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커스 - 새로운 수요를 만드는 사람들
크리스 앤더슨 지음, 윤태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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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하나 있다면 그건 책이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곳까지 보여주어 우리의 시야를 넓혀주기 때문이다. 책이 넓혀주는 시야란 현재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건 미래도 마찬가지다. 책은 현재를 넘어 도래할 미래 또한 보여줄 수 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보다 현명하게 미래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니까 책은 한 마디로, 정보의 부족 혹은 시야의 한계로 인해 치르게 될지도 모를 시행착오를 미연에 줄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인 것이다.

 

 굳이 이러한 책의 유용성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번에 나온, '롱테일 경제학'으로 이제 우리에게도 제법 이름이 알려진 크리스 앤더슨의 또 하나의 역작, '메이커스'가 바로 그것을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메이커스'는 우리가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달라진 현재의 모습과 더불어 도래할 미래의 모습을 정확히 밝혀 우리가 오늘과 내일을 어떻게 준비하고 대처해야 하는지 보여주고 있는데 그래서 만일 당신이 미래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 지 고심하고 있었다면 좋은 조언자가 되어 줄 것 같다.

 

 

 그렇다면 크리스 앤더슨이 보여주고 있는 미처 우리가 몰랐던 변화된 현재의 모습과 도래할 미래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그 대답은 '메이커스'라는 제목 자체에 단적으로 드러나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일단 전작 '롱테일 경제학'에서 크리스 앤더슨이 보여주었던 것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자. 그 책에서 크리스 앤더슨은 동시대 소비자들의 취향이 다변화되고 또한 이전 시대의 소비자들과는 달리 이제는 상황에 굴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그 취향을 실현시키려는 경향이 강해짐에 따라 소수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특수 상품이 선호되는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 보았다. 그렇게 크리스 앤더슨은 앞으로 날로 '틈새시장'이 생겨나고 중요해질 것이며 이제 그것을 적극적으로 창출시키는 것이 성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전략이라고 한 바 있다. 그의 예언은 맞아 떨어졌다. 정말로 이제 사람들은 대중의 일반적 성향을 수동적으로 반영하는 게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취향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고 그러한 다변화된 취향에 발빠르게 적응하는 '틈새시장'의 중요성은 이제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니까 말이다. 아마도 최근에 각광을 받고 있는 패스트 패션으로 유명한 '자라'가 거기에 대한 좋은 케이스가 아닐까 싶다.

 

  '롱테일 경제학'에서 상정했었던 시대적 환경은 '메이커스'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메이커스'는 ;롱테일 경제학'에서 보다 더 한 발 나아간다. 그러니까 보다 더 현실적으로 '틈새시장을 어떻게 창출시킬 것인가?'에 대해 알려주는 것이다.

 

  '롱테일 경제학'에서도 그랬듯이 크리스 앤더슨은 여전히 제조업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산업이라 본다. 비록 지금이 정보화 시대이고 산업의 근본적 구조가 '원자'에서 '비트'로 옮겨갔음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제조업의 중요성이 감소된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크리스 앤더슨에게 지금과 같은 정보화 시대로 인한 디지털 환경의 획기적인 변화는 한 마디로 제조업의 근본 환경을 바꿔 보다 더 제조업이 왕성해지도록 하는, '슬램덩크'식으로 말하자면 '왼손은 거들 뿐'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디지털 환경이 됨에 따라 이제 개인이 얼마든지 공장에서만 할 수 있었던 작업들을 스스로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사진관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예전에는 사진 현상을 위해서는 꼭 사진관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예전엔 전문가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사진 앨범 하나도 가지기 어려웠지만 이제 그렇지 않다. 사진관에서 하는 일들을 개인이 집에서 혼자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크리스 앤더슨에 의하면 제조업 환경도 그렇게 바뀌었다. 설계 프로그램의 발달로 이제 개인도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상품의 설계를 할 수 있고 거기다 그러한 이들이 설계한 상품을 얼마든지 자유롭게 만들 수 있는 이른바 '메이커 스페이스(우리나라로 치면  일종의 '공방'을 생각하면 될 듯 하다.)'의 발달로 굳이 전문가나 공장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얼마든지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상품으로 구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혹시 그래도 전문 지식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하시겠지만 크리스 앤더슨은 그것도 너무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많은 지식들이 인터넷을 통해 공유됨(이를 '오픈소스 라이선스'라고 말한다.)으로써 얼마든지 자신에게 필요한 전문 지식들을 습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누구나 상품화할 수 있는 자신만의 아이디어가 있다면 '메이커스', 즉 수요 창출자가 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지난 시대에는 자신에게 아무리 뛰어난 아이디어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상품화 시키기 위해선 다음과 같은 세 단계를 거쳐야만 가능했다.

 

  1. 제조업체들이 제조할 만큼 인기가 있는가?

  2. 소매업자들이 계속 진열할 만큼 인기가 있는가?

  3. (광고나 상점 쇼윈도를 통해) 소비자 눈에 들어올 만큼 인기가 있는가? (p. 102)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이러한 단계를 거칠 필요가 없다.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상품으로 구현시키기 위해 더 이상 타인들에게 그 평가와 심판을 맡길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그렇게 원하면 얼마든지 누구나 능동적인 '메이커스'가 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크리스 앤더슨은 실제 자신이 구상했던 '스프링쿨러'를 상품으로 만들었던 과정을 밝힘으로써 이것이 그저 허황된 공상이 아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기까지 하다.

 

- 이렇게 변화된 디지털 환경의 덕분으로 이제는 '책상 위 공장'이 가능하게 되었다. 사진은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책상 위 공장'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현재 나와있는 물건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변화된 현재와 도래할 미래의 모습을 보면서 이제 개인의 창의성과 역량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임을 분명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조직을 등에 업지 않으면 개인의 존재가치를 인정받기가 어려웠다. 어떤 집안, 어떤 지역, 어떤 학교, 어떤 회사, 이런 것들이 나 자신보다 더욱 중요한 가치를 가졌다. 그래서인지 우리들 스스로가 생각하는 존재의 가치는 많이 왜소했다. 요즘 젊은이들이 가장 바라는 직업이 '공무원'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안정을 무엇보다 최우선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도 그만큼 스스로의 존재가 왜소하다는 생각에 믿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상황은 이제 달라졌다. 미처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제 다가 올 세상은 그런 조직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얼마든지 자기만의 힘으로 일어설 수 있는 '메이커스'의 시대다. 앞으로 더욱 왕성해질 틈새시장들의 존재는 이러한 '메이커스'들의 양산과 활동에 청신호를 보내고 있다. 늘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노력하는 자세 그리고 도전 정신만 있다면 얼마든지 스스로 활로를 개척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를 준비하는 자로서는 남들이 우루루 몰려가는 평준화의 길 보다는 이렇게 도래할 시대에 맞춰 준비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즉, 이제 '개인 제조업자(메이커스)'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지식 혹은 기술을 습득하는데 더욱 노력하는 것이다. 크리스 앤더슨에 따르면 그것 외에 다른 것은 필요하지 않다. 있다면 그것을 내가 할 수 있다는 자신에 대한 신뢰와 더 좋은 '메이커스'가 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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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살찐 사람은 빚을 지는가 - 빚, 비만, 음주, 도박으로 살펴본 자멸하는 선택의 수수께끼
이케다 신스케 지음, 김윤경 옮김 / 와이즈베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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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당신의 고질병, 작심삼일...

 

 

 인류가 역사를 시작한 이후로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강력한 법칙이 하나 있으니 그것이 바로 '작심삼일' 이다.

금연을 하는 것도, 살을 빼기 위해 헬스 클럽을 다니고 아침마다 달리기를 하는 것도 이 법칙의 마력으로 부터 빠져나갈 수 없다. 돌아다보면 삶이 걸어온 길 가득 이루지 못한 결심의 주검들이 가득하다. 그렇게 우리는 한 번 마음 먹은 것은 채 삼일을 못 간다는 이 불변의 진리 앞에서 얼마나 많이 넘어지고 또 그래서 좌절했던가! 채 싹도 틔우기 전에 꺾이어져 버린 미완의 결심들이 보내는 원망 가득한 시선 앞에서 내 의지박약을 얼마나 부끄러워하고 또한 자책했던가?

 

 인류의 오래된 고질병이니만큼 그 치유를 위한 책들은 일찌기 세상에 존재해왔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모두 자기개발서일 뿐이었다. 그 어떤 전문직이 나와도 결국엔 연애 이야기로 귀결되고 마는 우리나라 전문직 드라마처럼 작심삼일의 치유를 위한 수많은 자기개발서들이 있어왔지만 뻔한 레퍼토리의 재탕에 지나지 않았다. 식상함만큼 우리의 주목을 잃게하는 것도 없다. 저마다 '제가 그 진정한 치유책이에요!'하고 우리의 눈길을 끌려고 호객 행위를 하였지만 그 뻔한 말들을 위해 희생된 나무들만 불쌍할 뿐이었다.

 

 좀 더 다른 게 없을까? 우리들에게 압도적으로 군림하는 이 '작심삼일'을 치유해 줄 뭔가 새로운 이야기는 없을까?

혹시나 매년 흘러가는 시간만큼 또한 차곡차곡 쌓여져가는 실패한 결심들의 돌탑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 사람들은 없었을까?

그랬다면 반가운 손님이 오리라는 것을 미리 알려주는 까치처럼 반가운 소식을 이 자리에서 전하고 싶다.

 

 

 2. 비만과 부채 그리고 도박, 그 모두를 하나로 이어주는 끈인 자멸적인 선택...

 

 

 우리의 '작심삼일' 고질병을 '행동경제학'의 입장에서 분석하고 치유법을 가르쳐주는 책이 있다고.

 그것이 바로 일본의 대표적 행동경제학자 이케다 신스케가 쓴 '왜 살찐 사람은 빚을 지는가?'란 책이다.

 

 

 

 이케다 신스케의 이 책은 비만과 부채 그리고 도박 중독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것에서 부터 시작한다. 한 마디로 조사를 해보니 살찐 사람일 수록 빚도 많이 지고 도박에도 쉽게 중독되었다는 것이다. 이걸 단순히 신스케가 비만이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제시했다고 생각한다면 오해다. 신스케가 이 셋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건 이 세가지가 모두 한 가지 점에서 공통되기 때문이다.

 

 즉, 이 책의 용어로 말한다면, 이 세가지가 모두 '자멸적인 선택' 이라는 것이다.

 

 자멸적인 선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행동경제학적 용어로 단기의 이득을 취하느라 보다 더 큰 장기의 이익을 스스로 망쳐버리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휴가 때 드러낼 근사한 '바디'를 위해 독한 마음으로 다이어트를 결심했다고 하자. 그런데 그런 결심을 하면 이상하게도 더욱 먹고 싶은 것들이 선명하게 뇌리에 떠오른다. 그리고 그렇게 한 번 떠오르면 왜 그리도 또한 사람을 허기지게 만드는 것인지? 휴가 때 당당히 바디를 드러내 보이고 있는 자신을 생각하며 꾹꾹 눌러참지만 그럴수록 식욕은 스프링이 되어 더욱 높이 튀어오를 뿐이다. 그 때 눈에 띈 치킨 한 조각. 한 입 배어물면 그대로 행복감이 쓰나미처럼 몰려올 것 같다. 하지만 지금 한 번 무너지면 앞으로도 통제가 안 될 것임을 안다. 어쩌면 그 때문에 휴가 때 보일 근사한 바디는 그대로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들은 어떤 선택을 하든 선택 뒤에 따르는 기회 비용을 다 예측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눈 앞의 치킨 한 조각이 줄 수 있는 행복감을 놓치기 싫어서 나중에 근사한 바디가 가져다 줄 보다 장기의 행복감을 스스로 날려버리는 것(이걸 행동경제학에서는 대리인 효과라 부르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자멸적인 선택'이다. 비만과 부채 그리고 도박은 이 자멸적인 선택의 대표적인 유형인 것이다.

 

  우리의 작심삼일 또한 '자멸적인 선택'의 대표적인 모습임은 두 말할 것도 없다. 보통 한 달치 이용료를 선불로 내는 헬스 클럽. 삼일 딱 나가보고 그 요금을 그대로 날려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자, 그동안 날린 헬스 클럽 선불료 아까웠다면 신스케에 말에 주목하길 바란다. 그는 '의지박약'이라는 말로 그것을 일축하지 않는다. 그는 그걸 행동경제학으로 분석해 보여준다. 우리는 왜 그렇게 단기의 유혹에 쉽게 빠져드는가? 이게 행동경제학으로 설명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그 견지에서 대답하자면 그건 바로 '쌍곡형 할인'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용어가 마구 나온다. 하지만 뛰쳐나가지 말고 조금만 침착하자. 금방 설명할테니. '쌍곡형 할인'이 뭔지 설명하기 전에 말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시간 할인율' 이다. 안다. 뜻모를 용어의 연쇄란 걸. 그래도 알고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니 조금만 인내를...  그래서, 시간 할인율이란 무엇인가? 쉽게 말해 그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을 조금 어렵게 말한 것에 불과하다. 이를테면 유통기한이 얼마남지 않은 음식을 생각해 보자. 유통기한에 다가갈 수록 그 음식의 가치는 급속도로 떨어질 것이다. 그런 걸 시간 할인율이 크다고 말한다. 그럼, 이번엔 금이나 다이아몬드를 생각해보자. 금값이나 다이아몬드 값은 물론 다소 유동적이긴 하지만 오랜 시간을 두고 그 가치는 일정 부분 변함이 없다. 그러면 우리는 시간 할인율이 작다라고 이야기한다. 시간 할인율이란 그런 의미로 쓰인다. 이미 19세기에 국민들의 저축 성향을 조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으로 역사도 오래 되었다. 아무튼 이제 알겠지만 시간 할인율은 가치에 시간적 차원을 고려한 개념이다.

 

  그렇다면 '쌍곡형 할인'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쌍곡'이다. 즉 두 개가 있다는 말이다. 시간 할인율은 하나의 시간만 고려했지만 여기서는 두 가지 시간을 고려한다는 의미다. 즉 두 시점간의 선택에 있어 달라지는 할인율이란 의미에서 '쌍곡형 할인'인 것이다. 맞다. 알고나면 별 거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 '쌍곡형 할인'에서 고려하는 두 가지 시점은 무엇인가? 그게 바로 단기와 장기 시점이다. 거기에 시간 할인율을 대입해보면 이런 경향이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쌍곡형 할인의 최종 개념이다. 즉 단기에 있어서는 시간할인율이 커지고 장기에 있어서는 시간할인율이 작아진다는 것이다.

 

  이제 이것이 어떻게 자멸적인 선택과 연결되는 지 감이 잡힐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단기의 이익에 집착하는 이유는 바로 그 단기에 시간 할인율이 크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치가 급속도로 줄어들기 때문에 우리는 장기 보다 단기에 집착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단순한 설명이다. 이걸 그대로 곧이곧대로 새겨두면 안된다. 왜냐하면 예외가 많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매그니튜드 효과 가 그렇다. 우리들은 단기의 시간 할인율이 커진다고 해서 무조건 단기의 이익을 취하려 들지 않는다. 스스로를 한 번 돌이켜봐도 그런 경우를 쉽게 생각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게만 설명했을 경우 놓치는 게 있다. 그건 바로 가치의 상이한 크기들이다. 가치의 크기는 저마다 다르다. 앞서 시간 할인율이란 가치에 시간성을 도입한 것이라 말했다. 그렇게 가치마다 시간 할인율 또한 다른 것이다. 즉 매그니튜드 효과는 이렇게 설명한다. '시간 할인율은 선택하는 대상의 가치가 적을 수록 커지기 때문에 대상의 가치가 크면 클수록 사람들은 더 튼 인내심으로 기다린다'고 말이다. 사법시험을 합격할 경우 얻게 되는 성공 때문에 몇 년을 모든 욕망을 참고 공부하는 것을 이 매그니튜드 효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란 이익만이 주어지지 않는다. 더러는 손해가 뻔히 예정되는 경우도 있다. 사법시험을 예로 든다면 낙방이 그렇다. 어떤 시험이든 합격을 100% 예정하긴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잠정적인 가능성 때문에 오늘의 힘겨움을 참기도 한다. 왜 그럴까? 이런 것도 행동경제학으로 설명이 가능할까? 가능하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 이미 이름도 있다. 그것이 바로 '부호효과' 다. 부호효과란 '장래 손실에 대한 시간 할인율은 장래 이익에 대한 시간 할인율 보다 작아지는 경향이 있음'을 말하는 것 인데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비록 합격이 잠정적인 가능성일망정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다. 즉 장래 어떤 시점에 이익과 손해가 뻔히 예측되지만 장래 예측되는 손해의 시간 할인율이 장래 예측되는 이익의 시간 할인율 보다 적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이익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장래의 경우에만 해당하고 단기에 있어서는 전혀 반대로 작용한다. 단기의 경우엔 손해의 시간 할인율이 이익의 시간 할인율 보다 훨씬 크다. 그래서 우리는 단기에 있어서는 이익을 얻기 보다 손해를 줄이려는 경향이 강하다.

 

 3. 결국 모든 가치의 평가는 당신에게 달린 것. - 프레이밍 효과...

 

 여기까지 오면 우리의 선택에 있어 중요한 한 가지 진실이 드러난다. 그건 우리가 어떤 가치를 선택하든 그것은 대상의 객관적인 가치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우리의 주관적 가치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행동경제학은 모든 가치가 당신 안에서 결정된다고 말한다. 그렇게 그 어떤 가치도 절대적이지 않고 객관적 수치로 환산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프레이밍 효과 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왕가위의 영화 '중경삼림'에는 '사랑엔 저마다 다른 유통기한이 있다'라는 유명한 대사가 나온다. 좀 뜬금없는 인용이지만 프레이밍 효과를 이 유통기한으로 설명할 수 있다. 대부분 우리는 냉장고에 있는 음식물이 유통기한이 지나면 속상해한다. 왜 진작 먹지 않았느냐고 스스로를 책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같은 음식물이더라도 유통기한이 아직 남아 있다면 '나중에 먹지 뭐'하고 태연히 생각한다. 미리 먹는 건 그 가치를 온전히 즐기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기에 별 느낌을 가지지 못한다. 그렇게 우리는 기한 넘김에 따르는 가치의 하락을 기한의 당김에서 오는 가치의 증가 보다 훨씬 크게 생각한다. 도대체 유통기한이 뭐길래 이러는 것일까? 사실은 이것이 바로 우리의 가치 기준이 주관적으로 결정된다는 강력한 증거이기도 하다. 즉 우리는 어떤 선택을 평가할 때 그 자체만 가지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비교 가능한 기준을 정해두고 선택한다. 그걸 행동경제학에서는 '준거점' 이라 부른다. 즉 우리는 어떤 선택을 평가할 때 선태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준거점에서 얼마나 변화했고 또한 괴리 되었나를 가지고 선택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걸 바로 프레이밍 효과 라 부른다. 다시 말해 우리의 가치 평가란 언제나 상대적으로 이루어진다. 때문에 실질적으로 같은 선택이라 하더라도 그 처한 상황과 문맥에 따라 평가가 얼마든지 달라지기도 한다.

 

 4. 자멸적인 선택의 치유로서의 커미트먼트...

 

 그러므로 행동경제학이 자멸적인 선택으로 부터 우리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 역시 주관적인 것일 수 밖에 없다. 즉, 당신의 마음을 스스로 조련하는 것. 그것이 바로 행동경제학이 내세우는 궁극적인 치료제이다. 이를 위해서 행동경제학이 내세우는 것이 바로 '커미트먼트'다. 커미트먼트란 무엇인가? 그걸 이렇게 설명해보자. 어떤 이들은 자신의 모습을 너무 잘 알아 스스로 조심하여 단기 이익의 집착을 억누르는 사림들이 있다. 말하자면 일종의 비관주의자들. 그러니까 '이대로 날 내버려두면 분명 미래엔 실패할거야'라는 생각에  오늘을 좀 더 절제하며 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행동경제학에서는 '현명한 선택자'라 부른다. 그러니까 자멸적인 선택과 완전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 사람들은 미래에 허물어질지도 모를 자신을 보호하고자 스스로 자제를 위한 어떤 규칙들을 정하고 거기에 따르려 한다. 그러한 자제를 위한 규칙 혹은 방법들을 통털어 '커미트먼트'라 부른다. 이를테면 그리스 신화에서 세이렌의 노래 소리에 유혹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돗대에 결박했던 오디세우스처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커미트먼트'다. 커미트먼트는 자멸적인 선택을 회피하고자 스스로에게 적용하는 일종의 결박, 즉 자제 기술이다. 그런데 이 커미트먼트는 우리의 본능과는 상관없는 마냥 인위적인 강압 방법은 아니다. 그건 어느정도 우리의 본성과도 일치하는데 이케다 신스케는 그걸 '조삼모사' 라는 중국의 고사성어에 비유해 설명한다.

 

 이케다 신스케에 따르면 '조삼모사'는 그냥 단순히 어리석은 원숭이들의 행동이 아니다. 그건 바로 우리의 본성적 경향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즉 우리 역시도 그 원숭이들처럼 아침에 세 개 받고 저녁에 네 개 받는 걸 더 선호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행동경제학에 따르면 우리는 총량이 조금 적더라도 그 시점마다 만족의 크기가 조금씩 증가하는 계열을 더 선호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자기개발서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 이유도 사실은 우리에게 '조삼모사' 경향이 본성상 강하게 남아있는 탓이다. 그렇게 조금씩 우리가 나아지는 느낌을 받는 것을 선호하는데 '커미트먼트'는 바로 그러한 증진의 만족의 가져다 줄 수 있기에 완전히 인위적 강압 방법은 아닌 것이다. 책의 후반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어렵게 생각하는 자제에 대하여 실질적인 '커미트먼트'를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설명하는데 주로 할애되고 있다. 여기서 주로 염두에 두는 것은 이른바 '넛지' 효과다. 즉 커미트먼트를 자제가 보다 용이하도록 유도하는 상황을 만드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계획기간은 짧게 잡으라' 또는 '장기적인 이익을 지키기 위한 세부적인 규칙을 설정하라'는 등의 세부적인 것에서 부터 그럼에도 의지력이 고갈된다면 그 강화의 방안으로 강력한 커미트먼트 전략까지 다 나오고 있다. 이 글을 읽고 자신에게도 그런 커미트먼트가 필요하다고 느꼈다면 이 책에 나와있는 방법들 중에서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으면 될 것 같다. 아무튼 후반에서 신스케가 보다 주장하는 것은 '자제'의 요청이다. 그는 우리가 이제 여기에 대해 신경을 쓸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싱가포르 대학의 웨이 캉 교수의 필드시험에도 나타났듯이 엘리트들 조차 거의 80% 가까이가 이 자제 문제에 전혀 신경을 쓰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제 문제를 방치한다는 것은 순간 순간 이루어지는 단기적인 만족을 우선하는 바람에 장기적인 계획을 도미노처럼 무너뜨리고 결과적으로는 선택한 당사자에게 큰 손실을 끼치게 된다. 그럼으로 우리는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자제하는 것'에 관심을 둘 필요가 있고 사실 후반의 이야기들은 이 자제의 구조를 잘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야만 자신에게 잘맞는 커미트먼트로 현명한 선택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5. 맺으며...

 

 이상으로, 내게는 정말 새롭게 다가왔던 작심삼일을 행동경제학으로는 어떻게 치유하는지 이야기해 보았다. 위에도 알 수 없는 용어들을 잔뜩 썼지만 사실 초반엔 좀 어려웠다. 잘 이해가지 않아서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는지 모른다. 그런 끝에 겨우 다다른 이해의 지점 위에서 썼는데 읽으신 분들은 어떻게 느끼셨는지 모르겠다. 내가 느낀 어려움이 있어 혹시나 나같은 분들이 있을까봐 그럴 때는 이 글에서라도 좀 도움을 얻으시라고 되도록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했다는 것만은 알아주시길. 아무튼 인간이 이렇게 경제학적으로도 낱낱이 분석될 수 있다니 흥미롭다. 신스케가 마지막에 요청하고자 했던 '자제의 문제'도 수긍이 간다. 이 책을 읽고 느끼게 된 것이지만 행동경제학은 사회정책과도 생각보다 긴밀하게 연관될 것 같다. 감세가 왜 소비를 진작시킬 수 없는지, 흡연 문제에 대해 국가의 개입은 왜 정당한지도 행동경제학으로 설명되는데 흥미로웠다. 기회가 되면 이 부분을 나중에 더 공부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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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파크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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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 나온 폴 오스터의 신작 '선셋 파크'는 2010년에 미국에서 출간되었다.

 전작인 '보이지 않는'이 2009년에 출간되었으니 채 1년도 안 되어 새로운 작품이 나온 셈이다. 그러고 보니 '어둠 속의 남자'가 나왔던 2008년 부터 꾸준히 1년에 한 권씩 내고 있다. 이러한 시기의 간격은 지금의 폴 오스터를 있게 한 대표작들, 그러니까 뉴욕3부작, 달의 궁전, 우연의 음악 등이 해마다 주루룩 나왔던 1980년대를 떠올리게 한다. 그것이 전기의 대표작이었듯 혹시 이 일련의 작품들은 후기의 대표작들인 셈일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무튼 지금 생각하기엔 분명 이 세 작품들은 그럴 값어치가 있어 보인다. 더구나 이 세 작품들엔 어떤 강한 연속성마저 감지된다. 그러고 보니 저번 '보이지 않는 리뷰'에서 한 번 언급했던 것도 같다. '어둠속의 남자'와 '보이지 않는'은 9. 11이 남긴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에 대한 작가 자신의 반향이라고. '어둠속의 남자'는 정확히 9. 11 이후에 이제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자문자답하는 작품이었고(이는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쓰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보이지 않는'은 그 후, 2008년 서브프라임으로 인한 경제 공황까지 가세한 미국에서 오늘의 현실이 과연 무엇때문에 초래된 것이었나를 되돌아보는 소설이었다. 그렇게 폴 오스터는 자신에게서 미국으로 나아갔다. 그럼, '선셋파크'는 어디로 나아간 것인가?

 

  전작 '보이지 않는'의 리뷰에서 나는 그 소설의 마지막이 일종의 '그라운드 제로'라고 말했었다.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리고 다시금 역사를 만들어가기 위한 현장이라고.

  결국 소설 '보이지 않는'은 이제 만들어 갈 미국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었다. 그건 한 마디로 이제는 보이지 않게 된, 그렇게 미국이 잃어버렸던 것의 복원이었다. 현재의 미국에서는 보이지 않는, 60년대의 미국은 가지고 있었던 순수한 이념들 혹은 가치들...

 

  그런데 '선셋 파크'의 시작도 그러하다. 일종의 '그라운드 제로'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선셋 파크'의 이야기는 마이스 헬러로 부터 시작되는데 작품의 첫 등장 장면에서 그는 서브 프라임으로 인해 밀린 대출금을 갚지 못하고 야반도주해 버린 빈 집에서 그들이 남기고 간 그들의 물건을 청소하는 일을 하고 있다.

 

  집 하나하나가 실패의 이야기이다. 파산과 체납, 빚과 가압류로 이루어진 이야기들이다. (p. 7)

 

  그렇게 마일스 헬러가 소위 '폐가 처리(기존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물건을 깨끗이 치워 다른 사람들에게 팔기 쉽게 만드는 일)'를 하는 주인을 잃어버린 집들은 9. 11 때 생겨난 그라운드 제로의 또다른 모습이다. 마일스 헬러는 그런 그라운드 제로에서 일하도록 고용된 인부다. 이는 '보이지 않는'의 마지막에서 세실이 보았던 그라운드 제로에서 일하는 인부들에서 그대로 이어진다. 하지만 정작 하는 일은 정반대다. '보이지 않는'에서는 현존하는 그라운드 제로를 기초로 역사를 이어 올렸다. 하지만 지금 마일스 헬러가 인부로서 하는 일은 그라운드 제로를 없던 것으로 지우는 일이다. 얼른 기존의 흔적들을 제거하여 새로운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에서는 거기에 뭐가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하지만 '선셋 파크'에선 분명히 존재한다. 이 차이는 어쩌면 기억과 망각의 차이를 말하는 것일수도 있다. '보이지 않는'이 대지에 새겨진 상처를 영원히 기억하는 것이라면 '선셋 파크'는 새겨진 상처는 다른 흙으로 서둘러 덮어서 망각해버리고 아예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그렇다면 이것은 또 한 번 겪었던 폴 오스터의 절망이 드러난 표현인지도 모른다. 2010년의 미국은 그야말로 '폐가 처리'와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아시다시피 2009년 미국의 금융위기를 타개하고 새롭게 재건하기 위해 추진했던 오바마의 금융개혁은 완전히 좌절되었다. 생각보다 기득권의 방어는 꽤나 강고했고 결집 또한 대단했다. 그 앞에서 오바마는 무력하기만 했다. 많은 여론의 지지 역시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건 미국을 좀 더 바람직하게 재건할 또 하나의 기회를 날려버린 셈이었다. 부시의 이라크 침공이 9. 11 이 가져온 기회를 날려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타자를 공격함으로써 비극을 재빨리 망각하려 했었던 미국은 결국 다시금 2008년 서브 프라임 사태를 맞이하고 말았다. 마치 카트리나에 휩쓸린 뉴올리언스 처럼 한 순간에 모든 재화들이, 그와 함께 장밋빛 미래를 꿈꾸고 있던 모든 가정들이 속절없이 쓸려가고 말았다. 이를테면 또 하나의 엄청난 그라운드 제로가 생겨난 셈이었다. 위기이 재발은 이제 좀 깨달아야 한다고. 더 이상 예전처럼 망각해서는 안된다고 신호를 주고 있었지만 역시나 미국은 아무런 교훈을 배우지 못했다. 오바마의 금융 개혁 실패는 미국이 또 한 번 망각을 선택했다는 선언에 다름아니었으니까.

 

   '보이지 않는'에서 조금은 희망적인 미국의 미래를 그렸던 폴 오스터로서는 정말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광경이었을 것이다. 늘 어떤 위기에 있어서든 '폐가 처리'만 고수하는 미국은 그에게 분명 이대로 영원히 실패를 반복할 수 밖에 없는 나라로 보였을 것이다. 트라우마가 치유될 순간은 영원히 도래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꾸만 커져갈 뿐. 마일스 헬러의 아버지 모리스 헬러처럼 타인의 아픔에 민감한 폴 오스터로서는 망각으로 그 개인들의 고통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미국이 더욱 절망스럽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선셋 파크'는 바로 그 절망에서 잉태한 소설이다.

 

  그리고 그 절망 끝에 나온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의 아이러니함. '선셋 파크'는 그런 아이러니로 충만한 우주이다. 희망은 곧 절망으로 바뀌고 구원의 가능성은 그대로 추락의 가능성으로 변질되고 만다. 모퉁이를 돌다가 예기치 않게 강도를 만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삶은 늘 뒷통수를 타격할 의외의 변수를 마련해두고 있다. 이를테면 모리스 헬러가 소설에서 처음 등장할 때 나오는 친구의 딸(수키) 장례식 장면처럼.

 

 그는 여러 해 전 봄이 끝나고 여름이 시작될 무렵 화창한 날 늦은 오후 휴스턴 스트리트에서 수키와 우연히 마주쳤던 기억을 떠올렸다. 수키는 고등학교 무도회에 가는 길이어서 눈에 확 띄는 화려한 빨간색 드레스를 차려입고 있었다. 토마토처럼 붉디붉은 빨간색이었다.(...) 그 날부터 그의 마음 속에서 수키의 모습은 생기발랄한 젊음과 미래의 가능성의 정수를 구현한 모습, 불타는 젊음을 보여주는 훌륭한 모범으로 자리잡았다. 이제 그는 한겨울 베네치아의 눅눅한 냉기, 거리로 무릎 높이까지 넘쳐흐른 운하, 불기 없는 방들의 몸이 떨리는 외로움, 그 속의 어둠의 힘에 부풀어 올라 터져 버리는 머리, 이 너무도 많고도 너무나 작은 세계에 의하여 파열해 버리는 삶에 대하여 생각했다. (p. 153)

 

 수키로 인해 언제까지나 세상이 화창하게 지속되리라 여겼던 믿음은 그녀의 예기치 않은 자살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진다. 폴 오스터는 시각적 그리고 촉각적 이미지들의 선명한 대비를 통해 이러한 모리스 헬러의 정신적 추락을 극명하게 부각한다. 하지만 그런 정도의 추락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예고도 없었다. 그야말로 느닷업이 맞게 된 루시퍼의 해머였던 셈이다. 그런데 그런 일은 그의 아들 마일스 헬러에게도 나타났었다. 그가 무려 7년 동안이나 탕아의 존재로 살았던 것은 말다툼 끝에 밀쳐버린 배다른 형이 길에 넘어져 차에 치여 숨지게 된 것이 결정적 원인이었다. 사소한 밀침이었지만 그게 가져온 것은 뜻밗의 죽음이었다. 그로 인해 마일스 헬러의 인생은 송두리째 전복되고 말았던 것이다. 역시나 아무런 전조도, 예고도, 징후도 없이.

 

 마치 운명이란 게 주사위를 던져서 결정되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예측불허다. 어쩌면 이 소설에 만연된 아이러니는 이 예측 불허를 경험한 자의 허망함일지도 모르겠다. 선셋 파크의 집이 거기에 모인 모두에게 겨우 구원의 공간이 되려는 순간 느닷없이 출현한 퇴거 명령 집행을 위한 경찰관에 의해 그 모든 가능성들이 산산히 부숴져 버릴 때 그것을 바라보는 마일스 헬러의 시선에 담겨져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일이 있기 전 바로 앞장에서는 선셋 파크의 거주자들 중 가장 행복과 거리가 멀었었던 앨런은 다시금 첫 연인을 만나 이런 고백을 한다.

 

   미칠 것만 같아. 아침에 눈을 뜨면 새삼 행복하다는 느낌이 들어. 이렇게 행복하다고 느껴 본 건 정말 오랜만이야.

  잘됐다. 엘

  그래, 잘된 일이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p. 316)

 

  이러한 말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녀는 퇴거 집행의 날을 맞이하고 행복에 젖었던 그녀의 두 눈은 공포로 경악하는 두 눈이 된다. 행복이 어느 순간 갑자기 다가오리라는 걸 몰랐듯, 불행 역시 그러하단 걸 그녀는 그렇게 뼈져리게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소설 속 인물 모두가 이런 걸 경험한다. 한 마디로 소설 속 이런 문장으로 대표될 수 있는 이런 경험을.

 

  지금 그는 어디에 있나? 피할 수 없는 소멸과 계속될 삶의 가능성 사이의 경계선 위에 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p. 186)

 

  이 경험은 정확히 폴 오스터가 2009년 미국의 모습에서 느끼던 것이었으며 2008년 서브 프라임 이후 갑작스럽게 맞이한 재정 파탄으로 인해 자신의 집을 버리고 떠나야 했던 모든 미국 가정들이 느끼던 것이었다. 그렇게 2001년의 9.11 이 만들어버린 트라우마의 심연은 미국이 내부의 진실된 반성이 아니라 이라크 전쟁을 비롯한 외부의 타자들을 지우는 것으로만 끝없이 메우려들었기 때문에 결국 미국인 모든 가정으로 확산되고 말았다. 아마도 미국에서만 유독 일어나고 있는 좀비 영화 붐은 이것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한 순간에 몰락을 경험했던 그들은 역시나 똑같이 단 한 번의 물림, 혹은 긁힘으로 좀비로 변해버리는 것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즉 그들에게 좀비란 그들이 겪었던 고통스런 기억이 구체화된 산물이요, 그들이 과거와 현재 짊어지고 있는 절망, 무력감 그리고 분노를 대신해서 표현하고 있는 존재인 셈이다.

 

  이 '확산'은 '선셋 파크'의 소설적 구성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소설은 '마일스 헬러'만의 내면에서 시작하여 차츰 선셋 파크에 모인 네 명의 내면으로 그리고 마지막엔 모두(All)의 내면으로 확장되어 간다. 마치 금융위기로 인해 난파선이 되어버린 이 미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재민으로서의 그들 하나하나의 내면을 다 보여주려는 것처럼.

 

  이렇게 '선셋 파크'는 지금 당신 곁에서 오늘을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소설이다. 그들의 내면 속에 간직된 것을.

 

  지금 확산되고 있는 좀비 영화가 미국인들이 그동안 미국이 했던 것과 똑같이 오로지 타인을 파괴함으로 자기가 겪고 있는 고통을 대리 치유하고 있는 것임을 고려한다면(그러니까 나는 지금의 좀비영화들을 이렇게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 앞에서 자신이 드러눕고 있는 소파 같은 것으로. 그렇게 자신들의 무의식적 욕망이 술술 드러나고 있는... 이런 면에서 같이 흥행하고 있는 '슈퍼히어로'물에 대해서도 의심의 시선을 던질 수 있다. 사실 '슈퍼 히어로물'은 '좀비물'과 동전의 양면관계다. 좀비물은 타자를 파괴하고 히어로물은 타자를 구원하지만 모두 타자에 대한 내밀한 헤아림은 없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좀비물에서 타자들이 오로지 자신의 치유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소모품이듯 슈퍼히어로물에서도 타자들은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기 위해 그 배경으로 사라져줘야 하는 소모품들인 것이다. 금융위기가 초래한 트라우마 앞에서 좀비물이 '너도 나처럼 당해봐라'라는 무의식적 욕망의 상관물이라 한다면 슈퍼히어로물은 '압도적으로 강해져서 다시는 이런 아픔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무의시적 욕망의 상관물이다.) 이렇게 소설 속 모든 인물들의 내면을 아우르는 것이 어쩌면 폴 오스터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던지고 싶은 대안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너무 자신의 고통만 바라보려 하지 말고 타인은 어떻게 지금의 상황을 견디고 있는지 그 헤아림의 시선을 한 번 던져보라는...

 

  그랬을 경우, 우리가 알게 되는 것 한 가지...

  그건 바로 지금 겪고 있는 힘겨움, 고통들이 나만은 아니라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그 모든 힘겨움, 고통들에서 나만이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폴 오스터가 독자들에게 주려하는 것을 단 한 문장으로 정의하라면 아마도 나는 바로 이것이지 않을까 한다.

 

  '너만 예외일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라'

 

  우리는 소설이 점점 모든 인물들의 내면으로 확장되어감에 따라 마일스 헬러만이 고통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님을 알게 된다. 모두가 다 자신만의 고통과 힘겨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어쩌면 '선셋 파크'의 공간에서 연대가 가능했던 것도 그러한 헤아림 덕분이었는지 모른다.

 

  그러고 보면 그들이 살던 선셋 파크 바로 옆에 그린 우드 묘지 가 있었던 것이 예사롭지 않다. 그들은 종종 거기를 거닐거나 바라본다. 그러면서 거기에 묻힌 그들의 삶을 헤아린다. 선셋 파크의 집이 소설에서 거의 유일한 구원의 공간임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헤아림이 바로 그들에게 진정한 연대와 구원을 가져오게 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는 듯 하다.

 

  그린우드 묘지는 소설에 종종 나오는 야구 선수들의 생애 와 이어진다. 마일스 헬러와 그의 아버지 모리스 헬러는 한 순간 빛났다가 예기치 않게 은퇴해 버린 야구 선수들의 인생을 자주 떠올린다. 마일스 헬러와 모리스 헬러처럼 느닷없이 루시퍼의 헤머를 맞았던 자들을. 그렇게 그들의 삶이 예외가 아니었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린우드 묘지의 존재와 야구 선수들 생애에 대한 이야기는 소설에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어쩌면 그 묘지는 9. 11이나 이라크 전쟁, 혹은 금융 위기에서 희생된 이들을 상징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삶을 헤아려 볼 것을 말하기 위해. 그러면 더욱 우리는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 역시도 그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을. 그렇게 삶의 모든 힘겨움 또는 비극 앞에서 우리는 전혀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을. 단지 우리가 여기에 서 있고, 그들이 저기에 누워 있는 것은 다만 우연이고, 운이 작용한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선셋 파크'의 모든 등장인물들은 어떠한 행복에도 혹은 불행에도 머무르지 못한다. 행복과 불행은 마치 넘실거리는 파고의 높낮이 만큼이나 변화무상하다. 그건 그들의 능력과 노력과도 무관하다. 흡사 눈을 가린채 해변의 모래 사장을 걸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밟게 될 것이 부드러운 모래일지 아니면 깨진 유리 조각일지 그도 아니면 누군가의 배일지 알 수 없다. 우리의 인생 경험에 비추어 봐도 비슷하다. 우리 역시도 그와 같은 상황이다. 고통은 전조도,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소설의 마지막 마일스 헬러가 또다시 뜻하지 않게 당하는 고난이 전혀 억지스럽게 여겨지지 않는 것도 그런 우리의 경험이 뒷받침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렇지만 '나만은 예외겠지'하는 생각은 여기서 전혀 다른 선택을 하게 한다. 그 예외일 거란 생각 때문에 자신의 어려움과 고통은 더욱 크게 보이고 거기다 '불운'이란 생각까지 겹치면 더 큰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때문에 그들은 타자들에 대해 적대적이 된다. 좀비물이나 슈퍼히어로물에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을 투사시키는 것처럼.

 

   그리하여 결국 미국이 저질렀던 잘못처럼 동일하게 늘 그릇된 선택을 하게 된다. 오바마의 금융 개혁은 언제나 자신들만은 예외일 것이라는 기득권자들에 의해 실패하고 우리나라의 아파트 소유자들은 아파트 가격에 대한 자신들의 소망이 우리나라 경제 상황상 관철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한 그 헛된 믿음을 정부가 따를 경우 그로 인해 또 어떤 어려움들이 타인들에게 전가될 것인지 알면서도 자신만은 예외라는, 아니 예외이고 싶다는 생각때문에 그릇된 선택을 한다.

 

  예외는 그렇게 단절을 가져오고 결국엔 늘 더 큰 희생을 대가로 치루게 한다. 아마도 그래서 칸트는 바로 그 예외가 되려는 생각이야 말로 정말 '악마적'인 것이라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칸트는 단적으로 말했다고 한다. 악마란 다름아니라 스스로 예외가 되려는 존재들이라고.  

 

  소설 '선셋 파크'는 '나만 예외'라는 생각을 버리라고 말한다. 결국 야구 선수 잭 로크도 죽는다. 늘 행운으로 모든 불행을 비켜나갔던 그는 그의 삶을 관심있게 지켜보는 마일스와 모리스 부자에게 '예외'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존재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도 죽는다. 그리고 그의 죽음과 동시에 마일스와 모리스 부자는 진정한 화해를 하게 된다.(잭 로크는 일종의 '사라지는 매개자'이다. 그것은 예외의 한계, 그것이 치유와 구원을 줄 수 없음을 말하는 존재이다.) 즉 우리는 이를 통해 '선셋 파크'가 하려고 하는 말, 그러니까 예외를 버렸을 경우 타인 역시 같은 어려움과 힘겨움 속에 살고 있음을 보게 되고 그렇게 상호 이해의 연대 속에서 우리가 바라는 치유 혹은 구원도 찾아올 것이라는 것을 더욱 확인하게 된다.

 

  물론 우리의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마일스 헬러의 상황이 바뀌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보게 된다. 이제 자신에게 닥쳐온 불행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변해버렸다는 것을. 바로 그 시선의 변화가 폴 오스터가 주려 하는 치유와 구원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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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폴 오스터의 '보이지 않는' - 외부와 내부에서 바라보기...
    from 헤르메스님의 서재 2013-05-30 13:33 
    PART 1 - 외부에서... 1967년... 그 해, 미국은 인구가 2억명을 넘었고 비틀즈가 미국을 휩쓸었으며... 새로운 세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아서 펜 감독의 영화 '보니 앤 클라이드'와 마이클 니콜스 감독의 영화 '졸업'이 개봉되었으며,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 여론이 들끓고 있었다. 그렇게 미국에 있어 1967년은 바람의 방향이 새롭게 바뀌는 시점이었다. 폴 오스터의 신작 소설 '보이지 않는'은 바로 이 1967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오드득 2013-05-30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름 연결되는 이야기라 '보이지 않는' 리뷰도 링크해 둡니다...

아이리시스 2013-05-30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세한 헤르메스님 리뷰 보니까 제가 유독 이 작품이 재미없던 이유를 알 것 같아요. 저는 미국적 시각은 하나도 없었고 그냥 '나의 시각'으로 읽었던 듯한데, 내용이 그저그러니까 계속 그러그렇게 읽혔던 것 같네요.

'보이지 않는'은 책을 안 읽어서, 담에 언젠가 읽고나서 리뷰를 다시 읽을 날이 오겠죠^^

희선 2013-05-31 0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한테는 그런 일 일어나지 않겠지, 하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하죠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았으니 일어나지 않을거야 하기도 했는데...
정말 누구한테나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아픔이 있고 힘든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언젠가는 죽습니다, 이것 또한 잘 잊어버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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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당한 유언들 밀란 쿤데라 전집 12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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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신당한 유언들'은 1993년에 나왔다. 1990년에 나온 소설 '불멸'로 부터 3년 뒤다.

  '배신당한 유언들'은 에세이다. 지금까지 밀란 쿤데라가 쓴 총 10편의 에세이들 중 7번째로 나온 것이다. 소설은 모두 9편을 썼다. 2000년에 나온 '무지'가 현재로선 그의 마지막 소설이다. 이후로는 에세이만 나오고 있다. 굳이 책에 대한 리뷰와는 별로 상관 없을 것도 같은 이런 사실들을 언급하는 건,(물론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배신당한 유언들'과 그 전에 나온 소설 '불멸'이 아무래도 상관관계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불멸' 바로 전에 나온 '소설의 기술'이라는 에세이가 또 바로 그 전에 나온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작가 자신의 해설인 것처럼 말이다. '배신당한 유언들'도 그렇다고 본다. 밀란 쿤데라 스스로가 말하는 '불멸'의 해설서라고.

 보다 쉽게 비유하자면, DVD나 블루레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감독 자신의 음성해설 같은 것...

 

 

  왜냐하면 여기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가 소설 '불멸'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와 아주 많이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여 '배신당한 유언들'이 알송달송했다면 이참에 '불멸'을 한 번 들춰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에세이에서 모호했던 내용들이 소설을 통해 더욱 분명해질지도 모를 일이다.

 

 

   혹, 그 정도도 왠지 귀찮다고 느끼시는 분들을 위해 정말 보잘것 없는 '리터러시'의 소유자이지만 감히 '배신당한 유언들'이 실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정리해 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듯 하다.

 

 

   일종의 분리에 대한 이야기라고...

 

 

   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쉽게 전달할 수 있는 말을 찾으려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봤으나 아무래도 한 단어로는 저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었다. 셜록 홈즈가 자주 쓰는 참 재수없는 방법이기도 하다. 처음엔 알듯 모를듯한 말을 툭 던져놓고 상대방의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실컷 즐긴다음 구체적 설명이 들어가는 것. 나도 그렇게 하려고 한다. '그럴거면 처음부터 말하면 좋잖아!'하고 돌을 던져도 그냥 맞을 수 밖에 없다. 어쨌든 내 머리의 프로세서는 이렇게 밖에는 작동하지 못하므로....

 

 

  분리의 이야기다. 어떤 분리?

 소설과 소설가의 분리이다. 소설의 내용을 가지고 소설가를 규정짓지 않는 것. '배신당한 유언들'은 결국 이런 말을 한다. 좀 상스럽게 직설화법으로 고쳐보면, 밀란 쿤데라는 이렇게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제발 네가 읽은 것을 절대시하지도 말고, 읽을 것을 가지고 나를 어떤 사람이라 판단하지도 마.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제대로 알 수 있나? 너는 이해한다고 하지만 그렇게 자신할 수 있을만큼 무슨 절대적 근거라도 있는 것인가? 우리는 부단히 변하는 존재야. 너도 변하고 나도 변하지. 그런 우리에게 책은 잊혀진 시대의 유물, 지워져 버린 생물의 화석과 같은 것일 뿐이야. 너는 솜씨좋은 고고학자처럼 그걸 가지고 나를 유추하려들지. 하지만 그건 너의 상상력이 빚어낸 수사학일 뿐, 진실은 아니지. 그런데도 넌 진실이라 주장해. 너의 상상이 주형한 틀에 나를 맞추려들어. 이건 폭력이지. 더구나 그것이 글이 되었을 경우 그건 불멸이 돼. 기록으로 남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기도 하지. 진실이 아닌데도 불멸이 되어 진실과 대등한 위치를 가지게 돼. 거기에 대해 내가 아무리 진실을 말하려 해도 소용이 없지. 이미 불멸이 되어버린 글 앞에선 초라한 자기 변명이 될 뿐이니까. 이런 상황에서 이해한다고 말하고 이렇게 저렇게 나를 규정짓는 것은 소송과 다를바 없어. 내 '불멸'이란 소설에서 괴테가 '불멸은 영원한 소송이죠(P. 136)'이라고 말했듯 말이야. 카프카가 정확히 꿰뚫었듯이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피고인을 없애기 위해 제기하는 소송인 것이지('배신당한 유언들' P. 340) 난 이게 싫어. 오만한 규정이 싫어. 유언의 진의는 오직 죽은 자만이 알 뿐이야. 우리는 늘 보지 않았나? 같은 유언임에도 불구하고 상속자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더구나 자기가 한 해석이 옳다고 기꺼이 소송까지 불사하는 것을! 난 그런 것을 경계하려 해. 오만하게 진리라 주장하며 규정짓는 너의 입을 좀 닥치게 하고 싶어!"

 

 

 

  뭐, 이런 말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이런, 극도로 작아지는 자신감이란...) 보잘 것 없는 리터러시의 그물로 포착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이렇게나 단정지어 버리다니. 밀란 쿤데라가 정확히 내 심장에다 비난의 화살을 쏘아 퍼부어도 할 말이 없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리뷰라는 것이 어쨌든 무슨 말이든 해야만 하니, '진격의 거인'처럼 앞만보고 걸어가는 무모한 철면피가 될 수 밖에...

 

 

  아무튼 밀란 쿤데라는 쇠사슬처럼 자기에게 감겨오는 자신의 글을 통한 이런저런 타인의 아는 척과 규정으로 부터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 글을 쓴 당시의 자신이 정말은 어떠한 생각을 했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거기다 그 때의 생각이 영원히 항구적인 것도 아니고 어제의 내 생각과 오늘의 내 생각도 얼마든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날 수 있는 법인데도 불구하고 그 과거의 생각을 가지고 현재의 자신마저 규정하려 덤벼드니 못 참는 것이다.

 

 

  그는 '배신당한 유언들'의 시작부터 누누히 말한다. 가볍게 여기라고. 하나의 농담처럼, 피식하는 웃음처럼 여기라고. 소설가가 마치 베토벤이 그랬던 것처럼 예술의 성전에 자신의 영혼을 봉헌하는 것과 같은 거대한 신념으로 작품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그저 모든 작품을 작가의 농담처럼 생각하라고. 그렇게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는 주인공의 성격이 휙휙 바뀌어서 일관성을 잃게 되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았고 '팡타그뤼엘'을 쓴 라블레나 '운명론자 자크'를 쓴 디드로도 여러가지 글의 형식들을 자유롭게 써서 형식의 일관성이 붕괴되더라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리고 또 말한다. 사실 모든 위대한 작품들은 완전무결한 일관성 보다 프리재즈 스타일처럼 즉흥적 변주를 즐겼으니 그 소설을 무겁게 하는 완전무결함에 대한 요구야 말로 사실은 소설을 질식시키는 것이며 소설을 읽는 당신 자신 역시 질식시키는 것이라고.

 

 

 첫 머리에 나오는 유머, 웃음 혹은 농담은 그런 의미다. 스트라빈스키의 즉흥곡 또한 그렇다. 모두 당신으로 하여금 카프카에 대해서 막스 브로트가 했던 것처럼 소송을 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소송 그것은 진실을 찾아내는 작업이 아니다. 오로지 피고인을 죽이는 '마녀사냥'이다. 예컨대 앞서 인용한 소설 '불멸'에서 괴테의 대답을 낳게 한 헤밍웨이의 고백이 그렇다.

 

 

 헤밍웨이가 말한다. "보세요, 요한. 나 역시 그들의 영원한 구형(求刑)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신세랍니다. 나의 책을 읽는 대신 그들은 나에 관한 책을 써 댑니다. 내가 여편네들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하고, 아들을 잘 돌보지 않았다고도 합니다. 어느 비평가의 입을 찢어 놓았고 성실하지 않았으며 너무 오만했고 남성 우월주의에 사로잡혔다고도 합니다. 전쟁터에서 입은 상처가 이백여섯군데이면서 이백서른군데라고 떠벌렸다질 않나, 내가 상습적으로 수음을 했다는 등, 어머니에게 매우 고약하게 굴었다는 얘기도 해 대지요."('불멸' P. 136)

 

 

 

 이런 식의 떠벌림. 손쉬운 판단, 제멋대로의 자의적 규정들을 막는 것. 다시 말해 배신당한 유언들을 가급적 줄이고자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책의 목적이라고 보여진다(어디까지나 '나'라는 필터에 걸려진 말이라는 걸 나타내기 위하여 이런 어미를 쓴다.). '어떻게 웃음 혹은 농담이 소송을 막을 수 있을까?' 혹시 아직도 궁금하다면 발터 벤야민이 했던 말을 들려주고 싶다.

 

 

  유머는 선고가 없는 집행의 세계로서, 그 속에는 사면(은총)이 웃음 속에서 요란하게 들려온다.

 

  (발터 벤야민, '고트프리터 켈러에 대한 글 중에서( 발터 벤야민 선집 9 (길 刊))

 

 

   여기서 발터 벤야민이 분명하게 발히고 있듯이 유머, 웃음 혹은 농담이란 사면이 원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구형을 바라는 소송은 유발된 웃음이 가져온 사면 속에서 절대적으로 무화되어 버린다.

   밀란 쿤데라는 자신의 작품들을, 아니 모든 소설이란 작품들도 그렇게 바라봐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소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른바 훌륭한 소설이라 평할 때 쓰는 흔한 잣대들, 그러니까 제대로 된 현실 묘사, 딱 떨어지는 기승전결, 캐릭터의 일관성, 개연성 넘치는 전개와 같은 잣대들로 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말이다. 더하여 소설가는 자신의 전부를 그대로 녹여내어 작품을 쓴다는 우리가 흔하게 가지고 있는 소설가에 대한 환상으로 부터도.

 

 

   그런데 여기까지 읽어보면 왠지 이런 의문이 하나 들지 않는가?

 

  그러니까 왜 밀란 쿤데라는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하는. 그는 이런 이야기를 '불멸'이란 소설에서도 했고, '배신당한 유언들'에서도 한다. 이렇게 형식을 달리하여 반복적으로 말하는 것을 보면 분명 어떤 이유나 계기가 있어 보인다. 밀란 쿤데라는 누누히 제발 선을 넘지 말라고 하지만 그래도 호기심은 억누를 수 없는 충동이고 우리의 뇌란 어쨌든 인과관계가 맞아 떨어져야 속시원한 법이니 아무래도 밀란 쿤데라가 바지 가랑이를 잡고 못 가게 한다 하더라도 선을 넘어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진격의 거인처럼 벽을 뚫고 돌진해 보면 현실의 그가 보인다.

 

   즉, 프랑스 망명 당시의 그가! 75년 그는 프랑스에 망명했고 81년 프랑스 시민권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후로 죽 그렇게 살아오고 있다. 체코에 있을 때만 해도 적극적인 반체제 운동을 했었던 밀란 쿤데라는 그러나 프랑스에 정착하고나서 부터는 체코의 반체제 운동에 대해서 소극적이 되었다. 그는 반체제 운동을 위한 체코로부터의 어떠한 협력 요청에도 잘 응하지 않았고 오히려 때로는 비판까지 감행하기도 했다.

   당연히 체코의 반체제 진영에선 그런 밀란 쿤데라를 곱게 보지 않았다. 그건 체코의 반체제 운동에 대하여 공감과 연대 의식을 가지고 있던 유럽 지식인들 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온갖 비난을 감내해야 했다. 그리고 그 비난은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작품의 순수성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으로 훼손되는 일이 비일비재해졌다.

  프랑스 정착 후에 쓰여진 '웃음과 망각의 역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리고 '불멸'은 바로 그런 상황 가운데서 쓰여진 것이었다. 모두가 어떤 무리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키에르 케고어의 책 제목처럼 '이 편이냐 저 편이냐' 선택할 것을 물었다. 그렇게 모두가 같은 춤을 추는 원무를 하나 골라 참여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자신의 고유한 개인성을 포기하고 집단의 일원이 되라고. 개성을 나타내는 웃음은 그만두고 단일한 표층의 망각의 일부분이 되라고. 그래서 밀란 쿤데라는 썼다. '존재의 가벼움'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져내야만 하는 '고유한 개인성'을. 그리고 썼다. 이 모든 우스운 짓거리와도 같은 불멸의 폭력 속에 농담으로 맞서기 위하여.

 

 

   그리하여 '배신당한 유언들'도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이다. 현재의 밀란 쿤데라가 겪은 경험에서 촉발된 사유의 산물이었던 것이다.(혹은 자기 변호...) 그는 소설과의 순수 경험을 중시하라고 말한다. 그 너머의 소설가는 생각하지도 말고, 행여 어떤 사회적 혹은 역사적 사실이 여과된 것일까 추정하지도 말며 오로지 눈 앞에 현존하는 글이 가져오는 순수한 경험에만 몰두하라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안개 속을 나아나고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자유는 안개 속에 있는 자의 자유이다. 그는 50미터 전방을 볼 수 있고 대화 상대의 모습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으며, 길가에 늘어선 나무들의 모습을 즐길 수도 있고, 근처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찰하고 그에 반응할 수도 있다.

 인간은 안개속을 나아가는 자다. 그러나 과거의 사람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뒤돌아볼 때는 그들의 길 위에서 어떤 안개도 보지 못한다.(...)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 볼 수 있다. 누가 더 맹목적인가? 레닌에 대한 시를 쓰면서 레닌주의가 어떤 귀결에 이를지 몰랐던 마야코프스키인가? 아니면 수십 년 시차를 두고 그를 심판하면서도 그를 감쌌던 안개는 보지 못하는 우리인가?

 마야코프스키의 맹목은 영원한 인간 조건에 속한다. 마야코프스키가 걸어간 길 위의 안개를 보지 않는 것. 그것은 인간이 뭔지를 망각하는 것이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망각하는 것이다.(P. 354 ~ 355)

 

 

   왠지 이 글을 쓸 당시의 밀란 쿤데라를 생각해보면 마야코프스키와 겹쳐 보이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순수경험은 그러니까 훗설이 말했던 판단중지, '에포크'와 같다. 순수하게 눈 앞에 현존하는 '글'이란 존재 자체 말고는 내게 선입관을 줄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 판단을 '일시 정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건 안개 속에 가려져 있는 것이므로 제대로 내 시야에 드러날 때까지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되는 까닭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대한 윤리적 물음을 요청한다. 도대체 우리는 글을 가지고 글을 쓴 타인을 어디까지 판단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그건 나를 중심으로 해서 10미터 밖의 안개인가, 아니면 50미터 밖의 안개인가 그것도 아니면 100미터 밖의 안개인가?(이 경우 물론 가까울수록 더 잘 들여다보는 것이다.) 어쩌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판단하고자 하는 타인의 자리에 나를 놓아보면 쉽게 풀릴지도 모르겠다. 내가 쓴 글을 가지고 남들이 판단할 경우 나는 그 사람이 과연 얼마만큼의 거리에서 안개에 둘러싸여 있는 나를 판단하고 있다고 순순히 인정할 수 있는가 하는 것으로.

 

   내가 이해받고 있다고 인정하는 만큼의 거리가 정확히 우리가 남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밀란 쿤데라가 중시하는 순수 경험은 일종의 장소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 공사를 어디서 부터 할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 장소란 물론 바로 우리 눈앞에서 유일하게 안개에 둘러싸여 있지 않아서 뚜렷하게 현존하고 있는 '글'이다. 그러니까 제목의 '유언'은 우리가 정확히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알려주는 일종의 지시어인 셈이다. '배신당한 유언들'에서 유언에 곧이곧대로 충실하는 자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마지막 부분은 정확히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찍어야 할 방점은 그 유언의 충실이 어디까지나 개인적 신념의 결과라는 부분이다. 그들은 순수한 그들만의 자의로 유언을 글자 그대로 따르기로 선택했다. 글과 내가 만나는 순수 경험을 중시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어떠한 선입관이나 지식의 매개없이 이루어지는 그 경험에 있어서 판단이 어디까지나 내 순수 의지의 결단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이렇게 하여 개인의 고유성을 건져내고 싶은 것이다. 즉흥이나 변주를 선호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아무래도 정형화되고 규격화된 것엔 전체성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테니 말이다. 그렇게 그는 이제 문학이 오늘날 굳어질 대로 굳어져 버린 소설의 형식으로 부터 자유로워졌으면 한다. 생각해보면 그의 소설 스타일은 꾸준하게 전형적인 소설 형식을 탈피해 왔는데 그만큼 그가 집단이 매개되지 않은 순수한 개인성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들은 현존하는 수많은 글들을 눈 앞에 두고 있다. 글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다. 사람들이 수 년 전 과거의 글들까지 가져와 비난하고 맥락은 고려하지 않고 문장만 따와서 공격하는 것도 자주 본다. 인터넷 마녀 사냥이 횡행하고 행간을 읽어내야 하며 저의를 의심하고 추정해야 하는 것이 거의 보편화되어 버린 요즘 시대에 밀란 쿤데라의 이러한 말은 얼른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더구나 그 자신의 삶까지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 분명한 안개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 안개를 슈퍼맨처럼 투시하여 명확한 진실을 알아낼만한 능력이 우리에겐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 앞에 놓여진 어느 것 하나를 섣불리 선택할 수 없는 난관은 이제 사유를 촉발한다. 아마도 궁극에 가선 당신의 결단을 이끌어낼 사유를 말이다. 어쩌면 그것이야 말로 밀란 쿤데라가 '배신당한 유언들'을 통하여 독자에게 접하게 하려는 순수경험인지도 모르겠다. 사유야 말로 바로 존재의 고유한 자기 증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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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5-31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에서는 무엇인가를 정해놓고 글에 대해 가르칩니다
시험 문제에 다른 답을 쓰면 틀려요
하지만 글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기도 합니다
그게 맞든 틀리든 그것은 작가와는 상관없는 거겠죠
작가는 글을 쓰면 거기에서 벗어나는 듯합니다

자신이 쓴 소설에 대한 해설서를 쓰다니, 재미있네요
예전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었지만 소설의 기술은 안 읽어봤습니다
한번 읽어보고 싶기도 하네요


희선
 
컬처 쇼크 - 위대한 석학 25인이 말하는 사회, 예술, 권력, 테크놀로지의 현재와 미래 베스트 오브 엣지 시리즈 2
존 브록만 엮음, 강주헌 옮김 / 와이즈베리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작년에 나온 마음의 과학에 이어 엣지 시리즈 두번째 책이 드디어 나왔다.

 

 

 제목이 '컬처 쇼크'인데 이번엔 제목 그대로 문화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이야기 한다. '마음의 과학'만큼이나 이번에 실린 저자들의 면면도 역시 화려하다. 포문은 '총,균,쇠'로 우리들에게도 유명한 제레미 다이아몬드가 연다. 그는 흥미롭게도 '사회의 붕괴'를 테마로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가 드는 주요한 사례는 우리에게 '모아이 석상'으로 유명한 '이스터 섬'이다.

 

 일단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 본다.

 

 이스터 섬 사람들, 즉 폴리네시아 사람들은 원래 숲으로 뒤덮여 있던 섬에 정착했다. 그 섬의 숲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야자나무들이 있었다. 이스터 섬 사람들은 숲에서 나무를 베어내 카누를 만들고 땔감으로 사용했으며 석상을 운반하고 세우는 데도 사용했다. (...) 결국 그들은 숲 전체를 베어내 모든 수종을 절멸시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달리 말하면 더 이상 카누를 만들 수도 석상을 세울 수도 없었다. (...) 이로 인해 식인 풍습이 전염병처럼 번지며 섬 주민의 90%가 죽음을 맞았고 그들의 사회는 붕괴하고 말았다. (p. 24)

 

 우리가 알고 있는 이스터 섬은 이렇게 멸망했다. 언제고 꼭 한번은 가보고 싶었던 섬이지만 전혀 몰랐던 섬의 역사였기에 흥미로웠다. 하지만 제레미 다이아몬드가 이걸 흥미 본위의 붕괴 사례로서 말한 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그가 이 사례에서 주목했던 건 다음과 같은 물음이었다. "어떻게 한 사회가 전적으로 의존해 살아가던 생존 수단인 나무들을 모조리 베어내는 재앙과 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가?' 이것 말이다.

 

 이 책을 다 읽고나면 왜 제레미 다이아몬드가 이 질문에 주목한 이 글이 가장 먼저 나왔는지 깨닫게 된다. 제레미 다이아몬드는 여기서 우리들이 흔히 말하고 있는 이른바 '집단 지성'의 한계를 논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에게 집단 지성은 언제나(라고 까지는 비록 말하긴 어려워도) 그래도 올바른 쪽에 가까운 결정을 내린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흔히들 들고 있는 사례가 그것이다. 대충 사람들에게 평균을 짐작케하면 가장 많은 대답의 평균치가 실제 평균값하고 맞아떨어진다는 사례 말이다. 그래서 자주 사람들은 하나 보다는 둘이 , 둘 보다는 셋이 생각하는데 더 맞다는 말을 한다. 민주주의가 뿌리 내리면서 자리잡게된 현상이기도 하다 아시다시피 민주주의를 이루는 주요한 원칙 중의 하나가 바로 '다수결 원칙'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제레미 다이아몬드가 말하는 이스터 섬 사례에서 보듯 집단 전체가 잘못된 결정을 내릴 가능성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러고보면 세계 제2차 대전을 일으켰던 독일의 나치 정당은 가장 많은 독일 민중의 지지를 받고 정권을 잡았었다. 그 역시도 집단의 선택이 꼭 올바르지 않음을 알려주는 좋은 사례다. 사실은 이 집단주의적 결정에 대한 불신은 고대 그리스 때부터 있었다.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다수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민주정을 쉽게 중우정치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고 보았으니까.

 

  이번에 나온 '컬쳐 쇼크'는 보통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인터넷의 광범위화로 온갖 정보들이 너나할 것 없이 넘쳐나는 시대에, 그렇게 지식과 문화가 집단적으로 창출되고 소비되고 있는 시대가 가져온 '문화적 쇼크'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 말이다.

 

  쉽게 말하면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저번 세기말에 유행한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한 일종의 반격이라 할 수도 있다. 하긴 이미 사양길에 접어들 대로 접어든 개념이니 반격이라는 말 자체가 어폐가 있을 수도 있겠다. 아무튼 예술에 대한 제대로 된 정의를 추구하고 있는 데니스 더턴이나 문화에 대한 꼭 필요한 개념을 위해 이른바 문화 통일장 이론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는 브라이언 이노(개인적으로 가장 반가웠던 글이다. 음악이 아닌 글로 만나보는 브라이언 이노라니 얼마나 신선하던지. 그의 대담을 읽는데 문득 그의 앨범  Another green world 가 다시 듣고 싶어졌고 그래서 음반을 틀어놓고 책을 읽었다.) 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탈색화 시켜버린 문화와 예술에 다시금 구별되고 그만의 독특한 의미망을 설정해주려는 작업이었다. 이렇게 이 책은 너무도 미시적으로 다원화 되어서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알 수가 없고 그 모든 것이 똑같이 동시에 터져 나와 오히려 사람들을 무가치의 혼돈 속에 빠져들게 만드는 오늘날의 집단주의적 창출과 소비에 우려와 그것을 합리적으로 개선시킬 통로들을 사색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것은 재런 레니어의 '디지털 마오이즘' 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글과 뒤에 실린 논쟁들이 이 책의 핵심 부분이라고 본다. 재런 레니어는 이 글은 여러가지 면에서 생각할 거리를 둔다. 직접 의미를 생산하는 자들 보다는 구글이나 우리나라의 포털과도 같이 오히려 정보를 통합하는 자들이 더욱 높은 수익을 얻고(음원 수익도 마찬가지라고 알고 있다. 창작자들 보다는 배포하는 자들이 더욱 돈을 많이 받는다.) '위키 피디아'나 '아메리칸 아이돌'의 투표와 같이 집단주의적으로 이루어지지만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별한 수단이나 존재는 전무하여 다만 그 과정만이 전부인 이런 상황. 그렇게 디지털 사회로 깊숙이 들어서면서 이전과는 여러 면에서 분명 달라진 지금의 현실을 그는 디지털 마오이즘으로 부른다.

 

 '컬쳐 쇼크'는 점점 통합화되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개인의 고유성을 다시금 복원시키려는 사유들이 모여있는 책이다.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글도, 예술의 의미나 문화의 의미를 추구하는 글도 사실 알고 보면 집단과 별개로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할 개인의 정체성과 존재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대략 2006년 전후로 나온 이 글들이 그러나 뜬금없이 제기된 것은 아니다. 사실 지금의 사회는 알고보면 저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서 보듯이 파시즘화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포스트 모더니즘이 결국은 보수와 파시즘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우려는 당시 부터 존재해 왔다. 지금 유럽이나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까지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보면 그들의 예언이 그리 틀린 것 같지는 않다. '컬쳐 쇼크'의 지식인들이 우려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더구나 스마트 폰을 비롯하여 디지털 환경이 더욱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사유라는 걸 하지 않게 되었다. 이 책에 실린 한 저자는 지금 사람들은 자신의 뇌를 머리가 아니라 외부의 하드웨어에 담아놓고 다닌다라고도 했다. 들뢰즈 역시 생전에 앞으로 사유 없는 무뇌아들의 사회가 될 것이라 경고한 바도 있다.

 

 사실 지금 사회가 개성이 넘친다고 하지만 그건 어불성설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개성의 대부분은 외모에만 치중된 일종의 기성품화된 개성들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개성이란 외모만이 아닌 사유와 그에 뒷받침된 행위가 바탕이 될 때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컬쳐 쇼크'의 저자들이 건져내고 싶은 것도 바로 그것이다. 지극히 그 자신만의 사유와 성찰 그리고 행동이 근거가 된 개인의 고유성.

 

 이제 생각해야 할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 되었다. 나는 무엇을 알고, 알 수 있으며, 판단할 수 있는가? 예전에 칸트가 제기했던 인간학적 물음을 우리는 다시 해야 할 시기에 도달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거기서 주어는 칸트와 달리 인간이 아니다. 바로 '나'다. 닥쳐오는 집단화(파시즘이라고 까지는 말하지 않겠다.)의 파도 앞에서 그렇게 계속 스스로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를 건져내 줄 유일한 구명 보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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