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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귀 세트 - 전5권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레밍이라는 동물을 아시나요?
실물은 이렇게 생겼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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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에 사는 들쥐과에 속하는 동물입니다.
이 레밍에게는 기이한 습성이 하나있는데요 간혹 떼를 지어 절벽에서 우르르 뛰어내려 자살하는 습성이 있다고 합니다.
하멜의 피리부는 사나이가 바로 이 레밍을 보고 지어진 얘기가 아니냐하는 설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 동물들이 왜 그렇게 집단 자살을 하는 것인지는 아직도 그 이유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레밍들의 이유를 알 수 없는 집단 자살을 보면서 숙명이 있다면 바로 저런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새삼스레 노르웨이의 조그맣고 앙증맞은 동물 이야기와 아무 관계도 없어 보이는 숙명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번에 새로운 번역으로 완간된(여기다 방점을 꼭 찍어두고 싶습니다. 이전에 판에 생략되었던 내용들이 모조리 복원된 것이 이번 판본의 가장 큰 의의이기 때문이죠.) 오노 후유미의 '시귀'는 바로 이 숙명이 중심 사건을 일으키는 주된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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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나무로 빽빽히 둘러싸인 '소토바 마을'.
그 폐쇄성 만큼이나 오래도록 이 마을은 변함없이 옛 모습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는데요. 어느 날. 기이한 가족 하나가 이사를 오면서 마을은 차츰 변모하기 시작합니다. 시작은 일단 죽은 사람이 유례없이 늘어난 것이었죠. 그것도 비슷한 증세로. 그래서 마을의 유일한 의사. 토시오는 전염병이 아닐까 여겨 소꼽친구 절의 주지 세이신과 조사에 나섭니다만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죽는 자는 나날이 급증. 이윽고 둘은 평범한 병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세이신은 자주 가는 옛 교회의 터에서 스나코라는 정체 불명의 여자 아이와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그러던 중 결국 죽어서 이미 매장된 자들이 다시 돌아와 산자들을 습격한다는 것을 알게되면서 이 급속하게 불어난 죽음의 원인이 바로 그런 자들 때문임을 알게되고 토시오는 그들을 '시귀'라 이름 짓습니다. 시귀들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나면서 이제 이야기의 비중은 시귀에게도 할애되어 본격적으로 시귀대 인간의 구도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시귀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이 인간의 습격 없이 안전하게 거주할 수 있는 장소. 그것을 위해 그들은 소토바 전체를 자기들의 마을로 만들기 위해 은밀하게 움직여왔는데요 그것이 결국은 드러나 토시오를 리더를 하는 인간과 이제는 전면전으로 나아갑니다.
네, 시귀는 흡혈귀 입니다. 오노 후유미는 시귀를 스티븐 킹의 '살렘즈 롯'에 대한 오마쥬라고도 말했는데 이 말대로 시귀는 흡혈귀의 특징을 그대로 가집니다. 사람의 피를 빨아야 생존할 수 있고 햇빛을 받으면 타버리기 때문에 밤에만 활동할 수 있으며 한 번 피를 빨린 인간에게 암시를 걸어 제 마음대로 조종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살렘즈 롯에 나오는 흡혈귀와 같지만 차이가 나는 점이 있다면 일단 그것 말고는 그냥 보통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냥 살아 생전에 할 수 있었던 것 만큼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약합니다. 약해서 두려움도 큽니다. 낮에는 그저 무방비하게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 두려움은 더욱 커집니다. 때문에 그들이 안심하고 있을 수 있는 장소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클지는 이해가 됩니다. 문제는 그들이 공존 가능한 존재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피를 빨고 마셔야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먹지 않으면 그냥 죽습니다. 더구나 시귀에게 굶주림에서 오는 고통은 사람들 보다 훨씬 더 격합니다. 그래서 직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에...
타인의 삶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존재들. 그것이 바로 시귀입니다. 여기엔 아무런 중간 지점이 없습니다. 타협의 여지도 없습니다. 그냥 남의 피를 빨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 뿐입니다. 레밍 처럼 이유 없이 따를 수 밖에 절대적 명령. 일종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죠. 바로 여기에 시귀의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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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무서운 건 잘 못 그려서^ ^; 한 번 이렇게 간략하게 표현해보았습니다만...
보다 본질적으로 그들의 비극은 그들 스스로 생명을 이어나갈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타인의 피에 기생해야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죽은 자들을 만들어낼 뿐입니다. 더구나 그 수단 역시 하나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더욱 생존이 절박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스스로의 노동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는 자들이기에 오로지 남의 생명에 빌붙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그들이기에 그렇습니다. 동물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오로지 생존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군집을 이루고 사는 생물들은 대단히 사회 공학적입니다. 이는 개미를 보면 확실해지지요. 생존을 위해서는 뭉쳐야 하기 때문에 동료애가 강하고 또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뚜렷한 위계질서가 존재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저항은 허용되지 않으므로 거의 전체주의와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 말이죠. 시귀들의 사회 역시 그렇습니다. 나츠오는 자신을 물라는 명령에 따라 시귀가 되어 돌아온 토오루에게 죽어서까지 그런 녀석들의 명령이나 받고 다니나며 비난하지요. 오노 후유미가 3권 후반부에서 보여주는 시귀 사회의 모습은 정말로 실망스럽습니다. 먹고 자는 것 밖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삶. 더구나 어떤 명령이든 따라야 하고 따르지 않으면 이유를 막론하고 벌을 받는 삶. 거기다 살아 생전 친했던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다는 죄책감까지. 나초노 처럼 이렇게 살려고 다시 살아났냐고 묻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시귀가 된 자들은 저항하지 않습니다. 빨지 않으면 죽으니까 이 절대적 숙명 앞에서 모든 걸 묵인하고 살아갑니다. 토오루에서 보듯 아무리 커다란 죄책감을 느꼈다 해도 그저 울부짖고 말 뿐입니다.
이 거대한 숙명 앞에서 죽음은 영원한 끝이라는 세상의 근본 섭리를 뛰어넘은 자들 조차 무기력할 뿐입니다.
문제는 이들이 오래도록 변함없이 그 모습 그대로를 유지해 온 소토바에게 변화를 가져오는 존재라는 것이죠. 물론 그 채색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어두운 색깔일테지만 말이죠. 토시오느 시귀들이 번창하는 것을 보며 마을이 내년 봄까지 과연 남아있을 수 있을지 걱정합니다. 정확히 그가 생각했던 마을은 지금까지 그 모습 그대로 이어져 온 소토바 이겠죠. 그렇게 토시오도 변화를 거부하는 존재입니다. 시귀들이 시귀의 숙명에 순응하듯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인간의 숙명에 순응하는 자입니다. 시귀가 인간을 먹이 이상의 존재로 취급하지 않듯이 그 역시 시귀를 인간을 위협하는 적 이상의 존재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아내라고 해도 시귀가 되어버리면 승리를 위한 정보를 얻는 동정의 여지가 전혀 없는 포로에 불과합니다. 사실 토시오의 교코 연구 장면은 그대로 포로 심문 과정이라고 보아도 상관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 둘 사이엔 전면전 밖에는 남아있지 않는 것입니다. 변화를 가져오는 존재도 원래 있던 존재도 사실은 다들 변화를 거부하는 존재들이니까요. 변화란 서로 공존한다는 것과 같은 말인데 둘 다 변화를 거부하니 남은 건 모조리 절멸될 때까지 배척하는 것 밖에는 없는 셈이죠. 그리고 결국 그렇게 된 것은 그들이 숙명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들 스스로 숙명을 벗어나려는 노력을 전혀 해보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 모두가 그에 맞는 형벌을 결국 받은 셈입니다.
타인의 삶을 짓밟음으로써 자신의 삶을 연명했던 시귀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내어 줌으로써
소토바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모습을 항구적으로 지키고자 했던 토시오는 결국 소토바가 불에 타 없어짐으로써...
벌을 받은 셈입니다.
이는 곧 후유미의 대안이 여기에 있지 않다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흔히 서로 이질적인 두 사회가 서로 섞이게 될 때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받아들임과 받아들여짐'의 문제를 그저 변화의 수용과 거부의 관점으로만 해석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오노 후유미는 더 깊이 내려가 그 근본에 무엇이 있는지 직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이 '시귀'에서 오노 후유미가 보여주는 가장 놀라운 점입니다. 자아, 당신의 확대경이 정말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건 당신 자신입니다.
왜냐구요? 그건 변화를 수용하거나 하지 않거나의 여부가 바로 자신의 숙명을 어느정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고 또한 그 객관화를 통해 어느정도 자유로워질 수 있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결정된 상태로 태어납니다. 인종적으로, 국적으로, 게층적으로 그리고 신체적으로. 한 번 그렇게 결정되면 우리는 왠만해서는 거기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아무리 무국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외국에 나가면 태극기만 봐도 뭉클해지고 아무리 인종 차별을 하지 않으려 해도 인종 따라 달리 감정을 가지게 되는 스스로를 인식하게 됩니다. 거창하게 숙명이라고 이름 붙이는 바람에 위화감이 들 수 있지만 그런 식으로 결정되어진 조건들은 우리들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판단하고 행위하게 만듭니다. 시귀나 토시오나 다를 바 없죠. 덜 극한적이라는 차이 밖에는 없습니다. 웃기는 것은 이렇게 영향을 미치는 조건(숙명이 너무 거창한 것 같아서 조건으로 달리 부르겠습니다.)들이 우연적으로 결정되었다는 겁니다. 지금 나를 형성하고 있는 모든 조건들은 확률의 결과일 뿐입니다. 주사위를 던져서 나온 수와 같은 것이죠. 주사위가 이유를 따져서 스스로 눈을 나타내지 않듯이 우리를 이루는 조건들 역시 마찬가지죠. 그런데도 이 조건들이 한 번 결정되어 버리자 마치 진짜 이유가 있는 양, 거기엔 그 누구도 반대하지 못할 절대적 진리가 있는 양 존재하게 됩니다. 모래 위에 세워진 탑일 뿐인데 스스로 단단한 반석 위에 있다고 여기고 있는 꼴입니다. 오노 후유미는 시귀에게 내려진 숙명 역시 우연의 산물임을 강조합니다. 시귀들에게 같이 피를 빨려 죽더라도 다시 깨어나는 자와 그러지 못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통해서 말이죠. 그런데 누가 다시 살아나고 영영 죽을지는 시귀들 조차도 알 수 없습니다. 그것 역시 확률의 결과입니다. 인간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한 번 시귀가 되면 숙명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오노 후유미가 이렇게 숙명이 우연의 소산임을 밝혀서 드러내고 싶은 것은 이러한 어이없는 모순입니다.
알고보니 우리의 목을 옥죄고 있었던 숙명이라는 쇠사슬이 아주 형편없이 녹슬어 있었다는 그것입니다. 어차피 우연으로 결정된 것일 뿐이어서 달리 마음 한 번 먹는 것 만으로도 그냥 똑 하고 부서질 만큼 연약한 것임을 깨달아라는 것입니다. 결국 나의 조건을 찬찬히 살피면 드러나는 것은 그런 모순이요 조건들의 허약함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숙명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가 숙명의 힘을 그토록 강하게 생각했던 건 시귀가 피를 빨린 인간에게 거는 암시와 똑같은 자기가 스스로에게 걸어 놓은 암시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스스로 조종당하도록 내버려둔 것입니다. 시귀와 인간이 만나는 순간이 암시로 인한 조종 밖에는 안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스스로에게 건 암시로 숙명에게 조종당하는 존재들이 할 수 있는 것 역시 암시로 타인을 자기 뜻대로 종속시키는 것 밖에는 없기 때문이죠. 이것은 거짓의 공존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만 살아남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오노 후유미가 보여주는 진정한 공존의 모습은 바로 대화입니다. 서로 극단적인 입장에 서 있지만 서로의 선택을 존중하는 토시오와 세이신의 대화도 그렇지만 이미 시귀가 되어버린 토오루와 아직은 인간인 나츠노의 대화와 세이신과 스나코의 대화가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다 관심가져야 할 것은 오노 후유미가 그 진정한 대화가 무엇을 가져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대화인지 아닌지는 그것이 야기하는 효과를 통해 알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한데요. 그 효과란 다름아니라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내어줌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나츠노의 경우(여기엔 어쩐지 반론도 충분히 제기가능할 것 같군요.) 그는 토오루에게 자신의 피를 내어줍니다. 세이신 역시도 자신이 맺지 못했던 소설의 이야기를 스나코와의 대화를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허물고 내어줌으로써 차츰 찾아가죠. 그러다 궁극에 가서는 전적으로 아예 내줘 버립니다.다시 말하면 그들은 변화를 받아들입니다. 나츠노든 세이신이든 그럴 때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한결 같습니다. 바로 스스로를 회의하는 것이죠. 나츠노는 자신이 문득 그렇게까지 시귀를 없애려 하는 것에 대해 무의미함을 느낍니다. 세이신은 스나코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생각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 갑니다. 이렇게 둘은 똑같은 반응을 보여주는데 바로 이것이 자신의 목에 걸린 숙명의 쇠사슬이 녹슬었다는 것을 알아보는 일에 다름아님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길고도 지루하게 썼습니다만 즉 돋보기를 자신에게 들이대라는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어떤 타인이 출현하여 우리가 가진 숙명(거창하다면 조건)을 각성시켜 본능적으로 배쳑하려 할 때 먼저 내가 가진 그 숙명이 타인을 배척할 만큼 절대적인 것인지 제대로 한번 객관화시켜 살펴보라는 것이죠. 여기서 객관화란 다른게 아니라 스스로 거기에 대해 대화해보라는 그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오노 후유미가 나츠노와 세이신을 통해 보여준 그대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숙명이라는 것에 대해 이것이 과연 절대적인지 아니면 옿은 것이지 스스로 자문해보고 해답을 구해보라는 것이죠. 바로 그것이 먼저 선행될 수 있을 때 우리는 시귀와 토시오가 걸었던 비극으로 부터 해방될 있다고 오노 후유미는 특히 세이신과 스나코와의 관계를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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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과는 달리 별 활약은 없었던 나츠노를 기리며...
(남자입니다. 왜 이렇게 여성스럽게 그려졌는지는 저도 잘 ㅡ ㅡ;)
결국 오노 후유미가 '시귀'를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심판의 화살은 타인의 가슴이 아닌 우리 마음에게로 행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귀는 그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을 리츠코에서 보듯이 먼저 극복하도록 노력해야 했었고
토시오 또한 세이신이 했던 것 처럼 먼저 마음의 문을 열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죠.
세이신은 늘 변화에 자신을 맡기는 존재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종교와는 전혀 다른 교회를 자주 산책다녔고 그것은 끊임없이 지금 자기가 존재하고 있는 곳을 벗어나 변화해보려는 마음의 표시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였기에 스나코와 대화할 수 있었고 스나코가 가진 상처를 이해하고 보듬어 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장차 또 반복될 거대한 비극을 미연에 방지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세이신이 글을 쓰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글이란 어떤 것입니까? 끊임없이 자신을 객관화시키는 작업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우리는 글을 쓰면서 쓰는 한편 어딘가에서 또 그것을 읽고 다시금 음미해보는 자신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는 것은 마치 우리 스스로 대화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쓰는 자아와 읽는 자아 사이의 대화 말이죠. 그렇게 나의 나 됨을 허물고 다른 생각으로 새로운 나로 변화해가는 작업이 바로 글을 쓰는 일이 아닐까요. 세이신의 소설이 계속 결말이 열려 있다는 것 역시 그것을 암시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글을 쓰면서 늘 새로운 자신으로 변모하기에 그 결말 또한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이겠죠. 오노 후유미는 그것 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보다 중요한 암시를 또한 해 두었습니다. 실로 아주 집요한 설계자라고 밖에는 할수 없습니다. 그것은 결국 시귀를 그 마을로 불러들인 것이 바로 세이신의 글 때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늘 자신을 새롭게 변모하게 만들었던 그 글이 이제 소토바 마을 전체를 변화게끔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죠. 결국 이 모든 것에 비추어 볼때 정작 오노 후유미가 하고 싶었던 말은 다 세이신에게 깃들어 있다고 암시해 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시귀는 이런 소설이었습니다.
완역본으로 이제 빠진 것 하나 없이 다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시귀의 여정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타인과 함께 공존하려면 어디를 먼저 살펴봐야 하는지 그 가장 중요한 하나를 위해 그려진 세밀화와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세밀화는 왠만한 예술가적 자의식이 없다면 불가능하겠기에 그 하나를 위해 이토록 많은 수고와 견고한 세계를 다듬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오노 후유미에게 감명 받게 됩니다. 사족입니다만, 지금 진행되고 있는 세계 상황을 보면 이제 타인과의 조화로운 공존은 하나의 시대적 요청이기도 합니다. 그 요청에 언젠가는 응답해야 할 자신을 위해서도 한 번쯤 이 '시귀'를 들여다 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