보고 해답을 구해보라는 것이죠. 바로 그것이 먼저 선행될 수 있을 때 우리는 시귀와 토시오가 걸었던 비극으로 부터 해방될 있다고 오노 후유미는 특히 세이신과 스나코와의 관계를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별 활약은 없었던 나츠노를 기리며... 

(남자입니다. 왜 이렇게 여성스럽게 그려졌는지는 저도 잘 ㅡ ㅡ;)

 

 

 결국 오노 후유미가 '시귀'를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심판의 화살은 타인의 가슴이 아닌 우리 마음에게로 행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귀는 그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을 리츠코에서 보듯이 먼저 극복하도록 노력해야 했었고

 토시오 또한 세이신이 했던 것 처럼 먼저 마음의 문을 열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죠.

 

 

 세이신은 늘 변화에 자신을 맡기는 존재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종교와는 전혀 다른 교회를 자주 산책다녔고 그것은 끊임없이 지금 자기가 존재하고 있는 곳을 벗어나 변화해보려는 마음의 표시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였기에 스나코와 대화할 수 있었고 스나코가 가진 상처를 이해하고 보듬어 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장차 또 반복될 거대한 비극을 미연에 방지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세이신이 글을 쓰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글이란 어떤 것입니까? 끊임없이 자신을 객관화시키는 작업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우리는 글을 쓰면서 쓰는 한편 어딘가에서 또 그것을 읽고 다시금 음미해보는 자신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는 것은 마치 우리 스스로 대화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쓰는 자아와 읽는 자아 사이의 대화 말이죠. 그렇게 나의 나 됨을 허물고 다른 생각으로 새로운 나로 변화해가는 작업이 바로 글을 쓰는 일이 아닐까요. 세이신의 소설이 계속 결말이 열려 있다는 것 역시 그것을 암시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글을 쓰면서 늘 새로운 자신으로 변모하기에 그 결말 또한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이겠죠. 오노 후유미는 그것 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보다 중요한 암시를 또한 해 두었습니다. 실로 아주 집요한 설계자라고 밖에는 할수 없습니다. 그것은 결국 시귀를 그 마을로 불러들인 것이 바로 세이신의 글 때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늘 자신을 새롭게 변모하게 만들었던 그 글이 이제 소토바 마을 전체를 변화게끔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죠. 결국 이 모든 것에 비추어 볼때 정작 오노 후유미가 하고 싶었던 말은 다 세이신에게 깃들어 있다고 암시해 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시귀는 이런 소설이었습니다.

 

 완역본으로 이제 빠진 것 하나 없이 다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시귀의 여정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타인과 함께 공존하려면 어디를 먼저 살펴봐야 하는지 그 가장 중요한 하나를 위해 그려진 세밀화와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세밀화는 왠만한 예술가적 자의식이 없다면 불가능하겠기에 그 하나를 위해 이토록 많은 수고와 견고한 세계를 다듬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오노 후유미에게 감명 받게 됩니다. 사족입니다만, 지금 진행되고 있는 세계 상황을 보면 이제 타인과의 조화로운 공존은 하나의 시대적 요청이기도 합니다. 그 요청에 언젠가는 응답해야 할 자신을 위해서도 한 번쯤 이 '시귀'를 들여다 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진 2012-09-01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보고 한 번 반갑고, <시귀> 보고 엄청나게 두 번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오신 것도 좋은데 무려 저의 여자라고 칭하고 싶은 오노 신의 <시귀>라니!
이 리뷰는 꼭 정독하겠습니다... 지금은 막 학원 갔다와서 피곤해요.
그래요, 저도 이제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영어 학원이요. 흑.
헤르메스님 ㅠㅠㅠㅠㅠㅠ 엉엉

그래도 <시귀>라니 반가워서 피로가 달아나는 거 같네요. 헤헤.

오드득 2012-09-05 01:55   좋아요 0 | URL
후후... 이제 우리는 라이벌이네요.
이번의 시귀로 오노는 이제 저의 여자가 되었으니^ ^
참 이번에 오노의 새로운 소설 한 편이 나올 예정이라더군요.
'흑사의 섬'이라는 책인데 고립된 섬에서 배척받았던 자의 이야기로
역시나 마성의 아이, 시귀와 동일한 문제의식에 있는 작품 같아요.
그건 그렇고 소이진도 이 시귀를 읽었을텐데
어찌 읽었는지 궁금하니 빨리 올려줘요^ ^




이진 2012-09-06 23:53   좋아요 0 | URL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흑사의 섬'이 번역되어 나온단 말입니까?!
... 왜 갑자기 오노 신에 관심이 이리 많아졌답니까.
엉엉 싫어요 안되요 오노 신은 나만 아는 여자란 말이어요 ㅠㅠㅠㅠ
5권짜리는 사놓기만 하고 아직은 못 읽었어요.
너무 바쁘고 힘들어요. 핑계지만요.
3권짜리로도 충분히 저를 사로잡았는데 빠진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 받았어요. 배신감도 느꼈고. 한국 출판사... 네 이놈들! 외쳤죠. 얼른 읽어보고 싶은데. 세상에 흑사의 섬이라... 요즘에 고스트헌트도 번역되어 나오고 있어서 살맛납니다. 행복해요 정말. 고스트 헌트 제가 오노신 좋아하기 시작한 초반에는 일본에서도 30만원에 구입할 수 있다고 악명 높은 소설이었꺼든요.. 헤
십이국기 완결이나 얼른 내 주시지.

재는재로 2012-10-31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사의 섬이라 처음듣는데 간만에 서재에 들어와서 이런정보도 얻게되네요 오노 후유미의 신작 빨리 읽어보고싶네요

오드득 2012-10-31 19:11   좋아요 0 | URL
북홀릭에서 곧 나온다고 하더군요. 저 역시 무척 기대가 되는 작품입니다.^ ^

희선 2013-01-25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흡혈귀가 나온 우리나라 소설을 읽었다는 글을 봤을 때,
이 책 《시귀》가 떠올랐거든요
혹시 읽으셨으려나 했는데, 역시 읽으셨군요
그리고 이 글도 아주 좋네요
빨간 바탕에 그린 그림은 귀엽습니다(실제로는 귀엽지 않을 텐데...)

저는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네요
그렇지 않아도 전에는 그랬을 텐데, 자기와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답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간 생각을 하셨군요
함께 살아갈 방법 찾기...
그런데 그럴 수 있을까요
흡혈귀와 사람은 어려울 것도 같아서...

이런 흡혈귀뿐 아니라 일본에서는 요괴와 사람이 함께 살아가기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군요
요괴 또한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고...

오노 후유미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모르지 않았습니다
<십이국기>는 읽었거든요 열한권이나 읽었는데, 이름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때는 책만 읽고 그것에 대해 거의 쓰지 않았거든요
그러니 잊어버릴 수밖에 없죠
<마성의 아이>는 <십이국기> 안에 있는 것인 듯하네요
아주 똑같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데 이 책 다 끝난 거 맞는지 모르겠네요, 끝난 것 같지 않은 듯한 느낌이었거든요
어쩌면 오노 후유미는 그런 식으로 글을 쓰는 작가인지도 모르겠네요

<십이국기>에서 참 마음에 들었던 인물은 라크슌입니다
커다란 쥐 모습인데, 사람 모습이 될 수도 있는...
내용은 거의 잊어버렸는데 라크슌이 생각하는 방식이 좋았어요
라크슌 때문에 마음을 다시 먹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가장 처음은 요코였군요


희선

오드득 2013-01-26 01:30   좋아요 0 | URL
오! 저도 라크슌 좋아해요^ ^ 저 개인적으로 오노 후유미는 타자와의 공존을 작품 중심에 두고 써 나가는 작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읽어보았던 그녀의 작품들이 다 그렇게 다가왔어요. '시귀'는 그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본 역시도 민족성이 배타적이죠. 그런 일본에게 있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타자와 공존의 가능성을 이다지도 집요하게 살펴보는 작가는 특히나 장르 문학에 있어 오노 후유미 만큼 독보적인 작가는 또 없는 것 같아요. 이러한 오노 후유미의 성향은 그녀의 남편이기도 한 아야츠지 유키토와 비교해보면 더욱 두드러지죠. 저는 아야츠지 유키토의 '어나더'가 '시귀'에 대한 응답이 아닐까도 생각하고 있는데 거기서 타자에 대한 태도가 사실은 부부이지만 그들 사이를 결정적으로 갈라놓고 있는 지점이기도 하죠(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부부로 살고 있는지 또한 저는 궁금하답니다^ ^.) 아무튼 호러물을 싫어하지 않으신다면 시귀는 정말 강력하게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희선 2013-01-30 00:28   좋아요 0 | URL
그것도 벌써 읽은 건 아닐까 했는데 정말 그랬군요
오노 후유미에 대해 쓰여 있는 곳에 아야츠지 유키토 이름이 있는 것까지 봤는데, 두 사람이 부부였군요
얼마전에는 오리하라 이치 부인인 작가에 대해 알았는데, 우리나라에는 책이 나오지 않았더군요 (니이츠 키요미) 올해는 나올까요
나와도 바로 볼 것도 아니면서...

그런데 <어나더>는 읽기만 하고 쓰지는 않았군요 뭐라고 썼을지 알고 싶군요
저는 잠시 <어나더> 볼 때 <시귀>를 떠올렸나 했는데, 그게 아니고 다른 소설이더군요
일본에는 이렇게 한 지역에서만 일어나는 일에 대한 이야기도 많은 듯해요
(우리나라에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만화 <쓰르라미 울 적에>도 한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로 어떻게 하면 비극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를 찾고 있죠
그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는 것은 이제야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이 만화 보고 사람 죽이는 것을 따라한 사람이 있다는 말도 있더군요

지난해 일본에서 9년 만에 오노 후유미 새 소설이 나왔다고 하더군요, 알고 계시겠지만...

글을 쓰는 사람 마음을 글에 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은 길이 있겠지만, 이렇게 하면 재미있지 않을까 할 수도 있잖아요
(<어나더>에 나온 것은 별로였지만, 그리고 그 책 보면서 이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러니 <어나더>가 꼭 아야츠지 유키토가 가진 다른 사람에 대한 태도라고 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글에 나타낸 것이 달라도 마음은 서로 다르지 않을지도 몰라요 아야츠지 유키토 소설 별로 읽지도 않았는데 이런 말을 했군요

이 책(시귀) 언젠가 읽어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때 이 글 한번 더 봐야겠습니다


희선
 
거짓말하는 착한 사람들 - 우리는 왜 부정행위에 끌리는가
댄 애리얼리 지음, 이경식 옮김 / 청림출판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상식 밖의 경제학'의 댄 애리얼리의 또 하나의 카운터 펀치. 그것이 바로 이번에 나온 '거짓말 하는 착한 사람들'이란 책이다. 여전히 그는 우리가 익히 상식으로 알고 있는 것이 다만 편견으로 점철된 고정관념에 지나지 않음을 스스로 고안하고 실시한 풍부한 연구 사례를 통해 다소 충격 속에 보여준다. 저번이 경제학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이라면 이번엔 도덕성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흔든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인들의 도덕성에 대해 회의적이라고 알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 주위의 사람들을 기회만 되면 얼마든지 비도덕적으로 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긴다. 이러한 믿음은 바로 얼마 전에 방영된 드라마 '추적자'에서 여실히 드러난 바 있다. 주인공과 아무리 가까운 친구, 동료라 하더라도 거액의 유혹을 받는 순간 여지없이 배신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그 누구도 설마 어떻게 저럴 수가 하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회의 단면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그려냈다고 여겼다. 거액의 돈에 굴복하여 친구의 우정과 동료의 신뢰를 져버리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말이다. '추적자'는 아예 더 나아가 이 사회 전체가 쉽게 비도덕적이 될 수 있는 곳임을 보여주었다. 돈과 권력 앞에서 검찰이든 언론이든 정부 관료든 무엇보다 도덕적이어야 할 존재들이 꼬리를 살살 흔드는 개로 변해버렸다. 그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라인홀드 니버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에서 사람은 도덕적으로 태어나지만 사회가 비도덕적으로 만든다고 상세하게 밝힌 바 있는데 바로 그대로였다. 이런 사회이기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그리고 남들에게 쉽게 남을 믿지 말라고 되뇌인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우리 곁에 있는 타인들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었다.

 

 

  여기에 바로 댄 애리얼리의 '거짓말 하는 착한 사람들'을 꼭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우리의 시선이 오해에 불과함을 알려주고 결국 그것을 교정시켜 주기 때문이다. 댄 애리얼리가 사람들의 도덕성에 대해 우리의 고정관념을 사정없이 뒤 흔들고 부셔버리는 데도 이것이 아주 설득력 있게 들리는 것은 책 전체에 걸쳐 그가 사람들의 도덕성에 대해 정확하게 알기 위해 고안한 독창적인 실험 결과 때문이다. 그것이 너무도 객관적인 데이터로 실증적으로 우리의 도덕성에 대한 생각들이 오해와 편견에 불과한 것임을 보여주기에 댄 애리얼리의 말에 절로 귀기울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도덕성에 가장 흔한 사람들의 생각을 한 예로 들어보자. 플라톤의 책에 나오는 '기게스의 반지'도 있듯이 우리들은 사람들이 들키지 않는 확신만 있다면 얼마든지 비도덕적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흔히들 투명인간이 되면 무엇을 가장 하고 싶냐 하는 질문에 가장 많이 나오는 대답만 봐도 알 수 있다. '은행에 몰래 들어가서 원 없이 돈을 가져오겠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정말 그들이 투명인간이 된다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우리의 상식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지만 댄 애리얼리의 실험 결과는 다르다. 댄 애리얼리는 실험을 통해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듯이 남의 시선이 아님을 밝혀내었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남의 시선이 아닌 바로 자신의 시선이었다. 놀랍게도 댄 애리얼리의 실험에서 사람들은 아무리 들키지 않는 확신이 있다 하더라도 커다란 부정은 저지르지 않았다. 그것이 아주 고액의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아주 사소한 부정만 저질렀다. 이 놀라운 반전에 댄 애리얼리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리고 또 다른 여러 실험을 통해 이 이유를 알아내었다. 사람들이 아무리 남들이 자신의 부정을 모른다 하더라도 사소한 부정만 저질렀던 이유는 남들은 모르지만 자기는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상 자신이 도덕적 인간이라는 확신에 상처를 주지 않는 선에서만 부정을 용인했던 것이다. 즉 사람들이 보다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은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내가 나를 바라보았을 때 나쁜 놈으로 보이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양심이란 게 실제적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또한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 때 이제껏 우리가 알아왔던 대로 이득을 먼저 고려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은 도덕성인 것이다. 아무리 경제적 선택이라 하더라도 나 자신이 도덕적이라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한에서 우리는 선택하는 것이다. 이는 굉장한 충격이지 않는가? 당신이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상식을 뒤집는 것은 아닌가? 적어도 내겐 그랬다. 그리고 그 결론이 거듭된 실험 결과를 통해 입증된 것이었기에 납득될 수밖에 없어서 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 사회에는 이득 때문에 부정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 사람들은 어째서 그럴 수 있는 것일까? 댄 애리얼리에 따르면 그 사람들은 그냥 요즘 인기 있는 개그 캐릭터 '갸루상'의 말대로 '사람이 아니무니다'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니다. 사람에겐 최소한의 도덕적 자부심이란 마지노선이 본성상 존재한다. 그들은 그러한 마지노선 자체마저도 무너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비인간(非人間)', 즉 괴물이다. 그들은 우리의 도덕적 인간이 되려는 마음에 상처를 주고 그 노력을 포기하게 만든다. 하지만 댄 애리얼리에 따르면 이는 어불성설이다. 그들은 이미 사람이 아니기에 그들에게 사람다움의 기준을 갖다 대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그러한 모습은 괴물을 닮기 위해 사람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시선은 제대로 교정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존재론적인 이유 말고도 여기엔 또 하나의 이유가 더 있다. 그건 이미지다. 댄 애리얼리는 실험을 통하여 실제 물질적인 현금일 때보다도 현금을 나타내는 이미지 상징 같은 것이 될 때 훨씬 더 많이 거대한 부정을 저지른다는 것을 밝혀낸다. 즉 진짜 돈이 오고갈 때는 사람들은 커다란 부정을 저지르지 못하지만 그것이 돈을 나타내는 수치이거나 다른 표식이라면 아무 거리낌 없이 부정을 저질렀던 것이다. 이 실험은 이번 미국의 서브 프라임 경제 위기 때 굴지의 금융 회사들이 보여준 후안무치한 비도덕적 태도가 어떻게 해서 나왔는지 말해준다. 그것이 진짜 돈이 아니라 다만 수치로 표시된 돈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많은 미국의 서민 가정을 파멸로 몰아넣었으면서도 반성은 커녕, 스톡 옵션을 행사하고 성과급을 받는 등 자신들의 이익을 철저히 챙기면서도 아무런 양심상 가책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번에 저축 은행 사건에서 보듯 너무도 자주 금융 사기나 사건들이 일어나는데 아마 그 이유 역시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어떤 면에선 과연 사람들이 이러한 사소한 차이 하나로 쉽게 비도덕적이 될 수 있을까 의심스럽기도 할 것이다. 댄 애리얼리는 거기에 대해 그건 우리 인간들의 마음이 아주 교활한 이야기꾼이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말하자면 현실의 돈이 아니라 수치로 변환된 가상의 돈은 실제 물리적으로 오고가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의 양심을 속이기 위해 좋은 변명거리로 만들기 쉽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한편 도덕적이지만 또 스스로 도덕적 인간이라는 자부심에 상처를 입지 않으면서 비도덕적으로 이득을 챙길 수 있는 우회로를 또한 만들어내는 데도 능수능란하다. 대개 그럴 때 사람들이 내세우는 변명거리는 세 가지다. 하나는 '남들도 다 하는 것이잖아' 또 다른 하나는 '이번 한 번 뿐이야' 마지막은 '나 하나쯤 그런다고 티나 나겠어' 하는 생각이다. 이런 사소한 마음들이 결국엔 커다란 부정을 낳게 되는 그 첫걸음이 됨을 댄 애리얼리는 잘 보여준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타인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겠지만 사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모두가 본성상 아주 능수능란한 교활한 거짓말쟁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아무리 말이 안된다 하더라도 필요하면 거침없이 거짓의 이야기를 꾸미는 존재다.

 

  그러니까 결국 이미지란 시선의 교란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모습을 혼란시키기 위해 마술사가 현란한 손동작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어 자신이 정말 하고 있는 것을 숨기듯이 그렇게 우리의 도덕적 자부심을 상처 입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도덕적이라는 자부심을 계속 가지기 위하여 타인에 대한 시선을 가지고 내 자신의 시선을 교묘하게 뒤트는 것이다. 남들이 저러니까 나도 괜찮아 하는 식으로... 결국 우리들은 스스로 속이기 위해서 남을 이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남이 다 그렇게 때문에 내가 날 비도덕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비도덕적이 되기 위하여 남들을 물귀신 작전처럼 끌어내리는 것이다.

 

 

  댄 애리얼리의 이 책이 정말 중요한 것은 보다 자신에게 정직한 시선을 던지도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편하게 남 핑계를 댄다. 세상이 이렇게 된 것도 결국은 다 남들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일상에서 참 많이도 하고 산다. 하지만 댄 애리얼리는 그 핑계 아래 정말 움트고 있는 우리의 밑바닥을 보게 한다. 사실은 내가 비도덕적 유혹에 쉽게 굴복하기 위하여 괜스레 남들 핑계를 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고 말이다. 왜냐하면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그렇게 우리의 이웃들은 어떤 선택을 할 때 무엇보다 도덕성을 가장 먼저 고려하는 선하디 선한 사람들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 곳에서도 그런 선함을 찾아 볼 수 없다고 아우성을 친다. 그런데 사실 그 아우성은 나의 도덕적인 자부심에 상처를 입지 않고 비도덕적이고 싶다는 아우성에 다름 아니었다. 모든 변화는 자기에게 정직해 질 때이다. 진정한 변화 또한 그렇다. 아무런 기교나 협잡 없이 정직하게 나의 도덕성을 지키려 할 때 타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또한 바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댄 애리얼리는 진정한 변화를 위한 가장 소중한 첫 걸음이 어디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지 이 책을 통하여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별을 스치는 바람]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별을 스치는 바람 1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뿌리깊은 나무'와 '바람의 화원'으로 지금은 한국 팩션계에 있어 최고 자리에 서 있다고 보아도 무방한 작가 이정명의 신작 '별을 스치는 바람'은 다시 한 번 그가 얼마나 글이 가져다 줄 수 있는 힘을 믿는지 또한 그가 작가로서 가지는 신념이 얼마나 강한지 깨닫게 한다. 때문에 개인적으로 그는 '드릴'과 같은 작가라 생각된다. 그렇게 늘 한 곳을 맴돌며 더 깊이 파고 들어가는 드릴처럼 이정명 작가의 작품들 또한 궁극적으로 다루는 세계의 모습과 주제는 늘 유사한 언저리를 맴돌지만 그 깊이는 좀 더 파고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정명 작가가 다루는 세계의 궁극적은 유사성은 무얼까?

 

 우선은 항상 닥쳐올 해방 직전의 어둔 상황을 배경으로 삼는다, 그것이다. 그의 소설이 그려내는 시대는 마치 동 트기 직전의 여명과도 같다. 진정한 변화가 도래하기 전의 과도기. 이정명의 소설은 바로 그 위에서 잉태한다. '뿌리 깊은 나무'는 세종 대왕의 한글 반포가 이루어지기 직전이었고 '바람의 화원'에서는 정조가 정적의 반대를 막고 그의 뜻을 펼치기 직전이었으며 '별을 스치는 바람'에서는 해방 되기 직전을 그린다. 그렇게 그의 소설들이 그려내는 시대는 어둡지만 그것은 곧 몰려나갈 어둠이다. 이는 그가 역사에 대해 낙관적임을 시사한다. '닭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신념이 굳게 배여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시대의 어둠이 아니다.

 그것은 언젠가는 곧 걷혀질 어둠의 장막이기에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장막을 누가 걷는가가 된다. 바로 변화를 만들어내는 주체. 역사를 보다 희망적으로 만들어가는 존재. 그것이 작가가 정말로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 존재들이 하늘에서 저절로 땅으로 뚝 떨어졌을 리는 없다. 무언가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음이 분명하다. 토인비가 '역사의 연구'에서 그랬듯이 존재에 대한 탐구는 저절로 그 존재들을 생성시킨 힘에게로 기울어지기 마련이다. 그의 작품은 바로 그것을 담으려 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신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려는 것이 된다. 말하자면 주제가 되는 것이다. 그 힘을 드러내는 계기가 하나의 살인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여전히 반복되는 유사성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읽으면 자꾸만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연상된다. '별을 스치는 바람'에서는 더욱 그랬다. 철저하게 책과 글이 통제된 후쿠오카 감옥은 그대로 중세의 수도원 같았고 그 같은 압박에 저항하여 비밀리에 도서관으로 통하는 통로를 만든 것이나 교묘하게 이중의 의미를 가미함으로써 검열을 피하는 것 또한 아무리 통제를 해도 변화의 흐름을 막을 수 없었던 '장미의 이름'을 떠올리게 했다. 따지고 보면 이정명은 이 작품에 이르러 가장 어둠 속으로 걸어간 셈이다. 일제 시대 그것도 감옥이라는 철저한 어둠으로 말이다. 그는 왜 하필이면 이 어둠을 가져와야 했던 것일까? 그래서 어쩌면 이 시대적 설정 자체가 거꾸로 그가 이 작품을 통해 가장 보여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로 아무리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라 해도 변화의 싹은 태동하며 바로 그 태동으로 인해 결국은 절망의 어둠마저 끝내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즉 앞서 말한 그 세 꼭지점을 중심으로 이루어져가는 이정명의 소설들 중에서 이 소설은 '그 힘'을 전면에 내세우는 작품이다. 그것이 어디에서 오고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말이다. 그것이 얼마나 잡초처럼 아무리 척박한 땅에서라도 잘 자라나는지 또한 한 번 자라나면 쉬이 제거되지 않고 궁극적인 변화를 일으킬 때까지 얼마나 질기게 견뎌가는지 그것을 확신에 찬 음성으로 들려주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이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소설에서 그 힘은 오로지 그 힘을 만들어내는 주체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 '뿌리 깊은 나무'는 세종과 그의 뜻에 동조하는 학자들로 나름 시대를 이끌어가는 주체였고 '바람의 화원'에서는 예술하는 주체들로 그들 역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자들이었다. 그렇게 전작들은 변화를 만들어내는 힘 자체를 하나의 수레 로 비유한다면, 앞에서 끌고 나가는 자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이 작품, '별을 스치는 바람'이 보다 드러내려 하는 것은 거기가 아니다. 그 보다는 뒤... 그러니까 뒤에서 수레를 미는 기층 민중들에게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시말해 그 힘을 궁극적으로 변화를 가져오는 진정한 동력으로 만드는 민중적 차원으로 시야를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별을 스치는 바람'이 가지는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게 이정명 작가의 드릴은 가장 깊은 곳까지 파내려 간 셈이다. 이를 위해 일제 치하를 시대적 배경으로 가져온 것이 아닌가 싶다. 조선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약자의 자리에 서야 했던 시대를. 그리고 바로 그것은 은유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그가 바깥 사회에서 어떤 일을 했든지간에 '죄수'라는 단일한 신분 밖에 가질 수 없는 형무소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소설은 윤동주나 최치수를 비롯하여 조선 사람들은 바깥에서 그 무슨 일을 했던지 간에 일본인들에게 '악랄하고 교활한 조선인'으로만 불리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일본인들에게 조선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배하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조선인'이라는 단일한 기표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런데 얼른 생각하기엔 이러한 묘사는 우리가 피해자임을 강조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건 아니다. 작가 이정명이 이런 묘사를 통해 강조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다. 그건 바로 우리가 지금 어떠한 모습으로 어떠한 일을 하고 있든 간에, 소설 속 후쿠오카 감옥에서 조선인들이 공산주의자이든 자유주의자이든 민족주의자이든 너 나 할 것 없이 하나였듯이, 지금의 우리들도 가지고 있는 이념이나 타고난 지연에 관계없이 같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공동 운명체'라는 사실이다. 바로 이 하나된 운명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주지시키기 위해 그는 일부러 가장 어두운 시대로 들어가 그것도 가장 깊은 어둠의 장소라 할 수 있는 '형무소'를 가져온 것이다. 그러니까 바로 이러한 선택된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 자체에서 그가 보다 민중적 차원에서 그 힘을 말하려고 한다는 것이 드러나는 셈이다.

 

 이를 강조하기 위하여 그는 두 가지 장치를 아울러 첨가한다. 하나는 조선인들이 부르는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에 나오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어가 철저히 금지되고 그 어떤 조선인 죄수들도 책을 소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조선인들이 휴식시간 내내 책에 대해 얘기할 수 있었나 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소설이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이 둘 모두 보통 사람들의 참여라는 점이다. 합창은 물론 '함께'라는 차원이 강조된 것임은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탐정 역할을 맡고 있으며 결국엔 윤동주를 이해하게 되는 일본인 간수 와타나베 유이치는 윤동주에게서 일본 고관들이 참석한 앞에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부를 것이라는 말을 듣고 조선의 독립을 강하게 연상시키는 노래를 불러서 그것이 장차 일으킬 파장을 도대체 어떻게 책임질 셈이냐고 묻는다. 거기에 윤동주는 이렇게 대답한다.

 

 "난 그런 건 생각하지 않아. 내가 생각한 건 최고의 무대뿐이야." (P. 91)

 "이 노래는 남의 나라 형무소에 갇혀 있는 조선인들의 마음을 가장 절절하게 표현해 줄거야. 조선인이든 유대인이든 일본인이든 이탈리아인이든 노래에 담긴 진심은 듣는 사람에게 분명히 전달될 수 있어" (P. 92)

 

 그에게 최고의 무대는 모두가 다 함께 그들의 진심을 노래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럴 때 그의 시가 조선인과 책에 대해 더없이 악랄했던 스기야마 도잔을 변화시켰듯이 일본의 고관들도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 믿은 것이다. 하나가 아니라 함께가 더 진정한 변화를 가져온다. 민중적 차원으로의 확장은 바로 여기에 드러난다. 이는 다음 책의 보존에 이르면 더욱 적극적인 양상으로 나타난다.

 

 독방행을 자처했던 사람들은 단지 자신들을 위해서 책을 읽은 것은 아니었어. 그들은 일주일 동안 최대한 많은 분량의 책 내용을 외웠어. 독방에서 나간 그들은 감방으로 돌아가 동료들에게 자신이 외운 책의 내용을 전달해 주었지. 책의 내용을 들은 사람들은 그 내용을 기억하고 한 사람이 기억할 수 없을 때에는 두 사람, 세 사람이 나누어 기억했지. 한 사람이 한 파트씩, 아니면 몇 페이지씩 나누어서 기억한거야. 짧은 시를 몇 편씩 외워서 시집 한 권을 완성하기도 했어.(P.173)

 

 이렇게 책을 통해 궁극적으로 초래될 변화의 힘은 보다 많은 사람들의 보다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보존되어 나간다. 이 설정이 보다 정교한 것은 이것이 그대로 윤동주와의 일대일 대면을 통해 변화하게 될 스기야마 도잔과 와타나베 유이치 각자와 일대일 대응관계를 이루며 그것의 보다 확장된 형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합창'은 피아노 조율사였던 스기야마 도잔의 확장된 형태이며 '책의 보존'은 헌책방 일을 하며 책벌레이기도 했던 와타나베 유이치의 확장된 형태라는 것이다. 이 둘이 각각 집단적 형태로 진화한다는 것이 이 소설이 무엇보다 그 변화를 이끌어내고 지속시키는 것이 가능한 것은 바로 그 바탕에 민중적 참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바로 이 측면이 이해되어야지만 왜 하필이면 와타나베 유이치라는 일본 제국주의 시대 가해자였던 일본인을 주인공으로 설정했는지 그 까닭이 제대로 드러난다. 뿐만아니라 일본 제국주의를 배경으로 시를 통한 변화와 민중의 참여를 역설하는 이 작품이 하필이면 지금 우리 앞에 나타났는지 또한 드러난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윤동주가 검열관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이중의 의미를 지닌 교묘한 문장을 썼듯 바로 그러한 이중의 의미를 가진 소설이다. 즉 이 소설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의 윤동주 생애를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지금 이 시대에 대해 말하고 있는 소설이다. 윤동주가 소설에서 시어가 삶의 비유임을 말했듯 이 소설이 그리고 있는 세계 역시도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시대의 비유인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참여가 강조된 것이며 그래서 그 부분은 더욱 적극적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그럼 먼저 와타나베 유이치로 들어가 본다. 그는 일본인이다. 하지만 그는 시를 사랑한다. 그에게 전쟁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인이기 때문에 전쟁에 참여한다. 전쟁이 싫지만 하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다 그러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윤동주를 만나서 그는 변한다. 그리고 결국 이렇게 생각한다.

 

 전쟁을 일으킨 것은 시민들이 아니라 권력을 쥐고 있던 몇몇 미친놈들이었다. 누구도 거리를 활개 치는 그 미친 개들을 잡을 생각을 하지 않고 때려죽이지도 않았다. 결국 그 미친개들이 세상을 이 모양으로 만들고 말았다. 우리는 이 전쟁에 죄가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래 우리는 직접 이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았고 그렇기에 죄가 없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이 전쟁에 대한 책임으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전쟁을 막지 못한 것이 아니라 막지 않았던 것이다. 세계를 전쟁의 불구덩이로 몰아가려는 자들의 음모를 알지도 못했거나 알려고 하지도 않았거나 알고도 모른척 했던 것이다.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P.224)

 

 나는 감히 말하지만 바로 이 말이 이 책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정명 작가가 우리 모두가 공동운명체임을 일깨우는 것도 변화를 가져오는 궁극적 힘이 바로 모두의 적극적 참여에 있음을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와타나베 유이치의 깨달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유이치 그는 고통스럽게 깨닫는다. 역사적 비극에는 단지 방관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 비극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세상을 고통과 지옥으로 만드는 상황에서는 무관심 또한 죄악임을 말이다. 그런데 솔직히 이 글을 쓸 때 이정명 작가가 청자로 염두에 두었던 것은 당연히 오늘의 우리였다고 생각된다. 사실 소설 속 후쿠오카의 세계는 그대로 지금 우리 세계로 옮겨 놓아도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정명 작가는 아마도 그 동일성을 암시하기 위해서인 듯 후쿠오카 감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음모를 첨가한다. 그런데 그 음모가 오늘날의 뭔가를 연상시키게 만든다. 그 음모로 인해 사람들에게 주로 일어나는 현상은 의식을 잃어간다는 것이다. 기억을 잊고 생각을 잊으며 자신이 누구인가를 잊는다. 그런데 이것은 그대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제대로 된 진실을 감춰서 민중들의 적극적인 정치적 참여를 막으려는 미디어 통제 그대로가 아닌가. 그 후쿠오카 형무소가 보다 강한 일본을 만들기 위해서 조선인들의 의식과 생명을 좀먹었듯이 지금의 우리나라 또한 소수의 권력자들이 더 강해지기 위해서 우리의 의식과 생명을 좀먹고 있지 않나...  아니 그대로다. 소설 속 일본의 잔학한 행위들은 그대로 지금 권력자들이 하는 행위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더구나 스포일러가 될까봐 말하지 못한 진짜 스기야마 도잔의 죽음에 대한 비밀마저 그렇다.

 

 이정명은 사실 지금 우리 시대와 그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 말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 검열관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이중의 의미가 간직된 문장을 쓰던 윤동주의 모습은 바로 이 진실에 다다르기 위한 단서였던 셈이다. 그는 앞에서 인용한 와타나베 유이치의 말을 통하여 지금 우리가 처한, 우리가 용납할 수 없는 어둠을 바꾸길 원한다면 무엇을 해야할지 단적으로 말해준다. 아니 작품 전체에 걸쳐 지속적으로 되새겨준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결국 이 소설은 그러한 변화는 참여를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태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 말이다.

 

 한 마디로 당신이 뭔가 바꾸기를 원한다면 적극적으로 참여부터 하라는 것이다.

 어둠에 눈감지 말고 못 본척 말고 뭔가 이대로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면 책의 보존을 위해 조선인 죄수들이 몇 페이지씩 나누어 암기했듯이 그렇게 시대에 대한 책임을 짊어진다는 생각으로 뛰어들라는 것이다. 그 죄수 하나하나가 외운 양은 보잘 것 없었는지 모르지만 결국 모두가 참여하여 그토록 많은 책들을 보존할 수 있었듯이 우리가 바라는 변화 또한 그렇게 찾아올 것이라고 말이다.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시에 대해서, 윤동주에 대해서 알려주기 때문이 아니라

 시대의 어둠이 아로새긴 망막의 아픔을 느끼고 있는 당신이라면

 지금 이 순간 진정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소설이기 때문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N을 위하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N을 위하여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나토 가나에의 'N을 위하여'는 이제야 소개되지만 사실 '야행관람차' 앞에 쓰여진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이 순서를 미리 알려두는 게 좋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이 작품이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 세계 전체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제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전 '왕복서간'에 대해 글을 쓸 때 그녀의 작품이 점차 '고백'과는 정반대로 변화하고 있다고 말했었고 그 과도기에 속하는 작품이 '야행관람차'라고 밝힌 적이 있다. 오로지 타자의 제거에만 하던 주체가 타자가 짊어진 짐을 나누어 받으려고 한다는 게 보인다는 이유로...

 (보다 자세한 것은 여기를 참조 http://blog.aladin.co.kr/748481184/5718450 )

 

 하지만 사실 그 과도기로서의 시작은 '야행관람차'가 아니었다. 그 진정한 시작은 바로 이 소설 'N을 위하여'였다. 단적으로 'N을 위하여'는 '야행관람차'에서 보여주고 '왕복서간'에 이르러 완성되어진 그 변화에 있어 '발아'와도 같은 작품이다.

 

 

 

 책 날개를 보면 미나토 가나에의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지금까지 저의 작품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자기주장이 강하고 그로 인해 사랑스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만, 이번 작품에서는 등장인물들의 자기주장을 다소 억제하기로 했습니다.

 

- 출간에 즈음하여, 미나토 가나에의 말 중에서 -

 

 본편을 읽기전에 이 말 부터 읽었는데 그 때부터 이 소설이 '고백' '속죄' '소녀'로 이어진 흐름과 다르다는 것을 직감했다. 읽어보니 과연 달랐다. 고백과 똑같은 형식이지만 'N을 위하여'의 독백의 주체들은 '고백'의 독백 주체들과 명백하게 반대되는 것을 위해 말하고 있었다. '고백'은 그야말로 타자의 제거를 위한 '독(毒, POISON)백'이었지만 'N을 위하여'에서는 타자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독을 삼키는 독백이었다. 단적으로 이 소설의 여주인공은 아예 사랑에 대해 이런 정의를 내린다.

 

  "그럼, 말이지, 스키시타에게 사랑이란 뭐지? 아니 바꿔 말하지 궁극의 사랑이란?"

  (...)

 "죄의 공유."

 스키시타가 중얼거렸다.

  (...)

 "... 공유란 것은 아무도 모르게 상대의 죄를 절반 짊어지는거야. 아무도. 그러니까 상대도 모르게 죄를 떠안고 아무 말 없이 떠나는 것"                                                                               

(P. 154)

 

 사실 'N을 위하여'는 이것이 핵심이다.

 

 그리고 바로 이 말은 이후에 성취되어지는 가나에의 변화그 자체를 나타내는 정의이기도 하다. 이것은 이후의 작품들 자체가 단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나타났던 '죄의 공유'가 '야행관람차'에서도 '왕복서간'에서도 내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야행관람차'에서는 살인죄를 가족과 이웃들이 나누어 짊어지고 '왕복서간'에서는 친구나 연인들이 짊어진다. 이렇게 내내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보면 가나에가 궁극적 사랑의 모습으로 죄의 공유를 믿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문제는 이 같은 변화가 왜 일어났는가 하는 것이다.

 

 그녀는 어쩌다 '죄'라는 것을 타자의 제거를 위한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그를 궁극적으로 사랑하기 위한 통로로 받아들이게 된 것일까? 이 까닭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럴 때 대부분 살펴보는 것은 작품이 만들어졌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다. 작가도 어차피 시대와 별개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고 독자들의 공감 또한 당시 시대적 상황과 불가분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N을 위하여'는 2010년에 나왔다. 2009년의 일본은 2008년 초래된 위기를 어느 정도 해결해 가는 양상이었으나 여전히 상황은 좋지 않았다. 실업률은 역사 이래로 최고조에 달했고 극빈자들의 수 또한 200만명을 넘게 되었다. 한 마디로 어딜가나 절망과 곤궁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미나토 가나에가 보여준 변화는 어쩌면 거기에 공명한 것은 아니었을까? 점점 늘어나고 있는 이웃들의 비극적인 삶을 마주하면서 자신의 작품으로나마 이들을 대하는 데 있어 배척과 심판 보다는 먼저 이해와 배려가 주어질 수 있도록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전과는 달리 자기 주장을 굽히고 먼저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을 그렸는지도 모른다.

 

 사실 이 'N을 위하여'을 보다 의미심장한 작품으로 만드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소설을 주의깊게 읽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이 소설에 미나코 가나에의 분신이라고 해도 좋을 인물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이 같은 변화를 추구하고 있는 가나에의 내면이 그대로 투영된 존재가 말이다.

 바로 그 존재가 초보 미스터리 작가로 나오는 '니시자키 마사토' 이다.

 

 그는 아직 정식 데뷔도 치르지 못한 무명 작가이지만 수 년간 백수로 지내면서도 작가가 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데 그런 그가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가 있다. 그건 어릴 때 겪었던 학대 때문이었다. 그는 학대로 인한 고통의 이유를 찾으려 했고 바로 그 때문에 결국은 문학을 하게 되었다. 미나토 가나에는 그가 직접 쓴 작품까지 소설에서 보여준다. 그 때문에서 소설의 구성이 다소 산만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 위험을 무릎쓰면서까지 가나에가 마사토의 소설을 그것도 두 편이나 인용해야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 답은,

 흥미롭게도 두 편에 담긴 마사토 소설의 여정이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 여정과 비슷하다는데 있다.

 

  그러니까 '작열하는 새'와 '낙원'에 이르는 여정이 그야말로 '고백'과 'N을 위하여'에 이르는 여정과 닮았다는 이야기이다. '작열하는 새'는 당할 수 밖에 없는 고통을 그린다. 거기엔 아무런 이유도 없기 때문에, 오로지 가해자의 전적인 의사에만 달린 것이기에 더 공포스럽다. 때문에 당하는 이로서는 오로지 순응하는 것 밖에는 생존할 길이 없다. 이건 마사토 뿐만이 아니다. 여주인공 스키시타 역시 이 고통스런 과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때문에 그들은 벗어나는 것으로 앙갚음 하려고 한다. 마사토는 새가 되고 싶어하고 스키시타는 아버지가 지배하고 있는 섬을 벗어나려 한다. 이 벗어남은 바로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존재가 버티고 있는 세계를 버림이니 그 벗어남 자체가 바로 타자의 배제에 다름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열하는 새'는 그대로 가나에의 데뷔작 '고백'과 닮았다. 사실 '고백'의 모든 이들 또한 자신을 얽매고 고통을 주고 있는 것에서 벗어나려 한다. 사실 그들의 '살인'조차 알고보면 그들의 벗어남이 좌절되었을 때 찾아온다. 벗어남을 통한 타자의 제거가 불가능함으로 아예 그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려는 것이다.

 

 이렇게 '작열하는 새'는 '고백'의 미나토 가나에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문제는 이것이 과거의 고통이라는 것이다. 즉 스키타시와 마사토는 트라우마를 간직하고 있다. 마사토는 그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 문학이라는 소재를 택한다. 하지만 '작열하는 새'를 쓸때만 해도 마사토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행위와 이유는 어떤 경우에도 한 쌍인 것일까?

 이미 일어나 버린 일에 대해 뒤늦게 이유를 늘어놓아 봐야 사실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동기다, 경위다, 이유다 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일까. (p.247)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그 무엇을 한다고 해도 과거는 어차피 변하지 않는다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글을 썼던 것은 상상적으로나마 거기에 복수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현실에서 불을 지르면 중대한 범죄가 된다. 설령 사랑을 위해 지른 불이라도. 방화의 이유가 사랑이라도 죄는 죄. 폭력의 이유가 사랑이라도 죄는 죄. 광기의 이유가 사랑이라도 죄는 죄. 어리석은 행위라며 멸시받고, 매도당하고, 존재했던 사랑마저 부정되고 만다. 하지만 문학의 세계에서는 이런 것들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평가된다. 과거의 인생에서 사랑을 찾아내고 싶으면 사실을 문학이라고 승화시키면 된다. 그러려면 각색이 필요하다.(P. 260)

 

 그렇게 애초엔 타자의 제거가 초점이었다. 하지만 '작열하는 새'를 쓰면서 그는 변한다. 글 자체가 자신을 객관화하고 그것을 반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객관적인 자아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글을 통해 자신을 객관화한다는 것은 타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볼 수 있게 됨을 뜻한다. 즉 글을 읽고 쓴다는 것 자체가 타자에게 자신을 여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야기라면 더욱 그렇다. 그 이야기를 쓰면서 작가는 여러 인물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 그와 하나가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 덕분에 그는 자신의 과거를 받아들이게 된다.

 

 마침내 나는 과거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다 쓰고 나서 그런 예감과 보람을 느낀 작품, 그것이 바로 '작열하는 새'였다. (P. 261)

 

 그래서 그에 뒤이은 두 번째의 소설 '낙인'은 완전히 변한다. 그건 치유의 이야기이고 이것은 바로 '작열하는 새'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작열하는 새'와 '낙인'이 보여주는 궤적은 그대로 '고백'과 'N을 위하여'가 이루는 궤적과 같다.  이 말은 마사토에게 일어난 것과 동일한 것이 바로 미나토 가나에 자신에게도 일어났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종합하자면 과거에 있었던 어떤 트라우마 때문에 그녀는 '고백'이란 소설을 쓰게 되었지만 타자의 제거에만 맞추어진 '고백', '속죄', '소녀'를 쓰다가 그 과정을 통해 어느 순간 그녀 역시 시선을 자신만의 고통이 아니라 타자의 고통 또한 아울러 보게 되었고 그것이 2009년 이래로 범람하는 이웃들의 고통들에 눈을 돌리게 하여 결국 이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N을 위하여'를 쓰게 되었다고 말이다.

 

 가나에는 자신의 그러한 변신이 어디로 갈 것인가를 마사토가 글만이 아니라 실제 행위까지 하게 함으로써(스포일러상 구체적인 설명은 생략한다.) 강조한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이러한 가나에의 결심은 '왕복서간'에 이르기까지 내내 지속되고 있다.

 

 지금에서야 만나는 'N을 위하여'는 그런 소설이었다.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지향할 것인가를 아예 자신의 분신까지 만들어 넣어서 친절하게 말해주는 소설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얘기하자면 약점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앞서도 말했지만 변화를 설명해 주려는 것에 대한 과도한 친절 때문에 구성이 다소 산만해진다는 점 뿐만아니라 주인공들이 왜 그리해야 했는지 그 동기도 잘 와닿지 않는다. 다소 무리가 있는 전개란 점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데 개인적으론 오히려 그래서 미나토 가나에의 진심이 더 잘 드러나게 된 것 같다. 무언가 꼭 전할 말이 있으면 사실 그 때문에 무리를 하게 되는 법이 아니던가. 그래서 사실 데뷔작 제목인 '고백'은 바로 이 작품에 쓰여져야 했지 않을까 싶다. 이 작품은 말 그대로 지금 미나토 가나에가 작가로서 어떻게 시작했고 글을 쓰면서 어떻게 변했으며 그래서 이제는 어디로 가고 싶은지 그 내면에 일어났던 풍경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말그대로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과도 같은 작품이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나에 작가 자체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정말 꼭 읽어야 될 작품이 아닐까 생각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