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귀 세트 - 전5권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레밍이라는 동물을 아시나요?

  실물은 이렇게 생겼습니다만...

 

 

 

 노르웨이에 사는 들쥐과에 속하는 동물입니다.

 이 레밍에게는 기이한 습성이 하나있는데요 간혹 떼를 지어 절벽에서 우르르 뛰어내려 자살하는 습성이 있다고 합니다.

 하멜의 피리부는 사나이가 바로 이 레밍을 보고 지어진 얘기가 아니냐하는 설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 동물들이 왜 그렇게 집단 자살을 하는 것인지는 아직도 그 이유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레밍들의 이유를 알 수 없는 집단 자살을 보면서 숙명이 있다면 바로 저런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새삼스레 노르웨이의 조그맣고 앙증맞은 동물 이야기와 아무 관계도 없어 보이는 숙명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번에 새로운 번역으로 완간된(여기다 방점을 꼭 찍어두고 싶습니다. 이전에 판에 생략되었던 내용들이 모조리 복원된 것이 이번 판본의 가장 큰 의의이기 때문이죠.) 오노 후유미의 '시귀'는 바로 이 숙명이 중심 사건을 일으키는 주된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전나무로 빽빽히 둘러싸인 '소토바 마을'.

 그 폐쇄성 만큼이나 오래도록 이 마을은 변함없이 옛 모습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는데요. 어느 날. 기이한 가족 하나가 이사를 오면서 마을은 차츰 변모하기 시작합니다. 시작은 일단 죽은 사람이 유례없이 늘어난 것이었죠. 그것도 비슷한 증세로. 그래서 마을의 유일한 의사. 토시오는 전염병이 아닐까 여겨 소꼽친구 절의 주지 세이신과  조사에 나섭니다만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죽는 자는 나날이 급증. 이윽고 둘은 평범한 병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세이신은 자주 가는 옛 교회의 터에서 스나코라는 정체 불명의 여자 아이와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그러던 중 결국 죽어서 이미 매장된 자들이 다시 돌아와 산자들을 습격한다는 것을 알게되면서 이 급속하게 불어난 죽음의 원인이 바로 그런 자들 때문임을 알게되고 토시오는 그들을 '시귀'라 이름 짓습니다. 시귀들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나면서 이제 이야기의 비중은 시귀에게도 할애되어 본격적으로 시귀대 인간의 구도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시귀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이 인간의 습격 없이 안전하게 거주할 수 있는 장소. 그것을 위해 그들은 소토바 전체를 자기들의 마을로 만들기 위해 은밀하게 움직여왔는데요 그것이 결국은 드러나 토시오를 리더를 하는 인간과 이제는 전면전으로 나아갑니다.

 

  네, 시귀는 흡혈귀 입니다. 오노 후유미는 시귀를 스티븐 킹의 '살렘즈 롯'에 대한 오마쥬라고도 말했는데 이 말대로 시귀는 흡혈귀의 특징을 그대로 가집니다. 사람의 피를 빨아야 생존할 수 있고 햇빛을 받으면 타버리기 때문에 밤에만 활동할 수 있으며 한 번 피를 빨린 인간에게 암시를 걸어 제 마음대로 조종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살렘즈 롯에 나오는 흡혈귀와 같지만 차이가 나는 점이 있다면 일단 그것 말고는 그냥 보통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냥 살아 생전에 할 수 있었던 것 만큼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약합니다. 약해서 두려움도 큽니다. 낮에는 그저 무방비하게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 두려움은 더욱 커집니다. 때문에 그들이 안심하고 있을 수 있는 장소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클지는 이해가 됩니다. 문제는 그들이 공존 가능한 존재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피를 빨고 마셔야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먹지 않으면 그냥 죽습니다. 더구나 시귀에게 굶주림에서 오는 고통은 사람들 보다 훨씬 더 격합니다. 그래서 직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에...

 

 타인의 삶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존재들. 그것이 바로 시귀입니다.  여기엔 아무런 중간 지점이 없습니다. 타협의 여지도 없습니다. 그냥 남의 피를 빨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 뿐입니다.  레밍 처럼 이유 없이 따를 수 밖에 절대적 명령. 일종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죠. 바로 여기에 시귀의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무서운 건 잘 못 그려서^ ^; 한 번 이렇게 간략하게 표현해보았습니다만... 

 

 

 보다 본질적으로 그들의 비극은 그들 스스로 생명을 이어나갈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타인의 피에 기생해야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죽은 자들을 만들어낼 뿐입니다. 더구나 그 수단 역시 하나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더욱 생존이 절박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스스로의 노동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는 자들이기에 오로지 남의 생명에 빌붙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그들이기에 그렇습니다. 동물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오로지 생존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군집을 이루고 사는 생물들은 대단히 사회 공학적입니다. 이는 개미를 보면 확실해지지요. 생존을 위해서는 뭉쳐야 하기  때문에 동료애가 강하고 또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뚜렷한 위계질서가 존재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저항은 허용되지 않으므로 거의 전체주의와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 말이죠. 시귀들의 사회 역시 그렇습니다. 나츠오는 자신을 물라는 명령에 따라 시귀가 되어 돌아온 토오루에게 죽어서까지 그런 녀석들의 명령이나 받고 다니나며 비난하지요. 오노 후유미가 3권 후반부에서 보여주는 시귀 사회의 모습은 정말로 실망스럽습니다. 먹고 자는 것 밖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삶. 더구나 어떤 명령이든 따라야 하고 따르지 않으면 이유를 막론하고 벌을 받는 삶. 거기다 살아 생전 친했던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다는 죄책감까지. 나초노 처럼 이렇게 살려고 다시 살아났냐고 묻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시귀가 된 자들은 저항하지 않습니다. 빨지 않으면 죽으니까 이 절대적 숙명 앞에서 모든 걸 묵인하고 살아갑니다. 토오루에서 보듯 아무리 커다란 죄책감을 느꼈다 해도 그저 울부짖고 말 뿐입니다.

 

 이 거대한 숙명 앞에서 죽음은 영원한 끝이라는 세상의 근본 섭리를 뛰어넘은 자들 조차 무기력할 뿐입니다.

 

 문제는 이들이 오래도록 변함없이 그 모습 그대로를 유지해 온 소토바에게 변화를 가져오는 존재라는 것이죠. 물론 그 채색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어두운 색깔일테지만 말이죠. 토시오느 시귀들이 번창하는 것을 보며 마을이 내년 봄까지 과연 남아있을 수 있을지 걱정합니다. 정확히 그가 생각했던 마을은 지금까지 그 모습 그대로 이어져 온 소토바 이겠죠. 그렇게 토시오도 변화를 거부하는 존재입니다. 시귀들이 시귀의 숙명에 순응하듯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인간의 숙명에 순응하는 자입니다. 시귀가 인간을 먹이 이상의 존재로 취급하지 않듯이 그 역시 시귀를 인간을 위협하는 적 이상의 존재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아내라고 해도 시귀가 되어버리면 승리를 위한 정보를 얻는 동정의 여지가 전혀 없는 포로에 불과합니다. 사실 토시오의 교코 연구 장면은 그대로 포로 심문 과정이라고 보아도 상관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 둘 사이엔 전면전 밖에는 남아있지 않는 것입니다. 변화를 가져오는 존재도 원래 있던 존재도 사실은 다들 변화를 거부하는 존재들이니까요. 변화란 서로 공존한다는 것과 같은 말인데 둘 다 변화를 거부하니 남은 건 모조리 절멸될 때까지 배척하는 것 밖에는 없는 셈이죠. 그리고 결국 그렇게 된 것은 그들이 숙명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들 스스로 숙명을 벗어나려는 노력을 전혀 해보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 모두가 그에 맞는 형벌을 결국 받은 셈입니다.

 

 타인의 삶을 짓밟음으로써 자신의 삶을 연명했던 시귀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내어 줌으로써

 소토바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모습을 항구적으로 지키고자 했던 토시오는 결국 소토바가 불에 타 없어짐으로써...

 

 벌을 받은 셈입니다.

 이는 곧 후유미의 대안이 여기에 있지 않다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흔히 서로 이질적인 두 사회가 서로 섞이게 될 때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받아들임과 받아들여짐'의 문제를 그저 변화의 수용과 거부의 관점으로만 해석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오노 후유미는 더 깊이 내려가 그 근본에 무엇이 있는지 직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이 '시귀'에서 오노 후유미가 보여주는 가장 놀라운 점입니다. 자아, 당신의 확대경이 정말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건 당신 자신입니다.

 

 왜냐구요? 그건 변화를 수용하거나 하지 않거나의 여부가 바로 자신의 숙명을 어느정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고 또한 그 객관화를 통해 어느정도 자유로워질 수 있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결정된 상태로 태어납니다. 인종적으로, 국적으로, 게층적으로 그리고 신체적으로. 한 번 그렇게 결정되면 우리는 왠만해서는  거기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아무리 무국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외국에 나가면 태극기만 봐도 뭉클해지고 아무리 인종 차별을 하지 않으려 해도 인종 따라 달리 감정을 가지게 되는 스스로를 인식하게 됩니다. 거창하게 숙명이라고 이름 붙이는 바람에 위화감이 들 수 있지만 그런 식으로 결정되어진 조건들은 우리들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판단하고 행위하게 만듭니다. 시귀나 토시오나 다를 바 없죠. 덜 극한적이라는 차이 밖에는 없습니다. 웃기는 것은 이렇게 영향을 미치는 조건(숙명이 너무 거창한 것 같아서 조건으로 달리 부르겠습니다.)들이 우연적으로 결정되었다는 겁니다. 지금 나를 형성하고 있는 모든 조건들은 확률의 결과일 뿐입니다. 주사위를 던져서 나온 수와 같은 것이죠. 주사위가 이유를 따져서 스스로 눈을 나타내지 않듯이 우리를 이루는 조건들 역시 마찬가지죠. 그런데도 이 조건들이 한 번 결정되어 버리자 마치 진짜 이유가 있는 양, 거기엔 그 누구도 반대하지 못할 절대적 진리가 있는 양 존재하게 됩니다. 모래 위에 세워진 탑일 뿐인데 스스로 단단한 반석 위에 있다고 여기고 있는 꼴입니다. 오노 후유미는 시귀에게 내려진 숙명 역시 우연의 산물임을 강조합니다. 시귀들에게 같이 피를 빨려 죽더라도 다시 깨어나는 자와 그러지 못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통해서 말이죠. 그런데 누가 다시 살아나고 영영 죽을지는 시귀들 조차도 알 수 없습니다. 그것 역시 확률의 결과입니다. 인간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한 번 시귀가 되면 숙명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오노 후유미가 이렇게 숙명이 우연의 소산임을 밝혀서 드러내고 싶은 것은  이러한 어이없는 모순입니다.

 

 알고보니 우리의 목을 옥죄고 있었던 숙명이라는 쇠사슬이 아주 형편없이 녹슬어 있었다는 그것입니다. 어차피 우연으로 결정된 것일 뿐이어서 달리 마음 한 번 먹는 것 만으로도 그냥 똑 하고 부서질 만큼 연약한 것임을 깨달아라는 것입니다. 결국 나의 조건을 찬찬히 살피면 드러나는 것은 그런 모순이요 조건들의 허약함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숙명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가 숙명의 힘을 그토록 강하게 생각했던 건 시귀가 피를 빨린 인간에게 거는 암시와 똑같은 자기가 스스로에게 걸어 놓은 암시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스스로 조종당하도록 내버려둔 것입니다. 시귀와 인간이 만나는 순간이 암시로 인한 조종 밖에는 안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스스로에게 건 암시로 숙명에게 조종당하는 존재들이 할 수 있는  것 역시 암시로 타인을 자기 뜻대로 종속시키는 것 밖에는  없기 때문이죠. 이것은 거짓의 공존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만 살아남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오노 후유미가 보여주는 진정한 공존의 모습은 바로 대화입니다. 서로 극단적인 입장에 서 있지만 서로의 선택을 존중하는 토시오와 세이신의 대화도 그렇지만 이미 시귀가 되어버린 토오루와 아직은 인간인 나츠노의 대화와 세이신과 스나코의 대화가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다 관심가져야 할 것은 오노 후유미가 그 진정한 대화가 무엇을 가져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대화인지 아닌지는 그것이 야기하는 효과를 통해 알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한데요. 그 효과란 다름아니라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내어줌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나츠노의 경우(여기엔 어쩐지 반론도 충분히 제기가능할 것 같군요.) 그는 토오루에게 자신의 피를 내어줍니다. 세이신 역시도 자신이 맺지 못했던 소설의 이야기를 스나코와의 대화를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허물고 내어줌으로써 차츰 찾아가죠. 그러다 궁극에 가서는 전적으로 아예 내줘 버립니다.다시 말하면 그들은 변화를 받아들입니다. 나츠노든 세이신이든 그럴 때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한결 같습니다. 바로 스스로를 회의하는 것이죠. 나츠노는 자신이 문득 그렇게까지 시귀를 없애려 하는 것에 대해 무의미함을 느낍니다. 세이신은 스나코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생각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 갑니다. 이렇게 둘은 똑같은 반응을 보여주는데 바로 이것이 자신의 목에 걸린 숙명의 쇠사슬이 녹슬었다는 것을 알아보는 일에 다름아님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길고도 지루하게 썼습니다만 즉 돋보기를 자신에게 들이대라는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어떤 타인이 출현하여 우리가 가진 숙명(거창하다면 조건)을 각성시켜 본능적으로 배쳑하려 할 때 먼저 내가 가진 그 숙명이 타인을 배척할 만큼 절대적인 것인지 제대로 한번 객관화시켜 살펴보라는 것이죠. 여기서 객관화란 다른게 아니라 스스로 거기에 대해 대화해보라는 그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오노 후유미가 나츠노와 세이신을 통해 보여준 그대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숙명이라는 것에 대해 이것이 과연 절대적인지 아니면 옿은 것이지 스스로 자문해보고 해답을 구해보라는 것이죠. 바로 그것이 먼저 선행될 수 있을 때 우리는 시귀와 토시오가 걸었던 비극으로 부터 해방될 있다고 오노 후유미는 특히 세이신과 스나코와의 관계를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별 활약은 없었던 나츠노를 기리며... 

(남자입니다. 왜 이렇게 여성스럽게 그려졌는지는 저도 잘 ㅡ ㅡ;)

 

 

 결국 오노 후유미가 '시귀'를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심판의 화살은 타인의 가슴이 아닌 우리 마음에게로 행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귀는 그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을 리츠코에서 보듯이 먼저 극복하도록 노력해야 했었고

 토시오 또한 세이신이 했던 것 처럼 먼저 마음의 문을 열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죠.

 

 

 세이신은 늘 변화에 자신을 맡기는 존재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종교와는 전혀 다른 교회를 자주 산책다녔고 그것은 끊임없이 지금 자기가 존재하고 있는 곳을 벗어나 변화해보려는 마음의 표시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였기에 스나코와 대화할 수 있었고 스나코가 가진 상처를 이해하고 보듬어 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장차 또 반복될 거대한 비극을 미연에 방지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세이신이 글을 쓰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글이란 어떤 것입니까? 끊임없이 자신을 객관화시키는 작업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우리는 글을 쓰면서 쓰는 한편 어딘가에서 또 그것을 읽고 다시금 음미해보는 자신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는 것은 마치 우리 스스로 대화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쓰는 자아와 읽는 자아 사이의 대화 말이죠. 그렇게 나의 나 됨을 허물고 다른 생각으로 새로운 나로 변화해가는 작업이 바로 글을 쓰는 일이 아닐까요. 세이신의 소설이 계속 결말이 열려 있다는 것 역시 그것을 암시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글을 쓰면서 늘 새로운 자신으로 변모하기에 그 결말 또한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이겠죠. 오노 후유미는 그것 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보다 중요한 암시를 또한 해 두었습니다. 실로 아주 집요한 설계자라고 밖에는 할수 없습니다. 그것은 결국 시귀를 그 마을로 불러들인 것이 바로 세이신의 글 때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늘 자신을 새롭게 변모하게 만들었던 그 글이 이제 소토바 마을 전체를 변화게끔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죠. 결국 이 모든 것에 비추어 볼때 정작 오노 후유미가 하고 싶었던 말은 다 세이신에게 깃들어 있다고 암시해 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시귀는 이런 소설이었습니다.

 

 완역본으로 이제 빠진 것 하나 없이 다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시귀의 여정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타인과 함께 공존하려면 어디를 먼저 살펴봐야 하는지 그 가장 중요한 하나를 위해 그려진 세밀화와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세밀화는 왠만한 예술가적 자의식이 없다면 불가능하겠기에 그 하나를 위해 이토록 많은 수고와 견고한 세계를 다듬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오노 후유미에게 감명 받게 됩니다. 사족입니다만, 지금 진행되고 있는 세계 상황을 보면 이제 타인과의 조화로운 공존은 하나의 시대적 요청이기도 합니다. 그 요청에 언젠가는 응답해야 할 자신을 위해서도 한 번쯤 이 '시귀'를 들여다 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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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9-01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보고 한 번 반갑고, <시귀> 보고 엄청나게 두 번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오신 것도 좋은데 무려 저의 여자라고 칭하고 싶은 오노 신의 <시귀>라니!
이 리뷰는 꼭 정독하겠습니다... 지금은 막 학원 갔다와서 피곤해요.
그래요, 저도 이제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영어 학원이요. 흑.
헤르메스님 ㅠㅠㅠㅠㅠㅠ 엉엉

그래도 <시귀>라니 반가워서 피로가 달아나는 거 같네요. 헤헤.

ICE-9 2012-09-05 01:55   좋아요 0 | URL
후후... 이제 우리는 라이벌이네요.
이번의 시귀로 오노는 이제 저의 여자가 되었으니^ ^
참 이번에 오노의 새로운 소설 한 편이 나올 예정이라더군요.
'흑사의 섬'이라는 책인데 고립된 섬에서 배척받았던 자의 이야기로
역시나 마성의 아이, 시귀와 동일한 문제의식에 있는 작품 같아요.
그건 그렇고 소이진도 이 시귀를 읽었을텐데
어찌 읽었는지 궁금하니 빨리 올려줘요^ ^




이진 2012-09-06 23:53   좋아요 0 | URL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흑사의 섬'이 번역되어 나온단 말입니까?!
... 왜 갑자기 오노 신에 관심이 이리 많아졌답니까.
엉엉 싫어요 안되요 오노 신은 나만 아는 여자란 말이어요 ㅠㅠㅠㅠ
5권짜리는 사놓기만 하고 아직은 못 읽었어요.
너무 바쁘고 힘들어요. 핑계지만요.
3권짜리로도 충분히 저를 사로잡았는데 빠진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 받았어요. 배신감도 느꼈고. 한국 출판사... 네 이놈들! 외쳤죠. 얼른 읽어보고 싶은데. 세상에 흑사의 섬이라... 요즘에 고스트헌트도 번역되어 나오고 있어서 살맛납니다. 행복해요 정말. 고스트 헌트 제가 오노신 좋아하기 시작한 초반에는 일본에서도 30만원에 구입할 수 있다고 악명 높은 소설이었꺼든요.. 헤
십이국기 완결이나 얼른 내 주시지.

재는재로 2012-10-31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사의 섬이라 처음듣는데 간만에 서재에 들어와서 이런정보도 얻게되네요 오노 후유미의 신작 빨리 읽어보고싶네요

ICE-9 2012-10-31 19:11   좋아요 0 | URL
북홀릭에서 곧 나온다고 하더군요. 저 역시 무척 기대가 되는 작품입니다.^ ^

희선 2013-01-25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흡혈귀가 나온 우리나라 소설을 읽었다는 글을 봤을 때,
이 책 《시귀》가 떠올랐거든요
혹시 읽으셨으려나 했는데, 역시 읽으셨군요
그리고 이 글도 아주 좋네요
빨간 바탕에 그린 그림은 귀엽습니다(실제로는 귀엽지 않을 텐데...)

저는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네요
그렇지 않아도 전에는 그랬을 텐데, 자기와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답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간 생각을 하셨군요
함께 살아갈 방법 찾기...
그런데 그럴 수 있을까요
흡혈귀와 사람은 어려울 것도 같아서...

이런 흡혈귀뿐 아니라 일본에서는 요괴와 사람이 함께 살아가기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군요
요괴 또한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고...

오노 후유미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모르지 않았습니다
<십이국기>는 읽었거든요 열한권이나 읽었는데, 이름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때는 책만 읽고 그것에 대해 거의 쓰지 않았거든요
그러니 잊어버릴 수밖에 없죠
<마성의 아이>는 <십이국기> 안에 있는 것인 듯하네요
아주 똑같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데 이 책 다 끝난 거 맞는지 모르겠네요, 끝난 것 같지 않은 듯한 느낌이었거든요
어쩌면 오노 후유미는 그런 식으로 글을 쓰는 작가인지도 모르겠네요

<십이국기>에서 참 마음에 들었던 인물은 라크슌입니다
커다란 쥐 모습인데, 사람 모습이 될 수도 있는...
내용은 거의 잊어버렸는데 라크슌이 생각하는 방식이 좋았어요
라크슌 때문에 마음을 다시 먹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가장 처음은 요코였군요


희선

ICE-9 2013-01-26 01:30   좋아요 0 | URL
오! 저도 라크슌 좋아해요^ ^ 저 개인적으로 오노 후유미는 타자와의 공존을 작품 중심에 두고 써 나가는 작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읽어보았던 그녀의 작품들이 다 그렇게 다가왔어요. '시귀'는 그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본 역시도 민족성이 배타적이죠. 그런 일본에게 있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타자와 공존의 가능성을 이다지도 집요하게 살펴보는 작가는 특히나 장르 문학에 있어 오노 후유미 만큼 독보적인 작가는 또 없는 것 같아요. 이러한 오노 후유미의 성향은 그녀의 남편이기도 한 아야츠지 유키토와 비교해보면 더욱 두드러지죠. 저는 아야츠지 유키토의 '어나더'가 '시귀'에 대한 응답이 아닐까도 생각하고 있는데 거기서 타자에 대한 태도가 사실은 부부이지만 그들 사이를 결정적으로 갈라놓고 있는 지점이기도 하죠(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부부로 살고 있는지 또한 저는 궁금하답니다^ ^.) 아무튼 호러물을 싫어하지 않으신다면 시귀는 정말 강력하게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희선 2013-01-30 00:28   좋아요 0 | URL
그것도 벌써 읽은 건 아닐까 했는데 정말 그랬군요
오노 후유미에 대해 쓰여 있는 곳에 아야츠지 유키토 이름이 있는 것까지 봤는데, 두 사람이 부부였군요
얼마전에는 오리하라 이치 부인인 작가에 대해 알았는데, 우리나라에는 책이 나오지 않았더군요 (니이츠 키요미) 올해는 나올까요
나와도 바로 볼 것도 아니면서...

그런데 <어나더>는 읽기만 하고 쓰지는 않았군요 뭐라고 썼을지 알고 싶군요
저는 잠시 <어나더> 볼 때 <시귀>를 떠올렸나 했는데, 그게 아니고 다른 소설이더군요
일본에는 이렇게 한 지역에서만 일어나는 일에 대한 이야기도 많은 듯해요
(우리나라에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만화 <쓰르라미 울 적에>도 한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로 어떻게 하면 비극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를 찾고 있죠
그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는 것은 이제야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이 만화 보고 사람 죽이는 것을 따라한 사람이 있다는 말도 있더군요

지난해 일본에서 9년 만에 오노 후유미 새 소설이 나왔다고 하더군요, 알고 계시겠지만...

글을 쓰는 사람 마음을 글에 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은 길이 있겠지만, 이렇게 하면 재미있지 않을까 할 수도 있잖아요
(<어나더>에 나온 것은 별로였지만, 그리고 그 책 보면서 이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러니 <어나더>가 꼭 아야츠지 유키토가 가진 다른 사람에 대한 태도라고 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글에 나타낸 것이 달라도 마음은 서로 다르지 않을지도 몰라요 아야츠지 유키토 소설 별로 읽지도 않았는데 이런 말을 했군요

이 책(시귀) 언젠가 읽어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때 이 글 한번 더 봐야겠습니다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